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채소 먹는 기쁨


오늘 마음을 채운 에세이 『제철 채소 먹는 기쁨』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채소’다. 그동안 우리 식탁 위에서 늘 조연에 머물렀던 채소들이 이 책 안에서는 당당히 주연으로 우뚝 선다.


부끄럽게도 나는 채소로 만든 음식은 늘 ‘밑반찬’이나 메인 메뉴를 돋보이게 하는 ‘곁들임’일 뿐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식탁의 중심은 으레 육류나 생선이 차지해야 하며, 채소는 그들의 느끼함을 잡아주거나 영양 균형을 맞춰주는 보조적인 식재료라 여겼다. 심지어 ‘김치찌개’처럼 이름부터 채소가 주인공인 음식조차, 그 안에는 반드시 돼지고기 같은 육고기가 들어가야만 제대로 된 맛이 난다고 맹신해 왔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정고메 작가는 그런 나의 해묵은 고정관념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저자는 채소가 만년 조연이라는 세간의 인식을 거부한다. 그녀는 채소가 식탁의 명실상부한 주연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치열하게 고민했고, 누구도 선뜻 시도하지 않았던 창의적인 조리법들을 고안해 냈다. 낯선 식재료의 조합을 실험하고 직접 맛보며 완성한 레시피들을 블로그에 공유하기 시작하자, 온라인상의 독자들은 열광했다. 하나둘 그녀의 요리를 따라 하기 시작하면서, 무대 구석에 밀려나 있던 채소들이 드디어 식탁 중앙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것이다.


책 속에서 보여주는 채소들의 무궁무진한 변주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향긋한 깻잎 하나만으로도 근사한 냉파스타를 뚝딱 만들어내고, 봄의 전령사인 냉이에 두부와 당근을 곁들여 단단한 풍미의 냉이김밥을 완성한다. 뿐만 아니다. 토마토는 평범한 라볶이의 품격을 높이는 핵심 재료가 되고, 고기 없이도 김치찌개와 김치스튜의 감칠맛을 폭발시키는 최고의 식재료로 재탄생한다.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끼니가 아니라, 제철의 에너지를 머금은 채소 본연의 맛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은 읽는 것만으로도 미각이 살아나는 기분을 선사한다. 그저 냉장고 구석에서 시들어가던 밑반찬용 식재료라고 치부했던 채소들이, 작가의 손끝에서 얼마나 입체적이고 다채로운 요리로 변모할 수 있는지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식탁 위에서 조연의 삶에 익숙해진 채소들에게 미안해지는 시간. 오늘부터 나 역시 나의 주방에서 채소들을 주연으로 데뷔시켜보고 싶다는 기분 좋은 설렘이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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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청춘의 초상 - 조국의 독립에 바친 뜨거운 젊음, 한 장의 사진이 증언하는 찬란한 그 순간
장호철 지음 / 북피움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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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장에는 일제강점기 관련 역사책들이 꽤 있다. 일제 수탈과 침략에 대한 역사와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의 역사. 결이 확연히 다른 두 역사는 읽는 이로 하여금 상반되는 감정을 들게한다. 어느 쪽을 선호하고 읽느냐는 개인의 자유이지만, 잊지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이 모든 역사를 절대 잊지않고 ‘기억’하고 기록하여, 우리 후손들이 이 사실을 명확하게 알게 할 것. 그리하여 우리에게 매우 당연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격이 어떻게 주어졌는지를 인지하고, 우리에게 ‘대한민국’ 이라는 나라를 남겨준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 이게 바로 내가 역사책을 읽고 또 읽는 이유다.



누군가의 자식이었고, 누군가의 배우자였으며, 누군가의 부모였던 독립운동가들. 그들이 바라던건 내 후손들이 ‘우리나라’에서 ‘우리말’을 쓰며 ‘자유’롭게 살수 있는 것. 단지 그뿐이었다. 그 하나만을 위해 독립운동가들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이 역사책은 독립운동가 26명에 대한 역사책이다. 독립운동이라는 특성상 자신을 드러내고 할 수 없기에, 광복 80주년을 맞은 아직까지도 후대가 확인하지 못한 무명의 독립운동가가 많다. 아직 발굴되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을 찾는 일은 전문가들에게 맡기자. 우리는 발굴된, 그리고 아직 발굴되지 못한 모든 독립운동가들을 기리고 그들을 기억하자. 




