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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가 품은 식물 이야기
안진흥 지음 / 지오북 / 2023년 6월
평점 :
오늘 리뷰하는 책은 역사책 『삼국유사』 속에 등장하는 식물 이야기다. 과거에 『삼국시대 꽃 이야기』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기에, 우리나라 고대 기록에 나타난 식물 이야기는 꽤 알고 있는 편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역사책 『삼국유사가 품은 식물이야기』 를 냉큼 집어서 읽었다.
확실히 과거에 읽었던 책과 비슷한 내용도 많긴 하지만, 책을 쓴 사람이 다르기에 책 속 흐름도 다르다. 앞선 책을 쓴 사람이 원예학자인 반면, 이 책은 식물유전학자가 쓴 책이다보니, 같은 사료를 보고 해석하는데 있어서 ‘관점’ 차이가 확실하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가!!!
이것을 먹으며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 마늘, 쑥
용맹스런 호랑이보다는 인내심이 많은 곰이 인간이 되어 단군왕검을 탄생시킨 건국신화는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어려운 역경을 지혜롭게 견뎌내고 우리의 찬찬한 문화를 일구어낸 한 민족의 특성을 담고 있다. 구하기 어려운 약초를 택하지 않고 흔하게 자라는 쑥을 신성시 하여 신화에 등장한 것은 평범하고 보편적인 것을 존중하는 우리 민족의 서 민적 사상과 일치한다. p 020
마늘은 이집트가 원산지로 1~12세기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고 추정한다. 중국 명나라 약초학서 『본초강목』에 의하면 마늘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외국에서 들어온 것을 대산이라고 하고 원래의 마늘을 소산이라고 했다. 따라서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마늘은 대산이 아니고 지금은 전해지지않는 토종 마늘이거나 야생 마늘일 것이다. 한반도에 자라는 마늘과 유사한 야생식물로 달래와 산마늘, 산부추 등이 있다. p 020
조선시대 학자 최새진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산(蒜)을 달래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달래는 저장성이 적고 오랫동안 두고 먹을 수 없다는 특성 상 단군신화에 나오는 마늘이라는 주장에서 힘이 좀 약하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산(蒜)이 산마늘이라는 주장은 고조선의 지리적 위치라던가 저장성 등을 고려했을때 꽤 유력한 설로 꼽힌다. 단군신화 속 ‘마늘’로 유력하게 추정되는 식물이다. 산마늘이라는 이름이 생소한 사람들을 위해 말하자면, 산마늘의 다른 이름은 ‘명이나물’ 이다.
짱아찌로도 유명한 명이나물은 울릉도가 유명한데, 실제 명이나물은 울릉도를 포함하여 강원도 북부, 함경도 등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고조선이 존재했던 위치를 보면 현재 기준으로 보았을 때 함경도 ~ 북한과 인접한 중국지역 일대다. 명이나물이 재배되는 지역인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북반구 시베리아까지 아우르는 유라시아 민족은 산마을을 ‘곰마늘’이라 불러왔다. 여기에 TMI 하나 더 추가하자면, 고고학적으로 시베리아와 우리나라는 유사한 부분이 정말 많다.
단군신화의 주체인 곰과 호랑이, 즉 곰 토템을 믿는 부족과 호랑이 토템을 믿는 부족, 그리고 환인으로 대표되는 하늘을 믿는 집단에 대한 부분에서도 할 이야기가 좀 있긴 하나, 이 책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으니 생략!
대나무는 합친후에야 소리가 나게 되어있으니 - 대나무
동해의 섬 하나가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 왔다. 섬에 있는 거북처럼 생긴 산 위에 대나무가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로 합친다고 신하가 신문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바다의 용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대나무는 합친 후에야 소리가 나게 되어있으니, 성왕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용이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 장군이 한마음이 되어 이런 큰 보물을 왕께 바치도록 한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왕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왜적의 침략을 막았다고 전한다. p 059
신라를 침략하던 일왕은 만파식적이 실제로 있는지 확인하고자 사신을 보내 금 50냥을 내고 피리를 보고자 하였다. 거절을 당하자 다음 해에 금 1,000냥을 보내면서 다시 보기를 청했다. 원성왕은 만파식적을 보여주지 않고 금을 돌려보냈다고 전한다. 전해 내려오는 만파식적을 잃어버렸다가 원성왕이 얻었다고 『삼국유사』에 전하는 것으로 보아 8세기 후반까지 왕실에 보관되어 있던 피리인 것 같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용이 바친 옥적이 왕에게 보배로 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p 060
‘대나무’하면 보통 사군자 속 ‘절개, 지조’ 등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다보나 자연스레 조선시대를 떠올리고 하는데, 사실상 사군자 속 대나무의 이미지는 꽤 오래전부터 형성되었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집필하면서, 이차돈 순국에 대해 이미 그의 절개를 대나무와 잣나무에 비교하기도 했다.
『삼국유사』 속 대나무는 지조, 절개 뿐만 아니라 국력 강화를 위한 요소로도 차용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傳 미추왕릉의 대나무 군사 설화와 신문왕 때 만들어진 대나무피리 만파식적 기사다.
신라 11대 유례왕 때 이서국 사람들이 신라에 침입했는데, 이때 한 군대가 홀연히 나타나 신라군을 도와서 싸웠다. 이들은 귀에 대나무잎 귀고리를 달고 있었다. 전투가 끝난 후 이들은 홀연히 사라졌는데, 그들의 자취가 끝나는 지점인 미추왕릉 능침에 대나무잎이 수천장 쌓여있었다고 한다. 이게 바로 傳 미추왕릉 대나무 군사 설화다.
