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려주마
발검무적 지음 / 파람북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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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리뷰하는 인문학책 제목은 『한국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려주마』 이다. 제목부터 도전적인 이 책은, 제목 그대로 한국인을 관찰하고 설명하는 책이다. 언뜻 보면 고 이어령 선생이 쓰셨던 한국인 시리즈와 비슷한 느낌도 든다. 고 이어령 선생이 쓰셨던 책도 읽어봤던 나다. ‘한국인’이라는 같은 주제로 쓰인 책이라, 어쩔수 없이 비교를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책 읽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더랬다. 


다 읽고 난 뒤 생각한건, 굳이 『한국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려주마』 과 고 이어령선생의 한국인 시리즈는 비교를 한다면 이렇다. 고 이어령 선생의 한국인 시리즈는 인자한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이라면, 이 인문학책 『한국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려주마』은 당장 내 피부에 와닿는 이야기다. 내가 겪었던 일들이 책 속에 있다보니, 더 공감되고 현실적으로 다가왔다고 해야할까? 즉 고 이어령 선생의 책이나, 이 책 『한국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려주마』 은 ‘한국인’ 이라는 주제만 같을 뿐, 풀어쓰는 과정이 달라도 너무 다르기에 비교를 할 수가 없다는 것! 확실한 건 양쪽 모두 퀄리티가 엄청 높은 양질의 책이라는 점이랄까?!



이 인문학책 『한국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려주마』 목차를 훑어보자. 우리에겐 너무 당연한 일들이다. 식당에 있는 ‘호출벨’, 부엌에서 사용하는 음식가위, 찬물마시기, 주변에 넘쳐나는 교회, 산후조리원, 자살율 높은 나라, 빨리빨리 문화, 먹방 예찬, 해장국, 커피러버, 설날 떡국 등등등. 너무 당연해서 이게 책으로 쓸  일인가? 싶을지도 모른다. 



잘 생각해보자. 세계 어느나라를 둘러봐도 우리나라처럼 교회가 많은 나라가 없다. 수많은 교회 십자가들 때문에 우스갯소리로 밤에 하늘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공동묘지 같다는 말 까지 있을 정도니 말이다. 빨리빨리 문화는 외국에서도 알아주는 K-문화다. 그뿐만인가? 코로나 때문에 많이 사라졌다고는 하나 술자리에서 술잔을 돌리거나 폭탄주 문화 역시 외국에서 놀라워하는 K-술문화 중 하나다. 커피? 에스프레소 본고장인 이탈리아도, 아메리카노를 만든 미국조차도 우리나라 사람만큼 커피를 많이 마시지 않는다. 우리에겐 너무나 당연한 문화들이, 외국사람들 눈에는 생소하기 그지 없는 문화인 것이다.



자 그렇다면! 만약 외국사람들이 “너희는 왜 커피를 많이 마셔? 왜이렇게 교회가 많아? 왜 집안에서 신발을 벗고있어?” 라고 물어본다면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원을 이용한 나만해도, 왜 우리나라에 ‘산후조리원’ 문화가 당연한건지 설명할 수 없고, ‘내’가 아닌 ‘우리’라는 단어를 쓰는지 설명할 수 없으니 말이다.


자 그럼 책 속으로 들어가보자!



왜 한국인들의 시위는 그렇게 독특한걸까?


우리 민족 DNA에는 시위, 혁명이 각인되어있다. 가깝게는 우리 세대에 일어났던 전 대통령 윤석열 탄핵 집회부터 전 대통령 박근혜 탄핵 집회가 있다. 부모님 세대 때는 군사정권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이 있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강점기 독립만세운동이 있다. 조금 더 올라가면 나라를 말아먹은 조선의 왕 고종과 지도계층을 상대로한 동학농민혁명이 있었고, 세도정치 때는 조선 곳곳에서 일어났던 민란들이 있었다. 조선만 있나? 고려 말에도 살기 힘들었던 농민들이 민란을 일으켰다. 삼국시대에는 나라별 부흥운동이 있었다. 이것만 봐도 대한민국인 핏속에는 시위, 혁명 DNA가 각인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모든 시위는 목숨을 걸어야했다. 왕조 시대에 민란군은 무조건 사형이었다. 왕조시대가 끝나고 공화국 시대라고 다를까? 불과 3~40여년전, 대한민국에서 빈번하게 있었던 민주화운동 역시 피가 난무했다. 정권에 의해 국민들이 죽거나 실종되는게 다반사였다. 그렇기에 부모들은 자식들에 시위, 데모에 참여하는 것을 극도로 반대했다. 생명과 연관된 일이었으니까. 이때까지만해도 시위, 데모, 혁명등에 대한 이미지는 이토록 부정적이었다. 



2016년 전국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전대통령 박근혜 탄핵을 위한.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던 시위 형태가 아니었다. 시위대는 촛불만 들고 있었을 뿐이다. 이때 대한민국은 전 세계 시위/혁명계의 역사를 새로 썼다. 폭력시위가 아닌, 비폭력시위로도 충분히 정치적 표현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 이렇게 K-시위 문화는 전 세계 시위/혁명계의 역사를 새로 썼다. 



이게 끝인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더 있다! 2024년 전대통령 윤석열 탄핵 집회다. 이때 K-시위 문화는 또 한번 시위/혁명계의 역사를 새로 썼다. 어떻게? ‘시위=축제’ 가 되었다. 2024년 전대통령 윤석열 탄핵집회 시위대들 손 들려있던건 다름아닌 응원봉이었다. K-pop 스타들을 응원하는 그 응원봉 말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위를 주도한건 2030 젊은 세대들이었다.



시위를 문화로 만들어버린 이 독특한 현상이 한국인의 정체성을 드러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례일 것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있어, ‘흥’은 기쁠 때만 작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한국을 대표하는 노래라고 일컬어지는 <아리랑>만 보더라도, 힘들고 지쳤을 때뿐만 아니라 흥에 겨운 때도 불립니다. 한국인들은 힘을 때도 노래로 ‘흥’을 드러내고 ‘한’을 표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p 021



실제로 이번 시위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데 중심이 되었던 2030의 젊은이들은 왜 그렇게 시위가 익숙한지를 의아해하다가, 시위에서 필요한 행동이 자신들이 공연을 참여하기 위해, 혹은 공연을 즐기기 위해 했던 행동들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럴 수밖에요. 일단 K콘서트는 준비할 것들이 많습니다. 일단, 질서 있는 입장을 하기 전에 웨이팅을 하고 자리를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전 예습을 통해, 앞에서 지휘하는 리더의 움직임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줘야 그 공연을 훨씬 더 즐길 수 있습니다. 신곡이라고 하더라도 노래를 함께 부르는 ‘떼창’은 K콘서트의 백미죠. 무엇보다 하나가 된다는 느낌을 갖기 위한 공감능력이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도 고도의 시민의식과 맥이 맞닿아 있습니다. p 024



심지어 먹을 도시락이나 간식마저도 조직적으로 준비하는 것에 K-Pop 팬들은 아주 익숙합니다. 특히나 콘서트가 끝난 후 공연장의 쓰레기 문제까지도 철저하게 모두가 자발적으로 챙기는 훈련이 되어있는 정예부대들이 바로 그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미 몸에 밴 훈련방식대로 시위장에 하나둘 모이게 된 것입니다. 못난 국민의 대표를 끌어내리자는 민의에 동조하면서 말입니다. p 025



응원봉을 들고 나온 2030세대는 시위를 ‘문화축제’로 그 형태를 바꿔버렸다. 축제에는 노래가 빠질 수 없는 법. 본인들이 좋아하는 K-pop 가수들의 노래들을 부르며, 그렇게 탄핵집회를 이끌어갔다.



