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왕후전 - 환국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비운의 왕비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15
작자 미상 지음, 조재현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오늘의 서평은 서해문집에서 출간된 고전문학인 ‘오래된 책방 시리즈’ 중 15번째인 #인현왕후전 이다. 서해문집에서 출간되고 있는 ‘오래된 책방 시리즈’ 내 개인적으로도 애정하는 시리즈라, 매번 신간이 나올 때마다 꾸준히 구입하고 있다. 참고로 오래된 책방시리즈는 고전소설(또는 고전문학)의 원문을 현재를 사는 우리가 읽기 쉽게, 우리글로 옮겨서 출간한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면, 시중에 나와있는 『인현왕후전』에 대한 책을 보면 원문에는 없는 MSG가 첨가되어 있는 경우가 아주아주 많다(대표적으로 장희빈이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는 내용이 아주 자세하게 쓰여있는 뭐 그런 이야기?). 뭐, 인현왕후전 자체가 일종의 ‘소설’이기는 하나, 그래도 당대에 기록된 사료이기도 한데, 여기에 더 많은 MSG를 뿌린 것이 시중에 널려 있는 『인현왕후전』이랄까? 예를 들자면..... 진수의 정사 『삼국지』를 보고, 나관중이 MSG를 미친듯이 첨가하여 소설 『삼국지연의』를 집필한 것과 같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원문을 그대로 우리글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책이 상당히 얇은 편에 속한다. 뭐 오래된 책방 시리즈가 대체로 책들이 얇다. 『고대일록』이나 『서유견문』, 『매천야록』처럼 우리 글로 옮겨도 페이지수가 방대한 고전도 있긴 한데, 뭐. 아무리 두꺼워봐야 벽돌책정도는 아니니 역시나 읽을만 하다. 여기서 함정은...내가 오래된 책방 시리즈를 계속 사는 것과는 별개로, 읽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 지금까지 읽은거라곤 오늘 서평을 쓰는 『인현왕후전』을 포함하여 『발해고』, 『하멜표류기』, 『동도일사』, 『징비록』 총 5권이다. 지금까지 이 시리즈가 24권까지 나왔는데, 독서 진척률이 너무 저....저조하다. 허허허. 이거 참. 출산하기 전까지 전 권 다 읽을 수 있겠지...ㅋㅋㅋㅋ




인현왕후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조선의 왕비중 한명이다. 그도 그럴것이 수많은 드라마에서 숙종과 인현왕후, 장희빈의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간혹 여기에 숙빈 최씨의 이야기까지 들어가는 경우도 있긴 하다. 뭐, 주연이 셋이든 넷이든 우리가 알고 있는 인현왕후의 이야기는 동일하다.



숙종이 장옥정이라는 나쁜 요녀에게 빠졌다. 옥정이 아들을 낳자, 그 아들을 세자로 봉하고 옥정은 희빈에 봉해진다. 장희빈에게 빠져있는 숙종은 결국 착하디 착한 본처 인현왕후를 쫓아내고 장옥정을 중전에 앉힌다. 그렇게 6년의 시간이 흐른뒤, 숙종이 본인의 잘못을 깨닫고 장옥정을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쫓아냈던 인현왕후를 불러와 다시 왕비로 복권시킨다. 왕비로 복권된 인현왕후는 장희빈의 저주로 인해 오래 살지 못하고 죽는다. 숙종은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린다. 



이렇게 숙종은 요녀에게 빠진 로맨티스트, 장희빈은 요녀, 인현왕후는 현모양처로 그려지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숙종은 재위기간 내내 왕권강화를 위해 조정에 수많은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우리가 국사시간에 배우는 ‘환국’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환국’이란, 대충말하자면 숙종이 서인과 남인으로 갈려있는 신하들에게 권력을 줬다가 뺏는 등 본인의 입맛에 맞게 신하들을 좌지우지 한 것이라고 보면 쉽다. 바로 이때 서인측의 사람이 인현왕후였고(+숙빈 최씨), 남인측의 사람이 장희빈이다. 숙종은 장희빈을 예뻐하며 남인에게 권력을 주고, 서인을 대거 숙청시켰다. 그와 함께 인현왕후는 폐위. 6년 뒤  인현왕후가 복권되면서 서인이 권력을 잡고, 남인이 대거 숙청되었다. 그와 함께 장희빈은 사약. 숙종 사후에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왕이 되긴 하였으나, 이미 서인 세력이 조정을 잡고 있은 뒤였다. 경종은 후사가 없었고, 이복동생인 연잉군에게 왕위를 넘겨주니 그가 바로 영조다. 연잉군은 숙종과 숙빈최씨의 아들이다. 숙빈최씨도 인현왕후와 함께 서인측의 사람이었다. 이후의 역사는 모두가 알다시피 계속해서 서인이 권력을 잡았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인현왕후전』은  어디까지나 서인, 즉 승자의 기록이다. 정말 장희빈이 그토록 악녀였고, 요녀였는지 이 책만으로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뭐, 실록에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긴 하지만, 결국 실록자체도 승자의 기록임으로. 무엇보다 왕실 내의 저주행각이야 뭐 드문일도 아니었고. 아니 그것보다 저주한다고 정말 사람이 죽는 것도 아니.........아, 이건 요즘의 가치관이니 패스!


《인현왕후전》은  《인현성모민시덕행록》과 《인현왕후성덕현행록》 두 본으로 나눌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사건 전개나 내용의 흐름, 문장 표현까지 흡사하다. 다만 《인현왕후성덕현행록》은 인현왕후를 폐출하는 일을 두고 강하게 반발한 ‘박태보’를 자세히 기술해, 작품 전반부에는 내용의 중심이 인현왕후보다 오히려 박태보에 기울어지는 느낌이다. 《인현왕후성모민씨덕행록》은 박태보에 관한 내용이 소략한 대신, 작품 말미에 다시 박태보를 언급함으로써 박태보의 충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 《인현왕후전》을 누가 썼는지 작자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작품을 읽어보면 인현왕후의 측근이 지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거의 모든 학자들이 인현왕후의 궁인이나 혹은 서인의 세력 후예라 추정한다. - 인현왕후전에 관해 中


내가 인현왕후전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초등학생때는 만화책으로 된 인현왕후전을 읽어보았고, 중학생때는 청소년용 인현왕후전을, 고등학생때는 무려 세로쓰기 였던, 그 옛날 울 엄마님이 읽었던 인현왕후전을 읽었더랬다.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대충 내용들은 기억이 나는데, 확실한건 내가 읽었던 모든 인현왕후전에는 수많은 MSG가  첨가되어 있었다는 것! 원문은 이렇게 짧고 간결한 것을...심지어 원문에는 어릴때 읽었던  책에는 없는 내용도 있었다. 바로 인현왕후전에서 충신이라 일컬어지는 박태보 이야기. 세상에, 이번에 읽은 원문 고전 인현왕후전은... 부제로 ‘충신 박태보전’이라 붙여야 할 정도로 박태보에 대한 이야기가 참으로 많았다.


슬프다! 예로부터 충신과 열사로 죽은 이도 많지만 박태보의 충성스러운 절개는 용봉과 비간 이후 으뜸이었다. 아름다운 이름이 세상에 가득해 천추만세 후에도 금석에 새겨 널리 전하게 될 것이니 어찌 죽었다고 하리오마는, 칠십되시는 부모님이 아직도 살아계셨으니 지극히 참혹한 일이었다. 박태보의 죽음을 보고 장안의 선비와 백성 중 울지 않는 이가 없으며, 간신이나 소인배마저도 감탄했다. p 075



아름답다! 박태보의 충성은 고금에 없는지라, 후세 사람들의 본받을 바로다! p 144 (인형왕후전 제일 마지막 문장^^)


분명 책 제목은 인현왕후전인데, 박태보에 대한 이야기를 몇 십페이지. 심지어 책을 끝내는 마지막 문장마저 박태보의 충성. 인현왕후전을 작성한 이가 인현왕후의 궁녀든, 서인세력이든 그 누구든 정말 확실한건, 박태보와 큰 인연이 있는 사람이거나 혈연이거나 둘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마저 든다. 분명 내가 읽은건 인현왕후전인데, 기억에 남는건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 죽은 충신 박태보와 박태보를 잔인하게 고문하는 숙종뿐..^_T



박태보를 빼고 인현왕후전을 논한다면, 뭐 책 처음부터 끝까지 인현왕후는 아주 신비롭고 성스러운 어린시절을 지나 아주 어질고 현숙한 왕비다. 반면에 장희빈은 그저 간사하고 교활하며 약삭빠르고 민첩한 요녀로 묘사된다. 그렇다면 두 여자 사이에서 저울질했던 숙종은 어떻게 묘사될까?


예로부터 위대한 황제와 총명한 군주(왕)라도 한번은 참소를 듣거니와, 숙종대왕의 성스럽고 신령한 덕과 문무를 겸비하신 뛰어난 자질로도 장씨의 유혹에 빠져 이토록 나라의 근본을 어지롭게 하심은 실로 의외였다. p 085



대장공주와 명안공주가 후를 뵙고 한편으로는 슬퍼하고 또 한편으로는 기뻐했다. 그리고 이것이 모두 전하의 은덕이며 중궁의 성덕임을 말하며 즐거워하셨다. 오로지 전하의 은혜를 감사드리며 축원할 뿐 지난 6년 동안의 고초에 대해서는 말씀을 내지 않으시고 모두가 전하께서 총명하신 덕탁에라 말했다. p 099



경자년 6월 초파일 묘시에 전하께서 경희궁 응복전에서 승하하시니, 이때 춘추가 예순셋이었다. 온나라가 망극하였으니, 그 성덕과 큰 도량, 신묘함과 문무를 견비하심이 만대의 뛰어난 군주셨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참소에 속은 군주는 많았으나, 오래지 않아 의혹을 풀고 분명히 깨달으셔서 밝고 환하며 올곧으셨던 분은 숙종대왕께서 역대 제일이셨다. p 141


아주 잠시 잠깐 요녀의 유혹에 빠졌을 뿐, 결국 그 모든것의 잘잘못을 깨달았으니, 밝고 올곧은 역대 제일의 대왕이란다. 애초에 밝고 올곧은, 사리분별이 똑바른 사람이었으면 요녀에 빠질일도 없지않았을까요, 허허. 이거 참. 하지만 뭐 어떡하겠나. 조선은 엄연이 유교국가이고,  왕이 다스리는 나라이며, 왕의 위엄이 굳건해야하니! 근데 숙종으로 인해 수 많은 서인들이 숙청당했으니, 서인 입장에선 이 문제를 어떻게든 집고넘어가야겠고, 근데 그러자니 왕을 상대로 ‘니가 잘못했잖아!’라고 하지는 못하겠고. 결국 그 책임은 오롯이 장희빈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던 것이다.



뭐, 장희빈의 아들이 왕(경종)이 되었다고 한들, 경종은 힘이 없었고 권력은 서인이 잡고 있었으니 장희빈을 악녀로 몰아세우더라도 서인 입장에선 부담이 1도 없기도 했고 말이다. 무엇보다 경종의 후계자는, 경종의 이복동생이자 서인측 사람인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이었으니까.


이때 숙인 최씨가 왕자(훗날  영조)를 탄생하셨는데 이미 세 살이었다. 기상이 비범했으므로 전화와 후께서 매우 사랑하셨다. 후께서 밤낮으로 어루만지며 아끼시기를 마치 친자식처럼 하셨다. p 105


그러니 이렇게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이 훗날 왕이 될 명분까지 만들어주지 않았겠는가. 정말 서인들의 치밀함이란!


