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세계사를 바꾼 시리즈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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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었던 식물 세계사 책 중에 제일 흥미로웠던 책이 있었다. 지금은 절판되었으나, 내 책장에서 항상 날 부르고 있는 책 『식물도시 에도의 탄생』. 그 책을 읽고서, 저자의 다른 책을 또 읽어보고 싶어서 구매했던 책이 있으니 바로 오늘 소개하는 식물 세계사책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이다. 물론 구매했을 당시에는 읽지 않고 책장에 꽂아뒀다가, 이번 구정 연휴에 읽었다. 왜? 공부하기 싫어서..ㅋㅋㅋㅋㅋ




늘 회사, 집을 오가는 워킹맘이지만 아이가 자는 시간에는 식물보호기사 필기 공부를 하고 있다. 이번 연휴에도 어김없었는데, 공부하기가 왜이리 싫은지! 책이라도 읽자 싶어서 책장에서 서성이다가 집어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공부는 하기 싫지만, 이왕 책 읽는다면 시험과 연관된 책을 읽자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 책이 식물보호기사 시험과 무슨 연관이 있느냐? 라고 한다면 대충 재배학원론에 나오는 내용 일부가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특히 재배학원론에서 중요하게 보는 작물들이 대거 포진해있다. 



이 세계사책에서 말하는 13가지 식물이 ‘감자, 토마토, 후추, 고추, 양파, 차(tea), 사탕수수, 목화, 밀, 벼, 콩, 옥수수, 튤립’ 이다. 이 중 ‘감자, 토마토, 벼, 콩, 옥수수’ 는 정말.... 재배학원론에서 빼놓으면 섭섭한 작물들이랄까. 특히 식물들 기원지라던가, 세계사적으로 유명했던 식물병도 이 책 읽으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으니 개이득!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에서 ‘감자’ 이야기만 살짝 가져와본다. 재배학원론에서 식량작물로써 감자, 식물병리학에서 단골문제인 감자역병의 감자. 그리고 재미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많이 가지고 감자!!! 정말 재미있는 감자이야기 시작해본다.


남미 안데스산맥 주변이 원산지인 감자가 유럽에 처음 전해진 것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한 이후였다. 그렇기는 해도 유럽에 감자를 처음 소개한 이가 콜럼버스는 아니었다. 사실 그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곳을 탐험했으나 산지에서 재배한 감자를 직접 접한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유럽인들이 속속 남미로 찾아들었고 그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감자가 발견되고 유럽에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6세기 초, 중반의 일이었다. p 028



감자의 원산지인 안데스산맥 주변 지역은 해발고도고 높고 기후가 서늘한 편이며 건기와 우기가 뚜렷이 구분된다. 감자의 사촌 작물이자 또 다른 덩이뿌리 식물인 고구마도 아메리카 대륙이 원산지인데 아열대성 기후인 중앙아메리카에서 처음 재배되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땅속에서 열매를 맺는 뿌리채소는 열대나 아열대 기후의 중, 남미나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인 경우가 적지 않다. p 029



이때까지 유럽인들은 땅속에서 열매를 맺는 무, 순무 같은 뿌리채소는 키워봤으나 덩이뿌리 식물은 단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처음 감자를 접했을 때, 유럽인들은 감자를 먹는 방법을 몰랐다. 그러다보니 유럽인들이 먹는 다른 녹황채소류 처럼 덩이줄기가 아닌 감자 싹이나 잎을 먹거나, 초록색으로 변한 덩이줄기를 먹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인은 안다. 감자 싹, 초록색으로 변한 덩이줄기는 절대 먹으면 안된다는걸. 왜? 감자싹과 잎, 초록색으로 변한 덩이줄기에는 솔라닌 이라는 독성물질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솔라닌은 조금만 먹어도 중독되거나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물질이다.



하지만 당대유럽인들은 이를 몰랐다. 그래서 감자를 먹고 중독되거나 죽음에 이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설상가상으로 감자는 성서에 기록되지 않는 식물이기도 했다. 결국 감자는 마녀재판의 피고인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감자는 악마의 열매라는 별칭을 얻게되었고, 화형을 선고받았다. 화형된 감자라.... 감자를 구우면 참 맛있는 냄새가 났을텐데, 당대 유럽인들은 그 냄새를 어떻게 참았으려나? 이유야 어쨌든 악마의 열매가 된 감자는 유럽인들이 기피하는 식물이 되었다.



감자라는 식물은 대표적인 구황작물 중 하나다. 원산지가 안데스산맥인 만큼 척박한 환경에서도 아주 잘 자라는 효자식물이다보니, 식량난을 해결하기에 최적인 작물이기도 하다. 유럽인은 이런 신의 열매 감자를, 먹는 방법을 모른다는 이유로,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악마의 열매로 매도하여 기피하한 것이다. 그리하여 유럽은 빠르게 사라졌을 식량난을, 더 오랜시간 버텨야만 했다. 



앞으로 이 나라에서 감자는 귀족만 먹을 수 있다! _ 프리드리히 2세



감자의 진면목을 알았던 19세기 프로이센(현 독일) 국왕 프리드리히 2세. 그는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7년간 전쟁을 벌였다. 전쟁은 프로이센의 승리. 하지만 긴 전쟁은 나라를 황폐화시킨다. 프로이센의 식량부족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때 프리드리히 2세는 감자를 떠올렸다. 여러 방면으로 감자를 보급하고자 노력했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이 따라주지 않았다. 감자는 어디까지나 악마의 식물이었으므로. 



유럽 대륙에 대기근이 들었을 때의 일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막대한 상금을 내걸고 주식인 밀을 대신할 구황작물을 모집했다. 이떄 파르망티에는 자신의 포로 시절 경험을 살려 감자 보급을 제안했다. 그의 제안에 따라 루이 16세는 단춧구멍에 감자꽃을 꽂아 장식했고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게도 감자꽃 장식을 달게 함으로써 대대적인 감자 홍보에 나섰다. (…) 감자는 서민에게 보급해야 하는 작물인데 어째서 왕족과 귀족이 독점하겠다는 취지의 공지를 냈을까? 사실 여기에는 루이 16세의 교묘한 책략이 숨어 있었다. 국영농장은 낮에는 엄중하게 경비를 서지만 밤이 되면 경비가 느슨해진다. 그러다 보니 호기심을 누루지 못한 사람들이 야음을 틈타 감자밭에 침입해 감자를 서리해갔다. 그렇게 감자는 서서히 서민들 사이로 널리 퍼져 나갔다. p 041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프랑스 루이 16세, 마리앙투아네트는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여 감자 보급에 성공했다. 어떤 묘안인가! 바로 ‘유행(트렌드)’다. 왕족이 하는 것은 귀족들이 따라하여 붐을 일으킨다. 그렇게 상류층에서 일어난 붐은 자연스레 하류층에 퍼진다. 프리드리히 3세와 루이 16세는 이를 파악하여 감자 보급에 접목한 것이다.  여담이긴 하지만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감자보급에 힘썼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지면 참 좋은 내용이라, 조금 아쉽다.




이렇게 유럽 여러나라에서 감자 보급에 성공하며, 유럽은 매년 찾아오는 식량난을 이겨낼 수 있었다. 어디서나 잘 자라는 감자로 인해 감자는 유럽인의 주식이 되었다. 자연스레 유럽인구가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늘어난 인구는 노동력 향상으로 이어진다. 그 노동력은 산업혁명과 공업화로 이어진다. 감자 하나로 유럽의 역사가 크게 바뀐 것이다. 