신라 31대 신문왕은 아비 문무왕이 이룬 삼국통일을 물려받은 왕이다. 문무왕은 죽어서도 신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고 했으며, 실제로 경주에는 문무왕릉 수증릉, 감은사 등 문무왕 전설이 깃든 곳이 남아있다. 여기에 더 하나가 있으니 바로 대나무피리 만파식적 이야기다. 불기만 하면 온갖 파란을 없애고,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대나무 피리, 만파식적. 전설로 치부하기엔 『삼국유사』 속 기록에 꽤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왕실 보물로 어느 기간까지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이미 신라시대부터 대나무에 국력강화, 국방에 대한 이미지 형성되었다. 근데 놀랍게도! 현재 우리나라 군대 영관급 계급장이 대나무잎 모양이라고 하니, 대나무에 국방에 대한 이미지가 당연하다는 것을 나만 몰랐나보다.
모랑의 집 매화를 먼저 꽃피웠네 - 매화
신라의 금교와 계림은 겨울 같은 날을 보내며 봄의 신이 와서 불교가 꽃피는 시기를 기다리는 상황을 일연은 찬시로 표현하고 있다. 금교는 아도가 미추왕의 허락을 받아 지은 불사가 있는 곳으로 추정한다. 불교의 상징인 연꽃 대신 매화가 등장한 것이 흥미롭다. 연꽃이 여름에 피니 봄철에 가장 먼저 꽃피는 매화를 불법으로 선택하였을 것이다. 매화의 원산지는 중국 쓰촨성으로 알려졌으며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대무신왕 24년에 매화꽃이 피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초기나 그 전에 한반도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p 182
강희안은 『양화소록』에서 선비들이 매화를 귀하게 여긴 것은 함부로 자라지 않는 희소함, 아름답게 늙어 가는 모습, 살찌지 않은 자제, 꽃봉오리의 자태 때문이라고 했다. 조선시대의 매화 그림은 단순한 미와 여백을 추구한 특징이 있다. 완벽하기 않고 기교를 부리지 않으며 자연스러운 것을 좋아하던 조선 사람의 정서가 깃들어있다. p 183
매화는 식용 매화와 관상용 매화로 나뉘는데 예전에는 관상용 매화를 주로 심었다. 이른 봄에 피는 매화꽃의 매력은 꽃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그 향기 때문이다. 순천 선암사에는 수령 350~650년으로 추정되는 홍매와 백매 50여 그루가 이른 봄에 꽃핀다. 그 외에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매화는 화엄사의 화엄매, 백양사의 고불매, 오죽헌의 율곡매가 있다. 이름이 지어진 매화도 있다. 고려 말 우왕 때 정당문학이란 벼슬을 지낸 강희백이 산청 단속사에서 지내며 과거 공부를 하던 소년 시절에 심었다는 매화를 정당매라고 부르며 후손들이 돌봐왔다. 100여 년이 지나 ㄴ훗날 강회백의 증손인 강귀손이 그 매화를 살피러 갔더니 이미 고사하여 그 곁에 매화를 다시 심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매화는 여러 차례 죽고 다시 심기며 정당매라는 이름을 이어가고 있다. p 185
사찰에 갈때마다 늘 의아했던 점이 있었다. 분명 부처님을 대표하는 꽃은 ‘연꽃’인데, 왜 사찰에는 항상 매화나무가 있을까? 왜 사찰의 꽃은 항상 매화일까? 였다. 심지어 봄만되면 매화명소로 손꼽히는 곳들 또한 대다수가 사찰기도 하고. 그런데 그 시작이 바로 삼국유사였다니!
삼국유사에는 승려 아도가 신라에 불법을 전하는 기사가 있는데, 여기에 매화가 등장한다. 참고로 아도가 신라에 불법을 전할 때는, 마라난타에 의해 불교가 전래되고 약 백년 뒤의 일이다. 하지만 이때도 신라에서 불교는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였다. 불교가 신라에서 자리잡는 시기는 아도가 불법을 전하는 시점에서 1백년이 더 지난, 법흥왕 재위기 이차돈의 순교 때의 일.
즉 불교가 신라에 처음 전래되었을 때는 고관대작들에게 핍박받는 등 서슬퍼런 겨울날을 지나고 있었다. 아도화상은 신라에 자리를 잡은 불교에 따스한 봄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 봄을 알리는 전령인 ‘매화’를 차용한 것이다. 그렇게 아도화상에게서 시작된 ‘불법=매화’라는 규칙은 이후 승려들에게 되물림되어, 새로 생기는 사찰마다 매화가 심겨졌다. 흔히들 말하는 ‘천년고찰’에 유서깊은 명품 매화가 있는 이유다.
여기에 조금 더 생각해봤다. 매화는 사군자 중 하나라 조선 선비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꽃이다. 조선은 불교를 억압하고 배척하던 유학의 나라였으며, 실제로 꽤 많은 유학자들이 승려들을 쫓아내고, 사찰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서원을 세우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천년고찰들과 그 속에 자라난 유서깊은 매화들. 어쩌면 이 매화들이 조선시대 불교를 억압하는 유학자들에게서 사찰을 지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