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 지내면 좋겠어요 - 끝나지 않은 마음 성장기
에린남 지음 / 상상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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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읽었던 에세이가 있었다. 집안일이 귀찮아서 점점 물건을 줄이다보니, 어느새 미니멀리스트가 된 사람의 이야기. 의도치않게 미니멀리스트가 되고보니, 점점 환경문제까지 생각하게 된 이야기. 심지어 그 책의 일러스트도 저자 본인이 그렸기에, 더더욱 와 닿았던 이야기. 그 책은 거실에 있는 내 책장에 꽂혀서, 매일매일 내 눈에 밟혔고, 덕분에 내 소비습관도 점차 줄어들게 했더랬다. 그렇게 의도치않게 내 행동을 개선해준 책의 저자가 신간을 출간했다.


이번 신간은 지금을 사는 2030, 바로 나를 대변하는 이야기였다. 앞선 세대보다  월등히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누리고 자라왔지만, 정작 성인이 되고 나니 끝없이 펼쳐진 포기와 좌절, 실패에 둘러쌓인 2030. 하지만 이들을 위로해주고, 이끌어주어야할 어른들은 사실상 전무한 지금. 우리는 우리들 스스로 극복해나가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렇게 찾은 방법 중 하나가, 나만 이렇게 힘들다는게 아니라는 것. 알고보니 내 친구도 힘들고, 내 친구의 친구도 힘들고, 심지어 무언가로 인해 성공한 누군가도 나와같이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 그렇게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위안이 되어주기 시작했다. 




이 책 『내가 잘 지내면 좋겠어요』는 바로 우리끼리의 위안이고, 위로고, 힐링이다.



꿈을 포기하는 결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이 꿈을 내려둘 좋은 기회 같았다. 이루기 전에 그만두는 편이 내게는 더 좋을지도 모르니까. 포기를 기회라 여기며 긴 시간 함께했던 꿈을 정리했다. 대신 오랜 시간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꿈 때문에 내 근처에 얼씸거리지도 못한 다른 가능성을 살폈다. 전에는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일을 떠올리기로 했다. 그게 무엇이든 하고 싶으면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자는 다짐이었다. p 023



완전히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두고, 나는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다시 꺼냈다. 처음엔 그 사실에 실망하기도 했다. 나의 폭이 협소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짧은 순간에 번뜩이듯 낯설고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배운 적 없고, 평소에 특별한 관심이 없던 일이 자연스레 떠오를 리 만무했다. 어쩌면 나도 은연중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꿈을 편히 내려두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러니 다행이다. 좋아하는 일을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게 되었으니까.  p 025



요즘은 ‘꿈’을 이룬다는 이야기가 정말 ‘꿈’과 같은 이야기다.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 내가 할 수  있는일을 찾는게 우선이 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꿈을 꾸지 않는 청년들도 있고,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꿈’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나만해도 이제는 내 꿈이 무엇이었는지 조차 기억이 할 수 없을 정도니 말이다. 



분명 교복을 입었을 땐, 꿈이 있었던 것 같은데, 새내기때만에도 꿈에 부풀었던 것 같은데,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 모든건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 당장 내가 취업할 수 있는 곳이 어딘지를 찾아야했고, 그렇게 ‘꿈’이라는 것은 사라졌다. 그리고 번듯한 회사에 취업했다.



나름 회사에서 연차가 쌓이고보니, 별안간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던 시점이 있었다. 아무래도 연차가 쌓이고, 내 자리가 확고해지니,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시작했나보다. 뭐, 나중에 회사를 그만두었을때, 무엇을 하고 살아야하나? 라는 그런 노후에 대한 막연한 걱정도 한몫하긴 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꾸었던 꿈이 무엇인지는 당최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 잘하는 것들을 떠올려보았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다보니 당연히 ‘문자’를 읽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게되고, 일본어를 꽤 잘하는 편이고, 역사를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하고 등등등. 이렇게 좋아하거나 잘하는 것을 나열하고 보니, 문득 어린시절 내 꿈들도 떠올랐다. 책방 주인도 되고 싶었고, 고고학자도 되고싶었고, 역사학자도 되고 싶었고, 여행작가도 되고 싶었다. 잊어버렸던 꿈들을 찾아내어, 지금 내 위치에서 사실상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았다. 물론 내 ‘노후’까지도 생각해서 말이다. 저 꿈들의 조합에서 생각해낸 것이 국가자격증인 ‘관광통역안내사’  였다. 그래서 바로 관통사에 대해 찾아보기 시작했다. 시험을 보기 위해선 공인된 외국어시험 점수와, 필기시험, 실기시험(외국어면접)이 있었다. 공인된 외국어점수야 아주 가볍게 패스할 수 있으니, 이건 껌이었고. 필기과목을 확인해보았다. 국사, 관광자원해설, 관광법규, 관광학개론 총 네가지 과목이었다.



국사랑 관광자원해설은 역사와 여행을 좋아하는 나에게 역시나 껌이었다. 남은건 관광법규와 관광학개론인데, 내가 또 (무늬만)행정학 전공자였으니, 법이나 개론따위야 달달 외우면 되겠지 생각했다. 워낙 ‘문자’를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나였기에, 필기시험공부는 낙승이라 생각했다. 실기는 뭐, 필기 붙고나서 생각하면 될일이고. 그래서 출,퇴근전 필기시험공부를 두달간 빡세게 했다. 그리고 진짜로 필기를 덜컥 붙었다. 이후 남은건 외국어 면접인 실기시험. 그리고 시험은 보기좋게 망한.....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합격! 



현실문제에 가로막혀 포기했던 꿈들을 재조합해서 도전한 자격증시험을 보기좋게 합격하고 보니, 일단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걸 해야하는건가 싶었다. 마음같아선 자격증을 받자마자 회사 때려치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볼까 싶기도 했지만, 여기서 다시 현실문제로 돌아왔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래도 매달 따박따박 들어오는 대기업 월급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내 자격증은 다시 서랍속으로 고이 들어갔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 자격증이 쓸 날이 올거라는 생각을 하게되니, 회사생활이 맘 편하진건 비밀아닌 비밀이랄까?



사람은 돈 앞에서 약해지기 마련이다. 예상 제작비용을듣는 순간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왜 이렇게 돈을 많이 주는거지? 큰 기업은 통이 커도 너무  크다면서 김칫국을 시원하게 마셨다. 두둑해진 통장은상상하기만해도 짜릿했다. 그러나 곧 내가 제작해야 할 영상의 분량을 보고 그 금액을 이해할 수 있었다. p 075



결론이 나왔다. 내가 하면 안되는 일이다. 아무리 큰돈이 욕심나도 이건 아니었다. 정해진 일정까지 납품하지 못해 계약불이행으로 법정에 선 내 모습이 눈 앞에 스쳐 지나갔다. 이 불행한 상상이 상상만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p 076



하, 돈 앞에서 약해지는건 만고진리 불변의 법칙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회사를 때려치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모름지기 내가 하고 싶은 일이란, 언제나 가변성이 있고, 지금 내가 회사에서 받는 월급만큼 벌 수 있을지 알수 없는 모험이다. 나 뿐만 아니다. 이는 회사를 때려치고 새로운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 아주 무섭디 무서운 망령과도 같다.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을 포기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해서 성공한 사례가 많기라도 하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꿈을 찾아 도전이라도 해볼텐데, 현실의 성공사례는 아주 극소수다. 대부분이 실패의 연속일뿐. 그래서 내가 계속 이 회사에 묶여서 1n년째 노예아닌 노예생활중인 것이다.




