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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탄생 - 뇌과학으로 풀어내는 매혹적인 스토리의 원칙
윌 스토 지음, 문희경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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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오면서 정말 수 많은 이야기를 읽고, 보고, 쓰고 말한다. 부모와, 친구와, 직장 동료와 대화 속에 이야기가 있다. 읽고 있는 책 속에도 이야기가 있다. TV를 틀면 드라마나 예능 등 장르는 다르나, 기본적으로 그 방송을 아우르는 이야기가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쓰는 일기조차도 한 편의 이야기가 된다. 언제부터 ‘이야기’가 시작이 되었고, 우리는 왜 이렇게 ‘이야기’에 열광하게 되었나. 그 비밀을 ‘뇌과학’으로 풀어낸 책이 있으니, 바로 이 책 「이야기의 탄생」 이다.




이야기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준다. 누군가가 도덕적으로 옳고 그르다는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그릇된 행동은 벌하고 옳은 행동에는 상을 준다. 이런 방식으로 모든 구성원이 협력하도록 유도하고 감시해왔다. 영웅과 악당의 이야기, 그리고 이런 인물들이 자극하는 기쁨과 분노의 감정은 인간의 생존에 결정적이었다. 인간은 본래 이런 이야기와 감정을 즐기도록 타고난 존재다. p 014



중요한 것은 이야기는 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심리학 교수 조너선 하이트는 뇌가 ‘이야기 프로세서’ 이기는 하지만 ‘논리적인 프로세서는 아니’라고 말한다. 이야기는 우리의 입술사이로 숨이 새어나오듯이 마음에서 흘러나온다. p 015




저자는 인류가 살아온 시작부터 지금까지 이야기가 함께있다고 말한다. 수렵과 채집을 하던 석기시대부터, 과학이 발존한 현재까지, 거대한 인간의 문화는 ‘이야기’ 속에 담겨 할머니가 엄마에게, 엄마는 딸에게 전승되었다. ‘이야기’가 전승되는 그 과정에서 영웅이 악당을 이긴다거나,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 벌을 받는다거나, 선한사람은 상을 받는등 우리가 사회를 살면서 지켜야 할 윤리규범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여기서 신기한 점은, 우리는 ‘이야기’ 속에 남겨있는 내용들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우리가 왜 이야기를 받아들이는지, 또 인간이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바로 ‘뇌과학’에서 찾았다.



우리는 머리 밖의 실제 현실이 머릿속에서 경험하는 현실모형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안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고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 주위에 없어도 기압에 변화가 일어나고 땅에는 진동이 일어난다. 나무가 넘어간는 소리는 사실 우리의 뇌에서 만드는 효과다. p 046



책에 적힌 단어들이 경첩 하나로 매달린 헛간 문을 묘사하면 독자의 뇌에서도 경첩 하나로 매달린 헛간문 모형을 생성하는 것이다. p 048



우리가 사는 세계를 구축하는 신경계의 환각모형은 작고 개별적은 모형으로 구성되고, 모형마다 저마다의 과거가 얽혀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대상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연상시키는 모든 것을 함께 본다. 그리고 그 모든것을 함께 느낀다. p 065



우리는 분명 눈 앞에 보이지 않는 현실을 머릿속에서 보는 경우가 있다. 책을 읽으면 책 속에 묘사된 배경이 머릿속에 떠오르거나, 어떠한 물건을 보았을 때 그 물건과 관련된 과거의 일이 떠오르는 등의 일이 대표적이다. 저자는 이러한 이유를 우리의 ‘뇌’가 만드는 여러 종류의 모형 때문이라고 말한다.  뇌가 만드는 모형은,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아닌, 또 다른 현실을 머리속에서 만드는 ‘현실 모형’도 있고,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대변하듯 ‘마음 모형’도 만든다. 다만 뇌가 만든 이러한 ‘모형’들이 모두 현실세계에서 100% 정당하다고 할 수 없는, 즉 왜곡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우리 머릿속에도 어두운 부분이 있고 그곳에서 현실로 경험하는 통제된 환각의 세계는 거짓 정보에 의해 왜곡되기도 한다. 그러나 왜곡된 현실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현실이므로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잘못됐는지 알 길이 없다. 이런 인지적 왜곡으로부터 누구나 저마다의 흥미롭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결함이 생긴다. p 088



우리의 환각 모형이 틀렸다고 해도 우리는 뇌에서 우리를 위해 만든 현실에 거의 의문을 품지 않는다. 어쨌든 그것이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p 092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낮선 생각을 가진 타인을 만난 때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거나 반박하려고 할 것이다. 동시에 괴로워할 것이다. 신경 모형이 위협을 받으면 압도적으로 부정적인 결과의 파도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우리의 뇌는 신경 모형에 대한 위협을 신체 공격처럼 취급해서 우리를 긴장시키고 스트레스가 심한 싸움-도주 상태로 몰아넣는다. 생각이 다를 뿐인데도 상대를 위함한 적, 곧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해를 입히려는 세력으로 보는 것이다. p 118



이렇게 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이용하여 ‘이야기’를 만듦으로써, 우리는 그 ‘이야기’가 우리의 삶과 밀접하다는 생각을 하게되거나, 이야기 속에 더욱더 빠져들게된다. 




“대체 뇌 현상을 어떻게 이야기속에 녹인다는 거지?”




 쉽게 말하면 이렇다. 뇌에 자극을 주지 못하는 이야기는 남지 못하고 사라진다. 하지만 뇌에 ‘자극’을 주거나, 뇌를 ‘활성화’시키는 이야기는 다르다. 뇌에 자극을 주는 이야기는 계속에서 남아있고,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렇다면 뇌에 자극을 주는 이야기란 뭘까? 바로 ‘뇌’에서 일어나는 현상, 그러니까 뇌과학적인 현상을 이용하여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뇌에 만드는 현실모형을 이용하여 이야기를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그저 현실모형만 생각한다면, 이야기 속의 배경이 생생하게 구축될 것이다. 하지만 딱 그정도 까지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서 모형속에서 생겨난 ‘왜곡’과 ‘결함’을 이용하면, 이야기는 좀더 풍부해질 수 있다.



