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을 묻는 십대에게 - 하루 한 봉지씩 뜯어 보는 독서 라면 세상을 묻는 십대
고진숙 지음, 이시누 그림 / 서해문집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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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4월 3일이다. 누군가에겐 언제나와 같은 하루일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는 가족이 학살된 날이며, 평화롭던 마을이 통채로 불타던 날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1948년 4월 3일부터 시작되어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날때까지 지속된 제주도 민간인 학살. 이 긴 기간동안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제주도민 학살은 지금까지도 그 성격이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아, 단순히 ‘사건’으로만 불리고 있다. 그나마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범죄라는 것이 공인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하지만 아직까지도 누군가는 제주 4.3이 민간인 학살이 아니라, 폭동을 일으킨 빨갱이를 물리친 것 뿐이라며 말한다. 대게 이런 사람들의 논리는 자기들만의 편협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명확한 증거를 들이민다 하여도, 그들은 조작된 증거라고 우기며, 오로지 본인들이 주장하는 ‘빨갱이 타도’라는 주장만 할 뿐이다. 또한 그들이 주장하는 연장선상에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도 빨갱이가 주도한 폭동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논리를 가진 사람들은 대게 친일파에서 파생되어, 군부독재를 찬양하던, 군부독재에 기생하던 사람들이 태반이다. 



(코로나19가 휩쓸었던 3년은 없는 시간으로 치고)최근 몇년 간 제주도에 갈 때마다 제주 4.3 유적지를 찾아다녔다. 어떤 곳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고, 또 어떤 곳은 조용한 마을, 또 어떤 것은 풍광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이 모든 곳들의 공통점이라면 단 하나, 그 곳을 찾는 사람들은 그 장소에서 수많은 제주도민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다. 제주 4.3은 자국의 역사이고, 우리 윗세대가 겪은 아픔이었음에도, 제주를 찾은 많은 사람들은 4.3은 커녕, 관광하느라 바빴다. 그 사실이 얼마나 서글펐던지. 우리나라 역사교육이 이 정도로 열악한건가? 아니면 아픈역사라서 알고 싶지 않은 건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앞으로의 희망이 될 청소년들만이라도 제주 4.3에 대해 제대로 알고, 이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 책 「제주4.3을 묻는 십대에게」를 소개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1년 전에 소개했던 책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와 같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 책은 제주 4.3 사건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배경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제주 4.3에 대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더 자세하게 말이다. 또한 동 시간대에 제주, 한반도 본토, 세계 정세가 어떠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미군정, 이승만 정부, 역대 군사정부에게 제주도는 같은 남한 사람이 아니었다.





기​: 걸을 수 있는 자, 모두 모이다

- 제주4.3의 배경


제주 4.3의 배경에는 조선시대부터 본토와 배제되어, 차별받은 제주의 고통이 있었다. 오랜세월동안 제주라는 섬 밖을 나가지 못한 제주도민들은 결혼도 섬 안에서, 섬 사람들과 해야했고, 어느새인가 섬 전체가 한 다리만 건너면 전부 친인척 또는 지인이었다. 그래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삼춘’ 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를 궨당문화라고 한다. 그래서 제주도민 한 사람의 일이라도, 그들은 제주도민 전체의 일이라 생각했다.


제주에는 빈부 격차가 거의 없었어. 다들 자기 밭을 조금씩이라도 가지고 있었고, 큰 회사나 공장도 없었지. 소작농도 없고 노동자도 없는데도 사회주의 운동이 가장 강했어.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였고, 이것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이념이 사회주의였기 때문이지. 그들은 외세를 몰아내고 제주사람끼리 평등하게 서로 돕고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사회주의라고 이해했어. p 026



징용, 징병으로 제주를 떠났던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오면서 조금씩 해방이 실감되기 시작했어. 제주는 다른지역보다 귀환자 수가 엄청나서 무려 6만 명이나 되었어. 제주 사람 수가 고작 22만명인데 말이야. 그런데도 신기하게 거리를 나도는 부랑자 하나 없었어. 당시 제주에 취재하러 왔떤 신문기자들도 놀랄 정도였지. 남한만해도 해외에서 돌아온 100만 명 가까운 귀환 인구로 거리에 실업자와 부랑자가 넘쳐나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었거든. p 037



당시 미군정 요원이었던 그랜트 미드는 이렇게 말했어-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이 섬에서 하나밖에 없는 정당인 동시에 모든 면에서 정부 행세를 한 유일한 조직체였다.” 제주 사람들은 미군이 제주로 들어왔을 때 성조기를 들고 환영해. 그러다 점점 보이지 않는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보리공출 때문이야. p 038



제주의 토지는 벼농사에 적합하지 않아서 쌀은 거의 생산이 되지 않았고, 사람들은 대부분 보리나 조, 콩 농사에 의존했어. 그것마저 해방 이후 흉년이 들어 수확량이 반에도 못미쳤지. 곡물이 없어서 보릿겨를 톳에 섞은 톳밥이 유행하기도 해. 돼지사료를 먹기도 했어. 미군정청은 이런 것들로부터 한국인을 지켜줄 의무가 있었어. 유일한 주권자라고 선언했으니까. 하지만 기대와 다른일이 벌어져. 보리를 공출한다고 한거야. 해방된 나라에서 다시 공출이라니! 일제에 맞서서 싸우며 다시는 식민지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이유 중 하나가 공출이었거든. 제주 사람들은 인민위원회와 힘을 합쳐 보리 공출을 반대하기 시작했어. p 039


죽지 못해 살았던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해방이 되었다. 오랜시간 억압받던 제주도민들은 기뻐했다. 그래서 그들은 일제를 몰아낸 미군정을 환영했다. 미군정 역시 제주도에 처음 입도했을 때는 제주도민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미군정의 보리공출이 시작되며, 제주도민과 미군정의 사이는 급격하게 틀어지게 된다.


(+)


한국인들의 자주적 독립운동 역사는 부정되었다. 충칭에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별적으로 귀국해야 했다. 주한 미군은 유일한 합법정부로서 입법, 사법, 행정을 장악했다. 모든 식민지 통치 기구들은 그대로 두고, 식민지 관료도 그대로 등용했으며 친일파 청산과 토지 개역 요구는 묵살했다. 


한국인들은 일제강점기 내내 신간회 결성, 임시정부 구성, 광복군 결성 등 좌우합작을 통해 민족의 독립을 우선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일본에서는 좌익들을 민주주의의 파트너로 인정했지만 한국에서는 불법화했다. 이로 인해 좌우갈등이 폭발했고, 대구 10월 항쟁, 제주 4.3등 수많은 현대사의 미극이 이 시기에 일어났고, 분단이 고착화되었다. 전범국가 일본 대신 엉뚱하게도 우리 민족이 벌을 받는 일이 벌어졌다. p 041



반탁운동에는 친일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익과 충칭 임시정부 세력이 앞장섰다. 반탁운동 결과 친일 세력들이 하루아침에 애국자로 둔갑하는 마술이 벌어졌다. 충칭 임시정부 세력은 국내에 세력이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반탁운동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고, 전통성을 인정받아 주권을 넘겨받을 계획이었다. 김구는 ‘반탁’의 상징이 되었고, ‘반탁’하면 김구를 떠올리게 되었다. 반탁운동은 국민을 두 동강 내버렸다. p 047



미군정은 미국식 자유시장 경제 제도를 남한에 도입한다며 쌀값을 자유화했다. 그러자 대지주와 부유한 상인들이 사재기에 나섰다. 1945년 가을에는 풍년이 들었지만 두 달 만에 쌀값은 8배가 뛰었다. 그러자 미군정은 미곡 수집령을 내려 쌀을 공출하고 배급제를 실시했다. 배급량은 일제 치하 전쟁 때의 절반에 불과했다. p 060



(소련은 북한에)미군정은 남한에 들어온 뒤 유일한 합법정부로서 권리를 행사했다. 국내/외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단체는 배제되었다. 당시 국내에는 여운형을 필두로한 좌우합작 건준위세력이 있었는데, 대다수의 국민들은 건준위를 지지했다. 이에 국외에 있던 김구를 비롯한 충칭 임시정부 요원들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방안으로 ‘반탁운동’을 선택했다. 한마디로 미군정과 함께 좌익세력을 몰아내는 운동이다. 



독립운동을 할 당시에는 좌/우익이 한데모여 일제에 맞서싸웠는데, 막상 해방이 되고보니 서로 세력을 넓히기 위해 칼을 들이미는 상황이 된 것이다. 대다수 국민들이 지지했던 여운형의 건준위는 좌익과 우익이 함께 만들어졌음에도, 충칭 임정에겐 좌익이라 욕먹었고,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에겐 우익이라 매도되었다. 그렇게 국론은 분열되어, 한반도는 분단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승​: 어긋남의 연속으로 과열되는 섬

- 제주 4.3의 시작


그렇게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진 본토에서는 1947년 3.1절 기념집회마저도 따로따로 준비했다. 하지만 제주도는 달랐다. 지금까지 제주 역사가 그랬듯, 그들은 집회 주제인 ‘3.1정신 계승하여 자주독립 이룩하자’라는 구호 아래 좌/우익 구분없이 모두가 모였다. 


(1947년 3.1절 기념 집회 직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져나갈 무렵, 관덕정 앞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어. 기마 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차여 도랑에 빠진거야.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어. 안 그래도 경찰에 대해 반감이 심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가 기마 경관은 난쳐해졌고, 꽁무니에 군중을 달고 관덕정 쪽으로 향해. 관덕정은 제주의 중심지로 미군정청과 경찰서가 있는 곳이야. 망루 위에서 내려보단 응원 경찰이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총을 쏘았어. 결국 6명이 숨지고 8명이 다치는 비극이 벌어지고 말아. 그 중에서는 학생과 젖먹이를 안고 있던 21세 여인도 있었어. 도립병원의 검안 결과 희생자 중 한명을 빼놓고는 모두 등 뒤에서 총을 맞았어. 도망치는 비무장 군중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한 것이지. 이것이 제주 4.3의 시작인 3.1절 발포 사건이야. p 066~067



그날 초저녁 7시부터 미군정은 통행금지령을 내렸고 응원경찰을 더 내려보내. 그리고 3.1절 행사 위원회 간부들을 불법 집회 혐의로 잡아들이기 시작해. 집회에 참석했던 학생들을 집까지 들이닥쳐 잡아가서 구타해. p 068



미군정과 경무부는 폭도들이 경찰서를 포위, 습격하려 했기 때문에 발포했으므로 경찰의 정당방위라고 발표해. “제주도는 인구의 70%가 좌익 단체 종조자거나 관련이 있는 좌익 분자의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 즉 제주는 붉은 섬이며 그것은 제주도가 적의 주둔지란 뜻이었어. 미군정과 경찰에게 제주 사람들은 적이었고, 이렇게 제주 4.3의 비극이 시작되었어. p 070



미군정청은 전라북도 출신인 유해진을 제주도지사로 임명해. 유해진은 서북청년단 출신 개인비서 7명을 데리고 제주에 도착해. 유해진은 제주총파업에 참여했던 관공서 직원과 학교 교원들을 차례대로 잘라버려. 쫓겨난 제주 사람들의 자리에 이북출신들을 앉혔어. 제주도에서 제주사람의 권리와 이익이 뒷전으로 밀리기 시작해. p 074



일제강점기 당시 101명의 경찰로도 유지되던 제주의 치안이, 경찰이 1000명이 넘어가는데도 불안하다고 미군정은 서북청년단에게 경찰을 돕도록 해. 서북청년단은 이북에서 김일성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모든 걸 뺏긴 채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이었던 만큼 좌익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어. 엉뚱한 복수가 시작된 것이지. 그들은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청년들을 무조건 잡아다가 가두고 금품을 요구해. 월급이 없는 무늬만 경찰이다보니 약탈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어. p 076



3.1절 발포사건 이후 제주 사람들은 계속 체포되어 이미 2500명 가까이 갇혀있었어. 잡히면 일단 고문이 일상적이었지. 단독 선거, 단독 정부 반대 운동이 시작된 이후 체포와 고문은 더 심해져가. 그러다 결국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지. p 084



(학생들의 고문치사 사건이 수차례 발생 후) 젊은 사람들은 사소한 잘못을 저질러도 죽을 수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혔어. 앉아서 맞아 죽을 것인가, 일어나 싸울 것인가. 남로당 제주도당에서 봉기가 결정되었어. p 085



미군정은 제주 3.1절 기념집회에서 대형사고를 쳤다. 대형사고 수습을 위해 바로 진상규명을 하겠다고 나섰다면, 제주 4.3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군정은 전혀 다른 선택을 하고 말았다. 이 날 미군정은 공식적으로 제주도민에게 총살을 하였고, 제주도민을 빨갱이로 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악명높은 우익테러단체 서북청년단을 제주도로 파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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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10월 항쟁은 미군정이 한국을 민주적이고 평화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미군정은 더 많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우익 테러 단체와 응원경찰의 힘에 의존해 돌파했다. 경찰의 고문도 부활시켰다. 경찰은 고문이 너무나 정당한 권리라고 믿게 되었다. 경찰관 수는 일제강점기보다 6배 많아졌다. 자연스럽게 친일 경찰들이 돌아왔고, 대구 10월 항쟁 직후에는 경찰 간부 중 82%가 최연, 노덕술 같은 친일경찰 출신이었다. 이들 중 이북에서 월남한 친일경찰들은 28.6%나 되었다. p 062



1947년 3월 12일에 미합중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의회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위협에 대항하는 그리스와 터키 지역을 돕기위해 군사, 경제 원조를 제공해야 한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로써 2차 세계대전 직후 유지되던 미,소의 협력관계가 무너지고 세계는 냉전체제에 휩싸였다. 이 영향으로 2차 미소공위는 결국 파국을 맞고 한국의 운명은 분단으로 치닫게 된다. p 070



1946년 창당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은 당시 미군정에 등록된 합법적인 정당이었다. 정당의 목표인 강령은 민주주의 자주 독립 국가 건설, 무상 몰수/무상 분배의 토지 개혁, 8시간 노동제와 사회보장제 실시, 주요 산업의 국유화, 언론/출판/집회/결사/시위/신앙의 자유/20세 이상의 국민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 부여, 남녀 동등권, 초등 의믜 교육제 실시, 진보적 세금제 실시, 민족 군대 조직과 의무병제 실시등으로 현재의 헌법과 비교해도 충돌할 만한 내용이 없다. 유엔위원단은 남북한 선거에 대한 협의 대상으로 남한 6명, 북한 3명의 정치지도자를 지명했는데, 남한에는 이승민, 김구, 김성수, 김규식과 함께 남로당 지도자인 박헌영과 허헌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남로당은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지속적으로 탄압을 받았고 대중 지도자들이 투옥, 살해된 데다 간무들의 월북으로 한국전쟁과 함께 소멸했다. p086



제주4.3은 남로당 제주도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날인 1948년 4월 3일에서 따온 명칭이다. 이런 작명은 마치 4.3이 무장대 봉기로부터 시작되었고 무장봉기가 원인인듯한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제주사람들에게 4.3은 평화, 통일, 항쟁의 의미였고, 어느 하루의 일이 아니라 오랜 역사와 전통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p088




전​: 좀처럼 모아지지 않는 평화를 향한 마음

- 제주 4.3, 민간인 학살의 잔혹함


이후로 미군정은 성공적인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위하여, 친일경찰 출신들을 불러모아 제주도 탄압에 돌입한다. 거짓뉴스 살포는 기본이었다. 미군정에게 제주도는 일명 “레드 아일랜드”, 빨갱이섬이었다.