서오릉에는 숙종과 숙종을 사랑하고 섬겼던 네 여인이 잠들어 있다. 결혼 뒤  채 2년도 못 살다 간 인경왕후는 남편 숙종을 얼마나 이해하고 사랑했을까? 두 번째 왕비인 인형왕후는?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났을 떄, 숙종은 용포자락을 모두 적실 정도로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고 한다. 숙종은 인현왕후의 혼전앞에 서서 무려 네차례에 걸쳐 직접 지은 제문을 읽으며 통곡했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자신이 죽은 뒤에는 인현왕후와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미리 인현왕후 봉분의 오른쪽을 비워두라 명한다. 그렇다면 인현왕후는 그토록 무섭게 자신을 내쫓아 6년 동안 치욕의 세월을 살게 한 숙종을 깨끗이 용서했을까? 세 번째 왕비로 들어와 전전긍긍하며 남은 세월을 보낸 인원왕후는 어땠을까?



무엇보다 명릉의 건너편, 키 높은 나무들에 앞이 막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대빈묘에 있는 그녀, 장희빈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사약을 거부하는 자신을 모습을 보고, ‘숟가락으로 억지로 입을 벌린 뒤 약을 들이부어라’라고 궁녀들에게 명한 남편을 원망하지 않을까? 그보다, 죽어서까지 숙종과 인현왕후가 함께 있는 모습을 음지에서 지켜보도록 한 후손들에게 서운타 할지도 모른다. -옮긴이 머릿말 中


숙종은 인현왕후와 장희빈, 두 여인에게 휘둘리던 우유부단한 남자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태어나면서 서인과 남인의 예송논쟁으로 골치아파하던 부친 현종을 보고 자라며, 신권이 강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왕권강화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왕이었다. 해서 어린나이에 즉위했음에도 정치오백단이었던 서인의 거두 송시열과 기싸움을 하던, 떡잎부터 다른 노련한 왕이었다. 그런 숙종이 왕권강화의 카드로 내밀었던게 바로 장희빈과 인현왕후, 두 여인을 사이에 두어 서인과 남인사이를 저울질 하는 것이었다. 이후에 추가로 들이민 카드가 연잉군(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였고.



뭐, 지금 관점에서 보면 숙종은 일종의 나쁜남자st일지도. 적어도 이후에 누군가 숙종과 인현왕후, 장희빈의 드라마를 만든다면(+숙빈 최씨), 서인 입장에서 쓴 그토록 뻔한 이야기는 지양했으면 좋겠다(심지어 질려!!!). 오히려 숙종에 포커스를 맞춰서, 그가 왕권강화를 하는 과정에서 궁중 여인들과 서/남인을 저울질 하던 모습을 그리는 것이 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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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8 17: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씨남정기도 한 몫했던거 같아요. ㅎㅎ장희빈을 당파싸움과 숙종의 희생양으로 보기도 하더라고요. 서해문집의 오래된 책방 시리즈 좋은데요 *^^*

피로 2022-03-09 09:35   좋아요 1 | URL
맞아요:) 사씨남정기도 한 몫 했어요 ㅎㅎㅎ
일단 기존의 역사서들이 전부 승자의 기록이다보니, 장희빈만을 악녀로 몰기엔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ㅠㅠ
 
기기묘묘 고양이 한국사 - 오늘 만난 고양이, 어디서 왔을까?
바다루 지음 / 서해문집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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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태교 책은 1년전에 출간된 『기기묘묘 고양이 한국사』. 물론 나는 고양이를 키우진 않지만, 고양이 자체는 꽤 좋아라하는 편이다. 뭐랄까, 고양이는 독립적(?)이면서도, 묘하게 기품있고, 고고해보인달까? 다만 나보고 키우라고 한다면, 그건 또 싫지만 말이다.



과거에 고양이에 대한 세계사 책은 여러번 읽은 적이 있었다. 덕분에 고대문명권에서 고양이는 어떤 존재였는지, 중세 서양에서 고양이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해갔는지에 대한 것도 꽤나 잘 알게 되었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세계사적으로 보는 고양이에 대한 내용이다보니(심지어 저자도 외국인이고), 한국에서는 시대별로 고양이를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우리나라 역사 속의 고양이라고는 숙종이 애지중지한 고양이 ‘금손’의 이야기 정도? 진짜 딱 그정도였다. 그래서 우리나라 역사 속 고양이는 별 다른 이야기가 없는 줄 알았을뿐이고. 하하. 그러다 이 책을 보고나니,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우리나라 역사에서 고양이는 꽤 오랫동안 한국인들 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 지금처럼 ‘반려묘’써의 인식이 생겨나기까지는 꽤 오랜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우리 역사속 고양이를 이야기 하기 위해선, 그 고양이들이 어디서 왔는지, 고양이의 조상은 누구인지 거슬러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이부분은 패스! 대충 동아시아에 남아있던 원시 고양이들은 환경에 맞춰서 진화를 거듭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삵’이다. 가끔 칡(ㅋㅋㅋ)이라고 읽는 경우도 많은, 바로 그 삵! 야생 호랑이, 사자, 표범등이 사라진 지금의 한반도에서 자연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인 ‘삵’이다.


고양이의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극적인 여정을 거치는 동안, 동아시아에 남아있던 또 다른 원시 고양이들은 삵속이라는 새로운 종족으로 진화한다. 지금도 동아시아 일대의 야생에 널리 서식하고 있는 삵은 사막에서 험난한 진화의 고비를 넘은 고양이와 달리 온대기후 지역의 숲에서 살았다. 비교적 생존에 유리한 조건을 차지한 덕분인지, 순탄하게 동아시아의 터줏대감으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다. p 035




그렇게 동아시아에서 살아남은 원시 고양이 중 일부는 삵이 되고, 또 일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고양이로 진화하며 오랜 시간이 흘렀다. 삵과 고양이에 대한 오래된 기록은 아쉽게도 한반도 사료는 없으나, 중국 한나라 저서에서 기록되기 시작했다.


동아시아에 고양이가 들어오기 전까지 살쾡이가 있었다는 사실은 한자의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자로 고양이를 가리키는 ‘猫(묘)’와 삵을 가리키는 ‘狸(리)’가 고대에는 서로 구분된 글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2세기의 한자사전인 《설문해자》는 “묘는 리의 일종”이라 적었고, 3세기의 한자사전인 《광아》도 “리는 묘이다”라고 직설적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는 곧 묘라는 글자 자체가 원래 삵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중국에 고양이가 널리 전파된 뒤에 비로소 삵과 분리되어 고양이를 가리키는 의미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고양이와 삵을 하나의 범주로 보는 시선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고양이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가리(家狸)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p 041



고양이와 살쾡이 사이에서 벌어진 ‘진화의 게임’에서 고양이가 최종적으로 승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세부적인 원인은 다양한데, 거시적으로 봤을 때 가장 먼저 ‘시간’의 문제를 꼽을 수 있다. 살쾡이와 인간의 공존은 기원전 3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서아시아의 고양이들은 그보다 두배 이상 앞선 기원전 7500년경에 이미 인간과의 공생을 시작하고 있었다. 더 오랜시간 인간과 접촉한 고양이는 인간에게 친화적인 방향으로 진화할 시간이 많았다. p 048



중국 남북조 시대의 역사서인 《후한서》에는 한반도 고대국가인 ‘부여’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 기록이 한반도에 사는 고양이(또는 삵)의 최초 기록이다.


아쉽게도 고대 한반도의 사람들이 살쾡이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직접적으로 증언하는 사료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중국의 《후한서》에는 부여의 특산물로 ‘豽(놜)’이라는 동물의 가죽이 나오고, 이 동물은 표범과 비슷하지만 앞발이 없는 짐승이라는 주석이 추가되어 있다. 주지하듯 삵은 가죽의 점박이 무늬가 표범과 비슥하기 때문에 ‘놜’은 바로 삵을 가리킨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앞발이 없다는 주석은 삵이 앞발을 감추고 앉은 자세에서 비롯된 오해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것은 ‘식빵자세’라고 부르는 모습에 대한 가장 오래된 언급일 것이다. p 066


한반도의 고대국가 부여는 고구려보다 더 위에 위치해있는, 지금의 만주지역에 있다. 적어도 중국 2세기 저서에 삵에 대한 언급이 된 것으로 보아, 이미 같은 대륙에 위치했던 부여에 삵이 있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무엇보다 부여의 특산물이 삵이 가죽이라고 하니, 삵은 꽤나 자주 출몰하는 동물이었다. 물론 지금과 같은 반려묘같은 인식이 아니라, 그저 사냥당하는 동물에 불과했지만.



이제 고양이가 어떻게 신라로 들어왔는지 설명 가능할 것 같다. 9세기 전반, 장보고 선단이 이끄는 중국, 신라, 일본인의 교류는 이전까지와 달리 전방위적이고 무제한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에 살던 고양이 일부가 빈번하게 해상을 넘나드는 상선을 잡아타고 신라와 일본으로 자연스럽게 넘어왔을 것이다. 특히 다자이후는 장보고 선단이 일본과 교역하는 창구였으니, 우다 덴노의 일기에 언급된 고양이가 이 다자이후에서 왔다는 말은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또한 신라와 일본의 귀족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물건이라고 하면 가산을 탕진할 정도로 수요가 컸기 때문에 중국에서 온 고양이도 덩달아 큰 사랑을 받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p 074



고양이에 대한 한국 최초의 기록은 김부식이 남긴 “아계부”라는 시다. 아침이 되어도 욹지 않는 닭을 꾸짖은 이 시에는 삵과 고양이가 서로 다른 짐승으로 나뉘어 등장하고 있으며, 고양이는 개와 대구를 이루어 대등한 짐승으로 나열되어 있다. 곧 고양이가 살쾡이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손목과 김부식의 글 가운데 무엇이 더 먼저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두 사람의 기록이 한반도에 살던 고양이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의 언급이라는 점이다. p 077



그러나 김부식의 시는 직접 고양이를 길렀다는 사실이 아니라, 누군가 고양이를 기른것으로 짐작게 하는 방증만을 전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고양이에 대한 한국 최초의 ‘증인’은 될 수 있지만, 그 자신이 ‘집사’는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역사에 분명히 이름을 남긴 한국 최초의 집사는 그보다 한 세기 뒤의 인물인 이규보가 된다. 그가 남긴 글을 모은 《동국이상국집》에는 “검은 아기 고양이를 얻다”라는 시가 실려있는데, 자신이 기르는 고양이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 것이 일품이다. p 079



우리나라 최초의 고양이 기록은 《삼국사기》 편찬으로 유명한, 고려시대 학자 김부식이다. 그가 최초로 고양이를 언급했다. 키웠다는 게 아니라, 단순히 ‘언급’만 한 정도였다. 반면에 고양이를 키웠다는 최초의 기록은 김부식과 같은 고려시대의 문인 이규보의 시에서 나타난다. 적어도 기록상으로 언급된 우리나라 최초의 고양이 집사는 ‘이규보’ 다.


검은 아기 고양이를 얻다 -이규보


가닥가닥 털이 파랗고

동글동굴 눈은 푸르고

모습은 범 새끼 같으며

울음은 사슴을 겁준다

붉은 끈으로 매어 두고

누런 참새로 먹이 주니

발톱 세워 들쑤시다가

꼬리 치며 점차 따르네






외환 -이색


추위 두려워 손님을 돌려보내고

불가에서 고양이와 친하노라니

득실이 서로 절반이어서

중화가 절로 새로워지네


위 시는 고려말 유학자 목은 이색이 지은 시다. 


이색이 1381년 겨울에 지은 이 시에서 고양이는 단순히 쥐 잡는 짐승에 머무르지 않는다. 손님을 돌려보낸 아쉬움과 고양이와 노는 즐거움이 서로 상쇄된다는 표현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이색은 고양이를 인간과 동등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 나아가 고양이와 교감하여 중화, 즉 하늘의 순리에 따르는 마음을 새롭게 빚을 수 있다고 예찬을 한다. 그에게 고양이는 존재 자체로 일상 속에서 기쁨을 주는 친구였던것이다. 이규보와 이제현 같은 앞선 시대의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이색의 관점은 고양이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의 등장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으며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애묘인’이라 부를 만한 수준이다. p 101



고려 말 사대부들의 구심점이었던 이색이 애묘인으로서 보인 모습은 그의 제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짐작된다. 예컨대 이색의 문객을 자처하면서 정몽주나 권근과 가깝게 교류하던 쌍매당 이첨이 집에서 고양이를 몇 마리 길렀는데, 한번은 이 고양이들이 공동으로 새끼에게 젖 먹이는 광경을 보고 시를 지었던 모양이다. 그 시를 읽은 권근은 이첨에게 새끼 가운데 한 마리를 주길 부탁하는 시를 써서 보냈다. 이것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확인되는 고양이 분양 기록이다. p 103


고려 중기 문인인 이규보에 이어서, 목은 이색까지. 고려말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점차 애묘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우리가 사극에서 제일 많이 접하는 시대가 바로 고려말, 즉 여말선초인데...당시 고양이에 대한 기록을 남긴 고려말 학자들은 사극에서 정말 많이 보았던 사람들인데!!! 그들이 애묘인이었을 거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치 못했다. 



