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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 앞도 모르면서
남덕현 지음 / 빨간소금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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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한 치 앞도 모르면서 >

어젯밤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가을비는 내릴 때마다 점점 추워지고 봄비는 내릴 때마다 점점 더워진다. 봄이나 가을이나 비가 내리는 원리는 같을진데 공전 주기로 인해 날씨에 미치는 영향이 달라 보이고 새로운 진리를 만들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 인생사다 보니 선후좌우 맥락을 빼고 보면 한 치 앞을 모른다는 것 자체가 진리처럼 보인다.

<한 치 앞을 모른다>는 책 제목을 보고 톨스토이의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떠올랐다. 톨스토이는 한 치 앞을 모르는 극단적인 예를 보여주면서도 선악의 갈등구조로 몰고 가기 보다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선을 추구하는 개개인의 삶이 승리자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에 비하면 남덕현의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사엔 선악이 없다. 그저 비루한 개개인들에게 아리지만 빛났던 추억들과 그런 추억을 묻고 늙어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천연덕스러운 충청도 특유의 해학이 있을뿐이다.

책 속에 드러난 충청도식 해학은 선문답처럼 매번 엉뚱한 의문으로 시작해서 엉뚱한 결말을 맺기 일쑤다. 그러면서도 그 이치가 어긋남이 없어 우리가 지닌 상식을 뒤집고 새로운 상식을 만들어 내며 밑도 끝도 없고 선악도 없으며 좌우도 없다. 이런 말놀이는 돈도 장소도 장비도 필요 없다. 격식을 갖춘 충청도식 말투 덕에 과격해지지도 않고 언제나 약자의 편에서 좀 더 무식한 쪽의 주장이 승리한다. 부지런히 늙어 가도록 시간을 흘려 버리기엔 이만한 놀이가 없다.

1여년 전쯤 페북을 시작하면서 남덕현 작가를 알게 되었고 그의 책만 세권을 구입했다. 현란한 글 빨로 진실을 왜곡하는 이들 속에 정견을 논리적으로 밝히고 행동하는 남작가를 존경한다. '세상에 글과 말로 먹고 사는 일이 제일 추하다' 하신 조부의 말씀을 새기고 달걀을 주는 이에게 시집을 건내며 '시는 달걀'을 낳지 못한다는 작가의 말 속에 묻어나는 작가 정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작가가 세상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은듯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니 보석처럼 빛이 난다. 고맙고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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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 프랑스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드니 디드로 외 지음, 이규현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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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니 디드로의 소설을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를 읽고 오노레드 발자끄를 대하니 묘한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디드로의 소설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에 대해 해설서에서 ‘소설이자 소설론’이라는 이중성 갖고 있다고 하지만 내 보기엔 소설이 아닌 실제 이야기를 적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소설처럼 보인다. 반대로 소설은 실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소설인 것이다. 그러니 디드로가 시험적으로 발표한 이 작품은 실제 이야기를 그대로 옮겼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고는 반응을 살폈을 것이다. 실제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과 가상으로 소설을 쓰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하고 말이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는
“아주 착한 남자들과 아주 못돼먹은 여자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p38쪽)로 시작하여 이 두 가지 사례를 대비시켜 한 가지씩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상사는 거의 그렇게 되어 있소 선량한고 성실한 따니에 같은 남자 있으면, 신은 그런 남자를 레메르 같은 여자에게 보내오. 착하고 정숙한 라 쇼 같은 여자가 있으면, 그런 여자는 카르데유 같은 남자의 몫이 될 것이오. 그래야 모든 것이 아주 훌륭하게 풀려나가지 않겠소.”(p38)

못된 남자는 착한 여자를 만나고 착한 남자는 못된 여자를 만나는 것이 세상에 이치라며 소설 같은 현실 속 이야기를 들은 후, 발자끄를 대하니 씁쓸한 미소를 짓게 된다.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천재적인 소설가 발자끄는 여성편력가로도 유명하다. 발자끄는 33세에 유부녀인 폴란드 백작부인과 사귀기 시작해 18년 만인 51세에 결국 결혼했지만 5개월 만에 병으로 숨졌다. 늙은 우크라이나 지주와 결혼한 백작부인 한스카는 남편이 죽으면 발자크와 결혼하기로 맹세했고, 발자크는 그녀에게 사랑의 편지를 지속적으로 보냈다. 그 편지는 발자크 사후 ‘이국 여인에게 보낸 편지’로 발표됐다.

