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말꽃모음 말꽃모음
설흔 엮음 / 단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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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달 전에 독립선언서 말꽃모음이라는 책을 구입해서 읽은 적이 있다. 그저 인터넷 서점 굿즈에 혹해서 구입했던 그 책은 나에게 크게 와닿았다. 이후 말꽃모음이 시리즈로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조만간 사야지 싶었는데 그대로 까먹고 말았더랬다.....

 

그러다가 역사 분야 신간을 확인하던 중에 바로 이 책 독립운동가 말꽃모음이 새로 나온 것을 알았다. 앞서 발매된 책은 나중에 산다고 치고, 이 것부터 먼저 읽어야지 싶었다. 받자 마자 읽기 시작했다. 눈으로 천천히 읽었고, 입으로 다시 한번 읽었다. 그냥 한 번 읽고 책장에 꽂아두기에는, 모든 문장이 너무 아깝고 또 아까웠다. 이 책은 그저 그런 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분들이 생전에 입에 담았던 말꽃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짧게는 두어문장, 길게는 열댓문장 정도의 말꽃이다. 거기에 독자로 하여금 말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이 책의 엮은이 설흔님이 당시의 시대상황 이나 그분들의 행적에 대해 간략히 적어놓기도 했다. 심지어 보물같은, 몇 안되는 독립운동가의 사진들도 실려있다.

 

이 책에는 백범 김구, 단재 신채호의 말꽃은 없다. 이미 그들에 대한 말꽃모음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여성 독립운동가의 말꽃도 없다. 이 역시 앞으로 책으로 나올 예정이기 때문에 제외했다고 한다. (라고는 하지만 이 책에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말꽃이 아주 소수 실려있긴 하다)

 

대한의 남자들이여, 국가를 약하게 만드는 악습을 고치지 않으면 비록 오늘은 비단옷과 명주옷을 입고 있을지라도 내일은 등에 채찍이 내릴 것이다. 대한의 여자들이여, 사회를 부패하게 만드는 추한 행동을 버리지 않으면 비록 오늘은 얼굴에 분을 발랐어도 내일은 똥을 바를 것이다. - 안창호

 

바로 오늘부터 우리나라를 괴롭히는 강국과 전쟁을 시작해 국권을 회복할 것이다. 의아하게들 여길 것이다. 병력도 미약하고 군함과 대포도 부족한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싸울 생각이냐고. 러일 전쟁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선전포고는 이삼 년 전의 일이나 개전 준비를 시작한 것은 38년 전이다. 일본은 개전을 준비한 지 38년 후에 결과를 얻었다. -안창호

 

190930대 초반의 안창호는 60대 노인이 된 이토 히로부미를 만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일본의 그릇된 태도를 하나하나 지적하며 비판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의외로(!) 안창호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심지어 공식적인 연설회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기까지! 그 연설회에서 안창호가 한 말이 바로 대한의 남자들이여, 대한의 여자들이여였다. 이 연설은 지금 당장 뉴스에서 흘러나와도 손색이 없다. 백년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일본을 등에 업고, 일본의 돈을 쓰며, 일본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사회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에.

 

1919년 전무후무한 세계적 회의가 열렸고 약소민족들에게도 권리를 준다는 말이 전해졌다. 이에 동경유학생들이 독립운동의 첫소리를 냈다. 도쿄에서 사관학교를 마치고 일본 육군 기병 제1연대 사관으로 재직하던 때였다. 꿈처럼 기쁜 중에도 불 보듯 뜨거워지는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김경천

 

여름이 끝나가고 초가을이 다가온다. 나뭇잎이 떨어지면 군사행동을 하기 어려우니 어서 무기를 준비해 압록강 한 번 건너는 것이 소원이라고들 말한다. 내 생각도 그렇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형편으로는 압록강은 고사하고 개천도 건너기 어렵다. -김경천

 

남만주의 3, ‘남만삼천이라 불리우던 세 명의 장군이 있었다. 김경천, 지청천, 신동천이 그들이다. 김경천과 지청천은 일본 육사 출신이다. 그들은 탄탄한 꽃길을 버리고 가시밭길, 즉 조국을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을 택했다. 만주에 있는 신흥학교에 들어갔다. 일본 육사에는 그들의 동기였던 또 다른 인물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 육군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응준. 하지만 그는 김경천, 지청천과는 달리 일본군에 남아서 독립군을 토벌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분명 친일파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그는 초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오래오래 잘 살았다. 우리나라는 이응준을 대한민국 육군의 아버지라 부른다.

 

자 그럼 다시 김경천, 지청천, 신동천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김경천, 지청천 장군은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하지만 위에 김경천 장군의 말꽃에서 보이듯 독립운동을 하는 그들의 생은 힘겨웠다. 김경천 장군은 스탈린의 강제이주로 인해 중앙아시아로 끌려갔고 그 곳에서 사망, 신동천 장군은 신흥학교학생들과 군사훈련 중 일본군에 매수된 중국군의 습격을 받아 사망한다. 지청천 장군만 유일하게 살아남아 광복을 보았다.

 

같은 일본육사 출신이었던 김경천 장군과 이응준. 김경천 장군은 독립군을 양성하며 독립운동을 한 반면, 이응준은 독립군을 일본군에 남아 독립군을 토벌하는데 앞장섰다. 김경천 장군은 비참하게 죽었고, 이응준은 대한민국 육군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으며 오래오래 잘 살았다. 정말 슬프지만 친일파는 3대가 떵떵거리고, 독립운동가는 3대가 망한다는 말이 들어맞는 순간이다.

 

나는 평생을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 바쳤다. 젊은이들은 그 정신을 잊지 말고 이어 가야할 의무가 있다. -이동휘

 

칼날보다 날카로운 삭풍이 나의 살을 벤다. 살은 깎여도 참을 수 있고 창자는 끊어져도 슬프지 않다. 내 발 내 집 빼앗은 것도 모자라 내 처자까지 넘겨다보니 차라리 머리를 잘릴지언정 무릎 꿇어 종이 되지는 않겠다. -이상룡

 

2019년은 대한민국 임시정수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일부 일본 지원을 받는 종자들은 임시정부가 망명정부라서 정식정부가 아니라는 개소리를 하고 있지만. 잊지말자! 지금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 정부라는 것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기에 지금 우리나라가 있다는 것을.

 

한국인들이 열망하는 건 단 두가지였다. 독립과 민주주의. 다른말로 바꾸어 쓰면 바로 자유.

자유를 모르는 이들에게 자유는 금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그 무엇! -김산

 

우리 혁명가들에게 나라가 넷이나 있다. 시베리아, 만주, 중국, 일본, 그러나 나라를 넷이나 가진 인간은 나라를 하나도 갖지 못한 인간보다도 훨씬 비참하다. 한국인들은 일본인, 중국인, 상하이의 영국인과 프랑스인 경찰, 심지어는 같은 한국인 경찰들에게도 합법적으로 체포된다. 그 어느 곳에서도 우리는 보호받지 못한다. -김산

 

독립운동가 김산. 다큐를 보며 여러번 들어본 이름이지만 다른 분들에 비하면 크게 기억에 남지는 않았더랬다. 헌데 이 책에서 김산의 말꽃 비중은 꽤 많다. (엮은이 스스로도 머릿말에서 김산에 대해 개인적인 관심이 있기에 말꽃 비중이 높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책 중간 중간에 분산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김산의 말꽃을 따라가다 보면 이 사람의 일생을 따라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1919년 한국을 떠나며 이 나라에서 태어난 것을 원망했으나, 그럼에도 울면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싸워서 승리한 후 조국으로 돌아오겠다고 한 15살의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은 독립운동을 하다 한국 감옥에 투옥되었다. 한국에서 석방된 후 중국으로 가니, 중국에서는 일본에 굴복했다는 무고를 받고 중국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렇게 그는 끊임 없이 싸웠고, 그만큼 오랜 감옥생활을 이어갔다. 종국에는 자신의 젊은 시절은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그 어떤 나라도 자기를, 동지를, 한국인을 보호해주지 못했다. 힘 없는 한국인 김산은 친구와 동지들이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내 삶은 실패의 연속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오직, 나 스스로에게는 승리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1938년 일본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중국에서 처형당했다. 나로써는 그가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았는지, 감히 상상해볼 수도 없다.

 


젊은이들은 서로 내가 먼저 죽으러 국내에 들어가겠다는 자세였다.

나가겠다는 사람을 모두 내보낼 수는 없는 상황이었으니 나중에는 제비를 뽑기도 했다.

먼저 죽으러 가겠다고 제비까지 뽑는다?