김란사, 조선의 앞길에 등불을 켜다

안창호, 미국 최초의 한인촌을 세우다

김알렉산드라, 조선인 1호 볼셰비키 혁명가 아무르강에 혁명의 꽃으로 지다

장인환, 샌프란시스코에 울린 3발의 총성

안중근, 세 번의 “코레아 우라”

이재명, 을사오적을 처단하리라

김익상, 감시대상 12310번 의열단원의 슬픈 독립투쟁

유관순, 영웅도 신도 공주도 아니었던 10대 독립운동가의 순수

김상옥, 수백 일경과 벌인 전설의 총격전

나석주, 황해도를 뒤흔든 투사

김마리아, ‘대한독립’과 결혼한, 조선이 낳은 혁명 여걸

박자혜, 홀로 두 아이를 키우며 일제의 압제와 싸우다

이봉창, ‘신일본인’에서 ‘독립투사’로

윤봉길, 중국 백만 대군이 못한 것을 해낸 스물 넷 청년

백정기, 함정수사에 걸려든 미완의 거사 상하이 ‘육삼정 의거’

윤동주, 마지막 여름방학 그는 돌아오지 못했다

김규식, 영특한 소년 ‘좌우합작’과 ‘납북협상’을 주도하는 정치가가 되다

김구, 26년간 임시정부 이끈 민족주의자의 풍찬노숙의 역사

전명운, 미주 한인사회의 통합을 앞당기다

차마리사, 여성해방은 경제적 자립에서 시작된다

김원봉, ‘현상금 100만 원’의 사나이

주세죽, 단발머리의 모던 걸? ‘코레예바’의 사랑과 혁명!

연미당&엄항섭, 파수꾼으로 임정과 함께한 부부, 분단 조국에서 이산의 비극을 겪다

권기옥, 창공을 날아올라 일왕 궁궐 폭격을 꿈꾸다

정정화, 권문세가 셋째딸, 임정 밀사로 압록강을 건너다

장준하, 그해 여름, ‘돌베개’를 베겠노라 다짐하다




김알렉산드라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는데, 재판장은 “당신은 조선인이기 때문에 러시아 국사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 그러니 죄를 뉘우치면 석방하겠다.”라고 제안하지만, 그는 이를 간단히 거부하며 “적위군과 함께 이 전쟁에 참여한 수백 명의 조선인은 소비에트 권력을 방어하는 것이, 조선을 해방에 이르게 해줄 것을 알기 때문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것이다.”라고 답했다. 1918년 9월 25일, 김알렉산드라는 하바롭스크 아무르강 유역 우초스 절벽에 섰다. 사형 집행관들은 포로들의 눈을 흰 수건으로 싸매고서 강변 바위 위에 세운 뒤 총살하고 그 시신을 강물에 던져넣었다. p 039


‘유관순 누나’, 친근하고 정겹게 부른 호칭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기실 이 호칭은 관행적인 남성 위주의 시각을 대변한다. 그가 스물 이전에 순국한 ‘소년’이었다고 한들 우리 사회에서 그를 ‘ㅇㅇㅇ형’이라 부를까. 더구나 ‘ㅇㅇㅇ오빠’는 언감생심이다. 호명의 주체로 여성을 상정하는 일도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공적 호칭으로 ‘유관순 언니’가 없는 것도 같은 이유다. 장소천이나 박두진에게는 1902년생인 유관순이 ‘누나’임직하지만 이미 그가 태어난 지 100년이 훨씬 지났다. 그런데도 여전히 ‘누나’로 불리는 것은 그를 온전한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로 바라보는 걸 방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를 ‘유관순 열사’라 부를 때 그는 ‘이준 열사’와 같은 위상의 공적 영역에 존재하는 인물이 된다는 점을 되새길 만하다. p 099


“대한독립과 결혼하였다”라는 진부한 표현마저 그의 삶을 아우르는 데 모자를 정도로 김마리아는 평생 독신으로 독립운동과 민족 교육, 여권 신장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었다. 두 차례의 투옥 중에 여성으로서 치욕적인 고문을 받아 한쪽 가슴을 잃고 늘 안섶과 겉섶의 길이가 다른 특별한 저고리를 입어야 했던 사람이었다. p 124


독립유공자 가운데 여성의 비율이 3%가 채 되지 않는 현실은 옥바라지와 경제활동, 양육까지 병행하며 항일투쟁에 참여한 여성들의 희생이 재조명되어야 할 필요성을 웅변으로 증명한다. 그늘에 가려진 부인들의 뼈를 깎는 희생은 남편에 부수되는 ‘내조’가 아니라 동등한 ‘투쟁’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아쉽다. 내로라하는 독립운동가들의 투쟁과 헌신은 바로 그들 가족의 희생을 전제로 가능했기 때문이다. p 142





#김알렉산드라. ‘한인 사회주의자 동맹’ 창당 및 한인무장부대를 조직하였고 출판사 ‘보문사’ 운영했다. 하지만 김알렉산드라를 비롯한 연해주 일대를 근거지로 두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광복 이후 오랜 시간 남한과 북한 양쪽에서 그 이름조차 금기시 되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남한에서 그들은 그저 사회주의자였고, 북한에서는 김일성 우상화의 걸림돌이었으니까.


