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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지 마, 니들 얘기야 - 잊힌 룸펜 흙수저와 문화자본가로 전락한 좌파 대안연구공동체 작은 책 - 인문학, 삶을 말하다
장의준 지음, 대안연구공동체 기획 / 길밖의길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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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이 책이 생각난다. 다시 읽어 봐야겠다. 날카롭고 매력적인 글. 찾아 읽고 싶어지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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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쿠스 모르티스 - 죽음을 함께 맞이하는 친구
리 호이나키 지음, 부희령 옮김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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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어서 죄송합니다. ㅗ.ㅗ

<아미쿠스 모르티스>

장마는 내 발을 묶고 내 눈을 촉촉히 하여 독서에 적당한 환경을 만들었다. 덕분에 봄부터 펼쳤던 <아미쿠스 모르티스> 읽기를 마칠 수 있었다. '아미쿠스 모르티스' 는 죽음을 함께 맞이하는 친구들이란 뜻이다.

내가 이 책을 읽은 까닭은 두 가지이다. 첫째 이반 일리치의 순고한 죽음을 함께한 리 호이나키의 책이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는 자본주의로 구조화된 학교, 병원과 같은 사회체제를 거부한 인물이고 그런 사회체제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모습을 구현해 냈다. 리 호이나키는 그런 이반 일리치의 절친으로 누구보다 일리치를 잘 이해하고 있으며 일리치와 같은 사유체계로 세상을 보고 삶으로 실천한다. 리 호이나키의 글을 읽으면 읽는 동안, 읽은 후에도 우리 삶에 밀착된 것(의료, 보험, 장례, 죽음, 학교 따위 )들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나는 호이니키의 책을 찾았다.

이번엔 왜 하필이면 '아미쿠스 모르티스'인가,
나와 나의 가까운 사람들은 이제 죽음과 점점 가까워지는 나이가 되었다. 부모님들에겐 더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그 죽음을 맞이 해야할지 알지 못 한다. 그래서 내 주변에 다가오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생각해 보기 위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호이나키는 이반 일리치와 마찬가지로 카톨릭신부 교육 받은 사제였다. 따라서 이 책은 매우 종교적인 관점에서 아름다움과 죽음, 그리고 장례에 대해 기술되고 있다. 그래서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고 조금은 지루한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지닌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 삶과 죽음, 병과 정의 그리고 장례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 스스로 실천을 할 수 없어도 나와 다른 태도(일반 적인 상식 밖의 태도)를 지닌 이들을 존중하고 존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호이나키는 맥도날드에서 일하는 친절한 장애소녀을 통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이 그녀의 존재 이유인듯 말하고 있다. 이 장면에서 나는 호이나키가 중세적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했다. 중세시대 귀족들은 천국에 가기 위해 걸인에게 자비를 베풀었고 걸인들도 귀족들을 천국에 보내기 위해 자신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수치심 없이 구걸을 하였다고 중세의 산책이라는 책에 기록된 것을 기억해낸 것이다.

이런 중세관을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왠지 꺼림직하다. 마치 장애인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존재 가치를 찾기 보다는 비극적인 자신의 삶을 무기력하게 수긍하고 타인의 삶을 위해 존재 가치를 찾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그가 말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을 좀 순수하게 보기로 했다.

그 것은 장애소녀가 친절하기까지 하여 감동을 받은 것이고 그것은 외형적으로 아름다운 사람이 친절한 것 보다 훨씬 감동적이어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그녀의 고통과 불행은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데 기여 했다는 뜻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그것은 하느님의 조화를 찾아 낼 수 있는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다.