누가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알아내지도 못한 채 경찰과 미군정은 제주 사람들을 선동하는 사람은 외지인이라고 해. 그 외지인은 불량배였다가 백정이었다가 중국 팔로군이었다가 북한군이었다가 나중에 소련까지 들먹여. 근거없는 기사가 언론에 보도됨으로써 육지 사람들이 제주도 사람들의 잔학성에 치를 떨게 하는데 성공해. p 096



1948년 4월 28일에 구억리라는 마을에서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총책임자인 김달삼 간의 역사적인 평화협상이 열려. 긴 시간 동안의 회담 끝에 합의안이 나왔어. 하지만 평화는 그렇게 쉽게 찾아오지 않았어. 평화 협상 합의안에 따라 차근차근 무장해제와 귀순이 이뤄지는 동안 오라리에서 우익청년단들에 의한 방화사건이 발생해. 놀랍게도 마치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것을 미군이 비행기로 촬영했어. 미 방화 사건은 마치 무장대에 의해서 벌어진 것으로 편집돼서 무성영화 <제주도의 메이데이>로 만들어져. p 099



김익렬의 뒤를 이은 박진경 연대장은 제주도에 들어오자마자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해-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 명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 국방경비대는 무장대가 숨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중산간 마을 두 곳을 수색해 218명을 체포하면서 무차별 체포 작전(초토화 작전)을 시작했어. 물론 그들 중에 무장대는 단 한명도 없었어. p 104



오라리 방화사건은 미군정의 지시하에 우익청년들이 조작한 사건이다. 미군정은 이 사건을 빌미로 무장대가 평화협정을 깼다고 말하며 대대적인 토벌에 들어간다. 미군정이 방화사건까지 조작하며 평화협정을 깨고, 바로 토벌에 들어간 이유는 단 하나, 5.10 총선거(남한 단독선거)였다. 당시 소련엔 유엔에 당시 제주도의 상황을 말하며 미군정의 폭정을 폭로했다. 그러자 미군정은 유엔이 5.10 총선거에 대한 공정성을 문제삼을수도 있다는 우려로,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을 최대한 빠르게 무마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평화협정을 진행한 김익렬 연대장도 강제해임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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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토화 작전에 대해 미국 국무부 한국 문제 전문가인 존 메릴은 이렇게 말했다- “당시 한국군에 참여하고 있던 사람들은 대게 일본군 출신으로서 그들은 만주에서의 소탕전을 그대로 제주도에 적용했던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제주도에서 초토화 작전을 벌인 연대장들인 박진경, 송요찬, 함병선은 모두 불과 3년 전까지도 일본군과 만주군의 장교로 활약했었다. 일본군에 의해 벌어진 사상 최악의 민간인 학살인 난징대학살은 10년 전의 일이었다. 이들은 제국주의 군사문화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한 번도 반성의 과정을 거치거나 잘못을 돌아볼 새도 없이 미군정에 의해 채용되었고, 제주에 파견되었다. p 110



5.10 선거를 앞두고 미군정과 경찰 그리고 100만 명에 이르는 경찰보조대인 향토보위단(향보단)은 선거를 공포 분위기로 몰아갔다. 언론과 유엔위원단도 이 문제에 대해 우려를 나타낸다. 미국에서도 비밀투표가 유지될지 염려했다. 그런 가운데 임기 2년의 국회의원을 뽑는 남한 단독 총선거가 이루어졌다. (……) 5월 31일 역사적인 제헌국회가 제주도 국회의원 2명이 없는 가운데 열렸다. 이승만은 국회의원 180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이승만은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렸다. 의회에서 반민족행위특별법(반민법)이 통과되어 공포되었고, 이에따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은 대부분 친일파 출신이었다. p112



북한은 자신들이 세울 정부는 통일정부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남과 북에서 각각 대의원(국회의원)을 뽑을 생각이었다. 이에 따라 남측 대의원을 선발할 1080명의 대표자를 뽑기 위한 선거가 남한에서 치러졌다. 미군정 아래의 남한에서 버젓이 선거를 치를수는 없기 때문에 이 선거를 ‘지하선거’ 라고 한다. 제주에서 지하선거는 4.3의 여파로 백지에 손도장만 찍어주는 백지투표 형식으로 치러졌다. 아무나 지지한다는 뜻이었다. p 113



남한 측 대표자들은 38선이 가까운 황해도 해주에 모여서 대의원 360명을 뽑았다. 이들이 북한에서 선출된 대의원 212명과 함께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김일성을 초대 수상으로 선출했다. 월북했던 제주도 대표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4.3을 일으킨 주역들이 남한정부가 아니라 북한정부를 선택하고 돌아오지 않은 것은 제주에 피바람을 불러왔다. 제주도 무장대가 북한과 연결된 조직처럼 되어버린것이니까 말이다. 제주 민란의 전통에서 장두가 민중을 버린 경우는 없었다. 김달삼의 월북은 제주 사람들에게 충격적이었고, 그를 평가절하하기 시작했다. 김달삼에 이어 무장대 총책이 된 이덕구는 끝까지 제주 사람들과 함께하며 죽음을 선택했다. p 114


가을이 되자 제주 경찰청장의 자리에 홍순봉이 임명돼. 그는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높은 경찰 간부자리에 올랐었어. 그가 재임한 1년여 동안 제주에서는 무시무시한 학살극이 벌쳐졌지. 군인은 물론 경찰까지 참여하는 새로운 군경 합동 토벌대가 만들어졌고 제주 출신들은 완전히 배제돼. 인정사정을 두지 않는 잔인한 토벌을 위해서였지. 미군은 이 작전을 ‘레드헌트’, 즉 ‘사냥’이라고 했어. p 118



토벌대가 오는 모습을 보고 젊은 사람들은 일단 산으로 도망쳤어. 하지만 몸이 불편한 사람들은 떠나지 못했다가 토벌대를 만났고, 총에맞아 죽었어. 이승만 정부는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해서 여수에 있는 군부대를 제주도에 보내려고 했어. 여수의 병사들은 ‘동족의 가슴에 총구를 겨눌 수 없다’며 반란을 일으켜. 이것이 여순 사건이야. p 119



토벌대는 젊은 남자들만이 아니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무차별적으로 처형을 시작했어. 운 좋게 체포되었다 해도 모진 고문이 기다렸지. 모진 고문을 이겨낸다고 해도 유죄판결을 받아서 수형인이 돼. 비무장 민간인인 그들은 군사 법정에 서야했고, 그들에게 법정은 계엄법 위반이 아닌 형법의 내란죄 위반을 저질렀다고 했어. p 121



수만 명이 죽고 체포되고 고향을 잃는 등 제주는 아수라장이 되었는데도 정부는 늘 폭도의 수가 500명 안팎이란 말만을 반복했어. 1948년 4월에도 그랬고, 12월에도 그랬고, 1949년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지. 왜 수가 줄지 않는지는 말하지 않았어. 그리고 왜 무시무시한 폭도들과 싸운다는 군인들이 거의 피해가 없는지도 설명하지 않았어. p 122



고문을 이기지 못한 이들이 거짓으로라도 자백하면 그들을 해안가 모래사장으로 끌고 가 총살해. 총소리가 멎으면 여인들은 겹겹이 쌓인 시체 사이에서 남편과 아들을 찾기 위해 필사적이었지. 시체라도 찾으면 다행이라고 여겼어. 많은 집에서 시신 없는 묘를 만들어야 했고, 죽은 날을 몰라 생일날 제사상을 차리기도 했거든. p 125



그들은 임신한 젊은 여자를 발가벗긴 뒤 몹쓸 짓을 하고 휘발유를 뿌려 태웠고, 산 채로 매장했어. 남편이 산으로 올라갔기 때문인데 그런 경우를 ‘도피자 가족’이라고 해. 그들 부부는 부모 형제까지 몰살당했지. 그러나 남편은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산에서 내려와 대한민국 군인으로 참전했어. p 126



하루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이 들에서, 집에서, 해안가 모래밭에서 처형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들이 무슨 법을 위반해 죄를 지었는지 듣지 못했어. ‘재판을 받을 권리, 무죄 추정의 원칙,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같은 것은 사치였어. 제주 사람들은 더 이상 살려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어. 끌려가는 그들의 마지막 소원은 칼이 아니라 총으로 한 번에 죽는 것이었지. p 130


미군정은 계속해서 친일경찰들을 제주에 내려보냈고,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시간대에 유엔에서는 <집단살해죄 방지>와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되었다. 유엔은 미군정이 제주도민을 집단으로 학살하는 행위에는 눈을 감았다. 유엔과 미군정에게 제주도민은 지켜야 할 인간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제주 4.3으로 가족이 학살당한 집안에는 대게 1명 이상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공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의해 폭도가족이라 매도된 그들은, 국가유공자 집안이기도 했다. 정말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말대로 제주도민은 빨갱이였던 것인가?


(+)


제주에 계엄령이 내려지고 집단 학살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1948년 12월, 유엔총회가 시작되었다. 총회에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인류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반성으로 <집단살해죄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과 <세계인권 선언>도 채택되었다.

집단 살해죄, 즉 제노사이드 범죄는 ‘국가권력이 특정 집단 구성원을 절멸할 의도를 갖고 체계적인 계획 속에서 실행한 집단 학살’로 1945년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전범 재판에서 처음으로 적용되었다.

함께 채택된 <세계 인권 선언>에는 생명, 자유 및 신체의 안전에 관한 권리, 즉 임의의 체포, 구금 또는 추방으로부터의 자유, 독립적이고 공평한 재판소에서 공정하고 공개적인 재판을 받을 권리, 사상과 양심 및 종교의 자유, 평화적인 집회, 결사의 자유등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제주도에서는 대한민국 헌법으로부터도, 국제법으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한 채 집단 살해와 인권침해가 자행되었다. 유엔은 이에 대해 아무런 논평도 내놓은 적이 없다. 제주도에서 벌어진 초토화 작전은 베트남전에서 미군에 의히 반성없이 사용되었다. p 133




결​: 여전히 진행중인 치유와 회복

- 제주 4.3은 끝나지 않았다.


미군정이 물러가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정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제주도 탄압은 끝나지 않았다. 바로 한국전쟁이 터졌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부는 ‘예비검속’이라는 미명하에, 더 많은 제주도민들을 학살했다. 이 예비검속은 제주 뿐만 아니라 본토에서도 자행되었다. 



본토 문경의 석달마을 학살,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 대구 가창골 민간인 학살, 칠곡 민간인 학살, 양천 아작골 민간인 학살, 영덕 뫼골 민간인 학살등이 전부 이승만 정부가 시행한 예비검속으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이다.