 



 과거 부모님 밑에서 살때는, 이 노예생활이 그렇게나 지겹고 싫었는데 말이다. 내 가정을 꾸리고 나니, 이 노예생활이 얼마나 다행인지. 휴. 노예생활 덕분에, 매달 정기적으로 내 통장에 찍히는 월급덕분에 나는 내 집 대출금을 꼬박꼬박 갚을 수 있고, 각종 공과금을 낼 수 있고, 내 가족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다. 



뭐, 노예생활이면 어떠하리. 내 가족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토대만 되어준다면, 앞으로 몇년은 더 노예생활을 할 수 이..ㅆ.....읍읍^_T...



나는 자주 불안하다. 편안한 와중에도 한 구석에는 불안이 자리했다. 그래서 궁금했다. 나는 왜 이렇게 불안할까. 무엇이 나를 이렇게 불안하게 만들까. p 139



불안은 대체로 나쁜 것으로 치부되어 하대당한다. 그래서 나도 불안을 싫어했다. 불안이 엄습할 때면 왜 자꾸 쫓아오냐고 밀어냈다. 하지만 불안이없었다면 얻을 수 없던 것들이 내게는 너무 소중했으므로 불안을 끌어안기로 했다. p 140



살아가다보면 뭔지모를 불안감이 엄습해올때가 있다. 굳이 멀리서 찾지 않아도, 회사생활 중 뭔가 께름칙하거나, 왠지 뒷맛이 구린 그런 일들은 퇴근후에도 계속 날 따라다니곤 한다. 그런 날에는 꼭 악몽까지 꾼다. 회사에 갓 입사했을 때 유독 심했다. 입사한지 얼마 안되다보니 일이 설었고, 심지어 선임자라는 사람은 내가 입사전에 이미 퇴사한 뒤였기에, 진짜 모든 일을 내 스스로 알아서 배워야만했다. 덕분에 입사 1~2년간은 불안감이 없던 날이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하지만 그 불안감 덕분에 난 생각보다 유능한(?) 직원이 되고야 말았다. 그때서야 알았다. 난 내가 생각한 것보다 완벽주의를 지향했던 사람이었음을.







집에만 있으면 ‘될대로 되라~’라는 식의 마인드가 날 지배했는데, 이상하게 회사에만 가면 모든지 ‘완벽’해야하는 이상한 마인드. 그 덕분에 어느새부터인가 난 회사에서 해결사가 되어있었다. 하, 회사에선 눈칫껏 못해야하는데, 사회초년생인 시절의 나는 그 사실을 1도 몰랐다. 덕분에 1n년간 내 업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는건 안 비밀^_T.....



적당안 안정감과 불안감이 나에게 필요하다. 그리고 그 균형을 맞추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잘해내고 싶은 진심 어린 마음이 불안을 만들어낸다. 나는 그 불안에 응답하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내 옆을 지키고 있는 불안 덕분에 부지런이 움직이고 있다. p 141



뭐, 요점은 그거다. 불안감 덕분에 내 스스로가 성장할 수 있었다는 점. 과한 불안감은 내 삶을 망가뜨릴 수도 있지만, 적당안 불안감은 나를 채찍질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내 하루 일과에 지장이 줄 정도의 불안감이라면 떨쳐버리는게 맞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의 동행자로써 함께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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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 흔들리는 나를 일으켜 줄 마음 처방전
오왕근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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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입덧지옥 3개월을 지나니, 이제야 좀  주변을 둘러볼 틈이 생겼다. 정말 이 3개월간은 그 어떤 책도 읽기가 넘 힘들었다. 그나마 기존에 서평의뢰를 받은 책만큼은 어떻게든 읽어내리려 애썼고, 정말 더럽게 힘들었다T_T. 이후에는 앉아있기조차도 넘 힘들어서 서평의뢰를 1도 받지 않았다. 그래도 정말 시간이 약인지, 진짜 3개월이 지나니 어느정도 수그러들었고, 여유도 생겼다. 이제 슬슬 책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손에 집어 든 책이 내가 애정해마지않는 상상출판에서 출간된, 에세이 「운명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였다. 너무 늦게 읽은 감이 없진 않지만, 어떡하겠는가. 내 커..컨디션이...크흡ㅠㅠㅠㅠ



어떤 에세이든 저자의 이력을 보게되곤 하는데, 이 책의 저자는 이력보단... 띠지에 실려있는 얼굴이 꽤나 낯이 익었다. 알고보니 여러 방송에 출연한 사람이었는데, 뭐 그 중에서 내가 봤던 방송이라고는 #놀면뭐하니 (유느...♡)하나. 그러니까 저자는 흔히들 말하는 무속인이라는 업을 가진 사람이었다. 꽤나 신선! 그도 그럴것이 난 우리나라 전통신앙을로써의 무속을 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내가 점을 보러간적은 1도 없지만, 하하하. 하지만 생각보다 가짜무속인이 판치는 세상에서, 그와 관련된  사건사고도 많이 발생하는 요즘인지라 모든 무속인을 다 믿을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그래서 난 세상에는 가짜 무속인 99%와 진짜 무속인 1%가 있다고 믿는다. 이 책의 저자는 그 1%의 무속인이길 바라며, 이 책을 읽었다.



당신에게 사주팔자의 한계에 갇히면 안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운이 안 좋으면 더 많은 노력을 하되 매사에 더 신중하고 조심해서 일을 처리하면 된다. 사주가 안 좋아서 평생 고생한다는 말을 들으면 큰 욕심을 부리지 말고 가진 것에 만족하고 살면 먹고사는 문제는 걱정 없을 것이다. 모든 일은 내 안의 욕심과 화로 인해 문제가 생긴다. p 21



어려서부터 사주팔자 한번 쯤은 보고 싶었으면서도 보고싶지 않았다. 결국 3n년간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점집, 철학관, 타로카페 등 미래를 봐준다는 그런 곳은 단 한번도 가본적이 없다. 분명 엄청 궁금한데, 가고 싶지 않은 그런 너낌적인 너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을 지도 모른다. 만약 점을 보러 갔는데, 부정적인 답변을 받았다면 그 이후의 내 삶에.... 그 부정적인 이야기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을테니까. 반대로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도 그렇다. 굳이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잘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인해 역시나 내 삶에 악영향을 끼치는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고로 나는 점을 보러 가지 않는다.



‘사주팔자의 한계에 갇히지 마라’



근데 놀랍게도, 무속인인 저자가 내가 우려하는 부분을 콕 집어주었다. 놀라운 이야기! 보통 사건사고를 일으키는 가짜무속인(?)들은 돈을 더 요구하며 미래를 좋게봐주겠다는 등 그런 감언이설로 속이는 경우가 많던데(흔한 그알 애청자1), 저자는 정반대였다. 오래전, 마을마다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던 진짜 무속인들의 모습이 저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누군가 나에게 사람을 가려가면서 보냐고 따지듯이 물은 적이 있다. 당연하다. 나는 사람을 가려서 본다. 인연법이 없는 자가 잘못 들어오면 아홉의 선량한 목숨들이 구제받지 못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마찬가지다. 당신도 사람을 가려 사귀면서 대인관계를 맺어야 한다. 사람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가장 해롭다. p 048



와, 따지고보면 무속인이라는 직접도 어디까지나 서비스업이고 사람을 상대하며 돈을 버는 업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님을 가려 받는다는 이야기는, 저자는 돈을 벌기위해 무속을 업으로 삼았다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생각보다 돈을 많이 들고오는 손님들도 그냥 돌려보내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러한 마인드난 ‘돈’이면 다 될거라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느낌이랄까?