#유관순. 과거에는 유관순 열사 이름뒤에 따라오는 호칭은 늘 ‘누나’였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이름 뒤에 의사, 열사, 지사를 붙여 존경받아 마땅할 사람으로 인식하였지만, 유관순 열사만큼은 달랐다. 국가적 차원에서 유관순 열사는 ‘유관순 누나’ 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2000년대가 시작되면서, 그 이름 뒤에 ‘열사’가 붙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김마리아. 2.8독립선언 대회에 참가했으나, 정작 2.8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조선 청년 대표 11명 중에는 여성이 없었다. 김마리아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동등하게 독립운동을 참여하지 못하는 현실을 자각했다. 여권 신장에 중요성을 깨닫고, 교육하며, 여성지도자들과 함께 대한대국부인회를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아 임정으로 보내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일제에 잡힐 때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끔찍한 성고문을 당했다. 


#박지혜. 그녀의 남편은 단재 신채호다. 다들 신재호는 알지만 박지혜는 모른다. 비단 그녀뿐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 대다수는 남성이다. 왜일까? 이 역시 남성 위주 시각의 대표적인 폐해다. 


이들은 살아서 조국이 광복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살아서 독립을 보지 못했던 것이 어쩌면 이들에겐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민족의 ‘단합’과 ‘통일’이 진정한 광복이라고 믿은 김규식은 해방 공간에서 일관된 태도로 좌우합작과 통합을 이루려고 애를 썼다. 1948년 1월, 유엔 한국위원단이 서울에 들어오자, 그는 남북협상에 들어갔다. 그해 2월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안에 ‘극소수의 이익을 위한 정권’이라며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p 205


일제의 전시 동원 체제하에서 이화의 김활란은 일제에 협력하면서 이화여전 교장에 취임했지만, 같은 시기에 근화여학교의 경영권을 잃은 차미리사는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 울분을 삭이며 은거해야 했다. 해방 이후 김활란은 이승만과 손을 잡고 단독정부 수립 운동을 벌였지만, 차미리사는 남북협상을 주장하며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김구 진영에 합류했다. 해방 정국에서 단독 정부 설립을 반대하고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성명서에 서명한 108인 중 유일한 여성이 차미리사였다. 일찍이 1907년에 의혈 투쟁을 주장한 바 있는 그는 해방 공간에서도 남북 분단을 반대한 유일한 여성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p 240


1944년에 임정의 군무부장에 취임한 김원봉은 1945년 12월 임시정부 환국 2진으로 귀국하였다. 1946년 6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하고 연합전선 구축에 노력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께 좌익 활동 혐의로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붙잡혀 가서 따귀를 맞는 등 수모를 겪고 밤낮을 통곡했다고 한다. 20년 가까운 세월을 오직 조국 독립 일념으로 일제와 싸워온 투사인 그가 더러운 친일파 노덕술에게 당한 모욕감과 치욕은 쉽게 삭일 수 없는 것이었다. p 250






#김규식. 그의 독립운동 행보에서 빠질 수 없는 키워드는 ‘좌우합작, 민족통합’이다. 임정에 민족혁명당을 참가시켜 좌우합작을 성공시킨 존재역시 김규식이었다. 해방 직후만 해도 김구선생은 반공 우파 노선을 확실히 했던 것에 반해, 김규식은 여운형과 함께 해방이후에도 꾸준히 좌우합작, 민족통합을 외쳤다(김구 선생이 좌우 합작을 외치게 된 건 나중일). 그의 바람대로 조국이 독립을 맞이했지만, 그가 원하는 형태가 아니었다. 결국 대한민국은 두개의 나라로 쪼개졌다. 설상가상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김규식은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어 지병으로 사망했다. 김규식도 여타 독립운동가들처럼 남한에서 그 이름이 금기시 되었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외치던 이승만의 정적이라는 이유가 첫번째고,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었다는 이유가 두번째였다.



#차미리사. 조국 독립을 꿈꿨던 덕성여대 설립자 차미리사와 일제 부역자 이화여대 초대 총장 김활란의 상반된 행보. 여성 교육의 선구자라는건 차미리사와 김활란이 같았지만, 차미리사는 독립운동을, 김활란은 친일행위를 했다. 광복 후에 차미리사는 김구 선생과 뜻을 함께했지만, 김활란은 여느 친일부역자들이 그렇듯 이승만과 함께했다. 