지금 사람들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 김성숙(의열단)

의로운 일을 행하자. 의로움을 추구하는 삶을 살자. - 이종희(의열단)

내가 몸을 돌보는 방법은 오직 하나,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다. - 김시현(의열단)

한 번 죽기로 결심했으니 어찌 즐거운 마음으로 가지 않겠습니까? -나석주(의열단)

우리가 반드시 강도 왜적을 섬멸하고 최후 목적을 이룰 날이 조만간 다가올 것이다. -윤세주(의열단)

나 홀로 적국에 들어와 사형을 선고받다니, 진실로 넘치는 영광이다. -김지섭(의열단)

 

의열단의 하루

상하이에서 나는 무정부주의를 신봉하는 의열단에 들어갔다. 뭐랄까, 의열단원들은 특별한 종교 집단의 신도처럼 하루하루를 보냈다. 사격연습은 기본이었고 수영과 테니스 등을 하면서 최고의 상태를 유지해나갔다. 독서와 오락 활동도 빼놓지 않았다. 우울해지지 않도록 늘 주의했고 특별한 임무에 어울리는 긴장된 심리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의열단원들의 생활은 명랑함과 심각함의 이종 결합이었다. 늘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삶이었기에 살아 있는 한 즐겁게 생활하자는 뜻이었으리라. 단원들은 외모에도 신경을 섰다. 몸에 잘 맞는 양복을 입고 머리는 깔금하게 다듬었으며 사진찍기를 좋아했다. 늘 마지막 사진으로 여기는 것이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이었다. _P131

 

학교 국사시간 혹은 한국사 시험을 위해 공부하다보면,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에서 꼭 알아야 3봉이 있다. 그 이름하여 김원봉, 김두봉, 양세봉. 이 중 김원봉이 바로 그 유명한 밀양 사람 김원봉, 의열단장이다. (김두봉은 조선의용군, 양세봉은 조선혁명군) 신흥학교 출신들이 만든 의열단. 김원봉이 단장으로 있던 의열단. 우리는 의열단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나마 김원봉 처럼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 달달달 외웠던 의열단 출신 독립운동가 김익상, 김상옥, 김지섭, 나석주. 이들의 이름이라도 알고 있으면 다행이다. 하지만 꽤 오랜시간 의열단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잊혀져 있었다. 대게가 중국으로 넘어가서 무장투쟁을 하였고, 무정부주의 내지 사회주의에 심취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우리나라는 그들이 빨갱이라는 이유로 지워버렸다.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중국에서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정율성이 전남 광주 출신 의열단원이라는 것을. 위에 별도로 언급한 김산 역시 의열단원이었으며, 저항시인으로 알려진 이육사 역시 의열단원이라는 것을.

 

강우규, 김경천, 김구, 김대락, 김산, 김상옥, 김성숙, 김시현, 김원봉, 김지섭, 김창숙, 나석주, 민긍호, 박상진박열, 송학선, 신규식, 신채호, 심훈, 안중근, 안창호, 유인석, 윤봉길, 윤세주, 이동휘, 이봉창, 이상룡, 이상설이육사, 이재명, 이종희, 이회영, 장준하, 주기철, 허위, 허은, 홍범도, 홍흥순.

 

이 책에 말꽃으로 함께한 독립운동가들 이다. 잊으면 안될 이름들이다. 대부분은 독립운동 단체에 몸 담은 사람들이지만, 아닌 사람도 있다. 지금의 나처럼 그저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말이다. 그런 분의 말꽃을 적으며 리뷰를 마친다.

 

나는 그 어떤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어 마땅하다는 사실, 그거 하나는 아주 잘 안다.

-송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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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셀프 트래블 - 2019-2020 최신판 셀프 트래블 가이드북 Self Travel Guidebook
이주영 지음 / 상상출판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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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같은 평범한 직장인은 해외여행을 하려면 주말 붙여서 연차를 하루 내지 이틀 사용해서 가는 게 고작이다. 그나마도 주말 붙여서 연차 이틀 사용을 허락해주는 회사라면 그야말로 럭키인거고, 대게는 연차 하루만 사용해서 23일로 가는 경우가 훨씬 흔하다. , 주말 붙여서 연차를 하루 사용하는 것도 솔직히 눈치보이는 것이 흔한 직장인의 고민이라는게 함정이라면 함정이긴 하지만.(실상은 남들 쉴 때 다 쉬는 여름휴가나 5월 가정의달 연휴를 이용해서, 비싼 돈 내고 여행을 다닐 수 밖에 없다는 점!!) 이렇든 저렇든 해외 여행을 가고 싶어도 길게 쉴 수 없는 직장인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해외여행지는 선택의 폭이 정말 좁다. 최소 23일 여행간다는 가정하에, 버틸 수 있는 항공시간은 편도 최대 3시간. 3시간 이내에 갈 수 있는 대표적인 나라가 일본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일본을 여행하고는 했다. 나 역시 갈수록 우경화 되가는 일본을 욕하면서도, 해외여행 선택의 폭이 좁다는 이유로 일본을 자주 다녔다.

 

하지만 가면 갈 수록 얄밉게 행동하는 일본을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판단하에, 일본은 포기한 지가 벌써 반년이 넘었다. 크흡. 아마 내년에도, 내 후년에도 일본은 안 갈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일본을 여행지도에서 지워버리고 최대한 가까운 해외여행지를 열씸히 골라 보았다. 그 후보 중 하나가 바로 오늘 이 책으로 간접여행을 할 타이완이다.

 

인천공항에서 타이베이(타이완 북부/대만 북부)까지 비행시간이 2시간 30, 까오숑(타이완 남부/대만 남부)까지는 약 3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심지어 직항편도 운항하니 23일 여행지로는 완전 제격이랄까?

 


여행 가이드북 퀄리티는 대충 목차만 훑어보면 딱 각이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셀프트래블 시리즈는여행 가이드 북 중에서는 정말 고퀄리티를 자랑한다. 그 어떤 여행 가이드북과 비교해봐도 흠 잡을 데가 없다.

 


나에게 타이완은 꽃할배들이 갔던 여행지정도였다. 그 전까지 타이완이라는 나라에 대해 크게 생각이 없었으니까. 하하하. 그래서 오늘 이 책으로 조금이나마 타이완에 대해 알게 되었다.

 

타이완의 정식명칭은 중화민국 타이완이다. 우리나라 크기의 섬나라이며, 사용하는 통화는 뉴 타이완 달러! 시차는 한국보다 1시간 느리다. 대한민국 여권 소지자는 90일 까지 무비자 체류 가능! (하나의 중국이라고 떠드는, 대륙 중국은... 비자 발급을 해야한다지?) 전압은 110V(돼지코)를 사용하지만 호텔에 따라서는 220V도 사용한다.

 


타이완 여행 시 주의할 점은 꼭 체크해야 할 부분 중 하나다. 자칫하면 진상부리는 한국 여행객으로 보일 수 있으니 꼭 숙지해야 한다.

 

 

타이완은 우리나라와 달리 지하철에서 음식불 섭취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물은 물론, 껌이나 사탕도 포함이다. 이를 어길 경우 약 30만원에 해당하는 벌금이 부과된다. 또한 유명 관광지에 있는 특별관리 대상 관광물의 경우 건드리게 되면 이 역시도 벌금이 부과된다.

 

그리고 나의 안전을 위해서 숙지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 모르는 사람이 공항에서 짐을 들어달라고 하거나, 모르는 사람이 길 거리에서 음식을 준다거나 이런 경우에는 절대로 NO! ‘안돼요, 싫어요가 필요한 부분인 듯 하다. 아니면 무시가 상책!

 


타이완에 갔다면 꼭 가보아야 할 여행지, 핫한 여행지, 절대 놓쳐서는 안될 여행지도 이렇게 별도로 체크되어 있다. 해당 여행지에 더 자세한 부분은 책 본문에 지역별로 소개하는 챕터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여행은 볼거리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건 역시나 먹방! 그런 의미에서 타이완은 먹방 여행에 완전 제격인 곳이다. 그야말로 미식의 나라다. 예전에는 짧고 굵은 먹방 여행은 오로지 일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정말 편협하디 편협한 생각이었다. 세상은 넓고 맛있는 건 많은데! 정말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타이완만 봐도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많은데 말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샤오롱바오, 훠궈가 타이완에서 온 음식이었다. 가끔 대형마트에서 사먹는 펑리수나 누가크래커도 타이완 과자였고, 요새 패스트푸드점에서 파는 지파이 역시 타이완에서 온 간식이었다. 얼마나 맛있으면 타이완에서 인기를 얻다 얻다 한국에까지 왔을까 싶은 느낌?! 특히 펑리수랑 누가크래커는 대형마트에서 외쿡산 과자 할인할 때, 가끔씩 사먹을 정도로 좋아하는 과자이기도 하고! 이쯤 되면 본 고장에서 한번 먹어보고 싶은 느낌이랄까?