스스로 결함을 인지하고 받아들인 후 변화하는 것은 현실의 구조 자체를 분해해서 새롭고 더 나은 양식으로 재구성한다는 뜻이다.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이런 깊은 차원의 변화를 거부하는 마음과 싸우면서 안간힘을 쓴다. 그래서 이런 싸움에 뛰어는 사람들을 ‘영웅’이라고 부른다. p 090



결함은 어떤 장르로든 누구에게 나타난다. 누군가에게는 ‘편견’이라는 형식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내 일상을 방해하는 ‘사람’ 일수도 있다. 우리가 열광하는 이야기 속에 많은 주인공들도 대체적으로 한 가지 이상의 결함이 있다(자의든 타의든 결함이 생긴 이유는 상관없다).



내 청소년기를 함께 한, 내가 정말 사랑하는 해리포터는 태어나는 순간, 볼드모트 손에 부모님이 죽고, 본인은 의도하지 않게 볼드모트의 호크룩스가 되었다. 본인을 죽이려는 볼드모트와, 자신이 볼드모트의 ‘호크룩스’라는 것 자체가, 해리에게는 엄청난 결함이었다. 하지만 결국 해리는 그 결함을 이겨냈다(뿌듯뿌듯, 하지만 해리와 헤어진건 아직도 슬프다...또르르르). 해리는 그저 책(또는 영화) 속의 캐릭터일 뿐인데도, 우리는 그렇게 해리가 본인의 ‘결함’을 헤쳐나가는 모습에 그토록 기뻐했다. 해리가 결함을 이겨낸 그 순간은, 아마도 나를 비롯한 많은 독자(또는 관객)들이 울고 웃었던 순간일 것이다.




왜일까? 해리는 그저 책 또는 영화 속의 인물일 뿐인데, 우리는 왜 해리가 결함을 이겨낸 모습을 보며 내 일 처럼 기뻤을까?




우리의 뇌는 언제나 상황을 ‘통제’를 하여 안정적인 상황으로 만들고자 한다. 하지만, 뇌에서 ‘결함’이라는 것이 생기면 우리의 뇌는 엄청난 자극과 스트레스를 받는다. 뇌는 ‘결함’이 있는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와 싸우고 움직인다. 그렇게 ‘결함’을 통제하는 그 순간, 우리의 뇌는 편안함을 느낀다. 이러한 뇌과학적인 부분을 이야기 속에 넣음으로써,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내가 되고, 이야기 속 주인공이 결함을 이겨내는 상황을 보면서, 내가 결함을 이겨내는 듯한 착각을 받는다. 그렇게 우리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에게, 우리의 삶을 투영한다.



그래서, 우리는 책(또는 영화) 속의 주인공이었던 해리를 보며, 그저 해리 혼자가 아닌, 우리 결함을 가진 ‘나’를 본 것이다.



이야기는 결국 결함 있는 자아가 치유의 기회를 얻는 과정에 관한 것이다. p 167



이야기는 어떻게 끝날까? 모든 이야기가 변화라면 당연히 변화가 멈출 때 이야기도 끝날 것이다. 주인공은 발화점부터 외부세계에 대한 통제력을 얻기 위한 싸움에 뛰어들었다. 이야기가 행복한 결말로 끝난다면 그 과정이 성공적인 셈이다. 외부 세계에 대한 뇌의 모형과 통제 이론이 갱신되고 향상될 것이고, 주인공은 마침내 혼돈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p 252




결국 이야기는 ‘결함’을 갖고 사는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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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친일파 - 반일 종족주의 거짓을 파헤친다
호사카 유지 지음 / 봄이아트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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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 담고 싶지도 않은 책 「반일종족주의」. 그 책은 일본 우파의 논리를 아주 완벽하게 그대로 이어받아, 심지어 더 나아가 일본을 향한 노예근성을 보여준다. 정말 종이를 만들게 해준 나무에게 미안할 정도로 자원낭비와 같은 그 책이, 꽤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였다는 것도 나에겐 너무 충격이었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나라를 좀 먹게하는 암세포 마냥  곳곳에 친일파들이 있다는 말이겠지.



그런데, 일본인이었으되 한국인으로 귀화하신, 우리보다도 더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호사카 유지 교수님께서 굳이, 친히, 시간을 들여서, 수 많은 자료를 가지고 와서, 저 쓰레기같은 책에 대해 아주 정성스레 반박을 했으니 그게 바로 이 책 『신친일파』 이다. 호사카 교수님의 강의를 직관하고 싶었던 나였기에, 이렇게 책으로나마 호사카 교수님이 생각을 읽는다(이미 호사카교수님의 독도 관련 서적도 가지고 있는 1인).



내 주된 관심사는 한일관계사 인지라, 관련 서적을 꽤 읽었다. 6할이 한일고대사라면, 4할은 한일근대사. 한일근대사 관련 책을 읽을 때마다 꼭 나오는 부분이 있으니 일본 우파에 대한 이야기다. 그도 그렇것이 현 아베 정부는 그 뿌리부터 극우  of 극우세력이다. 또한 그들은 본인들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을, 서양세력에 대항하여 동아시아를 지키기 위함이었다는 ‘대동아전쟁’이라는 헛소리를 짓껄이고 있다.



​일본 우파의 최종적인 목표는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를 부정하는 데 있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후지오카 노부카쓰 교수 등이 내세운 ‘자유주의 사관’을 도입했다. ‘자유주의 사관’ 학설이란 일본이 침략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아시아를 백인 지배에서 해방시킨 ‘해방 전쟁’을 수행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난징 대학살이나 ‘위안부’강제연행을 부정하며, 일본이 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배하면서 근대화시켰다고 강변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과거를 사죄하는 태도를 ‘자학사관’적 태도라고 매도하면서, 일본의 사과 외교는 일본의 진보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적 행위라고 주장한다. p 007



 그나마 사리분별을 할 줄 아는 일본인이, 과거 본인들의 작태에 조금이라도 ‘책임을 통감한다’라는 이야기를 한다면, 우파들은 그 일본인을 향해 좌익이라 낙인찍고 살해협박까지도 서슴치 않는다. 이 부분을 보면, 한국에서 보수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본인들과 반대의 의견을 제시하면 무조건 ‘빨갱이’라고 소리치는 것과 그 결이 같다. 그렇다. 그들은 한국인의 탈을 쓴 신친일파 였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빌붙어 자국민들 잡아들이고, 죽였던 친일파와 전혀 다를바가 없으니까. 그 신친일파의 한 축이라 할 수 있는 이영훈은 아주 교묘하게 사실에 거짓을 섞어서, 본격적으로 사람들을 속이기 시작했다.