#김원봉.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자 의열단 창립자 약산 김원봉. 일제는 현상금 100만원을 내걸 정도로 김원봉을 무서워했고 두려워했다. 심지어 김원봉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좌우 상관없이 그 누구와도 협조했던, 유연한 민족주의자였다. 하지만 오랜시간 남과 북 모든 곳에서 그 이름이 금기시 되었다. 남한에서는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북한에서는 김일성 우상화 정책에 장애물이라는 이유로. 



#박차정. 김원봉의 부인 박차정 역시 의열단원이었으며, 아버지 김두봉 역시 독립운동가였다. 1939년 쿤룬산 전투에서 총상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박차정 역시 남편 김원봉과 같은 이유로 오랫동안 그 이름이 금기시 되었다. 남한에선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북한에서는 김원봉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이들은 생전에 조국 독립을 마주했다(박차정 제외). 하지만 그들이 원했던 조국 독립이 맞았는가? 아니다. 반쪽짜리 독립이었다. 조국은 둘로 쪼개졌고, 쪼개진 반쪽짜리 나라에서는 권력 우상화 정책으로 독립운동가들이 숙청되었다. 남한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그랬고, 북한 김일성이 그러했다. 남한에 남아있던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 정권 때 ‘빨갱이’로 낙인찍히며 고문을 당하는 등 온갖 수모를 당했다. 왜? 이승만 정권은 친미라는 이름아래 가려진 친일부역자들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마저 대놓고 훼방하며,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독립운동 과정의 모든 이야기를 기억하고 또 기록하고, 후대에 전승해야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자유를 안겨준 선대를 기리고,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멸문 지경까지 간 그들의 후손들을 도와야한다.


반대로 독립운동가를 핍박한 일제와 그들에게 부역한 반민족행위자들 역시 반드시 기억하여, 그들의 후손이 우리 땅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없게, 반민족행위를 하면 대대손손 멸문을 당하는 결과가 돌아온다는 것을 배워야한다.


이게 바로 우리가 독립운동사를 배우고, 기억해야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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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리앗의 저주 - 문명의 붕괴로 보는 인류사
루크 켐프 지음, 박수철 옮김 / 까치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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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A와 B라는 국가(또는 문명, 도시)가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두 나라는 붕괴되었다. 분명히 붕괴된 나라들이지만 A는 계속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A를 모방하는 크고 작은 국가들이 꾸준히 생기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반면에 B는 잊혀졌다.


A는 설명이 필요 없는 로마 제국이고, B는 미시시피강 습지 한켠에 있던 카호키아다. 로마는 사라졌지만 살아남았고, 카호키아는 정말로 사라졌다. 똑같이 붕괴했음에도 한쪽은 역사 속에서 위대한 이름으로 살아남고, 또 한쪽은 잊혀지는 것. 그 차이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이 역사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바로 루크 켐프의 『골리앗의 저주_문명의 붕괴로 보는 인류사』다.


주의할 점이 있다면, 이 역사책은 상당한 두께의 벽돌책이라는 사실이다. 벽돌책 특성상 초반 흡입력이 없으면 완독이 어렵다. 나 역시 여러 벽돌책을 읽어보았지만 완독 여부는 초반 흡입력에서 갈렸다. 내 기준을 통과했던 책으로는 『사피엔스』, 『소련 붕괴의 순간』 등이 있는데, 이 책 역시 남다른 초반 흡입력을 자랑한다. 비유하자면 『사피엔스』를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과 닮아있다.




앞서 언급한 로마제국과 카호키아. 대다수 사람은 로마를 알고 있지만 카호키아는 모른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며 카호키아라는 문명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그렇다면 똑같이 붕괴했음에도 로마는 끊임없이 소환되고, 카호키아는 잊혀진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카호키아가 잊혀졌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이들에겐 무례한 말일지도 모른다. 카호키아가 개척한 미시시피 문화는 그곳 원주민들에게 깊이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카호키아를 모르는 이유는 단 하나, 우리가 '1퍼센트의 역사관'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로마의 언어, 관습, 문화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세계 패권국인 미국조차 로마의 흔적(예: 상원 제도)을 심심찮게 채택했다. 즉 패권국들이 로마를 소비하고 모방했기에 로마는 '승자의 역사'로 계속 소환되었다. 반면 카호키아는 피지배층이 된 원주민의 문화였기에 역사의 뒷길로 사라졌다. 상류층과 승자가 소비한 문화만 기억하는 역사의 편향성, 여기까지가 이 책의 서론이 던지는 강렬한 화두다.