 

꼭 가봐야할 타이완 명소는?

물론 내 기준^^...

 


우선 타이베이 101. 정식명칭은 타이베이 세계금융센터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그저 타이완 야경명소&전망대다. 심지어 그 높이가 500M를 넘는다고 하니, 지상에서 올려다 보려고 하면 목이 뿌러질지도! 전망대는 89층에 있다고 한다.

 


 

그 다음이 바로 국립고궁박물원! 예전 tvN 꽃보다 할배에서 할배들이 갔던 곳으로 기억한다. 그때 취옥백채라 불리우는 양배추 모양 옥을 보고 진짜 저건 꼭 실물로 봐야 해!’라는 마음이 미친듯이 솟구쳤더랬다. 듣기론 이 취옥백채가 청나라 광서제 후궁인 근비가 예물로 가지고 온 거라고 하던데..

(광서제는 서태후의 조카, 즉 서태후는 광서제의 이모이자 고모(족보 개판ㅋㅋ). 실상 권력은 서태후가 휘둘렀고 광서제는 그저 허수아비...그 뒤 왕이 그 유명한 푸이!)

 

 

하지만 제일 가고 싶은 장소는 바로 여기, 지우펀이다. 그 유명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배경이 된 곳이니까. 지금은 별로지만 과거에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꽤 잘 나갈 적, 나 역시 푹 빠져있었더랬다. 그 중의 제일은 역시 센과 치히로. 센과 치히로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꽤 여럿이긴 한데, 역시나 메인은 바로 이 홍등가가 아닐까? (아 물론 숨겨있는 의미나 이런건 무시하고...) 그저 색감이나 풍경만 봤을 때! 오로지 딱 그것만 봤을 때 홍등가 색감이 참 이쁘달까 하하하!

 

12월에 제주도 항공권을 예약해놨는데, 타이완을 예약할 껄 그랬나보다 ..ㅜㅜㅜ... 내년엔 타이완으로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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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징비록 - 역사가 던지는 뼈아픈 경고장
박종인 지음 / 와이즈맵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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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정말 좋아하는 박종인 기자님의 신작이 나왔다. 그 제목은 대한민국 징비록. 어쩌면 전작 땅의 역사 1,2연장선에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학교에서, 혹은 TV에서 알려주는 찬란한 우리의 역사 속에 숨겨진, 처절하고도 뼈 아픈 역사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기록된 역사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그런 내용들 말이다. 그렇기에 읽다보면 누군가는 조금 불편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당시를 살던 권력자들이 얼마나 무능했는지, 시대를 보는 눈이 얼마나 없었는지 너무 뼈저리게 느껴지니까. 그런 사람들 때문에 계속 아픈 역사가 반복되었다는 사실도 그렇고..

(참고로 본 책의 내용은 기자님이 최근까지 연재한 조선일보 박종인의 땅의 역사의 연장선이다. 뭐랄까, 읽으면서 복습하는 기분이 들었다ㅋㅋ 근데 확실히 화면으로 기사를 읽는 것 보다, 이렇게 종이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는게 머리에 잘 들어온다. , 그래서 TV프로그램 땅의 역사는 언제 방송해주나요? 언제까지 기다려야해요?ㅜㅜㅜㅜ)

 

우리는 징비록(懲毖錄)이라는 책을 알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전쟁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된 영의정 유성룡이 집필 한 책이다. 따지고 보면 임진/정유년 전쟁의 책임은 철저하게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던 무능한 왕이라는 사람에게 있는데, 조선이라는 나라가, 성리학을 신봉한 나라가 왕에게 니가 책임지세요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결국 만만한, 전쟁 당시 피폐해진 정국을 안정시키려 했던 열일했던 사람을 내친거다.

 

​「징비록(懲毖錄)은 참혹했던 7년 전쟁(임진왜란/정유재란)의 전황을 기록하며,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쓴 책이다. 하지만 정작 읽어야 할 사람들이 읽지 않았다. 아마 제대로 읽었다면, 이 때라도 제대로 된 사람들이 정치를 했다면 적어도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임진/정유재란은 1598년에 노량해전을 끝으로 종전).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 대한민국 징비록은 어떤 내용일까? 유성룡의 징비록이 담고 있던 임진왜란 전후, 그리고 2백년 뒤 일제강점기 전후 이야기가 담겨있다. 4백년 전 조선을 침략한 일본, 그리고 1백년 전 다시 조선을 침략한 일본의 이야기다. 일본이 침략하기 전 전 그들은 대체 무엇을 준비했는지, 우리는 어떤 대응을 했는지, 어째서 3백년 만에 똑같은 일이 되풀이 되었는지! 우리가 꼭 알아야만 하는 이야기다. 알아야만 2019년 현재, 한국을 상대로 경제침략을 단행하려 한 일본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응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1543년 일본은 이 해에 유럽에서 철포를 들여왔다. 그렇게 유럽과 교류를 하였다. 일본은 유럽에서 들여온 총을 국산화하였다.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였는데, 막강한 다이묘의 부대는 이상이 철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한다. 같은 해 조선에서는 서원이 처음 건립되었다. 바로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다. 백운동 서원은 명종 때 이황의 건의로 사액을 받아, 나라의 지원을 받는 소수서원이 되었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된 바로 그 영주의 소수서원이다. 이후 조선은 공자 왈 맹자왈, 죽은 자의 이야기를 맹신하는, 성리학을 맹신하는 나라가 되었다.

 

1543년 일본은 서양과 교류하며 과학을, 상업을 발전시켰고, 조선은 죽은 자의 이야기 속에 갇혀 과학을 버리고 상업을 천시했다. 그게 임진왜란 발발 하기 불과 49년 전이다. (*물론 서원을 만든 이유는 있다. 당시 국립 교육기관인 성균관이나 향교에는 공부를 하는 사람이 없없다. 공부를 하고 시험을 봐서 공무원이 되야하는데, 죄다 인맥으로만 공무원이 되니 그 누가 공부를 하겠는가. 중종실록에 따르면 성균관이 텅 비어 도살장으로까지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래서 재야 유학자들이 서원을 세운거다)

 

더 과거로 가본다. 1450년에 독일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했다. 1492년 이사벨라 여왕 지원하에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 같은 해 유대인들이 스페인에서 추방되어 유럽 여러나라에 정착했다. 스위스로 간 유대인은 시계를, 네덜란드로 간 유대인은 동인도회사와 주식거래소를, 영국으로 간 유대인들은 자본가가 되었다. 1498년 포르투칼의 바스쿠 다 가마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파한 이래, 그야말로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 1517년 독일에서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1543년에는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했다. 이 모두가 세계사 적으로 역사를 바꾼 일들이다. 그리고 이 일들이 나비효과가 되었다. 포르투갈은 새 시장 개척을 위해 일본에 문을 두드렸고, 그 때가 바로 1543년이다. 일본은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기술 발전에 온 힘을 쓴 반면, 조선은 죽은 자의 이야기에 갖혔다.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활자 인쇄술은 분명 우리 고려보다 발명은 느렸지만, 역사를 바꿨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는 수 많은 책들이 싼 값에 팔려나갔다. 지식이 그렇게 전 계층으로 퍼져나갔다. 반면 고려의 인쇄술은 오로지 불심으로 대동단결!’ 그리고 권력가들의 지식 독점에만 이용되었다. 그리고 지식 독점은 조선, 구한 말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592, 임진년. 일본이 처들어왔다. 우리가 임진왜란에 대해 배운 것은 이렇다.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이 일본에 갔다가 돌아온 뒤 선조에게 보고하길 황윤길은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김성일은 전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라고 보고를 올렸고 선조는 김성일의 보고를 택했다. 하지만 일본은 부산을 통해 쳐들어왔다. 전국시대 동안 무장만 잡으면 전쟁이 끝나던 일본군의 습성상, 조선 왕 하나만 잡기 위해 빠르게 한양까지 달렸는데 왠걸? 조선 왕 선조는 분조라는 이상한 수를 던져, 광해군에게 조정을 맡기고 수도와 백성을 버친 채 저 멀리 의주까지 도망을 갔더라.>

 

전쟁에 대한 내용은 뒤로 하고, 그 시작점만 봤을 때가 저거다. 근데 과연 저게 끝일까? 정말 일본의 전쟁의향을 저 때 처음 알았을까? 정말 어리석은 선조가 황윤길과 김성일의 보고 중 믿고 싶었던 보고서를 채택해서 무방비한 상태로 왜군을 맞이한걸까? 적어도 기록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에 가기 전에도 이미, 일본 (대마도/규슈)에서 전쟁이 일어날 꺼라고 직접 와서 보고를 했다. 심지어 전쟁이 일어나기 얼마 전까지도 와서 이야기 하며 대비하라 했다. 그 뿐이랴 저 멀이 독립국이었던 류큐의 사신까지도 같은 보고를 했다. 하지만 2백년 평화에 젖어있던 조선 조정은 그것을 무시했을 뿐이다. 분통터지는 사실은 더 있다. 명종 때 이미 일본의 철포, 즉 조총이 조선에 들어왔었다. 대마도인이 조총을 가지고 와서 나를 받아주면, 조총 만드는 법을 전수하겠다고 한 것이다.