1950년, 아직 제주 섬이 두려움 속에 있을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전장과는 먼 제주에서 또다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져.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내무부 치안국장(경찰청장)이 각 경찰서에 보낸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이란 긴 이름의 지시문 때문이었어. 요시찰인이란 보도연맹원을 비롯한 좌익 혐의자였어. 이들에 대한 예비검속이 시작된 것이지. 예비검속이란 죄를 지을지도 모르니 미리 가둬놓는다는 것으로, 반인륜적인 법이야. 해방이 되면서 미군정은 즉시 일제강점기의 예비검속법을 없앴고, 당연히 대한민국 제헌헌법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법이었지. 그러나 전국에서 수십만 명의 예비검속자들이 속속 잡혀갔어. 제주도에서는 4.3의 여파로 훨씬 더 폭넓은 범위의 사람들이 경찰에 잡혀갔지. p 151



체포자 수도 정확하게 파악이 안돼. 체포기록이 없었으니까. 수천명이나 되는 제주 사람들은 바다에 수장되거나 엄격하게 통제된 군사보호 구역 내에서 총살된 뒤 버려졌어. 시신이라도 찾게 해달라는 유족들의 간절한 요청도 허사였지. 이승만 정부가 철저하게 비밀로 부쳤거든. 이것이 바로 짓지도 않은 죄에 대해 재판도 거치지 않고 미리 처형부터 한, 문명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죽음의 예비검속 사건’이야. 육지에서는 ‘국민보도연맹사건’이라고 해. p 152



제주도에서는 2만 7000명의 보도연맹원과 5만 명의 4.3관련자 가족들이명부에 올라서 관리됐어. 이들은 공무원이나 교사가 될 수 없었고, 취직도 승진도 어려웠어. 사관학교 입학도 불가능했고 해외여행도 할 수 없었어. 군대를 다녀오고 훈장을 받아도 마찬가지야. 이로 인해 많은 가족이 파괴되고 일부는 자살을 선택하기도 했어. p 161



연좌제는 1980년 제5공화국 헌법으로 공식적으로 사라졌지만 제주에서는 1990년대까지도 그 악몽의 그림자가 이어졌어. 제주 4.3은 그때까지도 철저한 금기의 영역이었거든. p 162


(+)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진 후 좌익 세력을 ‘보호하고 지도한다’는 의미로 만든것이 ‘국민보도연맹’이다. 이미 좌익 세력은 북으로 갔거나, 산으로 갔거나, 죽거나, 감옥에 간 뒤라서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은 대부분 좌익과는 거리가 있었다. 군과 경찰, 공무원들은 실적을 채우기 위해 사탕발림으로 인원을 모집하거나 자기와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을 억지로 집어넣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우리 군이 밀리자 좌익 세력이 북한군과 힘을 합칠까 봐 두려운 나머지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원을 구금, 사살하라고 명령했고, 재판 없이 처형했다. 이것이 ‘국민보도연맹사건’이다. p 154


이승만 하야 이후 정권이 수차례 바뀌었지만, 대통령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이승만 정권 이후에 세워진 정권들도 이승만과 다름없는 독재정권이었다. 심지어 군부에 의해 생겨난 정권이었다. 제주 4.3은 경찰과 군인들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이었으므로, 군사정권에서도 언급하는 것이 금기였다. 언급하는 사람들은 빨갱이였다.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제주 4.3에 대해 알려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2000년 1월에 <제주4.3사건 진상 규명과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4.3 특별법)>이 공포되었어. 제주 4.3평화재단이 설립되었으며, 제주 4.3평화공원이 조성되었지. 2003년에는 사건의 진상을 담은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보고서가 확정됐어. 진상 조사 보고서에 근거해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를 방문하여 과거 국가 권력의 잘못을 공식사과하며 이렇게 말했어.

“국가 권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합법적으로 행사되어야 하고, 일탈에 대한 책임은 특별히 무겁게 다뤄져야 합니다. 또한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 전에 억울하게 고통 받은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자 의무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국가 권력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확보되고 그 위에서 우리 국민들이 함께 상생하고 통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p 168



제주 4.3이 벌어진 7년간 대략 3만 명이 희생되었어. 이들중 무장대에 의해 희생된 경찰과 우익단체 회원은 744명으로 이들은 모두 국가 유공자 예우를 받았어. 이들을 포함하여 무장대에 의한 사망자 수는 2000명을 넘지 못해. 그러므로 나머지 2만 8000여 명은 국가권력에 의한 의생이라고 볼 수 있어. 이들은 신고를 꺼리거나 일가족이 몰살당해 신고를 못한 경우도 많아서 정확한 수는 파악도 되지 않아. p 170



그렇게 제주도민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오랜시간이 흘렀다. 노무현 정권에 들어서야 제주도민들은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최초로 제주 4.3 사건에 대해 사죄를 한 것이다. 이후 제주 4.3 피해자들에 대한 재심이 시작되었고, 오랫동안 옭아매던 빨갱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게 완벽하게 끝난게 아니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제주 4.3으로 학살된 사람은 돌아오지 못하며, 실종된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찾을 수 없다. 심지어 제주도민 학살을 단행했던 경찰들은 국가유공자가 되었고, 그 후손들은 여전히 떵떵거리며 제주 4.3을 왜곡한다.



무엇보다 제주 4.3은 아직까지도 그 성격을 규정하지 못하여, 이름을 부여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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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28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주4.3 에 대해 읽을때마다 분노하게 되는거 같아요. 그 사건의 주동자들이 잘 살고 있다는 것, 지금도 서북청년단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는 단체들이 있다는 거 ㅠㅠ 제대로 진실된 역사교육이 너무나 필요한거 같아요. 요즘 아이들은 검색도 유투브로 한다는데 잘못된 내용들이 넘쳐나더라고요 ㅠㅠ 피로님 정성 가득한 글 넘 잘 읽었습니다 ~
 
우리는 숲으로 여행 간다 - 전국 자연휴양림.숲체원.국립공원 야영장 50
안윤정 지음, 서은석 사진 / 상상출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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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만의 여행책이다. 다만 이번 여행책은 기존에 내가 봐왔던 여행책과는 사뭇 다르다. 그도 그럴것이 이 여행책의 주제는 바로 #캠핑 또는 #야영 이니까. 고로 이 책 「우리는 숲으로 여행간다」는 캠핑이나 야영에 적합한 자연휴양림, 국립공원, 숲 야영장 또는 캠핑장을 소개한다. 여행을 갈때마다 호텔을 사랑하는 나에게는 매우 생소하디 생소한 여행방법이랄까, 흑흑흑.



보통 왠만한 국내여행책들이 소개하는 여행지는 대략 70%이상이 내가 갔던 곳인데 반해, 이 책에서 이 책에서 소개하는 여행지, 그러니까 휴양림이나 숲 캠핑장은 당연히 내가 모르는 곳이 태반이었다. 물론 나도 국립공원을 꽤 다녀보긴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등산로나 사찰등이 있는 방면이었지, 캠핑이나 야영지가 있는 방면은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 분명 익숙한 국립공원인데도, 매우 익숙하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는 건 함정^_T. 결과적으로 이 책에서 소개한 휴양림과 국립공원 야영지 중에서 내가 가본 곳은 고작 한 곳..........이었.....다 ㅋㅋㅋㅋㅋ



하지만.. 앞으로 아이가 태어나면 캠핑과도 친해져야 할 숙명을 지닌 예비맘으로써, 이 책을 달달달 외워야하나 싶기도...ㅋㅋ



이 책에서는 총 50 곳의 휴양림과 국립공원 야영장을 소개하고 있다. 책 8 페이지에 목차에서 50 곳의 장소를 소개해주고 있지만, 혹시라도 무언가에 특화된 휴양림이나 야영장을 찾는다면, 단숨에 책 뒷편으로 넘어가보시라!



테마별 휴양림, 야영장 찾기!


446페이지부터는 지금 정말 핫한 숲, 신생 숲을 비롯하여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은 숲, 목공 체험이 가능한 숲, 무장애 탐방로가 있는 숲, 각 계절별 경치가 아름다운 숲, 이색적인 숙소가 있는 숲, 이색 체험이 가능한 숲 등 테마별로 구분해놔서 더욱 찾기가 편하다.



예컨데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은 숲으로는 ‘동두천 자연휴양림’, ‘양평 쉬자파크’, ‘춘천 숲체원’, ‘설악산 국립공원 설악동야영장’ 등이 있고, 역시나 아이들이 목공 체험을 할 수 있는 숲으로 ‘경기도 잣향기 푸른 숲’, ‘철원 두루웰 숲속문화촌’, ‘공주 산림휴양마을’ 등이 있다.


모든 숲에 마음대로 들어가고 여행할 수 있을까? 답은 NO이다. ‘산림자원의조성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금지되는 곳이 아주 많다. 국립, 도립, 군립, 지질공원은 기본이고 도시공원, 수목원, 해수욕장 근처의 숲 역시 지정된 장소를 제외하고는 자유로운 여가 활동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아무리 좋은 숲이 있어도 국가나 소유자가 허가한 곳이 아니라면 모두, 우리의 여행은 불법활동이 될 수 있다. 특히, 직접적인 불을 이용한 취사는 숲 보호 차원에서 더욱 엄격히 금지된다.


그렇다면 정정당당하게 즐길 수 있는 ‘숲’은 어디일까? 야영, 취사가 허가된 숲, 먹고 자고 즐길 수 있도록 허락된 숲! 이를 ‘공인된 숲’이라 칭하겠다. 그런 곳의 대표 주자가 바로 자연휴양림, 숲체원, 치유의 숲, 국립공원 야영장 등이다. p 014



 


사람들이 처음 ‘국립된 숲’에서 묵는 이유는 대부분 ‘저렴한 숙박비’ 때문이다. 자연휴양림 야영장과 국립공원 야영장 이용 요금은 보통 사설 오토캠핑장의 1/2 또는 1/3 수준이다. 산림문화휴양관 같은 숙박 시설 역시 개인이 운영하는 펜션보다 요금이 저렴한 편이다. 장점은 또 있다. 일정 규칙만 지킨다면 관리받는 느낌으로 안전하게 지낼 수 있다. p 015



 

공인된 숲으로는 자연휴양림, 국립공원 야영장, 숲체원, 산림치유원, 산림교육센터, 치유의 숲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공인된 숲은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쉽게 캠핑(또는 야영)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공인된 숲은 나라(또는 지자체)에서 운영하다보니 비용도 사설에 비해 저렴하고, 관리도 잘되어 있다. 따라서 이곳을 찾는 사람도 많다는 것! 하지만 현존하는 공인된 숲에서는 이 모든 캠핑객을 포용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하게 공인된 숲에서 숙박(캠핑 또는 야영)을 하기 위해서는 예약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숲속 생활시 주의할 점※

1. 숲을 소중하게 여기며 훼손하지 않고 지킬 것

2. 불을 다룰 때는 조심 또 조심(장소에 따라 취사금지인 곳도 있음)

3. 자연재해, 안전사고 조심! 정해진 산책로(등산로)를 이용할 것

4. 모기나 말벌 등 해충 조심! 야생동물과도 만날 수 있으니 주의할 것

5. 숲의 규칙을 따를 것!

6. 내가 만든 쓰레기는 내가 들고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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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숲속) 고대산 자연휴양림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에 자리한 고대산자연휴양림은 행정구역상 연천이지만 철원과의 경계에 있다. 거의 철원인 셈. 연천 중심과는 꽤 거리가 있고 오히려 노동당사, 도피안사 등 철원 주요 관광지가 지척에 있다. 경원선 신탄리역에서 1.2km가량 거리로 서울 등 수도권에서 접근하기에 좋은 위치이다. 주말에 막히는 길이 싫다면 남쪽, 동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향하면 된다. 고대산자연휴양림으로 가는 길, 주요 고속도로의 교통상황을 들으며 뭔가 승자가 된 기분도 든다. p 136


경기도 의왕에 있는 바라산 자연휴양림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연천에도 자연휴양림이 있을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난 분명 연천 여행을 갔었는데, 심지어 바로 옆 철원 여행도 갔었는데! 이래서 무엇이든 관심을 갖고 봐야만 보이는건가 싶기도 하다.



고대산자연휴양림은 생각보다 작고, 기대보다 좋았다. 먼저 방문자센터 뒤로 2층짜리 산림문화휴양관 건물이 서 있다. 휴양관에는 5인실, 8인실이 있고 야외에 바비큐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오르면 예쁜 숲속의 집이 등장한다. 녹색 지붕의 나무집이 동화속 집을 연상시킨다. p 137


2017년도에 오픈한 고대산자연휴양림에는 숙박을 할 수 있는 숲속의 집과, 캠핑을 즐길 수 있는 캠핑 사이트가 전부 구비되어 있다. 이런건 메모를 체크를 해둬야지! 나중에 아이와 함께 캠핑................을 한다고 해도, 내 성향상 텐트부터 각종 집기까지 모든 것을 준비해야하는 캠핑보단 숲속의 집을 선호할 확율이 높기 때문에!


140~141 페이지에는 숲 간략정보(주소, 전화번호, 숙박시설, 야영시설, 예약싸이트)와 숲 주변 관광지에 대한 정보가 적혀있다.


2. (해안) 태안해안국립공원 학암포야영장


길게 뻗은 태안 해안을 따라 캠핑장소는 무수히 많다. 그중 국립공원 야영장도 두 곳 있는데 바로 몽산포 야영장과 학암포 야영장이다. 동계에는 학암포 야영장만 운영되며 편의시설 면에서도 앞선다. 학암포 햐영장은 태안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해변으로, 태안 해변길1코스가 시작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바다와 숲, 모두 즐기기 좋은 곳이다. p 234


태안 학암포가 책에 나와있는 장소 중 유일하게, 정확하게 가본 곳(?) 이다. 정확히는 학암포를 간 것이 아니라 바로 옆 구례포에서 해안길을 걸어가며, 학암포까지 갔던 것이지만...ㅋㅋㅋ


학암포 야영장에서는 생태여행을 떠나야할 의무가 있다. 사실 이곳은 2007년 서해안 기름유출 사고 후 침체된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한 방안으로 문을 열었다. 주변에 신두리 해안사구, 두웅습지, 천리포수목원, 만리포해변 등이 있어 동식물 생태관찰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p 235


학암포 야영장 근처에는 두 곳의 해변이 있다. 야영장 서쪽 해변을 편의상 A해변이라 부르고, 야영장 북쪽, 학암포항쪽을 B해변이라 부른다. 보통 야영객들은 가까운 B해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사실은 화력발전소가 배경인 B해변보다 학바위가 있는 A해변이 더 운치있다. 학암포의 유래가 된 학바위가 자칫 밋밋한 해변 풍광에 포인트가 된다. 바라길은 해변을 거쳐 해안 절벽을 따라 구례포, 먼동, 신두리까이 이어진다. 아이들과 함께라면 곰솔 숲, 자연관찰로, 학암포해변까지가 딱 알맞은 코스이다. p 236


진짜로 구례포에서 학암포로 이어지는 곳은 야영장 천국이다. 지나가면서도 놀랄정도였으니. 다만 전부 사립일줄 알았는데, 국립야영장이었을줄이야!


개인적으로 서해안은 태안을 좋아하는지라, 학암포 야영장도 미리 체크를 해놔야겠다.


236~237 페이지에는 숲 간략정보(주소, 전화번호, 야영시설, 예약싸이트)와 숲 주변 관광지에 대한 정보가 적혀있다.