그뿐만인가? 대항해 시대 선원들은 이름모를 병으로 힘들어했다. 헌데 감자가 주식이 되고, 감자를 배위에서 먹을 수 있게 되자 선원들은 이 병에서 벗어났다. 당시에는 이름모를 이 병의 이름은 괴혈병. 비타민C 결핍시 발병한다. 그때만해도 장기간 배를 탈 때, 배 위에서 먹을만한 식량이 없었다. 먹을게 없으니 자연스레 선원들은 비타민C가 결핍되어 줄줄이 괴혈병에 걸린 것이다. 하지만 감자가 등장하면서 이 괴혈병은 사라졌다. 감자는 비타민C가 풍부한 식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감자는 온/습도만 맞다면 장기보관이 가능한 아주 착한 식물이다보니, 망망대해에서도 보관이 아주 쉬웠던 것이다.



1840년대에 들어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아일랜드 전역에 감자 역병이 창궐해 지독한 흉작이 이어졌다. 그 무렵 아일랜드에는 감자가 주식으로 완전히 자리잡은 상태였기에 감자가 없으면 꼼짝없이 굶는 수밖에 없었다. 대기근이 닥쳤고 100만 명에 달하는 많은 사람이 굶주림으로 고통받으며 죽어갔다. 감자 역병 원인 조사 결과 감자의 증식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p 048



인류의 구원투수 감자. 하지만 감자로 인해 100만명이 죽는 일이 발생한다. 바로 그 유명한 감자역병! 



감자는 영양번식을 하는 식물이다. 즉 단일품종인 씨감자로 번식하는 것이다. 고로 하나의 씨감자가 특정 질병에 걸리면, 그 씨감자와 같은 덩이뿌리에 있던 모든 씨감자들도 그 질병에 걸릴 확율 100%다. 하여 감자의 원산지인 안데스에선 감자를 재배할 때 여러 품종을 섞어서 심는다고 한다. 감자의 전멸을 막기위해서다.



하지만 아앨린드 사람들은 품종을 고르고 골라서, 제일 우량하다고 생각된 하나의 품종만 재배했다. 그 결과가 바로 감자역병이다. 감자가 주식이 되어버린 아일랜드에서, 감자역병은 엄청난 문제였다. 100만 명이 굶어죽었고, 400만 명이 아일랜드를 탈출해서 미국으로 향했다. 여기서 약간 의아한 점 하나! 아일랜드인은 왜 바로 옆에 있는 영국이 아닌, 미국으로 향했는가. 알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원조 나쁜놈 영국은 이 때도 여지없이 나빴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굶어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아일랜드를 속국이라 생각하며 무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400만 명의 아일랜드인이 미국 땅을 밟았다.



그렇게 미국땅을 밟은 아일랜드인의 후손들이 미국 역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존F케네디, 레이건, 클린턴, 오바마 등이 있다. 이뿐만 인가? 월트 디즈니를 창립한 월트 디즈니, 맥도날드를 창립한 맥도날드 형제 역시도 감자역병을 피해 미국으로 피난온 아일랜드인의 후예다. 



감자는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못해 미국의 역사까지 그 영역을 넓힌, 정말 대단한 식물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감자전이나 먹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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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왜 한국역사에 집착하는가 - 홍성화 교수의 한일유적답사기 일본은 왜 한국역사에 집착하는가 1
홍성화 지음 / 시여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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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한일고대사 역사책을 멀리했었다. 시중에 나온 한일고대사 관련 책들은 내용이 대게 비슷해서, 내용면에서 업데이트된 부분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대게 비전공자들이 쓴 책이었으며 본인 연구결과가 아닌, 과거 다른 학자들이 공개한 연구결과가 반복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러다보니 어쩔수없이 한일고대사책을 멀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작년에 알라딘에서 홍성화 교수가 한일고대사 책을 출간했다는 알람이 떴다. 이것은 바로 구매하라는 하늘의 계시!! 왜? 나는 홍성화 교수가 2008년에 출간했던 『한일고대사 유적답사기』를 읽고, 많은 걸 배웠다. 틈만 나면 읽었고, 책 속에 들어있는 내용을 어느정도 눈 감고도 남에게 알려줄 수 있는 정도까지 되어서야, 책을 책장에 꽂아두었다. 무엇보다 이 책으로 하여금 한일고대사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하는지 배웠다. 그런 홍성화 교수의 신간이 나왔으니 당연히 읽어야하는 것! 



그래서 바로 구매했지만, 1분 1초가 아쉬운 워킹맘은 이 역사책 『일본은 왜 한국역사에 집착하는가』를  제대로 읽지를 못했다. 그러다가 몇 달전 2권 발매 알람이 떴고. 하하하. 부랴부랴 2권까지 구매 완료. 그렇게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책을 펼치기 전엔 한일고대사에 국한될거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한일관계사를 전방위적으로 아우르고 있었다. 더 좋아!!!! 그리고 역시 현직 전공자답게, 새로운 가설들과 연구결과 등 많은 내용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정신이 혼미해질정도! 그치 본디 역사책이란 바로 이런거지. 


정말 포스팅하고 싶은 내용들이 너무 많지만, 일단 고대사 부분만 기록해본다.





1. 칠지도의 진실


지금까지 우리나라와 일본은 칠지도를 근초고왕 때 만들었다고 보았다. 다만 우리나라는 근초고왕이 칠지도를 ‘하사’한 것으로 보고, 일본은 칠지도를 ‘헌상’한 것으로 보았다. 칠지도에 새겨진 일부 명문과, 역사서를 토대로 추정한 것이었다. ‘하사’와 ‘헌상’의 차이일뿐, 적어도 369년 근초고왕때 칠지도가 일본으로 왔다는 건 양국에서 인정하는 통설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통설을 뒤집는 새로운 이론이 나왔다. 칠지도의 제작년대가 바뀐것이다. 



칠지도 명문을 찍은 확대 근접사진과 X-레이 사진으로, 육안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웠던 일부 한자가 확인된 것이다. 기존 통설인 근초고왕 369년은, 명문에 새겨진 일부 한자를 중국 동진의 연호로 보고 추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새로이 확인된 한자로 인해, 이는 중국의 연호가 아닌 백제 자체 연호로 추정된다고 한다. 연호와 함께 새겨진 날짜, 일간지를 비교검증한 결과 제작년도는 408년. 전지왕 때다. 고구려와, 당 등 주변국에 대항하기 위해 왜와 긴밀한 사이를 유지하던 바로 그때다.



중요한 것은 칠지도가 전지왕 4년에 제작되었다고 한다면, 408년 경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를 통해 칠지도가 만들어진 정황을 여타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408년이면 광개토왕비문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에 침탈당했던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대항하던 시기이다. 비문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게 58성 700촌을 빼앗긴 백제는 이후 왜와 화통을 하여 고구려에 대항하게 된다. 이러한 정황은 비단 광개토왕비문만이 아니라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를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다. 즉 396년 고구려의 백제 공격 이후에 백제는 태자였던 전지를 일본에 보내 일본과 우호를 맺고 있다. 이후 405년 아신왕이 죽자 백제로 돌아와 왕으로 등극한 인물이 바로 전지왕이다. p 051



특히 『삼국사기』 전지왕 5년조(409년)를 보면 왜국 사신이 야명주를 선물로 가지고왔는데, 왕이 후하게 대접해주었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왜국 사신이 돌아갈 때, 전지왕이 사신을 통해 왜왕에게 보낸 선물 중에 408년에 만들어진 칠지도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타이밍이다.



