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석을 이렇게 본다 (반양장)
정양모 지음 / 두레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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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모 선생의 함자를 처음 들은 것은 TV에서 하는 도올 김용옥의 노자강의에서였다. 평생을 기독교인으로 사시면서 유.불.선을 통달한 분이라니, 어떤 분인가 궁금하여 마침 출간된 다석 선생의 제자인 박영호님이 쓰신 <진리의 사람 다석 유영모>이라는 책을 읽게되었다. 그 때는 책을 읽을 마음에 준비가 안 되어 그러는지 다석의 종교관이 어떠한지, 도통 이해할 수 없고 답답하였다. 그러다 오늘 새로 나온 <나는 다석을 이렇게 본다.>를 읽으니, 그 동안 내가 가졌던 종교에 대한 의문에 시원스레 답해주신 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의 종교관은 마치 구약성서의 모순을 깨우치고 신약성서를 일구신 예수님만큼이나 혁명적이 것이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부처나 공자처럼 하늘의 이치를 깨달은 인류의 스승으로 보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 정신병자 취급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독교 밖에서 나처럼 평범한 가정에서 이러다할 종교 없이 자라온 사람에겐 그리 놀란 일이 아니다. 필자는 어려서부터 평소 아버지께 ‘모든 종교는 결국 하나로 통한다.’,‘결국, 남에게 베풀며 착하게 살면 되는 거야.’라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들어왔다.
나와 같은 무종교인뿐만 아니라, 불교에서도 타종에 대해 기독교인만큼 배타적이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불교는 기독교처럼 유일신을 강조하지 않고 자기해탈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처럼 타 종교를 우상숭배라 하여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참 기독교인이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받들면, 해탈의 길로 가는 길이라 격려하는 이도 있다.
그런데 유일신을 강조하는 기독교인들은 무교이거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온전한 종교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하느님과 동일시하고 신격화하는 것은 신약성경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 예수를 하느님처럼 신격화 한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 당신의 뜻을 보이셨는데도 예수님을 추종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한다, 신의 뜻이다, 독생자이다, 라는 면목으로 자신들의 신앙만이 구원길이라 강요하며 얼마나 많은 악행을 저지르는가, 이런 모순을 안고 있으면서도 우리 사회에 기독교의 세가 점점 확대 되고 있다. 이런 모순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나, 이런 근원적인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 방법을 다석 유영모 선생에게서 찾아 볼 수 있었다.
다석 유영모선생은 15세에 기독교에 입신하였으나 22세에 오산학교을 재직하던 중 톨스토이를 접한 다음부터 혼자 신앙생활을 하였다. 52세에 신비한 체험을 하시고 하루에 저녁한 끼만 드시고 부인과 해혼을 선언하고 부부가 아닌 남매처럼 사셨다.
다석 선생의 종교관은 공자나 부처를 예수님처럼 깨친자, 거듭난 자로 본다는 것이다. 구약성서는 유대교의 기록일 뿐이고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예수께 가장 잘 나타내셨다. 그리고 공자나 부처, 간디, 톨스토이 같은 이에게도 나타내셨으며 하느님을 어버이처럼 모시고 깊이 사랑하고 따르는 자는 예수나 공자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 아버지를 가장 잘 섬긴 예수 길을 쫓아 하느님께로 이르겠다는 것이 유영모 선생의 종교관이다.
다석 선생은 이런 새로운 종교관으로 기성 종교전통의 속박을 미련 없이 떨쳐버리고 하느님 아들의 영광스런 자유를 찾는다. 기독교에서 이런 다석의 사상을 받아드려야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룰 수 있지 않을까, 기독교에서 계속해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유일한 독생자로 추앙한다면, 타종교와의 화합을 이루기 어렵고 종교분쟁으로 인해 인류의 평화를 찾을 길은 점점 더 묘원해 질 것이다.
이런 시도는 유영모 선생의 유일한 생각은 아니다. 이 책의 저자인 정양모 신부님은 일찍이 프랑스와 독일에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면서 기독교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연구과제로 삼아 왔다. 1965년 바타칸 공의회에서는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을 통해 종교 간의 이해와 관용을 촉구한 바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타종교관을 대하는 태도를 분석하면 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가 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의 종교관을 굳이 따지자면 다원주의 종교관에 속한다. 다음은 다원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이다.
2000년 동안 신학이 그리스도와 교회 주위를 맴돌았는데. 이제부터는 하느님을 주축으로 삼야 한다.(본문 189쪽)
구원자는 하느님 한 분뿐이고 구원의 중보자는 예수. 석가. 공자. 노자. 장자 등 여럿이라는 것이다.(본문 189쪽)
포괄주의자들은 예수신성 교리(325,451년)와 삼위일체 교리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을 주장하는 데 반해, 신 중심의 다원주의자들은 저 교리들을 신화적 발상이라고 본다.(본문 190쪽)
이러한 그리스도교에 대한 재해석을 연구하던 정양모 신부님이 귀국 후 다석 선생을 소개받았을 때 우리나라에도 이런 분이 계셨다는 것에 놀랐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부터 다석 사상을 연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종교분쟁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다치고 죽어가고 있는가, 모두 다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자신들이 섬기는 구원의 중보자의 말씀과 교리가 유일하다는 아집에 사로잡혀 이런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하다니,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느님께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하느님을 믿는 방식과 교리는 다르지만, 툭 털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시원스럽게 인정하면 안 되는가, 유일신을 강조하는 것이, 하느님이 뜻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해 볼 수는 없는가. 예수님이 이루신 혁명적인 구원을 오늘날 다시 재현 할 때가 온 것은 아닌가, 기독교의 배타주의적 종교관이 자신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오히려 하느님을 도구로 삼는 것은 아니가 반성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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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여우 콘라트
크리스티안 두다 지음, 율리아 프리제 그림, 지영은 옮김 / 하늘파란상상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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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고픈 여우 콘라트>는 마치 <알을 품은 여우> 속편인 것 같다. 전에 복지센터 어린이들에게 <알을 품은 여우>를 읽어주고 뒷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질까 상상하는 글을 써 보도록 하였다. 아이들 참 다양한 이야기를 내 놓았다. 여우와 오리가 결혼을 했을 거다, 여우가 오리에게 부모를 찾아 줬을 거다, 오리가 혼자 부모를 찾아 떠났을 거란 이야기도 있었다.