“한국의 거짓말 문화는 국제적으로 널리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p 013



 본인이 살고 있는 한국을, 거짓말과 사기가 난무하고 사회적 신뢰가 매우 낮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심지어 한국 특유의 샤머니즘이라는 헛소리까지 짓꺼리며 반일은 한국인 특유의 종족주의라고 했다. 아마 호사카 교수님이 『신친일파』라는 이 책으로 조목조목 반박하지 않았다면, 한국 역사에 관심없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그 거짓으로 일관된 책을 읽고, 선동당하는 사람이 많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건 정말 생각만하도 소름이 돋는다.




- 「반일종족주의」 인용


이 강제징용에 대해 대법원은 2018년 10월 30일, 일본 기업으로 하여금 한국인 한 명당 1억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판결 또한 명백한 역사왜곡에 의해 근거한 황당한 판결입니다. p 050



일본에서 온 기업체 사원들에게 조선인이 내가 가겠다고 의사를 표시하면 심사를 거쳐 일본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조선인들의 ‘자발적인 선택’에 맡겨졌습니다. p 055



생활은 대단히 자유로웠습니다. 밤새워 화투를 쳐 잠을 설친다거나, 근무가 끝나면 시내로 나가 과음하고 다음날 출근을 못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선 여인이 있는 소위 ‘특별 위안소’라는 곳에서 월급을 모두 탕진할 정도로 그들은 자유로웠습니다. p 073



예를 들어, 탄광에서 갱외보다는 갱내, 갱내에서도 가장 어렵고 위험한 일, 다시 말해서 탄을 캐는 채탄부, 갱을 파나가는 굴진부, 갱도가 무너지지 않도록 목재 등으로 구조물을 만드는 지주부, 이과 같은 일에 조선인들을 강제로 배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현장에서의 민족차별론은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p 074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해 강제로 징용된 피해자들에 대한 신친일파들의 생각이다. 강제징용 노동자들은 사실 자발적으로 일본에 갔으며, 같은 장소에서 일하는 일본인과 민족차별도 없었고, 임금차별도 없었다고 말한다. 뿐만아니라 조선인 노동자들은 조선에 자유롭게 송금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체 무엇을 근거로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일본이 조선인 노동자들을 강제징용했다는 사료는 정말 많다. 사료만 많은가? 아직까지 피해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증언도 있으며, 아직까지 두 눈 뜨고 살아계신다. 그런데도 신친일파들 눈에는 보이지 않나보다.







히라야마광업소에서는 당시 조선인이 가입해야 할 저축이 있었는데, 애국저축, 강제저축, 보통저축 등 세가지였다. 애국저축은 독신일 겨우 임금에서 매달 8엔 75전을 공제하고 회사가 보관하며 조선인 노동자가 만기 퇴직할 때만 돌려주는 저축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인이 도망치거나 중도 퇴직할 경우에는 돌려받지 못햇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만기가 아니더라도 중도해지가 가능했다. p 071



이 자료(유바리 탄광 개황)의 주목할 만한 부분은 훈련 기간 중의 지급 임금, 다시 말하자면 훈련 수당의 차별대우다. 조선인은 일률적으로 하루 1엔 80전의 훈련 수당이 지급되었는데, 근보대원(일본인)은 원래 무상인데도 하루 2엔 50전으로 조선인보다 70전이나 많이 지급되었다. p 083



예를 들면 1944년 9월 1일부 ‘조선인 노무자 내지 송출개선 강화책’에는 조선에 있는 가족들에게 송금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송금이 이루어지도록 (1) 일괄 송금 기타 특별한 조치를 강구할 것, (2) 송금처는 조선 군도로 할 것, (3) 가족 송금은 매달 장려할 것 등을 지시하고 있다. p 090



훗카이도 각 광업소 앞으로 보낸 조선총복구 관산국장의 통달 ‘반도 송출 노무자의 송금 기타의 연락 방법에 관한 건’에는 가족 송금에 대해 아직도 실시하지 않는 광업소가 많다고 지적하는 내용이 있다. p 091



스미모토 본사의 고노마이광업소에서는 『반도 노무원 통리 강요』에 “(조선인의)임금은 내지인의 80%정도의 수입으로 하는 것을 방침으로 한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p092



신친일파들이 그렇게 물고 빠는 일본에서 발견된 수 많은 사료들이, 조선인을 강제징용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조선인 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들 사이에 얼만큼의 차별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당시 일본 기업이 조선인 노동자에게 제대로 된 임금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눈 앞에 버젓이 있는거다. 그럼에도 신친일파들은 이러한 사료들은 없는 존재로 보거나, 아니면 본인들이 원하는 1%의 사실만 뽑아서 99%의 거짓을 보탰다.



조선인은 만기가 되어야 강제저축을 인출할 수 있었을 뿐, 중도 퇴직한 사람에게는 기업들이 강제저축을 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우연은 말하지도 않고 서술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강제연행한 조선인에 댛나 일본기업들의 핵심적 횡포인데도 이우연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p 087



실제로 2012년 5월 당시 신 일본제철(현 일본제철)이 패소하면서 4명의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원고)에게 1억 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한국 대법원이 선고를 내렸을 때, 기업 측은 처음에 그렇게 깨끗히 처리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국 대법원 한결대로 하겠다는 의사 표현을 한 것이다. 하지만 얼마 후 일본 정부가 끼어들어 방해하면서 개인 대 기업의 재판을 마치 나라 대 나라의 재판인 것 처럼 왜곡했다. p 095



이상의 인용문(19년 11월 일본 국회 중의원 회의록)을 보면 2018년 11월 시점에도 일본 정부는 개인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고, 배상 문제는 한일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분명히 인정했다. 그런데도 일본 측은 양국이 약속했기 때문에 재판에서 개인은 구제받지 못한다는 또 다른 주장을 내놓았다. 일본 측은 한국이 1965년에 일본과 맺은 약속을 어겼다고 강변하기 시작했다. p 102



심지어는 일본 정부조차도 피해자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물론 인정만 했을 뿐 배상과는 별개라는 현 아베정부의 역사관이 참. 아니 그전에, 꼭 이러한 문제가 터질 때마다 일본은 항상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 이라는 아주 좋은 방패를 들고 나왔다.