그동안 일본에서는 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왜곡, 해석하면서 일본의 역사를 구성해왔던 것이다. 칠지도는 408년 백제의 전지왕 4년 11월 16일에 만들어져 백제왕세자 구이신이 진귀하게 태어난 것을 계기로 왜왕에게 하사된 칼로서 그동안 칠지도를 『일본서기』 진구기를 근거로 하여 369년 백제에서 제작되어 372년 백제가 일본에 헌상했다는 일본학계의 통설은 타당하지 않게 되었다. p 055



『삼국사기』에 드물게 왕후의 기름이 기재된 전지왕의 부인 팔수부인을 비롯하여 책계왕의 부인 대방왕녀 보과, 침류왕의 어머니 아이부인 세 명이 왜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라던가, 새롭게 확인된 칠지도의 명문과 전지왕 연관성이 더 궁금한 사람은 책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2. 한일 고분에 얽힌 수수께끼


한일 고대사 관련 서평이나 유적지 답사기 포스팅에서 누누히 언급했듯, 일본 고대사 주요 자료인 『고사기』, 『일본서기』는 그대로 믿어서는 절대 안되는 책이다. 물론 완전 거짓은 아니다. 대충 5%의 진실에 95%과장(또는 왜곡)이 들어갔다고 해야할까? 당대 집필된 역사서긴 하지만, 후대 천황주의적 사관에 입각하여 집필되었다. 그러다보니 인간 신이자 만세일계 혈통이라는 천황을 강조하기 위해 많은 내용들이 과장되거나 왜곡되었다. 거기다 소위 백 살 넘게 살았다는 천황들이 들어가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당대 집필된 중국 사서가 남아있고, 당대는 아니어도 후대에 집필된 우리나라 사서 『삼국사기』도 남아있기에 이 사서들을 교차검증이 가능했다. 따라서 일본 사서에 있는 연대가 대략 120년의 차이가 난다는 것이 학계 통설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고 하면, 일본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알려진 고분 형식 전방후원분 때문이다. 일본 궁내청은 일본 곳곳에 산재해있는 고분, 전방후원분에 각각 고대 천황 무덤이라고 소개해왔다. 헌데 일단 그 천황이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점에 1차 함정이 있고, 실질적으로 연구&발굴을 허가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조성연대 파악도 어려워서, 실제 어떤 천황의 무덤인지 매칭이 어렵다는 2차 함정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끊임없이 만세일계 혈통이라고 우기지만, 왕조교체설에 대한 타당한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렇게 지들 땅에 있는 전방후원분에 대한 정확한 연구 결과도 없는 주제에, 한반도 남부에서 확인된 전방후원분을 임나일본부의 근거로 써먹으려고 수시로 발악을 하고 있다. 일본 국사 교과서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들어가있고, 한반도 남부지역이 야마토 정권 영향력 하에 있었다고 간접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닌코쿠에 대해서는 밥 짓는 연기가 나지 않는 것을 보고 백성의 곤궁함을 살펴 3년간 부역을 면제시킴으로써 성제라는 칭송을 들었따는 전승을 남기고 있다. 인덕(仁德)이라는 이름도 ‘어질고 덕이 있는 천황’으로 덧씌워진 듯해서 닌토쿠 천황 자체가 실재하지 않는 조작된 천황이라는 설도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학자들은 궁내청이 붙여준 대로 닌토쿠 천황릉이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일단 천황이라는 칭호도 7세기 후반에나 성립되었돈 것이기 때문에 이 시기의 왕을 천황이라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p 060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형 무덤과 일본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그중 하나는 전방후원형 무덤이 왜인의 집단 이주에 의해 생겼고 그 배경에 규슈나 왜 왕권의 개입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근거는 빈약하다. 단순히 일본과 관련된 유물이 출토되고 외형이 비슷한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것만으로 전방후원형 무덤을 만들었던 이들을 왜인으로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 전방후원형 무덤은 단순히 외형만으로 판단하기보다는 그 내부에 보이는 무덤방의 형식 및 유형을 함께 아울러 판단해야한다. P 065



규슈 계통과 흡사한 돌방무덤은 영산강 유역뿐ㅁ나 아니라 서부 경남의 고성이나 진주, 의령, 거제 등에서도 발견된다. 이들 지역은 서해안과 남해안을 따라 분포하고 있으며 해안을 통해 일본 열도와 연결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 지역들의 초기 돌방무덤은 그 모양이 규슈 계통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곳에서 출토된 이미 현지화된 토기라든지, 대부분의 돌방에서 발견된 관고리와 관못, 꺾쇠로 미루어 볼 때 백제의 매장 방식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따. 사후에 대한 의식적인 관념은 백제의 것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돌방무덤 안에 독널무덤이 놓여있는 것은 물론, 금동관모, 금동신발, 고리자루큰칼 등 소위 백제 계통의 위세품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백제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P 066 



한반도 남부 전방후원분의 주인들. 일본이 말하는대로 임나일본부의 근거가 되기엔, 부족한 것이 많다. 그 중에서도 일부를 이런 전방후원분은 백제 중앙이 아닌 변두리에 있다는 점이다. 한반도 남부를 장악한 사람들이 중앙이 아닌 변두리에 묻혔다? 누가봐도 이상하다. 무엇보다 일본 내에서도 백제식 굴식돌방무덤을 비롯한 한반도계 유적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뭐, 애초에 우가우가하던 석기시대에 머물러있던 섬나라를, 단숨이 청동기&철기시대로 점프시켜준 사람이 다름아닌 한반도인이니, 한반도계 유적이 발견되는 건 정말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의 논리대로라면, 임나일본부는 개소리고 고대일본을 다스린건 한반도라고 보아야하는게 아닌가.



자기들 편한대로만 해석하고, 불리한건 생략하는 그들의 행태란. 에휴.





 


3. 인물화상경은 누구를 위해 만들었던 것일까?


나름 한일고대사책을 읽으면서 관련 유물을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일본화상경이라는 유물은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게된 유물이다. 이 전까지는 이 유물에 새겨진 명문 해석이 여러 버전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일본서기』에 의거하여 백제가 진구에게 헌상한 칠자경이 바로 인물화상경이라고 하는 설이다. 내용면에서도 명문에 새겨져있는 인물이 일본의 호족이라는 설 등 여러모로 천황주의적 사관에 입각한 해설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이 해설들이 타당하지 않다는 반박이 나오기 시작했다. 첫번째, 1971년, 우리나라에서 무령왕릉 발굴시 발견된 지석. 두 번째 그동안 잘못 판독되었던 글자를 정확하게 판독하게 된 것이다. 



무령왕릉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피장자가 확인된 백제왕 무덤이다.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지석에는 무령왕의 이름이 ‘사마’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학계에서는 ‘사마’라는 이름을 쫓으며, 여러 사서 교차검증 결과 일본의 한 섬인 가카라시마가 무령왕 탄생지라는 것까지 밝혀진다. 『삼국사기』에는 무령왕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없지만, 『일본서기』에 해당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실제로 가카라시마에서도 이와 관련된 동굴과, 전승이 내려오고 있었다. 



다시 인물화상경으로 돌아와서! 무령왕이 일본에서 태어났고, 이름이 ‘사마’라는 사실을 염두해두고 인물화상경의 명문을 보자. 내용이 많이 달라진다. 아래는 새로 해석된 명문이다.



미년(기미년,479년) 8월 10일 대왕년(삼근왕의 치세) 남제왕(동성왕)이 오시사카궁에 있을 때 사마(무령)가 오랫동안 섬길 것을 생각하면서 귀중비직 예인금주리 2인을 보내서 아뢴 바 동 이백한을 올려 이 거울을 취한다. p 089



지금까지 일본 고대 왕권과 관련된 유물로, 일본 국보에 등록된 인물화상경의 진짜 모습은 백제 왕권과 관련된 유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삼근왕과 동성왕, 무령왕의 관계는?



『일본서기』에는 개로왕의 동생 곤지의 첫째아들을 무령왕, 둘째를 동성왕으로 본다. 반면에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두번째 자식으로 나온다. 무엇보다 무령왕릉 지석에 새겨진 생몰연도와 『일본서기』의 생몰연도가 일치한다. 따라서 무령왕은 곤지의 아들이자 동성왕의 이복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동생인 동성왕이 먼저 즉위하였고, 이런 동생을 섬길것을 서약한다는 내용이 바로 인물화상경의 명문인 것이다.