하지만 서론은 시작에 불과하다. 

본편으로 들어가면 진짜 충격적인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그 위대했던 '골리앗'들은 왜 하나같이 무너졌는가?"




붕괴의 역사는 우리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역사적 현상이다. 현재는 과거의 연장선에 있다. 과거는 대참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사람들이 대참사에 대한 회복력을 어떻게 입증했는지, 그리고 왜 우리가 극히 위험한 곤경에 놓이게 되었는지를 알려준다. 그리고 붕괴를 관찰하다 보면, 어떻게 사회가 자멸로 이어지는 위협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다른 사회를 파괴할 수도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붕괴는 대규모 권력구조가 어떤 식으로 소멸되는지에 관한 문제일 뿐 아니라 어떤 식으로 타자의 소멸을 초래하는지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p 025




저자인 루크 켐프는 300여 개가 넘는 제국과 정권의 역사적 사체를 해부하며, 거대하고 강력한 문명(골리앗)일수록 내부에서부터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골리앗의 저주'를 파헤친다.


문명을 키우고 유지하기 위해 만든 자원 착취 구조, 소수 엘리트 계층의 권력 독점과 극단적 불평등, 그리고 복잡해진 사회 유지를 위해 드는 비용은 증가하는 반면 비용대비 효율은 점점 줄어드는 것. 문명이 거대해질수록 이 시스템들도 점점 거대해지고, 거대해진 만큼 아주 작은 외부 충격에 허무하게 쓰러지고 말 것이다.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시스템 자체가 아이러니하게도 문명을 숨을 끊을 수 있는 칼이 되는 셈이다. 


이 책이 이토록 소름돋는 경고를 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다름아닌 '오늘날의 현대 사회'다.


과거 로마나 카호키아가 무너졌을 때, 민중들은 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났다. 어떤 의미에서 문명의 붕괴는 대중에게 '해방'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전 지구가 단 하나의 연결망으로 묶인 '글로벌 골리앗'의 시대다. 에너지, 식량 공급망, IT 네트워크가 한순간에 마비된다면 자급자족 능력을 상실한 우리는 생존조차 불가능하다. 그리고 우리는 실제로 경험했다. 코로나 펜대믹, 러시아vs우크라이나 전쟁, 미국vs이란 전쟁 등으로 에너지 공급망이 마비되고, 물류가 마비되는 것을 보았다.



서론의 '카호키아와 로마' 이야기로 지적 호기심을 극도로 끌어올린 이 책은, 본론에 이르러 인류가 걸어온 오만의 역사를 뒤흔들고, 결말에 이르러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문명의 시한폭탄을 직시하게 만든다.


혹여나 벽돌책이라는 압박감 때문에 망설이고 있다면 일독을 권하고 싶다.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쯤이면,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이 거대하고 복잡한 문명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얼음판 위에 서 있는지 깨닫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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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아가는 사람인가
박성욱 지음 / 파람북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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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게 돌아가는 거친 세상 속에서 우리는 늘 ‘어떻게 나를 지킬 것인가’를 고민한다. 파람북에서 출간된 박성욱 작가의 『나는 살아가는 사람인가』는 바로 그 고민의 출발점을 뒤흔드는 책이다. 저자는 동양고전의 지혜를 빌려,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고질적인 불안과 고립감의 원인을 날카롭게 짚어낸다. 책은 우리가 세상의 기준에 맞춰 '살아지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단단한 자기다움을 회복하여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인지 묻는다. 소유와 경쟁 대신 공존과 상생을, 고립 대신 따뜻한 연결을 제안하는 이 책은, 쉼 없이 흔들리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가장 깊은 근원을 돌아보게 만드는 묵직한 이정표가 되어준다.



존재에 이름을 붙일 수 있지만, 그 이름은 한결같이 지속되는 이름은 아니다. 『도덕경』 1장


한결같이 지속되는 본질은, 바라는 바가 없으면 그 묘함을 볼 수 있지만, 바라는 바가 있으면 바라는대로 보이게 된다. 『도덕경』 1장


있음과 없음이라는 것은 생겨남을 기준으로 나눈 모습이고, 어려움과 쉬움은 이루어짐을 기준으로 나눈 모습이며, 긴 것과 짧은 것은 형태를 기준으로 나눈 모습이고, 높음과 낮음은 기울어짐을 기준으로 나눈 모습이며, 음악과 소리는 조화로움을 기준으로 나눈 모습이고, 앞과 뒤는 따라감을 기준으로 나눈 모습이다. 『도덕경』 2장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간은 이름을 짓고, 기준을 정하고, 무언가를 규정하고 분류하는 일에 언제나 진심이었다. 무언가를 명확히 규정해야만 사회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때로 생활 규범이 되었고, 신분 체계나 사회적 지위가 되기도 했다. 형태가 무엇이든 이러한 ‘개념화’와 ‘분류’ 덕분에 인류는 혼란을 줄이고 사회 질서를 유지해 올 수 있었다.