굳이 발자끄를 못된 남자라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어느 것이 더 소설적인가 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 그 자체만큼 소설적인 것인 있는가 말이다.
디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소설도 바로 이 소설 같은 현실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모든 소설이 현실적이지만은 않다.

마르그리뜨 유르스나르의 <어떻게 왕부는 구원 받았는가>처럼 신비스러운 이야기도 있으니 말이다. 한나라 시대 화룡점정(畵龍點睛) 실현해 낸다고 소문난 왕부라는 화공과 그의 그림에 매료되어 많은 재산가 아름다운 부인까지 잃고 제자가 된 링의 이야기다. 링은 스승을 자기 목숨보다 아끼고 사랑해 마치 입안에 혀처럼 살갑게 왕부를 모셨다. 어느 날 왕부와 링은 느닷없이 황제에게 불려가 죽게 되었다. 이유인즉슨 황제는 어려서 궁속에 갇혀 그 화공의 그림만 보고 자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이 그 그림과 같은 줄 알았는데 세상을 나와 보니 그림만큼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다.

“왕부야, 요술을 부려 짐으로 하여금 짐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혐오하게 하고 짐이 소유하지 못할 것을 열망하게 한 너에게 무슨 형별을 내리는 것이 합당할지 모색하다가, 오아부야, 너의 두 눈은 너에게 네 황국을 열어주는 마법의 문이니, 너를 빠져나올 수없는 유일한 가옥에 가두려면 네 눈을 불로 지져 못 보게 해야겠다고 결정 했노라, 또한 네 손은 너를 네 제국의 심장부로 이끄는 열 갈래 중 두 길이므로, 너의 두 손을 잘라야겠다고 결정했노라. 알아들었느냐, 늙은 왕부야?”(p293)

황제가 왕부를 죽이려하자, 링은 칼을 들고 황제에게 덤벼들었고 호위병에게 잡혀 목숨을 잃는다. 황제는 마지막으로 왕부에게 젊은 시절 그리다만 그림을 다시 그릴 기회를 준다. 왕부는 수평선을 그리고 바다를 그리고 물결을 그리자 궁 안이 물에 잠긴다. 조각배를 그리자 링이 살아나 왕부를 태우고 그림 속으로 사라진다.

