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리어 왕 ㅣ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08년 8월
평점 :
지난 9일 예술의 전당 토월 극장에서 리어왕 공연을 보았다. 이 공연은 극단 미추의 2008 정기공연으로 올린 것으로 이병훈이 연출하였고 리어왕 역으로는 정태환이 맡았다.
토월극장, 극단 미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 주는 중후한 무게는 한껏 마음이 부풀었다. 고전이 전하는 무게는 무대장치에서부터 전해졌다. 무대장치는 갈색마루바닥과 갈색발이 전부였지만 그 색은 고전의 이미지를 단순한 장치는 배우들의 연기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 특히 배우들의 의상이 인상 깊었는데 고전의상을 복원하기 보다는 인물 각각의 성격을 잘 들어내는 의상이었다. 공연 중 글로스터의 적자 애드가는 알몸 연기로 열연을 하였는데 그가 이 역을 맡게 된 대에는 몸매가 한몫했을 것 같다. 그 만큼 배역에 신경을 썼다는 거다.
리어왕은 아주 오래전에 읽은 기억이 있는데 너무 오래되어 줄거리조차 기억에 없었다. 다만 폭풍 속에서 장면만이 어련 풋 떠오를 뿐이었다. 공연 관람 후 다시 책을 읽었는데 공연관람 당시 보다 더 큰 박수를 보냈다.
김정환 번역 리어왕이 원전에 가깝게 번역하였기 때문에 읽기가 어려워 공연을 보지 않았으면 이해가기 어려웠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이런 글을 토대로 그런 공연을 하다니 공연예술이 얼마나 대단한가? 새삼 깨닫는 계기였다.
한편으로는 공연을 보면서 미쳐 다 알아 들을 수 없었던 내용을 책을 통해 다시 읽는 재미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꽤 많았는데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바보광대 : 지금 처녀인 여자, 그러면서 나의 떠남을 비웃는 여자는, 오랫동안 처녀 못하지, 물건들이 더 짧아지지 않고서야.( 52쪽 )
이 말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 의미 없는 광대의 헛소리, 사실 리어왕에는 미친 리어왕과 거지로 변장한 애드가, 바보광대가 말도 안 되는 말들을 떠들어댄다. 하지만 이 대사는 헛소리라기보다는 셰익스피어가 글을 당시에는 통용 되는 은어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런 시대적 간극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원전에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 역자의 의도리라.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것이 ‘리어왕’이다. 리어왕은 딸들의 말을 믿고 자신의 영토 상속한다. 리어왕의 의도는 단순하고 순수했지만 결과는 부모형제간에 살육을 불러오는 비극에 불러온다. 고전은 시대를 막론한 보편성을 지닌 다는데 리어왕이 현대인들에게 전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세치 혓바닥으로 놀리는 말을 믿지 말라, 늙을수록 재산이 필요하다, 끝까지 의리를 지켜야 한다. 물론 이런 것도 틀릴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현대적인 관점에서 리어왕을 볼 때 참 잔인하다는 것이다.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배려한다하더라도, 부모가 자식에게 이런 저주를 퍼부을 수는 없다.
리어 : 그렇겠지 경
들으라, 자연이여, 들으라, 친애하는 여신이여, 들으라!
그대의 목적을 연기하라. 정말
이 짐승이 열매 맺게 하려는 의도라면!
심으라, 그녀 자궁 속에 불임을!
그녀 안에 든 증식의 기관을 말려 버리라,
그러면 결코 없으리로다. 그녀의 타락한 몸에서
아이가 솟아 그녀를 존경하게 될 일은! 굳이 낳아야 한다면,
악의에 찬 아이들을 만들어 주라, 그것이 살아
위협을, 자연에 어긋난 고통을 그녀에게 가하도록!
그것이 그녀 청춘의 이마에 주름을 낙인찍게 하라.
흘러내리는 눈물로 수로를 파게 하라, 그녀 두 뺨에,
그녀 모성을 온갖 심려와 인자한 행동을
비웃고 또 경멸하라, 그러면 그녀가 느끼리로다.
독사 이빨보다 더 모진 고통은
배은망덕한 새끼들 두는 것임을! 떠나자, 멀리! (퇴장) (46쪽)
이 대사로 딸에 대한 리어왕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는 백배 이해할 수 있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어떠한 경우에도 부모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리어왕은 저주를 자신을 배반한 두 딸에게만 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말로는 하지 않겠다는 코델리어에게도 냉혹한 처사를 보였다. 리어왕은 자식을 사랑하는 자혜로운 아버지와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분별력 없는 변덕쟁이다. 게다가 자신의 편의대로 왕위를 물려주고도 권위는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욕심쟁이다. 두 딸에게 배은망덕을 얘기하기 전에 부모로서의 자혜와 지혜가 부족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리어왕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인간다운 면을 보이는 인물은 애드가이다. 다음은 애드가의 대사인데 이런 비극에서 보여주는 유일한 자비이자 희망이다.
애드가 : 용서는 서로 하자꾸나.
나도 너 못지않게 피를 보았으니, 에드먼드,
비록 더 많은, 더 많은 악행을 네가 내게 했지만.
내 이름은 에드가, 네 아버지의 아들이다.
신들은 공명정대하지, 그리고 우리가 즐기는 악덕을
수단으로 우리에게 역병을 내린다.
그분이 너를 만드신 그 어둡고 사악한 곳이
값을 치르게 했다. 그분께 그분의 두 눈으로
리어왕이 가장 이성적인 말을 할 때는 오히려 광인일 때였다.
리어 : 그리고 비참한 거지는 똥개가 무서워 줄행랑을 치지? 거지 서 너는
보는 게야. 권위의 위대한 상을, 개의 공무에 복종하는 거지.
너 매질 담당 관리 놈, 네 피비린 손을 멈추지 못할까!
왜 그 창녀를 때리려는 게야? 네놈 등을 벗겨야지.
네놈이 할딱할딱 정욕을 퍼질렀던 그녀를
퍼질러 쌌다고 네가 매질하다니 고리대금업자가 사기꾼을 목매다누나.
누더기 옷 틈새로 작은 악행이 보이는 건 살이야.
법복과 모피 가운은 모든 것을 숨긴다. 죄악에 금칠을 해 봐.
그러면 정의의 강건한 창도 맥없이 부서진다.
누더기를 씌우면, 난쟁이 지푸라기도 그것을 꿰뚫지.
·······, (150쪽)
애드가 : 오, 조리와 부조리가 뒤섞였어!
광기 속 이성이로다!
리어왕은 권력의 자리에서는 볼 수 없던 것을 광인이 되어서 느끼고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미친 후에야 비로소 이성을 발휘한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의 대사는 저작거리에서 나도는 말처럼 천박하고 잔인하다. 품위라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떠오른 것이 우리 전통극인 마당극과 탈놀이였다. 마당극과 탈놀이는 대중문화이기 때문에 그 입담이 거칠다. 이런 거칠면서도 재기발랄한 대사가 셰익스피어 혼자 썼다는 것이 놀라웠고, 대극장에서 품위를 갖추고 관람해야할 것 같은 셰익스피어 작품과 우리 전통 극이 닮았다는 것이 흥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