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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길 위에 저 시간 속에 - 빛나지만 음험하고 고요하지만 번화하며 고풍스러우면서도 탈역사적인 척하는 어느 매력적인 도시 여행기
이인우 지음 / 파람북 / 2024년 7월
평점 :
우리집엔 책이 많다. 너무 많다보니 어쩔수없이 책을 좋아하는 지인에게 종종 나눔을 하는 편이다. 그런 내가 절대 남에게 주지 않는 책들이 있다. 대체로 역사책 또는 역사기행문 등이 그렇다. 그렇다고 모든 역사책, 역사기행문을 다 이고지고 가느냐? 그건 또 아니다. 그 중에서도 내 취향에 맞는 책들만 살아남아, 우리집 책장에 꽂혀있다.
내 취향에 맞는 역사책, 역사기행문은 대체로 한국사, 일본사, 한일관계사와 관련된 책이 많다. 특히 한일관계사는 고대사가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자타공인 역사더쿠 피로가 해외 답사를 주기적으로 다니게 했던 건 다름아닌 도래인과 한일고대사 유적지였으니까. 그런 내가 오랜만에 한일고대사 답사 여행기를 읽었다(엄밀히 따지면 이 책은 교토 전체를 답사하는 여행책임ㅋㅋ). 그리고 이 책은 남 주지말고, 끝까지 소장하자고 생각했다.
이 교토 여행책 제목은 『교토, 길 위에 저 시간속에』 다. 제목만 봐도 ‘일본 교토 여행기’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이 여행기가 어떤 방식으로 쓰여졌는지는 책을 읽어봐야만 알 수 있다. 혹은 저자가 누구인지를 알거나. 본격 리뷰에 앞서, 이 교토 여행책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살짝 귀뜸해보자면?
힌트 하나! 이 책의 저자는 현재 교토 리쓰메이칸 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 연구원이다.
힌트 둘 ! 이 책의 부제는 「교토, 빛나지만 음험하고 고요하지만 번화하며 길 위에 저 시간 속에 고풍스러우면서도 탈역사적인 척하는 어느 매력적인 도시 여행기」 다.
그렇다. 이 책은 교토를 인문학적 시선으로, 문화적 시선으로, 역사적 시선으로 바라본 여행기이자 답사기다.
교토는 헤이죠쿄에서 헤이안쿄로 천도한 8세기부터, 19세기 도쿄로 이전하기 전까지 일본 수도였다. 무려 천 년 동안 일본 수도였던 장소이기에, 그 곳에 켜켜이 쌓인 역사는 하루 밤낮을 이야기해도 모자란다. 하지만 여기서 교토 천 년 역사 중 바로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천 년 역사의 팔할이 한반도 도래인이 쌓아올린 역사라는 점이다. 아니, 교토의 시작 자체가 ‘도래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실제로 교토 여행지 중 관광지로 유명한 여러 사찰, 신사들은 한반도 도래인이 창건한 경우가 태반이다. 교토 여행 시 한 번 이상은 꼭 들른다는 후미시이나리타이샤, 기요미즈데라, 키타노 텐만구, 야사카 신사. 이 신사, 사찰을 창건한 사람이나 모시고 있는 신은 모두 한반도 도래인이거나, 도래인이 모셔온 한반도 신이다.
위에서도 말했듯 나는 도래인, 한일고대사 유적지 답사를 자주 다녔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만해도, 일본을 연 2회씩 다녔다. 여행겸, 덕질겸, 답사겸 겸사겸사 말이다. 제일 자주 방문했던 곳은 아무래도 ‘교토’다. 일본 곳곳에 도래인 유적지가 산재하지만, 접근성이나 명성 등 교토에 있는 도래인 유적지가 여러모로 압도적이다. 그래서 더 교토를 자주 찾은 면도 있다.
이 책 4번째 챕터가 바로 교토 도래인에 대한 이야기다.
