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최재형
최 올가 페트로브나.최 발렌틴 페트로비치 지음, 정헌 옮김 / 상상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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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15일. 광복절이 제78주년을 맞았다. 날이 날이니만큼, 오늘은 독립운동가 최재형에 관한 책을 리뷰하려 한다.



러시아 독립운동계의 대부, 러시아 한인들의 페치카, 안중근 의사의 후원자. 모두 독립운동가 최재형 이름 뒤로 붙어다니는 수식어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안중근은 기억해도, 그 뒤에 있던 최재형은 잘 모른다. 이 책 「나의 아버지 최재형」은 사람들이 잘 모르던 최재형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최재형의 자녀들이 기록한 책이다. 



최올가: 독립운동가 최재형 딸

최발렌틴: 독립운동가 최재형 아들





이 책의 전반부는 최올가의 시선으로 본 최재형과 최올가 본인의 삶이 기록되어있고, 후반부는 최발렌틴의 시선으로 본 최재형과 본인의 삶이 기록되어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최올가는 본인 삶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였고, 최발렌틴은 아버지 최재형의 삶에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따라서, 최재형의 삶을 조명함에 있어선, 최 발렌틴의 기록이 더욱 디테일하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 한인 1세 최재형

러시아 한인들의 페치카 최재형

러시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안중근 후원자 최재형

그는 대체 누구일까?



페치카 최재형


러시아 한인 1세 최재형은 가난한 노비 최홍백의 아들로 태어났다. 누가봐도 조선의 흙수저였던 그는 부모를 따라 러시아로 건너오고,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먹고 살기 바빴던 친부모와 달리, 러시아에서 만난 선장부부의 보살핌을 받으며 최재형의 삶은 달라졌다.



(최올가) 무역선의 선장과 그의 아내는 수습 선원인 소년 최재형을 무척 예뻐하였다. 그 선장 부부는 소년에게 세례를 주고 ‘표트르 세묘노비치’라는 러시아 이름도 지어주었다. 소년은 6년 동안 배에서 생활하였다. 선장이 더 이상 무역선을 무역선을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선장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역업을 하는 사업가 친구에게 보냈다. 최재형은 러시아인들과 지내면서 러시아 말과 글을 익히게 되었다. 최재형은 단 하루도 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다. 하지만 총명한 그는 책을 꾸준히 읽었고 점점 지식과 상식이 풍부해졌다. p 014



최재형의 대부, 대모가 되어준 러시아 선장 부부는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조선에만 갖혀있던 과거와는 달랐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은 당연했고, 다른 한인들과는 달리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사업수완까지 있었던 최재형은 어느새 자수성가한 거부가 되었다. 


당시 최재형이 소유했던 쿤스트 앤드 알베르스 백화점이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며, 최재형이 얼마나 거부였는지를 보여준다.



러시아는 최재형을 인정하고 존경했다. 1894년에는 10월에는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초청까지 받았다. 혼자 잘먹고 잘살아도 누가 뭐라하지 않았을 그 시기에, 최재형은 자신의 재산과 목숨을 독립운동과 한인들을 지키기 위해 바쳤다.



(최발렌틴) 고향 사람들의 권리가 이처럼 정당하게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본 젊은 최재형은 공사장에서 일하는 한인 노동자들의 법적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항상 노력했다. 공사장에서 일했던 농민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통역사 최재형은 착하고, 정당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 도로를 건설하던 시기에 한인들은 최재형을 최페치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원래 페치카는 난방을 위해 집 안에 철과 벽돌로 만든 땔감나무를 뜻하는 벽난로를 뜻한다. 대부분의 한인들에게는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라는 이름보다 최페치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p 165



(최올가) 도로 건설이 끝나고 통역사로서 일을 마친 후 최재형은 얀치헤의 읍장이 되었다. 읍장이 된 최재형 앞에는 해야할 일들이 많이 놓여 있었다. 새로운 마을이 생겼지만, 대부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최재형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고, 공부도 시켜야했다. 그는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p 017



(최발렌틴) 최재형이 주도한 애국 계몽 운동에 이종호 등 많은 계몽 활동가들이 참여하였다. 최재형과 계몽 활동가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 한인 청년협회를 조직하였고 한인 민족학교 건립자금을 모금하기도 하였다. 모은 자금으로 극동지역에 182개의 학교를 설립하여 260명의 교사들이 6,000여 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졸업시켰다. p 166



