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마제국 멸망 후 르네상스가 도래하기까지의 천 년. 그 기간을 우리는 중세시대라고 배웠다. 그리고 대표적인 폭력과 억압의 시대, 모든 문명이 죽은 시대라고 생각한다. 아마 중세를 관통하는 두 가지의 키워드 ‘십자군 전쟁’과 ‘흑사병’ 때문일 것이다. 오롯이 이 두 가지 키워드만으로, 우리는 중세 천년에 ‘암흑기’라는 굴레를 씌워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십자군 전쟁과 흑사병이라는 두 가지의 키워드만을 놓고 보았을 땐, 중세는 분명 폭력적이고 억압적이며, 죽음만 있는 어두운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게 다일까? 중세의 천 년을 고작 저 두 가지의 키워드만으로 재단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누군가 의도적으로 중세를 폄하하기 위해 한 일은 아닐까? 



시작과 끝은 제멋대로이다. 시작과 끝은 화자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의 틀이다. 그동안 중세 세계는 그림자에 가려진 채 어렴풋하게만 이해되었고, 고정적이고 변하지 않는 대상으로, 결국에는 우리가 바라는 현대 세계의 대립항으로 여겨졌다. 이 책에서 우리가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중세가 “암흑시대”였다는 수 세기에 걸친 신화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므로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 410년에 일어난 로마 약탈, 476년에 벌어진 서쪽의 “마지막” 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폐위 사건 같은, 고대와 중세 사이의 전통적인 전환점들은 일단 잊자. 만약 중세가 존재했고 그 시작과 끝이 있었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굳이 쇠락이나 암흑, 사멸을 출발점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 이 빛나고 거룩하고 고요한 공간에서 시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p 011



분명한 사실은 당대의 추악한 정치적 혼돈과 전쟁에 낙담한 14-15세기의 이탈리아인들이 고대 그리스 로마 세계에 닿는 향수 어린 연결고리를 마련하기로 결심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1,000년에 이르는 지난 역사와의 연관성을 끊기 위해서 로마와 그리스라는 먼 과거를 활용했다. 이후 18세기와 19세기 내내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과 지식인들은 백인성이라는 관념이 유럽의 세계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들의 새로운 세계질서를 위한 역사를 찾아나섰다. 그들은 중세와 그리스 로마의 연관성, 그리고 중세 정치체들의 독립성과 독특한 전통에 주목하면서 중세의 원형 국가들이 유럽 열강의 근대적 기원에 해당하는 유용한 과거라는 점을 발견했다. p 015



우리가 알고있는 ‘암흑기’ 중세라는 이미지는, 근대 유럽 열강에 의해 만들어졌다. 근대를 살던 유럽 제국주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빛나는 현재를 “서양 문명”이라는 개념으로 정립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서양문명 우월주의로 인해 유럽 열강들은 자신과는 다른 나머지 세력들을 ‘야만인’으로 보았고, 중세적인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개화해야할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중세는 더더욱 야만적인 시대, 어둠의 시대, 문명이 없는 시대로 여겨졌다.



이러한 인식은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이어져서, 유럽의 ‘중세’는 암흑기라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 되었다. 오죽하면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수많은 매체들마저도, 중세를 암흑기로 그리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 책의 저자들은 이미 세계에 만연하게 뿌리내린, 암흑기 중세라는 이미지를 탈피시키기 위해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왠만큼 해서는 암흑기 중세라는 뿌리깊은 인식을 뒤집긴 어렵다. 그래서 저자들이 선택한 것이 바로 이탈리아에 위치한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였다.



‘갈라 플라키디아’.