내 기준으로 봤을 때 내용 자체는 알고 있는 내용들이 다수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큰 테두리 안에서다. 세세한 내용 중에는 처음 알게 된 내용도 많았기에, 더욱 집중하며 읽었다. 특히나 출산 이후 일본을 못 간지가 n년 째 되는지라, 더 집중한 면도 있었는데. 책을 읽다보니 가봤던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장소가 많이 변했음을 책을 통해 알게되서 조금은 씁쓸한 면도 있었다.
아래는 ‘도래인’과 관련한 주요 키워드다.
아오이(=아욱)
푸른 아욱 잎사귀는 가모족 신화에 등장한다. 신화에 따르면, 신을 맞이하고자 하는 사람은 ‘푸른 아오이 잎으로 몸을 장식하라’는 신탁이 있었다고 한다. 신이 강림한 신산에는 푸른 아오이가 무성했다고 하고, 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아들을 그리워하는 어머니에게는 푸른 아오이 잎이 ‘만남’의 매개가 되어주는 이야기이다. 이 신화에 근거해 아오이의 어원을 일본어의 ‘만나다’라는 뜻인 ‘아우’와 신령 또는 신의 힘을 뜻하는 ‘히’의 합성어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후손들의 신화적 해석일 뿐 한국어와의 유사성으로 볼 때 ‘아오이’는 토템화된 ‘아욱’ 그 자체를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p 260
‘아욱길’을 따라 열도에까지 이른 ‘도래인’들은 어떻게 ‘일본’이 되어갔을까. 아오이마쓰리 퍼레이드의 종착지인 가모신사의 문장은 ‘후타바아오이’. 두 장의 잎으로 묘사된 아오이 문양이다. 이 문장은 할아버지와 손자 관계인 시모가모와 가미가모 두 신사의 친족 관계를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관저도 있다. 교토의 또 다른 도래인 호족이었던 신라계 하타씨 신사에도 이와 똑같은 문장이 있기 떄문이다. 가모씨와 하타씨는 혼인 등으로 유대를 맺고 고대 교토 일대를 양분해 다스린 호족이었다. 794년 간무덴노가 천도를 단행했을 때 배후에서 이를 지원한 세력이 이들이었다고 전해진다. 두 부족은 덴노가 교토로 옮겨운 뒤에는 황실 수호 신사를 자임했는데, 이런 내력으로 후타바아오이는 가모족의 내부 결합에서 나아가, 가모씨와 하타씨 두 부족 간의 단단한 동맹, 즉 ‘결합력’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다. 두 개의 가모신사 자체가 애초 가모족과 이즈모족 동맹의 결실이기도 했다. p 262~263
교토를 가면 한 번 쯤은 꼭 거니는 가모강변. 가모강변 상류에는 두 개의 신사가 있다. 일반적으로 관광객들은 가모강변 상류까지 가지는 않는다. 아오이 마츠리가 개최하는 시기 빼고. 여튼! 가모강변 상류에는 오랜 역사를 지닌 두 개의 신사가 있는데, 바로 시모가모 신사와 가미가모 신사다. 이 두신사는 한반도 도래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신사다.
뭐, 애초에 교토 일대를 일군 사람들이 한반도 도래인이다보니, 교토 내에서 천년 내력을 가진 신사와 사찰 중 도래인 연관성이 없는 곳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렵긴 하다. 도래인이 창건했거나, 혹은 그 후손이 창건했거나, 혹은 도래인의 비호를 받았던 사람들이 도래인(또는 그들이 모셔온 한반도 신)을 기리기 위해 창건했거나.
시모가모 신사와 가미가모 신사 내력을 보면, 아주 오랜 과거 초대 천황인 진무의 정복전쟁* 당시 큰 공을 세운 가모족이 공로로 받은 영지가 바로 가모강변 일대였다. 이후 이즈모족이 가모강변 일대로 들어왔는데, 놀랍게도 두 부족은 영지 다툼없이 융합되어 살았다고 한다. 대충 혼인동맹으로 추정된다고나 할까?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가모족 수장의 이름과, 이즈모족 명칭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초대천황 진무는 일본 건국시기를 기원전 660년으로 설정하며 생겨난 허구 인물이다. 초대부터 9대까지는 시간상 끼워맞춘 인물이며, 이들 천황에 대한 이야기는 『일본서기』에도 크게 다루지 않는다. 물론 진무의 이야기를 지어냄에 있어서 일부 사실이 있을 수 있으나, 『일본서기』 특성 상 5%의 진실로 95%의 허구가 나왔다는 사실을 잊지말자.