이반 일리치는 <병원이 병을 만든다>라는 책을 쓸 정도로 병원 사업을 성장시키는 현대 사회 구조체계를 비판한 사람이다. 그런 그였기에 얼굴에 혹이 생겨서 점점 커졌지만 병원에 가지 않고 고통 속에 살다 죽었다. 일리치는 그런 고통을 참는 이유가 병원치료에 대한 반감 때문만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지신 예수의 고통을 체험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만약 이 또한 하느님의 뜻이라면 왜 하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얼굴에 혹을 만들었을까, 내 생각에 그것은 하느님이 욥을 시험하셨듯 일리치를 시험에 들게 해 그를 세상에 드러내게 하려는 뜻인듯 하다. 왜냐하면 그의 길이 예수의 길 처럼 정의롭기 때문에 고통 속에 있는 그를 빛으로 삼으려 했음이다. 그렇지 않고서 자본주의 병원 시스템을 비판한 일리치 얼굴에 혹이 생기는 우연이 만들어질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예수를 믿는 수 많은 사람들은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있나 묻고 싶어졌다. 작은 고통에서도 벗어나게 해달라고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종교인이라면, 나처럼 종교인 아닐지라도 내게 찾아온 고통을 통해 예수의 고통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그러면 스스로에게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반 일리치처럼 병원 치료를 거부하자는 뜻은 아니다.

한편, 호이나키는 친구 제리가 머무는 요양원을 찾아 간다. 제리는 그닥 똑똑한 사람도 큰 명성이나 사회적 기여도가 있는 사람이 아닌 종교 교육자였다. 그러나 그는 세속적인 것을 욕망하지 갖지 않고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요양원에서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만족해 하는 모습을 보였다.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하는데 잘 살려면 자유로워져야 한다. 자유로워 지려면 세속의 것을 욕망하지 말아야 하는데 제리는 그것을 실천하기에 너무나 좋은 구조를 지녔다고 기술되어 있다. 어쩜 호이나키가 들려준 삶과 죽음 중에 그나마 실천 가능한 모델이 아닐까 싶다. 세속적 욕망을 죽이는 건, 일리치가 진리를 욕망한 것 보다는 쉬울듯 하다.

호이나키가 멕시코에 살던 때였다. 어느날 신문에서 끔찍한 기사 하나를 보게 된다. 얼음송곳을 든 청년이 마을버스 기사를 상대로 강도 행각을 버리다 실행하지 못하고 마을버스에 탄 승객들에 의해 제압 당하는 과정에서 얼음송곳에 의해 살해 당한다. 이 끔찍한 사건을 통해 호이나키는 예수의 현현을 발견하고 죽은 청년을 위해 기도를 한다. 청년은 비록 비극적으로 죽었지만 누군가 그 죽음을 통해 예수의 억울한 죽음을 떠올리고 기도하는 동력을 만들낸다 것이다.

난 여기에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적어도 기도하는 힘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수 없이 많은 사건 사고를 접하기 때문에 타자화 하는 일에 익숙하여 깊이 공감하고 아파하지 못 한다. 누구를 야단하는 게 아니라 내 종아리를 치고 있는거다.

나치에 대항한 백장미단(기독교 청년 단체) 한스와 조피의 하느님과 함께하는 정의로운 죽음을 감동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들이 어떻게 종교적인 인간으로 성숙해 왔는지, 자신들이 알게 된 하느님의 길을 온전히 실천하는 삶을 살다가, 불의에 맞서 항거하여 얼마나 평화롭고 온화하게 죽음 맞이 했는지, 세심하게 보여주고 있다. 나치에 동조했던 당시 교황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멕시코의 작은 마을에서 치뤄지는 장례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이 장례식을 하게된 이유는 동물과 달리 우정을 나누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은 교회에서 이웃들이 모여 주일 예배를 드리며 장례의식이 일상속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멕시코의 작은 마을에서 인간적인 깊은 우정을 느꼈고 장례식의 참 의미를 깨달았다는 내용이다.

이 글을 마무리 할 때쯤 내가 요즘 빠져있는 팟빵 두철수 리오타르편을 들었다.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이티의 핵심은 그 동안 추구해 오던 재현과 해방이 아니라 애도에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각자가 애도하는 삶을 지속하며 살때 변화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읽은 아미쿠스 모르티스가 종교적인 삶인 동시에 포스트모던이티적 삶을 추구하는 책이었다는 것을 알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내가 찾아낸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에 대해 정리해 보자. 나의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는 있어도 부모님이나 타인의 죽음을 내가 선택할 수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당신들이 생각하시는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하시도록 돕는 일이다. 그렇지만 내가 앞서서 연명치료를 한다든지 병원에만 의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시는 동안 정신을 잃지 않는 한 당신이 살아 온 삶을 유지 시켜드리고 돌아가신 뒤엔 깊은 애도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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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의 탄생 - 어르신과 꼰대 사이, 가난한 남성성의 시원을 찾아서 이매진의 시선 2
최현숙 지음 / 이매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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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의 탄생> 읽고