무엇보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 사람을 가려 사귀라고 조언하는 저자의 마음이 확 와닿았다. 당장 오늘만해도, 난 핸드폰을 들어서 여러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싹 지우고, 카톡에서도 차단했으니 말이다. 마음같아선 핸드폰번호를 싹 바꾸고, 진짜 내 사람들 몇몇이랑만 연락하며 살고 싶은데, 휴. 그건 일단 퇴사 이후에나 가능한 일인걸로...



인생은 순간이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나도 없고 상대도 없다. 소중한 존재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두 변해버리고 만다. 자식이 대학에 합격해야만 행복한 것일까? 반드시 아파트를 사고 원하는 회사에 취업해야만 사는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 꿈을 이뤄가는 과정에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고 순간을 즐길 수 있다. p 168



‘인생은 순간이다.’



진짜 오백프로 공감한다. 살기가 너무 팍팍하고, 삶이 너무 힘들고, 내집마련하기가 너무 어려운 지금의 현실. 이 현실 속에서 ‘나’는 사라지고, 오로지 눈 앞의 목표를위해 열씸히 노력하고, 아둥바둥하며 사는게 요즘 사람들의 삶이다. 하지만 그 속에 ‘내’가 없다면, 과연 무슨의미가 있을까 싶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분명한데, 그 과정에서 ‘나’는 사라진 그 느낌. 내 삶속에서 내가 사라졌기에, 그래서 현대인들이 번아웃이 자주오는건가 싶기도 하다.



과거의 우리 부모님들은 본인들의 삶을 희생하며, 자식을 키웠다. 그래서 난 항상 부모님께 감사하고,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듣는 것도 사실이다. 거기에 더해 안타까움도 있다. 분명 내 엄마도, 아빠도 본인들의 삶이 있었을 건데, 나와 동생을 키우느라 그 삶을 온전히 영유하지 못한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모든 부모들은 내 삶은 뒤로하고, 자식을 위해 사는것이 맞는것일까? 하는 그런 의문이 요즘들어 더더욱 많이 든다. 나는 내 새끼가 나오면, 우리 부모님이 그러하였듯 내 삶은 뒤로 한 삶을 살게 될까? 누구의 엄마이기 전에, 온전히 내 이름으로 불리는 삶을 살고 싶은데 말이다.



앞으로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할지는 온전히 내 몫이기에,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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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다시 제주였으면 좋겠어 - 그림으로 남긴 순간들
리모 김현길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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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이 얼마만의 여행에세이인가. 심지어 예전에 읽었던 『혼자, 천천히, 북유럽』(아래 리뷰!!)의 저자가 펴낸 두번째 에세이다. 시중에는 여행에세이도 워낙 많기에, 이 책을 그저 코웃음 치고 스쳐지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진짜 후회할지도 모른다. 이 저자의 여행에세이는, 다른 여행에세이에서는 볼 수 없는, 단연 돋보이는 매력포인트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름하야 여행드로잉.



보통 여행에세이라면 저자들이 찍은 여행사진이 반 이상을 할애하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다. 그 흔한 사진 한장 없다. 대신, 사진보다 더 많은 여운을 담고 있는 수 많은 그림들이 담겨있다. 그렇다. 저자의 여행방법은 바로 그림이다. 언제 어디서든 종이를 꺼내 그림을 그리는 것. 이게 바로 저자의 여행방법이고, 여행지를 마음속에 담는 방법이다.



앞서 읽었던 북유럽 여행에세이도 좋았지만, 이번 여행에세이 『네가 다시 제주였으면 좋겠어』는 꼭 한번 읽어보았으면 하는 책이다. 솔직히 북유럽은 아직 안가본 사람이 더 많다. 심지어 요즘 같은 시국에 해외여행은 언간생심이다. 하지만 제주도는 다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번씩은 가보았을 제주도다. 수학여행이든, 신혼여행이든, 우정여행이든, 가족여행이든, 그 어떤 이유로든 말이다. 심지어 2년째 이어지는 코로나 시국임에도,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가는 여행이 허락되는 곳은 유일하게 제주도, 한 곳이다.



그런 제주도를 저자는 화폭에 담았다. 저자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방문했던 그 곳이 아주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사진으로보는것보다 더 선명하게. 그날의 기분까지도.






사실 북촌리는 제주 4.3사건의 상흔이 깊은 마을 중 하나다. 1948년 12월 16일 군경에 의해 24명의 주민이 희생된 것을 시작으로 이곳에서만 5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마을 인구가 약 1,500명이었다고 하니, 마을 사람 셋 중 하나는 죽음을 피하기 어려웠던 셈이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사람들은 강요된 침묵 속에 가족을 잃은 슬픔마저 가슴에 품고 살아야 했다. p 047



제주 북촌은 나에게 제주 4.3의 잔혹성을 느끼게 했던 곳이다. 너븐숭이에서 시작해서 서우봉까지 이어지는 제주 4.3 학살의 흔적. 특히 너븐숭이에는 제주 4.3 당시에 덧없이 스러져간 어린 생명들의 애기무덤이 남아있다. 학살한 그들은 제주도민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고한다. 나는 그저 학살대가 ‘도민들을 잔혹하게 죽였구나’ 정도로 막연하게 생각했더랬다. 헌데, 북촌 너븐숭이에서 본 애기무덤을 보는 순간 모든 사고가 정지했다. 그저 ‘잔혹하게 학살했다’라고 쉽게 말하기엔, 너븐숭이에 있는 애기무덤들이 눈에 아른거린다.




너븐숭이를 지나, 해안선을 따라가면 저자가 그린 북촌포구를 만난다. 북촌포구 왼쪽에는 서우봉이 있다. 제주 4.3당시 북촌 너븐숭이 일대와 바로 이곳 북촌포구 및 서우봉 모두 학살의 현장이었다. 특히 서우봉은 제주 4.3이 일어나기 훨씬 전,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해안동굴진지를 수십곳이나 파놓은 곳이기도 하다. 물론 동굴진지를 직접 만든사람들은 단연코 강제징용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파란물결 넘실대는 북촌포구, 하지만 해방 이전의 아픔과 해방 이후의 아픔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김녕리는 섣불리 해안도로를 개발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마을안의 올레길이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미로처럼 구불구불 뻗어 있는 골목길을 걷는 즐거움이 남달랐다. (……) 마을ㅇ의 길은 해안선을 따라 이어져 곧 김녕성세기해변에 닿았다. 터키석을 갈아 넣은 듯 아름답게 반짝이는 바다와 눈부신 하얀모래, 그리고 이것들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짙은 갯바위의 조화가 가슴을 뛰게 했다. p 052 ~ 054



제주에는 아름다운 해변이 많지만, 그 중에도 한 곳을 꼽으라면 난 단연코 김녕 성세기 해변을 꼽을 것이다. 부모님을 모시고 제주에 처음 갔을 때, 우연하게 들렸던 성세기 해변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우리가족은 그곳에서 수 많은 사진을 찍었다. 당시에는 한평(?)짜리 카페인 쪼끌락에서 김녕라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그로부터 몇년 뒤 신랑과 둘이서 다시찾은 김녕 성세기 해변은 부모님 모시고 갔을 때와는 조금 달라진 느낌도 없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움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제일 큰 변화는 카페 쪼끌락이다. 대규모 카페가 되어있었다. 사장님이 돈을 많이 벌었나봐...!





