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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개의 경계로 본 세계사 - 국경선은 어떻게 삶과 운명, 정치와 경제를 결정짓는가
존 엘리지 지음, 이영래 외 옮김 / 21세기북스 / 2025년 8월
평점 :
본투비 역사더쿠로서 온갖 세계사책을 읽어보았다. 그저 시간순으로 쓴 일반적인 세계사(통사, 거시사)는 물론이오, 일부 지역에 한한 세계사 책도 읽어보았다. 그 뿐인가? 지도, 식물, 특정한 날, 약(drug), 전쟁, 경제, 기후, 범죄, 지리 등 수많은 테마를 주제로 쓴 세계사책도 읽어봤더랬다. 이제는 더이상 나올 테마별 세계사책이 없겠지? 싶었는데. 이야. 역시 역사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이번엔 ‘경계’를 주제로 한 세계사책이다. 책의 제목도 『47개의 경계로 본 세계사』 다.
‘경계’라는 단어를 네이버에 검색하면 어떤 답이 나올까? 명사로써 “지역이 구분되는 한계”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 이 세계사책은 각 국가를 구분하는 경계선, 국경을 주제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일단 주제를 보았을때, 이 세계사책은 일반적인 통사의 흐름대로 쓰여지지 않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들었다. 통사가 아니라는 말은 뭐다? 최소 단락단위로 끊어 읽을 수 있는 세계사책 이라는 이야기다.
보통 통사로 쓰여진 세계사책은 시간순으로 기록되다보니,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한다. 하지만 특정한 주제를 기준으로 쓰여진 미시사는, 그 주제에 한정하여 쓰여지기 때문에 단락별로 명확하게 끊어진다는 장점이 있다. 하여 짧은 호흡으로 읽을 수 있고, 흥미있는 단락만 골라서 읽을 수도 있다. 이는 시간이 금인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부분인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더할나위 없는 장점이다.
이 세계사책 『47개의 경계로 본 세계사』는 경계, 즉 국경을 주제로 쓰여진 책이다. 고로 일반적인 거시사(통사)가 아니다. 거시사가 아니기에, 이 책의 시작도 일반적인 통사와 다르다. 으레 나오는 인류의 시작, 또는 사대문명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시간순으로 배열되지도 않는다. 저자는 책 제목에 썼듯 ‘경계’라는 큰 틀을 기준으로 하여 ‘유산, 역사, 외부효과’ 로 세부적으로 나누어 이야기를 진행한다.
유산: 경계 자체가 유형 또는 무형의 ‘유산’이 된 중국(만리장성), 로마, 영국과 아일랜드(지도), 독일(철의 장막) 등을 이야기한다.
역사: 경계 자체가 커다란 역사적 사건을 불러일으킨 한반도 분단,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미국-캐나다 분쟁등을 이야기한다.
외부효과: 땅 위의 통제권이 아닌 다른 유형의 경계, 즉 날짜와 시간, 바다와 상공등의 경계에 영향을 미친 본초자오선, 국제날짜변경선, 남극의 영유권 분쟁등을 이야기한다.
나는 책을 읽기 전 항상 머릿말(또는 서문, 프롤로그)를 빠짐없이 읽는다. 머릿말은 항상 저자가 책을 집필한 뒤에 쓰는 기록이기에, 해당 책이 어떤 방향으로 쓰여지는지를 알 수 있는 바로미터다. 그 뿐인가? 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책을 썼는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고, 책 이해도를 높일 수 있는, 짧지만 작가와 독자에게 있어선 정말 중요한 글의 시작이다. 만약 머릿말을 읽었는데, 오히려 내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진창이 된다? 그럼 그 책은 덮어야한다. 특히 역사책은 머릿말의 중요도가 더 높다. 머릿말에서 보이는 저자의 자세에 따라, 역사를 대하는 저자의 자세를 파악할 수 있고, 나아가서는 저자의 역사 이해도가 어떤지까지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저자가 겸손한 자세로 머릿말(또는 프롤로그)를 쓴 역사책은 오랜만이다.