확실히 대상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행동의 기준을 정하는 행위는 세상을 인식하는 가장 편리한 도구이며,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유용하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까지 주어진 이름과 기준에만 맞춰 살아가야 할까? 편리를 위해 만든 ‘이름’이라는 틀은, 역설적으로 대상의 본질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감옥이 되기도 한다.



당장 나의 삶만 보아도 그렇다. 딸을 키우는 나는 사회로부터 ‘엄마’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엄마’라는 이름표가 나라는 존재의 전부를 규정할 수 있을까? 결코 아니다. 나는 엄마이기 이전에 매일 아침 회사로 출근해 ‘ㅇㅇㅇ 매니저’라는 명함을 내미는 직장인이다. 그뿐인가. 친정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다시 내 어머니의 ‘딸’이라는 이름표로 갈아입는다. 이처럼 상황마다 나를 지칭하는 파편적인 이름표들만으로 나의 본질을 온전히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름은 대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동시에 그 존재의 역할을 단편적으로 고정해 버린다. 그리고 이름이 정해지는 순간, 고정관념이라는 부정적인 반대급부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사회가 부여한 역할극에 갇히는 순간, 그 역할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려 할 때 우리는 이유 없는 불안감이나 죄책감마저 느끼게 된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한결같이 지속되는 이름은 없다"고 통찰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처럼 한 사람은 여러 이름을 동시에 지니며 다양한 역할을 하지만, 특정 이름에 갇히는 순간 그 존재의 다채로움과 고유한 정체성이 사라진다. 사회가 부여한 ‘역할’이라는 이름표가 개인의 모든 면을 규정하고, 심지어 그 역할을 벗어날 때 불안감이나 죄책감마저 느끼게 하는 일도 벌어진다. 이름에 잡혀 대상에 대한 선입관이 생기거나, 의도나 욕망이 개입되면 이름과 대상을 동일시하는 잘못이 일어날 수 있다. 존재를 인식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인 이름 때문에, 오히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p 050



우리는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하기 위해 개념을 정의하고 만들어낸다. 개념화는 복잡한 현실 세계를 단순화하고 구조화하는 인식의 도구인 것이다. ‘아름답다’, ‘선하다’, ‘크다’, ‘작다’와 같은 표현들 모두 존재를 이해하고 분류하기 위한 인식의 도구들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개념화가 오히려 존재의 본질을 흐리고 왜곡하는 결과를 자주 보게 된다. 단순화된 그 틀이 때로는 존재의 본래 모습을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개념은 분류를 낳고, 분류는 차이를 만든다. 이렇게 생긴 차이를 불필요한 평가와 차별로 일어가는 일이 쉽게 일어난다. ‘도덕경’에서는 개념과 분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p 059



비단 이름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개념화’하는 일 역시 서늘한 부작용을 낳는다. 개념은 분류를 낳고, 분류는 차이를 만들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떠한 것을 보고 ‘아름답다’라고 규정하는 순간 그 이면에는 ‘추함’이 동시에 생겨난다. 어떤 행동을 ‘선하다’라고 규정하는 순간, 그와 반대되는 행동은 고스란히 ‘악’이 된다.



일단 사회적으로 개념이 합의되고 규정되면, "과연 그것이 진짜 아름다운가? 착한 행동이 맞나?"라는 본질적인 질문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절대적이라 믿는 이런 규정들은 사실 그 당대의 관념과 욕망에 의해 결정된 것들이 대다수다. 노자의 말대로 '바라는 바(의도와 욕망)'가 개입되어 세상을 보기 때문에, 본질이 왜곡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개념과 규정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맥락이 완전히 달라지곤 한다. 멀게는 십자군 전쟁이나 마녀재판에 대한 당대의 찬사가 후대에 이르러 가장 잔혹한 악행으로 극명하게 엇갈린다. 가깝게는 과거의 기준에 묶여 현재 우리의 삶을 억죄고 있는 오래된 법 조항이나 규제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당대에는 질서를 위한 최선이었을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그저 낡은 틀이 되어 살아 숨 쉬는 존재들을 짓누를 뿐이다.