가모족 수장의 이름은 ‘야타가라스’. 우리 말로 하면 큰 까마귀다. ‘큰 까마귀’! 한국 고대신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다면, 바로 딱!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바로 ‘삼족오’다. 본디 삼족오는 태양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철기 기술을 지닌 부족이기도 하다. 따라서 삼족오(태양)을 숭상하는 부족은 대체로 철기기술을 바탕으로 농경을 하는 집단이다. 이즈모족 명칭도 우리말로 풀이하면 ‘떠나는 구름’이다. 즉 이즈모족도 구름이 떠나면, 떠오르는 태양을 섬기는 농경부족이었던 셈이다. 두 집단 모두 농경 부족이었기에 융합하는데 크게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타 씨(=진 씨)
대언천을 건설한 주체는 4세기 무렵 신라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온 도래인 집단 '하타‘ (한자로는 ‘진’을 쓴다)씨 일족이다. ‘하타’ 또는 ‘하다’ 라는 씨족명은 한국어 ‘바다‘ 에서 왔다는 설이 있지만, 현재는 경상북도 울진 지역에 있었던 ‘파단국’에서 유래한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어져 있다. 하타씨는 처음에는 교토 남쪽 나라현 가쓰라기 지방에서 살다가 도래계 주민들을 이끌고 야마시로 (지금의 교토) 남부 지역으로 이주한 뒤, 당시 황무지였던 이곳 대언천 개발에 성공했다. 하타씨들은 대언천의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상업에도 진출, 7세기 초에는 대호족으로 성장했다. 아라시야마 일대는 물론 강 건너 동쪽의 사가노와 우즈마사, 교토 남쪽 후시미의 후카쿠사 등에서 대촌락을 이루었고, 마침내 야마시로 전체의 주인이 됐다. p 267
대호족으로 성장한 하타씨는 대언천 건너 동쪽 지역도 세력권에 넣었다. 마쓰오신사에서 동쪽으로 다리를 건너면 우즈마사 라는 지역인데, 이름을 그대로 풀면 하타씨의 맏이 , 즉 큰집(장손집) 또는 ‘종갓집'을 의미한다. 하타씨의 씨족명이 그대로 동네 이름이 된 셈이다. 우즈마사와 인근 사가노 일대에는 하타씨족의 것으로 인정된 고분이 즐비하다. 그중 특히 우즈마사 주택가에 돌무지로 남아 있는 헤비즈카 고분이 유명하다. 전장 70여 m로 일본에서 네 번째로 큰 이 전방후원분 유적은 하타노 카와카쓰축 (생몰년 미상)의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것으로 추정된다. 하타씨족의 수장이던 하타노 카와카쓰는 유명한 고류지는 절을 지은 사람으로, 7세기 초 일본의 통치자 쇼토쿠 태자의 정치 고문이기도 했다. p 270
이 책 리뷰를 하면서 과거에 내가 포스팅 했던 도래인 유적지 답사 및 역사책 리뷰를 다시 봤는데, 당시 나는 옛 강원도 울진 땅에 있던 ‘파단국’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하타 씨’가 된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표현했더랬다. 정확히는 신라장군 이사부가 파단국을 점령하던 그 때, 신라에 복속되기를 거부하고 일본으로 갔던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이 ‘하타 씨’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무엇보다 ‘파단’을 일본어로 읽으면 ‘하타’가 되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왠걸! 현재 한일고대사에선 ‘파단국’ 사람들이 일본 ‘하타 씨’가 된 게 정설이라고 본다고 하니, 내 나름대로 잘 추론한듯 싶다. 그런 의미에서 우즈마사에 있는 하타씨가 세운 가이코노 야시로 신사 산쥬도리이와 대마도 와타즈미 신사 산쥬도리이와 연관성에 대해서도 뭔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긴다.