10년전쯤 이었을 거다. 남자 미용사가 머리를 깎다가 김영삼대통령 묘자리 이야길 하면서 한 나라에 대통령이 자신의 집안에서 탄생했다는 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냐고 하며 말을 꺼냈다. 그래서 무슨 말이냐 나라에 해악을 끼칠 바에야 차라리 무지랭이 농사꾼으로 사는 것보다 못하다고 설전을 버릴 일이 있다.

<할배의 탄생> 작가 역시 가난한 이들이 세상에 해를 덜 끼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 반가웠다. 다만 차이라면 현실 속에서 노숙자나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만날 때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는 생각해 볼 문제였다. 예를들어 전철 더러운 옷에 씻지도 않아 냄새를 품기는 노숙자가 내 옆에 앉는다면 난 어떤 태도를 취해야하나, 묵묵히 목적지까지 가면서 혹 그가 말을 시키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할 수 있을까, 십중팔구는 일어나 다른 칸으로 가거나, 좀 미안하면 다음 역에서 내려 다음 차를 기다릴 것이다.

글을 읽고 이해하고 안타까워하지만 생활속에서 만나 이웃을 대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이웃으로 마주하고 그들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다. 그들 이야기 속에서 당시 사회적인 이슈를 접점이 되는 부분을 신문기사나 문헌을 찾아 박스로 메모해 주었다. 나처럼 현대사에 어두운 독자에겐 큰 도움이 되었다. 사회 문제가 한 개인의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알려주는 간접적이지만 효과적인 장치였다. 이 장치가 없었다면 두 노인의 이야기는 넋두리처럼 들렸을 것이다.