이쯤되면 사극에서 목은 이색, 이인임 같은 당대 사람들이 고양이를 쓰다듬거나, 궁디팡팡하는 장면이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노릇이랄까. 당대 기록에 고스란히 남아있으니 말이다.


고려를 지나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고양이에 대한 기록도 점차 들어난다. 심지어 고양이 중성화, 고양이 입양에 대한 기록까지 나타난다. 물론 고양이를 사고파는 사람들이 ‘애묘인’으로써 사고판건지, 아니면 단순히 ‘가축’의 의미로 사고팔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말이다.


이 기록에서(선택요략, 이순지) 우리는 조선 초부터 정묘라는 이름으로 고양이의 중성화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고양이를 거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양이 구매와 고양이 들이기가 서로 구분되어 있어 전자는 ‘매매’이고 후자는 ‘분양’이라 짐작하기 쉽지만, 말과 소도 구매와 들이기가 따로 있는 것으로 미루어 둘은 지금의 ‘계약’과 ‘인수’에 상응하는 단어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거래절차가 있었을 만큼 당시 고양이를 사고파는 일이 활발했던 것이다. 고양이 매매와 중성화의 존재는 고양이를 원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특정한 고양이를 골라 기르고 번식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p 115



조선에서 고양이가 지닌 의미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확대되었다. 재산을 지켜 주는 동물이라는 기본적인 인식에서 재산을 불러오는 동물로, 더 나아가 행운을 가져오는 존자개 되기에 이른 것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 가깝게는 일본의 마네키네코가, 멀리는 유럽의 장화신은 고양이 민담이 이러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p 127



놀라운 사실은 고양이가 재산을 지켜주는 동물이라는 인식이 깔려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런지, 재산이 많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에도 고양이가 많이 돌아다녔다고 한다.




재산을 지켜주는 동물로 추앙받던 고양이지만, 그 반대로 고양이를 이용한 저주행위도 조선에서 왕왕 이루어졌다. 재산을 지켜주는 동물이 저주를 위한 재물로 이용되는 아이러니한 이야기라니.


한국에서 고양이 저주는 광해군 시기 계축옥사의 일환으로 처음 나타난다. 광해군의 이복동생 영창대군이 언급된 역모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영창대군의 보모 덕복, 덕복의 조카 김순복, 다시 그 아들 김응벽이 줄줄이 국문장으로 끌려오게 되었는데, 김응벽이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충격적인 자백을 토해낸 것이다. p 155



다른 미신도 대체로 쥐와 고양이의 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바로 ‘도둑’이라는 말일 것이다. 조선 후기의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고양이를 쪄서 도둑을 저주한다는 속설이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귀신이 된 고양이가 쥐로 비유되는 도둑에게 붙어서 괴롭히길 바란 듯 하다. 여기서 “고양이를 찐다”는 문구가 고양이를 산 채로 가마솥에 넣어서 죽인다는 뜻인지, 아니면 죽은 고양이의 시체를 구해다가 찐다는 뜻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전자라면 고양이 귀신이 도둑보다 자신을 해코지한 사람에게 먼저 달라붙지 않았을까? p 164


심지어 고양이를 이용한 조선판 짝퉁사건(사기극)도 있었다.


성종 25년에 웃지 못할 사건이 일어났다. 지방에서 공납품으로 올라온 삵 가죽 사이에 고양이 가죽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삵의 가죽은 선사시대 인류의 사치품이었고, 조선시대 공납품 목록에 들어갈 만큼 가치 있는 물건이었으나, 고양이 가죽은 그렇지 않았다. 1295년에 고려가 몽골에 바친 물건 가운데 노란색 고양이 가죽이 등장하지만 이것은 일회적인 사건이었을 뿐이다. 서로 비슷한 동물인 삵과 고양이의 가죽이 이토록 가치가 다르다 보니, 지금으로 따지면 ‘조기’를 ‘굴비’로 둔갑시켜 파는 식의 사기가 당시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p 174


한반도 고대국가였던 부여의 특산품의 삵의 가죽이었듯, 조선에서도 삵의 가죽은 사치품으로 인기가 있었나보다. 다만 야생에 사는 삵을 잡기가 어려우니, 고양이 가죽을 삵의 가죽으로 둔갑시키는, 일종의 짝퉁판매가 생겨나곤 했다.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 ‘애묘’를 넘어선, 실학자들의 고양이 관찰에 대한 기록도 보이기 시작한다.


이익의 탐구가 언제나 관찰과 비판에 입각한 것은 아니었다. 이익은 고양이의 눈동자가 묘시(5시~7시)와 유시(17시~19시)에 둥글어지고, 오시(11시~13시)와 자시(23시~1시)에 가늘어진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고양이의 동공은 낮이 되면 감지하는 빚을 조절하기 위해 작아지고, 밤이 되면 최대한 많은 및을 감지하기 위해 커진다. 따라서 깊은 밤인 자시는 고양이의 눈동자가 가늘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장 커지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이익이 그답지 않게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적은 건 밤중에 고양이의 눈을 관찰하기 어려운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일 밤에 고양이를 관찰하더라도 주위에 등불을 켜 두었을 테고, 따라서 고양이의 눈동자는 일정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으리라. p 189


물론 지금처럼 과학적인 관찰까지는 어려웠겠지만, 당대에서는 고양이 눈동자 파악에 대한 획기적인 성과였을 것이다.



거기다 고양이가 사랑해 마지않는 캣닢에 대한 기록까지 있다. 특히 이 캣닙에 대한 기록은 조선을 훌쩍 지나 1100년, 우리 역사로 따지면 고려 초정도의 시기에 중국 송나라의 기록에서 발견된다.


흥미로운 점은 동아시아 사람들이 이미 오랫전부터 개박하(캣닢)의 효과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100년경, 송나라의 한자사전인 《비아》에서 처음으로 “박하가 고양이를 취하게 한다”라는 말이 등장하고, 이 정보는 반세기 뒤에 일상생활의 각종 지식을 모은 《분문쇄쇄록》에 다시 한번 수록되었다. 조선사람들도 이 책을 읽으면서 고양이의 특별한 개박하 사랑(?)을 알게 되었다. 조선 의학을 대표하는 《동의보감》과 그보다 앞서 편찬된 《의침촬요》는 모두 이 책을 근거로 “고양이가 박하를 먹으면 취한다”라고 기록한다. p 194


고양이가 캣닙을 좋아한다는건 비교적 근대에 들어와 확인된 거라 생각했던 내 편견을 반성한다^_T...


묘마마라는 말은 ‘고양이 마님’ 또는 ‘고양이 엄마’ 정도의 뜻이어서 지금의 캣맘이라는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 실제로 묘마마가 돌본 이 고양이들은 그녀가 집안에서 키운 것이 아니라 도시의 밤거리를 자유롭게 떠돌던 길고양이였다. 이 점은 묘마마의 죽음으 ㄹ애도한 고양이가 집 안에서 밖을 향해 떠난 것이 아니라 집 밖에서 떠났다는 문구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조선의 가옥은 완벽히 닫힌 공간이 아니었으니, 묘나나는 자신이 사는 곳에 찾아온 길고양이를 융숭히 대접하고 고양이들은 집 안팎을 넘나들면서 그녀와 살았을 것이다. 묘마마의 이야기는 고양이 애호 문화가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모습과 함께 고양이로 넘쳐 나던 도시 풍경을 상상하게 한다. p 240


더 충격적인건.............캣맘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와 이건 좀 충격. 여튼 이렇게 이땅에서 아주 오랜시간 사랑받던 고양이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불과 몇십년전만에도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고양이를 요물로 보고, 가까이오면 멀리 내치고 그랬을까? 내 어릴적 기억속에 있는 할머니들도 고양이를 좋게 보지 않았고 말이다.



고양이, 골칫거리가 되다.


조선의 모든 사람들이 고양이를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고양이를 교정하려 했던 박인의 글에 묘사되는 것 처럼 “닭을 잡아다가 뜯어먹는” 고양이는 때론 “집안사람들이 괴로워하며 회초리로 등을 때리는” 동물이었던 것이다. 《성호사설》을 비롯한 여러 글에도 사람들이 도둑고양이를 잡아 죽이려 했다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녀석들에 대한 적의는 몇몇 사람에 국한되지 않았다. p 262


하긴 현대에도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조선이라고 오죽했을까. 나만해도 랜선으로 고양이를 보는 것은 좋아하지만, 내 눈앞에 고양이가 있는건 딱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니 말이다. 옛날엔 눈 앞에 고양이가 있으면 눈맞춤도 하고 그랬는데 하. 그런데..그도 그럴것이...‘캣맘’ 때문이라고 해야할까? 어쩌다 한두마리 길고양이가 보이는게 아니라, 캣맘들이 지네집도 아닌 공간에 길고양이들 밥준다고 고양이를 불러 모으면서 시작된 것 같다.



어느새 고양이 천국이 되고, 밤마다 고양이 울부짓고, 특히 고양이 짝찟기 철엔 와.. 그 소음이 소음이 진짜. 그뿐만이 아니다. 캣맘들이 방방곡곡에 있는 길고양이들을 불러모은 덕택에, 겨울마다 내 차 속에 고양이가 들어가진 않았을까 걱정꺼리도 한가득. 아니, 정말 길고양이 밥챙겨주는건 좋은데, 그럴거면 지네집앞에서 해야지 왜 공적인 공간에서 그러는걸까? 심지어 남의 집앞에서도 그러고. 신축아파트에 살면 좀 나아지겠거니 했는데, 왠걸? 맘같아서는 면상을 보고싶은 캣맘이,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고양이밥그릇, 물그릇을 가져다놓았다. 내참, 길고양이 챙기는 것도 상식선에서 챙겨야지. 휴.



결국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일부 몰상식한 인간들이 고양이를 사랑한다는 핑계로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어서 그런게 아닐까. 개를 싫어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이유도, 역시나 일부 몰상식한 개주인때문이고. 정말 개든 고양이든 사랑하는건 좋은데, 제발 상식선에서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조선 후기 고양이를 배척하는 현상이 두드러진 것은 단순히 개체 수가 증가해서만이 아니었다. 인구가 밀집되며 도시라는 하나의 거대한 소비 주체가 등장한 뒤 창고의 쌀을 갉아먹는 쥐의 심각성도, 그 쥐를 잡아 주는 고양이에게 느끼는 고마움의 크기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쌀이 귀중한 노동의 산물이자 생계였던 농촌에서와 달리 도시에서 쌀이란 돈을 주고 사면 그만인 상품이었다. p 268



여러 요소가 중첩되면서 고양이는 한때 누군가의 사랑을 받은 사실조차 잊혀진 채 사람들 곁에서 점차 사라져갔다. 심지어 개항기에 이르면 단순한 도둑을 넘어 요물이자 괴물로까지 인식되었고, 한 시대를 풍미하던 고양이 사랑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된다. p 270


흠흠.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캣맘으로 인해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현대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일이니, 이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고양이를 싫어하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결국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고양이를 싫어하게 된 이유는 사회가 발전함에 따른 부작용이었다. 본디 고양이는 농촌에서 쌀을 갉아먹는 쥐를 잡기 위해 들여오기 시작한 동물이다. 헌데 도시화로 인해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농촌이 점점 쇠퇴했다. 반면에 도시화로 인한 상공업이 발달하며, 쌀을 돈주고 사먹는 시대가 왔다. 힘들게 농사지어서 쌀을 얻는게 아닌, 손쉽게 돈으로 쌀을 사는 시대. 그런 시대가 되니 쌀을 갉아먹는 쥐가 있더라도, 굳이 힘들게 쥐를 잡는대신 쌀을 다시 사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고양이가 필요 없어졌다는 뭐 그런 이야기랄까.