그런데 <배고픈 여우 콘라트>에서 여우는 오리 아들이 결혼해서 낳은 손자를 돌보며 늙어간다. 여우는 오리를 요리해 먹는 법도 잘 알고 있었다. 매일같이 꼬르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오리를 잡아먹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천연덕스럽게 아빠라 부르고 할아버지하면 쫓아다는 오리를 잡아먹을 수 없었다. 여우는 오리가 점점 늘어나도 잡아먹지 않고 굶주린 채 죽어간다. 오리는 이제 먹이 감이 아니라 가족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우라는 짐승의 본성을 죽이고 알을 품어 오리를 키워낸다는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데 배고픔을 견디며 수많은 오리가족을 돌본다니 순고함마저 느껴지는 이야기다.

<배고픈 여우 콘라트>를 읽으면 어린이들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다. 어쩌면 어른들에 대해 신뢰하는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키우는 사람이 친부모건 아니건 간에 어린이들은 자신들을 키우는 어른들에게서 가끔은 여우와 같은 짐승 같은 본성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랬을 때 어린이들은 어른들을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이 책을 읽은 어린이들은 어른들에게도 배고픔과 같은 욕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참으며 자신들을 돌보는 것이라 이해하지 않을까?

어쨌든 여우가 배고픔을 참으며 많은 오리들을 돌보다 행복한 노년과 죽음을 맞이한다는 결말은 심리적인 안정감과 순고한 이의 표상을 만들어 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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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버들 2009-12-18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희종 교수의 <생명과학과 선>을 읽다가 이런 내용이 있어서 찾아 봤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비교행동학자인 콘라트 로렌츠를 어미라고 착각하여 따르던 오리들에서 보듯이 태어난 생물체는 오직 타자를 통해 자기 자신을 확인하게 된다.(p30)


콘라트 로렌츠=>오스트리아의 동물학자·동물심리학자. 도시에서 떨어진 자연 속에서 동물과 함께 생활하며 유형별 동물의 고유한 행동을 상세히 관찰하고 기술하였다. 비교행동학의 확립에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공격성의 견지에서 행동을 관찰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1973년 N.틴베르겐과 함께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동화책 주인공 이름 하나도 아무렇게나 쓰는 게 아니네요. ^^
 