인문학책 『나는 살아가는 사람인가』는 바로 이 지점을 날카롭게 건드린다. 삶은 짓밟고 올라서는 경쟁이나 타인이 정해놓은 기준을 축적하는 소유가 아니라, 온몸으로 부딪히는 경험이라고 말이다.



수많은 이름표에 갇혀 세상이 나눈 이분법적 기준에 헐떡이며 '살아지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그 틀을 깨고 나와 단단해진 자기다움으로 세상과 따뜻하게 연결되어 '살아가는' 삶을 살 것인가. 내 가슴에 붙은 수많은 명함과 이름표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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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과학 공부 - 볼 것 많은 요즘 어른을 위해 핵심 요약한 과학 이야기
배대웅 지음 / 웨일북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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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문과 출신이다. 문/이과를 가르기 전까지 공통과학도 좋아했고 수학도 좋아했지만, 그보다 더 역사를 좋아했고, 독서를 좋아했다. 문/이과 갈림길에서 더 좋아한 문과를 선택했다. 물리나 미적분 등 골머리 쓰는 이과 과목들을 배우고 싶지 않은 이유도 한 몫했다. 시간이 흘렀다. 최근 십 여년간 취업시장에서 문과생들이 빠르게 도태되기 시작했다. 문과생들은 닥남했다. 그들은 말했다. 



“문송합니다.”



문과가 점점 위축되는 시대가 오다보니, 반발심일까? 과학을 더 멀리하고, 역사 및 문화, 철학 등 인문학을 더 가까이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용하는 모든 도구들이 과학 발전으로 생겨난 것들인데 과학을 멀리하는게 맞는가? 아프면 병원가서 진찰을 받고 약을 처방받는데, 이런 행위 자체가 과학의 발달로 가능한게 아닌가?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많은 질문들이 들고 일어섰다. 



거기다 요즘은 과학적 사고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지금이야 어려서 엄마, 아빠 말이 다 맞다고 하는 우리 상전이지만, 몇 년 뒤 커서 질문을 했을 때, 나는 과학적 사고에 입각하여 제대로 된 대답을 해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떠오른 순간 더 이상 안되겠다 싶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과학과 친해져야겠다고 말이다. 



물론! 바로 물리, 화학, 지구과학 등 과학 학문을 공부한다는 말이 아니다. 애초에 그런건 현실적으로 어렵기도 하고. 그래서 나름대로 짱구를 굴려봤다. 다름아닌 내가 좋아하는 분야로 과학에 접근하는 법! 한마디로 ‘역사’를 중심으로, 과학에 접근하는거다! 따지고보면 이런식으로 과학서적(?)을 많이 읽긴 했다. 뭐 대게 의학, 약학 관련 책이긴 했지만. 이번엔 전반적인 분야에서(?) 과학에 접근해보자 싶어서, 책을 찾아봤다.



그렇게 내 눈에 띈 과학책 『최소한의 과학공부』. 내가 원하는 느낌의 과학도서다. 다 읽고보니, 과학에 입문하고자 하는 청소년 과학도서 추천용으로도 제격이다.



과학 발전은 정치, 사회, 경제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페니실린 개발(의학), 원자폭탄 개발(화학), 아폴로 계획(우주과학)이 대표적인 사례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사회적 배경과 정부의 막대한 지원으로 페니실린과 원자폭탄이 개발되었다. 소련과 미국 냉전체제라는 정치적 배경과 정부의 막대한 지원으로 지구 너머, 달에 사람이 발자국을 찍게 되었다. 



과학사적으로 페니실린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페네실린으로 거대과학 연구가 본격화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페니실린 개발사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의 직업적 정체성은 다양하다. 예컨데 플레밍은 과학적 발견에 천착한 과학자였고, 히틀리는 경제 기술을 개발한 엔지니어였으며, 케인은 대량생산을 조직한 기업가였다. 이렇듯 페니실린은 정부, 기업, 재단, 대학 등을 망라하는 직단작업의 결과였다. 또한 페니실린을 계기로 과학 연구에서 국가 역할이 부각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페니실린 대량생산의 결정적 순간은 미국 정부가 화이자의 제조법을 (특허 따위는 무시하면서) 공유하고, 엄청난 자금과 자재를 지원한 데에 있었다. 이는 과학 발전이 국가 규모의 지원이 필요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함의한다. 이후 맨해튼 계획, 아폴로 계획 등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면서 과학과 국가는 불가분의 파트너십을 맺게 되었다. p 064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이 모든 것을 정당화했다.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을 결정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일단 만들기로 한 뒤에는 약간의 가능성만 보여도 인력과 물량을 쏟아부었다. 난다 긴다 하는 과학자들도 그렇게 조건 없는 대규모 지원을 받으며 연구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한 계획은 단 3년 만에 성과를 냈다. 1945년 7월 뉴멕시코 앨라모고도에서 테스트에 성공했고, 한 달 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두 방의 폭탄이 떨어졌다. 1억 총옥쇄를 외치며 결사항전을 준비 중이던 일본은 곧바로 항복했따. 3년간 총 13만명의 인력와 20억 달러의 예산이 투입된 결과였다. 2023년 기준 330억 달러, 원으로 환산하면 약 39조 9600억 원이다. 이러한 대규모 물량과 천재적 두뇌의 조합은 맨해튼 계획의 성공,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전 세계에서 오직 ‘천조국’ 미국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p 121