제주도 바닷가 마을에서 여자는 곧 해녀였다. 가난에 지지 않기 위해서는 여린 몸을 이끌고 거친바다로 나가야 했다. 가까이는 경상도와 전라도로, 멀리는 대마도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원정 물질을 나갔다. 1920년에 해녀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해녀 어업 조합’이 탄생되었지만, 일본인이었던 제주도사(현 제주도지사)가 조합장을 겸임하게 되며 오히려 수탈 기관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p 082




제주는 단연코 여자, 그러니까 해녀들이 많든 섬이다. 



생계를 책임지던 제주 남자들은 조선시대에 귤 진상과 전복 진상에 시달리다 섬을 떠나갔다. 남자는 떠나갔지만, 가족은 제주 섬안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제주 남자가 떠나가니, 남은 가족을 먹여살리는 사람은 제주 여자들이 되었다. 제주 여자들은 바다속에 들어가 물질을 하며 가족을 먹여살렸고, 제주를 먹여살렸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가 들어서도 여전했다. 제주는 해녀들이 먹여살렸다. 하지만 일제강점기가 어떤 시대인가. 사람까지도 수탈되던 시대이다. 일본인들은 제주 해녀들도 핍박했고, 제주 해녀들이 물질해온 해산물도 수탈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당할 제주해녀들이 아니었다. 거친 물살과 함께 살아온 그들이다. 그들은 들고 일어났다. 1932년 최초로 제주 해녀들의 항일운동이 일어났다. 



제주  하도리는 해녀들의 항일운동 역사가 숨쉬는 장소인 것이다.






아름다운 이곳도 현대사의 아픔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제주 4.3 당시 성산읍에는 악명 높은 서북청년단의 특별 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성산읍을 비롯하여 세화, 하도, 종달리 등에서 억울하게 잡힌 주민들을 터진목 인근에서 총살했다. 비뚤어진 맹목적 이념은 이처럼 거대한 비극을 만들어냈다. p 104


성산일출봉, 터진목, 광치기해변으로 이어지는 해안길. 해안 드라이브코스로도 각광받는 곳이며, 관광지로도 핫한 장소다. 저 세곳을 다 가지는 못했더라도, 하다못해 성산일출봉만은 찍고 왔을 것이다. 그 정도로 유명한 장소이다. 하지만 이 장소들 모두 제주 4.3의 광풍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저자가 말했듯이 이 장소는 모두 학살의 장소였다. 



성산에서 터진목으로 가는 해안도로 옆, 인적이 드물고 수풀이 우거진 그 곳에는 ‘제주 4.3 양민 집단 학살터 표지석’이 세워져있다.



그리고... 위 책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성산일출봉 헤안절벽에는 일제강점기 당시에 만든 해안진지가 지금도 남아있다. 성산일출봉 주차장 인근은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다. 



이곳에서 자라나고 있는 동백을 흔히 ‘토종 동백’이라 부르고 있지만, 정작 이 관목의 학명은 Camellia Japonica다. 한국에서 자생하는 식물에 일본의 국가명이 포기된 까닭을 이상하게 여길 수 있다. 관목의 학명이 Camellia Japonica가 된 이유는 17세기에 일본을 방문했던 독일 태생의 식물학자 엥겔베르트 캠퍼의 보고 때문이었다. 그는 독일로 돌아가 서양인 최초로 일본에서 보았던 동백나무에 대한 묘사를 했다. 이것이 1753년에 스웨덴의 식물학자인 칼폰 린네가 동백나무의 학명을 명명하게 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p 136


겨울에 제주를 갔다면 꼭 봐야할 것이 있으니, 바로 동백군락지다. 지금까지 화분으로나 봐온 동백과는 정말 차원이 다르다. 나 역시 위미리 동백군락지를 가서, 동백나무에 에워쌓여있자니 꼭 동화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그런데...! 동백의 영어명이 카멜리아라는건 알았는데, 그 뒤에 자포니카가 붙는다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았다. 



동백은 제주에 널리 분포되어있지만, 바다 건너 일본에도 동백이 있는데, 푸른눈의 서양 식물학자들이 17세기에(그러니까 1600년대) 일본에 있는 동백을 먼저 보았기 때문에 학명에 자포니카가 붙었던거란다. 서양 식물학자들이 일본에 가서 동백을 보았던 동시대에, 우리나라에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조선은 서양인에 대해 매우 보수적이었다. 아니, 배척했다고 해야하나. 그러니 서양 식물학자들이 조선에 와서 동백을 보고 싶었어도,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전시관은 1653년에 네들란드 상인 헨드릭 하멜이 일행들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할 당시 타고 온 스페르웨르라는 이름의 배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하멜은 난파된 이후 15년이 지난 1668년에야 네덜란드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귀국 후 그가 쓴 <하멜표류기>는 한국의 지리, 풍속, 정치, 군사, 교육, 교역 등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 되었다. p 282


위 동백 이야기와 조금 연결되는 지점이다. 서양 식물학자가 일본에서 동백을 보았던 그 시기에, 제주도 그러니까 조선의 탐라에도 서양사람이 들어왔다. 그 유명한 하멜표류기의 ‘하멜’이다. 우리나라는 하멜이 유럽에 최초로 조선을 알렸다고 과시한다. 제주 용머리해안에 있는 저 하멜전시관에도 동일한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해서 난 하멜전시관을 갔을 때, 실망하고 또 실망했다. 조선을 유럽에 최초로 알렸다는 사실, 그거 하나 자랑하려고 저 큰 전시관을 만든 것인가? 정말 그뿐인가? 하멜표류기를 잘 따져본다면, 조선에서 하멜일행을 어떻게 대우했는지를 본다면, 저거 하나 자랑하자고 저 큰 전시관을 세우는데 막대한 돈을 쓴 것이 그저 어리석어보일 뿐이다.



당시 하멜은 일본으로 가고 있었는데, 좌초되어 제주로 오게된 것이었다. 하여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조선은 거부했다. 조선땅에 들어온 외국인은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게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우연이라도 조선에 들어오면 고향으로도 돌아가지 못하는 외국인들. 그렇다면 조선은 외국인이 가지고 온 서양 문물을 흡수해서, 나라를 발전시킬 생각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조선에서 서양인들은 그저 푸른 눈의 원숭이였을 뿐이었으니까. 심지어 하멜일행은 조선에서 강제노역을 하고, 다른 죄인들처럼 삼남지방 곳곳으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 약 13년간 하멜일행은 조선에서 온갖고초를 겪었고, 그 중 살아남은 일부가 겨우 빠져나와 원래 목적지였던 일본으로 도망갈 수 있었다.



일본에 도착한 하멜일행은, 일본 관리들에게 많은 질문을 받았다. 질문의 대부분은 조선의 국방, 식량, 문화재등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2백년뒤 일본이 조선에 처들어오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된다.