해저 2만리 아셰트클래식 1
쥘 베른 지음, 쥘베르 모렐 그림,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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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상과학소설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19세기 SF소설이 이럴 진데 과학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의 SF소설은 얼마나 대단할까? 어쩌면 너무 전문적인 과학지식을 나열해 내가 읽기엔 다소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아니,쥘 베른의 계승자이길 원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들을 생각해보면 쥘 베른 이후 현대 SF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혁명적인 과학적 사건들이 출현하던 시대에 살았던 쥘 베른에게 들려오는 과학 보고들은 그 어떤 고전이나 이론 보다 상상력을 펼치게 하는 자극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쥘 베른이 <해저 2만리>를 저술한 시기는 과학적으로는 항해기술을 비롯한 다윈의 진화론, 페러데이의 전자기유도 발견, 노벨의 다이너마이트가 발명 등과 같은 과학사뿐만 아니라 인류사적 혁명을 이룬 시기이다. 사회적으로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물질의 풍요 뒤에 숨은 흉악한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를 저술하였으며 미국이 남북전쟁이 치러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 시기와 근접해 있다.

<해저 2만리>는 당시로서는 시선한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잠수함을 만들고 바다 속 세상을 전개해 간다. 일본근해에서 시작한 네모선장의 모험은 태평양을 걸쳐 클레르몽토뇌르섬을 전환점으로 방향을 바꿔 오스트레일리아 대륙과 인도양을 지나 홍해와 지중해 사이를 통과한 뒤 남극점에서 다시 북으로 향한다. 바다의 소금을 원료로 전기를 쓰는 고갈되지 않는 연료와 어떤 압력에도 견디는 지칠 줄 모르는 ‘노틸러스’호는 아메리카 대륙을 지나 유럽에 도착한다.

그 험난한 여정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함께하게 된, 아로낙스 박사와 콩세유와 네드 세 사람은 바닷속 세상이 펼치는 경이로움에 감탄하지만 호시탐탐 탈출할 기회를 노린다. 콩세유는 생물분류학에는 천재이지만 물고기를 보고 이름을 맞추지 못한다. 네드는 최고의 작살잡이로 직접 보고 들은 온갖 바다생물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다. 아로낙스 박사는 바다생물뿐만 아니라 지리와 화학, 기후학, 해양 탐험 사까지도 해박하다.

하지만 <해저 2만리>의 실질적 주인공은 단연 신비스러운 베일에 싸인 네모선장이라고 할 수 있다. 네모선장은 잠수함 하나로 감히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해저왕국을 차지하고 종횡무진 질주 한다. 저자 쥘 베른은 네모 선장을 통해 지구가 생명체처럼 변해왔고 앞으로도 변할 거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으며, 인간들에 의한 환경파괴가 다른 생물과 인간에게 어떤 재앙을 내릴지, 19세기 당시에 이미 예견하여 경고하고 있다.

546쪽에 달하는 긴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위엄과 고결한 인품을 지닌 네모선장이 왜 문명세계에 원한을 품고 바다왕국을 선택했는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자연현상을 밝혀내는 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상상력이 사라져간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 책을 보면서 오히려 무궁무진한 상상의 세계로 이끌어주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새해에는 과학 잡지를 하나 구독해서 보아야겠다는 계획을 추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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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9-12-14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긴이야기를~

하늘바람 2009-12-14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긴 겨울밤 읽고 픈 책이에요

수양버들 2009-12-14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난 후 더 그럴만하다 여겨집니다. 특히 어린이들에겐 .....,
 