이 책은 세계사 전체를 아우르지는 않는다. 수 세기 동안 지속된 역사는 물론이고, 아예 다루지 못한 문명도 있다. 이러한 공백은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반영하기도 하며, 중복을 피하려는 의도도 있다. 하지만 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는 ‘나’라는 인간의 한계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영국인, 영국시민, 유럽인, 서구인, 백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배경이 내 시각에 영향을 미쳤다. 나는 나 자신의 편향성을 극복하려고 노력했지만, 세상의 많은 문제가 나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려 한다. 그럼에도 이 책은 결국 나의 시각에서 쓰인 역사이며, 나의 편견이 반영된 결과이다. 만약 내가 당신이 관심을 가진 특정한 국경이나 문명을 빠트렸다면, 그저 사과드릴 수 밖에 없다. p 013

역사는 사람이 사람에게 전해야면 살아남는 분야다. 예컨데 우리가 선사시대, 역사시대로 구분하는 방법은 바로 ‘기록’이다. 자신들이 살아온 일을 문자로 기록을 하여 후세에 남기면서 역사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숨어있는 ‘함정’이다. 어떠한 개인이 기록한 기록물은, 기록한 당사자의 가치관이 묻어나올 수 밖에 없다. 최대한 가치중립적으로 작성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살아왔던 모든 가치관을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난 그 누구보다 역사가들에게 필요한건, 역사 앞에서의 겸손함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역사가들이(또는 역사가라 지칭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쓴 기록이야말도 제대로된 역사라며 우후죽순으로 나오고있는 요즘을 보고 있노라면, 역사가들에게 제일 중요한 ‘겸손함’이라는 가치가 이제는 빛바랬구나 하고 씁쓸함만 느꼈더랬다.
그런데! 이 책 『47개의 경계로 본 세계사』의 저자는 달랐다. 자신이 살아오며 정립된 가치관과 편향성을 최대한 극복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수 없이 지극히 자신의 주관적인 시각에서 쓰여졌음을 인정하는 자세, 자신이 살아온 배경이 자신의 시각이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 이게 바로 역사가들에게 제일 필요한 자세다. 하지만 내가 읽은 수많은 역사책 중 이런 자세를 가진 저자들이 얼마나 있었는가.....
만리장성은 그들이 보호하는 하나의 통일된 중국을 상징하는 역할은 여전하지만, 영원히 그 뒤에 숨어 있을 수는 없다. 성벽을 뚫은 것은 몽골과 만주족만이 아니었다. 19세기 유럽인들은 중국 항구에 군함을 대고 중국에 침입했다. 수천 년 전 초나라, 제나라, 그리고 17세기 명나라가 깨달았듯이, 외부인을 영원히 막아주는 국경은 없다. p 038
지도 위의 선이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은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왜 다른 곳에 그려지지 않았는지 설명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역사를 단순히 현재에 이르는 필연적인 사건들의 연속으로 읽다 보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가 유일한 가능성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려 아주 사소한 몇 가지 요소만 달라졌다고 해도 결과는 완전히 다를 수 있다. 스코틀랜드는 컴브리아를 포함했을 수도 있고, 잉글랜드가 로디언 지역을 차지했을 수도 있으며, 웨일스는 완벽히 흡수됐을 수도 있다. 물론 이런 논의 자체가 어찌 보면 속임수일 수도 있다. 대브리튼 섬에는 세 개의 민족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단 하나의 국가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대브리튼섬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줄여서 영국 혹은 UK다. p 073
몽골의 정복과 약탈이 끝난 후 교통과 교역이 훨씬 원활해졌고, 이 시기는 ‘평화로운 몽골’이라는 다소 아이러니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몽골은 무역의 원활한 흐름을 돕기 위해 적극적으로 정책을 도입했다. 여행자들에게 식량과 숙소를 제공하는 역참 네트워크를 구축했으며, ‘오르토그’라는 무역조합을 공식적으로 지원하여 상인들이 자원을 공유하고 위험을 분산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조합은 일종의 보험과 같은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낮은 이자율로 자금을 빌려주기도 했다. p 087
오늘날 약 6,000만 명의 미국인이 군사력으로 멕시코에서 정복한 땅에서 살고 있다. 한때는 미국인들이 경제적 기회를 찾아 멕시코로 건너갔지만, 이제 미국은 멕시코인들이 같은 이유로 국경을 넘는 것을 막기 위해 장벽을 세우고 있다. 물론 이 장벽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p 137
외침을 막기위해 거대한 장벽을 쌓았지만, 실상은 온갖 유목민들에게 뚫리고, 바다를 통해 몰려들어온 유럽인에게 뚫린 만리장성, 잔학하기로는 지구 반대편 유럽에서까지 악명을 떨친 몽골 정복의 이면, 멕시코인들이 국경을 넘는 것을 막으려는 현재 트럼프 장벽과 좋게 말하면 멕시코 할양지이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미국이 삥뜯어낸 멕시코의 땅 텍사스. 경계를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가 오늘 추천하는 이 세계사책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