나는 제주도 여행이 정말 좋다. 그저 관광지로써만 좋은게 아니다. 만약 관광지로써만 좋았다면 제주를 두번, 세번 찾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저자도 그랬을 것이다. 물론 제주 풍광이 너무 이뻐서, 그림그리기에도 이만한 곳이 없다지만, 그저 이쁘기만 했다면 저자가 이토록 제주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제주는 아름다운 풍광만큼, 그 속에 서로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에 저자도 나도 제주를 사랑하는게 아닐까.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제주로 떠나고픈 마음이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니. 내년에 날 좋은 날에 제주로 날라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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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0-22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다 가본 곳. 다시 또 여러번이라도 가보고 싶은 곳. 그것도 드로잉에다 ! 당장 담아갑니다
정성들인 리뷰에 좋은 여행에세이 소개 고맙습니다 ^^
 
꼭대기의 수줍음 매일과 영원 3
유계영 지음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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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책을 읽을 때 출판사를 유심이 보는 편이다. 우연히 읽었는데 마음에 드는 책이라면, 그 책을 출판한 출판사의 다른 책들도 한권, 두권 읽어보다가 어느새 내 책장의 한켠을 가득 채우기도 한다. 반대로 정말 마음에 안드는 책이라면(특히 역사왜곡이 들어간) 그 출판사의 다른 책들에 눈길한번 주지않는다. 베스트셀러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의미에서 민음사는 전자에 속한다. 민음사 책을 몇권 읽어보진 않았으나, 이런 책을 출판했다면 믿고볼수 있는 출판사라 생각했다. 다만, 민음사는 내가 즐겨있는 장르와는 조금 다른 문학쪽 출판사다보니, 민음사 책을 읽을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을뿐^_T 그래도 민음사에서 나오는 에세이(또는 수필) 류는 내가 즐겨 읽는 장르 중 하나다보니, 이렇게 또 한번 민음사의 책을 읽을 기회가 생겼다.



이 에세이의 저자는 시인 유계영 이라고 한다. 현대 시인이라고는 나태주 시인님밖에 모르는 나로써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뭐 어떠한가. 나는 시를 읽으려고 이 책을 읽은게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이 녹아든 에세이를 읽으려했던 거니까.



여러사람들 틈에 있을 수록 나는 납작해진다. 변기의 용도는 유일할 것 같지만 의외로 쓰임이 다양하지. 자발적이거나 비자발적으로 혼자가 된 사람들이 변기 뚜껑 위에서 도시락을 먹기도 한다던데. 나는 가끔씩 변기에 앉아 우는 사람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시간이다. p 017



맞다. 우리집 화장실에 있는 변기는 그저 변기일 뿐이지만, 사회에 나가서, 회사 화장실에 있는 변기는 그저 변기가 아니게된다. 저자가 말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시간’이 바로 변기위에서 시작되니 말이다. 사회초년생들이 한번씩은 거쳐갔던 변기위의 그 시간이, 아주 당연하듯 나에게도 있었다. 그때는 뭐가 그렇게 서럽던지. 회사 화장실에 들어가서, 변기위에 앉아서 울었던 적이 있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다. 어른처럼 보이던 회사 언니들이 서럽게 우는 소리를 들었던 적도 있었다. 



저자가 그랬다. 되도록 소리내어 울음으로써, 누군가가 이 울음소리를 듣고 자신을 연민의 눈초리로 봐주었으면 한다고. 나역시도 그랬고, 회사언니들도 그랬듯이 그때는 정말 서럽게 울었다. 내 잘못이 아닌데 왜 내가 이런 대우를 받아야하는지, 내 우는 소리를 듣는 누군가가 알아주었으면 했던 그 마음. 물론 지금이야 눈물이 메말라서, 누가 뭐라그러면 기계적으로 웃으며 ‘네네~’ 하고 뒤돌아버리거나, 그건 내가 한게 아니라고 되받아치는게 아주 당연한 일상이 되었지만, 그때는 그게 그렇게 서러웠다.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저들은 왜 나를 함부로 대할까 생각하다가, 그래서 나는누굴까 생각하다가,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남이 나를 알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나 싶다. 산다는 것은 사람들을 오해하고 오해하고 또 오해하다가, 신중하게 다시 생각한 뒤에 또 오해하는  것이라던 말이 생각난다. 내가 나인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나는 내가 얼마나 소중하기에 아무것도 참을수가 없을까. 나를 가리려고 직접 골라 쓴 가면을 물끄러미 본다. 자기 자신의드라마를 위해 조금도 화를 참지 않는 낭만주의자가 겸연쩍은 얼굴로 거울을 보고 있다. p 018



책을 읽다보면, 그런생각을 자주 한다. ‘저자는 왜 이런 이야기를 썼을까? 무슨 의도일까?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이길 원하는걸까?’ 이런 류의 생각말이다. 어렸을땐 안그랬던 것 같은데, 역사책을 자주 읽게되면서(특히 역사왜곡하는 사람들의 책 포함해서)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점점 관심을 갖게되었달까? 문제는 굳의 의도를 파악할 필요 없는 가벼운 글들이나, 힐링을 위해 읽는 에세이나 수필집을 읽을때도,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래도 대체적으로 ‘아! 이런 의도인걸까?’하는 나만의 답을 내리고는 하는데, 이 에세이는 도무지 모르겠다. 근데 막 의도는 모르겠는데, 묘하게 글의 흐름이 친숙하다. 뭐랄까. 생각에 꼬리를 물고 물어 흘러가는, 이른바 의식의 흐름..? 내가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하는 경우가 정말 많은데, 저자는 그 의식의 흐름을 말이 아닌 글로 옮긴 느낌이랄까. 아, 어쩐지 뭔가 친숙했어. 이런 글.....!!



처음에는 달리는 말을 보고 싶었던 거다. 거르나 이 땅에서 질주하는 자유를 누리는 말은 거의 없을 것이다. 경주마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든 지옥에서 쉴새없이 달려야 하는 말 또한 있을 것이다. 몇 해 전 경주에서 꽃마차 끄는 말이 쓰러졌던 사실이 떠올랐다. 학대로 쓰러진 검은 말이 재작년에 죽었다. 죽은 말과 두 마리의 말들이 더 구조되었다. 구조 이후 다른 삶을 살게 된 말들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 또한 말들에게 고통이라면, 꽃마차가 사라진 거리라도 직접 보고 싶었다. 아무리 포개도 자양이 되지 않는 슬픔을 좀 덜기 위해서. p 034



뭐라고해야하나, 이 에세이를 읽다보면 저자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무언가 눈에 딱 틀어왔을때, 그 무언가에 대해 생각이 꼬리를 물고 물어질것 같은, 꼭 나와 같은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다. 



과거에 해미읍성에 놀러갔다가, 한켠에 주차(?)되어 있던 꽃마차가 있었다. 꽃마차. 꽃으로 장식된, 말이 이끄는 수레다. 한마디로 그 꽃마차 앞에는 끈으로 고정되어있던 살아있는 말 한마리가 있었다. 그 말의 눈을 들여다보았는데, 어찌나 슬퍼보이던지. 심지어 간신히 서 있는 듯한 모습의 말이 그렇게 불쌍해보일 수가 없었다. 더 슬픈건, 그 때 그곳은 비가 오고 있었다.



꽃마차와 말. 누군가의 눈에는 해미읍성을 방문한 관광객을 위해 비치된 일종의 관광상품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말이 비를 맞고 있던 말던, 건강하던 말던 아랑곳하지않고, 오로지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역할만을 시켰을 것이다. 간혹 지나가던 관광객들이, 나 처럼 말이 가엾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우리는 그 말을 구할 수 없고 구할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 말은 누군가의 사유재산일 것이고, 누군가의 사유재산에  관여한다는 것은 내가 그 사유재산을 다시 웃돈주고 사오거나, 아니면 그저 옆에서 말만하는 오지랖일테니.



결국 나는 해미읍성 한켠에, 꽃마차와 함께 묶여있던 그말을 동정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딱 거기까지었다. 그 말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인간의 욕심에 희생되는 가엾은 동물들이라는 생각만, 말만 한 또 다른 이기적인 인간이었을뿐이다. 