요컨데 아폴로 계획은 과학이 정치, 경제의 전폭적 지원으 받으면 어떤 위업을 이룰 수 있는지 보여준다. 순수하게 과학 연구만의 목적만 있었다면 아폴로 계획은 시작조차 못했거나, 금방 좌초되었을 것이다. 소련과의 체제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시대적 목표가 있었기에 반대 여론과 천문학적 비용에도 불구하고 계속될 수 있었다.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아폴로 11호로 목표의 상당부분을 이뤘기에 더 이상 계속되기 어려웠음을 함의하기도 한다. 원래 아폴로 계획은 20호까지 계획되었으나,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17호로 끝났다. 그리고 냉전질서가 완전히 해체된 이후, 더 이상 달에 가려고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을 이유도 없어져 버렸다. p 149



과학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많다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건 ‘돈’이다. 기본적으로 연구는 돈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백날 연구만 하는 과학자들이 연구할 돈은 어디서 구하는가? 돈 많은 사람들의 지원과 투자다. 투자자들은 아무 이유없이 지원을 하는가? 아니다. 그 기술이 돈을 벌어다준다는 확신이 있어야 투자를 한다. 특히나 페니실린/원자폭탄 개발, 달탐사 계획은 일반적인 투자가 아닌, 범국가적 투자가 필요한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간다. 실패했을 경우 n년치 국정 운영예산을 날리는 것과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막대한 비용을 지원했다. 물론 이 프로젝트들을 지원 결정을 하기까지 과정은 지난했다. 하지만 당시 정치, 사회적 배경으로 인해 미국 정부는 막대한 비용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냉전체제에서의 승리라는 목표를 위해서. 그렇게 일단 지원을 결정한 순간, 미국은 이 프로젝트에 경제적 지원, 세계 여러나라에 있는 인재 포섭, 각종 규제완화등 전폭적인 지원과 지지를 보냈다. 그리고 성공했다. ‘천조국’의 시작이다. 결과적으로 과학의 발달은 국가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과학도 입문은 보통 ‘이과’를 선택하며 시작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이과생들이 과학도의 길로 들어서는가? 아니다. 공부머리가 있는 이과생 대다수는 ‘의사’를 목표로 이과를 택했다. 이는 최근 몇 년간 방영된 여러 대중매체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실제로 난다긴다하는 이과생들의 최종 목적지 역시 의과대학이다. 심지어는 공과대학에 갔던 학생들조차도 수능을 다시 보고 의대를 가거나, 졸업후 의전원을 선택한다. 



물론 이과생 일부는 순수 과학 분야를 위해 공부하는 학생들도 많겠으나, 의과대학을 노리는 학생들에 비하면 그 수는 턱없이 적다. 이러한 추세는 순수 과학분야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적고, 의사들에 비해 과학도의 수입이 적은 이유가 적지않은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단 한 명도 없다.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앞으로도 우리나라에서 노벨과학상 수상자 배출은 어렵지 않을까(일본 노벨과학상 수상자는 스무명이 넘었다).




뢴트겐은 강직한 지식인이었다. 누가 봐도 X선의 특허는 떼돈을 벌 기회였다. 독창적 아이디어를 특허로 독점해 돈을 버는 것이 나쁜 일도 아니었다. 예컨데 영국은 1623년 일찌감치 확립한 특허법 덕분에 산업혁명에서 다른 나라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뢴트겐은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X선의 특허 제안을 끝까지 거절했다. 그 이유는 이랬다. “X선은 내가 발명한 것이 아니라, 자연에 있던 것을 발견한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자산이어야 한다.” 카피레프트라는 용어도 없던 시절에 그 철학을 앞장서 실천한 것이다. 만약 X선의 사용권이 독점화되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거대 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기업들만 주로 썼을 것이다. p 050 


여담이지만, 뢴트겐의 이러한 행보는 과학도를 넘어 모든 이가 본받아야할 자세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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