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뇌 - 좌선은 위대한 뇌훈련법이다
아리타 히데호.겐유 소큐 지음, 이성동 옮김 / 운주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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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뇌」건대 알라딘 중고매장에서 발견한 책이다. 몇 년전 시청 도서관에서 발견해서 구입한 「비갸나 바이라바」 보다 더 재밌게 읽었다. 아무래도 다양한 책이 많은 곳에서 책을 고를 필요가 있다. 책 한 권이 군더덕이 없이 꽉찬 느낌이라 좋았고 뇌와 선에 대해서 애매한 신비감을 조성하지 않아 좋았다.
의미도 모르는 불교 경전을 외우는 것이 뇌파에도 좋고 공사상과 관련이 있다는 논증이 흥미로웠다. 앎을 습하는 것이 행이고 머리에서 배로 내려오는 것이라는 주장은 「비갸나 바이라바」을 읽으면서 가졌던 배에 대한 의문점을 풀어주었다.
또한 지옥과 천당을 오가는 우리의 삶이 새옹지마라 붙잡고 있지 말고 정보처리 하듯 흘려보내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도 애매한 참선방법 보다 선명하게 다가왔다.
끝으로 내게 가장 실용적으로 쓰일 부분은 언어로 뇌를 지배하는 방법을 설명한 부분이다. "무엇이 될 것이다.","무엇이 된다"라는 언어 표현이 아니라 "무엇이다","성취했다"라는 표현이 뇌를 속일 수 있고 신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제 다 낫다" "건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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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와 기계의 원리
데이비드 맥컬레이 글 그림, 박영재.박은숙 옮김 / 서울문화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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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릴적 정말 궁금한게 많았는데....,진작 이런 책이 있었으면 얼마 좋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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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 - 서로 다른 입장에서 들려주는 이야기
브리타 슈바르츠 외 지음, 윤혜정 옮김 / 청어람주니어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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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쥐 팥쥐, 신데렐라, 헨젤과 그레텔의 공통점은 계모가 악녀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중국신화에 나오는 순임금은 계모의 온갖 핍박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지극한 마음으로 섬겨 왕의 자리에 오른다. 그래서인지, 계모하면 왠지 전처의 아이들을 학대할 거라는 선입견이 있다. 하지만 모든 계모가 다 전처의 자식을 학대한 것도 아니고, 학대한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의 생각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니다. 더욱이 오늘날처럼 부모의 이혼과 재혼이 많은 시대에 계모에 대한 편견은 새로운 가정을 일구게 되는 가족들에게 큰 걸림돌이다.
또한 아이들은 키울 때 유의해야 할 점 중 하나가, 자기 아이의 이야기가 실제 사건의 전부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말만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친구와 싸우고도 상대방의 잘못만 이야기한다거나, 선생님께 야단맞은 이야기는 빼고 칭찬받은 이야기만 하곤 한다. 아이말만 믿고 학교에 갔다간 실망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아이들과 대화할 땐 전후 맥락을 찬찬히 살피거나 뭔가 다른 것이 있을 거라 생각해보아야한다. 그렇다고 아이를 너무 다구 쳐서도 안 된다. 어떤 사건이 벌어진 후에 신문하듯 하지 말고 평소에 대화 할 때나 <진짜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처럼 서로 다른 입장에서 들려주는 책을 읽으면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진짜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는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를 패러디 하여 계모와 아이들 두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그림 동화이다. 어린이들은 ‘진짜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를 통해 두 입장의 이야기를 다 들으므로 해서, 계모에 대한 편견을 버릴 수도 있고 자신들이 평소에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기는 아주 단순한 말이지만, 마음을 다스리고 인격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매우 핵심적인 테크닉이다. 아무리 화나는 일도 상대입장에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으며, 오히려 상대도 돕고 나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을 찾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주 작은 사회의 아주 작은 분쟁도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며, 세계에서 벌어지는 국가 간의 분쟁도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하는 까닭에 벌어진다. 어린이들이 <진짜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같은 동화를 읽으면 고정관념(固定觀念)을 깨고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을 키워 크고 작은 싸움을 막는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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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된 장난 마음이 자라는 나무 22
브리기테 블로벨 지음, 전은경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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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못된 장난>