현재 인물화상경은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고 한다. 근데 나는 왜 못봤는가. 분명 도쿄국립박물관에 갔었는데!! 이래서 사전 지식이 중요하다. 봤어도 내용을 모르면 백프로 그냥 지나치게 생길 유물이니, 뭐. 어쩌면 그 앞을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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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나일지도 몰라 - 지친 나에게 권하는 애니메이션 속 명언
이서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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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에세이는 애니더쿠라면 한번쯤 눈길이 갈 만한 제목이다. 특히 나랑 비슷한 세대이거나, 나와 가까운 앞 뒤 세대 더쿠들에겐 더더욱!



나는 어린나이부터 덕질을 시작했는데, 최초 덕질이 다름 아닌 애니 덕질이었다. 뭐, 비슷한시기에 다른 덕질도 같이 시작하긴 했지만, 여튼 최초는 애니덕질! 그런 나에게 이 에세이 『어쩌면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나일지도 몰라』는 눈길이 가기엔 정말 충분한 제목이었다. 물론 지금은 휴덕중이긴 하지만, 그래도 언제나 ‘애니메이션’은 내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 무언가! 라는 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저자는 내용을 4개의 파트로 구분하였고, 각 파트도 애니메이션 3개씩 할당하였다. 고로 총 12개 애니메이션 속 내용과 명대사가 이 에세이 속에 담겨있다. 나는 이 에세이를 읽으며 그때 그 시절, 애니를 보고있던 과거의 나와 다시 만났다.



자랑은 아니지만 12개의 애니메이션을 모두 봤던 나였다. 책을 읽으며 자연스레 그때 그 애니를 봤던 과거의 나와 만났다. 띠부띠부씰 모으기에 열중했던 초등학생 때의 나, 중2병이 한창이었던 중학생 때의 나, 수능준비에 찌들어있던 고등학생 때의 나, 알바로 바빴던 대학생 때의 나, 그리고 사회생활을 갓 시작했던 나와 회사에 찌들어있던 나까지. 이 책을 읽으며 모든 나이 대의 ‘나’를 만났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살아오며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잊고 살아왔는지.




『포켓몬스터』는 주인공 지우가 세계 제일의 포켓몬 매니저라는 꿈을 꾸며 방방곡곡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지우의 여정에는 수많은 우연과 만남이 존재하죠.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목표를 향해 나아갑니다. 이는 인간 존재의 의지와 운명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또한, 오롯이 꿈 하나만 품고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 고난을 겪는 지우의 모습을 보다 보면, 꿈에 대한 어린아이의 무조건적 열정이 부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순수함에서 오는 강렬함이기도 하고요. p 040



초등학생 때 방영한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 심지어 지금도 끝나지 않는 포켓몬스터! 그때는 그저 포켓몬을 잡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지우를 보며 박수치고 좋아했다. 덩달아 띠부띠부씰 모는 것에도 전투적이었고. 당시 띠부씰 모으던 열정, 이는 내가 처음으로 무언가에 미친듯이 빠졌던 최초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3n살이 된 나에게 그런 열정은 당최 찾아볼 수가 없다. 뭔가 빠져볼까? 하다가도 나중을 생각하면서 시작조차 안하고 포기하는게 습관이 되어버렸달까.


그 뿐만인가? 분명 그 때는 세계 최고의 포켓몬 마스터가 될꺼라는 지우처럼, 나에게도 꿈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기억조차 안나는 내 꿈.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지니던 꿈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고, 현실과 타협하며 점점 작아지더니 이제는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생각한다. 내 딸 만큼은 나처럼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꿈을 지켜나갔으면 좋겠다고.  



- 인생은 주어진 카드로 펼치는 진지한 승부야. 내가 받은 카드에 불평하기 보다는, 그 카드를 어떻게 다룰지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한단다.

- 미래는 정해지지 않았어. 우리가 스스로 개척하는거야!

- 언제든 세상을 바꾸는 것은 꿈을 진정으로 뒤쫓는 사람이야.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로 스튜디오 지브리의 대표작이죠. 특히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는 무정부주의적인 성향과 더불어 반전주의, 평화주의 등 전쟁을 둘러싼 다양한 정치적인 배경이 소피와 하울의 사랑 이야기와 잘 어우러졌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공존하는 작품 속 세계관은 우리에게 환상과 동시에 현실의 아픔을 느끼게 합니다. 이 작품에서는 기술과 마법이 함께 성장한 상황을 유토피아적으로, 그러한 시대적 배경을 기반으로 발생한 국가 간 잔인한 전쟁 상황을 디스토피아로 그려내죠. p 105




고등학교 진학, 외모, 교우관계 등 고민 많은 중3. 질풍노도의 중학생. 하울은 그때 내가 본 애니메이션이었다. 당시 나는 하울과 소피의 성장을 보고 깨달은 게 하나 있다. 겉으로 보이는 외모가 다가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한창 외모에 관심 많은 중학생에게 이런 깨달음을 얻기란 꽤 어려운 일인데, 하울이 그걸 해냈다. 그때부터였던것 같다. 내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한 시기가!



- 자기 미래는 자기가 정하는거야

하울이 마음을 잃었다니요! 확실히 이기적이고 겁쟁이에다 무슨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하울은 솔직하고 자유롭게 살려는 것 뿐이죠. 하울은 여기 오지도, 악마가 되지도 않을 거예요. 그리고 그는 악마와의 관계를 스스로 정리할거예요. 난 그렇게 믿어요!


유바바는 치히로에게 일을 주며 원래의 이름을 빼앗습니다. 그리곤 센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죠. 그러자 하쿠는 센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원래 이름을 절대 잊지 말라고 합니다. 유바바가 이름을 빼앗아 사람들을 조종한다면서요. 그렇다면 이름을 잊지 말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물질만능주의가 도래한 지금, 우리가 이름, 즉 정체성을 잊지 않도록 조언하는 것입니다. 치히로는 자신을 되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며,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죠. 이는 니체의 ‘초인’ 사상처럼 고난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성장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p 144




센과 치히로는 개봉하고도 한참 나중에 보았던 애니였다. 아마 고딩때 봤던 것 같다. 나는 앞으로도 청소년일것 같은데, 곧 사회로 나가야한다는 압박감을 가졌던 그때. 인 서울 해야한다는 부담감과 함께 수능준비로 예민해졌던 그 때. 그 때 센과 치히로는 나에게 잠깐의 휴식을 주었고, 내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주었다. 



- 이름을 뺏기면 돌아가는 길을 잊게 돼. 난 아무리 해도 생각이 안나.

내가 어렸을 때 강에 빠졌었는데, 그 강은 이미 메워지고 아파트가 들어섰대. 문득 생각이 났어. 그 강의 이름은…. 이름이 코하쿠 강이었어. 네 진짜 이름은 코하쿠야!

자 어서가, 뒤돌아보지 말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책을 통해서 만난 과거의 나에게 나는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봤다. 정말 과거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가끔은 뒤를 돌아봐도 되고, 옆으로 빠져도 돼. 너는 해내고자 하는 건 어떻게든 해내는 아이니까, 너 자신을 믿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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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역사의 쓸모 - 합리적이고 품위 있는 선택을 위한 20가지 지혜
최태성 지음 / 프런트페이지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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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장에는 구입한지는 꽤 되었으나, 아직까지도 읽지 못한 책이 꽤 있다. 책을 구입한 속도와 읽는 속도가 다르다보니, 매번 반복되는 일이다. 그래서 올해는 최대한 신간보다는 사놓고 못읽은 구간 위주로 읽어보려고 한다. 앞서 리뷰한 두 권도 그랬고, 오늘 리뷰할 『다시, 역사의 쓸모』도 그렇다.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이 변한다. 사람의 힘이 많은 것을 변하게 한다. 심지어 변화에 필요한 시간도 옛날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예컨데 10년이면 변하던 강산이, 요즘은 5년이면 변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면 안되는 것들이 있다. 시간이 지난다해도 언제고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 ‘사랑, 배려, 존중, 도리, 신뢰, 진심…’ 등 사람이 사람일 수 있게 해주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면 안되는 가치들이 바로 그것이다. 


