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배한철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11월
평점 :
오늘은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가, 책장에서 내 눈에 띄는 역사책 한권을 들고 출근했다. 저자는 가끔 역사/문화재 기사로 종종 보았던 배한철 기자. 기사로도 자주 접해서 아는데, 배한철 기자님이 쓴 글은 보통 읽기가 수월하고, 글맛이 있다. 한국사 역사책 입문서로 강력 추천한다. 무엇보다 이 책을 사놓고 무려 5년간 까먹고 있었다는 사실에 조금 미안하기도 했고^_T(책에게).
이 역사책 제목은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이다.

1963년 대구 현풍읍 유가면의 속칭 ‘팔장군묘’를 불법으로 파헤친 도굴꾼 일당이 경찰에 일망타진된다. 검찰에 송치된 범인들은 검찰 심문에서 “1961년 10월 고령에서 대가야의 순금관을 파냈다”고 자백했다. 이어 “서울의 장물업자를 통해 이를 110만 원에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에게 팔았다”는 사실도 털어놓았다. 리움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138호 고령 금관(대가야 금관)이다. p 049
* 유물을 산 이병철 전 회장은 선의에 의한 취득으로 판결, 소유권 인정.
‘ㅇㅇ가야’도 가야 이후 신라, 고려의 행정구역명에 ‘가야’를 붙인 것에 불과하다. 가야인이 전혀 알지 못하는 국명인 것이다. 가야 각국은 가락국(금관가야), 가라국(대가야), 아라국(아라가야) 처럼 쓰는 것이 맞다. 임나는 《일본서기》가 고대 일본의 가야 지배를 꾸미기 위해 사용한 명칭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임나는 존재했다. 광개토대왕릉비문에도 “고구려가 임나의 종발성을 항복시켰다”고 나온다. p 055
가야는 고대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연맹국가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는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등을 비롯해 최소 12개 이상의 가야 연맹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매우 칭찬하고 싶다. 그 사람은 최소 국사시간에 졸지 않고 집중했던 사람이니까! 보통 공교육에선 가야 연맹체를 6가야라고 가르쳤다(지금도 그런지는 잘..). 대표적으로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성산가야, 고령가야’ 이렇게 말이다. 하지만 이후 확인된 옛 문헌들과, 발굴된 문화재들을 확인한 결과 ‘가야’라는 이름을 가진 연맹국가는 최소 12개 이상으로 추정된다.
예컨데 《삼국유사》에는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 5 가야가 나오고, 《본조사략》에서는 ‘금관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성산가야, 비화가야’ 다른 이름을 가진 5가야가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금관가야, 대가야’ 정도만 기술되고 있습니다. 또한 악성 우륵의 가야금 12곡은, 각 곡마다 가야 연맹국가를 지칭한다는 말도 있다. (가야 관련 문헌들: 《삼국유사》, 《삼국지》,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
보통 ‘가야’라고 하면 고구려, 백제, 신라처럼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연맹체제로 있다가 각 국에게 멸망&흡수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가야 연맹체 중 대가야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16대 왕까지 존속했고 유일하게 중국와 외교관계를 맺는 등 고대국가로 발전하였고, 특유의 제철 기술은 주변국을 비롯해 바다 건너 일본에서까지 와서 철정을 사갈정도였다.
캐면 캘수록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는 가야. 미스터리한 국가 가야. 가야사가 지금까지 홀대되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해답을 찾으려면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일제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일본부’를 확인하고자, 한반도에서 가야 관련 유적 발굴등을 앞다투어 진행했다. 그러다보니 ‘가야’를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일본서기》를 인정한다는 의식의 흐름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인식은 광복 이후에도 동일했다. 그러다보니 가야사는 우리 역사에서 잊혀졌다. 덩달아 동시대에 있던 고구려/백제/신라와는 달리 가야는 힘없는 연맹국가로 그려졌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그려진다.