값싼 석유의 종말, 그리고 우리의 미래 라루스 지식in 이슈 2
안 르페브르 발레이디에 지음, 김용석 옮김 / 현실문화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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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생활에 있어서 석유에너지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지에 대해 굳이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런 석유는 한정적인 것으로 언젠가는 고갈되고 말 것이다. 그에 대비해 대체 에너지를 개발하고 있지만 실용화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그래서 우리 일상생활에서 석유를 쓸 수 있는 시기가 언제까지인지, 그 때까지 대체에너지는 공급되는 것인지, 그런 과정은 어떻게 전개되며 우리 생활은 어떻게 변할 것인지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에너지가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는다면, 수많은 고층아파트를 어떻게 오르내릴 것이며 난방은 어떻게 될 것인가? 또 항간엔 선진국에선 대체에너지 개발은 이미 완성되어 있으나 자신들의 이속 때문에 대중화 시키고 있지 않다는 설이 있는데 사실인지? 조금 속된 마음으로 값싼 석유의 종말이 오면 어디에 투자하는 것이 이득인지, 그러니까 지금 어떻게 해서라도 아파트를 장만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시골에 작은 집을 짓고 여차하며 나무라도 때거나 태양열에너지 집적기를 설치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

이런 기대와는 상관없이 이 책은 석유에너지와 대체에너지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보고서 형식으로 나열하고 있다. 기술적인 부분이나 석유.대체 에너지 재고의 분포도와 량, 개발진행 현황과 장단점에 대해서 잘 정리 되어 있다.

『 값싼 석유의 종말,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읽으면서 조금 충격적인 부분은 농사를 짓는데 있어서도 석유가 차지하는 위치가 절대적이라는 사실이다. 만약, 석유를 보급 받지 못한다면, 옛날처럼 우리나라도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그 예가 북한인데 1990년대 초 소련이 해체되자 석유와 가스 지원이 중단되었고 오늘날과 같은 경제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농업과 관련한 노동력을 높이고 있음에도, 생산성은 50년 전보다 낮은 상태란다.

그래도 북한 식량자급률이 65%이지만 남한의 식량자급률은 25%에 지나지 않으며, 그나마도 석유 의존도가 높은 형편이다. 석유공급이 원활하지 않게 되면 10%로도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도 4대강 정비를 위해 팔당강변 농지를 없애고 자전거 도로를 만든다고 한다니, 석유 값의 고공행진으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울 판에 무엇으로 관광을 한다는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선진국을 쫓아 녹색성장을 외치며 선두에 나서면서, 선진국이 환경운동과 함께 식량자급률을 높이고 있다는 사실은 왜 외면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강은 식수원으로 국민의 생명줄이다. 이런 국민의 생명줄을 단보로 사업을 추진할 때, 대통령은 물론 그 친인척들의 목숨까지도 내 놓는다는 각서라도 써 놓아야 할 것이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대우만 해줄 것이 아니라 이런 대규모 사업에 대한 책임은 대통령 임기가 끝난 후에도 물을 수 있어야, 국민을 만만히 보고 우롱하는 일이 없어 질 것이며, 지키지 못할 공약으로 국민을 현혹시키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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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만나는 중세 이야기 에듀 픽션 시리즈 5
귄터 벤텔레 지음, 박미화 옮김 / 살림Friends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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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라는 시대는 특별한 매력을 지닌다. 하층민에서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신을 믿으며 보이지도 않는 영혼의 세계가 지배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까발리고 드러내는,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 증명되지 않는 것은 믿을 수 없으며 인정할 수 있다는 경박한 현대에 비해 얼마나 낭만적이고 깊이 있는가 말이다.
중세는 근대와 현대에 비해 긴 역사를 지녔다. 근대와 현대라는 짧은 역사가 얼마나 인간의 삶을 변화 시켰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세를 알아야한다. 그런데 이런 앎이라는 것이 교과서나 역사책을 통해 알아지기 어렵다. 안다는 것을 지식으로 받아드리면 안다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시대를 느끼기는 쉽지 않다.
『소설로 만나는 중세 이야기』는 중세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을 재현하여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카롤루스 대제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카노사의 굴욕’으로 지칭되는 하인리히 4세가 그레고리우스 7세게 무릎을 꿇은 순간 어떤 분위기 였는지, 소로 경작을 시작하게 되면서 농사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으며, 동서양의 교류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따위가 한편의 드라마를 보듯 머릿속에 그려지는 책이다.
이런 역사 소설은 청소년들에게 복잡하게만 느껴지는 서양 역사를 친밀감 있게 접할 수 있고 역사에 흥미를 느끼게 할 것이다. 특히, 중 2, 1학기 사회 교과과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역사는 단지 외워 안다는 것보다 ‘이런 분위기였구나.’하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단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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