양력 기준으로 2025년 새해가 되었다. 음력으로 따지면 아직 2024년 말이다. 24년이든 25년이든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 생각해야할 건, 위에서 말한 사람이 사람일 수 있게 해주는 가치들이, 계속 우리 곁을 지키고 있는가? 이다.


당장 핸드폰으로, 컴퓨터로, TV로 뉴스를 켜보자. 슬프게도 지금 내가 사는 사회에서 중요 가치로 자리잡은 것은 ‘혐오, 차별, 증오, 폭력…’ 이다. 어딘가에서 혐오범죄가 발생하고, 또 어딘가에선 차별이 발생한다. 혐오와 차별, 증오등으로 인한 폭력도 급증했다. 변하지 않고 늘 그자리에 있어야 할 ‘사랑, 배려, 존중, 도리, 신뢰, 진심…’ 등의 가치가 사라진 것이다. 사회가 이토록 혼란에 빠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혼란을 수습하고, 사람사는 사회로 만드는 법. 답은 하나다. 사라진 가치들을 되찾으면 된다. 큰별쌤이 이 책 『다시, 역사의 쓸모』를 쓴 이유도 이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오랜시간 역사 속에서 변하지 않았던 가치들을, 우리가 사는 시대에 맞는 스토리텔링하여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 그리하여 잊혀진 가치들을 다시 수면 위로 올리는 것. 『다시, 역사의 쓸모』가 그 일을 하기 위한 선두주자는 아닐까 생각한다.




과거의 위인을 기리고 존경하는 일은 무척 중요하지만, 전혀 다른 시대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과제가 있었듯 우리 시대에는 우리 시대의 과제가 있어요. 우리는 이 과제를 풀어나가면 됩니다. 그러니 ‘만약 나였다면’이라고 상상하며 자신에게 실망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p 019


역사의식은 마치 DNA처럼 우리 몸에 각인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평소에는 모르고 있다가 필요한 상황이 되면 짠 하고 발현되는 거죠. 역사의식이라는 DNA가 온몸을 휘감으면서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역사적 장면에 뛰어들게 될 수도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보다 ‘그런 일이 있었다’라고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사를 기억하는 것, 그리고 역사 속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역사적으로 사는 길일거에요. 이것이 ‘만약’으로 시작하는 여러분의 질문에 제가 드릴 수 있는 답입니다. p 024



많은 사람들이 위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만약’을 생각하게 된다. 나도 그렇다. 예컨데 가야가 연맹국가에서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했다면 어땠을까. 도래인의 후예인 고대 일본이 국수주의에 매몰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선조가 일본이 침략할 것다는 상소를 믿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인조가 일말의 정이라도 남아 소현세자를 죽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벨테브레, 하멜이 조선에 표류했을 때 조선정부가 서양의 기술을 배우고자 했다면 어땠을까, 정조가 문체반정이 아닌 여러 학문에 개방적인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고종이 자기 권력이 아닌 백성을 챙기는 왕이었다면 어땠을까 등등등. 정말 많은 ‘만약’을 떠올렸다. 물론 이와 조금 결이 다른 ‘만약’도 있다. 예컨데 독립운동가들을 보며 ‘만약, 나라면 어땠을까’ 이다.



내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면, 난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아니. 절대 못했을 것이다. 난 늘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를 죄스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책 속에서 큰별샘이 말했다. 그때와 지금은 전혀 다른 시대라고, 그때와 우리가 사는 시대과제는 전혀 다르다고. 2025년을 사는 나는, 2025년에 맞는 시대과제가 있으니 그 과제를 풀어나가면 된다고.



지금으로부터 가까운 과거인 1950년, 오랫동안 부진하던 대구상고 야구부가 대회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전국야구선수대회에서 우승을 한 것이다. 대구상고 야구부원들은 기세를 몰아 다음 대회를 생각했다. 당연하다. 아마 현재를 살고 있는 청소년들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적 영웅? 이런 거창한 일은 내 일이 아니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야구대회에서 뛰어야 했을 학생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학도병으로. 군번줄 하나 없어서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 전쟁 중에 산화했다. 



우리가 역사를 보며 ‘만약’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이유다. 우리 주변의 누군가처럼 학교를 다니고, 운동을 하던 평범한 학생들. 하지만 ‘한국전쟁’이라는 시대적 문제에 맞닥드렸고, 전쟁전에는 생각한적 없던 ‘나라를 지키겠다’라는 생각으로 전쟁에 나선것이다. 





※김득신의 묘비 中

“나보다 머리 나쁜 사람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나는 조선의 노둔한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한 번도 스스로에게 ‘너는 못 해’라고 한계를 정한 적이 없다. 혹시 당신이 살다가 재주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나처럼 한 가지 일에 정성을 다해보아라. 내 시대에 나보다 시를 빨리 쓰는 사람도 있었고, 나보다 시험에 빨리 합격한 사람도 있었고, 나보다 글을 빨리 배운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은 나와 같이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지금 당신이 만나고 있는 사람은 시를 빨리 쓰는 사람, 시험에 빨리 합격한 사람, 글을 빨리 배운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이지 않은가. 그러니 이것저것 해서 이름을 남기지 못하는 것보다 하나에 매진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건 내가 구하여 스스로 깨달은 바다.” p 086



숙종 재위기 문신 김득신. 안동 김씨 출신으로 조부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이다. 아비는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사회적인 명성이 있는 집에서 태어났으니, 그 역시 그 뒤를 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충격적이게도 그는 머리가 나빴다. 정말 나빴다. 정말 우리 역사를 통틀어서, 과거부터 지금까지 통틀어서! 이보다 더 나쁜 사람은 없을거라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나빴다. 오죽하면 그가 글을 깨우친 건 10살 때였다. 



더 놀라운 사실은 김득신이 엄청난 독서가였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공부도 그누구보다 전투적으로 했다. 다만 암기력이 매우 부족했을 뿐이다. 몇 시간전 공부한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최악의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책을 반복해서 읽었다. 오죽하면 《백이열전》을 11만 3천번을 읽었겠는가. 하지만 11만 3천번 읽은 《백이열전》의 내용 조차도 기억을 못하든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는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정말 우직하게 공부했다. 그렇게 59세에 이르러서야 대과에 합격했다. 


김득신 일화는 나는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하고, 요래서 못한다는 변명으로 중무장 한 사람들이 꼭 봐야할 일화다.




※ 매천 황현의 유언中

“내가 위로는 하늘로부터 타고난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글을 저버리지 않고 영원히 잠들어 버린다면 참으로 통괘함을 깨달을 것이니,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너무 슬퍼하지 말라.” p 115


황현의 죽음은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었어요. 황현이 죽기 전에 쓴 <절명 시>에는 “그저 인을 이루고자 죽을 뿐 충성하려는 건 아니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자신은 국가의 녹을 먹은 사람도 아니고, 나라에서 자신을 위해 해준 것도 없다는 거에요. 그렇지만 500년이라는 시간을 이어온 왕조의 역사가 끝나는데, 그 왕조가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든 선비 문화의 수혜자 중 한 명도 죽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이 그가 자결을 선택한 이유였습니다. p 115



19세기 조선은 어떤 나라였나. 세도정치가 들끓었다. 왕이 누구냐에 따라 안동 권씨, 풍양 조씨가 권력을 나눠가졌고, 얼마안가 여흥 민씨가 그 권력을 가져갔다. 권력을 주로 지녔던 성씨만 바뀔 뿐, 지배층인 그들은 지들끼리 권력을 노나먹고 백성을 수탈하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가렴주구, 황구첨정, 백골징포, 족징, 인징’ 등 온갖 이유를 붙여가며 백성들 등쳐먹는데 혈안이 되었던 이들이 바로 조선 왕실과 권력을 나눠가진 양반들이었다. 물론 권력에서 떨어진 양반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반기를 들면 죽음 뿐이니 대세를 따랐다.