생각해보면 우리 역사상 모든 시위는 노래가 함께했다. 당연한거다. 우리 민족은 노래를 사랑했다. 힘들어도 노래를 부르고, 기뻐도 노래를 불렀다. ‘노동요’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시위 때도 노래를 하는 건 우리 민족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왕조시대 때는 아리랑 같은 민요가 있었다. 민주화 운동 때는 ‘임을 위한 행진곡’, 이나 ‘아침이슬’ 같은 민중가요가 그 선두에 있었다. 이런 민중가요들은 당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던 청년 세대들이 소비하던 가요였다. 2024년 응원봉 시위 역시 동일하다. 응원봉 시위를 주도하는 청년 세대들이 소비하는 가요가, 흔히들 말하는 케이팝이다. 똑같이 당대 소비하던 가요가 쓰였을 뿐인데, 지금의 시위가 축제가 된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케이팝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을 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를 유행하는 케이팝이 시위현장에 흐르고, 시위대는 응원봉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며 축제의 장을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한국인 고유의 DNA로 또 한번 시위의 역사를 새로 썼다. 




왜 한국에만 산후조리원이 있을까?



세계보건기구에서도 산후조리에 대한 권고사항을 말하는 것을 비추어보면, 사실 ‘산후조리’에 대한 개념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뿌리박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유독 산후조리에 있어 압도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산후조리원’ 이라는 전무후무한, 산모&신생아 맞춤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기관 때문이다.



다른 나라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산후조리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눈에 띄는 역사적 기록이 있는데, 바로 세종대왕이 여자 관노들에게 100일 출산휴가 부여한 것이다. 이에 더해 관노인 남편에겐 30일의 출산휴가를 주었다. 이에 대해선 과거에 포스팅을 한적도 있었기에 각설한다. 노동력이 국력이었던 왕조시대 조차도 산후조리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노비들에게 출산휴가를 준 것이다. 심지어 출산휴가일이 현대와 다를바가 없다. 



조금 더 이야기해볼까? 현대 출산휴가에 대한 인식은 불과 십여년전만해도, 출산휴가를 쓰면 그야말로 역적이었다. 여성은 출산휴가 3개월은 커녕 1개월 겨우 쓰고 복직해야했고(육아휴직은 퇴사와 같았다), 남편이 배우자출산휴가를 쓰는건 고작 3일만 쓰는 것 조차도 역적이었던 때가 있었다. 세종대왕도 배우자 출산휴가를 100일 줬는데 말이다. 어찌보면 세종대왕이 선구자인가 싶다. 여튼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산후조리에 대한 중요성을 지배계급에서부터 누누히 이야기해왔다.



그렇다면 산후조리원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역사속에서부터 누적된 산후조리에 대한 중요성에 더해, 현대사회에 이르러 급격하게 변화된 가족형태에 기인한다. 산업사회가 되기 이전의 우리나라는 사촌, 팔촌, 십이촌 등 모두가 한 마을이 모여살았다. 한 가구에는 3세대가 모여사는 대가족 형태가 기본이었다. 초모 엄마, 아빠여도 주변에서 육아 지식을 전수해줄 수 있을 뿐더러, 할머니, 이모, 삼촌, 이웃 등 육아를 같이 해줄 주변 사람들이 있었다.


 


산업사회가 도래했다. 도시화가 진행되며 가족형태도 변했다. 집성촌은 와해되고, 이웃과 단절되며, 한 가구 당 2세대가 기본이었다. 초보 엄마, 아빠는 기댈 곳이 없었다. 심지어 아빠는 출근을 해야했다. 그러자 산후조리원이라는 전문업체가 탄생하게 되었다. K-산후조리 문화라는 말이 무색할정도로, 조금은 각박하고 슬픈 탄생비화다. 여하튼 이렇게 탄생한 산후조리원은 많은 초모 엄마아빠들을 구원했다. 나 역시 산후조리원에 구원받은 사람 중 하나다. 헌데, 맑은물도 고이면 썩는다 했던가. 어느새 산후조리원이 사회 양극화를 부추기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나도 들어보았던 ‘산후조리원 동기부터 아기의 사회생활이 시작된다’ 라는 정말 개떡같은 가스라이팅을 시작으로 5성급 호텔에서 사용한다는 침대, 최고급 산후마사지, 호텔 뷔페급 식단. 참으로 기가차서 웃음이 난다. 이런 업자들의 장난질로 인해, 정말 산후조리원들은 점점 고가가 되어갔다. 상대적으로 저렴했던 산후조리원들은 경쟁을 이기지 못하고 폐업했다. 그저 평범한 산후조리 시스템에 절실히 필요한 나같은 일반인들에겐 엄두 조차 나지 않는 고가의 산후조리원들만 살아남았다. 그렇게 대한민국 산후조리원은 계급이 없는 나라에서, 어떻게든 계급을 가르려고 안달이난 사람들의 훌륭한 도구가 되고 말았다. 


한국인들의 공통되는 개성도 작용합니다. 트렌드에 민감하여 유행을 반드시 따라야 하는 성향, 셀레브를 필두로 사회지도층이라고 하는 이들이 향유하는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워너비 경향, 산후조리원을 이용하지 못하는 이들이 느낄 수밖에 없는 상대적 박탈감 등입니다. 그 덕에 산후조리원이 나타난지 그리 오랜 세월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마치 일반적인 상식처럼 모두가 산후조리원을 알아봅니다. 여행은 가되 숙소의 등급을 나누는 것처럼, 산후조리원을 가느냐 안가느냐의 차원의 결정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등급을 선택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 것입니다. p 098




왜 한국인은 커피를 좋아할까?


나는 하루에 커피를 몇 잔 마실까? 출근해서 캡슐커피 1잔을 시작으로, 일과 중에 카누 스틱 n잔, 가끔 원두머신에서 1잔. 종류야 다르지만 죄다 아메리카노다. 여기에 가끔 달달구리가 땡길 땐 믹스를 마시기도 한다. 회사에 구비해둔 커피 종류가 많다보니, 언제든 원하는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것. 아니 근데, 난 왜 이렇게 커피를 많이 마시게 되었지? 곰곰히 생각해본다.



학창시절에도 커피를 마신적없던 나다. 입사 초기때만에도 커피를 입에 대 본적이 없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회사에서 믹스를 마시기 시작했고, 아메리카노로 취향이 확고해졌으며, 회사에 수많은 커피들을 구비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단 이틀만 커피를 못마셔도 두통, 어지러움증 등의 부작용을 쎄게 받는 커피 중독자가 되어버렸다. 결과적으로 나는 회사를 다니며 커피를 마시게 되었고, 커피가 없으면 못사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커피는 직장인의 생명수라는 말이 있다. 나 역시 그 생명수에 의존하여 회사에서 하루를 버티는 것이다. 정확히는 커피 주성분인 카페인에 의존하는 것이다. 직장인은 왜 커피를 손에서 놓을 수 없을까? 주변에 흔한 직장인의 일과를 살펴보자.



남의 돈을 벌어야 하는 직장인은,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안된다. 집중해서 일을 하고 성과를 내야한다. 하지만 법정 근로시간인 1일 8시간 동안 집중근무가 가능할까? 말이 8시간이지 야근이 더해지는게 다반사다. 야근만 있나? 집에가면 육아를 비롯한 집안일이 기다린다. 모든 일을 다 끝내고 잠들었지만, 충분한 수면은 커녕 빨리 일어나서 다시 출근해야한다. 현대인의 일과다. 피로가 쌓일대로 쌓였지만, 그 피로를 해소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 하지만 다시 출근하고 집중해서 일을 해야한다. 



모두가 알듯 카페인의 역할은 각성이다. 피로에 찌든 직장인들이 매일 출근해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카페인의 힘을 빌려 피로한 몸을 각성 상태로 두는 것이다. 



비단 직장인 뿐만이 아니다. 요즘은 너나할 것없이 커피를 즐긴다. 학생들도 커피를 마신다. 직장인과 비슷할 정도로 많이 마신다. 왜? 수면시간을 줄이고, 공부를 하기 위함이다. 왜? 명문고, 명문대, 대기업 취업을 위해서. 자영업자들도, 프리랜서들도 똑같다. 수면, 휴식시간을 줄여 조금이라도 더 일하기 위해. 바야흐로 대한민국, 커피 공화국 시대다. 