최재형은 계몽 활동과 사회 활동을 하면서 주민들의 문화 수준 향상에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 그는 특히 학교와 교육에 큰 관심을 두었다. 마을마다 교회와 학교가 설립되고, 노보키옙스크에서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는 6년제 상급 교육기관도 세웠다. 상급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학생들은 민족의 지식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p 169



최재형이 죽은지 100여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러시아 한인들에게 최재형은 아직도 ‘페치카’라고 불린다. 그 증거가 바로 우수리스크에 남아있는 최재형 고택이다. (러시아 한인)고려인들이 최재형 고택을 지키기 위해 러시아 정부와 끊임없이 협상을 하고, 우리나라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지켜낸 고택이다. 현재는 최재형 고택이며, ‘독립운동가’ 최재형 기념관으로 운영중이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1908년에 러시아에서 이위종의 주도로 항일 의병단체 ‘동의회’가 창설되었다. 동의회 창단 멤버는 최재형을 비롯하여 안중근, 이범윤, 엄인섭 등이다. 1910년에는 최재형 주도로 ‘권업회’가 창설되었다. 권업회는 대외적으로 러시아 정부의 공식승인을 받은 노동단체다. 실제로는 한인 무장 단체의 조직과 훈련을 비밀리에 진행하는 항일독립운동단체였다.


(최올가) 한국의 애국자로서, 최재형은 점령자들인 일본과 싸웠다. 독립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나의 아버지 최재형은 1906년, 항일 독립 운동 조직을 결성하고 독립운동가를 양성하였다. p 028



(최 발렌틴)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 창립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정관이 승인되었고, 지도부가 선정되었다. 최재형, 유인석, 이범윤, 김학만, 홍범도, 이상설, 이종호, 이남기, 김치보, 고상준 등 권업회를 이끌었던 사람들은 모두 적극적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운동가들이었다. 항일운동의 지도자들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이 합법적인 단체를 방패막이로 사용하였다. p 167


안중근: 하얼빈 의거

이위종: 헤이그 특사

엄인섭: 훗날 친일파로 변절(영화 ‘밀정’ 모티브)

유인석: 을미의병

이범윤: 간도관리사

이상설: 헤이그 특사

홍범도: 봉오동 전투







총알을 피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 

붉은피로 독립기를 크게쓰고

동심동력하여 성명을 동맹하기로

청천백일에 증명하노니 슬프다

동지 제군이여

-동의회 총장 최재형-

( 러시아 해조신문 발췌 )



(최 발렌틴) 연해주에서 의병이라는 첫 유격대는 1906년에 조직되었다. 의병을 조직하고 무장시키는 일에는 최재형, 이범윤, 이상설이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무장한 유격대원들은 주로 연해주의 한인 마을에서 훈련하였고, 한반도 이북 지역에 침략해 있던 일본 군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하기도 하였다. (…) 1908년 6월 일본군을 섬멸하기 위한 작전이 실시되었다. 최재형의 지휘 아래 있던 한인 의병부대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부대에 큰 타격을 주었고, 더 나아가 회령시 지역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 부대를 향해서도 기습공격을 감행한 후 연해주로 돌아왔다. p 171



1910년 7월 4일 러시아와 일본 간에 협정이 체결되었다. 협정에 따르면 일본에 의한 대한제국의 강제합병을 러시아는 인정하고, 러시아는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이익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러시아는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항일 운동을 사전에 방지하기로 한 것이다. (…) 이러한 상황 변화로 항일 의병 유격대의 일부는 해체되었고, 일부는 중국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p 172



그러나 일본은 이와 같은 결과에 여전히 만족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연해주에서의 항일 운동을 완전히 진압하려면 항일 운동의 지도자인 최재형부터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최재형이 대한제국의 일본 식민지화에 반대하여 항일 투쟁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연해주 지방 행정부는 그의 추방을 반대했다. 무엇보다 최재형을 보호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은 우수리스크 철도관리국의 경찰국장 쉐르바코프가 연해주가 군정 총독 스베친 앞으로 보낸 편치였다. p 173



이후 최재형은 상해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도 역임한다. 