매천 황현은 그런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황현은 권력에 몰려드는 개떼같은 양반들과는 달랐다. 그렇다고 부패한 사회를 바꾸기 위한 행동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조선의 선비 문화의 수혜자이자, 기득권층에 속했기에 받은 만큼의 책무는 다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 방법이 바로 ‘기록’이다. 


부패한 조선 왕실과 양반들의 행태를 가감없이 써내려갔다. 그가 《매천야록》에 남긴 마지막은 ‘경술국치’였다. 그렇게 조선 왕이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것까지 적고나서야, 그는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고 보았다. 그렇게 그는 서스름없이 자결을 택했다.




※육영공원과 명동학교※

육영공원은 조선 말, 정부가 통역관 양성을 위해 설립한 한국 최초 근대적 명문 귀족 공립 학교다. 정부는 외국인 교사까지 초빙하여 엘리트 통역관 양성에 힘썼다. 엘리트 통역관 양성이 목표였기에, 당연히 ‘영어’가 기본이었고 그 외에 여러과목을 가르쳤다. 나라에서 큰돈들여 가르친만큼, 육영공원 졸업생은 높은 관직이 보장되었다. 해서 ‘출세’를 위한 양반가 자제들이 입학하고자 했다. 육영공원 1회 입학생은 누구일까? 대세에 따라 친미, 친러, 친일을 오가며 오로지 출세를 위해 살았던 사람, 성공과 부를 쫓았던 사람, 이완용이다. 친일매국노 중에선 그 어렵다는(!)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사람이다. 



명동학교는 독립운동가 김약연은 북간도 지역에 설립한 민족교육기관이다. 명동학교의 목표는 ‘한반도에 빛을 밝히는 인재’를 배출하는 것이었다. 1908년에 설립되어 1925년에 폐교되었는데, 그 동안 천 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학교의 졸업생들 면면을 보자. ‘문익환, 윤동주, 송몽규, 나운규’ 등이 명동학교의 졸업생이다. 이들을 비롯한 명동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하나같이 출세나 성공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원했던건 한반도에 빛이 밝혀지는 것이었다.



2025년 현재를 보자. 지금 우리 학생들이 다니는 초중고등학교는 어느쪽에 더 가까운가. 학교폭력은 과거에 비해 유례없이 증가했다. 학교는 학교폭력 사건을 숨기기에 급급하다. 대신 성적을 올리고, 얼마나 많은 졸업생이 서울권 대학교로 진학했는지 광고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자라나는 우리 학생들은 이완용으로 자라고 있는가, 윤동주로 자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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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길 위에 저 시간 속에 - 빛나지만 음험하고 고요하지만 번화하며 고풍스러우면서도 탈역사적인 척하는 어느 매력적인 도시 여행기
이인우 지음 / 파람북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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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엔 책이 많다. 너무 많다보니 어쩔수없이 책을 좋아하는 지인에게 종종 나눔을 하는 편이다. 그런 내가 절대 남에게 주지 않는 책들이 있다. 대체로 역사책 또는 역사기행문 등이 그렇다. 그렇다고 모든 역사책, 역사기행문을 다 이고지고 가느냐? 그건 또 아니다. 그 중에서도 내 취향에 맞는 책들만 살아남아, 우리집 책장에 꽂혀있다.


내 취향에 맞는 역사책, 역사기행문은 대체로 한국사, 일본사, 한일관계사와 관련된 책이 많다. 특히 한일관계사는 고대사가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자타공인 역사더쿠 피로가 해외 답사를 주기적으로 다니게 했던 건 다름아닌 도래인과 한일고대사 유적지였으니까. 그런 내가 오랜만에 한일고대사 답사 여행기를 읽었다(엄밀히 따지면 이 책은 교토 전체를 답사하는 여행책임ㅋㅋ). 그리고 이 책은 남 주지말고, 끝까지 소장하자고 생각했다.


이 교토 여행책 제목은 『교토, 길 위에 저 시간속에』 다. 제목만 봐도 ‘일본 교토 여행기’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이 여행기가 어떤 방식으로 쓰여졌는지는 책을 읽어봐야만 알 수 있다. 혹은 저자가 누구인지를 알거나. 본격 리뷰에 앞서, 이 교토 여행책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살짝 귀뜸해보자면?



힌트 하나! 이 책의 저자는 현재 교토 리쓰메이칸 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 연구원이다. 


힌트 둘 ! 이 책의 부제는 「교토, 빛나지만 음험하고 고요하지만 번화하며 길 위에 저 시간 속에 고풍스러우면서도 탈역사적인 척하는 어느 매력적인 도시 여행기」 다. 


그렇다. 이 책은 교토를 인문학적 시선으로, 문화적 시선으로, 역사적 시선으로 바라본 여행기이자 답사기다. 


교토는 헤이죠쿄에서 헤이안쿄로 천도한 8세기부터, 19세기 도쿄로 이전하기 전까지 일본 수도였다. 무려 천 년 동안 일본 수도였던 장소이기에, 그 곳에 켜켜이 쌓인 역사는 하루 밤낮을 이야기해도 모자란다. 하지만 여기서 교토 천 년 역사 중 바로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천 년 역사의 팔할이 한반도 도래인이 쌓아올린 역사라는 점이다. 아니, 교토의 시작 자체가 ‘도래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실제로 교토 여행지 중 관광지로 유명한 여러 사찰, 신사들은 한반도 도래인이 창건한 경우가 태반이다. 교토 여행 시 한 번 이상은 꼭 들른다는 후미시이나리타이샤, 기요미즈데라, 키타노 텐만구, 야사카 신사. 이 신사, 사찰을 창건한 사람이나 모시고 있는 신은 모두 한반도 도래인이거나, 도래인이 모셔온 한반도 신이다.



위에서도 말했듯 나는 도래인, 한일고대사 유적지 답사를 자주 다녔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만해도, 일본을 연 2회씩 다녔다. 여행겸, 덕질겸, 답사겸 겸사겸사 말이다. 제일 자주 방문했던 곳은 아무래도 ‘교토’다. 일본 곳곳에 도래인 유적지가 산재하지만, 접근성이나 명성 등 교토에 있는 도래인 유적지가 여러모로 압도적이다. 그래서 더 교토를 자주 찾은 면도 있다. 



이 책 4번째 챕터가 바로 교토 도래인에 대한 이야기다. 


내 기준으로 봤을 때 내용 자체는 알고 있는 내용들이 다수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큰 테두리 안에서다. 세세한 내용 중에는 처음 알게 된 내용도 많았기에, 더욱 집중하며 읽었다. 특히나 출산 이후 일본을 못 간지가 n년 째 되는지라, 더 집중한 면도 있었는데. 책을 읽다보니 가봤던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장소가 많이 변했음을 책을 통해 알게되서 조금은 씁쓸한 면도 있었다.



아래는 ‘도래인’과 관련한 주요 키워드다.