참 다행인 사실은 우리 역사속의 고양이는 서양에 비하면 잔혹한 참상은 없었다는 사실이다.(ex 마녀사냥;고양이는 마녀의 종). 다만 서양처럼 시대에 따라 고양이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좋은 가죽을 얻기위한 일종의 사냥동물에서, 농사를 망치는 쥐를 잡기위한 보안책으로, 이후 무료함을 다스리기 위한 반려동물의 위치까지 올랐다가, 도시화로 인해 다시 냉대받는 위해동물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고양이는 역사상 수많은 집사들에게 사랑을 받고 또 한편으로는 엄청한 혐오를 받고 있기도 한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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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7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는 강아지와 또 다른 매력이 있는 듯 합니다 ㅎㅎ 저도 강아지를 키우지만, 유투브론 고양이를 보는 랜선 집사랍니다 ~
 
병자호란 - 그냥 지는 전쟁은 없다 임용한의 시간순삭 전쟁사 1
임용한.조현영 지음 / 레드리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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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개인적으로 임용한 교수님을 늠나 좋아하는지라, 토크멘터리 전쟁사가 폐지되었을 때 얼마나 화가 나던지! 더군다나 토전사 폐지 이유가 마땅치 않았고, 폐지될까 전전긍긍했던 전 정권도 아닌 현 정권에서 폐지된 것이 정말 어이가 없었더랬다. 토전사는 전 세계의 전쟁사를 돌아보면서 ‘리더’의 중요성을 이야기 한 것 밖에 없는데 말이다. 아, 다시 생각해도 빡치네!!! 토전사를 그렇게 폐지해놓고 매주 주말 마다 토전사 재방 틀어놓는 국방TV 진짜-_-... 뿡이다. 흠흠.




이 책은 조선을 유린했던 두개의 전쟁 중 하나인 #병자호란 에 대한 이야기다(나머지 하나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은 드라마나 영화로도 자주 다뤄졌던 이야기인지라, 행여나 주제가 새롭지 않다고 이 책을 외면하는 독자들이 있을까 걱정이다. 이 책은 그저 ‘병자호란’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게 아니다. 당시의 시대상을 비롯하여,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당대 역사서에서는 병자호란을 어떻게 서술했는지, 전쟁 상황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전쟁 준비가 되있긴 했던 것인지…. 거기다 제일 중요한, 당시 조선의 리더였던 ‘인조’는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하나하나 조목조목 이야기한다. 



이 책의 성격을 말하자면, 뭐라고해야할까? 대충 임진왜란 이후 류성룡이 집필했던 《징비록》을 떠올리면 좋을 것 같다. 류성룡이 《징비록》을 집필했던 이유는, 더 이상 임진왜란 같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해서, 훗날 환란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슬프게도 이 《징비록》은 조선에서는 널리 읽히지 못했고, 임진왜란이 끝난지 채 50년도 안되서 병자호란이 일어났지만 말이다. 이후로도 외침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반복되는 슬픔을 겪기도 했다.



비록 지금은 조선같은 왕정시대가 아닌, 공화정시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는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임진왜란 이후 《징비록》이 널리 읽히지 않아, 동일한 이유로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 처럼 말이다. 그때만큼이나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더하면 더했지 과거보다 더 빠르게 세계 정세가 돌아가고 있다. 해서 한 나라를 대표하는 리더(대통령)의 자질과 사상, 행동력 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심지어 곧 있으면 대선이 코앞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리더를, 우리 손으로 뽑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작금의 대선후보들 행태를 보면 역대급 비호감에, 정책은 사라졌고, 네거티브 천국이지만.



여튼 그나마라도 제대로 된 리더를 가리기 위해서, 우리는 이 책을 읽고 깨달아야 한다. 어떠한 리더가 국민에게 좋은 리더인지를.




임진왜란/정유재란 이후 약 40년간 조선은 더욱 망가져갔다.


신충일이 묘사한 퍼알라의 모습은 무지에 기반했기에 문명권과 거리가 먼 후진국의 모습이다. 거칠고 야성적인 모습이야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을테고, 거칠고 투박한 것이야 야만인에게는 정상적인 모습 아닌가. 문제는 신충일의 보고에는 여진군에 대한 공포가 없었다는 점이다. 


“소수 부족이 좀 강하다 한들 글을 하는 자도 없는 저들의 문명 수준을 보건대 약탈 집단에 불과하며, 공격을 한다고해도 마을을 휩쓸고 분탕질을 할 뿐이지 광범위한 영토를 정복할 수는 없다. 무장수준도 조선이 여진 정벌을 감행했던 15세기에서 달라지지 않았다. 저들은 아직 화포도 없지 않은가?” p 035



명은 14만 대군이 요동으로 모여들고 있으며, 더 많은 병사가 오고 있다고 허풍을 쳤지만 광해군은 믿지 않았다. 또한 광해군은 임진왜란의 경험 덕분인지 명군과 누르하치 전력에 대해 비교적 정확히 예측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조선의 군사력이었다. 광해군은 말했다. 


“조선 군대가 형편없다는 사실은 온 천하가 다 안다.”


조선군의 문제점은 야전과 공격 능력이었다. 수비는 곧잘 하는데 공격이 안 됐고, 더 큰 문제는 원정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공격은 고사하고 수비, 이동, 보급 등 모든 것에 대한 준비가 전무했다. p 045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정권에서는 당시 세력이 커지던 여진족 누르하치를 만나고 돌아왔다. 하지만 여진족을 만나고 돌아온 신충일은, 불과 십년도 채 지나기 전 일본에 다녀왔던 조선의 사신단과 다를바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보고 얕보았던 조선은 그렇게 임진왜란을 맞이했다. 그렇게 임진왜란/정유재란이 끝난 뒤, 이번엔 여진족으로 갔던 조선의 사신들은 일본에 갔던 그때처럼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무시했다. 조선의 국방력이 튼튼해서 여진족을 무시한거라면 다행이겠지만, 그 역시도 아니었다.



7년간의 전쟁이 끝난지 오래 지나지 않았고,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 7년간의 전쟁에서 배운 것이 없었다. 류성룡이나 허균같은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곤 말이다. 하지만 권력은 언제나 소수가 아닌 다수에 있다. 당시 왕이었던 광해군 조차도 조선의 군대가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개혁할 수 없었다. 광해군이 아무리 왕이었고 북인의 힘을 믿고 있었다 한들, 전체적인 권력은 서인들이 쥐고 있었다. 무엇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7년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해도, 조선은 2백년간의 평화에 젖어있어서 ‘국방력 강화’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선의 건국은 분명 이성계라는 걸출한 무장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건국 후 이백년간 조선은 무신을 무시하고 문신을 우대하였다. 점점 무신들의 자리는 줄어들었고, 그에 따른 국방력도 약화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양반들은 군역을 피하기 위해 여러 편법을 동원했다. 과거를 준비하는 유생은 군역이 면제되기에, 평생 과거를 준비한다는 미명하게 군역을 회피했다. 노비들도 군역이 면제되기에, 가짜 노비행세를 하는 양반들도 허다했다. 무엇보다, 전쟁 시 군인들을 이끄는 지휘관이 평생 군인생활을 했던 무신이 아닌, 글자만 주구장창 읽는 문신들이었으니 말 다했다. 



이후 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쫓겨나고, 능양군이 왕이되었으니 그가 바로 인조다. 그나마 다행인건 인조 재위기에 ‘국방력 강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권력에 가까웠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서인계열 인사들은 3년 전에 사망한 남한산성 수축과 수어청 건립의 공로자 이귀에게 찬사를 보냈다. 최초로 남한산성의 가치를 발견하고, 중부지방의 거점으로 삼자고 건의한 이는 강골형 무인 이서였다.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인 이귀가 이서의 건의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두 사람은 강단있게 밀어붙였지만, 산성 축조 과정에서는 별의별 말이 다 돌았다. 그 뒷담화의 주도자들이 산성에 피란해 전쟁을 치르게 된 것이다. p 185


반정공신이었던 이귀, 그는 ‘국방력 강화’를 위해 수 많은 서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에 전쟁에 대비해 물자를 비축하고, 수어청의 병사들도 엄선해 선발했다. 이귀는 죽기전까지 남한산성 강화에 힘을 쏟았다. 그가 이렇게까지 남한산성에 대대적인 전쟁준비를 해두었던 건, 그가 임진왜란을 경험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군인들이 얼마나 오합지졸이었는지, 군 지휘체계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슬픈 사실은 권력을 잡고 있던 공신세력 중에는 이귀 같은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김류뿐 아니라 비변사 대신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전란을 두 번이나 겪고, 수십 년간 ‘전쟁준비’를 한 나라인가? 훈련도감, 어영청, 수어청 같은 군영 설치, 직업군인 양성, 화기와 화약 개발, 남한산성 축성, 속오군, 영장제-. 단어만 나열하면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군사제도는 획기적으로 변했다. 그러나 막상 열어보니 속 빈 강정이었다. 누구의 잘못일까? 문제를 알면서도 비변사 대신들이 국왕과 정치인의 눈치를 보느라 방치한 것일까? 그냥 총체적인 무능일까? 누구도 단 한마디의 언급을 남기지 않았다. p 197



이 나라의 전쟁은 40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바뀐 건 조총 뿐이다. 군복은 커녕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병사들, 불안감에 병사들만 들쑤시고 다니는 장교들, 모두가 아마추어인 장병들…. p 288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세력들 태반은 임진왜란을 겪었던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징비를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당시 왕이었던 선조를 비롯하여 조선의 사대부들은 오히려 ‘명’에 대한 사대를 강화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아픈 역사는 결국 40년만에 반복되고 만다.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인조는 3월 3일 후금의 사신과 함께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동맹의식을 거행하고 후금과 조선이 형과 아우가 된다는 맹약을 한다. 유일한 성과라면 후금이 명과 단절하라는 조건을 철회한 것이다. p 079


청나라, 그러니까 후금이 조선으로 처들어온 건 두 번이었다. 첫번째가 정묘호란, 두번째가 병자호란이다. 두 호란 사이에는 약 9년 정도의 시차가 있다. 정묘호란 당시 조선은 후금에 패배했으며,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후금 입장에선 최대한 양보한 것이었고, 실제로 조선에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만약 당시 정세를 제대로 읽을 줄 알았더라면,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인조는 정세를 읽지 못했다. 후금에 아주 제대로 뒤통수를 가격했다. 스스로 재앙을 초래한 것이다.


“조선의 왕이 내가 신의를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무슨 소리인가? 나는 정묘호란 때 맺은 약속을 지켰다. 오히려 조선에 은혜를 베풀었다. 그런데도 나를 비난하다니 어이가 없다. 그러나 좋다. 교역을 끊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라. 그건 당신들의 자유이고 선택이다. 난 아쉬울 것 없다.”



척화파는 이런 논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정의라면 반드시 상대에게 강요해야 하고, 몸에 좋은 음식은 상대방이 싫어하더라도 강제로 먹여야 한다. 그게 성리학의 정의관이고, 사대부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판단하다 보니 척화파는 당시 홍타이지의 답변을 허세가 들통난 것으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세개 나가니 저들도 꼼짝 못한다고 보았다. p 105


후금의 홍타이지는 황당했을 것이다. 군사력도 얼마 안되는 나라가, 갑자기 뒤통수를 쳐대니 말이다. 하지만 후금 입장에서는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최우선 목표는 명나라를 쳐부수는 것이였고, 조선은 후금을 칠 힘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오히려 당황한건 조선의 사대부들, 정확히는 척화론자였다. 무릇 조선의 양반들은 본인들과 논리가 다르면, 무슨일을 쓰더라도 본인들의 말을 이해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싸웠다. 그렇게 싸우고 싸우다가 상대방이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사문난적으로 매도하던게 조선의 사대부들이었다. 특히 이들은 정묘호란 패전 이유를, 명분론만 외치던 자신들에게선 찾지 않고 외려 주화론자들 때문에 민심이 분열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당시 인조는 비변사에 이런 비장한 메세지를 보냈다.