단지 앞에 회오리감자 푸드트럭이 와서 사 먹으러 갔다. 트럭 앞에 서 있던 여자가 강아지 호두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이지만 나는 이럴 때 좀 화가난다. 사람은 사람만 보려고 한다. 이 세상에 사람만 정당하게 존재하는 줄 안다. 눈 앞에 확보된 세계가 세계의 전부인 줄 안다. 동물에게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달라! p 050



에세이를 읽는 내내 저자는 동물에 우호적인 사람이구나 싶었는데, 역시나! 물론 저자의 말처럼 동물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야하는 건 당연하다고 본다. 해미읍성 한켠에 묶여서 오도가도 못하는 그 말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런데, 위의 저자의 에피소드를 무작정 편들수만은 없다.



푸드트럭앞에서 저자의 강아지를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란 여자를 비판하는듯 써내린 저 글, 저 글은 오롯이 애견인의 입장만 생각하고 쓴게 아닐까? 누구나가 애견인들처럼 강아지를 좋아하고 사랑하지는 않는다. 나 역시 어렸을때 커다란 진돗개에 물린 경험이 있기에, 내 앞에 어린 강아지가 있다면, 일단 멀찌감찌 떨어진다. 저자의 강아지를 보고 놀란 그 여자는, 나처럼 개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은 아닐지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어땠을까.



당장 내가 사는 단지를 보면, 세상에세상에 개반 사람반이다. 산책을 하러 나가면 정말 여기는 큰개, 저기는 작은 강아지 난리도 이런 난리가 아니다. 물론 그 개들을 산책시키러 나온 사람들이, 개티켓을 잘 지켜준다면 나도 할말은 없다. 그런데 왜때문에, 목줄(또는 몸줄)이 없이 개 혼자 저 앞에 걸어가고 개주인은 뒷짐지고 슬렁슬렁 걸어가는걸까. 자기 개가 화단에 큰일을 치루면, 그걸 처리하지않고 그냥 무시하고 가는걸까. 심지에 엘레베이터 안에서 개를 바닥에 두고, 사람을 보고 짓든 말든 신경쓰지않는 견주들을 보면 나는 이런사람들을 보면서 ‘개가 개를 키운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개를 키우는 사람들이 다 그렇다고 일반화를 하진 않는다. 개통령처럼 개와 사람이 어떻게 공존하며 살아가는지, 개에 진심인 사람이 있는지도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심지어 개통령의  바이블을 따라, 사람과 공존할 수 있게 개를 키우는 사람들도 정말 많다. 물론 개의 입장에서 보면 수많은 통제로 인해 힘들겠으나, 사람과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으니.



하지만, 저자의 저 글은 묘하게... 저자의 개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물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는다는 일반화를 하는 것 같다. 내가 아무리 강아지를 무서워해도, 내 뒤에 누군가의 강아지가 있다면 놀라지말고 꾹 참으라고 하는 듯한 뉘앙스. 내가 좀 과하게 생각한걸지도 모르지만, 그냥 좀 그렇게 느껴진다. 내가 개를 안키워서 그런가....^_T..





이 에세이는 나에게는 묘하게 친숙하면서, 묘하게 달랐다. 많은 생각을 하게 했고, 어떤 생각은 저자와 비슷했지만, 또 어떤 생각은 저자와 대척점에 있기도 했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분명 저자는 시인이랬는데, 나와 닮으면서도 닮지않은 이 사람의 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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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11-07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1일 1페이지 조선사 365 - 읽다보면 역사의 흐름이 트이는 조선 왕조 이야기
유정호 지음 / 믹스커피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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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에 “1일 1페이지~어쩌구~” 하는 수많은 장르의 책들이 정말 많다. 이런 책들은 대게 얉고 넓은 지식을 표방하는 교양서라 읽지는 않았다. 내 개인적으론 얉고 넓은 지식보단, 깊고 좁은 지식을 추구하는 책들을 좋아하니까. 하지만, 예외도 있는법. 이번 신간도소에 『1일 1페이지 조선사365』라는 책이 보였다. 볼까말까 살짝쿵 고민했으나, 아무래도 조선사니까. 음 조선사니까! 대체 어떤 이야기로 1페이지씩 분량을 할당했을까 궁금했다. 무엇보다 요즘 나오는 조선사 책은 어떤 기조로 서술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책을 읽어본 결과, 각 페이지별 레이아웃 구성도 괜찮았고, 내용구성도 정사와 야사를 적절히 섞어서 서술한 것이 나쁘지 않았다. 특히 정사와 야사를 명확하가 구분해준 점은 칭찬받아 마땅하다고나 할까. 특히나 학교에서 배우는, 학생들 (국사시험제출빈도 높은) 내용들도 거진 포함되어 있었다. 


책을 서술한 시각도 한쪽으로 치우쳐지지 않은 것 같아서 꽤나 만족스러웠다. 과거에 나온 조선사 책들은 대게 조선의 밝은 점을 부각시키고, 어두운점은 축소하거나 생략한 경우가 많았으니까.




내용면에서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예컨데 태종재위기에 쓰여있는 이야기에 ‘이 정책은 조선후기에 이런식으로 변한다’ 라고 기록되어있다면, 조선후기에 넘어왔을 땐 ‘조선 전기에는 이랬던 정책이 이렇게 변했다’ 라는 식의 중복되는 부분이 꽤 있었다는 것. 근데 뭐, 이건 역사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 어쩔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1페이지에 꽉꽉 채워넣다보니 글자 크기가 좀 작다^_T...




조선은 정말 민본의 나라였나?


조선은 ‘위민/민본국가’를 자처했던 나라다. 한마디로 조선이란 나라는 백성을 위한, 백성이 근본인 나라인 것이다. 하지만 조선 백성들의 실상을 본다면, 정말 조선이라는 나라가 백성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 아니 노력이란걸 하긴 했는가 싶은 의구심이 들곤 한다. 어쩌면 조선이 말하는 백성은 모든 백성이 아닌, ‘양반’에 한정된건 아닌지? 하고 말이다.



양인의 수가 많아질수록 세금과 군인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만큼, 태종은 아버지의 신분을 따르는 종부법을 시행했다. 당시 양인이 천민을 첩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기에 종부법의 실행으로 양인의 수는 많이 증가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자 세종은 종부법을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는 종모법으로 환원시켰다. p 029



조선시대는 노비 매매도 문제였지만 주인이 노비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주인은 노비를 죽여도 관청에 보고만 하면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중종 때 홍언필의 처 송씨는 홍언필이 여종의 손을 잡은 것을 목격하고는, 여종의 손을 잘라버렸다. 홍언필이 또 다른 여종과 잠자리를 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여종에게 심한 매질을 하고 빗으로 얼굴을 긁는 폭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송씨는 국가로부터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의지와 기개를 겸비한 여장부로 평가받았다. p 030



그와중에서도 조선의 노비는 숨을 쉬는사람이었으나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사고파는 재산이었다. 그럼 태어날때부터 노비는 노비였을까? 이에대한 답이 태종 때 종부법과 세종 때 종모법이다. 세종때 종모법은 이후로 조선 사회를 쭉 관통한다.



종부법은 아비의 신분을 따라서, 종모법은 어미의 신분을 따라서 자녀의 신분이 정해진다. 고로 아비가 양반이면 엄마가 노비여도, 자식은 양반이라는 이야기. 하지만 세종이 환원시킨 종모법은 어미가 노비면 아비 신분상관없이, 자녀는 무조건 노비가 된다. 세종이 종모법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나, 결국 종부법으로 바뀌었던 신분제를 종모법으로 다시 환원시킨건 세종이라는 이야기다.