참으로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소설이다. 그러면 <어떻게 왕부는 구원 받았는가>는 디드로가 말하는 소설이 아닌가? 디드로가 쓰고 싶어 했던, 아니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어 했던 소설은 어쩌면 이처럼 비현실적인 이야기 일지 모르겠다. 너무나 현실적인 것은 소설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소설 같은 실제 이야기를 작품으로 보이고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소설을 읽고 싶은가, 후자이다. 소설 속에서나마 현실을 떠나 가상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고 싶다. 황제처럼 현실세계가 그림과 같지 않냐 하는 것은 투정에 불과하다. 링처럼 누더기에 구걸로 생계를 이을망정 즐거운 마음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짊어지고 다니는 구도자의 모습으로, 현실엔 없지만 허구 속에서나마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심정으로, 소설을 읽는다. 사실이 아니라 허구를 즐기고 실물이 아닌 그림을 보는 것은, 허무하게만 느껴지는 현실을 잠시나마 벗어나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즐기고 간직하고 싶은 마음일 게다. 어쩌면 그 것이 현실에서 재현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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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돌의 도시 - 생각이 금지된 구역
마누엘 F. 라모스 지음, 변선희 옮김 / 살림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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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미래뉴스>라는 어린이 도서를 보았다. <미래뉴스>에선 우리사회가 미래에 어떻게 변화 될지, 어린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고 있었다. 미래에는 종이 책이나 노트가 없어지고 전자기기가 그 역할을 대신 할 것이며, 모든 지식을 간편히 휴대할 수 있는 전자기가 영상으로 알려주기 때문에 문자도 사라지고 지금처럼 지식이 중요한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고 하였다. 전자기기에 저장되어 있는 지식을 지식은 필요에 따라 선택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의적이 작업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라 하였고 예술, 예능, 스포츠가 따위가 각광을 받을 시대가 올 것이라 예측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계는 하나의 나라로 통합될 거라고도 하였다.
그런 맥락에서 <둥근 돌의 도시> 본다면 작가 설정한 49세기라는 배경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문자와 음악, 사랑이 금지된 세상, 가상 멀티미디어로 교육을 받고 버추얼 비전이 보여주는 세상만 바라보는 사람들. 그들에게 남은 책은 세계의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둥근 돌 속에 숨겨진 세권의 책. <전쟁의 기술>,<건강한 인생을 위한 에로틱한 요리법>, 노래집이 전부이다.
발전된 미래 세상에서 보물처럼 여기는 것이 오래전에 사라진 책이라니!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삶에 너부러져 있는 책들이 미래디지털 세상에선 고대 중국의 갑골문자처럼 특별한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과거 역사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충분히 근거 있는 말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고대 문자들에 대해 우리는 너무 신비롭게 생각하고 있거나, 우리는 지금 고대인들이 지닌 평범하지만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니가하는 의심이 든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전쟁의 기술>,<건강한 인생을 위한 에로틱한 요리법>, 노래집일까? 둥근 돌 속에 숨겨진 책이 불경이나 성경, 코란 같은 경전도 아니고 고전도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그리 소중하게 여기는 책도 아니고 특별한 가치를 진다고 보지도 않는, 흔하고 흔한 책 중에서 무작위로 고른 것 처럼 보인다.
왜? 저자는 이 책들을 둥근 돌 속에 숨겼을까? 저자는 아마도 20세기와 21세기에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분쟁의 근원이 고대 문자를 숭상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미래에는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전쟁의 기술>,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요리책 <건강한 인생을 위한 에로틱한 요리법>, 그리고 사람을 감동 시키는 <노래집>만 남아 사람들에게 전해진다면 더 이상 분쟁이나 전쟁 같은 건 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코믹한 발상은 스토리 전개에서도 계속 된다. <둥근 돌의 도시>는 코믹하다 못해 황당한 스토리가 전개된다. 그래서 기존의 소설을 즐기던 독자는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읽을 때처럼 경망스럽게 느껴져 불쾌감마저 든다. 그러면서 스스로 ‘내가 현대 소설을 좇아가지 못할 정도로 사고 굳은 거야.’라고 자책 하게 된다.
더욱이 이 책에선 갑자기 등장인물이 저자를 불러 불만을 호소하기도 하고 저자는 변명을 늘어놓는가하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등장인물이 많고, 사건도 너무 복잡하게 엉켜있다. 인간의 내면을 천천히 들어내는 소설에 익숙한 세대로선 따라 가기가 너무 벅차다. 그러고 생각해보니, 이 소설은 49세기 비주얼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란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서 읽어 음미하기 보다는 영상처럼 보는 것이 적합한 그런 책이란 결론을 내렸다.