“이기도 지는 것은 병가의 상사이다. 금의 병사들이 강하긴 하지만 싸울 때 마다 반드시 이기지는 못할 것이며 (……) 만약 오랑캐가 침략해오면 과인이 오랑캐의 앞길에 진주하여 장사를 격려하고 평안도에 사는 군인과 백성을 위로하겠노라” p 103



인조도 뒤따라 즉시 출발하려고 하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 사복시(궁중의 가마와 말을 관장하는 관청) 마구간에 말은 있는데, 말 고삐를 잡아줄 하인인 말구종이 모조리 사라져버린 것이다. 조선은 체면이 중요한 양반사회였다. 말구종을 구하지 못한 인조는 정오까지도 출발하지 못했다. 보다 못핸 대신 하나가 간신히 사간원의 하인 2명을 데리고 와서 말고삐를 잡게 했다. p 175


결국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인조는 또 도망갔다. 겉으로는 본인이 앞장서 나서겠다고 하던 사람이다. 그렇게 인조는 재위기간 중 무려 세 번이나 궁을 버린 임금이 되었다(첫번째 이괄의 난/공주, 두번째 정묘호란/강화, 세번째 병자호란/남한산성). 선조도 고종도 궁을 한 번밖에 버리지 않았는데, 인조는 무려 세 번이다. 세 번을 모두 궁을 버렸다. 궁을 버렸다는 건, 백성들을 버리고 오롯이 본인의 안위만을 걱정하여 도망갔다는 말과 같다.



그나마도 병자호란 당시 인조의 피난길에 웃지못할 이야기가 있었다. 인조는 세자를 비롯한 다른 왕실사람들을 먼저 강화로 피난보냈다. 본인도 뒤따라 강화로 가려고 했으나, 말 고삐를 잡아줄 하인이 없어서 (^^) 피난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강화로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후문이다.



그 때, 조선에 리더는 없었다.


인조는 책임져야 할 일은 책임지는 리더였다. 일반적인 행정에 관해서는 그랬다. 하지만 조금만 수위가 높아지면, 절대로 책임지려 하지 않았고 결정도 회피했다. p 205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화의를 하든 전투를 하든 전하가 결정을 내리셔야지요. 전하가 이러시니 관료들이 별것도 아닌 일까지 전부 결재를 받는다고 찾아옵니다. 매사가 의논만 하다가 끝나고, 장수들은 매일 날씨 핑계를 대고, 국가의 중대사와 군사비밀을 하인과 심부름꾼까지 다 알고 있습니다.”


정곡을 찌른 비판이었지만 인조는 화를 내지 않았다. 인조의 대답은 기록이 없다. 회의가 끝나고 신하들이 모두 물러갔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p 269



조선 왕이 여진족 왕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 충격은 이해가 가지만 책임 있는 리더라면 항복 협상 중 산성에 있는 군인과 백성의 철수 문제를 논의했어야 했다. 명분 논쟁만 하다 이 문제가 쏙 빠졌다. 질서정연하게 산성으로 들어와 남문을 사수했던 수원 병사들은 성을 나서자마자 절반이 청군의 포로가 되었다. p 358


모름지기 한 나라의 임금은, 그 나라를 대표하는 리더다. 신하들이 의견을 달리하면,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야한다. 또한 국제정세에 항시 눈과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공과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하고, 책임질 때는 책임질 줄 알아야하고, 치하를 할땐 해야한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당시 조선에는 그런 리더가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그런 리더가 없어서 왜놈들에게 국토가 유린되었는데, 불과 40년도 안되어 같은 이유로 되놈들에게 국토가 유린되었다. 인조는 할아버지 선조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았고, 그 댓가는 백성들이 짊어지게 되었다.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가 중시한 건 ‘명분’이었다. 그 명분으로 본인이 왕의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무늬만 명분이다. 인조가 중시한 명분은 입맛에 따라 달랐다. 뿐만이 아니다. 정치를 하기 위해선, 다른 정치가들과 기싸움을 할 수 있는 노련한 정치감각이 있어야 한다. 때로는 누군가를 믿어야하고, 때로는 누군가를 내쳐야한다. 하지만 인조는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역시나 반정으로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반정이란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서 왕을 갈아치우는 일인데, 본인이 왕이 된 이유가 그 신하들 덕분이었다. 허나 그 신하들이 언제 자기의 뒤통수를 칠 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해서 믿어야할 사람을 믿지 않았고, 믿지 말아야 할 사람을 믿었다. 적어도 임진왜란 당시 선조 주변엔 인재들이 있었고, 이유야 어찌되었든 선조는 그 인재를 선택하는 안목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인조는 인재를 보는 눈 마저도 없었다.



그 결과가 정묘호란, 병자호란, 아들인 소현세자의 죽음, 손자인 석철/석린의 죽음, 며느리 강빈의 죽음이었다.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은 인조였다. 




백성은 안중에도 없었던, 명분론에 함몰된 척화파


조선의 리더였던 인조만 문제인 것은 아니었다. 인조 주변을 둘러싼 척화파 역시 부패할대로 부패한 암세포였다. 


홍타이지가 거의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명의 망조, 천명이 명을 떠나 후금으로 왔다는 의견에 대해서 조선은 시치미로 일관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편지에 대놓고 쓰지는 못했지만 척화파의 논리는 한결 같았다. 부모가 범죄자에 주정꾼이라 해도 부모는 부모다. 자식은 자식의 도리를 다할뿐이다. (……) 이후 후금은 국호를 바꾸고 홍타이지는 황제가 된다. 그리고 홍타이지는 조선 침공을 결정한다. p 142



《산성일기》는 이 패전으로 정부에 대한 불신이 쌓여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고, 이것이 삼전도의 비극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의 절반은 왜곡이다. 병사들은 이 패전의 원인이 아마추어 제갈량들에게 있으며 그들 대부분이 척화파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군사작전에 정치가 개입하면 없던 사단도 벌어진다는 것이 만고의 진리인데, 근절하기가 어렵다. p 280



김상헌이 냉철한 반격을 하자, 인조의 사위로 대표적인 척화파였던 신의성까지 뛰어들어 분위기를 망친다.


“비단과 금은보화를 줄 수도 있고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황제로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p 323


척화파는 정묘호란 때부터 주구장창 ‘명분’을 주장했다. 황제국은 오로지 명나라 하나 뿐이며, 조선은 명을 배신하면 안된다는 논리였다. 결국 그들은 입으로만 싸웠다. 백성들이 후금 군화에 짓밟혀도 그들은 끝까지 ‘대명의리’를 주장하며, 후금과 싸우기를 주창했다. 



이쯤되면 궁금하다. 척화파라고 할지언정 그들은 분명 유학을 배운 성리학자다. 유학은 모름지기 인본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백성들의 죽음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 잘난 ‘명나라를 향한 사대’를 위해서. 이쯤되면 그들이 정말 유학자가 맞는것인가? 백성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주기 위한 공맹의 말은 그렇게 소리없이 허공에 흩어지고 있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성리학은 그저 본인들 입맛에 맞게,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에 그쳤다는 이야기다.


척화파에게 주화파는 추구하는 정책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양심과 정의감이 결여되고 무능력을 넘어 질서를 파괴하는 악의 축이었다. 독전어사들이 손에 손잡고 성벽에 올라 참견을 하고, 무장과 다투고, 매일같이 왕에게 달려가 제갈량 흉내를 낸 데에는 공신 그룹과 주화파에 대한 음모론적 불신이 가득했던 탓도 있었다. p 366


임진왜란 전, 일본에 사신으로 갔었던 (동인)학봉 김성일과 (서인)우송당 황윤길. 이유야 어찌되었든 동인 김성일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보고하였고, 서인 황윤길은 전쟁이 일어날거라고 보고하였다. 결과론적으로 서인 황윤길의 말대로 전쟁이 일어났다. 그때 허위보고를 한 김성일은 본인의 발언에 대한 책임을 다했다. 그는 1차 진주대첩을 진두지위하였다. 그렇게 죽을때까지 앞장서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사망했다. 



이후 40년도 채 지나지않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할거라던 서인세력은 광해군 재위기에도 끝까지 권력을 잡았고, 광해가 본인들의 입맛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능양군을 끌여들어 반정에 성공하여 능양군을 왕위에 올렸다. 그가 인조다. 반정공신이 된 서인들중 강경파들이 대거 척화론자였다. 척화론과 반대로 청과 화친을 하여, 안정을 도모하길 이야기했던 주화론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주화론자들은 인조를 포함한 대다수 척화론자의 명분론에 이길수가 없었다. 결국 전쟁은 터졌고, 조선은 유린되었다. 



그렇다면 병자호란 발발 후 척화론자들은 학봉 김성일처럼 본인들의 발언에 대한 책임을 다했을까? 슬프게도 아니었다. 그들은 병자호란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명분론’을 내세우기 바빴다. 그렇게 입싸움으로 질질 끌다가 조선은 항복했다. 



병자호란, 그 후 북벌과 명에 대한 사대 그리고 정신승리


인조는 임시궁에서, 병사들은 성벽에서, 충청사단의 병사들은 차디찬 땅속에서 1637년 신년을 맞았다. 행궁에서는 늘 하던대로 망궐례를 올렸다. 명 황제를 향해 예를 올린 것이다. 명이 구원병을 보내준다거나 하는 기대는 아예 접었지만 그래도 망궐례는 했다. p 315


인조가 청에게 항복하기 바로 직전, 인조는 행궁에서 명나라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이 때의 명나라는 이미 망해가던 나라였다. 명나라의 황제는 허수아비였고, 실권은 환관들이 쥐고있었던, 망국행 급행열차를 타고 있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인조를 비롯한 사대부들은 끊임없이, 본인들이 모신 황제국 명나라를 울부짖었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홍타이지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었다(삼배고구두례). 그렇게 조선은 후금, 아니 청나라에 무릎을 꿇었다. 누가봐도 예견된 결과였다. 문제는 그 이후다. 


실제로 조선은 날이 갈수록 명분론이 강해졌다. 공식문서에는 청의 연호를 사용했지만, 사적 문서, 묘비 등에는 명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을 계속 사용했다. 명의 연호는 1644년 숭정 17년으로 끝나는데, 조선에서는 그 다음 해를 숭정 후 원년으로 삼았다. 새로운 연호를 창조한 것이다. 이런 태도는 나중에 거의 종교적 근본주의처럼 된다. 예전에 필자는 조선 후기 사대부가 바위에 쓴 낙서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은 자신을 대명의 유민이라고 적어놓았다. p 368


그렇게 대패한 전쟁을 두고, 인조와 사대부들은 나라를 개혁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징비를 외치던 류성룡같은 인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정신승리의 끝을 달리기 시작했다. 실력으로는 청나라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속으로 욕하기 시작했다.



그뿐이 아니다. 창덕궁 으슥한 곳에 명나라 황제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단, ‘대보단’을 건립했다. 청나라에 걸리면 끝장이기에, 정말로 찾기 어렵게 궁궐 저 으슥한 곳에 건립한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도 명나라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단을 설립했다. 지금의 충청도 괴산에 위치한 ‘만동묘’가 그것이다. 심지어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신들이 죽을 때 세우는 비석의 첫머리를 ‘有明朝鮮國(유명조선국)’으로 시작했다. 뜻을 그대로 풀이하자면 이렇다. ‘명나라의 신하 조선’, ‘명나라에 속한 조선’이라는 뜻이다. 