분명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본 곳이라고는 학암포 딱 한 곳 뿐이었는데 말이다. 각 숲속 야영장(캠핑장) 주변 관광지로 적혀있는 곳은 대부분이 내가 갔던 곳이라 또 한번 당황했다. 저자가 추천하는 50곳의 캠핑장 주변마다, 내 발길이 닿던 곳이 천지였는데 말이다. 이쯤되면 정말 내가 캠핑에는 관심이 1도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하..


뭐, 하지만 앞으로 한 10년간은.... 이런 캠핑(또는 야영)을 가야될 확율이 매우 높으니^-T. 이 책은 향후 10년간 내 여행의 바이블이 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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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와 일본인 - 가미와 호토케의 길
박규태 지음 / 이학사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한일고대사, 즉 도래인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아주 자연스레 일본 신도 문화에도 관심을 갖게되었다. 뭐, 한일고대사에 관심을 갖기 이전부터 여러매체를 통해서 일본 신도 문화에 익숙해지긴 했지만..하하. 여튼 이런저러한 이유로 관련 책들을 읽다보니, 어느순간부터는 이 책 내용이 저 책 내용이랑 똑같고 그런 상황이 발생했다. 아마 입문서 또는 교양서로 만들어진 책들이라 심도있는 내용을 넣기 어려웠으리라.




그 때 이 책을 만났다. 



이 책은 그저 일본 신화 또는 일본 신도 문화에 관심이 있다고 섣불리 읽기 시작했다가는 큰코 닥칠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수박겉핧기 식으로 알고있는 일본 문화 - 예컨데 일본천황, 다테마에, 혼마에, 사무라이문화, 또는 일반론적인 일본문화 책이나 『국화와 칼』로 일본문화를 이해한 사람 등은 이 책을 이해 못할 확율이 높다고 본다. 그만큼 이 책은 초심자들에겐 엄청 어려운 책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무엇보다 글들이 좀 딱딱하다. 흑흑. 



난 분명 일본의 신도에 대해서, 일본의 불교에 대해서 남들보다는 잘 알고, 심지어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더군다나 고대 일본지명, 고대 일본신들의 이름들도 꽤나 익숙한 편이다. 그래서 이 책을 구입했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헌데 뭐라고 해야하나. 이 책 내용 자체는 스무스하게 이해가 되는데, 읽다보면 글들이 눈에 잘 안들어온다고 해야하나, 가독성이 떨어진다고 해야하나....하...^_T... 



물론 책 내용 자체는 훌륭하다. 저자가 힘들게 연구한 내용을 나는 이 책 한권으로 손 쉽게 후르륵 얻을 수 있으니까! 다만, 다시한번 말하지만 매우 전문적인 내용들이기 때문에, 일본사(정확히는 고대사)에 해박하지 않다면 이해하기가 어려울 지 모른다. 그저 일본 역사에 관심이 있거나, 흥미가 있다는 이유로 이 책을 읽기에는 처음 열장도 못 읽고 덮어버릴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정말 내 갈증을 채워줄 유익한 책이었는데, 섣불리 남에게 추천할 수 없는 이유다.



- 그렇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일본의 신도란 무엇인가?



전 세계에는 여러 종교가 있다. 불교, 천주교, 개신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등등. 우리나라만에도 이 좁은 땅덩어리 안에 여러 종교가 두루두루 섞여있다. 반면에 어떤 나라들은 ‘국교’라고 해서 하나의 종교만 믿는 경우도 있다(나처럼 종교가 아예 없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데! 이런 일반적인 종교관에서 벗어나는 나라가 있으니, 바로 일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본은 수많은 신들이 있고, 그 신들을 모시는 신사가 있는 나라이다. 오죽하면 일본여행을 갈때 유명하다는 신사 한, 두곳을 찾아가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인들 스스로는 자기네 나라를 팔백만 신이 사는 ‘신도’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함정! 그렇다면 이 신도는 하나의 종교일까? 일본의 국교라고 할 수 있을까? 일본인들은 본인들이 믿는 신을, 신도를, 종교라고 생각할까? 답은 NO다. 



그들은 신도를 종교로 보지 않는다. 실제로 매일 아침 신사참배를 하는 일본인에게 “당신의 종교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종교를 믿지 않습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오는게 부지기수다. 분명 각자가 믿는 신이 있는데, 믿는 종교는 없다니. 어찌보면 모순적인 이 상황은, 일본의 생활문화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신들을 하나하나 해체해보면, 많은 신들이 씨족의 ‘조상신’이거나 혹은 자연물(나무, 돌,동물)인 경우가 많다.



우선 조상신에 대해서 보자.


우리나라를 빗대어 쉽게 풀어보자. 나는 ‘강릉 최씨’다. 시조는 최필달 할아버지이다. 헌데 최필달 할아버지는 원래는 경주 최씨였고, 고려 개국당시 강릉부원군에 봉해지면서 ‘강릉 최씨’의 시조가 되었다. 원래 경주 최씨였던 최필달 할아버지의 시조는 고운 최치원이다. 그렇다면 고운 최치원부터 경주 최씨가 시작하느냐? 그건 또 아니다. 고운 최치원은 신라 6부 촌장 최 소벌도리공의 24세손이다.



이 상황을 일본의 신도에 빗대서 보았을때, 조상신이 3명에 나온다. 강릉 최씨 시조 최필달, 경주 최씨 시조 최치원, 최초 최씨성을 받았던 최 소벌도리공. 이런식으로 각 성씨마다 최초 시조, 중시조, 계파 시조 + 각 성씨(+계파별) 유명한 위인들이 전부 신이 된다. 팔백만 신이 우스울지경이다. 아, 물론 일본에서 말하는 ‘팔백만’이란 정말 숫자 팔백만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을 뜻한다. 그러니 이렇게 각 성씨들의 조상신만 합쳐도 이미 무수히 많은 신들이 나온다. 일본의 조상신 태반이 이렇게 탄생되었다.


일본인은 신도의 신을 ‘가미’라고 부른다. 『고사기』는 팔백만의 가미(야오요로즈노가미)가 있다고 기술하는데, 여기서 ‘팔백만’이란 가미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뜻한다. 이 수많은 가미의 기원 중 하나가 조령, 즉 조상신이다. 예로부터 일본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 사령이 가족과 촌락을 수호하는 가미가 된다고 생각하여 숭경해왔다. 일본 민속학의 아버지 야나기타 구니오에 의하면 이와 같은 조상숭배의 관념에서 이른바 ‘씨신’이라는 촌락공동체의 수호신 관념이 형성되었고, 이 씨신을 중심으로 신사가 발전되어온 것이다. p 022



조상숭배 관념과 더불어 신도 신앙의 근간을 이루는 또 하나의 축으로 자연숭배의 관념을 들 수 있다. 모든 자연물에 영적인 존재가 깃들어 있따는 애니미즘적 신앙은 현재까지도 신도의 에토스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남아있다. 사실 신도의 가미는 자연물을 신격화한 신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가령 황조신으로 말해지는 여신 아마테라스는 태양을 신격화한 것이고 그 밖에 달을 신격화한 쓰쿠요미, 폭풍우를 신격화한 스사노오를 비롯하여 일본 신도의 판테온에는 산, 들, 폭포, 강, 바다, 거품, 나무, 새, 짐승, 벌레, 풀, 금속, 돌 등의 자연물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소변, 토사물, 눈물, 피, 몸의 때라던가 말(言)까지도 신격화되어 등장한다. p 023



산신과 해신 외에 가미의 중요한 유형으로 재앙신 및 원령신(어령신)을 비롯한 인신(人神)을 빼놓을 수 없다. 이중 일본어로 ‘다타리가미’라 일컬어지는 재앙신은 인간에게 재앙(다타리)를 내리는 신을 뜻한다. p 024


이 외에도 자연물 신(쉽게 말해서 토테미즘, 애니미즘)도 있고, 사람신, 원령신도 있다. 



특히 일본이라는 나라는 사람이 죽으면 원한을 품고, 산 사람에게 해코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헤이안 시대의 우대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스가와라 미치자네는 당시 후지와라 가문에 의해 누명을 쓰고 유배를 갔다가, 규슈 다자이후에서 사망했다. 이후 후지와라 가문에 재앙이 끊기지 않자 사람들은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신으로 받들었으니, 그를 모신 곳이 바로 텐만궁이다. 한국인에게도 관광지로 유명한 규슈의 다자이후 텐만궁, 교토의 기타노 텐만궁 등 - 텐만궁의 주 신이 바로 스가와라 미치자네다. 



반면에 마을 주민들에게 은덕을 베푼 사람을 신으로 모신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끌려갔던 도공들이다. 당시 조선에서 일본 아리타에 끌려간 도공 이삼평은 그 곳에서 도자기를 만들며, 아리타도자 문화를 끌어냈다. 이삼평이 죽은 후 아리타 사람들은 이삼평을 도자기의 신(또는 도자기의 조상) ‘도조 이삼평’이라고 추앙하며, 그를 신으로 받들어 도잔신사에 모셨다.



여기까지가 책 초반의 내용. 뒤로 갈수록 더더욱 전문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이 책은 어디까지나 쉽게 읽을 책이 아니라는게 함정이다. 이 책을 읽을 사람이라면... 멘탈 단디잡고 읽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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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에게 안전한 집
조성문 지음 / 북센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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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출산용품&육아용품을 하나, 둘 사들여야할 시기다. 다만... 지금까지는 어떤 물건을 사도 안전에 대해 크게 개의치않았는데, 예비맘이 된 지금은 안전에 대해 겁나 민감한 상황이랄까? 특히 화학제품들.................이라고해도,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물건들이 화학제품이니, 거의 모든 물건들에 눈을 크게 뜨고 확인해야하는 상황이 발생^_T....



출산용품&육아용품을 쟁여둘 공간도 마련할 겸 청소도 할겸 겸사겸사 노후된 물건들, 안쓰는 물건들은 우선 죄다 버리기 시작했다. 안 입는 옷들은 전부 헌옷수거함으로! 오래된 USB선, 휴대폰 충전선은 휴지통으로! 유효기한이 임박한 화장품 샘플도 전부 휴지통으로! 오랫동안 쓴 플라스틱 락앤락통도 전부 다 버리고 유리용기로 재구매!



이렇게 비우고 또 비워서 공간을 마련하였으니, 이제 출산용품과 육아용품을 사들여야하는데. 이게 참-. 아무거나 사면 안될 것 같고. 해서 인터넷 검색 또 검색을 하다가, 결국 책의 힘을 빌렸다. 책을 읽고 나니, 이건 꼭 ‘집 밖도 위험하지만, 집 안도 위험해!!!!’ 같은 느낌이랄까T_T...



하긴, 우리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전부 화학물질이 안들어간 제품이 없으니. 하. 그나마 다행인건, 화학물질의 부작용에서 최대한으로 벗어날 방법을 이 책에서 알려주고 있다는 점이랄까. 그리고 생각보다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안전수칙을 꽤나 잘 지키고 있었다는 점에서 뿌듯뿌듯. 이러고보니 난 안전을 엄청 중시하는 사람이었나, 싶기도 하고 ㅋㅋㅋ



아! 예비맘들에 눈여겨 볼 사항중하나가 있으니, 바로 #유아용세탁세제 ! 아주 놀랍게도....... 유아용 세탁세제는 판매시에 성인용 관리기준과 동일하기 때문에, 일반 세탁세제보다 안전한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 나는 유아용 세탁세제라고 판매하길래, 당연히 유아용 관리기준이 따로 있는 줄 알았지? 육아용품으로 사두려고 했던 유아용 세탁세제는, 이로써 탈락! 그냥 판매처의 상술이었던걸로-_-. 



그리고 인기많은 해외직구 제품이라고 다 안전한 것도 아니었던 걸로. 하긴, 애초에 해외와 우리나라 화학물질관리규정이 다른데, 뭘 믿고 해외제품을 사겠는가. 무엇보다 난 1n년차 제약회사를 다니는 직원으로써(휴직중이지만ㅋㅋ), 화학물질관리규정에 생각보다 민감한 사람....!



책 중요 내용 요약!



<소모품>


1. 기저귀


- 젖은 기저귀를 오랫동안 착용하지 않도록 한다. 자주 갈아주고, 통풍에 신경쓸 것.


- 기저귀가 너무 조여지지 않도록 할 것.


- 기저귀를 갈아줄 때는 물로 몸을 깨끗하게 씻어준 후, 최소  15분 이상 말린 후 기저귀를 입혀줄 것.


- 기저귀는 습한장소를 피하고, 이물질이 유입되지 않는 별도의 공간에서 보관할 것.



2. 물티슈


- 물티슈는 인체청결용(화장품용), 구강청결용(의약외품), 음식점용(위생용품)으로 구분되어 판매.


- 만 2세 이하의 아이는 치약을 삼킬 가능성이 크므로, 치약대신에 되도록 의약외품인 구강청결용 물티슈를 사용해서 닦아 줄 것.


- 아이의 얼굴이나 몸을 닦을 때는 인체 청결용 물티슈를 사용할 것.


- 유통기한이 짧고 용량이 적은 물티슈를 구매할 것(유통기한이 길 수록 보존제 성분이 많이 들어가있어, 유해물질 포함량이 높음).


- 사용할 만큼만 뽑고 잘 닫아 놓을 것.


- 상처난 부위에는 물티슈를 사용하지 말것.



3. 음식용기


- 플라스틱제, 유리제, 금속제, 목재류 용기는 각각 다른 유해물질이 함유되어 있으므로, 각각의 사용방법에 따라 사용할 것.


- 영유아가 사용할 음식 용기는 영,유아용으로 표시된 제품을 사용할 것(프탈레이트, 비스페놀A가 없는 용기).


- 음식을 장기간 보관할 때는 플라스틱제보다는 유리제 용기를 사용할 것.


- 플라스틱제 용기에 수분 또는 기름기가 많은 음식을 담거나 고온으로 과열된 경우 유해물질 용출 가능성이 높음.


