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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의 전화박스
도다 가즈요 지음, 다카스 가즈미 그림, 이선아 옮김 / 크레용하우스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인들의 감성은 독특한데가 있다. 우리의 감성이 굵고 투박하지만 도톰한 광목 같다면 그들의 감성은 가늘고 섬세한 깔깔이처럼 야리야리하다.
아기를 잃은 여우는 어느 날 전화박스에서 전화를 하는 아이를 보게 된다. 아이는 병 때문에 떨어져 사는 엄마에게, 매일 매일 전화박스로 가서 전화를 한다. 여우는 전화를 거는 아이를 보고 죽은 아기 여우를 생각하며 위로를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박스가 고장 난 것을 보고 여우는 아이를 위해 전화박스가 되어 준다.
아이의 전화 통화 소리를 들고 여우는 아이가 곧 엄마 곁으로 이사 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이는 떠나고 여우는 아이가 한 것처럼 전화박스 안에 들어가 수화기를 든다. 그러자 전화박스는 마지막 힘을 짜내 불을 밝혀주고 여우는 아기 여우에게 전화를 한다.
여우가 아이의 전화박스가 되어 준 것처럼, 전화박스도 여우를 위해 불을 밝혀 준다. 엄마 여우는 그 불빛 아래서 행복한 얼굴을 하게 된다.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이(사람)의 마음을 아기 잃은 엄마 여우(동물)가 이해하고, 그 엄마 여우의 마음을 전화박스(무생물)가 온힘을 다해 위로해 준다는 너무나 샤머니즘 같은, 그런데도 감동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샤머니즘 같다는 까닭은 옛날 우리 조상들은 무생물인 물건에도 귀신이 붙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의 물건은 태우는 관습이 있다. 무생물인 물질에 영혼이 깃든다는 생각은 일본 풍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니 여우가 둔갑하여 전화박스가 되고 고장 난 전화박스가 여우를 위해 불을 켠다는 이야기가 샤머니즘적이란 수밖에.
그런 동양의 샤머니즘이 배어 있는 상상력과 전화박스라는 현대적인 물질을 결합해 이처럼 따뜻한 동화를 만들어낸 작가는 어떤 감성을 지닌 인물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작가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또 다른 까닭은 그가 썼다는 다른 작품들의 제목 때문이다. <없어없어 고양이가 잃어버린 것>, <달밤의 고래>, <곰이 아니라 여우>,<개구리 가사야>, <유원지는 쉬는 날> 뭔가 알듯 말듯 한 제목이 풍기는 건, 눈에 선명하게 들어나지 않은 부분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처럼 아련한 감동을 안겨주는 작가는 어떤 감성을 지닌 사람인지 더욱 자꾸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