 

1555521, 비변사가 명종에게 보고했다. “왜인 평장친이 가지고 온 총통이 지극히 정교하고 제조한 화약 또한 맹력합니다. 당상의 직을 제수함이 어떻겠습니까?” (중략) 다음달 사간원이 명종에게 총통을 주조해야 하는데 철재가 없으므로 버려둔 큰 종으로 총통을 주조하게 해 달라고 건의했다. 그때 남대문과 동대문 문루에는 만들어놓고 설치하지 않은 종이 뒹굴고 있었다. (중략) “이미 철재를 사들이도록 했으므로 윤허하지 않는다.” 사간원이 철재를 시장에서 사들이게 하니 원망과 한탄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해도 듣지 않고 비변사와 홍문관까지 철포 제작허가를 청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명종은 이렇게 답했다. “어진 장수가 있어 잘 조치한다면 적들이 멋대로 날뛰지는 못할 일이다.” (중략) 이에 세 정승이 조선이 가지고 있는 중화기 천자총통, 지자총통 또한 잡철로는 만들 수 없다고 거들었다. 명종이 딱 부러지게 답했다. “오래된 물건은 신령스러우니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물건을 부수어서 쓰는 것은 옳지 못하다.” 스스로 억지임을 알았는지, 명종은 이 말은 삭제함이 옳겠다고 사관에게 일렀다. 사관 또한 어이가 없었는지 삭제함이 옳겠다는 말까지 실록에 기록해버렸다. _P 051

 

참고로 명종 때는 그 유명한 여인천하시대였다. 명종의 엄마는 불교를 열렬히 신봉했던 문정왕후였고, 그녀의 올케가 그 유명한 정난정이다. 불교를 신봉하고 정권을 주무르던 문정왕후에게 커다란 범종을 녹여 조총을 만드는건 아니될 일이었다. 뭐 평화에 찌들었기 때문에 그랬겠지, 라고 정신승리를 할 수도 있는데 이 때는 왜구가 호남을 침략했던 을묘왜변이 일어났던 때였다. 조선초에 단절됐다 생각했던 왜구들이 다시 들성이던 그 때다.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했다. 그리고 다시 1592.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거란 정보가 정말 많이 흘러들어왔지만 조선의 왕이었던 선조는 듣지 않았다. 무시했다. 조선에 리더는 있었지만 리더십은 없었던거다. 선조가 무능하다고 욕을 먹는 건 전쟁에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것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 뿐인가? 백성들이 의병이 되어 나라를 위해 싸웠는데, 의병들을 역모죄로 몰아 죽였다. 자기는 저 멀이 의주까지 도망갔으면서 백성들이 일본에 항복하고, 도망가는 건 역시나 역모로 간주했다. 전쟁의 흐름을 바꾸었던 이순신 장군이 아니었다면 100% 졌을 전쟁이었는데 선조는 그런 이순신 장군을 그저 시기, 질투로 대했다. 심지어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상처뿐인 승리일지언정) 승리의 공을 목숨걸고 싸운 수 많은 장수와 의병이 아닌, 오로지 명나라에 있다고 했다. 전쟁 후 공을 치하할 때 목숨 걸고 싸운 장수들인 선무공신보다, 자기를 모시고 의주까지 피난 갔다는 호성공신을 그렇게나 치하했다. 그렇기 때문에 선조는 무능한거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때 조선의 리더는 리더십이 없었던거다.

 

이런 식으로 조선의 왕이, 조선 조정이 무능력해지고 일본과 격차가 벌어진 건 아주 조그마한 차이다. 생각의 차이, 기술의 차이. 같은 조총을 받고 조선은 저기 어딘가에 짱박아 놨고, 일본은 국산화 했다. 조선은 오래전에 죽은 공자왈 맹자왈을 읊고, 주자를 맹신했다. 성리학에 대한 해설은 주자학만 있을 뿐이며,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이나 반발이 있으면 사문난적이라 매도하며 내쳤다. 일본은 어떤가? 임진왜란 이후 조선 선비 강항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면서, 그 때 일본에 성리학이 펴졌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막부는 쇄국을 단행하긴 했어도, 네덜란드와 무역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성리학은 있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서학이 있었고 근대과학도 같이 발전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 군주 명을 받아 공자와 주자가 일본을 공격해온다면 내가 먼저 나서서 철포를 들고 공자와 주자의 목을 쳐 깨뜨리리라 _P 144

 

당시 일본의 주자학자 아사미 케이사이의 말이다. 과연 이 말이 조선 조정 한 복판에서 나왔다면 어땠을까? 우암 송시열이 들으면 어땠을까? 바로 사문난적으로 지목되어 유배를 가거나 참형이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이렇게 앞뒤 꽉 막힌 조선만 있는 건 아니었다. 조선의 역사에도 과학이 꽃을 피웠던 시기는 있었다. 바로 역대급 성군이라 칭송받는 세종대왕 재위시절이다. 세종은 수 많은 천재들을 불러 모아 조선 과학의 꽃을 피웠다. 해시계가 나왔고, 물시계가 나왔다. 역법도 나왔다. 하지만 전승되지 않았다.

 

155011월 흠경각 수리공사가 있었다. 물을 받는 그릇 하나가 문제였다. 관상감 책임자 이기가 공사를 마치고 명종에게 보고했다. “(이 그릇은) 옛날 성인들이 권계하던 기구이니 언제나 옆에 두고 물을 부으며 살피고 반성하는 것이 좋겠나이다.” 명종은 그리 하겠다라고 답했다. 때는 7년 전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을 소수서원이라고 사액한 지 8개월 뒤였. 물그릇에 빗물이 고이듯, 어느 틈에 실용을 목적으로 만든 기계가 덕목 수행용으로 변경이 된 것이다. _P 083

 

세종이 꽃 피운 조선의 과학은 그렇게 사장(死葬)되었다. 보면 볼 수록 암울함의 극치다. 어쩜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조선은 살아 있는 학문을 갈갈이 찢어 쓰레기통으로 버리고, 죽어있는 학문만을 따랐다. 그래도 하늘은 공평한 지, 이후에도 새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몇번 있었다.

 

첫 번째는 병자호란 이후 청에 끌려갔던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두 번째는 그 유명한 하멜 표류기의 저자 하멜이 제주도에 당도했을 때, 세 번째는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와 퍼지기 시작했을 때, 네 번째는 미국 제너럴 셔먼호가 강화도에 도착했을 때 다.

 

1636, 청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소현세자는 아담 샬 이라는 천주교 신부를 만났다. 그리고 그를 통해 새로운 학문, 새로운 문화, 새로운 기술을 보았다. 그 모든 것을 바리바리 싸 들고 조선에 왔는데, 정작 아비라는 사람 조선의 왕 인조는 그것을 반기지 않았다. 외려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갔다. 심지어 며느리에 손자들까지 죽였다. 이렇게 첫 번째 기회가 날라갔다.

 

1653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 스페르웨르호가 일본 나가사키로 가는 길에 제주도에 표류했다. 그 안에는 첨단 항해술, 과학기술, 무기술은 물론이요 전문가 집단이 있었다. 하펠 포함 36명이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이들을 그저 죄인취급 했다. 그들은 13년 간 조선에서 노역을 했다. ‘풀 뜯기’,‘땔감 베어오기’, ‘양반집 구경거리 되기’, ‘구걸하기등이 전부였다. 13년 간 조선 정부는 최첨단 기술을 전수 받을 기회를, 자원을 그렇게 통으로 날려버렸다. 13년 간 지옥같은 삶을 산 하멜은 조선을 겨우 탈출하여 원래 목적지인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한다. 당시 일본 공무원은 하멜 일행을 향해 강도높은 조사를 했다. 그 당시 하멜은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한다.