진짜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그 어떤 역사책에서도 보지 못했던 이름인지라 책을 읽기 전에는 몰랐다. 왜 수많은 유명인물들을 놔두고, 하필 역사적으로 이름의 가치(?)가 조금 뒤떨어진 사람이 중세의 시작으로 선택되었을까? 하고 말이다. 벗뜨, 이 책을 읽고 나니 이해가 갔다.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한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 중세 천 년간의 사회상을 짧게 요약하라고 한다면, 그녀의 삶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 암흑기가 아닌 “빛의 시대” 중세를 말하기 위해, 이보다 더 적합한 장소가 또 어디 있을까.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



라벤나에 있는 갈라 플라키디아 황후의 예배당으로 되돌아가자. 기원후 5세기에 지어진 이 예배당은 황후의 시신이 매장되지 않았는데도 오늘냘 영묘로 알려져있다. 최근들어 학계의 동향이 바뀌고 있기는 하지만, 갈라 플라키디아 황후는 아들의 섭정으로서 권력을 잡았을 때와 관련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이 시기에 관한 역사서의 주요 등장인물은 아니다. 중심이 되는 것은 남자, 피, 전투이다. 그러나 이 여성과 이 공간을 중심으로 관점을 재구성하면, 우리는 중세 유럽의 매우 색다른 “출발점”을 만나게 될 것이다. p 023



그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에 이탈리아로 건너갔으며, 그곳에서 다시 프랑스와 스페인으로 향했다가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왔고, 이탈리아에서 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갔다가 결국 이탈리아로 되돌아왔다. 이탈리아의 도시 라벤나에 머물던 그녀는 423년에 어린 아들의 섭정이 되어 서로마 제국 전체를 다스렸다. 갈라 플라키디아는 남녀를 불문하고 지난 500년간 누구 못지않은 로마 통치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녀는 450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제국은 위기와 과도기를 겪고 있었지만, 그 위기가 종류와 정도의 측면에서 이전에 로마를 엄습했던 위기와 꼭 다르다고는 할 수 없었다. 로마에는 예전부터 늘 파벌싸움이 있었고 외부의 위협도 언제나 존재했다. p 024



갈라의 인생에는 여전히 왕성하게 살아 숨쉬지만 확실히 과도기를 겪던 로마 제국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것은 새로운 종교와 민족들이 기존의 관념, 풍습과 통합될 시대의 무대를 마련하는 복잡한 이야기이다. 새로운 형태의 황제권을 배경으로 온갖 부류의 통치자들이 다양한 기독교인 집단이나 종교 지도자들과의 친밀한 유대관계를 통해서 정통성을 주장했고, 그런 식의 황제권은 지중해 세계 전역과 갈리아 지방의 대부분에서 표준으로 자리를 잡았다. 새로 출현한 이민족들은 로마의 통치 세력인 최상류층 가문들과 동맹을 맺는 데에 열중했고, 로마의 전통을 받아들였다. p 038



“제국”으로서의 로마는 변했지만, 로마는 예전부터 늘 변해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변화는 처음부터 로마 이야기의 일부분이었다. 권력의 중심지는 바뀌었다. 권력이 영향을 미치는 영역은 분열했고 연합했고 다시 분열했다. 반면에 로마가 “멸망했다”는 관념은 동질성 개념, 즉 역사적인 평형 상태 개념에 기댄다. 아주 오래된 이 관념은 중앙집권화된 근대 국민국가의 원형을 가정하는데, 그 이상적인 국민국가는 고대의 실제 현실보다는 에드워드 기번이 살던 18세기 대영제국과 훨씬 더 비슷하다. p 039



암흑기라고 배웠던 중세 천 년은, 그 이후 우월하다 자부하던 근대 서구 열강과 비교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여러 인종이 교류하고 있었고, 수많은 종교 문화가 발달했으며, 그에 따른 멋드러진 종교 건축물들이 곳곳에서 지어졌고, 어느 왕조든 근대 서구열강과 견주었을 때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덜하지 않은 권력투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중세의 시계바늘은 어느 한 곳에 멈추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어보았다면, 그 누구도 중세가 암흑기였다고 감히 입에 담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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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8-02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중세의 교회는 오직 유일신인 하느님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율법으로 인간들(서민)의 삶을 지나치게 통제함으로써 핍박한 삶을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기에 인본주의 입장에서는 그 때를 암흑기라고 평가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