최재형과 안중근 하얼빈 의거


(최 올가) 우리가 있던 노보키옙스크에 ‘안인사’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던 안응칠(안중근)이 살았다. 그는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창고 벽에 세 명의 모습을 그려놓고 그들을 향해 총을 쏘는 연습을 했다. 어느 날, 나와 소냐 언니는 마당에서 놀다가 그 광경을 보게 되었다. 결국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가서 일본군 우두머리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 노보옙스크에는 안중근의 아내 두 명과 아이들이 남았다. 그들은 우리 식구들과 친했기 때문에 우리 집에 자주 왔다. 어머니는 그들에게 잘 대접하려고 애썼다. 어머니는 아이들 옷과 각종 물건들이 들어 있는 보자기를 가지고 와서는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골라 가져갈 수 있게 해주었다. p 028



(최 발렌틴) 나의 아버지 최재형이 이끄는 유격부대에는 안중근이라는 젊고 결단력 있는 소대장이 있었다. 1907년도에 블라디 보스토크에 도착한 안중근은 최재형과 이범윤 등 반일 유격부대 지도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p 175



최재형과 이범윤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한 작전을 수립하고 사격 훈련을 계획하였다. 훈련은 노보키옙스크에서 진행되었다. 1910년 3월 26일, 죽음도, 고문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영웅 안중근은 뤼순감옥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사형을 당하고 순국하였따. 한국에서 안중근의 미망인이 우리 집에 왔다. p 176



우리에게는 너무나 유명한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그 뒤에는 최재형이 있었다. 최재형의 딸과 아들의 기록에 따르면, 안중근 의사는 최재형의 집에서 주기적으로 사격연습을 하였다. 안의사가 체포되었을 직후에는 최재형의 부인이 안의사의 가족들을 돌봐주었고, 국제변호사를 선임하여 안중근 의사를 변호한 사람도 최재형이었다.



추측이지만, 안중근 의사가 사용한 권총은 최재형이 구해주었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에서 총을 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며, 심지어 실명등록을 해야했다. 거기다 안의사가 사용한 권총은 당시 기준으로 최신식 총인 브라우닝 권총이었다. 최재형은 러시아에서도 인정한 사람이었기에, 그가 권총을 구해다주었을 것이라는 게 추측이지만, 이 추측 외에는 안의사가 권총을 구할 방법이 없으므로, 이 내용은 정설이 되었다. 



최재형의 마지막 모습


1920년 일본군은 간도일대에서 한국인들을 무차별 학살한다. 우리가 배운 ‘간도참변’이다. 간도 일대에 살던 수많은 한인들이 무차별적으로 도륙되었고, 최재형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가들은 일본군이 잡아갔다. 이후 이 지역에 살던 한인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설상가상으로 1937년 스탈린 강제이주 정책이 시작되었고, 수많은 한인들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흩어졌다. 최재형 가족들도 그랬다. 그들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고려인’ 이다.



1920년 4월 4일 저녁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아버지는 어머니와 우리 모두를 불러 “내가 떠나고 없으면 곧 일본인들이 어머니와 너희들을 모두 체포헤 때리고 내가 있는 곳을 말하라고 할 거다. 나는 이미 늙었고 충분히 오래 살았으니 죽어도 되지만 너희들은 살아남아야 한다. 나 혼자 죽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그 말에 우리 모두가 울었다. 그렇게 또 한 번 아버지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일찍, 아직 해도 뜨지 않았을 무렵 아버지가 우리방 덧문을 열었다. 5분 정도 지났을 부렵 방문이 열리고 총을 든 일본군이 나타났다. 우리는 모두 무슨 일인지 깨닫고 벌떡 일어나 옷도 입지 못하고 현관 계단으로 내달렸다. 그리로 나가보니 팔이 뒤로 묶인 아버지의 뒷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1920년 4월 5일 아침에 일어난 일이었다. p 046



늦은 밤, 불시에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나는 집을 떠날 수 없다. 내가 떠나서 집에 없으면 일본군들이 어머니와 너희들에게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말하라며 고문할 것이다. 나는 이제 나이 60이 되었다. 충분히 오래 살았고 죽어도 된다. 하지만 너희들은 살아남아야 한다. 나 혼자 죽는것이 낫다”라고 말했다. 밤새 내화가 이어지는 내내 어머니는 우셨고, 아이였던 우리들도 울었다. p 191