세종의 종모법으로 환원시키며 조선 팔도에는 노비가 기하급증했다. 그 노비들은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으며, 그들은 조선에서 말하는 백성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양반들은 특권을 누리기 위해 과거에 응시하는 자격 조건으로 사조(증조부, 조부, 부, 외조) 안에 관직이 나간 인물이 있는지를 보았다. 만약 사조 안에 관직에 나간 인물이 없다면 현직 관료의 보증서인 보단자를 첨부토록 했다. 이로써 신분을 양인과 천민으로 나누었던 양천제가 신분을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구분하는 반상제로 변화했고, 결국 조선 중기 이후의 신분제는 폐쇄적 신분제가 되었다. p 041



조선 초기에는 ‘양천제’라고 하여, 사람의 신분은 ‘양인’과 ‘천민(예: 노비)’으로 구분되었다. 해서 ‘양인’이라면 신분고하 막론하고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능력우선’ 인재채용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양반’는 무엇인가? 과거에 급제에서 문신이 된 사람을 동반, 무과시험에 급제에 무신이 된 사람을 서반이라고 하였고, 이 동반과 서반을 아울러 말하는 명칭이 ‘양반’이었다. 즉 문신, 무신 관리들이 ‘양반’이었다.



하지만 물은 고이면 썩는다고 했던가? 능력으로 채용된 양반들이, 자신의 권리와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의 신분제도를 변화시킨다. 바로 ‘양천제’다. 기존 ‘양천제’는 양인과 천민으로 구분했다면, 저놈의 양반들이 만들어낸 신분제도 ‘반상제’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구분한다. 가끔 사극에서 나오는 ‘반상의 법도가 지엄한데!’ 라고 외치는건, 그 양반놈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사회를 망가트리며 만든 자기들만의 법도인 것이다.



‘양인’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던 과거도, 양인이 아니라 ‘양반’만 가능하게끔 바꿔버렸다. 조선 초기에는 개천에서 용 나는게 드물지 않았다면, 어느순간부터 조선에선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작금의 대한민국과 하등 다를바가 없는 사회가 된 것이다.



백성이 신문고를 울리면 의금부 당직청이 사연을 접수해 왕에게 보고토록 했다. 그러나 억울한 일이 생겼다고 아무나 신문고를 울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차적으로 한양은 주장관, 지방은 관찰사에게 억울한 사건을 고발해야했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사헌부가 문제를 고발하도록 했다. 이 과정을 모두 마치고 나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비로소 신문고를 울릴 수 있었다. (……) 신문고가 한양에 위치해 있어 지방에 사는 백성들은 사용하기 어려웠으며, 신문고를 울렸다 해도 약자의 처지에서 고발 내용을 제대로 입증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고발할 수 있는 내용도 조상을 위하거나, 남편을 위하는 일 등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p 045


 


백성의 고충을 듣기 위해 설치했다던 신문고, 그 신문고는 정말 백성의 소리를 들려주었을까? 정답은 ‘아니오’다. 실제로 신문고는 아무나 칠 수 없었다. 우선 신문고는 왕이 사는 궁에 있다. 그 어떤 (양반이 아닌)백성이 궁을 지키는 수문장을 다 물리치고, 궁으로 들어와 신문고를 칠 수 있었을까? 왕이 없는 저 먼 지방에 사는 백성들은,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백성들은 신문고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만약 신문고가 궁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나에게 신문고를 꼭 쳐야할 사연이 있다고 치자. 그래도 신문고를 바로 칠 수 없다. 신문고를 치기 전 거치는 단계가 한 두 단계가 아니다. 심지어 그 사연이, 신문고를 쳐도 되는 사연에 해당되는지도 확인해야한다. 신문고를 칠 수 있는 사연에 해당되는 것은 ‘유교국가 조선’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쉽게 그 답이 나온다. 나라(왕)을 위하거나/ 부모(조상)을 위하거나/ 남편을 위할때. 만약 신문고를 치고 싶은 사연의 주인공이 여성이라면, 그 여성의 사연이 위 세항목에 대한게 아니라면 택도 없다는 이야기다.



과연 누구를 위한 신문고였을까?



이쯤에서 현재 온라인에 존재하는 ‘국민신문고’를 생각해본다. 국민신문고는 정말 신문고 노릇을 하고 있는가? 조선시대의 그 신문고와 다를바가 없는 건 아닐까?



죽은자의 이야기(주자성리학)에 매몰된 조선 후기


그나마 조선 초기는 봐줄만하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아무리 유교국가를 표방한다 한들, 우리가 아는 꽉 막힌 조선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초기의 조선은 고려 때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기에, 여성에게도 나름대로의 자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게 바뀌어, 꽉 막혀버린 조선이 되어버린 시기가 있다. 9대왕 성종, 16대왕 인조다.


 


(조선 초기) 여성의 재혼도 가능했다. 태종은 배우자를 잃은 남녀가 재혼하는 것이 무슨 문제냐며 다시는 이를 문제 삼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혼을 문제삼는 상소가 계속 올라오자 성종은 <경국대전>에 재가하거나 절개를 못 지킨 여인의 아들과 손자, 서얼 자손은 문과, 생원, 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재가금지법을 만들었다. 이혼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성은 요구할 수 없었고, 남성만이 부모의 동의를 얻어 요구할 수 있었다. 이때 남성이 이혼사유로 내세운 근거는 칠거지악이었다. p 108



(성종 재위기)이 시기, 어우동과 간통한 양반들은 약한 처벌을 받거나 혐의 없음으로 풀려난 것과는 달리 어우동만 처형당한 것은 조선시대의 남녀 차별이 매우 심각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어우동과 간통한 사람중에 상민과 천민에게만 죄를 물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 115



조선 초기에는 여성을 천대시하지않았고, 무시하지않았다. 그렇다면 여성을 천대하는 문화는 언제시작되었을까? 바로 9대왕 성종때이다. 성종은 재위기에 여성의 재가금지법을 만들었다. 즉 남성은 재가를 해도 되나, 여성은 안된다는 이야기다. 이와 함께 성종의 모친인 인수대비는 <내훈>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여성의 지위를 격하시켰다. 



성종과 인수대비는 여성의 존재의 가치를 ‘남편을 잘 섬기는 것’, ‘시부모를 공경할 것’, ‘자식을 바르게 키우는 것(과거급제)’에 한정시켰다. 이후부터 조선의 여성은 온갖 차별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물론 과거에 비하면(해방이후) 많이 희석되었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조선 후기 정계에는 산림지사, 임하지인 등으로 불리는 특별한 존재가 있었다. 각 당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고 많은 제자를 둔 스승을 산림이라 불렀는데, 이들 대부분은 국가로부터 관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거부하고 재야에서 학문을 닦았다. 이들은 정치를 멀리하며 학문을 익혔으나, 순수한 학자는 아니었다. 산림이 붕당의 영수로 숭상받으며 많은 제자와 관리의 존경을 받는 만큼, 그들의 말 한마디는 정국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산림과 의견이 다르거나 산림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비난을 넘어 최악의 경우에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을 수도 있었다. (…) 효종은 북벌론을 시행하기 위해 산림 송시열, 송준길, 허목, 윤휴등을 중용하고 이들을 국정운영에 끌여들었다. 효종은 산림 송시열이 북벌론을 지지할 때는 탄력을 받아 전쟁을 준비했으나, 송시열이 반대하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를 알고 있는 숙종은 산림 송시열을 죽이는 강수를 두면서 산림보다 왕이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p 218



때는 인조 재위기. 인조는 정묘/병자호란을 겪으며 청나라에 머리를 숙였다. 인조와 그 신하들은 청나라에 졌으나, 진게 아니라는 정신승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친명사대주의와 ‘소중화’ 사상이다. 조선은 대(!)명나라를 이은 나라라는 뜻이다. 물론 명나라는 이미 청나라에 잡아먹히고 사라진 뒤다. 즉 조선은 오랑캐라 비웃던 청나라에 머리를 숙인 것에 대한 분노를,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를 계승한다는 것으로 정신승리로 승화한 것이다. 이 친명사대주의는 조선 후기에 아주 깊숙히 파고들었었다. 