뜬금없이 왜 산쥬도리이 이야기인가 하면, 일본 신사는 기본적으로 금문(?) 역할을 하는 도리이가 세워져 있다. 보통 도리이는 기둥이 두 개인데, 교토 우즈마사에 있는 하타 씨 신사에 기둥이 세 개인 도리이가 있다(일명 산쥬도리이). 그리고 내가 아는 한 대마도 와타즈미 신사에도 산쥬도리이가 있다. 와타즈미 신사에 있는 산쥬도리이는 용왕신 이야기라, 언뜻 보기엔 하타 씨와 큰 연관이 없어보이지만, 이게 또 아예 연관이 없다고 하기엔 좀 꽁기꽁기 하다. 일단 대마도가 한반도와 제일 가까운 지역이자, 도래인들이 넘어갈 때 경유지가 되는 지역이기도 하고 말이다.
너럭바위배 (핏, 연오랑 세오녀 설화)
일본황실이 시조로 여기는 진무덴노가 정복전쟁(어디까지나 가공의 역사이다)을 벌일 때. “진무의 어머니 다마요리 히메가 오사카만에서 요도가와강을 거슬러 올라와 이곳에 사당을 지었고, 그때 타고 온 배를 사람들이 들로 덮어 놓은 것”이란 전설이 ‘황실 버전’이다. 두 번째는 유사한 내용에 주인공이 진무의 어머니에서 가모신사 제신 의 어머니(다마요리 히메라는 이름은 똑같다)로 바뀐 ‘신토 버전’ 이다.p 281
그런데 묘하게도 기후네신사의 중궁은 끊어진 인연을 다시 맺어주는 결연의 신사로 이름이 높다. 고대의 여류시인 이즈미 시키부가 기후네신사를 찾아와 냉담해진 남편의 마음이 돌아오길 빌어 소원을 이룬데서 유래했다는데, 고대의 이 지식인 여성은 무슨 '전승'에 근거하여 이 깊은 산속 신사에까지 와서 재회의 소망을 빌게 됐을까? p282
우리나라 ‘연오랑 세오녀 신화’와 연관성이 있는 너럭바위 배 전승. 나는 너럭바위배 전승이 시마네현에 있는 카라카마 신사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교토 키후네 신사에도 있었다. 물론 카라카마 신사 너럭바위와 키후네 신사 너럭바위에 얽힌 내용은 조금, 아니 상이하긴 하다. 오히려 연오랑 세오녀와 연관성은 교토 기후네 신사보다는 시마네현 카라카마 신사가 훨씬 높다고 해야할까?
물론 세오녀가 일본에서 연오랑을 만난 뒤 ‘귀비’에 추대되었다는 점과 ‘기후네’ 신사 명칭의 연관성, 그리고 연오랑과 세오녀의 끊어진 인연이 일본에서 다시 이어졌다는 점과, 기후네 신사가 끊어진 인연을 연결해주는 신사라는 연관성을 보았을 때, 확실히 기후네 신사에 얽힌 전승이 연오랑 세오녀 전승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특히나 현제 기후네 신사에서 내려오는 전승은 누가봐도 일본 황실 주도하에 변형된 전승이고.