비단 강제징용 문제만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국민에게 제일 아픈 손가락인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 대한 사실도, 신친일파들은 아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 대부분의 위안부는 기생양성소 권번 출신이거나, 요리옥 기생출신, 혹은 가부장제(호주제) 사회에서 발생된 성착취 라고 이야기 한다. 심지어 위안부는 고임금 매춘부였으며, 자유롭게 폐업이 가능했고, 자발적인 성매매라고 한다. 강제 연행사실은 없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업자(포주)의 책임일 뿐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서는, 해방 이후 한국에는 미군 성매매 업소등 자발적으로 운영된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 결국 이들은 위안부를 오래된 한반도의 역사 선상에 있었던, 기존부터 있었고, 이후에도 계속 있었으므로, 일본으로 인해 생겨난 범죄가 아니라, 한국에 있는 수많은 풍속 중 하나일뿐이라 이야기한다.



- 「반일종족주의」 인용


헌병과 경찰이 길거리의 처녀를 납치하거나 빨래터의 아낙네를 연행하여 위안소로 끌어갔다는 통념은 단 한 건의 사례도 확인되지 않는 새빨간 거진말이었습니다. p 017



위안부란 일본군에 부속된 직업적 창녀들이다. 그녀들은 남자를 가지고 노는 방법을 알고 있다. 개인별로 독방에서 생활하고 영업하였다. 식사는 위안소의 업주가 제공하였다. 그녀들의 생활은 비교적 사치스러웠다. 식료와 물자를 구입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들의 생활은 좋았다. p 110



요컨데 미군의 심문기록은 위안소가 군에 의해 편성된 공창제로서 고노동, 고수익, 고위험의 시장이었음을 더없이 생상하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p 116



그들(일본군 ‘위안부’문제 운동가나 연구자들)은 빈곤계층의 여인들에 강요된 매춘의 긴 역사 가운데 1937~1945년의 일본군 위안부제만 도려낸 가운데 일본 국가의 책임을 추궁하였습니다. 그들은 인도주의자도 여성주의자도 아니었습니다.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아니 난폭한 종족주의자였습니다. p 253



이건 지금 위안부를 보는 시각과 전혀 다릅니다. 옛날 사람들이 위안부가 뭔지 몰라서 그랬을까요. 오히려 반대죠. 위안부가 어떤 건지 잘 알았지요. 당대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위안부로 갔는지 잘 알았지요. 그래서 위안부를 일본 식민지배의 피해자로 보지 않았고, 일본에 배상을 요구하지도 않았던 겁니다. p 255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 문제도 정말 많은 사료가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피해 할머니들이 두 눈 버젓이 뜨고 살아계신다. 헌데 어떻게 저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인가. 대체 무엇을 근거로 저렇게 말하는건가 봤더니, 왠걸. 근거는 없다. 혹은 일본군 위안부가 엄연히 불법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료들 중에서 일부만 발췌한 뒤에, 본인들이 소설을 가져다 붙인 것이다.



위의 인용문(미군 포로 심문 보고서)으로,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 때문에 전차금을 다 상환하여 폐업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하더라도 ‘위안부’들은 일본군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될 조선으로의 귀환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p 124



위의 인용문(군마현 경찰서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일본)경찰이 거동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검거하여 심문했더니, 그들이 상하이 일본군의 명령으로 작부 3,000명을 모집해 상하이로 보낸다고 말한 사실이다. 여기서 업자들은 일본군의 ‘명령’으로 작부를 모집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군이 업자들에게 명령해 작부(위안부)를 동원헀다는 사실은 곧 ‘위안부’동원의 책임이 일본군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p 137



이 문서(육군성 문서 ‘군 위안소 종업부 등 모집에 관한 건’)는 위안부 강제연행이 일본이나 조선 내에서 실제로 있었고, 경찰에 의해 체포된 업자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또한 업자들이 납치나 유괴 등을 저질렀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이 업자들은 일본군이 선정한 업자인데, 일본군의 책임이 아니라면 누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p 157



일본은 1925년 국제 조약인 ‘추업을 시키기 위한 부녀 매매 금지에 관한 국제조약’에 가입했는데, 이 조약은 미성년자의 인신매매를 금지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제 2조에서 다음과 같이 성인 여성을 성매매 목적으로 해외로 보내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p 164



네모토 중사는 1941년 3월부터 만주 치치하얼로 징병되었다고 한다. 그는 거기서 보병 제 59연대에 배속되었는데, 그 부대에는 조선인 남녀를 ‘사냥’해오는 부대가 있어서, 조선 남자들은 강제노동으로 혹사당했고 조선 여자들은 강제적으로 ‘위안부’가 되었다고 증언한바 있다. p 190



신친일파들이 극히 일부만 조금씩 인용한 사료들의 전문 내용은, 일본군 위안부가 왜 불법인지, 어떤식으로 인권을 유린했는지, 위안부 모집에 일본군이, 일본정부가 어떻게 개입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신친일파들은 이러한 부분은 깔끔하게 삭제하고, 오롯이 본인들에게 유리한 부분만 발췌하여 소설을 쓴 것이다.



이렇게까지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폄하하며, 소설을 쓴 신친일파들이 노리는 건 단 하나. 일본군과 일본 정부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이미 과거 한국 박정희, 박근혜 정권에서도 일본에게 면죄부를 준적이 있었다. 앞에서 이야기 한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과, 박근혜 정권의 ‘위안부 밀실협약’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박근혜 정권의 밀실협약은, 현 정부에 들어서 파기되긴 했으나 일본은 받아들이고 있지 않으니, 이 역시 엄연한 면죄부 인 것이다. 신친일파들은 이 두 정권 세력에 힘입어, 날개를 달았던거다.



심지어는 위안부라는 제도가 조선시대에, 그것도 세종대왕이 1435년에 군을 위해 만든 제도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없었던 ‘군 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말이다. 자칭 ‘역사가’라고 하는 사람이, 그 어디에도 없는 내용을 만들어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존경하는 세종대왕님을 끌어들여 또 한번의 왜곡을 했다. 