 

조선인은 전 세계에 나라가 12개 뿐이라고 생각한다. 옛 기록에 나라가 84000개라고 적혀 있지만 태양이 한나절 동안 그렇게 많은 나라를 다 비출 수 없기 때문에 지어낸 얘기라고들 했다.” _P 125

 

18C 후반, 즉 조선 후기 소현세자가 가지고 들어왔던 새로운 학문 서학은 종교로써 꽃 피운다. 천주교다. 충남지방을 위주로 천주교 신자가 급증하였다. 당연히 서양에서 천주교 신부들도 들어왔다. 하지만 우리의 개혁군주 정조대왕님은 이를 용납하지 못하였다. 성리학 체계를 위협하는 기독교 서적들은 전부 불태웠다. 조선판 분서갱유다. 또한 천주교를 믿는 신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조선후기 유별난 천주교 박해, 학살의 시작은 바로 이 때부터다. 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뿐만 아니다. 이 당시 책쾌 대 학살극도 벌어진다. 백성들이 그나마 싼 값에 책을 볼 수 있는 건 책 장사치, 책쾌들 덕분이었는데 이 때 씨가 말랐다.

 

 

선왕(중국 요/순 임금)의 옳은 말씀이 아니면 노자, 석가, 제자백가가 모조로 이단이다.” _ P 189

 

(사족이지만 우리가 성군으로 말하는 세종, 정조 역시 그림자가 있다. 다만 업적이 워낙 크다보니 그 그림자가 가려져 있을 뿐. 세종은 우리 땅에 있는 은광을 폐쇄하고 산업 발달을 막아 사방이 꽉 막힌 조선이 되는 시초를 만들었다. 또한 노비를 늘리기 위해 종모법을 실시했다. 서얼등용으로 박수 받는 정조는 천주교 박해 뿐만 아니라 서얼들을 광대로 기른다라는 말을 남겼다.)

 

1866년 미국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기 위해 평양까지 들어왔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이를 거절하였고, 배를 불태웠으며 선원을 죽였다.

 

그리고 1871년 제너럴 셔먼호의 복수를 겸하여 미국이 강화도로 쳐들어온다. 신미양요다. 조선은 쇄국을 지켰고 이 전쟁은 승리한 전쟁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조선 정부는 관심이 없었다.

 

반면 1853년 미국 흑선이 일본을 향했을 때 문을 열었던 일본과는 대비된다. 물론 아무 계획 없이 통상을 했다면 문제가 되었겠으나, 일본은 이 때까지도 계속 네덜란드를 통하여 세계 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자국 내 과학, 상업발전도 시키면서 말이다. 그리고 1876, 일본은 강화도로 처들어왔고 조선 최초의 불평등 조약,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정부에 복귀한 지도자들은 영국에서 취한 산업과 미국에서 취한 언론과 스위스의 교육과 독일의 법률을 그대로 정책에 적용했다. 영국에서는 광업을 배웠다. 산업혁명 기초가 석탄과 철에 있음을 이들은 깨달았다. (중략) 그리고 이들이 찾아낸 서양 근대화의 힘은 교육이었다. 사절단이 정치 및 경제 분야 이외에 관심을 기울인 분야닌 교육 부문이었다. _P265

 

다름아닌 일본의 이야기다. 미국에 문호를 개항한 일본은 사절단을 꾸려 유럽 여러나라를 돌아다니게 하고 배워오게 했다. 일본을 돌아온 이들이 혁명을 일으켰으니 그게 바로 메이지 유신이다. 우리에게는 이가 갈리는 일제강점기의 신호탄이자, 제국주의의 서막이었다.

 

이 뒤의 이야기, 그저 이가 갈리고 답답한 이야기 향연이다. 왜 일본의 침략을 방비하지 못했는지, 왜 우리는 수 많은 기회를 발로 차버렸는지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다. 현대의 시각으로 과거를 논하지 말라고 하기엔, 동 시대 다른 나라들은 우리와는 너무 다른 길을 걸었다. 과연 이를 두고 현대의 시각으로 논하지 말라고 할 수 있을까?

 

기껏 수입한 최첨단 무기를 못살겠다고 들고 일어난 동학농민군에게 쏘고, 그것도 모자라 외국 군인까지 대리고 온 고종이 조선의 왕이었다. 국정농단을 하던 무당 진령군의 말만 믿고 그대로 따랐던 고종이 조선의 왕이었다. 부국강병을 위해 개혁을 한 게 아니라, 자기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개혁을 한 고종이 조선의 왕이었다. 부국강병을 위해 써야할 나라의 세금을 자기 황제 즉위식을 위해, 조선 왕 즉위 40주년을 위해 몰빵한 고종이 조선의 왕이었다.

 

이홍장이 물었다. “왜 귀국은 서양옷을 입는가.”

모리가 대답했다. “옛날 옷은 놀기에 좋았지만 열심히 일하는 데는 절대 맞지 않는다. 우리는 가난하고 싶지 않다. 부자기 되기 위해 옛것을 버리고 새 것을 취했다.”

이홍장이 반격했다. “의복 제도는 조상에 대한 존중 표시다. 만세 후대에 이어야 한다.”

모리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조상이 살아 있어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 천 년 전 조상들은 중국 옷이 당시 일본 옷보다 우월해서 중국 옷을 택했다. 남의 나라 장점이 보이면 일본은 어떻게든 배워서 따라한다. 그게 일본의 미풍양속이다.” _P 287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일본에 회답겸쇄환사 통신사를 수 차례 보낸다. 일본은 통신사를 성대하게 맞이했다. 그리고 많은 것을 배워갔다. 일본이 많은 것을 배웠고, 그것이 조선을 능가했을 때 일본은 더이상 통신사를 받지 않았다. 그 때 조선은 소중화사상에 빠져있었고, 세도정치가 진행되고 있었다. 조선의 시계는 과거로 돌아가버렸다.

 

개방과 교류, 다양성과 대중의 각성. 이 네 가지 단어에 임하는 지도자의 자세가 한 나라 백성을 고난으로 이끌었고 한 나라 백성을 부강한 나라로 이끌었다. 유럽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게 서기 1543년에 벌어진 세가지 사건과 21세기 대한민국을 연결하는 징비의 열쇠다. _P 381

 

과연 우리는 얼마나 징비를 하고 있을까? 아니 하고 있기는 한걸까? 여당, 야당 모든 정치권 인사들은 전부 징비를 하고 있을까? 적어도 작금의 상황을 보면 전혀 아닌 것 같다. 그 누구도 관심이 없어보인다. 아니 오히려 어떤 인사들은 일본 우익 뉴스에서 하는 말을 그대로 외치고 있으니, 징비는 커녕 매국을 하고 있는 사람이 더 많겠다. 거기다 가짜뉴스를 많이 퍼트려서 이제 뭐가 진짜인지 조차 알 수 없는 정도다. 정치권 인사들은 대체 뭘 하는 지 모르겠고, 오로지 국민들만 나서서 징비를 하는 꼴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내가 사는 이 나라가 내 나라니까, 앞으로도 꾸준히 가지 않고 사지 않으련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것밖에 없고, 무엇보다 100년전 일본의 총칼로 유린당하던 때 목숨 걸고 독립운동 하시던 분들에 비하면, 아주 쉬운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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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요리 백과사전 - 한국인이 좋아하는 진짜 중국 음식
신디킴.임선영 지음 / 상상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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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숙하다면 친숙하고 멀다면 멀게 느껴지는 요리가 바로 중국요리다. 그도 그럴 것이 짜장면/짬뽕/탕수육/깐풍기 등은 정말 친숙한 반면, 각종 중국 여행 프로그램에서 만나는 중국 요리는 멀어도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음식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는 중국에선 저런 음식까지 먹어?’ 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놀라운 요리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중국 음식에 대해 잘 모르다보니, 왜 한국에서 중국 음식과 중국에서 먹는 중국 음식이 서로 다른지도 잘 모르고, 우리가 보았을 때 정말 놀라운 음식을 중국에서는 거리낌 없이 먹는 건지도 잘 모른다. 가끔은 이런 이유들에 대해 알고 싶어서 공부를 하려고 해도, 도대체 어떤 책을 봐야할지 모르겠더라. 그런 와중에 상상출판에서 중국요리 백과사전라는 책을 받았다. 언뜻 보기에는 중국요리 레시피북 처럼 보였다. 하지만...! 표지를 펼치고, 한 장 한 장 읽어본 결과 이 책은 레시피 북이 아니었다. ... 아주 간단하게 요리법을 설명해주기는 하지만 말이다.