태극기 집회가 등장하면서 <할배의 탄생>이라는 책이 나왔다는 신문기사와 작가의 칼럼을 읽고 페북으로 작가와 친구신청을 했다. 여러가지 면에 흥미로운 이력을 가지신 작가였다. 내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한 작가의 이력은 요양보호사와 생활관리사 일을 했고 그 일터에서 구술생애사라는 조금은 낯선 일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구술생애사가 기술한 글은 서사적이면서도 서정적이며 사실적이었다. 한 사람의 역사인 동시에 개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기록자가 묘사하지 않아도 화자의 어투나 어휘 속에서 개성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서정성을 발견할 수 있다. 소설로서는 접하기 어려운 사실성 예를 들어, 엄마를 잃은 형제간의 애틋함 보다는 상실의 상처로 폭력성이나 자기 방어를 하다보니 가장 약한 동생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인다든지. 전쟁터에서 느끼는 공포와 그 이후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등이 생생하게 전달되어 그 어떤 소설보다도 흥미롭웠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글을 가난 밖에서 지켜보거나 조사를 통해 일정한 의도를 갖고 쓴다는 것은 어떤 부분에선 한계에 봉착할 수 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재구성 하지 않은 가난한 이들의 구술 기록은 가장 사실에 근접해 있다. 물론, 개인마다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할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사실에 근접한 이야기이다. 또한 성공한 이의 자서전 읽는 것보다 의미 있다. 왜냐 가난한 이들이 세상을 덜 해롭게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구술하는 동안 화자의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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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마르크스 Bye, 자본주의
강상구 지음, 손문상 그림 / 레디앙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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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쓰려고 모니터 앞에 앉았는데 머릿속이 멍하다. 책이 어려워서도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그런 것도 아니다. 너무 긴 시간을 두고 읽었더니 앞쪽 내용은 백지장처럼 하얗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식 자본주의는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자본주의 속성은 뼛속까지 배어있고 어설픈 복지정책이 포장되어 있는 형국이다.
어설프나마 우리식 자본주의는 지난 10년 동안 복지정책을 꾸준히 진행해 왔다. 그런데 새로운 정권과 함께 뉴 라이트의 물결은 어설픈 그마저 흔들고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이야기하는데 복지정책을 왜 걸고 넘어지냐 하면, 자본주의 대안으로 복지정책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복지정책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따져보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Hi마르크스의 Bye자본주의」에서 말하는 자본론이 현 시점에서 새롭게 조명 받고 논의 되어야하는 까닭을 찾아보고자 한다.
안타깝게도 필자는 지식과 생각이 미천한 탓에, 깊이 있는 부분까지 논할 수는 없고 현실 속에서 느끼는 부분만 간략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나라 복지정책이 최소 수혜자에게 혜택이 돌아가기엔 복지시설 운영자들의 근성이 너무나 자본주의에 물들어 있다. 어쩌면 실무자들의 자본주의적 근성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복지정책이 체계적이지 못하고 관리에 허점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기부금 관리가 그렇다. 기부문화가 발달한 미국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경우, 국가에서는 국가지원금만 관리하고 있고, 기업에서는 자신들이 지원하는 사업을 홍보하기 바쁘다. 따라서 복지시설에선 얼마든지 이중장부가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또한 아동복지센터니 노인요양센터니 하는 곳을 민간인에게 맡기고 일정금액을 지원하여 운영하도록 되어 있는 시스템이 문제이다. 복지시설이 운영자 개인의 생계가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복지시설이라는 면목 하에 온갖 혜택은 다 받으면서 어려운 이웃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교묘하게 빼돌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복지정책이 이런 식으로 끌고 간다면 자본주의 대안이 될 수 없다. 또한 수혜자들의 의식의 문제도 심각하다. 기초수급대상이 되기 위해 편법을 쓰는 것은 다반사고 아이들에게 조차 거짓을 꾸미게 하는 일까지 생겨나고 있다. 그 때문에 정말로 수급대상이 되어야하는 사람들이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 미덕으로 여기는 미국식 재벌들의 기부문화 역시 자본주의 문제점의 대안일 수 없다. 미국 재벌들의 기부문화는 노동자에게 정당한 임금을 주지 않고 노동력을 착취해 배를 불린 다음 던져주는 개뼈다귀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기업인들의 기부문화 역시 자본주의 문제점의 대안 일 수 없다.
이에 비해 마르크스의 이론은 구린 데 없이 깔끔하다. 노동자들을 정당하고 당당하게 설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받아야할 정당한 임금을 당당하게 받을 수 있게 되면 가난이 악순환 되는 일이 없을 것이고 국가는 저소득층을 위한 막대한 복지예산을 지불할 일도, 서민들이 구차하게 가난을 위장할 일도 줄어들 것이다. 기업인들은 선심 쓰듯 생색내며 기부하지 말고 노동자들에게서 걷어 들인 잉여가치를 노동자에게 지급하여 노동자들이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건강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기업은 소비할 대상 필요하고 노동자는 일할 곳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을 착취해 쓸 돈이 없게 되고 기업은 생산한 물건을 팔 대상이 없게 된다. 그러면 경제공황이라는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미래 사회를 생각하는 기업이라면 눈앞에 보이는 이득만을 따지지 말고 우리 사회와 국가가 원활하고 정의롭게 돌아갈 수 있도록 지도자로서 책임경영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이 기업과 노동자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며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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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제발 잡히지 마 - 끝나지 않은 이야기, 이주노동자들의 삶의 기록