호사카 교수님은 책 초반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영화 『엑소시스트(1943)』에서 악마와 사투를 벌인 신부가 남긴 “악마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면 안된다. 악마는 거짓말에 교묘히 진실을 섞는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현대의 ‘악마’는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하는 ‘말’ 속에 존재한다. p 027



과거에 모 출판사에서 ‘지일’을 지향하는 한 도서를 읽고 서평을 한 적이 있다. 그 책의 제목만 봤을 때는, 그야말로 올바른 ‘지일’을 통해 ‘극일’로 향하는 느낌이었으나 실상은 달랐다. 책 속의 내용은 반일종족주의를 쓴 신친일파들과 같은 맥락의 내용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믿어버릴 정도로, 아주 교묘한 글이었다. 1%의 사실에 99%의 거짓을 덧붙여, 언뜻보면 우리가 일본에게 반성과 사죄를 바라는 건 그저 한국민의 통속적인 관습에 불과하다는 내용이며,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은 우리의 발전을 도왔다는 것. 아주 대놓고 일본 우파가 지향하는 ‘역사수정주의’에 입각한 내용이었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지만, 어떤 책이든 팔아서 이윤을 남겨야 한다지만, 적어도 출판사라면, 본인들이 내놓는 책이 어떤 내용인지, 정말 세상에 내놓만한 책인지, 정말 그 책을 세상에 내놓아도 되는지는 한번 고려해야 하는게 아닌가? 결국은 그 출판사도 악마의 꾐에 넘어갔던 것일까. 난 이후 그 출판사의 책을 멀리하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정말 많은 신친일파들이 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친일파들과는 달리, 더욱더 교묘하게 ‘말’ 속에 악마를 숨겨서, 보다 많은 사람들을 꾀어내려 하고 있다. 하지만 아주 조금만, 진실을 알려는 마음이 아주 조금만 있다면, 이 책을 쓰신 호사카 교수님처럼 신친일파을 속아낼 ‘눈’을 키워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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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이 귀찮아서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했다 - 할 일은 끝이 없고, 삶은 복잡할 때
에린남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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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N년차인 나, 결혼 전에는 집에 빈 공간이 많았고 물건도 많이 었었는데. 어느새 거실, 방할 것없이 물건으로 가득가득 차있다. 더 신기한건 물건을 비우면 비울수록, 더 채워진다. 몇 개월 뒤면 이사를 가야하는데, 이사가기 전에 최대한 짐을 줄이고 싶은데 이거 참. 정말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는 삶을 살아야 하나? 싶을 정도로 집에 뭔가가 참 많다. 주말마다 봉다리씩 무언가를 버리는데도 말이다. 



이런 타이밍에! 어떻게 하면 미니멀한 삶을 살 수 있는지 궁금하던 찰나에!! 상상출판에서 이 책이 도착했다.


제목부터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집안일이 귀찮아서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했다」.


미니멀리즘이란, 그저 물건을 적게 사용하는 삶을 사는 거라 생각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미니멀리스트라고 생각했다. 근데 이 책을 읽고 보니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미니멀리스트는 그저 물건을 적게 사용하는 게 아니라,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만을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플라스틱 양념통을 받아왔을 때는 단지 새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득템’한 기분이었다. 서랍장 형태의 통에 설탕과 소금, 고춧가루를 넣으면 되곘다고 구체적인 계획도 짜놓았지만, 슬프게도 플라스틱 양념통 역시 상부 장에 넣어둔 후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p 031



덕심을 자극하는 제품을 봐도 강인한 정신력으로 견뎌내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2020년 경자년을 맞아 각종 브랜드에서 디즈니와 협업해 미키 마우스 제품을 선보였지만 구경만 했다. 그렇게 꾹꾹 잘 참다가 결국 하나를 구입해버렸다. p 181



우리 집에는 정말 많은 용기들이 있다. 그것도 카카오프렌즈 콜라보 용기들. 상부 장에 아주 가득가득 쌓여있다. 머그컵, 온텀블러, 냉텀블러, 접시 등. 사용은 하지도 않으면서, 수집만 엄청 했다. 근데 또 이렇게 수집한 것 치고, 내가 이렇게 많은 공간을 할애할 만큼, 이 캐릭터들을 좋아하나? 싶으면 그건 또 아니다. 



물건을 비울 때 스스로 해보면 좋은 질문

1) 나에게 필요한 물건이 아직도 많다고 느끼는가?

2) 단지 미련이 남아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3) 같은 아이템을 다시 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해?

4) 나를 위한 물건인가, 남을 위한 물건인가?

5) 이 물건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한가?


저자는 물건을 버릴 때, 스스로에게 저 다섯가지의 질문을 했다. 우리집 상부 장에 있는 카카오프렌즈 콜라보 용기들을 바라보며, 저 다섯가지 질문을 나에게 해보았다. 일단 필요한 물건이 과도하게 많다. 텀블러도 사용하는 것만 사용하고, 접시도 사용하는 것만 사용하고, 컵도 사용하는 것만 사용한다. 고로 카카오프렌즈 용기들은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내다 버리거나, 팔기엔 솔직히 미련이 있다. 혹시라도 나중에 다시 갖고 싶어질까봐. 그런데 또 이 물건들을 보고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지지는 않는다. 결국! 이 카카오프렌즈 용기들은 나에겐 비울 물건 제 1 순위였다. 하..하하....하....


그 외 나머지 내 수집품들과 책들은 같은 물건은 다시 나오지 않으므로 살 일이 없고, 오로지 나를 위한 물건이고,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에 100% 부합하기에, 비울 물건에서 제외!!!!.........라고 정신승리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슬프다.


매번 환절기가 되면 옷을 버린다. 최소 3개월 이상 안 입는 옷, 늘어난 옷, 색이 바랜옷만 골라서 버리는 대도 20L봉다리로 두, 세봉지는 나오는 듯하다. 신랑과 나는 입는 옷만 입고, 옷을 안사기로 참 유명한데, 왜이렇게 버리는 옷은 계속 나오는지. 신기하기 그지없다. 


‘대체 왜지? 이 옷들은 대체 뭐지?’ 라는 생각에 옷을 빤히 쳐다 보고 있으니, 떠올랐다. 지금의 신랑이, 남친이였던 시절. 그 시절 우리가 데이트를 할 때 입었던 그 옷들! 매년 버리려다가도 그 추억에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던, 그 옷들이었다. 결국 지나간 추억에 얽매여, 몇년 째 물건들을 싸짊어다니고 있었다.


이제서야 물건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확실해 졌다. 가지고 있는 물건이 절대 나를 대변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물건이 아닌 나 자신을 스스로 기억하고, 추억해야 한다. 그러니까 물건에 너무 많은 감정과 에너지를 내어주지 않아도 괜찮다. p 206


하지만 이제 지나간 추억에 연연하지 않기 위해, 과감히 버리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결혼하기 전에, 중/고등학교 교복도 과감히 버린 나인데. 결혼 전 데이트 할 때 입었던 옷들이라고 못 버릴게 뭐가 있을까! 무엇보다 지금 신랑과 나는, 아직도 결혼 전과 다름없이 알콩달콩하는데. 주말마다 짧은 동네산책이라도 나가는데. 매일 매일이 데이트 같은 삶인데 뭐. 고로 과감히 버린다. 그런데 버렸는데도, 옷이 아직도 많네? 이상하네...