“(신라 임금의)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중국 순임금)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지가 영이함을 담아낼 수 있었다. 투후 제천지윤이 7대를 전하여 (…)”
682년 건립된 문무대왕릉비문에 새겨진 김씨의 기원이다. 비문에서 언급한 ‘투후’라는 표현에 주목해보자. 투후는 중국 《한서》 <김일제전>에 등장하는 제후의 직책이다. 《한서》의 주인공인 김일제(기원전 135~85)는 흉도 휴도왕의 아들이었지만, 한나라와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포로가 됐다. 이후 그는 한나라 무제를 섬겨 김씨 성을 받았고, 무제의 아들 소제에게도 충성해 투후에 올랐다. 문무왕릉비는 김씨 왕조가 고대 유라시아의 강자였던 흉노의 왕손이라는 놀아운 이야기를 전한다. p 155
신라는 무덤도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으로, 평지에 목곽을 만들고 그 안에 관을 넣은 뒤 사람 머리만 한 당돌을 쌓아 봉문을 올렸다. 카자흐스탄 이시크의 기원전 5~4세기 쿠르간(무덤 유적)도 이 양식이다. 4세기 후반 백제와 고구려의 무덤은 돌을 계단식으로 쌓아 정상부에 시신을 안치하는 ‘적석총(돌무지무덤)’으로 신라무덤과는 차이가 있다. p 158
저자는 신라 김씨와 흉노족의 연관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석씨, 박씨를 제치고 권력을 진 김씨들이 새로운 지배 이데올로기를 표방하고, 김씨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도구로서 북방 통치 이데올로기를 수용한 것이라고 말이다.
나도 신라 김씨와 흉노족에 대한 연관성에 대해선 포스팅을 몇 번 했었다. 워낙 특이한 케이스니까. 한반도 남쪽 끝에 있는 신라와 대륙을 지나 북부 초원에 있는 유목국가. 거리가 거리인 만큼 공통점이 없는게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두 나라간에는 신기하리 만큼 닮은게 많았다. 금관문화(나뭇가지/사슴뿔 모양), 황금문화(금관, 금궤 등)를 비롯하여, 자작나무 껍질로 생필품을 만들고(관모, 말다래 등), 초승달 문양을 사용한다거나(천마총 말다래), 적석목곽분으로 분류되는 무덤 양식 등 말이다.
심지어 두 나라(민족..?)은 서로 간에 쉽게 갈수 있는 지역도 아니거니와, 북부 초원과 신라 사이에 여러 국가들이 죽치고 있었다. 만약 문화적 교류라고 한다면, 맞닿아있는 다른 국가들도 비슷한 문화적 유물들이 발굴되었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라는 사실. 오로지 북방 초원 유목 문화와 신라에서만 발견되니, 미스테리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문무대왕릉비에 대놓고 난 흉노의 후예요! 라는 내용이 있으니 두 나라간의 깊은 연관성을 생각해볼 수 밖에 없다. 하다못해 흉노 김씨의 직접적인 후손은 아닐지라도, 흉노 문화와 익숙한 북방계열 후손은 맞다거나 뭐 그런?
만약 저자의 말처럼 김씨 일족이 굳이 지배 이데올로기로 표방하고자, 유목민족의 문화를 도입했다면? 황금문화정도야 이해가 되는데, 자작나무 생필품 문화만큼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자, 생각해보자. 자작나무는 서늘한 북방에서 자라는 나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경주 날씨는 어떠한가? 한반도 남부지방으로 대표되는, 아주 따뜻한 기온의 도시다. 고대라고 다르지 않았다. 즉 신라가 있던 경주 땅에서 자작나무는 자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자작나무를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인제를 비롯한 강원도 북부다. 물론 강원도까지 신라 땅인적이 있었으니, 같은 나라에서 옮기는 게 뭐가 문제인가! 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대는 지금처럼 물류 이동이 쉽지 않았기에, 근거리 이동도 험난했다. 하물며 400km나 떨어진 인제와 경주다. 고작 나무껍질을 운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위험이 도사렸을지 상상할 수도 없다. 그 뿐인가? 위험요소가 큰 만큼 제반비용과 노동력도 제곱으로 소요된다. 그 많은 위험요소를 뚫고 경주까지 자작나무 껍질이 도착했다고 가정했을때, 이 재료를 구할 비용은 얼마나 컸을지는 누구나 상상이 가능하다.
그렇게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산 재료로, 민간에서 사용할 생필품을 만든다? 음. 어렵지않을까. 금관이나 황금문화는 어느정도 이해한다고 쳐도, 자작나무 껍질 생필품 제작 등은 신라 김씨 일가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유목 문화를 도입했다고 하기엔, 상승하는 비용이 너무 큰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옛부터 이런 재료를 사용하는 문화가 남아있지 않고서야, 굳이 갑자기..? 아, 아닌가. 오히려 명품일수록 수요가 높은 특성이 반영되었다고 생각해보면? 어라, 얼추 가능할것 같기도 하다. 생각해보니 신라에서 출토된 자작나무 껍질 유물들 면면이 약간 귀족 또는 왕족 계층에서 사용하는 생필품이었으니까.