커피 공화국. 이는 절대로 좋은 신호가 아니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커피 없이 못살게 되었다는 건, 그만큼 피로에 잠식되었으나 이를 회복할 시간이 없다는 말과 같다. 피로를 회복할 여유, 휴식, 쉼을 인정하지 않는 각박한 나라가 되었다는 반증이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의 식품산업통계에 따르면 2023년 국내 성인 1인당 연간 커피 소비량은 405잔이라고 합니다. 전 세계 1인 당 연간 커피 소비량인 152잔보다 두 배 이상 높은 수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균적으로 매일 한 잔 이상씩 커피를 마시고 있는 셈입니다. 수치만으로도 이렇게 엄청난 커피를 소비하는 나라는 많지 않을 겁니다. p 180



잡코리아에서 직장인 820명을 대상으로 ‘업무효율이 떨어질 때 하는 일’을 조사한 결과 ‘커피 한 잔(39.5%)’이 1위를 차지했습니다. 특히, 출근 직후나 식사 후 오후에 밀려오는 피곤함과 식곤증을 쫓기 위함이라는 점이 직장인들이 커피를 찾는 가장 큰 이유로 꼽혔습니다. 이 부분에서 사람들은 비슷한 의문을 갖게 될 겁니다. ‘왜 피곤할 때 커피를 마시지?’ 하는 질문이지요. 커피에 함유된 대표적인 화학물질은 바로 카페인 입니다. 카페인은 중추 신경에 자극을 주는 물질로 일시적으로 졸음을 없애주기도 하고, 긴장감을 유발하여 집중력을 높여주기도 합니다. p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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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여왕과 공주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Cha Tea 홍차 교실 지음, 김효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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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영국사 관련 책은 꽤 읽었지만, 크게 감흥이 없었다. 내가 읽은 책들이 대게 영국의 남성 위주 정치, 역사, 문화에 관련된 책이었기 때문인 영향도 크다. 그러다보니 관심 자체가 떨어지고, 관심이 떨어지니 이해도가 떨어지는 악순환! 영국 왕실은 비슷한 이름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관심을 갖고 봐야만 헷갈리지 않는다. 헌데 관심이 없으니, 찰스 1세인지 찰스 2세인지, 메리 1세인지 메리 2세인지 알게 뭐람?


그런데! 

그런 나에게!! 

영국사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는 나에게!!! 



영국 왕실에 관심을 갖게 해준 세계사책이 나왔다. 바로 오늘 읽은 세계사책 『영국의 여왕과 공주』 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영국의 ‘여왕’과 ‘공주’에 초점을 맞춘 세계사책이다. 여기에 차 문화(tea)를 한 스푼 더했다. 갑자기 왜 차 문화? 인고 하면, 저자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다. 저자 이름은 홍차교실. 저자는 홍차(tea)를 좋아하고, 너무 좋아하다못해 관련 업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제 생각해보자. 홍차를 좋아하는 저자가 홍차에 대해 책을 쓴다. 홍차하면 떠오르는 나라? 당연히 영국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인도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감안하자. 거기 더해 실질적으로 차 문화를 유행시킨 장본인은 영국 궁정이다. 하나의 아이템을 유행시킬 수 있는 사람들은 권위가 있는 사람이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국 궁정에서 차(tea)를 유행시킬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왕비(또는 여왕, 공주)다. 


그렇게 이 세계사책 『영국의 여왕과 공주』가 나온 것이다. 



책의 시작은 영국 왕실 가계도다. 솔직히 여기는 스킵. 여기도 제임스 저기도 제임스, 여기도 찰스 저기도 찰스, 메리가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고. 가계도만 보면 솔직히 어렵고 헷갈리는게 영국 왕실이다. 그래서 난 영국 왕실은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어느정도 영향이 큰 인물들만 기억하기호 했기 때문에다. 예컨데 유럽의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 부인킬러(이혼의상징) 헨리8세 블러디 메리(메리 1세) 뭐 이런 굵직한 인물들만 알고있어도 반은 먹고 들어가니까.


근데 여기서 반전. 이 세계사책 『영국의 여왕과 공주』에는 영국 정치사에서 굵직한 행보를 보였던 인물들은 없다. 대신 차 문화(tea)에서 만큼은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사람들이다. 


1662년 11월 25일, 윈저 궁전에서 열린 새 왕비 브라간사의 캐서린의 생일 축하연에서 궁정 시인 에드먼드 윌러는 왕비가 영국에 가져온 두 가지 선물을 상찬했다. 그 선물은 차와 차 생산지를 잇는 향료였다. p 010


1662년 5월, 캐서린은 영국 포츠머스에 상륙했다. 포르투갈에서부터 폭풍우를 뚫고 온 긴 배 여행에 지친 캐서린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멀미를 가라앉히기 위해 차를 요청했다. 그러나 준비된 것은 한 잔의 에일이었다. 당시 영국 궁정에는 차를 마시는 습관이 없었던 것이다. p 013


캐서린은 지참금으로 은 30만 스털링과 배 3척에 가득 실은 차와 설탕 그리고 향신료를 영국에 가져왔다. 또 인도의 봄베이, 북아프리카 탕헤르의 양도권도 큰 선물이었다. 봄베이는 왕비가 결혼한 후 영국 동인도회사가 연간 10파운드에 임대하면서 차 무역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1664년 인도네시아 반탐에서 귀항한 영국 동인도회사는 은으로 만든 상자에 담은 시나몬 오일과 양질의 녹차를 왕실에 헌상했다. 찰스 2세는 그 일부를 캐서린에게 주었다. 이후 차는 수입품 목록에 반드시 실리게 되었다고 한다. p 015


제 8대 브라간사 공작 주앙의 차녀이자  독실한 가톨릭신자 캐서린. 캐서린의 아버지는 30여년 뒤 포르투갈 국왕 주왕 4세로 즉위한다. 주왕 4세는 즉위와 동시에 스페인에 독립을 선언하며, 포르투갈-스페인 전쟁이 발발했다. 주앙 4세가 선택한 길은 영국과 결혼동맹. 주앙 4세는 자신의 딸인 캐서린을 영국에 시집보내기로 한다. 하지만 때마침 영국에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며, 가톨릭 신자인 캐서린의 결혼이 무산될 기로에 섰다. 다행히 영국에서 캐서린의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기로 하며, 캐서린은 영국의 찰스 왕세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


캐서린이 영국 궁정에 도착했던 그 때, 영국 궁정에는 차(tea)가 없었다. 그저 한잔의 에일을 마실 뿐이었다. 그런 곳에서 고국에서 차를 마시며 자란 캐서린에게 차가 없는 삶은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궁정에서 자국에서 가져온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차를 혼자만 마시지 않았다. 영국 궁정에서 차 모임을 자주 열며, 차 문화를 선도하며 유행시켰다.


그런 캐서린을 영국사람들은 ‘영국 최초의 차를 마시는 여왕’이라 부르며 칭송하였다. 


캐서린의 삶을 잠시 들여다보면, 영국 귀족과 국민들은 캐서린의 신앙과 수차례 유산을 이유로 이혼을 요구했다. 하지만 찰스 2세는 늘 왕비를 존중했고 옹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왕비를 늘 존중한 찰스 2세에게는 13명의 정부가 있었다. 심지어 왕의 정부가 왕비 캐서린 침실 여관이 되었다. 대대로 왕의 정부가 왕비의 침실 여관이 되는게 관례였기에. 캐서린은 이를 감내했다. 왕이 왕비로써 그녀를 지켜주었기 때문에. 찰스 2세 사후 영국 명예혁명등 궁정이 불안정해지자, 왕비는 고향인 포르투갈로 귀국하여 여생을 보냈다.