 

난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삶은 말 그대로 주변에 물건을 최소화 하는 삶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아마 이 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평생 미니멀리즘에 대한 착각을 한 채 살았을 것이다. 그저 물건만 줄이면 된다는 생각을 하며. 하지만, 이제는 안다. 진정한 미니멀리즘은 나에게 ‘불필요한’ 물건을 줄이는 것과 함께, ‘쓰레기’도 줄여나가는 삶이라는 걸. 그리고 이 삶은 또 하나의 환경을 살리는 운동이라는 걸.


분리수거를 열심히 하고, 회사에 텀블러를 들고다니고, 마트에 장바구니를 들고다니며, 출근할 때 에코백 하나로 몇년을 사는 나는, 내 나름대로 환경을 생각한다고 자부했었다. 아..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정말 환경을 파괴하는 주범이었다 ㅜㅜ


처음에는 쓰레기가 우리 집, 내 공간,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만으로 할 일이 끝난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내나 버린 물건들의 행선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다시 쓰이기를 바랐지만, 대부분은 재활용되지 못하고 쓰레기로 전락해서 매립된다는 것을 알았다. 잘 썩지 않는 플라스틱이 바다로 흘러들어가 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p 095


‘쓰레기를 줄이는 방법’을 검색해보다가 아주 자연스럽게 ‘제로 웨이스트 운동’을 알게 됐다. 제로 웨이스트는 쓰레기의 사용과 배출을 최소화하려는 움직임으로, 실 생활에서 발생하는 쓰레기, 특히 비닐봉지나 플라스틱 용기 같이 썩지 않는 소재의 사용을 줄이려는 실천을 말한다. p 096


가방은 무거워졌고, 텀블러는 매일매일 세척해줘야 했다. 우리의 새로운 식수 생활은 생수를 사 먹는 일보다 훨씬 불편했다. 마시고 버리면 끝이 아니라, 손이 많이 가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므로 확실히 귀찮다. 하지만 생수보다 보리차가 더 맛 좋다. p 111


우리집에는 정말 곳곳에 플라스틱이 있다. 매주 생수를 사먹기에, 당연히 플라스틱 생수병이 나온다. 화장실에는 플라스틱 칫솔, 플라스틱 용기의 샴푸와 린스. 플라스틱 용기에 들어있는 클렌징폼, 하루에도 수어번 사용하는 일회용 랩. 와, 나는 진짜 어쩜 이러지? 난 결국 편리하다는 핑계로 플라스틱 제품을 펑펑 써재끼고 있었다. 결국은 인간이 편리함을 버리고 불편한 삶을 택해야, 환경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당장이라도 저자처럼 물을 끓여마시고, 환경에 프렌들리한 대나무칫솔, 옥수수전분 봉투, 실리콘 랩 사용을 해야할까? 휴. 또 막상 그렇게 살려고 하니 벌써부터 막막하기도 하고. 우선은 생수 사마시는 것을 줄이고, 보리차를 끓여먹는 것부터 시작해볼까?


이제는 물건을 집으로 들일 때, 내가 물건을 제대로 쓸 수 있을지까지 생각해본다. 방법은 간단하다. 충동적으로 가지고 싶은 물건이든, 첫눈에 마음이 뺏겨버린 물건이든 간에 우선 이성을 앞세워 이 물건과의 마지막 순간이 어떨지 예상해보는 것이다. p 129


다행인 것은 인터넷 쇼핑을 할 때, 장바구니에 넣자마자 바로바로 구입한느 대신 며칠 묵혀두는 습관이 생겼다는 거였다. 인터넷 쇼핑몰의 장점 중 하나이다. 바로 사지 않는다고 해도 누구의 눈치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 p 187



이제 물건을 살 때, 다른 건 몰라도 이 두 가지는 꼭 기억해야겠다.


1) 정말 나에게 필요한 물건이 맞는지? 장바구니에 넣고 몇일을 묵혀본다. 구입하지 않고 몇일을 묵혔는데도 사는데 문제가 없으면 살 필요가 없다.

2) 같은 용도의 물건이 더 있지는 않은지? 어차피 쓰던 것만 쓴다.


지금까지의 생활방식을 바로 바꾸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비어내고, 환경에 도움이 되는 생활방식을 시작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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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나의 모든 봄날들 - 엄마와 함께한 가장 푸르른 날들의 기록
송정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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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흐름출판에서 출간된 한 만화에세이를 보고 펑펑 울었던 적이 있었다. 그 책의 주제는 엄마였다. 그리고 오늘, 난 RHK에서 출간한 에세이 「엄마와 나의 모든 봄날들」을 읽고 또 펑펑 울고 말았다. 읽다가 너무 힘들어서 책을 서너번 정도 덮었다가, 폈다가. 책이 내 눈물에 젖지는 않을까, 조심하면서 겨우겨우 읽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엄마랑 놀러도 잘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으로 다니고, 공연도 보러다니고 그래서, 이정도면 난 정말 엄마에게 잘하는 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난 세상 나쁜 딸이었다. 엄마가 어떤 음식을 제일 좋아하는지, 엄마가 제일 좋아했던 책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없었다.


나는 정말 우리 엄마에게 세상 나쁜 딸이었다.



이모티콘을 이모콘티라고 말해서 딸의 짜증을 촉발시킨다. 그 엄마는 요즘은 컴퓨터의 컨트롤 브이와 컨트롤씨도 모른다고 또 딸에게 혼났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딸에게 가나다라를 가르쳐주려고 수백 번 설명해주고, 더하기 빼기를 알려주려고 수백 번 가르쳐주었다. 걸음마를 가르쳐주려고 수천 번 알려주고 한 걸음만 떼도 물개박수를 쳐주셨다. 세상 이치를 알려주려고 수천 번이나 얘기해주시는데 딸은 이모티콘이나 컴퓨터 설명 몇 번에 짜증을 낸다. p 088




시간이 엄마의 얼굴에서 젊음을 가져갔다. 김진호의 <가족사진> 속 노랫말처럼 ‘나를 꽃피우기 위해 거름이 되어버렸던’ 엄마의 모습에 딸의 가슴이 무너진다. p 066



아, 불과 몇일 전 내 모습이다. 엄마가 이것좀 해달라, 저것좀 해달라 할 때마다 내 반응은 항상 짜증이었다. 정말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처음부터 짜증이 나온다. 엄마는 왜 이런 거 하나 못하냐고 타박은 덤이다. 회사에서 손윗사람들이 저런 질문을 하면 얼굴에 미소를 자동장착하고, 흡사 서비스직처럼 응대를 하는데, 이상하게 엄마가 같은 질문을 하면 난 세상 나쁜 딸이 되었다. 그거 하나 알려주는게 뭐가 어렵다고, 짜증부터 낸다.