연오랑, 세오녀, 너럭바위 배 이야기가 나온 김에 시마네현 카라카마 신사에 얽힌 전승(일본 건국신 스사노오 전승) 살짝 해볼까 한다. 물론 이 책에는 없는 내용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 건국신 스사노오는 신라국 소시모리라 불리우는 곳에서, 바위를 타고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넘어온 신이다. 스사노오가 탄 바위배가 카라카마 신사에 남아있다(①바위를 타고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간 연오랑). 이 외에도 스사노오 일화 중 야마타노 오로치 퇴치 설화에 ‘가라쿠니(韓國)마루’라는 칼을 사용한다. 이는 가라쿠니에서 만든 칼이라는 뜻으로 봐도 무방하다(②철기문화를 지니고 있던 집단으로 대표되는 연오랑/현재 ‘포항’은 제철소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시마네현에는 스사노오를 주신으로 모시는 히노미사키 신사가 있는데, 이 신사 권내에 작은 신사가 남아있다. 실제로는 이 작은 신사가 히노미사키 신사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 작은 신사에는 ‘가라쿠니(韓國)신사’라고 적혀있다.(③한반도 도래인 ‘연오랑’이, 한반도 신을 위해 만든 사당) 또한 시마네현에는 ‘니시코리’라는 도래인 성씨 집성촌이 있는데, 이 성씨의 한자를 풀이하면 ‘비단을 짜는 집단’이라는 뜻이다(④직조기술을 지닌 집단이 ‘세오녀’를 대표하여 일본으로 들어옴). 이 외에도 『이즈모 풍토기』에서 나오는 ‘쿠니비키’ 일화, 시마네현 ‘고진다니 유적’등 스사노오와 ‘연오랑 세오녀 설화’ 연관성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간무 천황
2001년 당시 일본 아키히토 덴노가 68살 생일 기자회견에서 "간무덴노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 이라고 역사(속일본기)에 기록된 사실에서 한국과 깊은 인연을 느낀다"고 말한 것이다. 당시 일본 언론들은 이 발언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충격적 이었다는 뜻이다. 사실 발설해서는 안되는 일종의 '금기'를 덴노 자신이 건드렸기 때문이다. 히라노 신사는 아키히토 덴노가 깊은 인연을 느낀다고한 간무덴노의 어머니 다카노노 니가사와 깊은 인연이 있는 신사이다. p 288
적자인 이복동생을 제치고 44살에 어렵게 즉위한 간무는 정통성 강화를 위해 왕권신수설을 내세웠다. 기존의 일본 태양신(먼저 열도에 들어온 가야, 신라계 태양신앙)에 대륙(고구려, 백제) 태양신을 더해 자신을 하늘이 내린 덴노로 포장하고 싶었다. 황태후 추존문은 그런 당시의 정황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 기록은 8세기 일본에도 고구려 난생신화가 전해진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해서 무척 흥미롭다. 이처럼 간무와 니가사는 자신들의 혈통, 즉 고구려에서 백제로 이어진 도래계 계보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간무 집권 뒤 정치는 간무 옹립을 주도한 후지와라 가문과 백제, 고구려 출신의 도래계가 주도했다. 대신 등 고위직을 뜻하는 '의정관' 5명이 고구려와 백제계였던 사례는 이때 말고는 없다고 한다.p 294
간무 덴노, 그의 어머니 다카노노 니가사(고야 신립), 간무 집권 시 도래계 고위직 등 이런 이런 이야기는 포스팅을 워낙 자주 했으니 생략...하지만, 여기서 자주 반복해도 이상하지 않을 이야기 하나를 말하자면. 간무덴노 당시 일본 최초 정이대장군(쇼균)이 발탁되었다. 그의 이름은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그가 발원하여 창건한 사찰이 있으니 바로 교토 최대 관광지 기요미즈데라(청수다)다. 기요미즈데라 경내에 있는 ‘전촌당’에 다무라마로 부부상이 모셔져있다. 물론 비공개라는게 함정.
여기서 중요한건, 바로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본인. 일본 최초 쇼군이었던 다무라마로는 백제계 도래인 후손이다. 책에는 자세한 내용이 없어서, 후술하자면. 일본 사서 『속군서류종』에 따르면 다무라마로의 조상은 백제 왕족인 ‘아지사주(=아치노오미)’다. 특히 ‘아지사주’는 야마토 아야씨의 조상이기도 하다. 참고로 야마토 아야씨는, 5세기 야마토 정권 당시 무력(군사력)을 쥐고 있던 도래인 집단이었다. 그들의 후예인 다무라마로가 일본 최초 쇼군에 오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여기서 조금 더더더 덧붙이자면, 교토가 수도가 되기 이전부터 야마토, 아스카, 나라시대 모두 한반도 도래인들이 일본 황실 외척 및 주요 관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5/0120/pimg_7440571784576657.jpg)
한동안 한일고대사책을 멀리했었는데, 이 책 덕분에 꺼져가던 지식의 불씨를 살렸다. 이제 다시 한일고대사 책을 읽어보기로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