동양의 차를 마실 때 사용된 작은 찻종과 받침으로 이루어진 구성은 ‘티 볼’이라는 애칭으로 알려져 있다. 브라간사의 캐서린은 영국으로 시집올 때 차와 함께 차를 즐길 다기도 함께 가져 왔다. 블루&화이트 색상의 아름다운 동양품 다기는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주변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좋아했던 캐서린 왕비는 친해진 귀족들에게 포르투갈에서 주문한 다기를 선물하기도 했다고 한다. p 017, 블루&화이트 티볼​


1683년 7월 앤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왕 프레더릭 3세의 차남 조지와 결혼했다. 다소 미덥지 못한 인물이었지만 심성이 착했다. 앤은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정원 가꾸기와 술을 좋아하는 남편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여섯 번의 유산과 여섯 번의 사산을 경험한다. 1689년, 고대하던 아들 글로스터 공작 윌리엄이 탄생했다. 하지만 윌리엄은 선천성 수두증이 원인이 되어 열한 살에 성홍열로 목숨을 잃는다. p 050


여왕이 된 앤은 켄싱턴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즉위 기념을 겸해 궁전의 정원 안에는 오렌지를 재배하기 위한 ‘오랑주리’가 지어졌다. 여름에는 이곳에서 차 모임을 열었다. 여왕이 된 자신을 막을 자는 없었다. 윌리엄 3세가 끝내지 못한 스페인 계승전쟁에도 관여했다. 같은 시기에 대륙에서 프랑스와의 전쟁도 발발한다. ‘앤 여왕 전쟁’이라고 불린 이 전쟁은 장기전에 접어들었다. 기반을 공고히 할 목적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국의 통합안이 진행되어 1707년 5월 양국의 ‘연합법’이 성립했다. 스튜어트 왕조 창설 이래 100년 남짓 동군 연합을 결성한 양국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었으며, 앤 여왕은 최초의 국왕이 되었다. p 055


1685년 카톨릭 신자인 아버지가 제임스 2세로 즉위했다. 앤과 언니 메리(+메리 남편 윌리엄 3세)는 신교도였다. 영국 국교를 못마땅해했던, 카톨릭 신자이자 왕이었던 아버지는 앤과 언니 메리에게 카톨릭 개종 및 이혼을 강요했다. 영국 의회는 메리의 남편 윌리엄 3세와 함께 ‘신교도 국민의 권리 회복’이라는 반란을 시작하였고, 제임스 2세는 결국 프랑스로 망명했다. 


차기 왕은 왕위 계승1위인 언니 메리가 되었어야 하지만, 남편 윌리엄 3세를 지극히 사랑했던 메리는 남편과 공동 통치를 시작. 왕위 계승 2위였던 앤을 뒤로 한채. 앤은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언니가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1702년 메리가 죽은 뒤 앤이 영국 왕으로 즉위했다.


왕이 된 앤이지만, 그녀의 삶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왕이 되기 전에는 수도 없이 자녀를 잃었고, 왕이 된 후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엔 전쟁을 끝냈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통합했다. 그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그레이튼 브리튼 왕국’이 시작된다.


앤 여왕 시대에 보급된 것이 은으로 만든 찻주전자이다. 앤은 서양 배를 모티브로 한 로코코 양시그이 찻주전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 우미한 찻주전자는 ‘앤 여왕 양식’이라고 불리며 상류층의 인기를 끌었다. 단 음식을 무척 좋아했던 앤의 식탁에는 다과가 빠지지 않았다. 머랭과 같은 설탕 과자, 향신료로 풍미를 낸 과일 설탕 절임이 대표적이었다. 앤이 가장 좋아한 것은 ‘서양 배 시나몬 콩포트’였다. p 057, 앤 여왕 양식


1761년 8월 17일, 고국을 떠난 샤를로테는 세 번의 폭풍우를 뚫고 9월 7일 영국에 상륙했다. 다음 날인 8일 대면한 두 사람은 6시간 후,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조지 3세는 식을 올린 후 아내에게 ‘정치에 간섭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원래 겸손하고 조신한 성격이었던 샤를로테는 왕의 말에 순종했다. 익숙치 않은 영어 때문에 고생하면서도 궁정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그녀를 조지 3세도 사랑스럽게 여긴다. p 094


음악을 사랑한 왕비는 바흐와 아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를 왕실 음악 교사로 초청했다. 1764년 5월에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버킹엄 하우스에 초청했다. 여덟 살이었던 모차르트는 샤를로테가 부르는 아리아에 즉석에서 반주를 만들어 붙였다. 모차르트는 1년간 머물면서 왕비에게 ‘런던 소나타’를 헌상했으며, 당시 유행하던 티 가든에서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p 099


1773년 북미에서는 보스턴 티 파티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미국의 13개 식민지가 영국에 반발했다. 영국은 유럽 내 주요 동맹국을 잃게 된다. 이런 상황은 샤를로테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딸들의 결혼 상대를 찾기 힘들어진 것이다. 왕가의 공주는 왕가로 시집가는 것이 통례였다. 왕족이 아닌 상대와 결혼하면 신분이 하락한다. 1783년 9월, 장기화된 미국 독립전쟁이 파리조약에 의해 종결되었다. 조지 3세는 광대한 식민지를 잃은 왕이라는 불명예를 안게된다. p 100


1818년, 정식 결혼을 통해 적자를 얻기 위해 3남, 4남, 7남이 잇따라 결혼했다. 3남, 4남 때는 국가의 경비 삭감을 이유로 합동결혼식을 거행했다. 식장은 샤를로테가 지내고 있는 큐 궁전이었다.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한 이후 샤를로테의 건강이 악화된다. 어머니의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자 섭정 왕세자 조지는 아이처럼 이성을 잃었다. 1818년 11월 17일, 샤를로테는 큐 궁전의 침실 팔걸이 의자에 앉아 섭정 왕세자의 손을 잡고 74년간의 인생을 마감한다. p 104


조지3세는 역대 왕들과 달리 정부를 두지 않고 샤를로테를 존중했다. 시어머니 아우구스타의 괴롭힘을 막아주기 위해, 버킹엄 하우스를 사저로 분리하였다. 버킹엄 하우스는 왕비를 향한 왕의 사랑을 나타내듯 ‘퀸즈 하우스’라고 부른다. 궁정파티보단 가족과 생활을 우선했다. 부부가 얼마나 사이가 좋았냐면, 둘 사이의 자녀가 9남 6녀다. 샤를로테는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 유명한 어린 바흐와 모짜르트를 불러 연주회를 열 정도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후 불행이 시작된다. 조지 3세에게 폭력성이 나타나며 정신 장애가 생긴다. 이후 건강을 회복하긴 했으나, 그의 생활은 예전만치 못했다. 뿐만 아니라 조지3세 형제들 사건사고로 영국 왕실 지지율은 점점 나락으로 떨어진다. 왕비 샤를로테는 어떻게든 남편을 보호하기 위해 궁전 부지에 ‘퀸 샤를로테 코티지’를 지어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나며, 조금이나마 회복되었던 조지 3세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 건강이 악화된다. 설상가상으로 아들 왕세자 조지도 악행을 일삼기 시작했다. 차남, 삼남 모두 사건사고에 휘말렸다. 심지어 막내딸이 세상을 떠나며 조지 3세는 정신을 놓고 만다. 조지 3세는 의사소통마저 불가능해지며, 윈저성에 유폐된다. 왕세자 조지가 섭정을 시작했다. 


정말 샤를로테 삶은 눈물없이는 볼 수 없다. 영국판 인간극장이 바로 이런건가 싶다. 이 책에 나온 다른 여성들도 저마다 사연이 있었지만, 샤를로테를 이길 사람이 있을까 싶다. 남편을 잘 만나서 행복할 일만 남았는데, 남편 건강 이슈, 남편 형제 이슈, 자식 이슈 바람잘 날 없는 시간이 계속된다. 그런 그녀가 마음 둘 곳이라고는 오직 왕세자 조지의 딸, 손녀였다. 하지만 장성한 손녀마저도 결혼 후 출산 과정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정말 안타까운 삶 그 자체인 샤를로테. 하지만 차 문화에 있어서 만큼은, 차를 마시며 행복했을 그녀의 족적이 뚜렷하다.