- 전자레인지로 음식을 가열할 때는 전자레인지용을 사용할 것.


- 새로 구매한 금속제 용기는 깨끗이 세척 후 사용할 것. 금속 성분은 산성 용액에서 잘 배출되므로, 식초를 첨가한 물을 넣고 10분 끓인 후 세척하면 제품 표면에 오염된 중금속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음. 또한 염분이 많은 절임, 젓갈류 음식은 중금속 배출을 중가시키므로 금속제 용기에 장기간 보관하지 말 것.



4. 놀이매트


- 놀이매트는 주로 표면 재질이 합성수지 이기 때문에 여러 유해물질이 포함되어있음. 특히 제품의 온도가 높아지는 과정에서 유해물질이 더 높은 농도로 방출될 가능성이 크므로 실내온도를 적정하게 관리해야함.


- 놀이매트를 구매하면 반드시 젖은 천으로 제품 표면을 닦아주고, 최소 1일 이상 베란다에서 햇볕에 말린 후 사용할 것.


- 놀이매트 세척시 사용상 주의사항, 권장사항을 준수할 것. 잘못 세척시 표면에 있는 유해물질이 방출되어 아이가 흡수할 수 있음.


- 놀이매트에 누워서 오랫동안 자면 안됨. 소재 특성상 표면 입자가 가루 형태로 방출될 수 있음.


- 바닥에 닿는 부분이나 접히는 부분은 냄새가 나거나 곰팡이가 생길 수 있으므로, 주기적인 세척이나 일광소독 필요.



5. 장난감


- 장난감은 다수의 재질과 부품을 포함하고 있어, 다양한 유해물질을 포함할 가능성이 높음. 또한 아이들은 의도된 사용방법외에 입으로 빨고 땀이 나도록 손에 쥐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만큼 제품의 유해물질에 노출될 위험이 높음.


- 플라스틱, 금속, 섬유 등 재질에 상관없이 모든 장난감은 구매 후 반드시 세척 후 사용할 것. 특히 천 재질의 장난감은 진드기가 서식할 수 있어서 정기적으로 세척해야함.


- 페인트가 벗겨진 장난감은 버릴 것. 페인트에는 주로 납이 함유되어 있어서, 흡입 또는 구강섭취를 하여 인체에 중금속이 쌓일 수 있음. 함께 보관한 장난감도 반드시 세척할 것. 특히 반짝이거나 광택이 있는 장난감은 벗겨졌을 때 중금속 노출이 쉽기 때문에 되도록 사용하지 말 것.


- 장난감 사용시 주의사항 또는 경고사항이 있다면, 부모가 옆에서 지도할 것.


- 장난감 구매 시 KC 인증표시를 확인 할 것. KC 인증은 안전기준을 지켰다고 검증한 것임.


- 장난감을 갖고 논 직후에는 손을 깨끗하게 씻을 것.



6. 옷


- 옷에는 다양한 화학물질이 염료로 사용되므로, 새 옷은 반드시 세탁 후 입을 것. 특히 새옷을 살 때 화학냄새가 적은 옷을 구매할 것.


- 드라이클리닝 제품보다는 되도록 손세탁이 가능한 옷을 구매할 것. 드라이클리닝을 한 제품은 세탁에 사용된 유기용제의 독성이 남아있어서, 특히 아이옷의 경우 주의가 필요.


- 아토피피부염 등 피부질환이 있는 아이에게는 되도록 면으로 된 제품을 입힐 것.



<화학제품>


1. 치약


- 치약을 완두콩 크기만큼 짜서 물에 묻히지 말고 바로 양치할 것. 사용 후에는 입안을 충분히 헹굴 것. 단 만2세 이하는 치약을 삼킬 가능성이 높으므로 구강 청결용 물티슈로 닦아주는 것이 바람직함.


- 양치할 때는 샤워헤드에서 나오는 물로 입을 헹구지 말 것. 수도꼭지에서 물에 접촉하는 부위는 위생안전인증을 취득후 판해하고 있으나, 샤워헤드는 먹는 물 용도의 수도꼭지가 아니기에 그러한 인증을 거치지 않음. 



2. 모기(진드기) 벌레 기피제


- 필요 이상으로 과량 또는 장시간 사용하지 말것. 기피제는 최소 4~5시간의 효과가 있음. 외출에서 돌아오면 기피제가 묻어있는 피부를 되도록 빨리 씻어내야함.


- 모기(진드기) 기피제는 자외선 차단제와 함께 사용하지 말것. 자외선 차단제로 인해 기피제의 성분인 디에틸톨루아미드가 피부에 더 많이 흡수될 수 있음.


- 밀폐된 장소에서 사용하면 안되고, 얼굴에 직접 분사하면 안됨.


- 벌레 기피제는 안전확인대상생활화학제품 표시, 모기(진드기) 기피제는 의약외품 표시 여부를 확인 후 구입할 것. 특히 의약외품인 모기 기피제의 유효성분은 디에틸톨루아미드, 파라멘탄-3,8-디올, 이카리딘, 에틸부틸아세틸아미노프로피오네이트, 이렇게 4개 뿐이니 다른 성분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지 확인 후 구매할 것.



3. 주방세제


- 주방세제는 1종, 2종, 3종으로 구분되는데 용도에 맞게 구매해야함.


- 제품에 표기된 적정 사용량을 사용해야, 용기에 잔류하지 않음.



4. 세탁세제, 섬유유연제


- 제품에 표기된 적정 사용량을 사용할 것. 아이옷과 침구류는 되도록 1회 세척 후 헹굼 기능을 1회 더 사용하여 화학물질이 잔류하지 않도록 할 것.


- 안전확인대상생활화학제품 표시를 꼭 확인하고 구매할 것. 우리나라는 해외에 비해 생활화학제품 관련 성분 사용규제가 높음. 만약 해외직구로 제품을 구매한다면, 우리나라에서 금지하고 있는 화학물질을 사용할 확율이 높으니 꼭 확인할 것.


- 시중 제품에 유아 전용 세제라고 표기되어 판매되는 제품들이 있지만, 국가에서는 일반 성인세제와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여 관리하고 있음. 따라서 안전성 측면에서 큰 차이를 확신 할 수 없음.



5. 세정제


- 서로 다른 세정제와 혼합하여 사용하지 말 것. 특시 산성계인 욕실 세정제와 염소계인 락스를 함꼐사용할 경우, 화학반응으로 인체에 치명적인 염소가스가 발생함. 욕실 청소할 떄는 되도록 문을 열거나 환풍기를 가동시킬 것.


- 반드시 고무장갑이나 비닐장갑을 착용할 것. 피부에 묻을 경우 바로 씻을 것.


- 해외 제품은 성분표시를 꼭 확인할 것. 특히 미국과 일본 제품은 관련 규정이 없으므로 주의.


- 안전확인대상생활화학제품 표시를 꼭 확인할 것.



6. 방향제, 향초


- 구매 시 제품 성분표시를 확인하고 주의사항을 반드시 지킬 것. 적정량 사용시 성인에겐 문제가 발생할 확율이 적지만, 아이들에겐 사용되는 향료의 종류나 민감도에 따라 천식, 알레르기, 비염등의 질환을 유발할 수 있음.


- 밀폐된 공간에서 사용금지. 실내 사용 시 주기적으로 환기할 것.


- 안전확인대상생활화학제품 표시를 꼭 확인할 것.



<기기, 가구>


1. 가구


- 새 가구 사용시 가구문을 활짝 열고 장시간 환기를 시켜서 유해물질을 밖으로 내보냄. 초기 유해물질을 크게 줄일 수 있는 방법으로 베이크 아웃이 있음(베이크아웃 과정에서는 집에 있으면 안됨).


- 목제가구는 목질 판상제품(파티클보드, 섬유판, 합판)보다는 화학처리가 덜 된 원목가구를 구매할 것.


- 공장에서 갓 생산된 제품보다 전시장이나 창고에서 한동안 머물러 폼알데하이드가 거의 다 방출된 제품을 선택할 것.


- 되도록이면 표면에 금속 재질이 적은 제품을 구매할 것. 금속 재질 부위에서는 니켈이 방출되는데, 호흡을 통한 노출만으로도 알레르기 유발.


- 어린이용 가구를 살 때는 KC인증 표시를 확인할 것.



2. 침대


- 침대방은 진드기 및 곰팡이 번식을 막기 위해 환기를 자주하고, 습하지 않은 환경을 유지해야 함. 


- 매트리스 커버는 최소 월 1회 정기적으로 세탁할 것. 커버는 진드기 불투과성 천을 사용.


- 침구류도 정기적으로 세탁하고 자주 햇볕에 말릴 것. 베개는 1주일에 한번씩, 이불 등은 2주일에 한번씩.


- 새 침구류는 반드시 한 번 세탁 후에 사용할 것.


- 낯선 소재의 침대 광고에 현혹되지 말고, 사회적으로 대중화 및 안전성 검증이 된 뒤에 구매할 것.


- 어린이용 침대를 살 때는 KC인증 표시를 확인할 것.



3. 컴퓨터, 프린터


- 기기에서 열이 나오는 방향과 사용자의 얼굴이 마주보지 않도록 설치할 것. 열 배출과정에서 브롬화난연제, 오존 등 유해물질이 증기형태로 방출됨. 주기적으로 방을 환기할 것.


- 전선의 피복이 벗겨진 제품은 즉시 교체할 것. 피복이 벗겨지거나 낡은 전선에서는 유해물일지 입자형태로 방출됨.


- 인쇄된 종이에 토너가루가 많이 남을 경우 즉시 토너를 교체하거나 프린터를 수리할 것. 토너 가루에는 중금속, 벤젠 등 유해물질이 포함되어 있고, 가루 형태로 남아있을 때는 흡입을 통해 몸으로 쉽게 흡수 됨.



4. 가스레인지


- 구이나 튀김 등 미세먼지가 많이 발생하는 요리를 할때는 레인지후드의 풍량을 최대로 높인다. 또한 요리가 끝난 후에도 최소 30분 이상은 레인지 후드를 켜두어야 한다. 생선구이 같은 요리를 할 때는 팬뚜껑을 덮고, 튀김요리를 할 때는 재료가 기름에 완전히 잠기도록 하는 것이 유해물질을 줄이는 방법.


- 레인지후드와 함께 창문을 조금이라도 열어둘 것.


- 요리할 때는 공기청정기를 꺼둬야함. 공청기를 켜두면 기름 입자 등이 공청기 필터를 막아서 수명이 단축되고, 냄새가 날 수 있음. 



5. 자동차


- 새차를 구매할 경우 포장비닐 바로 제거할 것. 포장비닐에는 다양한 플라스틱 제품과 이들을 연결하기 위한 접착제가 포함되어 있어서, 초기에 휘발성 유기화학물 등 유해물질 방출이 매우 높음. 모든 비닐을 벗긴 후 창문을 닫고 최소 3일 이상 햇볕에 놔둔 뒤, 환기를 하면 방출되는 유해물질을 현저히 줄일 수 있음.


- 자동차를 타기 전과 주행 중에도 수시로 환기할 것. 공조 시스템을 외부 공기 유입모두에 맞추면 환기효과가 배가 됨. 다만 차량이 많거나 미세먼지 농도가 높은 날에는 공조시스템을 내부 공기 순환모드로 맞춰서 외부 공기가 유입되지 않도록 할 것.


- 에어컨과 히터 필터는 주기적으로 교체하되, 아이가 타는 자동차는 초미세먼지를 거를 수 있는 필터로 교체하는게 좋음.


- 자동차 내부 온도를 23~24도로 유지. 자동차 내 온도가 올라갈 때는 유해물질 방출량이 평소보다 8배 가까이 증가함.


- 주유소에서는 자동차 창문과 문을 꼭 닫을 것. 주유소는 휘발유 증기로 인한 벤젠, 톨루엔, 자일렌등 휘발성 유해물질 노출이 높은 곳임.


- 지하주차장에서는 아이를 오래 두지 않을 것. 지하주차장에서는 자동차 시동 및 운행에 따른 벤젠 등 각종 유해물질이 고농도로 배출되는 곳이나, 밀폐된 공간으로 인해 유해물질이 쉽게 제거되지 않아서 공기중에 잔류할 가능성이 높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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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역사산책 : 한국사편 골목길 역사산책
최석호 지음 / 가디언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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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태교를 위해서 책을 읽을때 소리내어서 읽는 연습을 하고 있다. 물론 눈으로 읽는 것 보다, 읽는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졌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소리내어 읽기 시작한 건, 일종의 태교의 일환이다보니 멈출 수도 없다. 다른 산모들은 뱃속의 아이에게 말도 잘 건네는데, 나는 아직 낯간지럽다고요T_T 우리  신랑조차도 맨날맨날 아가에게 인사하는데, 하 ㅋㅋㅋ 이러다간 내 새꾸가 아빠 목소리만 기억하고 내 목소리를 어색해할까봐, 마지막수단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소리내어 책 읽기였...다. 하..하하..하하하.




그렇게 소리내어 책을 읽다보니, 글을 읽는것에 있어서 눈으로 보았을 때와는 다른 차이점을 느꼈다. 뭐, 기존에 눈으로만 읽었을 때도 가독성이 뛰어난 글들을 찾아다니곤 했는데, 확실히 소리내어 읽으니 달랐다. 가독성이 높다고 생각한 글 조차도, 소리내어 읽었을 때는 한 숨에 읽혀지지 않거나, 혀가 꼬이거나 막 그런 문장들이 있더라. 심지어 역사관련 책들은 워낙 어려운 단어들도 많다보니, 그런 경향이 더 심했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이 책 『골목길 역사산책:한국사편』은 조금 달랐다. 소리내어 읽어도 문장이 딱딱 떨어지고, 간결한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꼭 박종인 기자님 글을 읽을 때랑 비슷한 느낌! 그러고보니 이 책 저자가 박종인 기자님과 공동집필했던 『골목길 근대사』를 읽었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던듯?