기존의 소설에 익숙해 있던 내게 <둥근 돌의 도시>이 특별히 재미있거나 감동을 주지는 못 했다. 하지만 낯선 느낌 때문에 오히려 문학적으로 가치가 있는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고 저자의 깊이 있는 사고와 의도가 담긴 작품이란 사실은 부인할 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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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견딜 수 없어! - 아지즈 네신의 유쾌한 세상 비틀기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살림Friends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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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견딜 수 없어!>를 읽으면서 여유오줌에서 출판된 <원숭이 꽃신>이 생각났다. 단편 동화 같다는 것과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게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의 11개의 단편 중 처음에 실은 ‘덜컹덜컹’은 진보라는 이름하에 기계문명을 떠받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정휘창의 ‘원숭이 꽃신’ 이 떠올랐다. 발바닥을 보호해주는 꽃신을 오소리에게 얻어 신다가 결국, 꽃신 때문에 원숭이는 오소리의 노예 신세가 되었다. 솔직히 이 두 작품을 비교하자면, 원숭이 꽃신에 더 점수를 주고 싶다. 주제가 분명하고 깔끔하게 잘 된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철퇴’,‘그림자가 없는 사람들’,‘아, 우리 당나귀들 ’을 읽을 땐 권정생의 ‘새들은 날 수 있었습니다’라는 동화가 생각났다. 아지즈 네신의 이 세 작품 속에서 각각 권력자의 횡포와 억압을 비판하였고, 지식인이 탁상공론만하며 대중을 혼란에 빠지게 한다고 비판하였다. 이런 권력자들과 지식인들의 횡포에 순응하고 남의 일처럼 방관하는 우매한 대중역시, 아지즈 네신의 비판대상이다.
그런데, 아지즈 네신의 작품들이 사회를 비판하는 것에 그쳤다면, 권정생의 ‘새들은 날 수 있었습니다’는 문제해결 방식까지 보여주고 있다. 허수아비의 몽둥이가 무서워 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새들은 어린 새들이 먼저 하늘을 날자, 함께 하늘을 날아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아지즈 네신은 ‘행복한 고양이’에선 보이지도 않는 원에 갇혀 답답해하면서 고양만 그리워하며 원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아지즈 네신이 사회비판적인 글만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민중이 혁명을 통해 승리하는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권정생은 잠시나마, 4.19혁명으로 민중이 승리하는 경험을 했고 5.18 민주화 운동과 6월 항쟁을 통해 어떻게 민중이 민주화를 이루는가를 경험했다. 그러기에 어린 새들의 용기와 날 수 없었던 모든 새들이 함께 힘을 합하면 허수아비를 물리치고 창공을 훨훨 나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았기에 동화로 그려 넣을 수 있었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의 현대사가 그리 형편없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언론 탄압, 부자감세, 사대 강 살리기로 인한 환경오염 등으로 인해 여기저기서 시위와 지식인들의 시국선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MB정권에서는 자신의 진심을 믿어 주지 않아 답답하고 억울하다고 한다.
국민은 대통령의 진심에는 관심이 없다. 진심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판단기준이다. 국민이 바라는 건 언론의 자유이고 서민을 위한 정책이며, 단기적인 경제부양이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의 경제정책과 교육정책이다. 우리 국민들은 아지즈 네신에 등장하는 당나귀도 아니고, 하늘에 원을 그려 놓고 고양이를 부러워하며 누가 먼저 원 밖으로 나가길 기다리는 사람들도 아니다.
우리는 6월 항쟁을 통해 6.29 민주화 선언을 이끌어 냈으면, 야당으로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경험했으며, 군사독재 대통령을 법정에 세운 경험이 있다. 6,70년대의 국민이 아니란 말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에서는 사회.정치적인 비판뿐만 아니라, 아지즈 네신이 지닌 종교에 대한 비판, 인간 본성에 관한 비판의식을 작품을 통해 볼 수 있었는데, 짧은 글 속에 오싹 할 정도로 날카롭고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동화도 외국 정창휘의 ‘원숭이 꽃신’이나 권정생의 ‘새들은 날 수 있었습니다.’ 같은 작품들은 아지즈 네신 작품처럼 외국에 소개되어도 손색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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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 가기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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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 가기』는 펭귄 출판사가 창립 7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한 문인들 70명의 작품 선집들 가운데 한 권이다. 이 중 드 보통은 70번째라는 상징적인 자리에 자신의 자리를 당당히 올리므로 산문가로써 확고한 위치를 보여준다. 이는 귀스타브 플로베르, 버지니아 울프와 나란히 이름을 같이하기에 그로서는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동물원에 가기』는 드 보통이 쓴 글 중 그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글만 모아 새로 엮은 책이다.