1765년 5월, 샤를로테는 웨지우드 공방에서 개발한 흰색 도기인 크림웨어를 주문했다. 이 소박한 그릇은 큐 궁전과 퀸 샤를로테 코티지 그리고 프로그모어 하우스 등 왕비의 사적인 식탁에서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샤를로테는 이 크림 웨어에 ‘퀸즈 에어’라는 특별한 명칭을 붙였다. 1788년 샤를로테는 국왕과 함께 우스터에서 열린 음악제에 참석했다. 그리고 우스터 공방에 들러 티 세트와 디너 세트를 주문한다. 호화로운 궁정에 어울리는 그릇과 함께 중국 자기의 연꽃 모양이 디자인된 호박한 청화 자기 ‘블루 릴리’도 구입했다. 이 식기는 후에 프로그모어 하우스의 식탁을 장식한다. 그 후에 이 문양은 왕비에 대한 경의를 담아 ‘로열 릴리’로 불렸다. p 106, 왕비와 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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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조선의 심장을 쏘다
이상훈 지음 / 파람북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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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삼일천하’라는 단어를 들어본적이 있는가. 아니, 질문이 잘못되었다. 학교 정규 교과과정을 배운 사람이라면 무조건 배웠을 내용이다. 부패했던 조선 말, 미완의 혁명가 ‘김옥균’에 대하여. 


다만 과거에 가르쳤던 김옥균과, 현재 정규 교과과정에서 가르치는 김옥균이 얼마나 같을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내가 학창시절 배웠던 ‘김옥균’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다. 그는 사회 분위기와 달리 너무 급진적으로 개혁하려했고, 일본의 도움을 빌리려 했기에 당연히 실패할 수 밖에 없는 혁명이었다고 말이다. 하여 고종이 자객을 보내 김옥균을 죽인 것 까지도 어쩔수 없는 일이었노라고 말이다.



내가 역사를 배웠을 때는 오로지 나라의 명예를 위해 빛나는 영광은 과장해서, 실패한 역사는 축소/생략해서 배웠다. 이유는 단 하나다. 권력을 가진 위정자들이 자기 조상들의 친일매국 흔적을 최대한 지우기 위해서. 그랬기에 고종과 민비 일파의 부정부패 역시 매우 축약해서 가르치거나, 생략했다. 심지어는 고종과 민비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썼다는 거짓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내가 역사를 배웠던 시절은, 그런 밀레니엄 시절이었다. 


내가 바라는 건 하나다. 현재를 살고 있는 아이들이 제대로된 역사를 배웠으면 하는 것. 그래야 올바른 역사관, 가치관을 가진 성인으로 자랄 수 있을테니까. 왜곡된 역사관을 가진 채로 자란 사람들의 결말을 우리는 매일매일 뉴스로 보고 있지 않나.


TMI가 너무 길었다. 이제 본론이다. 이 장편소설 『김옥균, 조선의 심장을 쏘다』는 ‘김옥균’의 일생을 담은 역사소설이다. ‘삼일천하’라는 오명에 갇혀, 가려져버린 김옥균의 빛나는 개화사상을 고스란히 담은 소설이다. 소설이기에 허구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허구는 지금까지 밝혀지고, 검증된 김옥균 생애에 털오라기 하나 바꾸지 못할 정도이니 안심하길 바란다.



소설에 들어가기에 앞서, 당시 시대배경과 김옥균의 스승 박규수에 대해 알아보자.


박규수는 조선말 개화사상의 선구자이자, 효명세자(순조 아들) 스승이었다. 효명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무력했던 순조의 아들이었다. 순조는 아들 효명에게 대리청정을 명했고, 적어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던 시기에는 안동 김씨가 배척되어 어느정도 조선이 바로잡혀가고 있었다. 하지만 효명이 요절하며, 안동 김씨가 다시 권력을 쥐었다. 박규수는 실의에 빠져 칩거했다. 


역사에 가정만큼 부질없는게 없지만, 그럼에도 효명세자가 요절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즉위했더라면 어땠을까.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양강구도로 굳혀졌던 세도정치가 발도 못붙였을것이다. 거기에 더해 깨어있던 효명과 개화파 선구주자인 박규수의 합작으로 조선은 위로부터의 개혁이 성공했을 것이다. 섬나라 일본에서 위로부터의 개혁인 메이지 유신이 성공했던 것처럼.



실의에 빠졌던 박규수는 후학을 양성하며, 자신의 집에 개화사상을 가진 청년들과 자주 모임을 가졌다. 그중 하나가 바로 김옥균이다. 김옥균은 박규수의 집에서 박영효, 이동인, 유길준 등 같은 개화파 청년들과 머리를 맞대며 망해가는 조선을 살리기 위한 대책을 강구했다. 그렇게 조선을 살리고자 애썼던 청년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전부 관료가 되었다. 그들은 조선을 바꿀 수 있을거라 믿었다.



여담이지만 박규수의 집은, 일본 요시다 쇼인의 사숙과 비슷하다. 요시다 쇼인은 일본 개화파의 선구자였으며, 그는 자신의 사숙에서 많은 청년들을 가르쳤다. 그 청년들이 훗날 일본 근대화 개혁, 메이지 유신을 도모했고 성공시켰다. 조금 더 생각해보자. 박규수와 요시다 쇼인은 동시대를 살아간 인물이다. 즉 이들은 같은 시간대에, 서로 다른 공간에서, 근대 개화사상을 가진 청년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일본은 근대 개혁에 성공했고, 조선은 실패했다. 근대 개혁에 성공한 일본은, 근대 개혁에  실패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대체 무엇이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한걸까.


어쩌면 성공했을지 모를, 정변이 아닌 개혁이라 이름붙여졌을 위로부터의 근대화 개혁 ‘갑신정변’. 실패한 이유는 다름아닌 고종과 민씨척족이었다.



조대비와 대원군의 협력으로 고종이 왕위에 올랐다. 대원군은 세도정치를 쓸어버리는 개혁을 단행했다. 대원군은 내부적으론 부정부패 개혁을 하고자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서양 기술과 문물에는 눈과 귀를 닫았다. 고종은 조금 달랐다. 서양 기술에 관심을 기울였다. 과거 일본이 청년들을 미국에 보내 배우고 오게 했던 것처럼,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청년들을 일본에 보냈다. 신사유람단이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개화’라는 목표는 고종, 개화파 관료들이 같았지만 목적이 달랐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관료들은 조선 백성들이 모두가 잘 살수 있는 나라를 원했다. 반면에 고종은 모두가 아닌, 자기 혼자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원했다. 하여 자신과 목적이 다르다고 깨달은 순간, 언제나 그랬듯 고종은 이들을 배신했다. 배신하다못해,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관료들을 천하의 몹쓸놈, 배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씌우고 목숨줄을 끊고자 했다. 그렇게 김옥균은 고종이 보낸 자객의 손에 죽었다. 


김옥균은 실패했지만 그의 동료들이 그의 뜻을 이어나갔다. 박영효가 그랬고, 서재필이 그랬고, 유길준이 그랬다. 하지만 번번히 고종에게 가로막혔다. 박영효의 2차 갑오개혁은 민씨척족들이 그에게 역모혐의를 뒤집어 씌우며 브레이크를 걸었다. 서재필의 독립협회에서 ‘입헌군주제’ 안건이 튀어나온 순간, 고종은 황국협회를 결성하여 이들을 움직여 독립협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렇듯 고종과 민비는 자신의 권력에 맞서려는 낌새가 보인다면, 주저없이 역모 프레임을 씌우고 죽이기 위해 사활을 다했다. 자신의 기득권을 침해한다면 가차없이 상대방을 죽이는 사람들, 고종과 민비가 바로 이런 인간들이었다. 비단 조정에 나온 관료들에게만 이랬을까? 백성들에게도 똑같았다. 고종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힘들어서 못살겠다는 백성들을 진압하라며, 개틀링건을 사용하게 했다. 고종의 명을 받은 관군들은 동학군을 향해 개틀링건을 난사하며, 백성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였다. 


고종과 민비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욕심은 기어이 일본에 조선을 내어주는 결말을 불어왔다. 그렇게 조선 백성들은 일본에게 모든것을 빼앗겼다. 



저자는 소설 속 인물인 ‘경식’을 통해 이런 말을 했다.