아오이(=아욱)



 


푸른 아욱 잎사귀는 가모족 신화에 등장한다. 신화에 따르면, 신을 맞이하고자 하는 사람은 ‘푸른 아오이 잎으로 몸을 장식하라’는 신탁이 있었다고 한다. 신이 강림한 신산에는 푸른 아오이가 무성했다고 하고, 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아들을 그리워하는 어머니에게는 푸른 아오이 잎이 ‘만남’의 매개가 되어주는 이야기이다. 이 신화에 근거해 아오이의 어원을 일본어의 ‘만나다’라는 뜻인 ‘아우’와 신령 또는 신의 힘을 뜻하는 ‘히’의 합성어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후손들의 신화적 해석일 뿐 한국어와의 유사성으로 볼 때 ‘아오이’는 토템화된 ‘아욱’ 그 자체를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p 260



‘아욱길’을 따라 열도에까지 이른 ‘도래인’들은 어떻게 ‘일본’이 되어갔을까. 아오이마쓰리 퍼레이드의 종착지인 가모신사의 문장은 ‘후타바아오이’. 두 장의 잎으로 묘사된 아오이 문양이다. 이 문장은 할아버지와 손자 관계인 시모가모와 가미가모 두 신사의 친족 관계를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관저도 있다. 교토의 또 다른 도래인 호족이었던 신라계 하타씨 신사에도 이와 똑같은 문장이 있기 떄문이다. 가모씨와 하타씨는 혼인 등으로 유대를 맺고 고대 교토 일대를 양분해 다스린 호족이었다. 794년 간무덴노가 천도를 단행했을 때 배후에서 이를 지원한 세력이 이들이었다고 전해진다. 두 부족은 덴노가 교토로 옮겨운 뒤에는 황실 수호 신사를 자임했는데, 이런 내력으로 후타바아오이는 가모족의 내부 결합에서 나아가, 가모씨와 하타씨 두 부족 간의 단단한 동맹, 즉 ‘결합력’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다. 두 개의 가모신사 자체가 애초 가모족과 이즈모족 동맹의 결실이기도 했다. p 262~263



교토를 가면 한 번 쯤은 꼭 거니는 가모강변. 가모강변 상류에는 두 개의 신사가 있다. 일반적으로 관광객들은 가모강변 상류까지 가지는 않는다. 아오이 마츠리가 개최하는 시기 빼고. 여튼! 가모강변 상류에는 오랜 역사를 지닌 두 개의 신사가 있는데, 바로 시모가모 신사와 가미가모 신사다. 이 두신사는 한반도 도래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신사다. 



뭐, 애초에 교토 일대를 일군 사람들이 한반도 도래인이다보니, 교토 내에서 천년 내력을 가진 신사와 사찰 중 도래인 연관성이 없는 곳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렵긴 하다. 도래인이 창건했거나, 혹은 그 후손이 창건했거나, 혹은 도래인의 비호를 받았던 사람들이 도래인(또는 그들이 모셔온 한반도 신)을 기리기 위해 창건했거나. 



시모가모 신사와 가미가모 신사 내력을 보면, 아주 오랜 과거 초대 천황인 진무의 정복전쟁* 당시 큰 공을 세운 가모족이 공로로 받은 영지가 바로 가모강변 일대였다. 이후 이즈모족이 가모강변 일대로 들어왔는데, 놀랍게도 두 부족은 영지 다툼없이 융합되어 살았다고 한다. 대충 혼인동맹으로 추정된다고나 할까?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가모족 수장의 이름과, 이즈모족 명칭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초대천황 진무는 일본 건국시기를 기원전 660년으로 설정하며 생겨난 허구 인물이다. 초대부터 9대까지는 시간상 끼워맞춘 인물이며, 이들 천황에 대한 이야기는 『일본서기』에도 크게 다루지 않는다. 물론 진무의 이야기를 지어냄에 있어서 일부 사실이 있을 수 있으나, 『일본서기』 특성 상 5%의 진실로 95%의 허구가 나왔다는 사실을 잊지말자.



가모족 수장의 이름은 ‘야타가라스’. 우리 말로 하면 큰 까마귀다. ‘큰 까마귀’! 한국 고대신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다면, 바로 딱!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바로 ‘삼족오’다. 본디 삼족오는 태양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철기 기술을 지닌 부족이기도 하다. 따라서 삼족오(태양)을 숭상하는 부족은 대체로 철기기술을 바탕으로 농경을 하는 집단이다. 이즈모족 명칭도 우리말로 풀이하면 ‘떠나는 구름’이다. 즉 이즈모족도 구름이 떠나면, 떠오르는 태양을 섬기는 농경부족이었던 셈이다. 두 집단 모두 농경 부족이었기에 융합하는데 크게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타 씨(=진 씨)



대언천을 건설한 주체는 4세기 무렵 신라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온 도래인 집단 '하타‘ (한자로는 ‘진’을 쓴다)씨 일족이다. ‘하타’ 또는 ‘하다’ 라는 씨족명은 한국어 ‘바다‘ 에서 왔다는 설이 있지만, 현재는 경상북도 울진 지역에 있었던 ‘파단국’에서 유래한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어져 있다. 하타씨는 처음에는 교토 남쪽 나라현 가쓰라기 지방에서 살다가 도래계 주민들을 이끌고 야마시로 (지금의 교토) 남부 지역으로 이주한 뒤, 당시 황무지였던 이곳 대언천 개발에 성공했다. 하타씨들은 대언천의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상업에도 진출, 7세기 초에는 대호족으로 성장했다. 아라시야마 일대는 물론 강 건너 동쪽의 사가노와 우즈마사, 교토 남쪽 후시미의 후카쿠사 등에서 대촌락을 이루었고, 마침내 야마시로 전체의 주인이 됐다. p 267



대호족으로 성장한 하타씨는 대언천 건너 동쪽 지역도 세력권에 넣었다. 마쓰오신사에서 동쪽으로 다리를 건너면 우즈마사 라는 지역인데, 이름을 그대로 풀면 하타씨의 맏이 , 즉 큰집(장손집) 또는 ‘종갓집'을 의미한다. 하타씨의 씨족명이 그대로 동네 이름이 된 셈이다. 우즈마사와 인근 사가노 일대에는 하타씨족의 것으로 인정된 고분이 즐비하다. 그중 특히 우즈마사 주택가에 돌무지로 남아 있는 헤비즈카 고분이 유명하다. 전장 70여 m로 일본에서 네 번째로 큰 이 전방후원분 유적은 하타노 카와카쓰축 (생몰년 미상)의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것으로 추정된다. 하타씨족의 수장이던 하타노 카와카쓰는 유명한 고류지는 절을 지은 사람으로, 7세기 초 일본의 통치자 쇼토쿠 태자의 정치 고문이기도 했다. p 270




이 책 리뷰를 하면서 과거에 내가 포스팅 했던 도래인 유적지 답사 및 역사책 리뷰를 다시 봤는데, 당시 나는 옛 강원도 울진 땅에 있던 ‘파단국’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하타 씨’가 된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표현했더랬다. 정확히는 신라장군 이사부가 파단국을 점령하던 그 때, 신라에 복속되기를 거부하고 일본으로 갔던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이 ‘하타 씨’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무엇보다 ‘파단’을 일본어로 읽으면 ‘하타’가 되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왠걸! 현재 한일고대사에선 ‘파단국’ 사람들이 일본 ‘하타 씨’가 된 게 정설이라고 본다고 하니, 내 나름대로 잘 추론한듯 싶다. 그런 의미에서 우즈마사에 있는 하타씨가 세운 가이코노 야시로 신사 산쥬도리이와 대마도 와타즈미 신사 산쥬도리이와 연관성에 대해서도 뭔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긴다.