글쓰기에 관해서 드 보통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위대한 책의 가치는 우리 자신의 삶에서 경험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나 사람들의 묘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이들을 훨씬 더 잘 묘사하는 능력 또한 중요하다. 독자가 읽다가 이것이 바로 내가 느꼈지만 말로 표현을 못하던 것이라고 무릎을 쳐야 하는 것이다.(126쪽)
그의 에세이가 바로 우리의 무릎을 치게 한다. 그는 호퍼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황량함이 외로움을 달래준다고 한다. 그림 속 황량함과 외로움은 보는 이로 하여금 나 혼자만 외로운 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에 외로움을 잊게 한다는 것이다. 낯선 여행지에서 부딪치는 또 다른 외로운 여행자들 있다는 것만으로도 각자에게 위안이 된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 내게 불행이 닥치며 나와 같은 불행을 경험을 사람을 찾게 마련이니 말이다. 드 보통은 그런 공감을 호퍼의 그림으로 잘 묘사하고 있었다.
드 보통은 그림 통한 공감을 이야기하고 음악이나 풍경은 정신의 검열관이 잠시 한눈을 팔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당신의 일부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외려 생각도 쉬워진다. 예를 들어 음악을 듣고 있을 때나, 줄지어 늘어선 나무들을 눈으로 좇을 때, 우리 정신에는 신경증적이고 검열관 같고, 실용적인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의식에 뭔가 어려운 것이 떠오를 때면 차단해버리곤 한다. 이 검열관은 기억이나 갈망이나 내성적이고 독창적인 관념들을 두려워하고 행정적이고 비인격적인 것들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음악이나 풍경은 이 정신의 검열관이 잠시 한눈을 팔게 하는 것 같다. (19쪽)
어디 그림이나 음악, 풍경만 그러겠는가, 책 또한 우리를 일상으로부터 잠시 도피시키고 외로움을 달래주는 훌륭한 도구가 아닌가, 이처럼 그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사소한 생각들을 하나하나 풀어 다시 잘 엮어 놓은 것 듯하다. 바로 내 생각이야, 하지만 그처럼 이야기를 풀어 놓을 수 없기에 그는 작가이고 나는 독자이다.
그는 또한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한 남자가 자아를 잊고 그녀와 동일시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가장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가장 자신 있게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다. 상대를 향한 강렬한 욕망은 유혹에 필수적인 무관심에 방해가 된다. 또 상대에게 느끼는 매력은 나 자산에 대한 열등감을 동반하기 마련이니, 이는 사랑하는 사람의 완벽함에 자기 자신을 견주어 보기 때문이다. ( 43쪽 )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작아지는 내 모습이란 노랫말처럼 보편적인 감성을 드 보통 식으로 풀어 놓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매력은 보편적인 감성에만 머물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는 코밑 솜털이 있는 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는데 그녀가 그 솜털을 깎자, 그녀의 수많은 다른 매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욕망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코밑 솜털에 매력을 느끼다니 그 다운 발상이다.
이 책에 실린 그의 에세이가 모두 일상적인 것은 아니다. ‘일과 행복’이라는 텍스트에서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노동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특유의 가벼운 문체에 깊이와 무게 있는 내용을 실고 있다. 특히, 그가 들려준 오늘날의 노동과 직업을 갖게 한 기독교적 발상은 경악스러웠다.
메사추세츠 감독과 교회의 감독 윌리엄 로런스는 1982년에 이렇게 주장했다. “결국 부는 도덕적인 인간에게만 온다. 시편 저자가 말했듯이 가끔 악한 자가 번창하는 것을 보기도 하나, 그것은 가끔일 뿐이다. 경건한 삶에는 부가 따른다.” ( 76쪽)
오늘날 사람들은 사람을 평가할 때 제일 먼저 직업을 묻는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피고용인에게 주는 임금은 “바퀴가 계속 돌아가도록 칠하는 윤활유와 같다. 일의 진정한 목적은 이제 인간이 아니라 돈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드 보통은 노동에는 사업자와 노동자의 요구가 공존하지만, 둘 중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상업적 체제의 논리에 따라 언제나 경제적 요구가 선택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늘 불안하다.
그러나 그 슬픔은 이런 현실에 눈감고 일에 대한 기대를 극단적인 수준으로 올려버릴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슬픔이라고 한다. 인생은 오히려 고통일 수밖에 없다는 고전적 진리에 의존하는 편이 더 위로가 되고 좌절밖에 기다리는 것이 없는 희망의 길로 가는 발걸음을 막아주는 보호벽이 될 거라 한다.
드 보통의 글은 사소한 것을 특별하게 묘사하는 매력이 있다. 또한 깊이 숙지한 내용을 가벼우면서 감성적인 문체로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탁월한 능력을 소유했다. 그러니 그의 말처럼(위대한 책의 묘사하는 능력) 스스로를 대가의 반열에 이름을 나란히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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