“민비도 서태후에 뒤지지 않습니다. 매일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이고 백성이 굶어 죽어 나가는데도 사치가 끝이 없었지요. 왕실 재정이 조선 정부의 재정을 넘어서서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민비와 왕실의 부속품에 불과했습니다. 민비를 명성황후로 칭송하고 있지만, 민비가 일본인에게 무참하게 살해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평가받았을까 궁금합니다.” p 366


“선배님, 김옥균이 살아있었다면 한일합방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한일합방을 막았을 것입니다. 박영효는 어릴 때부터 부마의 신분으로 최고의 기득권을 누렸기 때문에 미국 망명에서도 견디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반면에 옥균은 어릴 때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입양되었기에 출신성분에서부터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박영효도 나름대로 모든 권력과 부를 내려놓고 갑신정변에 참여한 것은 높이 평가합니다만 태생적인 한계가 작용했던게 아닐까요. (…) 선배님, 역사는 냉정한 것입니다. 박영효도 목숨을 걸고 절개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것이 지도자의 자세가 아닐까요. 지도자가 누구냐에 따라 그 나라가 흥하고 망하기도 해온 걸 세계의 역사가 말해주지 않습니까. 메이지와 고종은 1852년에 태어난 동갑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을 근대화시키면서 강국으로 만들었으나 또 한 사람은 나라를 팔아먹은 옹졸하고 무능한 왕으로 후대에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 p 396



동시대에 태어났던 메이지와 고종, 심지어 두 사람은 허수아비 왕이었다. 메이지는 도쿠가와 막부 그늘에 가려져있었고, 고종은 대원군 그늘에 가려져있었다. 메이지는 대정봉환으로 권력을 되찾았고, 고종은 대원군이 실각하며 권력을 되찾았다. 하지만 이후 그들의 행보는 달랐다. 메이지는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고, 개혁에 앞장섰다. 고종은 자신의 권력을 붙잡고 개화의 불씨란 불씨는 다 끄고 다녔다.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김옥균의 개혁은 너무 급진적이어서, 사회적으로 반발이 심해 실패했다고. 일본 메이지 유신을 생각해보자. 메이지유신도 급진적으로 진행된 근대화 개혁이었다. 하지만 성공했다. 심지어 김옥균의 개혁처럼, 메이지유신도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실패했고, 일본은 성공했다. 



시작은 같았으나, 성공과 실패가 확연히 달랐던 조선과 일본의 근대화 개혁. 이제는 다들 이유를 알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감히 바라본다. 김옥균이 실패한 혁명가가 아니라, 비정상이던 세상에서 목숨걸고 자신의 정의를 향해 나아간 인물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기를 말이다. 더 나아가서 마치 평행이론마냥 겹쳐지는 지금의 현실과 김옥균이 살던 조선 말을 생각해보며,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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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사전 - 대체로 즐겁고 가끔은 지적이며 때로는 유머러스한 사물들의 이야기
홍성윤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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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제목부터 아주 획기적이고 기똥찬 인문학책 한 권을 읽었다. 진짜 뭐랄까, 몰라도 삶에 지장은 없지만 알면 어쩌다 한번 쯤 “난 이런 것도 알고 있어! 알려줄까?” 하고 으스댈 수있는 류의 인문학책이랄까? 진짜 말그대로 ‘알쓸신잡’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은 인문학책이다. 제목부터 정말 기똥찬 이 책 제목은 『그거 사전』.



“너 그거 알아?”



할 때 바로 ‘그거’다. 진짜 ‘그거’!!!! 뭔지는 알겠는데, 이름이 딱 떠오르지 않는, 내 삶에서 무수히 마주친 그것들. 저자는 그것들을 한데모아 책으로 엮었다. 



나도 꽤 잡학지식이 많은 편이라, 사람들이 말하는 ‘그거’ 이름을 꽤 아는 편이다. 예컨데 피자세이버 같은거. 근데 와 ㅋㅋㅋ 이 책을 읽고보니 최소 반 이상의 그것들 이름을 모르고 있었네..? 심지어 그것들 이름도 이름인데, 비하인드 스토리 왜이렇게 재미있는지! 



특히 소주 병뚜껑 꼬투리 그거! 아래에 내용에 자세히 적긴 했지만, 와. 소주 병뚜껑 제조업이 국세청 지정 독과점 사업이라는거에 일차 충격. 전직 국세청 간부들이 현직 병뚜껑 업체 간부로 자리를 옮겨간다는 사실에 이차 충격. 그놈의 채용비리는 정말. 없는 곳이 없구나? 




1. 과일이 손상되지 않도록 감싸는 그거 

팬캡, 과일망이다. 폴리에틸렌으로 만든 완충 포장재의 일종으로, 외부 충격으로부터 과일을 보호한다. 과일 일부 혹은 전체를 보호하는 그물 모양 포장재는 과일망(그물망)이라고 하고, 과일 밑부분을 감싸는 형태의 꽃받침 모양 포장재는 팬캡이라고 부른다. 팬캡이나 과일망 외에 종이 혹은 플라스틱 판에 과일이 흔들리지 않도록 여려 개의 반구 모양으로 틀을 잡은 ‘그거’는 난좌다. 바닥 완충재, 트레이라고도 한다.p 027


과일 포장재는 재활용 난도를 확 끌어올리는 ‘킬러 문항’ 쓰레기다. 팬캡과 과일망은 촉감부터 물성까지 스티로폼 같지만 실은 발포 폴리에틸렌으로, 다른 재질이다. 환경부 자원순한정책과와 한국폐기물협회에서는 재활용 가치가 낮고 수거가 어려운 팬캡과 과일망은 종량제 봉투에 담아 배출하는 것을 권장한다. p 027



죄송합니다. 지금껏 과일 포장재 스티로폼 재활용에 버렸습니다. 반성합니다. 근데 진짜 몰랐습니다. 하...아니! 이런건 과일 포장상자에 재활용 여부 로고 박아주면 안되나? 다른 제품포장지들은 죄다 재활용 여부 로고를 박아주면서, 이런것들은 왜 안해줄까.




2.열지 않고 마실 수 있는 테이크아웃 컵 뚜껑 그거

커피 리드다. 커피 전문점에서 테이크아웃 컵에 음료를 받으면 플라스틱 뚜껑이 함께 딸려온다. 점원이 깜빡했다면 “컵뚜껑 주세요”라고 하면 그만이지만, 정확한 명칭은 커피 리드다. 트래블러 리드, 드링킹 리드, 돔 리드라고도 부른다. 리드가 ‘뚜껑’을 뜻하는 단어이므로 컵 뚜껑이라고 지칭해도 문제는 없다. p 101


커피 리드를 자세히 살펴보면 음료가 나오는 구멍 반대편에 작은 구멍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공기 유입구다. 이 작은 구멍이 없으면 음료가 차지하던 공간을 대체할 공기가 제대로 유입되지 않아 액체의 흐름이 방해받는다. 그 과정에서 뜨거운 음료가 갑자기 쏟아지면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 공기 유입구는 음료에서 발생하는 열기를 배출해 커피 리드가 고온에 오래 노출돼 변형되는 것을 막는 역할도 한다. p 102


테이크아웃 컵 뚜껑 이름은 커피 리드! 근데 이건 좀 봐줘야 한다. 리드가 뚜껑이잖아? 커피 리드라고 부르나, 컵 뚜껑이라고 부르나 도긴개긴아닌가 하는 뭐 그런 생각이 든다. 커피 리드 구멍막는 그거, ‘스플래시 스틱’ 은 오우 완전 처음 듣는 이름이라 신기방기 그자체!