 

책에 적혀있는 아주 간단한 요리법은 요리에 대한 감각이 남다른 사람이 아니라면, 따라하기에는 불친절한 요리법이다. 그저 ! 이런식으로 만들어지는구나를 알면 될 정도의 내용만 적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무슨 책일까? 레시피북은 아니고.. 대체 뭘로 분류해야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뭐라고 단언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결국 책 제목으로 돌아왔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중국요리 백과사전이다.

 

음식은 예술이자 학문입니다. 단순한 끼니의 문제를 넘어 인류의 역사를 가능케 한 위대한 창조물이지요. 이 안에는 전통과 문화, 생활상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공자는 음식을 중요시 여겨 음식은 정교하고 섬세할수록 좋다라고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_P 014

 

백과사전 답게 이 책에는 중국 음식에 대한 유래가 들어 있다. 중국이 땅 덩어리가 넓은 만큼 지역별로도 음식이 엄청 많은데,그 수 많은 음식들 유래가 정말 개별적으로 다 있다. 뭐 간혹 없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왜 이 요리가 만들어졌는지, 어떤 역사적 인물이 이 요리를 좋아했는지 등등등! 특히 중국 역사적 인물 중에서 유독 주원장, 건륭제, 서태후, 마오쩌둥이 많이 거론되는데, 그 중에서도 건륭제가 탑이다. 건륭제는 순행을 많이 다녀서 그런가, 아주 지역별 맛있는 음식이란 음식은 다 먹었나보다. 건륭제는 정말 바람잘날 없는 여자 문제만 떠올랐는데, 적어도 이제는 TV드라마 대장금 속에 나오는 중종처럼 맛있구나~” 라는 이미지가 추가된 듯 하다ㅋㅋ

 

수 많은 중국요리들을 나누는 제일 큰 카테고리는 중국 8대 요리 다. 중국 8대 요리는 각 지역에서 만든 요리를 통칭 하며, 그 지역을 따서 산둥 요리: 중국 북방 요리 대표, 쓰촨 요리: 천의 얼굴, 쓰촨의 매운 맛, 광둥 요리: 자연과 일치를 이루는 고급 음식 문화, 장쑤 요리: 격조 높은 국민 반찬 요리, 저장 요리: 자연의 밑그림에 인문이 색칠한 요리 예술, 푸젠 요리: 화교의 고향 요리, 전통과 외래문화의 다양한 변주, 후난 요리: 강산을 넘나드는 호탕하고 칼칼한 매운 맛, 후이저우 요리: 재력과 학식을 겸비한 상인들의 식문화라 한다.

 

산둥요리 : 무쉬러우

무쉬러우는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계란요리이다. 굳이 이 챕터를 올린 이유는 중국 여행 시 아주 중요한 요리 주문 팁이 있기 때문이다ㅋㅋㅋㅋ. 중국 메뉴판에는 계란이라고 써있는 요리 이름이 없다고 한다. 이상하게도 계란요리는 무쉬(木须)’ 라는 단어가 들어간다고 한다. 계란고기 볶음은 무쉬러우, 계란토마토복음은 무쉬스즈, 계란완두볶음은 무시원더우 등등.

 

무쉬는 계수나무 꽃을 이르는 말인데 계란 노른자를 부서지게 볶은 모양이 노랗게 핀 꽃잎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계란은 중국어로 지딴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딴은 모두 중국어의 욕설과 동음이므로 맛있는 음식에 이름으로 붙이기 꺼려 했지요. 그래서 계란이 들어가는 요리는 대부분 아름답고 향도 좋은 계수나무 꽃에 비유했습니다._P 049

 

혹시라도 중국 여행가서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경우, 이 팁을 이용하여 계란요리를 먹는 건 어떨까 싶다. 아무리 중국요리가 입에 안맞아요 계란 요리는누구나 다 맞겠지..ㅋㅋㅋ

 


쓰촨요리 : 마파두부

난 어릴때 마파두부가 중국요리라고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다. 학교 급식에서 정말 아주 자주 나오던 반찬 중 하나였으니까. 그냥 두부조림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마파두부는 중국요리였고, 심지어 급식으로 나오는 마파두부는 가짜 마파두부(...) 였다. 하 세상에, 진짜 마파두부는 달랐다. ..이렇든 저렇든 중국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까지 학생, 회사원들 점심 반찬으로 나오는 마파두부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이 요리는 얼굴이 곰보투성이인 진씨 아주머니가 만들었다 하여 마파두부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1862년 어느 날 유채기름을 파는 사람이 식당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돈이 없어 요리를 시킬 수 없으니 이것으로 두부라도 지져달라고 하며 유채기름과 고기를 내밀었습니다. 마음씨 좋기로 소문난 진씨 아주머니는 기꺼이 즉석 두부요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혀가 얼얼할 정도로 맵고 뜨겁지만 두부의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유채기름 장수는 배불리 먹고 기운을 차린 후 식당을 나섰습니다. 지금도 쓰촨 청두에 가면 인심 좋은 아주머니의 진마파두부라는 식당이 성업중입니다. _P 077~078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중국에서 결혼상대를 고를 때, 착한 사람을 만나라는 의미에서 진씨 아주머니를 이상형으로 꼽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

 

쓰촨의 매운 맛

쓰촨의 요리에서 매운 맛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다. 고추기름을 듬뿍 넣어 맛을 낸 홍유, 생선 향이 나는 위샹, 양귀비가 사랑한 과일 리치처럼 달콤하게 매운 리즈, 얼얼한 매운 맛 마라, 시큼하게 매운 맛의 솬라, 마늘을 넣어 향을 낸 쏸샹, 약초 맛이 강한 진피 등 그 종류만도 수십가지 이다. 매운맛이라는 것이 단순한 오미 중 하나요, 미각의 통증이 아니라 얼마나 다양한 맛으로 어우러지는 지 쓰촨에 가서야 비로소 느껴볼 수 있다. _p91

 


광둥 요리: 딤섬

유래 중 제일 놀라웠던 게 바로 딤섬이다. 딤섬은 만두 처럼 생겨서 당연히 한 끼 대용이라 생각했는데, 왠걸! 차와 같이 먹는 일종의 간식이었다. 유럽에서 먹는 애프터눈티 세트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차에 딤섬을 곁들이는 시간은 광둥인의 가장 큰 행복입니다. 1851~1861년 사이의 약 10년간 제위한 청나라 9대 황제인 함풍제 시기에 광둥의 찻집문화가 시작되었습니다. _ P 107

 

찻집의 꽃은 차보다는 딤섬입니다. 딤섬은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의미로 모양과 조리법에 따라 참으로 다양합니다. _P 109

 

딤섬 문화는 중국 전역에 퍼져 있으나 지역마다 그 역할이 각기 다릅니다. 북방에서는 식후 간식으로 올라오고 저장과 장쑤지역에서는 차와 곁들이는 다과로, 광둥에서는 그 자체가 정식에 가까운 코스요리로 여겨집니다. _P110

 

뿐만 아니다. 차와 같이 먹는 음식 답게 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 중 다도에 대한 이야기아 있는데 여기서도 건륭제가 등장한다. 건륭제가 강남 순행 때 신하들과 식당에서 차를 마시는데, 신하들이 너무 송구스러워서 식탁을 손가락으로 두번 톡톡 두드려 예의를 갖췄다고 한다. 그 뒤로 이 신호는 식사 테이블에서 상대방에 대한 예의로 사용하였다나 뭐라나...!


 


후난요리: 취두부 / 후이저우 요리: 마오더우푸

대체 이런걸 왜 먹지? 싶은 요리중 하나가 바로 취두부다. 근데... 만만치 않은 두부요리가 또 나왔으니 마오더우푸다. 세계 3대 악취 요리로 선정되기도 한 취두부, 서태후와 마오쩌둥은 이런 취두부를 정말 좋아했나보다. 서태후는 취두부에 어청방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기도 했고, 마오쩌둥은 취두부의 향은 고약하나 그 맛은 향기롭기 그지없구나!”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근데 이런 취두부가 만들어진 유래는...참으로 기가 막힌다.

 

과거에서 낙방한 선비 왕즈허가 자산을 탈탈 털어 두부가게를 열었는데, 두부가 전혀 팔리지 않았다. 팔리지 않는 두부를 볏단으로 덮어 두었는데, 몇일이 지나니 두부에 푸른 곰팡이가 피어오른게 아닌가. 왕즈허는 자산을 탈탈 털어 만든 두부인지라 그냥 버릴 수 없어서, 곰팡이가 핀 두부를 소금물에 절여서 팔았는데 이게 또 대박! ㅋㅋㅋ 요즘 같으면 식약처에 잡혀갈 일이다.