조선 후기에 죽은 위정자들의 비문의 대부분은 ‘유명조선국’이라는 문자로 먼저 시작한다. 그 뜻은 대충 이렇다. ‘명나라의 신하 조선’ 또는 ‘명나라에 속한 조선’. 이미망해버린 명나라를 부르짓다 못해, 지들 무덤에 세우는 비석에까지 저렇게 새겼다. 뿐만 아니다. 숙종은 창덕궁 깊숙한 곳에 명나라를 위한 제단 ‘대보단’을 설치했다. 청나라에 들키면 안되기에, 아주 깊고 깊은 곳이 설치했다. 대표적인 산림이자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의 제자들도 충북 괴산에 명나라를 위한 제단 ‘만동묘’를 설치했다. 이는 송시열의 유언이기도 했다.



정신승리로 시작한 친명사대주의와 소중화를 부르짖던 서인은 권력다툼으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고, 노론이 권력을 틀어쥐며 안동 김씨, 풍양 조씨에 아우르는 부패하다는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한 세도정치가 일었고, 백성들은 무자비한 세금부담에 죽어나갔고, 그렇게 조선은 망국의 길을 걸었다.



조선왕실의 그림자


조선의 위정자들은 안팎으로 조선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만약 군주가 멀정했더라면, 조선의 부패가 이정도까지 심해지지는 않았을리라.


중종반정은 백성과 국가를 위한 반정은 아니었다. 연산군의 폭정에 위정자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반정에 불과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을 때 개국공신이 55명이었던 것에 반해 중종반정에서 정국공신에 오른 사람은 117명이었다. 이외에도 3천 명 이상이 원종공신으로 책봉되었다. 이 중에는 연산군에게 미녀를 바치며 나쁜짓을 일삼다가, 반정을 논의하는 자리에 술과 안주를 바쳤다는 이유로 공신에 책봉된 구수영 등도 있었다. 그리하여 관직을 가진 사람들 대부분이 공신에 책봉되어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등 많은 재물을 하사받고 품계가 올랐다. 공신의 숫자가 많아진 만큼 백성들은 농사지을 땅이 부족해졌고 세금은 늘어났다. 결국 백성들은 연산군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어려운 삶을 계속 이어갔다. p 139


계유정난의 세조, 중종반정의 중종, 인조반정의 인조. 모두 전 왕을 끌어내리고 왕이 된 자들이다. 이들이 전 왕을 끌어내린 이유는 하나다. 바로 ‘권력’. 세조가 끌어내린 왕은 어린 조카 단종이었고, 중종이 끌어내린 왕은 폭군 연산군이었으며, 인조가 끌어내린 왕은 임진왜란 때 분조를 이끈 광해군이다. 어린 단종을 끌어내린 세조는 신권(이때는 훈구)에 휘둘리는 ‘첫’ 조선 왕실을 만든사람이며, 삼촌인 광해군을 끌어내린 인조는 폐륜아 아비를 왕으로 추존하고(원종), 그릇된 권력욕으로 자기 아들을 죽였으며, 그릇된 판단으로 자기 백성들을 청나라 말발굽 아래에 떨어뜨렸고, 망해버린 명나라를 조선의 조상으로 만들어버린 사람이다.



물론 연산군은 그냥 폭군도 아닌, 자신의 향락을 위해 백성들의 터전까지 짖밟은 왕이므로 왕에서 쫒겨나야하는 사람이 맞다. 하지만 그런 연산군을 끌어내린 중종은 처음부터 힘이 없었고(심지어 신하들 손에 이끌려 왕이되었고), 수많은 반정공신에게 하사품을 주기 위해 연산군때와 다름없이 백성들을 피고름을 빨았다. 더군다나 중종의 부인인 문정왕후는 권력욕과 함께 자기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조선의 질서를 어지럽히기도 했다.



결국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된 그들은 조선을 밝게 하는게 아닌, 더욱 어두운 길로 향하게 하였다.



정여립의 역모과 관련된 구체적 증언이나 물증 없이 3년 동안 많은 사람이 희생되자, 정여립이 진짜 역모를 꾀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 제기되었다. 당시 사전을 맡았던 정철이 선조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옥사를 확대했다는 주장, 서얼 출신인 서인 송익필이 양반의 신분을 갖기 위해 정철을 조종했다는 주장, 선조가 붕당의 갈등을 중재하며 왕관을 강화하려 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p 185



선조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기에 바빴고(……). 나라를 버린 자신과 달리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고 전국 각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며 백성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고,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연전연승하며 백성들에게 조선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선조는 전쟁이 끝나갈 무렵 자신의 과오를 감추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왕이 되어야 했다. 그 해결책으로 명나라 군대를 치켜세우고 조선의 관군과 의병을 평가절하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p 202



‘조’가 ‘종’보다 좋다는 인식이 생긴 것은 광해군 때였다.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조는 조선시대 최초의 방계 출신 왕이었다. 더욱이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쟁에서 왕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광해군 자신도 서자로서 왕위에 올라 정통성이 약했던 만큼, 아버지 선조의 묘호를 높일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선종이라 붙여질 묘호를 선조로 바꾸었다. p 155



선조는 너무 할 말이 많아서, 뭐부터 써야할지 난감한 왕이다. 분명 하성군 시절에는 나름대로 총명했던 것 같은데, 최초의 ‘방계 출신’이라는 신분 콤플렉스가 조선을 전란에 빠트릴정도로, 인재를 보는 눈을 가릴 정도로 컸던 것인가. 음. 선조에 대한 이야기는 수많은 포스팅에서 조미료 곁들이듯 썼던게 워낙 많아서 그냥 패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오백년이나 버틴 이유는...


세종은 결혼과 출산에 관한 복지제도도 마련해 운영했다. 가난해 결혼하지 못하는 사람은 친족이 돕도록 하고, 이마저도 어려운 사람에게는 관청에서 곡식을 지급해 결혼할 수 있게 했다. 출산에 있어서도 관청의 여종이 임신하면 출산 한 달 전부터 일을 쉬게 하고, 아이를 낳으면 100일 동안 휴가를 주었다. 남편에게도 30일의 휴가를 주어 산모를 도울 수 있도록 했다. 여성이 세쌍둥이를 낳으면 1년 치에 해당하는 쌀과 콩을 지급하며 출산을 장려했다. p 075



이렇게 가뭄에 콩나듯 백성을 위하는 군주가 나왔기 때문에, 혹은 대동법 같은 백성을 위한 정책이 나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들이 위하는 백성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정말 온전히 백성을 위한 정책인지는 차치하고. 너무 긍정적인 생각인가..? (개인적으로는 부패할대로 부패한 위정자들이 자기들의 권력유지를 위해선 나라가 계속 이어져야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딱 너무 망하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하게 조선을 끌고 나간게 아닐까 하는 뭐 그런 생각? 그나마도 조선 말기까지 가면 그 적당히조차 못한 부패관리들로 인해 나라가 아예 사라졌지만) 



여튼, 간만에 괜찮은 조선사 책을 읽었다. 만족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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