이란주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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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란주님은 현재 <아시아인권문화연대> 대표로 일하고 있고 15년과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했다. 전작으로『 말해요. 찬드라 』가 있다.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는 나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전철이나 거리에서 거무틱틱한 피부에 커다란 눈을 가진 사람들과 마주치는 일은 이제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이방인이고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 아빠, 제발 잡히지마 』에서 실은 저자의 글 한마디가 이주노동자와 내가 어떤 관계인지를 깨닫게 하였다.
우리는 현대를 살아오면서 깊은 열등의식에 빠져있는 것 같다. 백인 중심 세계로부터 유색인종이라는 열등감, 중국 대륙으로부터 주변국가라는 열등감, 일본인들로부터 받는 침략의 상처 따위로 열등감에 쌓여 스스로 다른 민족을 착취하거나 경멸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 역시 우리보다 나약한 민족 앞에서 얼마나 거만한지, 그리고 얼마나 악랄한지 거울 속에 나를 들여다보는 느낌이 든다.
저자는『 아빠, 제발 잡히지마 』134쪽에서 외국인 연수제도가 ‘현대판 노예제도’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고 하였다. 이주노동자와 관련 있는 일을 하는 이들에게 일상적인 이야기이겠지만 나에겐 생소하게 다가왔다. 낯설어서 강렬하다고나 할까, ‘현대판 노예제도’란 말을 통해, 갑자기 내가 그동안 그렇게 경멸했던 악의 축이 그들에겐 우리의 모습으로 그려질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마치 흑인노예를 부리고 아시아 곳곳을 식민지로 지배했던 백인인 것처럼 느껴졌고, 소수민족을 오랑캐로 업신여기는 중국인처럼 느껴졌다, 우리민족을 침략하고 악랄하게 착취한 일본인처럼도 느껴졌다. 물론 모든 백인이나 중국인 일본인이 직접적으로 다른 민족을 학대하거나 착취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식민지배인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본국의 평범한 소시민이라 할지도 간접적인 혜택을 보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부의 일부가 어디에서 기원하는지 알아야한다. 아직은 만족스럽지 못하더라도 복지부분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래서 저소득층의 생계뿐만 아니라 교육문제에도 힘쓰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 이주 해와 살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은 가족의 목구멍에 풀칠하기 위해, 국가의 내란을 피서 살고자, 우리나라 저소득층도 기피하고 있는 3D업종에서 일하고 있다.
이런 힘들고 위험한 일이라도 오랫동안 계속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그들의 바람이지만, 계약기간 만료로 인해 강제추방을 당한다. 그런 강제추방이 두려워 목숨을 건 사투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 그들의 현실이다.
『 아빠, 제발 잡히지마 』에선 이러한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이 생생히 그려져 있으며, 우리 또한 그들의 고통으로 인해 얻는 이익의 수혜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특별이 이 책이 다른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책에 비해 좋았던 것은 단순이 그들과 함께 하며,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있지 않고 그들이 지닌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돕고 해결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답답한 푸념이 아니라, 희망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진취적인 기상이 느껴진다.
작가 이란주는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일을 하면서 외국인 노동자를 구출하는 첩보작전을 벌이기도 하고 상주가 되기도 한다. 법원을 드나드는 일은 일상이고,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그들의 고향을 찾는 위험한 일을 감수하기도 하고, 죽은 이의 사인을 알아내기 위한 부검현장에 직접 참여하기도 한다. 그런 그라고 해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항상 반가운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하기 버거운 일들이 태반이고 그런 일들을 마냥 지켜볼 수밖에 없는 답답한 심정을 고백하기도 한다.
그래도 그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새로운 희망을 품는다. ‘꼬마도서관’을 만들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찾아가 책을 빌려준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지적능력 향상뿐만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들이 무슨 책을 보냐고 하는 주변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이다. 또한 이주노동자 연대를 결성하여 그들이 귀환해서 잘 살 수 있도록 돕고 송출비용을 최대한 낮추고 충분한 교육을 통해 이주노동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문제를 최소화하도록 노력하는 등 다양한 일들을 모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우리나라가 간호사를 송출하는 것과 관련지어, 외국인 노동자 한 사람이 다른 나라에 가서 일을 하는 것은 국가에서 키워 놓은 인적자원을 빼앗기는 것과 같다고 역설하고 있다. 사회에서 한 사람의 인적자원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경비를 투자하는데 그런 인력을 선진국에서 얼마간의 돈을 더 주고 데려간다면 선진국만 이익이라는 것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선진국의 지식과 기술을 익혀 자국으로 돌아와 보급해야 국가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력 송출국이나 도입국에선 이주노동자 송출 제도를 정비하여 저임금에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것을 박고, 국민과 이주노동자의 권리에 차별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책을 읽은 뒤, 전철이나 거리에서 보이는 외국인들이 친근감 있게 느껴졌다. 그들이 길을 묻거나 도움을 청한다면 선뜻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고 이웃에 있다면 가깝게 지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마 저자 역시 이런 작은 변화를 바라며 바쁜 와중에 책을 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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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버들 2009-07-07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이버 콩기부도 해주세요.
http://happylog.naver.com/asiansori.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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