 

자 그럼 옆에 있는 마오더우푸는 무엇인가! 취두부가 푸른 곰팡이라면 마오더우푸는 흰 곰팡이가 핀 두부요리다. 아으... 얘들은 왜이러니 ㅠㅠㅠㅠㅠ

두부에 기다란 흰 곰팡이 털이 보송보송 나있다고 한다. 근데 곰팡이가 길 수록 더 진귀하단다 ㅠㅠㅠ..........더이상 상상할 수가 없... 이런 요리도 유래가 있다.

 

명 태조 주원장이 후이저우 지역을 공격할 때, 이 지역의 백성들이 많은 양의 두부를 빚어 장수들에게 헌납했다고 한다. 두부가 너무 많아서 다 먹지를 못한 지라, 남아있는 두부에 곰팡이가 끼고 말았다. 곰팡이가 끼면 버려야 하는데, 이 동네 요리사는 버리기 아까웠나보다. 흰 곰팡이가 핀 두부를 기름에 튀겨 갖가지 양념으로 조리했는데, 이게 또 대박!! 역시나 요즘 같으면 식약처에 잡혀가다 못해 폐업이다...

 

결국 취두부나 마오더우푸는 자린고비 정신(?!)에 의해 발명된 요리였...... 아 근데 자린고비여도 너무 자린고비다..ㅜㅜ... 울 엄마가 먹는 거 가지고 장난치지 말랬는데 헝뮤.ㅁㅇ...

 

동북지역 하얼빈 요리: 꿔바오러우

곰팡이 두부에 놀란 가슴, 꿔바로우로 안정시킨다. 중국 8대 요리는 아니나, 소수지역 음식 중 동북지역 대표 음식이 바로 꿔바로우다. 우리에게는 찹쌀 탕수육으로 잘 알려진 요리다. 찹쌀 탕수육의 그 쫄깃함은 정말 .... 그런데! 정작 정통 꿔바로우에는 찹쌀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오로지 옥수수전분!

 

중국의 정통 궈바오러우에는 찹쌀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돼지고기 안심에 옥수수 저분을 입혀 여러 번 튀겨내고 식초와 설탕, 맛술, 생강, 파 등을 곁들인 소스에 볶아 나옵니다. 궈바오러우는 중국요리의 튀김 기술을 잘 표현한 요리입니다. 1차로 돼지고기 안심에 옥수수 전분을 고루 묻혀 약불에 오래 튀겨 고기를 익힙니다. 2차로 센 불에 빠르게 튀겨 색을 입힙니다. 한꺼번에 많이 넣고 튀기면 고기가 엉겨 붙기에 기름을 가득 부은 웍에 몇 회식 나누어 튀겨야 합니다. 그래야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며 부드러운 식감의 고기튀김이 완성됩니다. 전분과 고기가 혼연일체를 이루지요. _P 324

 

꿔바로우는 생각보다 그 역사가 조금 짧. 청나라 광서제 때 하얼빈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 정확히는 광서제 재위 기간이나 서태후가 권력을 잡고 있을 때다. 여튼 만들어진지 1백년 조금 넘는 정도? .. 짧은게 아니라 긴편인가? 특히 꿔바로우를 발명한 요리사가 운영하는 식당은 지금까지도 운영중이라고 하니, 하얼빈을 간다면 여긴 꼭 들러봐야 될 것 같다.

 

 

 

이 책은 정말 중국요리, 먹잘알들을 위한 책이다. 혹은 예비 먹잘알들을 위한 책일 수도 있다. 그리고 중국 여행을 하려는 누군가에게, 중국 먹방여행을 찍고 싶은 누군가에게 그 어떤 여행 가이드북 보다 0순위로 필요한 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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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로 읽는 류큐 왕국
정진희 지음 / 푸른역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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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를 공부하면서 공부하면서 궁금했던 부분이 있었다. 일본사를 공부할 때는 류큐처분’, ‘전쟁의 전초기지’, ‘미군정등의 단락적인 부분만 알려져 있는 곳, 오키나와의 역사이다. 지금 나에게 오키나와는 그저 일본이나 일본이 아닌, 일본 내에서도 엄청난 차별을 받는 섬이다. 헌데 이 책을 읽다보니 류큐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더욱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구나 싶었다.

 

난 지금의 오키나와가 아닌, ‘류큐였을 때의 역사를 알고 싶었다. 우리 빛나는 문화재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수십, 수백번 이름이 나오는 그 류큐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류큐=유구)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 태조 1818일 정묘 1번째기사 / 유구국의 중산왕이 사신을 보내 조회하다

-태조실록 2, 태조 1년 윤1228일 갑진 2번째기사 / 유구국 중산왕이 신하라고 칭하면서 예물을 바치고, 포로 8명을 송환하다

-태조실록 6, 태조 399일 병오 1번째기사 / 유구국 중산왕이 망명한 산남왕의 아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다

-태조실록 13, 태조 7216일 계사 1번째기사 / 진양에 우거 중인 유구국 산남왕 온사도가 소속 15인을 거느리고 오니 의복과 양식을 주다

-정종실록 6, 정종 21015일 병오 7번째기사 / 유구 국왕 찰도가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치고 또 왕세자에게 예물을 바치다

-태종실록 20, 태종 101019일 임자 2번째기사 / 유구국 중산왕 사소가 모도결제를 보내 조현하고 포로 14명을 송환하다

-성종실록 81, 성종 866일 신축 1번째기사 / 유구 국왕이 내원리주 등을 보내어 글과 토산물을 보내다

-성종실록 105, 성종 10610일 을미 1번째기사 / 제주도 표류인 김비의 등으로부터 유구국 풍속과 일본국 사정을 듣다

-선조실록 25, 선조 241024일 병진 2번째기사 / 김응남이 중국에 갔을 때 유구의 사신이 와서 일본의 침략 의도를 보고하자 황제가 칙서를 내리다

 

 

조선왕조실록을 펴보니 유구에 대한 기록은 정말 너무 많아서 뭘 포스팅해야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류큐는 류큐는 신생 국가 조선의 건국을 축하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오기도 했었고 그 이후에도 수 많은 사절을 보냈다. 그 뿐이랴? 조선왕조 실록에는 류큐의 역사에 대해 생각보다 많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태조실록 2권에 있는 유구국 중산왕이 망명한 산남왕의 아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다이 기록을 보면, 당시 류큐는 조선처럼 통일 국가가 아닌 최소 2개 이상의 국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뭐 잡소리는 여기서에 멈추고, 자세한 내용은 이제 본 책인 신화로 읽은 류큐왕국으로 돌아와본다.

 

책 처음에 나오는 부분은 바로 용어풀이다. 그리고 이 용어풀이가 정말 중요하다. 현재 오키나와가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고 해서, 당연히 일본사에 익숙한 일왕가, 일본 신도, 창세신화 등 단어가 쓰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나 역시 그런생각으로 이 책을 폈다가 호되게 당했다. 오키나와 아니, 일본의 영토가 되기 전의 류큐국은 일본과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왕조, 종교체계가 있었다. 당연히 용어도 다르다.

 

일본 본토에서 신을 모시는 신녀(미코)들이 있었듯 류큐에도 그에 상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만 직급별로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일본에서 각 지역을 통치하던 영주를, 류큐에서는 아지라고 불렀으며, 그 영토에 지어진 성곽에 대해서는 구스쿠라고 부른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용어가 다르다.

 

용어풀이로 기본적인 개념을 머리속에 넣고 나면, 류큐국 중산왕조에 대한 연표가 나온다. 근데 이게 참 이상하다. 연표의 시작년도가 ‘1118~’이다. 이 당시면 우리나라에선 고려라는 통일왕국이 있었으며, 심지어 이때는 당대 내노라하는 외척 집안인 인주 이씨, 이자겸이 권세를 주무를 때다. 이런 시기에 류큐라는 왕조가 시작된건가? 라는 생각이 스쳤더랬다. 하지만 책을 읽고 알게 된 사실은 조금 달랐다.

 

류큐는 1118년 중산왕조(순천왕통~)이 시작되기 전 까지 여러 지역에서 각각의 지배자, 즉 아지가 있었다. 뭐 고려로 치면 호족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옛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성립되기 전 군장국가들이 넘쳐났던 삼한시대라고 해야하나?뭐 여튼 그런 시대였다. 물론 그 때도 중산왕조는 있었나보다. 다만 그 중산왕조는 류큐 창세신화와 연결된, 하늘의 후손인 천손가 25대까지 그 지역을 다스렸다는 것. 그러다 순천왕통으로 넘어오면서 군장국가들이 싹 정리되고 중산왕조 하나로 합쳐지는 뭐 그런 왕조시대로 넘어온다. 이후 17C에 일본 규슈지역 사쓰마번 (시마즈)에서 류큐를 침공할 때 까지 중산왕조는 계속 이어진다. 근데 이상한게 ... 이 왕조가 혈연으로 이어진게 아니라는 점이다. 순천왕통이 끝난 다음, 과거 류큐를 만들어 초기 중산을 다스렸다는 천손이 후손 영조 왕통이 들어서고, 그 다음에는 혈연관계 1도 없는 그냥 농민의 아들인 찰도 왕통이 들어섰다가, 그 다음에도 역시나 혈연관계 1도 없는 찰도 왕통, 1상왕조, 2 상왕조가 들어선다. 이거 참 신기하기 그지 없다. 어떻게 한 왕조 안에서 여러 왕통이 들어설 수 있지? 나라이름 바꿀 생각이 없었나...?