인조를 시작으로 조선의 왕들과, 조선이 망할때까지 권력을 놓지 않던 서인들은 그렇게 겉으로는 청에게 조아리면서, 속으로는 이미 망한 나라 명에 대한 사대주의를 공고히 해나갔다. 그들이 명에 대한 사대에 공을 들이던 그 오랜 시간동안, 그들에게 조선의 백성은 안중에도 없었다.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의 이야기는 그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리더의 자질이 없는 사람이 리더가 될 경우, 나라가 어떻게 망가지는지, 국민들의 삶이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과거와 달리 현대는 리더를 우리의 손으로 뽑을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 손으로 뽑는 리더라고 전부 올바른 리더일 수는 없다. 현재 대한민국의 대선 방식은 ‘최선’을 뽑는 것이 아닌, ‘차악’을 뽑는 방식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악보단 차악을 선택해야하는 우리로써는 그나마 나은 리더가 누구인지 고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잘못된 리더들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알아야하고, 거기서 배워야한다. 서애 류성룡이 《징비록》을 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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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2-28 1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토크멘터리 좋아하는 일인입니다. 아쉽죠. 도대체 왜?! 황금알을 낳은 거위를 죽여버린걸까요. ~ 선조 인조. 신하도 버리고 백성도 버리고 ㅠㅠ전 전쟁후에 자기 결혼부터 챙긴 선조가 쪼금 더 한 수 위가 아닐까 합니다. ㅠㅠ 피로님 말씀처럼 그 때 조선엔 리더가 없었던 거 같아요 ~
 
흔들림 없는 역사인식 - 조선인 강제 연행·원폭 피해자의 편에 서다
다카자네 야스노리 지음, 전은옥 옮김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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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일본인이다. 하지만 그의 삶과 모든 시간은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조선인과 중국인 피해자들을 위해 사용했다. 일본인인 그는 일본의 식민지배의 피해를 당한 그들을 위해, 자국 일본과 맞섰다.

이 책은 내가 서평을 쓰는 것보다, 저자의 한마디 한마디를 옮겨적는게 나을 것 같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물리적 피해는 똑같을지라도, 조선인의 피폭은 (일본인의 그것과) 질적인 차원에서 다르다”고 지적한 바 있따. 여기서 “질적인 차이”란 “일본인 피폭자는 침략전쟁을 자행한 국가의 국민이라는 입장을 비껴갈 수 없지만, 조선인 피폭자는 아무런 전쟁책임도 없는데 원폭 지옥에까지 내던져진 완전한 피해자다”라는 오카 씨의 말 속에 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p 019

일본의 근대사를 둘러싼 역사 인식이 문제가 된 지 오래다. 최대 논점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있따고 할 수 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의 대립으로 볼 수 있는데, 사실의 검증과 교육을 중시하는 사고방식 대 사실 검증에는 관심이 희박한 채 근대를 미화, 정당화하는 데 중점을 둔 입장이다. 전자는 후자를 역사 왜곡이라 비판하고, 후자는 전자를 자학사관이라 비판한다. 이러한 대립은 역사교육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교과서 검정 과정에서 전자는 점차 축소되고 후자 쪽이 증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과서에 따라 강도의 차이는 있으나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교육함으로써 현대를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역사교육이 약화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런 흐름은 제2차 아베정권에 의해 한층 강화되고 있다. p 035

역사윤리란 ‘역사에 책임을 지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역사 용어로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개념으로서는 전혀 드물지 않다. 역사상 자주 볼 수 있고 국제 관계에서 많은 국가가 역사윤리의 과업을 다해왔다. (……)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인간의 길’에 어긋나는 행위가 없었는지를 따져보고, 만일 있다면 반성하고 사죄와 배상, 처벌 드으이 과정을 통해 청산할 의무가 발생한다. 또 항상 이 ‘역사윤리’를 의식하며 정치와 사법에 임해야 한다는 뜻도 포함한다. p 036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의 책임을 묻는 이른바 전후 보상문제에 대하여, 일본 정부는 국가 간의 ‘해결’이 끝났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완전히 무시했다. 하지만 ‘해결이 끝난 문제’라는 일본 정부의 주장은 핑계에 불과하다.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고, 국가 간에도 배상을 한 것이 아니라 한일 경제협력협정을 맺고 청구권을 방기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피해자의 배상 청구를 모조리 거부했다. 그런 까닭에 배상 청구는 사법의 장에서 다툴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사법 역시 하급심에서 드물게 원고가 승소하는 일은 있어도 최고재판소에서는 전부 패소 확정을 강요받았다. 사법이 정치권력을 추종하는 소위 어용 기관이 된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p 040

과거 재일동포의 피해배상을 위해 목소리를 내었어야할 한국 정부가 입을 닫고있을 그 때, 일본인 다카자네 야스노리는 재일동포의 피해배상을 위해 자국 일본을 향해 끝없이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우리 정부는 재일동포의 피해배상을 위해서 일본에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적어도 국정농단이 있던 전 정부는 그렇지 못했다. 그렇다면 곧 임기가 끝나는 현 정부는? 글쎄, 역시나 전 정부와 다를바가 없다고 느껴진다. 난 아직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농락한 윤미향을 감싼 현 정부를 믿을 수 없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거의 다 돌아가시고, 강제징용 피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거의 다 돌아가시는 동안 현정부, 전정부를 비롯한 대한민국 정부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걸까. 더 슬픈건 곧 들어서게될 새 정부에도 큰 기대감이 없다는 사실이다. 현재 대선 후보들의 면면을 보아하니, 적어도 그들은... 일본에 피해를 입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위해 무언가를 할 인물들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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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배우는 조선 왕실의 신화 한빛비즈 교양툰 15
우용곡 지음, 전인혁 감수 / 한빛비즈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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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 있는 역사만화책이라곤 박시백 화백의 조선왕조실록 세트랑 35년(일제강점기) 세트밖에 없었는데, 이번에 새로운 역사만화책이 내 책장에 꽂히게 되었다. 책 제목은 『만화로 배우는 조선왕실의 신화』. 조선왕조실록이 아니고, 그 외 조선사도 아니고, 무려 ‘신화’!!!!!! 알고 보니 이 만화책은 정확히는 ‘교양툰’으로 네이버 베도에도 올랐던 일종의 웹툰이었다...ㄷㄷㄷㄷㄷ



생각해보면 과거에 네이버 웹툰에서 무적핑크님의 ‘조선왕조실톡’을 참 재밌게 봤던 기억이 있었다. 이런 역사웹툰이 많이 나온다면 청소년들도 역사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을텐데! 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었다. 물론 박시백 화백님의 조선왕조실록도 어마어마한 역사만화지만, 아무래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웹툰과는 좀 무게감이 다르다고나 할까? 박시백 화백님의 조선왕조실록은 정통역사책같다면, 무적핑크님의 역사웹툰이나 이 책 우용곡님의 『조선왕실의 신화』는 정말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역사책이다. 하지만 내용은 또 가볍지 않다. 역사적 사실에 지장없는 상에서 뿌려진 MSG덕분에 역사이야기가 은근하게 스며든다. 고로 역사를 ‘암기’가 아닌, ‘이해’하며 쉽게 읽을 수 있는 역사책이라고 해야하나? 진심 청소년들이 읽기에는 이만한 역사책이 없다고나 할까? 아, 역사를 좋아하지 않는 성인들에게도 완전 제격이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조선왕실의 ‘신화’를 다루고있다. 정확히는 조선에서 믿었던 신, 제사에 대한 이야기다. 서점에 널리고 널린 그런 조선사(사회,정치,실록 등)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남의 나라 신화는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예컨데 그리스/로마,북유럽 등) 우리나라의 신은 잘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우리나라의 신도 모르면서, 남의 나라 신이나 외우고 있는 학생들을 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휴. 아니 뭐, 물론 우리나라에서 모시는 신도 태반이 중국신화에서 건너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반도로 건너오면서 우리의 신이 되지 않았나(그리스 신들이 로마신이 된 것 처럼)!



고로 모름지기 자국의 신을 먼저 알고난뒤에 남의나라 신화를 읽어보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게 내 생각이다. 



1) 신화의 탄생 - 길례와 사전: 의례를 통한 통치의 실현


2) 국토의 신 국사, 곡식의 신 국직 - 사직제 친행의 정치적 성격


3) 토지의 신 후토 구룡씨 - 후토신의 신앙 변쳔과정


4) 오곡의 신 후직 희기 - 후직 탄생신화 깊이 읽기


5) 유교의 귀신 - 유교에도 내세관이 있는 걸까?


6) 신이 된 제왕들, 종묘 정전 -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의 표상, 종묘


7) 해동 육룡이 나르샤, 사대고조 - 영영전에 모셔진 사연 많은 임금들


8) 국가와 백성의 수호신, 공신과 칠사 - 종묘 속 또 다른 사당 공민왕 신당


9) 농사의 신 신농씨 - 설렁탕은 선농제에서 유래한 것일까?


10) 양잠의 신 서릉씨 - 성세의 재현을 꿈꾼 영조, 정순왕후의 친잠례를 기획하다


11) 날씨의 신 풍운뇌우 - 기우의례 속에 나타난 주술성과 도덕성


12) 명산대천과 성황신 - 유교와 무속이 충돌한 종교 권력의 현장, 성황사


13) 악 해 독 - 산천 제례의 국가 제례 편입과 운영


14) 우사단의 여섯 신 - 기우제의 현장, 우사단


15) 문선왕과 제자들 - 소상으로 모셔진 공자를 대하는 어느 유학자의 시선


16) 동국 18현 - 도통과 문묘종사: 조선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


17) 단군왕검 - 민족의 시조 단군 인식의 발전상


18) 문명의 상징, 기자조선 - 인류 보편 문명의 전수자, 기자


19) 역대 시조묘 - 전국 시조를 기억하는 공간, 역대 시조묘


20) 관우와 전쟁의 신 - 관왕묘 제례와 ‘충’의 강조


21) 영성과 노인성 - 별에 대한 제사, 영성제와 노인성제


22) 말의 신 - 마제와 둑제의 여러 모습


23) 여제와무사귀신 - 재난을 방지하던 제사, 여제


24) 대한제국의 신들 - 미완의 제국과 함께 미완으로 남은 예서, 《대한예전》


 위 목차에서 보듯 조선왕실에서는 정말 많은 신을 모셨다. 물론!! 이 책에는 흔한 ‘창세신화’같은 건 없다. 책 제목 그대로 ‘조선왕실’, 그러니까 이미 중세에 들어선 조선에서 모시던 신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은 또 유교국가인지라, 우리 무속신앙에 대한 신들이 모두 나오는 것도 아니다. 제주도에서 모시는 신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 옛날 가택신들도 없다. 하지만 없는 신들은 일부일뿐, 이 책에서 알려주는 ‘조선’의 신들은 정말 어마무시하게 많다. 특히 중국신화를 즐겨 읽었던 사람들에게는 조금 더 친숙한 신들도 곳곳에 스며들어있다는 건 함정!



유교의 나라 조선, 조선 왕실에서는 여러 신을 모시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유교는 무신론이 아니었기에 유교를 받아들인 국가는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다만 같은 유교를 받아들였어도 지리적 위치나 국제 외교 관계에 따라서 모시는 신이 모두 달랐는데, 이는 제사를 지내는 ‘사람’ 혹은 ‘왕조’의 계급에 따라 모실 수 있는 신이 달라지는 유교의 특성 때문이었다. 조선의 경우 개국 초기부터 조선식 사전(祀典)채계를 마련하여 어떤 신을 모실지 결정했고 (《세종실록》오례의, 《경국대전》예전) 그 결과 우리나라의 위인부터 중국 고사 속 성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과 인물에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p 011~ 014



 


 


유교에서 제사라는 행위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서 행하는 것이었다. 즉 국왕이 종묘와 사직을 비롯해 국내외 각종 천신, 지기, 인귀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닌, 조선이라는 거대한 공동체를 위해 ‘예(禮)’로써 행하는 의식이었다. 이러한 인식 아래 조선시대의 모든 제사는 국왕이 거행하는 국가 제례뿐만 아니라 지방관들이 행하는 주현제, 일반 사대부 및 서민이 집에서 행하는 가제에 이르기까지 공동체를 위하여 지내는 행위라는 부분이 지속적으로 강조됐다. (……) 그러나 성리학적 이해가 심화되면서 전통 제사를 유교적 가치관에 부합되지 않는 ‘음사’로 규정하자, 사전에서 삭제되거나 유교적 제사의식으로 대체되는 제사도 더러 생겨났다. p 024


유교에는 귀신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무속과 불교를 탄압하던 유교였기에, 난 은연중에 유교는 귀신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 물론 내가 생각하는 귀신은 무속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악한 혼령이나, 빙의 뭐 이런 의미이다. 그도 그럴것이 유교는 무속이나 불교, 기독교 처럼 특정한 ‘신’을 믿는 종교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유학이라는 ‘학문’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학문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고, 그 학문을 토대로 통치하는 왕조가 많아지다보니 어느새 유학이 유교라는 종교가 되어버렸다고 해야하나. 여튼 참 독특한 학문이자 종교이다. 음... 종교라고 하는게 맞긴 맞는건가.