우리 엄마는 내 어릴 적, 내 똥기저귀 갈아주고, 내가 궁금한건 하나하나 다 알려주고 그렇게 살아왔는데, 정작 다큰 딸 자식은 엄마의 사소한 질문에도 짜증으로 대답을 하니, 휴. 난 정말 내가 철이 다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철은 개뿔. 아직도 짜증으로 중무장한 철없는10대 사춘기 소녀 저리가라였다. 그런데도 엄마는 이런 나에게 짜증은 커녕, 내가 저녁먹으러 간다고 하면 뭘 먹고 싶냐고 먼저 물어본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고, 엄마는 항상 날 위해 살았다. 날 위해 본인의 젊은 날을 다 썼다. 나는 엄마를 위해 무엇을 했나. 사회에 나가서 빠르게 자리를 잡았고, 결혼을 한 게 내 딴에는 엄마의 자랑거리라 생각했는데, 이 모든 건 그저 나를 위한 행위였지 엄마를 위한 행위는 아니었다.




 


못난 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찍은 사진은 꽤 많다. 결혼한 이후에도 엄마랑 둘이서 공연도 자주 보러 갔고, 나들이도 꽤 다녔으니까. 심지어 엄마 아빠랑 같이 여행도 자주 다녔다. 심지어 올 여름도 엄마 아빠와 함께 여름휴가를 계획중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난 엄마와 여행에서 착한 딸이었나? 엄마랑 같이 다니기는 했지만, 엄마가 원하는 걸 하기보단 내가 원하는 것만 했던 것 같다.



여행지는 어디든 좋다. 발 닿는 데로 가서 팔짱 끼고 걸으며 끝없이 수다를 떨면 된다. 무뚝뚝한 딸이라 미안하다고 속마음을 표현하기도 하고, 엄마가 내 엄마여서 행복하다는 고백도 해본다. 엄마는 내 사진을 예쁘게 찍어주고, 내가 엄마를 예쁘게 찍어주고, 이 골목 저 골목, 알려지지 않은 길을 걷다가 식당에 들어가기도 하고. 실수 좀 하면 어떤가. 엄마인데, 딸인데 ……. p 061



언제나 엄마는 내가 하자는 대로 했고, 내가 가자는대로 갔으며, 내가 먹고싶은 것을 먹으러 갔다. 내가 원하는 대로 안되면 바로 짜증을 내는 딸이었기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엄마라서 그랬을까? 아니, 엄마는 그저 딸과 같이 다니는 이 시간이 좋았던 것 같다. 그래서 딸이 하자는대로, 딸이 가자는데로 다녔다. 못난 딸은 그저 내가 좋아하는 건, 엄마가 다 좋아하는 거라는 착각했을 뿐. 하지만 알면서도 난 앞으로도 엄마와 시간을 보낼 때, 내가 좋아하는 것 위주로 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거라면, 다 좋아할테니까!’ 라는 착각을 계속 한 채로..




 



정말 다행인 사실은, 이 책의 저자는 엄마를 멀리 떠나보냈지만, 아직 내 곁에는 엄마가 있다. 아직 엄마와 함께 할 시간이 길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난 애교는 커녕 애정표현도 없는 딸이라서 엄마한테 살가운 소리 한번을 한 적이 없다. 그래서 살가운 소리를 하기 보다는, 엄마가 하고 싶은 일들을 같이 해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게 뭔지 지금까지도 잘 모르는 못난 딸이니까, 지금이라도 엄마에게 ‘엄마의 버킷리스트’를 작성해달라고 말해보면 어떨까 싶어졌다. 그렇게 ‘엄마의 버킷리스트’를 차곡차곡 하나씩 해나간다면, 어떨까?



 딸은 사실, 엄마의 아기 캥거루이고 싶다. 딸 옆에 엄마가 없으면 행복이라는 그림이 완성되지 않는다. 엄마가 딸에게 그러하듯 딸도 엄마에게 바라는 건 금은보화가 아니다. 엄마가 돈 걱정하지 말고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 옆에서 잔소리도 하고 도닥여주고 못난 딸 예쁘게 봐주면, 그러면 된다. 그러니 세상의 엄마들은, 딸을 위해서라도 건강해야 한다. p 048




저는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길래 엄마의 자식으로 태어났을까요?

엄마가 우리 엄마라는 사실은 제 인생 최고의 행운입니다.

엄마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해주신 신께 감사합니다.

엄마가 계시기에 고통스러울 때마다 다시 힘을 냅니다.

엄마가 계시기에 눈물이 날 때마다 차라리 웃어봅니다.

엄마가 계시기에 무릎이 꺾일 때마다 주먹 쥐고 일어납니다.

엄마가 계시기에 땅을 보는 시선을 들어 하늘을 봅니다.

내 삶의 이유, 내 삶의 힘, 내 삶의 배경인 우리 엄마. p 192


내가 말 안해도 엄마는 당연히 다 알거라고 생각하지만,

아마도 이 포스팅을 보고 계실거라 생각하지만,

평소에는 표현도 없는 딸이지만, 엄마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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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마 인턴
나카야마 유지로 지음, 오승민 옮김 / 미래지향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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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유일하게 본방사수 하는 드라마는 tvN에서 방영하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다. 동갑내기 5인방, 99즈도 참 매력넘치고 좋지만 이상하게도 난 그들 밑에 있는 전공의들에게 눈길이 갔다. 간담췌웨과의 장겨울, 흉부외과의 도재학, 산부인과의 추민하, 신경외과의 용석민/안치홍/허선빈. 이 여섯명의 전공의들의 생활을 보면서, 이들이야 말로 정말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주인공이 아닐까 싶었다. 헌데 꼭 이들의 뒷 이야기를 보여주는 책을 만났다. 바로 이 리뷰의 주인공인 「울지마 인턴」.