이 책 제목 『골목길 역사산책』만 봤을 땐, 그저 골목길이나 동네길 또는 한 건축물에 얽힌 역사이야기를 일종의 해설사처럼, 또는 역사를 주제로한 여행에세이처럼 가볍게 이야기해주는 줄 알았다. 무엇보다 이 책의 저자가 책 속에 고스란히 녹인 모든 골목길은 대체로 내가 다 답사를 해봤던 곳인지라, 더더욱 쉽게 생각했다. 그런데 왠걸? 약간 뒤통수 맞은 느낌! 내가 생각한것과는 달리 이 책 속에 들어있는 역사이야기는 정말 깊이가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봤다가 큰 코 다친격이랄까? 심지어 나 역시 갔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알지 못하는 내용까지 있었던지라(화순 운주사!!!) 이건 뭐 이 책 들고 다시 가봐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근데 여기서 그냥 뻘하게 궁금한 점 하나. 이 책의 순서다. 뭐랄까, 시간순서도 아니고, 시간역순도 아니고. 뭐지..? 물론 읽는 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낭 뻘하게 순서를 정한 이유가 궁금하다..ㅋㅋ


이 책의 목차

1. 서울 남촌 대한민국길(근현대)

2. 전남 화순 고려길

3. 강릉 조선길

4. 경주 신라길





남촌 대한민국길 산책


저자의 서울 남촌 역사 산책길을 들어다본다. 나 역시 이 길을 걸었었는데, 그때는 너무 오래전이었던 지라 이 책에서 알려주는 서울로 7017이라던가, 통감관저 기억의 터 등... 대부분 조성 전 이었다는게 함정이다^_T. 뭐 어쩌겠나. 애기 태어나면, 애기랑 다시 가면 되지!


 

1911년 4월 ‘희망을 양식 삼고 곤란을 초석 삼아 마침내 집을 짓겠다’면서 경학사를 조직한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여 실력을 기르고자 한 것이다. 자주독립은 교육과 독립전쟁을 통해 달성된다. 나라 빼앗긴 망명국민 모두가 교육을 받아서 실력을 키워야 한다. 5월에는 신흥강습소를 열었다.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할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실시하기 위해서다. 신민회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뜻으로 新(신)과 망명지에서 흥왕하여 다시 일어나는 무장독립투쟁기구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興(흥)을 합친 이름이다. 이리하여 신민회에서 목적한 무관학교를 시작한다. p 033


신흥무관학교…. 우리나라 독립전쟁사에서 절대 빠질수 없는 바로 그곳이다. 안동에 있던 석주 이상룡 선생과 서울에 있던 이회영 6형제가 의기투합하여 만주에서 세운, 독립운동가를 키운 무관학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챕터의 주제는 서울 남촌이므로 석주 선생은 잠시 뒤로 빠지고, 서울살던 이회영 형제가 주인공이다. 


이회영 6형제는 서울에 있던 자신들의 모든 재산을 헐값에 팔아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이 먹이고 재우고 가르쳤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무장투쟁을 했던 많은 독립운동가가 바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들도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었다.


슬픈 사실은... 이회영 6형제의 결말이다. 우리는 근현대사를 배울 때 이회영, 이시영 6형제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거나, 이시영이 훗날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된다는 정도만 배운다. 이시영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형제가 어떻게 가르쳐주지 않는다. 우리가 항시 잊지않고 기억해야할, 우리가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준 분들인데 말이다.


(넷째)이회영은 동북항일의용군 창시자로 나선다. 11월 13일 대련에 내리는 순간 대련수상경찰서 형사들에게 붙들린다. 여순감옥에서 모진고문을 당한다. 11월 17일 고문사한다. 딸 이규숙이 시체실에서 눈조차 감지 못하고 순국한 이회영을 확인한다. 일제는 이회영이 삼노끈에 목을 매고 자결했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삼노끈이 어디서 낫는지 대지 못한다.


첫째 이건영은 형제들과 함께 1910년 서간도로 망명했다. 1926년 선산이 있는 경기도 장단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감시 속에서 농사를 지으며 선산을 돌봤다. 1930년 78세 일기로 장단에서 숨을 거뒀다.


둘째  이석영은 가장 많은 돈을 독립전쟁 자금으로 지원했다. 80세 된 1934년 끼니를 이을 돈이 없어서 굶어 죽었다.


셋째 이철영은 경학사 사장과 신흥무관학교 전신 신흥강습소 교장을 역임했다. 신흥무관학교 폐교  뒤 상해, 천진 등지를 떠돌다가 1925년 풍토병으로 사망했다.


다섯째 이시영은 독립전쟁 뒤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키자 시민들과 함꼐 서울에 남아서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부통령이 북한군 포로가 되는 일을 막기 위해 한강 다리를 끊기 직전 피난길에 올랐다. 부산 피난 중 이승만과 갈등을빚었다. 1951년 군 간부들이 군수물자를 횡령해 수만 국민방위군 청년들이 굶어 죽은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났다. 5월 9일 이시영은 부통령을 사퇴한다. 1953년 4월 17일 부산 동래에서 숨졌다.


여섯째 이호영은 다물단원으로 독립전쟁에 참여했다. 밀정을 색출하고 일제 잔당을 처단했다. 일가족 모두 일제에 몰살당했다. p 039~040


이시영을 제외한 다섯형제는 해방 이전에 사망한다. 사망이유가 너무 처참하다. 넷째 이회영과, 여섯째 이호영은 일제에 죽임을 당한다. 첫째 이건영은 일제 감시 속에서 죽었다. 둘째 이석영과 셋째 이철영은 가난으로 인해 굶주려 죽고,풍토병에 죽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다섯째 이시영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형제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목숨걸고 지켰던 한반도에서 이승만의 독재와 민간인 학살에 충격을 받고, 부통령에서 사퇴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은 이시영, 이회영 6형제의 결말이다. 우리는 그들의 행적에만 관심을 둘뿐, 그들의 죽음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체 왜? 왜 우리는 이들의 죽음은 왜 가르치지 않는걸까. 이들뿐만 아니다. 스탈린 강제이주 정책으로 인해 중앙아시아로 쫓겨난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죽음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홍범도 장군과 김경천 장군이 중앙아시아로 건너가서 어떻게 죽어갔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여기까지 일뿐. 해서 이런 역사를 알고자 한다면, 개개인이 독립운동사 관련한 책을 읽고 배울 수 밖에 없다.


정말 이해할 수 없다. 빛나는 역사만 역사인걸까? 빛나는 역사를 이끌었던 주인공들의 아픈 역사는 왜 가려버리는걸까. 그 모든 것을 알아야만, 그 속에서 그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텐데. 우리나라의 근현대사 교육에 새삼스레 아쉬울 따름이다.


안중근 의사 사후의 이야기다.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독립운동가 안중근을, 친일파들이 어떻게 이용했는지 그에 대한 이야기다.


1963년 안중군의사숭모회를 만든다. 초대 이사장은 윤치영! 1938년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심기일전해서 친일매국한길로 달려간 인물이다. 1944년 국민동원총진회 중앙지도원이 된다. 안중근의사숭모회는 1967년 안중군 의사 동상을 세우고 1970년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짓는다. 김경승이 만든 동상이다. 김경승은 1940년 <목동>으로 조선미술전람회특선에 오른다. 일제가 추진한 산미증산 계획을 주제로 한 것이다. 침략전쟁에 쓸 군량미다. p 062


해방이후 친일파들은 미군정 휘하에서, 이승만정권 아래서 반공을 외치는 애국투사로 변모했다. 살아있는 친일매국노였던 그들은 당시 살아있던 독립운동가들을 핍박하고 탄압했다. 이미 사망한 독립운동가들은 자신들의 치적을 위해 이용했다. 안중근 의사도 친일매국노들이 이용한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매우 늦은감이 없진않지만 2005년에 안중근의사기념관 건립위원회를 새로 꾸리고, 기념관도 새로 지었다는 사실이다. 친일매국노 김경승이 만들었던 도산공원 안창호 동상, 국회 앞 이순신 장군 동상, 정읍 황토현전적지에 있던 옛 전봉준 장군 동상도 철거되었다.


1995년 국가안전기획부를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하였을 때 서울시가 일괄 매입했다. 미군정과 정부수립 초기 수도경찰청, 이승만 정권에서 안하무인 권력을 휘두른 특무대, 박정희 장군쿠데타 직후 중장정보부. 그리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보안사와 국가안전기획부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가며 인주주의와 인권을 마음껏 짓밟았다. (……) 아시아 최초로 독재와 싸워 이긴다. 대한국인이 민주주의를 건설한다. 민주주의를 짓밟고 국민을 고문하던 국가안전기획부를 남산에서 쫓아낸다. 지금은 소방방재센터, 시청별관, 문학의집, 서울유스호스텔, 교통방송 등으로 쓰이고 있다. 눈 떠보니 선진국이다. p 069 ~ 070


내가 남촌을 걸었을 때는 조성되지 않았던 그 공간, 일제의 약탈과 인권유린의 현장을 고스란히 조성한 그곳. 내가 이 곳을 걸었을 때는 끽해야 한양도성이나, 조선신궁 터(정확히는 삼순이계단) 정도였는데 말이다. 부끄러운 사실은 난 당시에 이 곳이 대한민국 시대, 군부독재의 인권유린 현장까지는 인지했어도, 일제강점기 통감관저가 바로 이곳이었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했다. 다시한번 반성T_T..


관훈동 민씨는 민영휘를 말한다. 본명은 민영준이다. 일본국 세자가 조선을 올 떄 환영위원장을 맡아서 환영 행사를 주관한다. 1910년 정우회 총재로서 한일합방 찬성운동을 벌인다. 이자의 집을 고스란히 보존한다. 남산골한옥마을이다. p 076


친일매국노 민영휘의 집, 또 다른 친일매국노 윤덕영의 집 등이 모두 고스란히 보존되어 남산한옥마을에 있다. 헌데 남산 한옥마을에선 이 사실을 고지하고 있으려나? 서울 유명 관광지 북촌한옥마을은 친일파가 살았던 흔적을 싸그리 지웠는데 말이다. 친일매국의 흔적을 정부에서, 또는 지자체에서 나서서 지워주고 있으니 친일매국노 후손들이 이렇게 떵떵거리고 살고 있는거겠지.


예컨데 친일매국노 민영휘의 후손들이 남이섬을 운영하는 것처럼^^ 


남이섬이 친일매국노 민영휘 후손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모를까, 알면서도 굳이 남이섬을 가서 그들의 재산을 계속 불려주는 행동은 딱히 좋게 보이지 않는다. 뭐,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모르고 가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남이섬 역시도 지자체에서 나서서 친일매국의 흔적은 지우고, 관광지로 홍보해주는데 뭐!




운주사 고려길 산책


역시나 꽤 오래전이었나, 아빠랑 둘이서 화순 운주사를 갔었다. 운주사는 내가 너무 가고 싶었던 곳이라, 아빠한테 매일 가자고가자고 노래를 불렀더랬다. 물론 집에서 가기엔 너~~무 먼 곳이라, 외가집이 있는 영광에 갈 때나 갈 수 있었던 장소였지만. 여튼! 그렇게 가고 싶던 운주사를 가게되었다.


보통 우리가 아는 사찰은 불국사,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등 주로 부처의 가르침이나 불교 교리를 가지고 이름 짓는다. 운주사, 불교와 아무 관련 없는 이름!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에 운주사가 있다. 천년 된 불교사찰이 있는 동네 이름이 도암(道岩)이다. 불암(佛岩)이어야하는데? 맞닿은 마을도 도곡면이다. 불곡면이 아니네? 온통 도교다. p 093


고려시대에 도교가크게 일어난다. 도교에는 성수신앙 중 하나 태일신앙이 있다. 태일, 곧 북극성에 대한 믿음이다. 북극성은 하늘의 중심을 이루고 자연계와 인간계 현상의 모든 것을 주관한다. 성수 북극성의 신격, 즉 별자리 신은 태일이다. 태일은 하늘의 황제로서 매년 한  차례  구궁을 순행한다. 구궁이란, 9개의 방위에 세운 황실 도교사원을 말한다. p 094


운주사에 처음 들어갔을 때, 기존의 사찰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떠오른다. 경내에 들어서자마자 온갖 석탑들과 석불이 즐비어 있는 모습도 너무 낯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저 불교 사찰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도교사원이라니, 하 ㅋㅋㅋㅋㅋㅋ 역시 어딜가든 뭘 보든 알고 봐야한다^_T...


당시 내가 알고 있는 운주사에 대한 내용은 천년고찰과 천불천탑, 도선국사 정도였..으니..까...하.....


고려와 조선에서 중국 도교를 받아들이면서 더 풍성해졌다. 강역이 중국보다 작았기 때문에 고려에서는 태일전의 규모를 9개에서 5개로 줄여서 운영한다. 화순이 속한 능주 권역은 고려 황후  공예태후를 배출한 지역이다. 공예태후의 다섯 아들 중 세 아들이 황위에 오른 유력한 고장이다. 방위로도 한반도 남서쪽이 위치함으로서 태일 오궁중 간궁을 세우기 적합한 곳이다. 북극3성을 상징하는 좌불, 입불, 시위불과 북두7성을 상징하는 칠성바위 등을 운주사 서산에 배치한다. 애초에 운주사는 불교사원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p 095


고려와 도교? 솔직히 이렇다하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학교에서 배울때도 그랬고, 나중에 한능검 공부할때도 그렇고, 대체적으로 고려의 종교에 대해선 불교를 위주로 배웠으니 말이다. 그래서 늦게나마 공부를 좀 해보니, 고려왕실에선 도교행사도 개최했고, 도교제단도 만들고, 심지어 개성 만월대에선 왕실에서 도교행사를 주최를 뒷받침하는 유물들까지 나오고. 세상에나!