3. 소주 병뚜껑에 꼬리처럼 달린 그거

스커트다. 국내 제조현장에서는 간단히 링이라고 부른다. 공식 명칭이 낯설다 보니 주류 업체 홈페이지나 SNS계정에서는 ‘병뚜껑 꼬리’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스크루 형태의 뚜껑을 비틀어 열면 밑부분만 뜯어지는데 이 스커트 상태에 따라 개봉 여부를 확인할 수 있어 개봉 확인 밴드라고도 한다. 소주병 뚜껑처럼 알루미늄을 재료로 하는 병바개는 ROPP 캡이라고 한다. 스크루 캡이라고도 부르는 ROPP 캡은 녹이 슬지 않고, 별다른 도구 없이 손으로 개봉할 수 있다보니 널리 활용된다. 페트병 뚜껑으로는 위조 방지 스커트가 달린 플라스틱 PP캡이 주로 쓰인다. p 108


국세청 입장에서는 술 병뚜껑은 실제로 중요한 영수증이다. 소주와 맥주 뚜껑에 인쇄된 ‘납세필’이라는 글자는 한국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병뚜껑을 통한 납세 증명제도를 운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2014년부터는 1만 킬로리터 이상 출고하는 막걸리(탁주)에도 증지 부착을 의무화했다. 덕분에 소자와 맥주 병뚜껑의 세법상 이름은 ‘납세병마개’가 되었다. 납세병마개는 ‘40년간 밀봉된’ 권력이기도 한다. 주류세 납부의 영수증인 만큼 국세청이 병마개 제조 업체를 별도로 지정해 엄격히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p 109



와, 진짜 이 책 『그거 사전』 읽으면서 제일 큰 충격을 받은 구간이다. 소주 병뚜껑 자체가 납세 영수증이라는 사실도 신기한데, 이 납세 병뚜껑 제조업을 국세청에서 지정 관리하고 있다니. 심지어 40년이 넘도록 계속!!!! 국세청 관할하에 있는 대놓고!!! 독과점!!! 심지어 병뚜껑 제조업체 요직에 전직 국세청 고위관직자들을 두루두루 앉혀놓았다고. 하 정말 이렇게 짜고치는 고스톱, 민망하지도 않나? 국민들이 모르니까 문제없다고 생각하는건가. 하 정말!!!!!!!!!!!!! 



여기서 주목! 소주, 맥주 금속 병마개 제조업체는 지금까지 단 두 곳^^! 40년 넘은 시간동안 돈을 얼마나 쓸어담았을까...



4. 두루마리 화장지 다 쓰면 나오는 종이 심 그거

지관이다. 종이로 만든 원통형의 심을 뜻한다. 흔히 휴지심이라고 하지만 제조 현장에서 쓰이는 공식 명칭은 지관이다. 한뼘도 안되는 짧은 심을 왜 ‘관’이라고 부를까. 두루마리 화장지의 제조과정을 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먼저 대형 화장지 원지를 풀어 무늬를 인쇄하고 오돌토돌한 엠보싱 패턴을 입힌다. 그러고 나면 화장지를 긴 지관에 일정한 길이로 감고 똑같은 길이로 끊어낸다. 김밥을 만드는 과정과 똑 닮았다. 사실 지관이라는 단어는 없다. 땅속에 파묻은 관을 뜻하는 지관, 골무를 뜻하는 지관, 불교에서 천태종을 다르게 부르는 지관은 표준국어 대사전에 등재되어 있지만 두루마리 화장지의 심을 뜻하는 지관은 없다. 다만 한자 생활권인 한국에서 ‘종이로 만든 관’을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단어가 오랫동안 쓰이면서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p 199


미국의 사업가 조지프 가예티는 1857년 최초의 사용 휴지를 발명했다. 이 휴지는 알로에가 함유된 마닐라삼 재질로, 낱장 500장을 상자에 담은 현재의 갑 티슈와 비슷한 형태였다. 목적은 치질을 예방하는 치료용 제품이었다. 가예티는 발명품이 자랑스러웠는지 한 장 한 장마다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덕분에 가예티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의 엉덩이를 닦아준 영예로운 이름이 됐다. p 200


뉴욕주의 소도시 올버니 태생의 세스 휠러는 휴지가 쉽게 끊어지도록 돕는 절취선을 넣고, 지관을 중심으로 둥글게 말린 형태의 화장지를 발명한 두루마리 휴지의 아버지다. 하지만 당시 대중은 ‘뒤처리’를 창피하게 여겼던지라 지금처럼 생필품으로 자리 잡는 데에는 꽤 오랜시간이 필요했다. p 201



화장지. 그 누구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소모품이지만 알고보면 인생에서 절대 없으면 안될, 아주 중요한!!!! 제품이다. 그런 화장지 역사를 이제서야 알게되다니. 허허허. 아 물론 몰라도 사는데 전혀 지장없는 그런 내용이긴하다. 하하하.




5. 전자제품이나 문구의 뜯기 어려운 포장 그거 

블리스터 포장이다. 가열한 플라스틱 시트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여 금형에 밀착시키고 두꺼운 판지나 알루미늄 포일, 플라스틱 시트 등을 부착해 밀봉하는 포장 방법이다. p 241


문제는 이 재료들의 강도가 무척 높다는 점이다. 거기에 더해 이를 고열로 녹여서 열접착 방식을오 밀봉하면 손아귀 힘만으로 뜯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겨우 뜯어내도 날카로운 단면에 다치기 일쑤다. 가위나 칼을 이용해 뜯다가 다치거나 제품이 손상되는 일도 왕왕 발생한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악마의 포장’이라는 세간의 비난이 과하지 않다. 하지만 블리스터 포장은 튼튼하고 저렴하다. 모든 공정이 자동화로 진행돼 생산성도 높다. 금형을 만드는 비용과 시간, 품이 적게 들어 다품종 생산에 적합핟. 다른 포장방식에 비해 부피도 작은 편이라 물류 비용을 아낄 수 있다. 투명한 플라스틱 안으로 제품이 한 눈에 보여 판촉에 유리하다. 뜯기 어렵다는 단점마저 ‘도난이 어렵다’, ‘재포장으로 인한 내용물의 변경, 위조가 어렵다’는 장점으로 치환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소비자의 단순 변심으로 인한 환불을 방지하는 효과도 탁월하다. p 242


블리스터 포장 때문에 태어난 영어표현도 있다. 바로 ‘wraprage(포장 분노)’다. 포장, 그 중에서도 블리스터 포장을 뜯지 못해 분노와 좌절이 극도로 치솟는 상황을 뜻한다. 2003년 영국 일간지 《데일리텔레그래프》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이 용어는 언어학 교수와 작가 등으로 구성된 미국방언학회에서 2007년 가장 유용한 단어로 선정하기도 했다. p 243



그렇구나. 3n년 동안 많은 소비를 하며, 포장지를 뜯을 때마다 피를 봤던 최악의 그 포장, 하지만 흔하디 흔한 그 포장법 이름이 바로 블리스터 포장이구나. 이제서야 이름을 알게되다니 감회가 새롭......기는 개뿔! 



소비자중심경영(CCM)이 요즘 시대 최고의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왜 저 포장법 만큼은 변하지 않는가 했는데! 이 책 덕분에 앞으로도 블리스터 포장은 계속될 거라는 확신만 얻게 되었다. 후, 어쩌겠나. 자동화에 비용절감에, 부피도 작은데다가 심지어 도난, 위조방지가 된다는데! 어떤 공급자가 이렇게 좋은 포장방법을 포기할까. 그냥 내가 저런 포장을 뜯을때 안전장갑 끼고, 가위로 조심스럽게 뜯어내야지^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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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들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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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현대사에는 여러국가가 등장한다. 그중 한 곳이 바로 소련이다. 소련은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고, 1922년에 세워진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준말이다. 러시아 영토를 비롯하여 북유럽, 중앙아시아 내부까지 광활한 영토를 자랑했던 인류사 최초 공산주의 연방국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 유럽을 장악한 히틀러 조차 막아냈던 나라가 소련이었다. 이렇게 보면 소련이라는 나라가 우리 근현대사와 무슨 연관이 있나 싶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배웠던 내용을 상기해보자. 



1945년 해방 이후 우리가 살고 있는 남한은 미군이 통치했다. 북한은 어땠을까? 바로 소련이 통치했다. 무엇보다 소련은 냉전 시절 공산주의 종주국이기도 했다. 지금에야 공산주의 종주국을 중국이라 생각하지만, 중국이 치고 올라오기 전까지만해도 공산주의 종주국은 거대한 영토를 가진 소련이었다. 그런 소련이 1991년에 붕괴되었다. 12월 25일 대통령이었던 고르바초프 사임과 함께.