뜬금없이 왜 산쥬도리이 이야기인가 하면, 일본 신사는 기본적으로 금문(?) 역할을 하는 도리이가 세워져 있다. 보통 도리이는 기둥이 두 개인데, 교토 우즈마사에 있는 하타 씨 신사에 기둥이 세 개인 도리이가 있다(일명 산쥬도리이). 그리고 내가 아는 한 대마도 와타즈미 신사에도 산쥬도리이가 있다. 와타즈미 신사에 있는 산쥬도리이는 용왕신 이야기라, 언뜻 보기엔 하타 씨와 큰 연관이 없어보이지만, 이게 또 아예 연관이 없다고 하기엔 좀 꽁기꽁기 하다. 일단 대마도가 한반도와 제일 가까운 지역이자, 도래인들이 넘어갈 때 경유지가 되는 지역이기도 하고 말이다. 





너럭바위배 (핏, 연오랑 세오녀 설화)



일본황실이 시조로 여기는 진무덴노가 정복전쟁(어디까지나 가공의 역사이다)을 벌일 때. “진무의 어머니 다마요리 히메가 오사카만에서 요도가와강을 거슬러 올라와 이곳에 사당을 지었고, 그때 타고 온 배를 사람들이 들로 덮어 놓은 것”이란 전설이 ‘황실 버전’이다. 두 번째는 유사한 내용에 주인공이 진무의 어머니에서 가모신사 제신 의 어머니(다마요리 히메라는 이름은 똑같다)로 바뀐 ‘신토 버전’ 이다.p 281



그런데 묘하게도 기후네신사의 중궁은 끊어진 인연을 다시 맺어주는 결연의 신사로 이름이 높다. 고대의 여류시인 이즈미 시키부가 기후네신사를 찾아와 냉담해진 남편의 마음이 돌아오길 빌어 소원을 이룬데서 유래했다는데, 고대의 이 지식인 여성은 무슨 '전승'에 근거하여 이 깊은 산속 신사에까지 와서 재회의 소망을 빌게 됐을까? p282 



우리나라 ‘연오랑 세오녀 신화’와 연관성이 있는 너럭바위 배 전승. 나는 너럭바위배 전승이 시마네현에 있는 카라카마 신사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교토 키후네 신사에도 있었다. 물론 카라카마 신사 너럭바위와 키후네 신사 너럭바위에 얽힌 내용은 조금, 아니 상이하긴 하다. 오히려 연오랑 세오녀와 연관성은 교토 기후네 신사보다는 시마네현 카라카마 신사가 훨씬 높다고 해야할까?



물론 세오녀가 일본에서 연오랑을 만난 뒤 ‘귀비’에 추대되었다는 점과 ‘기후네’ 신사 명칭의 연관성, 그리고 연오랑과 세오녀의 끊어진 인연이 일본에서 다시 이어졌다는 점과, 기후네 신사가 끊어진 인연을 연결해주는 신사라는 연관성을 보았을 때, 확실히 기후네 신사에 얽힌 전승이 연오랑 세오녀 전승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특히나 현제 기후네 신사에서 내려오는 전승은 누가봐도 일본 황실 주도하에 변형된 전승이고. 



연오랑, 세오녀, 너럭바위 배 이야기가 나온 김에 시마네현 카라카마 신사에 얽힌 전승(일본 건국신 스사노오 전승) 살짝 해볼까 한다. 물론 이 책에는 없는 내용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 건국신 스사노오는 신라국 소시모리라 불리우는 곳에서, 바위를 타고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넘어온 신이다. 스사노오가 탄 바위배가 카라카마 신사에 남아있다(①바위를 타고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간 연오랑). 이 외에도 스사노오 일화 중 야마타노 오로치 퇴치 설화에 ‘가라쿠니(韓國)마루’라는 칼을 사용한다. 이는 가라쿠니에서 만든 칼이라는 뜻으로 봐도 무방하다(②철기문화를 지니고 있던 집단으로 대표되는 연오랑/현재 ‘포항’은 제철소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시마네현에는 스사노오를 주신으로 모시는 히노미사키 신사가 있는데, 이 신사 권내에 작은 신사가 남아있다. 실제로는 이 작은 신사가 히노미사키 신사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 작은 신사에는 ‘가라쿠니(韓國)신사’라고 적혀있다.(③한반도 도래인 ‘연오랑’이, 한반도 신을 위해 만든 사당) 또한 시마네현에는 ‘니시코리’라는 도래인 성씨 집성촌이 있는데, 이 성씨의 한자를 풀이하면 ‘비단을 짜는 집단’이라는 뜻이다(④직조기술을 지닌 집단이 ‘세오녀’를 대표하여 일본으로 들어옴). 이 외에도 『이즈모 풍토기』에서 나오는 ‘쿠니비키’ 일화, 시마네현 ‘고진다니 유적’등 스사노오와 ‘연오랑 세오녀 설화’ 연관성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간무 천황



2001년 당시 일본 아키히토 덴노가 68살 생일 기자회견에서 "간무덴노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 이라고 역사(속일본기)에 기록된 사실에서 한국과 깊은 인연을 느낀다"고 말한 것이다. 당시 일본 언론들은 이 발언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충격적 이었다는 뜻이다. 사실 발설해서는 안되는 일종의 '금기'를 덴노 자신이 건드렸기 때문이다. 히라노 신사는 아키히토 덴노가 깊은 인연을 느낀다고한 간무덴노의 어머니 다카노노 니가사와 깊은 인연이 있는 신사이다. p 288



적자인 이복동생을 제치고 44살에 어렵게 즉위한 간무는 정통성 강화를 위해 왕권신수설을 내세웠다. 기존의 일본 태양신(먼저 열도에 들어온 가야, 신라계 태양신앙)에 대륙(고구려, 백제) 태양신을 더해 자신을 하늘이 내린 덴노로 포장하고 싶었다. 황태후 추존문은 그런 당시의 정황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 기록은 8세기 일본에도 고구려 난생신화가 전해진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해서 무척 흥미롭다. 이처럼 간무와 니가사는 자신들의 혈통, 즉 고구려에서 백제로 이어진 도래계 계보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간무 집권 뒤 정치는 간무 옹립을 주도한 후지와라 가문과 백제, 고구려 출신의 도래계가 주도했다. 대신 등 고위직을 뜻하는 '의정관' 5명이 고구려와 백제계였던 사례는 이때 말고는 없다고 한다.p 294



간무 덴노, 그의 어머니 다카노노 니가사(고야 신립), 간무 집권 시 도래계 고위직 등 이런 이런 이야기는 포스팅을 워낙 자주 했으니 생략...하지만, 여기서 자주 반복해도 이상하지 않을 이야기 하나를 말하자면. 간무덴노 당시 일본 최초 정이대장군(쇼균)이 발탁되었다. 그의 이름은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그가 발원하여 창건한 사찰이 있으니 바로 교토 최대 관광지 기요미즈데라(청수다)다. 기요미즈데라 경내에 있는 ‘전촌당’에 다무라마로 부부상이 모셔져있다. 물론 비공개라는게 함정.



여기서 중요한건, 바로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본인. 일본 최초 쇼군이었던 다무라마로는 백제계 도래인 후손이다. 책에는 자세한 내용이 없어서, 후술하자면. 일본 사서 『속군서류종』에 따르면 다무라마로의 조상은 백제 왕족인 ‘아지사주(=아치노오미)’다. 특히 ‘아지사주’는 야마토 아야씨의 조상이기도 하다. 참고로 야마토 아야씨는, 5세기 야마토 정권 당시 무력(군사력)을 쥐고 있던 도래인 집단이었다. 그들의 후예인 다무라마로가 일본 최초 쇼군에 오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여기서 조금 더더더 덧붙이자면, 교토가 수도가 되기 이전부터 야마토, 아스카, 나라시대 모두 한반도 도래인들이 일본 황실 외척 및 주요 관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동안 한일고대사책을 멀리했었는데, 이 책 덕분에 꺼져가던 지식의 불씨를 살렸다. 이제 다시 한일고대사 책을 읽어보기로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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