그동안 학교에서든, 역사책에서든 ‘불교’ 또는 ‘유교’를 중심으로 가르쳤다. 그러니 나 역시 아주 당연히 운주사도 불교사찰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저 배운 것에 함몰되고 그게 전부라 생각해서, 나도 모르게 편협한 시각을 가져버린 내 자신을 반성한다T_T.


그렇다면 내가 알고 있던, 도선국사와 운주사 창건설화, 운주사 와불 미륵신앙도 자연스레 의심할 수 밖에 없게된다.


문헌 속에 등장하는 도선과 운주사의 관계는 1743년에 중간된 《도선국사실록》이다. 그  이후 이런저런 서적들이 이 이야기를 확대 재생산하면서 운주사 명칭도 변화를 겪는다. 운주사(雲住寺)는 ‘구름이 머무는 곳’을 뜻한다. 그런데 한때 운주사를 ‘운행하는 배(運舟 운주)’ 라는 이름으로도 불렀다. 도선 설화를 수용한 것이다. 도선은 배 모양을 한 한반도의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 동쪽은 태백산맥이 터를 잡고 있어 무겁고 서쪽은 명야지대라 가볍다. 서로 균형이 맞지 않아 나라가 순조롭게 운행할 수 없다. 그래서 배의 중심에 해당하는 운주사 일대에 천불천탑을 세워 군형을 맞추려 했다. p 106


(고려)의종 4년 1150년 의종 황제는 최유청에게 도선의 생애를 기록하라고 명한다. 개국에 큰 공을 세웠으나 문장으로 전하는 것이 없음을 부끄럽게 여겼다. 최유청은 난감했다. 도선에 관한 기록이 전무한 데다가 알려진 바 역시 없었기 때문이다. 하는 수없이 동리산 선문을 개창한 혜철비문에서 도선의 탄생설화를 짓는다. 어머니가 태몽을 꾸고 낳은 혜철은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도선도 그렇다. 동리산 선문 법통을 이은 선승 도선은 이렇게 탄생했다. 옥룡사를 세운 경보비문을 이용하여 도선 전기를 엮는다. 경보는 김씨 성을 가지고 영암 구림마을에서 태어나 월유산 화엄사에 출가하여 공부하고 옥룡사에 입적한다. 도선도 그렇다. 태조 왕건의 탄생과 고려 창업을 하늘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만들고자 한 고려 황실 현창사업의 일환으로 도선국사 현창운동을 벌인 것이다. p 107


아니나 다를까, 도선국사의 운주사 창건설화도.....하 ㅋㅋㅋ 네, 문헌속에 최초로 등장한 운주사의 이야기는 조선시대에 집필한 1743년. 심지어 도선국사의 생애까지도. 아..... 그동안 가려져있던 역사들을 많이 배웠다고 생각했건만, 그것은 새발의 피였다. 



불교적 관점으로 봤을 땐 이상하게 보이던 운주사가, 도교적 관점으로 보니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실제 운주사에 가서 원형 석탑을 보았을때, 심지어 석탑이 짝수층인걸 보았을때 ‘참 이상하다’ 싶기만 했는데. 처음부터 불교사찰이라고 배웠기에, 그 편견에 사로잡혀서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던 나 자신이란. 휴.


동산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육층으로 보이는 석탑이 눈에 들어온다. 이 탑을 칠층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육층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  해석은 완전히 달라진다. 오주석은 칠층석탑이란다. 원래 있었던 한 층이 빠져 버렸기 때문에  칠층석탑이라는 주장이다. 상식적인 주장이다. 사찰에 육층석탑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칠층석탑이다. 눈앞에 뻔히 보이는 탑을 보지 않는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이념대로 말한다. 땅은 음이고 탑은 양이다. 짝수는 음이고 홀수는 양이다. 탑은 양이니 홀수여야 한다. 그래서 6층이나 7층은 있어도 6층은 없다. p 123



많은 사람이 석조불감 안 석상은 지권인을한 붓다라고 말한다. 아무리 양보해도 저  손 모양은 불교의수인이랄 수는 없다. 석조불감 안 두  석상의 손  모양이 서로 다르다. 앞쪽, 즉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석상은 손을 자연스럽게늘어뜨린모습이고 반대쪽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석상은 손을 공손히모으고 있다. p 129


은하수 하늘길 남쪽 하늘에 육층석탑을 세운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불교적 관점에서 은하수 하늘길 원반육층석탑을보면 문제가 생긴다. 티베트 불교를 제외하면,짝수로 탑을 세우지 않는다. 한 층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으로밖에 달리 해석이 불가능하다. 머릿속에 도교가 없고, 불교만 있는 사람에게는 상식이다. 그러나 이 경우 탑신의 전반적인 비례가 어긋나야만 한다. 한 층이 없어졌으니까! 유감스럽게도 그런 흔적은 없다. 6층 그 자체로 완벽하고 아름답다. p 132


무엇보다 저자는 이 모든 것에 대해 하나하나 근거를 가지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 고구려 천문관측술, 고려 고분벽화, 고려 시대 왕실에서 세운 도교사원, 도교제사, 수많은 도교 유물, 고려시대 천문도 등 정말 수많은 유물들로 말이다.


자 그리고, 대망의 운주사 와불 미륵불이야기!


운주사는 역사 속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온 유적지다. 아주 오래전부터 영산강 물줄기가 운주사 앞까지 어어졌었기 때문에 왜구들의 침입에 시달렸다. 이는 왜구들을 막기 위해 쌓은 산성에 대한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발굴조사 과정에서 상감청자 100여  편을 찾았다. 고려중기12세기경에 조성했을  것이다. 홍치 8년이라 새긴 기와도 찾았다. 즉 연산군  1년 1495년에 중수했다. 운주사가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것은 정유재란 때다. p 153


여기에 주민들까지 가세한다. 운주사에 있는 유물들을 가져다가 생활도구로 사용한다. 주민들에게 석탑과 석상은 새로운 세상을 알리는 미륵의 환생이 아니라 담과 디딤돌을 위한 석재다. 운주사 평지는 생계 수단이다. 그리고 몇몇 주민들은 석탑, 석상들 중 값나갈 만한 것들을 가져다 팔기도 한다. 1980년 석탑은 18기로 4기가  줄고 석상은 70구로 1구가 준다. 운주사 천불천탑을 미륵신앙과 연결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또한 엄청난 크기의 운주사 석탑과 석상이 무수하게 널려 있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민중  지향적이라고 볼 수 없다. 이  정도 규모의 석상과 석탑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주민을 강제로 동원할 수 있었던 강력한 권력집단이어야 한다. 따라서 운주사를 미륵신앙과 연결시킨 것은 문학적 상상일 뿐이다. p 155


정말 민중이 와불을 미륵불로 믿었다면, 민중들 스스로 이 절을 망가트리진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 제일 와닿는다. 하. 나는 여태껏 무엇을 보고, 무엇을 믿었던 걸까.


물론 운주사를 도교사원으로 이야기하는 건 저자의 추측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무언가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이건 당연히 이거지!’라고 단정하는 게 얼마나 편협한 시각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훌륭한 길라잡이가 된다고 생각한다.



강릉 조선길 산책

율곡은 공안, 선상, 군정 등 폐정에 대한 개혁을 경장이라 했다. 중쇄기에 접어들어 벽이 무너지고 지붕이 깨질 위기에 처한 조선을 새롭게 고쳐서 백상을 편안케 하고자 하는 방책이다. 선조는 오랜 구법을 함부로 바꿀 수 없다고 한다. 율법은 구법이 아니라 악법이라 한다. 홍문관 부제학 미암 유희춘은 “이이가 상소한 바와 같이 공물, 선상, 군정에 관한 일을 강구해서 시행한다면 백성들이 곤고함에서 벗어나 한 숨 돌릴 수 있을 것”이라 아뢴다. p 184


율곡은 을사삭훈을 통해 왜곡된 정치를 바로잡고, 개혁을 통해 백성을 편안케 하고, 동서분당을 조제보합함으로써 그 폐해를 막고, 변방을 튼튼히 지켜 오랑캐가 넘볼 수 없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무너지는 벽을 바로 세우고 깨지는 기와를 제대로 이어서 조선이라는 집을 반듯하게 하고자 했다. 퇴계나 선조는 율곡을 알았다. 많은 사람은 더불어 살았으면서도 율곡을 제대로 몰랐다. p 190


사림들이 대거 죽는 사화의 피바람과 함께 조선의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선조 재위기는 붕당정치의 한복판에 있었다. 동인과 서인들은 서로 내가 맞네, 네가 틀리네 하는 상황이었다. 백성들이 힘들던 말던, 임진왜란이 코 앞으로 다가오던 말던 그들에겐 자신들의 논리만이 중요했다. 그런 상황 한가운데 율곡이 있었다. 백성을 생각하고, 나라의 국방을 생각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류성룡 조차도 율곡을 비판했다. 임진왜란이 터지고 나서야, 류성룡은 율곡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율곡은 붕당을 뛰어넘어 망가져가는 조선을 바로잡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을 벌인다. 문성사를 짓고 표준영정으로 지정한 <율곡영정>을 설치한다. 김은호가 1965년에 그린 그림이다. 김은호는 1937년 애국금차회가 미나미 총독에게 전쟁헌금을 바치는 광경을 그렸다. 율국선생께서 살아계신다면 친일매국 화가에게 당신을 그리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시에서 친일매국  조각가 김경승이 만든 안중근 동상을 철거한 것은 지난 2010년 10월 26일, 2013년 서울특별시 강남구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 동상, 2015년 국회에서 이순신 장군 동상, 2021년 정읍시에서 전봉준 장군 동상 등 김경승이 만든 동상 철거 및 교체가 줄을 잇고 있다. 이제 강릉치 차례다. 강릉시에서 친일매국노가 그린 영정을 제일 먼저 교체했으면 좋겠다. p 192


오롯이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만 있던 율곡을 대한민국 시대에 들어서 친일매국노들이 이용했다. 심지어 군사정권에서도 율곡을 이용했다. 심지어 친일매국노가 그린 율곡의 영정은 아직도 표준영정으로 자리잡고 있다.


강릉은 율곡이 태어난 곳이다. 율곡의 모친은 신사임당이다. 신사임당의 고향이 바로 강릉이었다. 우리는 신사임당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기묘명현 신명화에게 신사임당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똑똑한 딸이다. 18세기 노론 중진들에게 신사임당은 아들을 잘 가르쳐서 성공시킨 어머니다. 노론과 소론 사이에 벌어진 갈등을 배경으로 나온 주장이다. 20세기 권력에게 신사임당은 10만 양병을 주장하면서 상무 정신을 고취시킨 아들을 낳아서 잘 기른 현모양처였다. 유신 정국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내새운 새로운 해석이다. 그 중심에 초충도가 있었다. 신사임당을 신사임당으로 볼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p 201


신사임당은 시대 변화에 따라, 그녀를 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하지만 그 시각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신사임당’ 본인이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딸이었고, 누군가의 어머니였을 뿐이었다. 애초에 그녀의 본명조차 알려져있지 않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임당은 그녀의 ‘당호’일뿐, 이름이 아니다. 그래도 신사임당의 삶은 비교적 긍정적이었다. 


신사임당과 같이 강릉에 근거를 두었던 허난설헌의 삶은 어땠나? 그녀는 초당 허엽의  딸이자, 당대 명문장가 허균의 누이였다. 허난설헌은 글을 참 잘썼다. 하지만 결혼과 함께 그녀의 행복도 끝난다. 그녀의 남편과 시댁은 조선에서, 그것도 한낱 여자가 글을 쓴다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신사임당의 남편인 이원수와는 매우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나마도 그녀의 버팀목이었던 부친과 오빠, 자식들까지 줄줄이 잃고 그녀는 27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놀랍게도 허난설헌의 이름은 알려져 있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허초희. 그녀의 동생인 허균이, 누이의 글을 엮어서 사방팔방, 외국에까지 널리 알렸기 때문이다. 조선 여성중 이름이 알려진 몇 안되는 사람 중 한명인 허초희. 하지만 그녀의 삶은 불행했다.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의 삶, 결혼 후 그녀들의 삶과 죽음은 달랐지만, 결국 조선식 유교적 잣대에 좌우되어,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누이로 남아버렸다.




경주 신라길 산책


요즘 블로그에 경주 여행기를 쓰는 중이라서 그런지, 경주 신라길 챕터가 이리 반가울 수가 없다. 혹시나 여행기를 쓰면서 이 책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ㅋㅋㅋ



빅토리아 황금보검, 북방 초원을 가로지른 금관, 서역 너머 로만글라스 게다가 오직 신라에만 있는 높은 굽다리 줄무늬 유리잔, 인도 합금강철 기술등은 신라가 오랜 시간 참아내면서 쌓아온 역량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로마 유리와 페르시아 유리를 응용하여 신라 유리를 만든다. 중국에서 난리를 피해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에게 신라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게 한다. 왜에서 표주박을 허리에 메고 바다를 건너온 호공은 재상이 된다. 서역 사람이 원성왕 괘릉을 지킨다. 아랍 사람이 왕 앞에 나와서 노래하고 춤을 춘다. p 248


유독 동시대 다른나라와는 달리, 이국적인 유물이 많이 발견되는 나라 신라. 그 덕분에 신라 관련 역사다큐도 엄청 봤더랬다. 뭐, 가야도 신라만큼은 아니지만 이국적인 유물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음. 이 챕터의 주인공은 신라니까!


신라 고분에서 저기 바다건너에서나 나올법한 로만글라스가 발견되고, 황금보검이 나온다. 북방 기마민족 문화에서나 볼법한 동복이나, 황금문화, 나뭇가지  모양(?)의 금관들이 나온다. 원성왕릉에 세워진 서역인 석상과 사산조 페르시아 서사시에 실려있는 ‘바실라’ 이야기. 우리의 다른 고대국가와는 다르게 엄청나게 개방적이고, 세계적인 신라의 문화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유물들이다.