유교의 귀신은 여러가지 뜻을 포함하는데, 그 중 첫번째 의미는 음양의 작용을 설명하는데 쓰인다. 둘째는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되는 일종의 혼백 개념에서의 귀신이다. 셋째는 제사를 지낼 때 존재 영역에 따라 천신, 지기, 인귀로 구분하는 개념에서의 귀신이다. p 076


유교에서 말하는 ‘귀신’의 의미는 그들의 학문적 이해를 위해 정의된 개념이다. 그 귀신 중에서 제사를 지내는 존재를 ‘천신, 지기, 인귀’로 구분한다 


※명나라 때 저서 《삼재도회》에 따른 정의※


- 태양, 달, 별, 날씨 등 하늘을 중심으로 하는 하늘신: 천신(天神)


- 땅의 기운 혹은 땅의 신: 지기(地祈)


- 자기 자신과 가문과 생명적 근원이 되는 조상신: 인귀(人鬼)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자면 천신은 말그대로 하늘신, 지기는 땅에 비는 것, 인귀는 조상귀신(...) 뭐 이렇다.




 


 



조선에서는 천신, 지기, 인귀에게 제사를 지냈다. 천신과 지기에게 제사를 지낸 주된 이유는 ‘농사’였고, 인귀에게 제사를 지낸 주된 이유는 ‘조상’이기 때문에. 유교에서 농사는 사람의 생업과 관련되어 아주 중요했고, 조상도 ‘효’를 다하는 주체로써 중요했다.



실제로 유교국가 조선에선 직업의 귀천을 ‘사농공상’이라고 하여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를 제일로 쳤고, 그 다음이 농업에 종사하는 농부였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교류 방법 가운데 유교에서 가장 애용된 것이 바로 상례와 제례이다. 살아있는 자의 집을 양택이라 하는데 반해 죽은 자의 무덤을 음택이라 한다. 형식은 다르지만 동질적인 ‘집’임에는 틀림없다. 부부를 합장하거나 자손이 부모의 무덤 근처에 잇달아 묻히는 경우가 많은 것 또한 죽은 자들의 공동생활이 지속된다는 의식을 보여준다. 그래서 집마다 사당이 있고 나라에도 사당이 있어 가묘나 종묘로 불리며 유교의 성전으로 받들여졌다. p 085


농사의 신, 신농씨


소는 오래전부터 농경을 상징하는 동물로 인식되어왔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신화 속 인물이 있으니 바로 최초로 농사법을 발명했다고 전해지는 염제 신농씨이다. p 134



신농은 먼저 불을 발명하여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주었고, 주변의 나무로 농기구를 발명하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고는 사람들이 굶지않도록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쳤다. 또 그 덕분에 생활이 안정된 사람들이 잉여 생산물을 팔 수 있도록 시장을 열어주었고, 혼인제도를 만들어 사람들이 가족을 이루고 마을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한편 사람들이 자꾸 이상한걸 주워 먹고 병에 걸려서 죽는 일이 발생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신농은 100가지 풀을 직접 먹어가며 약초와 독초를 가려냈다. (……) 비로소 신농은 동양 문화권에서 ‘농사의 신’이자 ‘불의 신’ 겸 ‘의학의 신’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p 138~141


중국신화를 조금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겐 매우 친숙한 신, 염제 신농씨. 농업을 중시하는 조선에서 소의 머리를 하고, 농사법을 발명했다고 하는 염제 신농씨는 핫하디 핫한 신이었다.




 


한국의 경우 삼국시대 때부터 신농에 대한 제사가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신농은 조선시대에도 어김없이 등장하여 그 이름을 과시했으니, 민간에서는 영남성주굿이나 평산소놀음굿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왕실에서는 후직 희기와 함께 농사의 신으로서 선농단에 모셔졌다. 오늘날 선농단 근처에는 한약재를 전문으로 파는 약령시작이 있는데 의학의 신 신농의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는 대목이다. p 142~143


서울에서는 선농단에서 염제 신농의 제사를 지낼때 만든 탕이 설렁탕의 유래라고 하는데, 그건 믿거나 말거나!


유일하게 왕비가 진행하는 제사, 선잠례


서울 지하철 2호선 ‘잠실’, 그 잠실의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나오는 종착역. 바로 조선의 ‘선잠례/친잠례’다.


양잠이란 누에나방을 사육하여 고치를 생산하는 일을 의미한다. 고치에서 빼낸 시을 가공하면 비단을 만들 수 있었으니, 비단은 옛날부터 삼베, 모시, 목면과 함께 옷감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예시로 통하고 있다. 조선에서는 옷감생산을 장려하기 위해 양잠을 발명했다고 전해지는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그가 바로 양잠의 신 서릉씨이다. p 149~150


사극에서도 종종보았던 ‘친잠례’. 양잠에 대한 제사란 것 까지는 알았는데, 제사를 받는 신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냥 하늘에다 ’누에생산 잘하게 해주세요‘ 정도로 생각했을 뿐. 하하하. 친잠례때 제를 받는 사람은 양잠의 신 서릉씨이다. 참고로 서릉씨는 황제 헌원의 아내이기도 하다.


조선에서는 선잠단이라는 공간에서 매년 3월 서릉씨에게 제사를 지냈다. 특히 선잠제례는 조선 왕실의 제사 중 유일하게 왕비가 주도하는 제사였고, 경복궁과 창덕궁 후원에 내잠실을 마련하여 왕비와 궁궐 안 여성들이 뽕잎을 따는 의식인 친잠례를 행하기도 했다. 또한 조선 각지에 잠실을 만들어서 누에농사를 관리했다. 현재에도 ‘잠실’이라는 지명을 통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p 158



(조선)왕실 여성이 국가 제례를 직접 주관한 사례는 정순왕후의 선잠례 이전까지 단 한 차례도 보이지 않는다. 여성의 국가 제례참여는 원칙적으로 차단돼 있었고, 1683년(숙종22) 왕후와 세자빈이 종묘를 알현하는 제도를 시행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영조는 친잠을 시행할 때 굳이 경복궁에 선잠단과 채상단을 같이 만들어 왕후가 제사를 주관하고 친잠 역시 주관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국가 제례를 주관하는 상징성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였던 셈이다. p 162


조금 놀랐던 사실은 수 많은 사극으로 인해 조선의 왕비가 당연히 친잠례를 주관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기록에 남은 조선왕비의 친잠례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였다는 점. 생각해보면 내가 드라마에서 자주 봤던 친잠례는 중국사극(...) 이었고, 한국 사극에서는 최근에 종영한 ‘옷소매 붉은 끝동’ 이었다. 옷소매에서 친잠례를 주관한 사람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였고.



중국에서는 선잠례와 친잠례가 황후가 하는 중요 제사였지만, 조선에서는 선잠과 친잠이 구분되었었다고 한다. 심지어 고려 때 선잠제는 신하가 시행했기에, 친잠례는 거행하지도 않았다고. 고려때의 선례가 이러한데다, 조선 성종때 시행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오랫동안 친잠례는 기억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다가 영조 때 부활! 영조 때 친잠례가 부활한 건 단순히 잊혀졌던 양잠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함이라기 보단, 정치적인 목적이 내포되어 있었다. 새파랗게 어린 중전인 정순왕후와 세손(정조)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양자의 화합을 도모, 백성을 위해 시행한다는 명분이었달까?


유교국가에서 살아남은 토속신앙, 성황신 및 산신


개인적으로 내가 궁금해하는 토속신앙(민간신앙/무속신앙)에 대한 이야기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마을에는 마을의 안녕을 비는 성황신이나 산신, 용왕신이 있었고, 당산나무가 있었다. 각 개개인의 가정 안에는 가택신도 있었다. 이 책에서 가택신은 언급되지 않지만, 성황신을 비롯한 산신들이 언급된다.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의 대부분은 산과 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 사람이 거주하는 지역은 굉장히 한정적이었으니, 전근대만 해도 마을 이외의 지역은 미지의 영역이자 두려움의 공간이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마을의 성황신에게 자신들을 보호해달라며 제사를 지냈고, 인간의 힘이 미치지 않는 마을 밖의 산천신에게도 안녕을 기원하였다. p 177~178



 


조선은 국내의 이름있는 산과 강을 골라 제사를 지냈다. 특별히 중요한 19개의 산천을 선정해 ‘명산대천’이라 칭하고, 왕실에서는 이들을 소사의 예법으로 모셨다. p 180



이런 신들은 먼 옛날의 애니미즘 신앙에서 유래했으며, 이것이 한국에서는 ‘산신신앙’과 ‘용왕신앙’으로 발전했다. 고려시대에 이르자 산천신에 대한 제사는 지역마다 산발적으로 행해졌는데, 조선시대에 와서 음사로 취급되어 크게 위축되었다가, 나라에서 산천신을 유교식으로 관리하면서 명산대천의 제사가 정비된 것이다. 또한 성황신을 모시는 제사도 유교식으로 정비했는데, 원래 마을의 성황신들은 ‘인격신’으로써 그 지역의 유력 씨족이나 조상신의 성격을 띠었지만, 유교화를 거치면서 인격신적 요소가 사라지고 마을을 수호하는 기능적 개념만 남게 되었다. p 182~184


조선왕실에선 제사의 규모와 중요도에 따라서 대사, 중사, 소사로 구분했다. 종묘나 사직은 ‘대사’, 신농이나 선농제례는 ‘중사’, 산신이나 수신제는 ‘소사’였다. 



조선왕조는 건국직후부터 성황신에 대한 사전을 마련하고 국가 제례에 편입해 제도화하고자 했다. 이는 지방 각 주, 부, 군, 현과 같은 행정 단위마다 성황사를 두어 지방관을 중심으로 제사를 거행하게 한 데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법제적 측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표면적인 모습이고, 실제 민간에서는 관이 주도하는 성황제와 별도로 고려시대 이래 무속이나 산신신앙과 융합한 성황신앙이 이어져오고 있었다. 이 떄문에 유학자들은 민간 성황제 금지책을 마련하고자 ‘부정한 제사’라는 낙인을 민간 성황제에 가져다 붙이기 시작했다. p 187



이처럼 조선의 유학자들은 유교적 예제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공간을 무력으로, 또 사상적으로 공격하면서 무속과 충돌했다. 어쩌면 유교과 예전과 같은 위상을 가지지 못하게 된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도 일부 동제나 무속에 유교적 제례 의식의 단면이 보이는 것과 관련이 있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p 190


유교국가 였던 조선에서는 민간신앙이었던 성황제나 산신제를 유교식으로 변경하고자 했고, 법제화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법과 실제는 다른 법. 특히 유학자들은 산신제나 성황제 같은 전통신앙(무속신앙)을 ‘음사’로 낙인찍고, 탄압했다. 무속뿐만이 아니다. 유학자 및 조선왕실은 불교도 탄압했다. 조선왕실에서는 사찰에 종이를 만드는 노역을 강제부과하였고, 유학자들은 스님들을 쫓아내고 사찰을 강제로 허물어서 서원을 짓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소수서원이다. 소수서원의 터는 기존 ‘숙수사’라는 사찰이었으나, 유학자들이 스님들을 쫓아내고 사찰을 허문뒤 ‘백운동 서원’을 세웠다. 이 백운동 서원은 최초로 사액을 받은 ‘소수서원’이다. 이는 불교가 한반도에 처음 도래했을 당시, 한반도의 전통신앙을 이해하고 융합, 발전한 것과는 매우 대비된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에는 ... 무속신앙을 미신으로 규정하여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현재 제대로 된 무속의 제사나 굿은 무형문화재로써 간간히 명맥을 유지하거나, 제주도에 남아있는 토속신앙 정도다. 