그날 200명이 넘는 한인이 체호되었다. 심문이 끝나고 저녁 무렵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 카피톤 니콜라예비치를 제외하고 나머지 한인들은 모두 풀려나왔다. 4월 참변, 그 비극의 시기에 당시 연해주에 있었던 러시아인들과 함께 일본 침략자들에 맞서 싸웠던 수많은 러시아 국적의 한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 나중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일본군들이 당시 체포한 사람들을 잔혹하게 고문했다고 한다. 최재형과 그의 동료들이 일본군에게 지독한 고문과 학대를 당하고 나서, 체포된 다음 날, 총살되었다고 한다. p 193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일제가 총살 후 그를 언덕배기에 묻어버리고, 그 장소를 함구했기 때문이다. 최재형은 지금도 우수리스크 소베스트카야 언덕 어딘가에 묻혀있다. 하지만 시신을 찾지못했다 한들! 유교의 나라 대한민국에선 문제가 없다. 대한민국은 가묘라도 만들어서 제사를 지내기 때문이다. 



최재형은 해방 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고, 국립현충원에는 최재형의 가묘가 조성되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사실이 들어났다. 당시 최재형의 보훈 혜택을 받았던, 최재형 후손이라고 했던 그들은 ‘가짜’였다. 더 웃긴건 지금부터다. 논란이 두려웠던 국립현충원은 최재형의 가묘를 없앴다. 무엇보다 이 모든 사실을 진짜 최재형의 후손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최재형은 죽어서조차, 그 영혼마저 안식을 찾지 못했다. 아니, 못했었다.



2023년 8월 14일, 바로 어제 국립현충원에 최재형 묘가 다시 설치되었다. 최재형 부인 최 엘레나와의 합장 묘로. 많은 사람들의 노력 덕택에 법이 바뀌었고, 최재형은 부부 합장묘 방식으로 현충원에 다시 안장될 수 있었다. 여기서 조금 슬픈 사실 하나는, 최재형의 부인 최 엘레나의 유해가 어디에 있었는가다. 최 엘레나의 유해는 키르기스스탄의 한 공동묘지에서 발견되었다. 관리의 흔적 하나 없이. 그녀는 최재형이 독립운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그의 뒤에서 내조를 했고, 최재형 사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된 후에도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 했던 사람이다. 



(옮긴 이) 독립이 되고 난 후에, 러시아뿐만 아니라 중국에 남겨진 독립투사들의 자손들, 한반도에 남겨진 자손들이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얼마나 힘들고 어렵게 살았는가를 생각하면 깊은 한숨과 함께 가슴이 미어진다. 당시 조국 해방을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목숨을 건 투쟁과 끊임없는 헌신에 대하여, 정확한 사실에 입각하여 재조명함으로써 제대로 된 한민족의 역사관을 정립하여야 한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처자식의 안위는 뒤로한 채, 이역만리에서 소리없이 스러져간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을 우리는 국가적 차원에서 보살펴야할 의무가 있다. 조국을 위해서 싸우다 희생된 애국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을 존경하며 보살피지 않는 나라가 세계 역사를 주도한 예는 역사상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p 309




아직까지도 중앙아시아 곳곳에는 우리가 모르는 독립운동가 무덤이 버려져있다. 그나마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인물이면 다행이다.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씨들도 많다.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가. 이제는 나라가 그들을(또는 그들의 후손을) 보호하고 지켜줄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그들은 아직까지도 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위에 짧게 언급했지만,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강제이주 된 한인들은 오로지 몸만 기차에 실렸다. 짐짝처럼 기차에 실린 고려인들. 기차에서 죽어나간 생명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고려인’들은 아무것도 없는 중앙아시아에 버려졌다. 그 어떤 물질적은 지원도 없었다. 그저 맨 몸으로 중앙아시아에 버려졌다. 여기서 중요한 건 대다수 ‘고려인’들이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라는 점이다. 국내에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그랬지만,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삶이 힘들었던 건 매한가지였다. 나라가 독립을 해도 그랬다. 



강제이주 1세대 고려인들에게 해방 후 ‘대한민국’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들의 후손들에게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떤 의미일까?

지금의 나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많은 생각이 드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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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3-08-18 14: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분을 <범도>를 읽다가 처음 알게된 분입니다. 일본군에 끌려가는 이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던 기족의 기억이 먹먹하게 하네요. 많은 독자기 만났으면 하는 책입니다.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