 

, 근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류큐의 역사서라고 알려져 있는 중산세감, 채탁본 중산세보, 채온본 중산세보, 류큐국유래기등이 전부 일본 규슈, 사쓰마 침공 이후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신화의 문자화, 다시 말해 사유나 관념, 상징으로 향유되는 신화가 이야기의 형태로 기록될 때, 그것은 신화를 즉정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재편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다는 신화 일반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_P 175

 

이 책에서는 각 왕통의 시조들에 대한 신화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하나같이 그 시조들은 하늘()과 연관이 있다. 아 중산왕조를 시작한 순천왕통은 좀 다르다. 순천씨의 부친은 글쎄.... 일본 본토에서 호겐의 난 때 이즈오시마로 유배를 당한 미나모토 다메토모 라는 것. 미나모토는 겐지라고도 불리며, 당시 일본 일왕가의 방계가문이었다. 아 근데 또 일본 일왕은 창세신화로 보면 또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후손이니, 결국 하늘의 자손인건가?

 

근데 이런 순천씨의 이야기는 정말 실제일지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위에서도 말했듯 류큐의 역사서는 사쓰마의 류큐 침공 이후에 집필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본토는 류큐를 상대로 일류동조론을 펼쳤다. 아마 순천씨 이야기가 그 일류동조론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1백년전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했을 때 우리를 상대로 일선동조론과 내선일체론을 펼쳤던 것 처럼 말이다.

 

...무튼 영조 왕통의 영조는 순천씨 이전의 천손의 후손이니 당연히 하늘의 자식이며, 찰도 왕통의 시작인 찰도는 그 유명한 선녀와 나무꾼설화에 나오는 선녀가 엄마다. 1, 2 상왕조의 시조는 죄다 하늘의 선택을 받은 왕이다. 근데 또 미묘하게 이 하늘의 선택 혹은 하늘의 후손이라는 일화를 보면 우리의 왕조 신화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유교에서 나오는 그런 하늘()의 느낌이랄까?

 

조선과 거의 겹치는 역사적 시간위에 존재했던 류큐왕국은 동아시아 책봉-조공 체제의 일원이었고 동아시아 문명권의 공통적 문화기반이었던 유교와 불교, 한자문화를 공유했다. 동아시아 중세 왕조 국가로서의 일반적 특성을 지닌 듯 보이지만, 왕국을 지배한 류큐 왕권의 주요 기조 가운데 하나는 고유의 신화적 논리였다. _P 019

 

그럴수 밖에 없었던 거였다. 류큐라는 나라는 위에서도 언급했던 독립국가였다. 또한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이웃 국가와의 교류가 절실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옛날 장보고가 해상무역에 통달했던 것 처럼, 류큐 역시 해상무역에 일가견이 있는 나라였다. 그렇기에 배를 타고 중국까지 가서 책봉-조공관계를 맺었고, 한반도에도 주기적으로 왔었다. 그러니 중국과 한반도에 퍼져있는 유교적 세계관이 류큐에 도입될 수 밖에 없었던 거다.

 

외부적으론 해상무역 활동으로 어엿한 동아시아 일원이었던 류큐, 내부적으론 다른 나라에 비하면 많이 늦었기는 하지만 하나의 왕조로 통일해가고 있었던 류큐였다. 그들 나름대로 평화적으로 살았겠지만, 아 물론 왕조를 통일해가는 과정이나 왕통이 변경되는 과정에선 분명 피튀기는 혈전이 있었겠지만(중산왕 연표를 보면 각 왕들이 재위기간이 정말 짧....), 적어도 외부인 입장에서 류큐는 나름대로 평화로웠던 것 같다. 그러다 일본 규슈세력 사쓰마번(시마즈)가 류큐를 침략한거다. ? 당시 일본은 임진/정유재란에서 패배하고 그 활로를 모색했어야 했으니까. 그 방안 중 하나가 바로 류큐였다.

 

사쓰마의 침략과 간섭으로 왕조의 독립성에 심각한 훼손을 입게되었지만, 류큐 왕조는 지속될 수 있었다. 그 까닭은, 임진왜란으로 중국과 교류를 차단당한 일본 막부가 류큐를 그 통로로 남겨놓으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사쓰마 침입 이전 류큐 왕국은 중국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고 있던 동아시아 국제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었다. 일본 막부는 류큐 왕국을 존속시키는 한편 자신들의 세력을 노골화하지 않음으로써, 류큐와 중국 간의관계를 유리하게 활용하려 헀던 것이다._P 178

 

조선왕조실록에도 사쓰마의 류큐 침공에 대한 기록이 나와있다.

 

조선왕조실록

또 유구(琉球)와 일본 양국의 일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유구는 일본에 소속되었는데, 남경과 복건 사람들이 또한 양국과 서로 왕래하고 있다." 하였다.

-효종실록 8, 효종 3330일 신축 2번째기사 1652년 청 순치(順治) 9/ 정의현에 표류한 중국 상인에게 중국·일본의 상황을 물어보다

 

이렇게 류큐는 중국이 아닌, 일본에 조공을 하는 류큐번이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 1879년 일본 메이지 정부 폐번치현의 일환으로 류큐번은 사라지고, 오키나와 현이 생긴다. 이를 일본사에서는 류큐 처분이라고 부른다. 지들 멋대로 류큐라는 지역을 처분한거다. 그 이후? 오키나와는 일본의 제국주의의 피해를 고스란히 받았고, 2차 세계대전 중 일본 영토에서는 유일하게 전쟁영토가 되었다. 그것도 아주 치열한 오키나와 전투가 있었던 지역말이다(오키나와 전투로 오키나와 주민이 최소 이상이 학살당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그 어떤 전쟁을 하던 자국이 아닌 남의 나라에서 했는데, 오키나와에서 전쟁을 했다는 사실은 오키나와를 자국 영토가 아닌 식민지로써 혹은 처음부터 전쟁기지로 사용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류큐 라는 역사를 지닌 채 일본의 일부가 된 오키나와는 일개 지방이 아니라 제국 일본의 내부 식민지 였다._P 026

 

하지만 평화의 나라로 환기되곤 하는 류큐도 실제가 아닌 이미지에 가깝다. 류큐 왕국 역시 여느 왕국처럼 투쟁과 정복 위에 세워진 국가였고, 왕권을 둘러싼 피의 쟁투와 그로 인한 왕통의 변화도 겪었다. ‘평화왕국 류큐라는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은, 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낸 오키나와 전투의 경험, 제국 일본의 패전 이후 실시된 미군정, 섬 곳곳에 설치된 미군 기지로 인해 상존해온 전쟁에 대한 공포 등 평화롭지 않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빚어낸 또 하나의 허상이다. _031

 

지금 일본에게 오키나와는 또 다른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은 전쟁의 피해자다라는 슬로건을 걸고 말이다. 지들이 일으킨 전쟁인데!!! 오키나와 전투 당시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니, 당연히 일본이 피해자다라고 생각하는거다. 물론 오키나와 한 섬만 봤을 때는 전쟁의 피해지역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죽었던 수 많은 오키나와 사람들이 누구 손에 죽었나?라는 측면에서 보면 대체 가해자는 대체 누구인가? 싶은거다. 학살당한 수 많은 오키나와인이 일본군인 손에 강제 자살당했다. ‘미군에게 잡히는 수치를 당하느니, 그냥 죽어라라는 미명하에. 일본은 그 점을 묵살하고 있다. 오로지 오키나와의 전쟁의 피해자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원폭을 맞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와 함께.

 

오키나와라는 섬은 전쟁의 피해자는 맞지만, 그게 일본이라는 나라가 전쟁의 피해자라는 공식이 성립되지 않는다. 아우 걍 도쿄올림픽 망해라 하고 저주를 퍼붓고 싶어졌다.

근데 또 이렇게 일본을 욕하자니, 오키나와와 비슷한 우리 제주도의 역사를 봤을 때.... 참 꽁기꽁기 하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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