천마도를 그린 말다래 소재를 보면 쉽게 출처를 알 수 있다. 자작나무다. 신라에서는 대나무를 사용했다. 천마도 말다래  출처는 신라가 아닌 다른 곳이라는 뜻이다. 또한 천마도라면 날개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찾아봐도 날개는 없다. 천마가 구름을 타고 가는 것일 수도 있지 않나? 아니다. 애초에 질주하는 백마였기 때문에 구름이 아니라 먼지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 백마 몸에 초승달 반점! 중국와 유럽 천마도에는 초승달 무늬가 없다. 초승달은 스키타이를 비롯한 북방 기마민족 문양에 등장한다. p 264


천마도로 유명한 말다래에서도 북방 기마민족의 향기를 찾을 수 있다. 날개가 없다거나, 초승달반점도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눈여겨 볼 것은 천마도의 소재 자작나무다. 


알타이 산맥에 있는 쿠르간은 신라 고분보다  최대 1150년을 앞선 적석목곽분의 원조쯤 된다. 나무무덤방 위쪽에 돌무지가 있기 때문에 나무 무덤방이 썩으면 돌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함몰된다. 대릉원 고분은 무덤방 바로 위에 돌무지가 있었기 때문에 함몰될 때 무덤방 안으로 돌이 많이 들어온다. 파지리크 고분은 무덤방과 돌무지 사이에 봉토층이 있었기 때문에 함몰될 때 돌이 적게 들어왔다. 양자 모두 돌무지 무덤때문에 도굴꾼이 건드리지 못했다. p 267


알타이 산맥무덤방은 삼림지대, 즉 자작나무로 뒤덮인 언덕에 정착한 부족장이 사는 통나무집 ‘타이가 하우스’다.  (……) 신라사람들은 하얀 자작나무 껍질을 좋아했다. 타이가 하우스, 자작나무 껍질에 그림을 그린 말다래, 자작나무로 만든관모. 모두 천마총에서 발굴한 것이다. 일본 사람들 시각으로 보면 신라는 하얀나무 나라다. 껍질이 하얀 자작나무를 좋아하니 백목이라 불렀다. 일본말로 발음하면 신라와 백목 모두 ‘시라기’다. p 268


난 한일고대사에도 관심이 많다보니, 도래인 관련 일본원서도 곧잘 읽곤 한다. 그러다보니 일본에서 우리 고대국가들을 읽는 이름을 보면서, 대체 왜 그렇게 부르는건가 궁금할 때가 많았다. 고구려는 코쿠리, 백제는 쿠다라, 신라는 시라기, 가야는 가라. 고구려나 가야는 보자마다 대충 느낌을 알았다. 쿠다라는 곰나루 혹은 큰나라 에서 어원이 왔겠거니 했다. 하지만 시라기는 당최 알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일본이 왜 신라를 시라기로 부르는지에 대한 것을 언급하다니!!!


저자의 말대로 하얀나무(백목)을 일본어로 발음하면 시라기다. 하얀 자작나무 껍질을 좋아하던 신라인, 하얀나무, 시라기. 오 뭔가 그럴듯하다. 맞는 말인것 같기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진짜 맞는 것 같다. 일본이 신라를 부르는 이름에서 조차도, 북방 기마민족의 흔적이 나타난다는게 정말 신기하다면 신기하달까?


대릉원에서도 옴총 유명한  황남대총이다. 근데 이 황남대총의 유물들로 인해 사람들은 혼돈에 휩싸인다. 조금 더 큰 북분에서 금관이 나와서 피장자가 남자라 생각했는데, 같이 출토된 허리띠에 ‘부인대’라고 적혀있었다. 반대로 조금 작은 남분에서는 금동관과 유해 일부가 출토되었다. 남분의 유해를 확인해본 결과 남성이라고 특정되었다.


알타이  고산지대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북분에 아내를, 남분에 남편을 매장했다. 그래서 황남대총 북분에 장신구가 많다. 반대로 남분에는 무기가 많다. 그런데 북분이 남분보다 크다. 북분 왕비릉을 작게 만들고 남분  왕릉을 크게 만들어야 한다. 부장품도 북분이 훨씬 많고 값지다. 게다가 금관은 북분에서 나오고 남분에서는 금동관이 나온다. 왕비릉에서 금동관이 나오고 왕릉에서 금관이 나왔어야 한다. 왜 서로 뒤바뀌었을까? p 272


일단 황남대총이 왕릉급 고분, 심지어 쌍릉인건 확실한데, 남성의 유해는 남분에서 나왔다. 조금 더 큰 북분에선 남분보다 더 귀한 금관과 피장자가 ‘여성’이라고 칭한 금제 허리띠가 나왔다. 다름아닌 황남대총에서 혼돈의 카오스같은 상황이 일어난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다시 기마민족 문화를 근거로 가지고 왔다. 수많은 기마민족 향기가 짙은 유물들이 신라고분에서 넘처나게 출토되고 있으니(황남대총포함),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금동관과 남성의 유해가 나온 조금 작은 남분은 왕릉이고, 금관과 금제허리띠(부인대)가 나온 큰 북분은 왕비릉이라는 이야기다.


이러한 사정때문에 타협점을 찾아야만 했다. 왕릉과 금동관에서 해법을 찾는다. 결과적으로 최대 왕릉을 만들어서 김씨 세습왕조 제2대 왕으로서 예를 갖췄다. 박씨나 석씨와 더불어 왕권을 돌려가질 필요가 없는 김씨 세습왕조를 이제 막 시작했다. 안착시키기 위해서 내부 싸움을 덮어야만 했다. 그러나 왕관이 아니라 금동관으로 격을  낮췄다. 내가 살기 위해서 당대를 죽였다. 힘든 왕위쟁탈전을 치른 만큼 앙금도 쉽사리 가라앉이 않았다. 게다가 왕비 아류부인의 아버지는 왕인데 실성마립간의 아버지는 제2관등 아찬이다. 같은 혈통  안에서도 차별은 존재한다. 왕비 아류부인은 왕관을 쓰고, 왕 실성마립간은 금동관을 쓴다. 이렇게 힘든 내력을 지닌 왕릉과 왕비릉이다. p 278


우선 현재 학계에서 황남대총의 피장자를 5세기 무렵 내물왕, 실성왕, 눌지왕으로 추정한다. 여기서 다수설은 눌지왕이라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황남대총의 피장자를 실성왕으로 추정한다. 그 근거는 당대의 왕위 다툼 속에서 찾는다. 그 속에서 왕릉이 더 작고, 왕비릉이 더 커진이유가 들어있다.


(※우선 당시 신라의 왕 명칭은 마립간이지만, 통칭 왕으로 칭하겠다.)

당대 왕위 다툼의 역사는 이렇다. 내물왕은 사촌동생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다. 내물왕이 죽자 고구려에서 돌아온 실성왕이 왕위에 오른다. 실성왕은 왕위에 위협이 되는 내물왕의 세 아들을 견제한다. 감시하기 위해서 내물왕의 장자 눌지를 자기 딸 아로와 결혼시킨다. 내물왕의 차남 미사흔은 왜에 볼모로 보내고, 내물왕의 삼남 복호는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다. 과거 내물왕이 본인에게 그랬듯이. 이후 실성왕의 사위가 된 내물왕의 장자 눌지는 쿠데타를 일으켜서 장인인 실성왕을 죽위고 왕위에 오른다. 왕이 된 눌지는 박제상을 보내 볼모로 잡혀있는 둘째와 셋째를 환국시킨다. 


여기까지가 당대 왕위 다툼의 역사다. 이후 눌지는 장인이면서, 자신의 원수나 다름없는 실성왕의 왕릉 조성을 위해 고심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선 왕릉이고 뭐고 때려치고 싶겠지만, 이 시기는 김씨 세습왕조를 견고하게 다져야 했던 시기이니 만큼 실성왕의 왕릉을 거대하게 조성해야만 했다. 해서 왕릉을 거대하게 조성하되, 사적인 마음 한 스푼 담아서 왕릉보다 왕비릉을 더 크게 조성한다. 물론 명분도 그럴듯 했다. 실성왕의 부친은 6두품 출신이지만, 실성왕비의 부친은 미추왕(초대 김씨왕^^)이었으니까! 그래서 왕비릉은 크게, 왕릉은 작게 라는게 저자의 추론이다.



근데 이게 또 빠져든다. 하하...하하. 원래 고대사라는게 남아있는 당대  기록이 없다보니, 발굴된 유물로 추론과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하는 학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일단 지금은 저자의 추측에 한표 던지는걸로...ㅋㅋㅋㅋㅋ


경주에서 유명한 최부자댁. 교촌마을엔 최부자집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내가 경주 최부자댁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곤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한 사람이라는 정도였다. 그 뒤의 이야기는 모르고 있었다. 흡사 독립운동가들의 말로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모르는 것 처럼.


경주 최부자로 유명한 최준 선생은 백산 안희제 선생과 함께 자본금 100마나 원을 출연해서 백산상회를 경영한다. 자본금 기준으로 당시 조선 10대 재벌이다. 백산상회는  자본금을 빨리 잃기 위해 세운회사다.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했다. 회사는 곧 망한다. 최준 선생은 기뻤다. p 303


최준선생은 광복을 맞자 전 재산을 털어서 대구대학교를 설립한다. 1947년 대구대학교 세우던 해에 경주 교동에 있는 최부잣집을 비롯해서 논과 선산 등도 모두 대구대학교에 내놨다. 1964년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은 경주 최부잣집 사랑채로 찾아 온다. “대구대학교를 한수 이남 최고 대학교로 만들겠다”고 한다. 최준은 아무런 대가 없이 대구대학교를 이병철에게 넘긴다. 이병철은 대구대학교 재단 이사장에 취임한다. 1966년 한국비료는 ‘사카린 밀수 사건’을 일으킨다. 삼성이 갖고 있는 회사다. 곤경에 처한 삼성은 대구대학교를 박정희에게 헌납한다. 박정희  정권은 1967년  12월 청구대학교와 대구대학교를 합쳐서 영남대학교를 만든다. 최준 선생 모든 재산은 박정희에게 넘어갔다. p 304


독립운동을 열심히 지원한  최준 선생은 해방이후에는 교육을 위해 모든 재산을 털었다. 하지만 그 재산은 삼성을 세운 이병철에 입 바른 말을 하며 꽁으로 가져갔고, 이병철이 가져간 최준 선생의 재산은 다시 박정희에게 고스란히 상납되었다. 반면에 최준선생의 손자는 그 박정희 정권에서 빨갱이 취급을 받아,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 들어갔다. 최준 선생의 모든 재산을 탈취한 박정희는, 일제강점기 때 ‘타카키 마사오’라는 이름을 쓰는 일본군이었던 박정희는 그렇게 독립운동을 한 최부자집을 몰락시켰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월정교다. 월정교 복원 공사 시에도 가서 봤었고, 복원 된 후에도 가서 봤던 월정교다. 월정교 관련 포스팅을 할때 이게 정말 복원이 맞는건가 욕을 한참했던 그 월정교다.


고려 때 문신 김극기는 월정교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반월성 남쪽 토령 강에 무지개 모양 다리가  그림자를 거꾸로 문천에 비추었네. 용이 꿈틀거리며 은하수에 오르니 꼬리는 땅에 드리우고 무지개가 하수를 마시매 허리는 하늘에 걸치었네. ”


월정교를 무지개 모양 다리라고 한 것으로 봐서 월정교는 반월교 또는 홍예교였던 것 같다. 지금처럼 교각 위에 수평으로 다리를 만든 직선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p 308


그래도 꾸역꾸역  이해하려고 애썼다. 당대의 역사기록도 없고, 월정교의 원형을 추론할 수 있는 유물도 없으니 어쩔수 없었을거라고 이해하려 애썼다. 그런데 왠걸, 고려시대 한 문신이 월정교에 대한 글을 남겼다. 월정교는 무지개 모양 다리라고. 그니까 한마디로 홍예교라고. 적어도 지금같은 일자 모양의 교각은 아니었던 셈이다.


생각해보면 신라는 홍예, 아치형모양, 반달을 좋아했다. 반달은 점차 차올라 보름달이 된다. 그래서 신라는 점차 차오르는 나라였다. 신라의 도성 이름도 반월성이었고,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도 반달모양 홍예교다. 석굴암 본존불 입구도 반달모양 홍예교다. 물 위에 있는 홍예교가 달빛을 받아, 물에 비치면 원형이 된다. 가득찬 보름달이다. 


그런데 월정교를 홍예교로 만들지 않고 일직선 들보교로 복원했다. 월정교 주변 석재를 발굴했다. 다리 난간을 만들 떄 사용했던  홍예교에 해당하는 부재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중국 호남성에 있는 회룡교를  본떠서 들보교로 복원했다. 홍예교일 수도 있고 들보교 일 수도 있다. 사료는 별로 없고 유물은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남기고 있다. 그렇다면 월정교 복원은 우리 몫이 아니다. 서두르지말고 후손들에게 맡겨야 한다. p 309


하지만 우리 눈앞에 있는 월정교는 일자 모양의 교각이다. 나라에서 월정교 복원에 앞서 모델로 한 것이 중국에 있는 회룡교라고 한다. 아니 대체 왜? 왜때문에 갑분중국? 원형을 추론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본 뜬 것이 중국의 다리라니. 이걸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아, 이렇게 된거 이 책의 전작들도 한번 읽어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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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9 1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전 아이 가졌을때 해리포터 많이 읽었어요. 남편이 아이가 링가 디움 레비오사! 이러면서 나오는 거 아니냐고 ㅠㅠㅠ 역사로 하는 태교 👍 좋은데요 *^^*

피로 2022-03-14 12:03   좋아요 1 | URL
태교랍시고 열씸히 책을 읽고 있기는 한데, 얼마나 아이에게 영향이 갈지는 모르겠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