그동안 읽었던 의학관련 책이라고는 이국종 교수님의 「골든아워」밖에 없었다. 슬의의 99즈처럼 초보 의사가 아닌, 숙련된 의사였던 이국종 교수님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초보의사의 이야기는 슬의를 보면서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한 정도랄까? 그랬는데, 이 책 덕분에 모든 의사들은 초보시절이 있었다는 것, 그들이 진정한 의사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뇌를 하고 성장통을 겪었는 지를 알 수 있었다.



가고시마에서 태어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아메노 류지. 공부를 잘해서 의대에 진학했고, 의사면허를 취득하여, 도쿄에 있는 종합병원에 들어가 이제 겨우 외과 인턴 1년차였다. 매번 병원 숙직실에서 잠을 자고, 언제나 당직당직당직. 피곤할게 자명한 일인데도, 그는 ‘의사’라는 직업에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고, 하루 빨리 ‘진짜 의사’가 되고 싶어했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할까? 류지는 의사를 선망하던 사람들이 한번 쯤은 생각해봤을, 그런 관념? 정의감? 에 투철한 초보 의사였다. 



​그러니까 그의 생존은 종료되어도 된다? 의료비가 전액 무료인 기초생활수급과 관련이 있는걸까? 아니, 수술을 하면 몇 년은 더 살 수 있을테고 적어도 입으로 밥을 먹을 수 있게는 될것이다. 전혀 수를 쓰지 않는다면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수술을 하는게 옳은지, 안 하는게 옳은지. 단지 수명을 연장하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수술하는 게 맞다. 하지만 사회 전체로 본다면 어떨까. 수술을 해서 그의 생명이 연장될 경우 어떤 일이 발생할까. 사회 전체로 보면 부담만 증가할뿐일까. p 065



가족이 없는 94세 치매에 걸린 암환자였다. 류지는 이 환자가 수술을 받으면 살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데, 병원 차원에서는 수술이 아닌 완화의료를 하는 걸로 결정했다. 류지는 이런 결정을 한 병원이 환자를 꼭 돈으로만 보는 것 같아서 정말 못마땅했다. 하지만 조금 숙련된 의사들의 생각은 달랐다.



환자는 오래 살 만큼 살았고, 지병까지 앓고 있는 상태라 수술자체가 위험하며, 입원비랑 수술비 몇십만 엔을 세금으로 부담하면서까지 치료를 해야하는가. 더군다나 수술로 생명을 연장시킨다면 본인과 가족이 행복해야하는데, 이 노인이 수술을 받아 생명이 연장된다면 대체 누가 행복해지는가?



 의사라고 모든 환자를 다 살릴 수 있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류지는 의사라면, 환자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의사였다. 하지만 병원측은 류지와 달랐고, 류지는 이러한 병원측 의견에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며, 끝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류지의 말도 맞지만, 숙련된 의사들의 말도 일리가 있다. 뭐라고 해야할까? 의사는 모든 환자를 살릴 수 없다. 살려낸 환자가 행복하리란 보장도 없다. 의사가 신은 아니니까. 어쩌면 류지의 생각은 초보의사들이 겪은 흔한 문제가 아닐까 싶었다. 아니, 무엇보다 이런 마인드를 가졌기 때문에, 나중에 환자 입장에서 생각하는, 환자를 위한 좋은 의사가 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류지가 맡은 또 다른 환자,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아이 다쿠마가 있다.



의학적으로 얕은 진정상태에서 이런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류지도 그건 알고 있엇다. 그럼에도 류지는 아이에게서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느꼈다. 류지 혼자서 그렇게 느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 작은 인간을 류지는 어떻게든 살려내고 싶었다. p 035



의학드라마를 보다보면, 의사들이 의사가 된 동기 대부분은 과거에 환자의 가족이었던 경우가 태반이었다. 류지 역시 그랬다. 어린시절 갑자기 쓰러진 형을 보았고, 그렇게 형을 떠나보냈다. 본인은 기억하지 않으려 했겠지만, 류지는 의대에 진학했고 의사가 되었다. 그런 류지 앞에 나타난, 혼수상태에 빠진 다쿠마는 류지에겐 특별했다. 류지는 다쿠마를 통해서 어린시절의 형을 보았다. 형은 떠나보냈지만, 이번 만큼은 살려내려고 했고, 그래서 다쿠마의 병실을 매일매일 찾아갔다. 인턴이 해야할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류지에게 다쿠마는 특별한 환자였다. 



‘난 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이렇게 감사 인사를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데 …….’


그런 생각이 들자 류지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무엇보다 자신이 아직 그런 감사의 말을 들을 만한 일을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하루라도 빨리, 빨리, 빨리. 의사로서 성장해야만 한다. p 084



다쿠마의 응급 수술 때, 류지는 제2 어시스트로 참여했다. 수술 집도는 다른 숙련된 의사가 했지만, 적어도 류지는 다쿠마의 수술을 끝까지 지켜봤고 도왔다. 그리고 하루 24시간, 발이 닳도록 다쿠마 병실을 드나들었다. 그럼에도 다쿠마의 아버지에게 감사인사를 듣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적어도 류지는 경험은 부족한 초보 의사지만, 마음가짐 만큼은 이미 숙련된 의사 그 자체라 생각했다.



나는 지금 의사로 일하고 있다. 틀림없이 난 이 심야의 도시를, 지친 몸으로 쓰러지듯 잠들어버린 어른들을, 아무것도 모른 채 잠자고 있는 아이들을 지키고 있다. 과연 잘 해내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말이다. 지금은 아무것도 못 하고 아는 것도 없지만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많이 배워서 인턴 생활을 잘 완수해내고 말겠다. 아무리 힘들어도 상관없다. 사토 선배에게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갖춘 더 친절한 의사가 되고 말것이다. p 118



지난 몇 달간 인턴 생활을 하면서 류지 내면에는 주어진 일을 100% 지시대로 완벽하게 해내고 싶다는 마음을 넘어서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해내고 싶다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p 142



그저 인턴이었던 류지는, 어린 환자 다쿠마를 통해 트라우마로 남았던 형의 죽음을 이겨냈다. 죽음을 기다리는 치매노인을 만나고, 동갑 내기 말기암 환자를 만나면서 ‘의사로서’ 또 한뼘 성장했다. 



환자의 눈 높이에 맞추고, 오롯이 환자를 생각하는 의사. 아직은 초보의사지만 류지는 이미 ‘진짜 의사’다. 세상 모든 의사들이 류지와 같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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