미국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소련 붕괴를 세계사적 흐름에 따른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고, 그렇게 가르쳤다. ‘제국’이라는 정의가 사라진 세계에서, ‘제국’을 표방한 소련은 붕괴될 수 밖에 없었다고. ‘제국’에 반발한 연방국가들의 민족주의적 독립 열망도 거기에 더했다. 이런 역사적인 흐름에 따라, 고르바초프라는 위대한 인물이 소련에 민주주의 라는 대의를 심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다고 미국 역사가들을 비롯하여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말했다. 



그렇게 소련 붕괴는 당연한 역사적 흐름이며, 대의를 위한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프의 위대한 희생이라는 인식이 뇌리에 박혔다. 많은 학생들이 교과 과정에서 이러한 내용을 배웠다. 정말일까? 소련은 역사적인 흐름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붕괴된 것이며, 고르바초프는 소련에 민주주의 씨앗을 심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위대한 영웅인걸까? 이 세계사책 『소련 붕괴의 순간』 저자는 그런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인정받는 고르바초프의 공인 전기를 쓴 미국 작가 윌리엄 타우브먼은 “고르바초프는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타우브먼은 고르바초프가 러시아를 변화시키려고 했으며,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았지만 새로운 국가, 사회, 경제를 건설하는 데는 당연히 실패한 유례없는 “비극적 영웅”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p 041



미국과 서방에서 가르친 고르바초프와 실제 책 속에 비친 고르바초프는 극과 극을 달린다. 개인적으론 책 속에 보여지는 고르바로프가 사실에 가까운 모습이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고르바초프는 미국을 포함한 서방이 만들어난 환영이다. 오롯이 소련 붕괴를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눈으로 만들어낸 환영인 것이다. 고르바쵸프의 헛발질이 소련에 암울한 미래를 가져다주든 말든 미국을 포함한 서방은 관심없었다. 심지어 고르바초프가 소련에 민주주의를 일으키고자 미국의 도움을 원했음에도, 미국은 그저 관망했다. 미국 입장에선 ‘이념’에 따라 공산주의는 사라져야했으며, 따라서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결과론적으로 미국은 소련을 해체한 고르바초프를 위대한 영웅이라 일컫고, 노벨평화상을 수여했다.



저자는 이 책 『소련 붕괴의 시간』을 쓰기에 앞서 무려 30여년간 자료를 모았다. 출처 미국, 러시아 문서고 등 정부기관에서 확인한 각종 보고서를 포함해서 과거 KGB 및 MIC 요원을 비롯하여 사회 각계각층 사람들 인터뷰를 망라했다. 



신레닌주의적 웅변에도 불구하고, 고르바초프는 집권하고 첫 2년 동안 어떤 개혁 전략을 취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 놀랍게도 안드로포프가 소련의 거시 경제 안정성에 관해 제기했던 시급한 문제는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다. 식량 수입을 줄이고, 무역수지 군형을 회복하고, 그림자 경제를 강력히 단속하고, 노동력을 규율할 필요성 말이다. 고르파초프의 작성문은 소련 경제를 괴롭히는 경제적, 재정적 문제점에 대한 진단은 담지 않았다. p 044



예측에 따르면 5년 내로 소련 경제는 재편되어 국내 소비자 요구에 부응하고 해외로 수출할 만한 질 좋은 제품을 생산할 것이다. 과거에, 소련의 현대화 시도는 서방의 회사를 끌어들여 신규공장을 지었던 1930년대나 1960년대에 최상의 성과를 낳았다. 신규 기업에는 새로 훈련받은 기술자와 노동자가 필요했는데, 그들은 싫든 좋든 외국의 관행과 표준을 따랐다. 이는 경쟁과 여타 시장 추진 요인이 부재한 상황에서, 노후한 공정과 화석화된 작업 관행을 극복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1986년 고르바초프의 조치는 기존 국영기업의 장비 교체에 돈을 투자했다. 대규모로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정책이었다. 오래된 공장의 경영자와 노동자는 보수적으로 행동하며 혁신에 저항했다. 값비싼 서구 장비는 대부분 구공장과 시설에서는 절대 사용되지 않았다. p 047



고르바초프는 레닌을 영웅시하며, 소련을 구할 혁명가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눈 앞에 보이는 소련의 문제점들을 급진적인 방법으로 개혁하고자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고르바초프가 끌고가야 했던 소련은 경제, 사회, 모든 면에서 위기에 직면한, 깊숙한 곳까지 뿌리박힌 문제점들을 개혁을 하지않으면 자멸할 수 밖에 없는 상태였다는 점이다. 누가봐도 시급하게 개혁을 진행해야 했다. 소련의 불행은 그 개혁을 진행할 사람이 고르바초프였다는 점이다. 그는 그야말로 탁상머리 행정가의 표본이었다.



진짜 어둠은 겪어보지 못했으나, 글로써 어둠을 배웠으며, 글로 배운 어둠을 급진적으로 개혁하고자 한 이상주의자 그게 바로 고르바초프였다. 제일 중요한 사실은, 그의 이상에는 ‘현실(또는 현장)’이 없었다. 그의 이상은 책상위, 책 속에 있었다.



고르바초프가 선호한 정책, 인텔리겐치아를 달래고 공화국의 지배 엘리트에게 책임을 이양하는 정책은 더 나은 개혁이 아니라 혼란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는 발트 지역과 남캅카스에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소련의 핵심 슬라브 공화국들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분리주의를 가능케하고 정당화했다. (…) 1988년 후반, 고르바초프의 부관들 일부는 세금과 재정을 중앙이 통제하는 단일국가, 최소한 강력한 대통령을 둔 연방을 헌법상으로 긍정할 것을 제안했다. 그 대신, 고르바초프는 눈에 뻔히 보이는 유고슬라비아의 나쁜 사례에도 불구하고 ‘더 강한 공화국들’이라는 치명적 정책을 추진했다. 그리고 그는 인민대표대회와 최고소비에트같이 대의제 기구지만 다루기 힘들고 통치 능력이 없는 기관의 권한을 강화했다. (…) 당 독재를 대체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시스템은 해방과 자유화를 의미했지만, 견제와 균형을 제공하지 않고 특히 러시아연방에서 악성 포퓰리즘과 민족 분리주의로 가는 관문도 열었다. 유사한 참사가 경제에도 일어났다. p 389



물론 그가 소련을 이끌고 나가는 동안, 무능함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는 몇 차례 있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그 기회들을 스스로 날려버렸다. 그렇게 무능한 이상주의자가 이끌던 소련은 끝내 회생이 불가능했다. 그의 무능함은 소련에 잘못된 개혁방안, 연방국가들의 민족주의적 독립열망, 포퓰리즘, 발트 3국의 독립투쟁, 막대한 부채, 권위주의, 사회보장제도 파괴, 대규모 탈산업화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련은 붕괴했다. 



연방은 해체되었고, 연방의 중심이었던 러시아는 살아남아야 했다. 온갖 오물을 유산으로 떠안은 러시아가 살아남는 방법은, 놀랍게도 소련 시절 정치적 유산을 물려받는 길이었다. 그렇기 소련 시절 유산을 물려받은 러시아는 혼란기를 지났다. 현재 러시아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 소련의 잔재를 밟고 선 러시아의 현재는 어떠한가. 뭐, 남의 나라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제 우리나라로 시선을 돌려보자. 이 세계사책 『소련 붕괴의 순간』을 읽다보면, 묘하게 기시감이 느껴지는 장면들이 나온다. 분명 내가 살던 나라도 아니고, 내 조상들이 살던 나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정책 전문가, 관련분야 정치가들은 전부 배제한 채 측근 엘리트, 검사들만 기용하던 대통령. 현실에 눈 돌린채, 자기만의 이상을 펼치려던 대통령. 줄곧 잘못된 정책을 펼치며 자신의 무능함을 자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적나라하게 보이던 대통령. 그 결과, 대한민국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모든 곳이 파괴되었다. 그다마 다행인 점은 대한민국은 소련과 달리 잘못된 정책에 반대하고, 정당한 항의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파괴가 되었어도, 어찌저찌 삐걱대며 돌아는 가고 있다. 문제는 이 상태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가!



언제쯤 대한민국에 진짜 “봄”이 올까.

우리 딸 만큼은 진짜 “봄 날”을 살게 하고 싶은, 간절한 엄마의 소망을 하늘이 들어주려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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