역사적으로 충주는 남쪽에서 한강으로 진출하는 길목이자, 반대로 북쪽에서 한강을 통해 남쪽을 공략하는 전략 요충지였다. 삼한시대 마한과 백제는 충주를 주요 근거지로 삼았고, 고구려 장수왕은 이곳을 정복하여 국원성이라 불렀다. 신라가 차지한 뒤로는 충주의 중요성이 더 커진다. 진흥왕은 이곳을 신라의 행정구역 9주 5소경 중 국원소경으로 승격시키고 경주의 귀족들을 이주시켰다. 경주에 이은 제2의 수도로 기능했던 것이다. p 164
일부 학자들은 쇠를 잘 다뤘던 김씨 족단이 처음에는 철이 풍부한 충주를 지배했다가 이후 남하해 영주 등을 거쳐 경주에 정착하고, 결국엔 신라의 왕좌를 차지했다는 ‘충주 김씨의 경주 이주설’을 주장한다. 3세기 백제 고이왕은 마한 연맹의 우두머리 국가였던 목지국을 멸망시키면서 경기 남부, 충남 북부를 차지했고, 여세를 몰아 충주까지 압박해왔다. 이를 계기로 김씨 족단이 남쪽으로 이주했을 수 있다. (…) 만약 김씨가 충주에 기반을 둔 족단이었다면 신라 초기 대 백제전의 궁금증도 자연스럽게 풀린다. 김씨가 신라의 권력을 차지한 후, 혁거세로 시작되는 경주 왕들의 재위 연대를 기준으로 김씨 족단의 충주 시절 동향을 부기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기술했을 수 있다. 이런 방식은 고대 역사 기술의 보편적 경향이기도 하다. 물론 충주 김씨의 경주 이주설은 가설에 불과하다. 신라 5대 파사 이사금의 부인과 6대 지마 이사금의 부인이 김씨이다. 김씨 왕비가 배출됐다는 것은 이미 김씨 족단이 이 시기에 신라의 정치 무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p 166
충주를 가본 사람이라면 한번 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충주의 랜드마크 ‘중앙탑’을. 중앙탑 전설은 워낙 유명하니 각설하고. 내가 궁금했던 건 석탑은 있는데, 왜 절터가 없는가? 였다. 보통 석탑은 탑 주변에 조성하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불교국가를 표방했던 통일신라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중앙탑 주변에는 절터가 없다. 국가에서 여러차례 조사했지만, 사찰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절이 존재했었다는 기록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미스테리함에 n년 전 난 굳이 충주까지가서 중앙탑을 보고 왔다. 늘 석탑은 절과 함께라는 고정관념을 가졌던 사람이기에, 강변에 거대한 석탑이 있는 모습은 사뭇 부조화스러운 느낌도 들었었다. 물론 중앙탑이 절과 완전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앙탑 설화에 따르면, 대충 옆 동네 절에 있던 석탑을 풍수 등의 이유로 옮겨왔다는 내용이다. 중앙탑 전설은 두 남자가 신라의 끝과 끝에서 걸어오다가 마주친 지점에서 세웠다는 전설만 알고 있었는데, 이 외의 전설이 더 있었다는 사실에 살짝 놀라긴했다.
뭐, 중앙탑 건립 이유가 어찌되었든 간에! 신라는 중앙탑이 세워져있던 충주를 매우 중요시했다. 이 부분에 대해선 교과서적인 부분만 알았기에,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왠걸! ‘충주 김씨 경주 이주설’이 있었다니. 이 시점에서 다시 떠오른게 경주 김씨와 북방 유목민족의 연관성이다. 신라와 북방 초원은 지리상으론 멀어도 너무 멀고, 그 사이에 장애물이 많기에 어떻게 동 떨어진 지역에서 동일한 문화가 발견되는가가 의아했는데, 그 사이에 충주를 끼워넣으니 조금 달라졌다.
충주는 신라 뿐만 아니라, 고구려/백제에게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충주에 있는 중원고구려비만 봐도, 고구려가 이 지역을 차지하며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역사적으로 부여에서 갈라져나왔다. 부여는 북방 초원 문화를 대표하는 고대 국가이다. 충주를 차지하려고 했던 백제는 어떠한가. 백제는 고구려에서 갈라져나왔지만, 후기에 ‘남부여’로 국호를 바꿀정도로 부여를 계승했다는 정체성을 확고히한 나라다.
무엇보다 신라는 충주를 제2의 수도로 삼을정도로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충주 금릉동 유적 발굴 당시 북방 유목 문화 동일한 양상의 유물들이 발굴된 것을 미루어 볼 때, 북방의 유목문화가 경주에서 발견된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그 유목문화가 흉노계 황금문화와 동일한가! 라고 할 때는 선뜻 대답할 수 없긴하다. 하지만 황금이란게 권력을 상징하다보니, 김씨 일족이 왕권을 잡기 전과 후에 달라질 수는 있지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