조선에 뿌리깊게 박힌 유교와 문선왕 공자


유교국가 조선, 그 ‘유교’를 창시한 사람이 바로 공자다. 물론 공자가 ‘유교’라는 종교를 창시한 것은 아니다. 정확히는 ‘유학’이라는 학문의 시조라고 해야할까? 여튼 공자는 본인이 깨우친 것을 이루기 위해 고대 중국의 여러나라를 돌았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하였다. 대신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는데, 훗날 그 제자들이 공자의 말씀을 받들어 중국을 비롯하여, 한국, 동남아시아 모든 곳을 유교국가로 만들어버렸다.


공자는 유교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로서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않고 등장하는데, 중국의 왕조들이 공자를 왕로 추존하여 국가적으로 제사를 지내자 공자에 대한 신앙이 유교와 함께 동북아시아 전체로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p 218


그가 받은 시호는 총 4개다. 한나라 때는 ‘나선공’, 당나라 때는 ‘문선왕’, 송나라 때는 ‘지성문성왕’, 원나라 때는 ‘대성지성문성황’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보통 문성왕이라고 칭하는건, 공자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까 공자는 죽은 뒤 왕이 되었다. 




 


 


비록 공자 자신이 살아생전에 본인의 이상을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공자의 사상은 그가 남긴 저서(논어)와 제자들의 활동 덕분에 수많은 왕조의 통치 이념으로 수용될 수 있었다. 유가라고 불리는 유학자 집단은 공자의 등장에 힘입어 체계화 되었고 한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공자에 대한 국가 제사도 본격적으로 시장되었는데, 이후 공자에 대한 제사를 석전이라고 불렀으며, 유교를 받아들인 국가들은 각자 문묘를 설치하고 석전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일찍이 삼국시대(신라)부터 공자와 제자들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조선시대에는 성균관 대성전과 각 지방의 항교마다 문묘를 설치하고, 공자와 여러 유학자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p 223~224


그렇다면 조선은 공자의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받는 나라일까? 음, 애매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조선은 공자가 아닌 그의 제자 중에 제자 중에 제자 뭐 이렇게 거슬러 내려온 제자 ‘주자’가 자기식의로 정의한 학문을 받아들인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 주자학을 열렬히 신봉한 자가 조선에서 ‘송자’라 일컬어지던, 서인의 거두 송시열이었다. 조선 중기부터 권력을 잡은건 서인(이후에는 노론으로 갈라짐)인데, 그들이 하는 꼴을 보면 말이다. 정말 공자가 원하는 유교세상에 이런거였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지역신에서 민족의 신으로! 단군왕검


우리가 학교가면 무조건 배우는 단군왕검 이야기. 물론 단군왕검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일종의 ‘신화’이다(혁거세나 주몽이 알에서 나온것처럼). 예컨데 곰토템을 믿는 부족와 호랑이토템을 믿는 부족간의 알력다툼에서, 곰토템을 믿는 부족이 승리한.. 뭐 이런 이야기를 신비로운 설화로 탈바꿈한 것이라고나 할까?



확실한건 단군왕검 신화를 가르침으로써, 우리는 ‘단일민족, 단일국가’라는 민족 공동체의식을 깨우치게 한다는 점이다. 근데 이게 참 웃긴게, 잘 생각해보면 한반도가 단일민족이라는 말부터가 참 어불성설인데 말이다. 


원래 단군은 평양 일대에서 모시던 지역신에 가까웠는데, 고려시대에 이르러 단군을 시조로 하는 공동체 의식이 형성되었고 삼한의 백성을 모두 통합하는 시조신으로 섬겨지게 된 것이다. p 250



실제로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단군은 성황신이나 산신처럼 평양에서 믿는 일종의 지역신이었다. 한반도 내에는 정말 여러 고대국가가 있었고, 그 고대국가들 중 일부가 흡수/합병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가 되었다. 이 세 나라는 각각 별도의 나라였고, 따라서 각 나라의 건국신화(시조전승)도 별도였다. 물론 백제의 경우 고구려에서 갈라진 나라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역다툼을 하는 등 그 두나라 사이마저도 공동체라는 의식이 없었다. 



우리 모두가 알듯 고구려의 시조는 주몽, 백제는 온조, 신라는 박혁거세! 더 들어가면 가야는 김수로왕을 비롯한 여섯왕이 있고, 예맥, 부여, 낙랑 등 수 많은 고대국가가 자기들만의 건국신화가 있었다.




 


 


단군이 한민족이라는 집단의 시조로서 보편적으로 인식된 것은 고려 말의 일이었다. 14세기까지 단군은 대체로 평양 지방의 신, 또는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를 중심으로 하는 민간신앙의 대상이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대몽항쟁을 거치면서 단군은 공통된 조상이자 국가 시조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점은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p 253



조선 전기에 형성된 단군 인식은 조선 중기 사림의 등장과 함께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주춤하게 된다. 이때는 기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기자로부터 출발하는 소중화 의식이 문화적 우월성을 드러낼 수 있는 자긍심의 근거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17세기 중반 이후 다시 단군에 주목하는 경향이 등장했다. 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p 254


평양의 지역신이었던 단군이 한반도 전체의 시조가 된 건, 몽골의 침입기인 고려 말때 시작된다. 우선 고려라는 나라는 한반도를 통일한 나라이다. 물론 그 전에 통일신라가 있기는 했으나, 통일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흡수하면서 백제/고구려 유민들의 반란을 지독히도 겪어왔다. 반면 고려는 완전한 통일국가다. 따라서 시조가 각기 달랐던 삼국시대와는 달리 모두가 믿을 수 있는 시조가 필요했고, 그 시조로 선택된 인물이 바로 옛 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이었던 것이다.



조선도 동일하다. 심지어 조선은 옛 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국호를 ‘조선’이라 칭했다. 다만 조선에서는 단군왕검만 시조로 삼은게 아니라, 기자조선의 기자도 시조로 삼았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현재 우리나라 사학계는 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고조선의 역사 중 단군조선과 위만조선만을 인정한다. 기자조선의 경우 당대의 역사서도 없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당대 중국계 유물도 출토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왜 기자조선을 믿었던 걸까?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조선을 믿은 이유는, 한나라때 서적에 적혀있는 ‘기자동래설’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일 큰 이유는 바로 ‘명분’ 이었다. 기자를 통해 조선이 문명을 받아들였고, 중국에 버금가는 ‘소중화’라는 의미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에는 조선이 명에 사대를 하고 있었고, 심지어 명이 망하자 조선은 명나라를 잇는 국가라고 칭하던 조선이었음을 인식해야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조선이 명나라를 잇는 국가(소중화/유명조선)라고 열렬하게 주장했던 사람들은 서인의 거두 송시열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이 바로 조선이 망할 때까지 쭉 권력을 잡은 이들이다.


조선에서 인정한 역대 시조묘 팔전(八殿)


우리나라 국민들 중 태반이 모르는 역대 시조묘, 팔전에 대해 나왔다. 이야, 책에서 팔전에 대한 내용을 읽는 건 이번이 처음인 듯 하다. 개인적으로 유적지 답사를 할 때마다, 해당 지역에 시조묘가 있으면 찾아다녔던 나로써는 그저 반가울 따름!



동아시아에서는 한 국가가 멸망하면 이전 왕들의 후손들에게 세습 작위를 주고 선대왕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해주는 전통이 있었다. 조선에서도 옛 왕조의 후손을 찾아 시조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이것을 역대 시조묘 라고 불렀다. p 270



(조선)태종 재위기 역대 시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사전에 중사로 등재해 제사를 시행한 것이 시초였다. 그러나 제사 대상으로 모신 역대 시조는 시대에 따라 강조하는 대상이 달랐다. 조선 전기에는 단군과 기자, 고구려 시조, 고려 시조에 대한 제사가 중시되었고, 백제와 신라의 시조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후 조선 후기에 병자호란이 발발하면서 백제 시조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신라 시조와 관련된 제도가 정비되어 이들을 모시는 사당이 ‘전(殿)’으로 승격됐다. p 283


팔전(八殿)은 한반도에 있던 나라의 건국왕(이자 시조)를 모시는 사당이다. 조선 이전까지는 사당이나 신사 쯤으로 관리되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서 왕실의 사당으로 격상시켰다.


※시조묘 팔전※

- 숭령전: 전조선 단군묘 겸 고구려 동명왕묘 (평양/봉사손 성씨: 선우씨)


- 숭인전: 후조선 기자묘 (평양/봉사손 성씨: 선우씨)


- 숭렬전: 백제 온조왕묘 (경기 광주/봉사손 성씨: ??)


- 숭선전: 가야 수로왕묘 (김해/봉사손 성씨: 김해 김씨, 김해 허씨)


- 숭덕전: 신라 혁거세묘 (경주/봉사손 성씨: 경주 박씨)


- 숭혜전: 신라 미추왕(경주/봉사손 성씨: 경주 김씨)


- 숭신전: 신라 탈해왕(경주/봉사손 성씨: 경주 석씨)


- 숭의전: 고려 태조묘 (연천/봉사손 성씨: 개성 왕씨)


팔전은 각 시조의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으며, 지금도 언제든지 가서 볼 수가 있는데 .. 여기서 함정! 단군왕검과 주몽을 모신 숭령전과 기자를 모신 숭인전은 평양에 있기 때문에 당연히 가볼 수가 없다. 그 외 나머지 6곳은 언제든지 가 볼 수 있다.



내가 가본 곳은 숭렬전(백제 온조왕), 숭덕전(신라 혁거세왕), 숭혜전(신라 미추왕), 숭신전(신라 탈해왕), 숭의전(고려 태조왕건) 총 5곳이다. 어라? 이제 김해만 가보면 남한에 있는 시조묘는 다 섭렵이네? 허허허.



근데 지금와서 보니 온조왕을 모시는 숭렬전은 봉사손 성씨가 없다. 뭐랄까... 백제 후손이 없나? 그러고보니 백제 마지막왕인 의자왕과 그 가솔들은 당나라로 끌려갔었는데. 마지막 왕 기준으로 당시 백제 왕가의 성씨는 부여씨였는데, 음. 현재 남아있는 부여씨가 없나? 그럼 숭렬전 관리/제사 주체는 어디인가. 



거기다 단군왕검 및 주몽과 기자를 모시는 숭령전, 숭인전의 봉사손 성씨도 좀 특이하다. 난 숭령전은 당연히 고씨일거라 생각했는데, 왠걸. 선우씨다. 알고보니 선우씨의 시조가 기자조선을 창건한 기자의 48대손 우평이라나 뭐라나. 다시말하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을 인정안함!


1612년(광해군4) 이정귀가 오랑캐를 중화로 바꿔 예의와 문명을 퍼뜨린 공을 들어 평양의 기자사를 ‘숭인전’으로 고치고 선우씨를 후예로 저해 제사를 주관케 하며 비석을 세길 것을 청했다. 광해군은 이를 기꺼이 따르고 승지를 보내 제사를 시행하게 했다. 당시 선우식이 6품의 관직을 갖고 제사를 주관했는데, 대대로 자손이 그 직을 이었다. p 283



이 책은 역사책임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 쉽게 만화로 이루어져있어서, 역사에 해박하지 않은 성인이어도 쉽게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 어린자녀와 함께 읽어도 전혀 어렵지 않을 역사만화책이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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