오늘 낮에 인터넷에서 중학교 2학년 남학생이 같은 학교 남학생 3명에게 폭행을 당해 사망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저녁 뉴스에선 한 여학생이 여러 명의 남녀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상의가 벗겨지고 그 위에 케찹을 뿌리는 장면이 동영상에 찍혀 인터넷에 떠돈다는 보도를 들었다. 인터넷을 켜니, 메인 화면에 뉴스에서 말하던 장면이 떠있다. 여러 명의 남녀학생들이 둘러서 있고 흐릿하게 장면이 처리되었지만, 그 안에 상의가 벗겨진 누군가가 누어있다.

그 아이는 내 아들일 수도 있고 내 조카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안에 누어있는 아이가 내 아이인 것 보다, 그 아이에게 옷을 벗기고 케찹을 뿌린 아이, 그런 장면을 보면서 방관하거나 동조하며 즐거워하는 아이가 내 아이 일수도 있다는 것이 더 두렵다.

왕따 문제는 비단 우리 문제만은 아니다. 가끔 인터넷에 올라오는 중국의 학생들의 집단 폭력사건을 보아도 그렇고 일본은 ‘이즈메’로도 유명하니 말이다. 그렇지만 독일 같은 유럽 국가는 좀 다를 거라는 생각했는데 그 곳 역시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특히, 이주민에 대한 곱지 않은 십대들의 시선은 <못된 장난>에서 고스란히 나타난다.

스베트라나 올가 아이트로마토바는 열네 살의 소녀로 우크라이나에서 이주해온 이주민이다. 그런 스베트라나가 공부를 잘해서 교장선생님의 추천으로 명문인 김나지움에 장학금을 받고 다니게 된다. 모든 왕따의 원인은 ‘너는 우리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열등이고 어느 쪽이 우등이고 간에. 이런 경우 일단은 알아서 기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니까 좀 어수룩하게 보여야 한다. 모르는 것도 아는 척, 아는 것도 모르는 척. 불행히도 스베트라나는 그런 처세술에 익숙하지 못했다.

결국 일은 점점 꼬여 사이버 스토킹이 시작된다. 아이들이 놓은 덫에 걸려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스베트라나는 그 무리에 소속되기 위해 도둑질을 하게 된다. 유명 메이커 옷이나 장신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람의 수준을 판단하는 중요한 잣대인 것은 독일의 아이들이나 우리나라 아이들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스베트라나는 훔친 옷을 학교 마구간에 숨겨두고 등하교 길에 갈아입었다. 사건의 절정은 그 장면을 반 아이 중 누군가가 사진으로 찍어 인터넷에 올리면서 시작된다.

이 사건이 선생님들에게 알려지자, 스베트라나는 모든 사실을 밝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철로에 눕는다. 다행이 아들의 가방을 찾으러 철로를 걷던 사람에게 발견 되 목숨을 건지게 되지만, 스베트라나는 정신병동에 입원하게 되고 이 소설은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쓴 글로 설정되어 있다.

책을 읽으면서 스베트라나는 왜 진작 선생님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받는 고통을 털어 놓지 않을까하며 답답해했다. 하지만 14살 소녀로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싶기도 했다. 선생님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더 궁지로 몰아갈 승산이 크고,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가난한 부모님을 마음 아프게 할 수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스베트라나에겐 김나지움에 있는 다른 학생들과 같아지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었기 도둑질을 시작했고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들었다.

학교를 포기하든, 도둑질을 해서라도 그 아이들과 같아져야 하는 상황이라면 학교를 포기할 수 있어야한다. 그 상황에서 도둑질을 한다는 것은 수단과 방법을 다리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겠다는 의지이다, 불쌍하게도 어린 소녀가 운명 덫에 걸려들었다. 물로 스베트라나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수많은 순간 수많은 유혹에 노출되어 살아간다. 그런 유혹에서 온전히 나를 지키는 것은, 최선의 선택은 욕망을 버리고 올바름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른에게 설명하고 진지하고 의논해야한다.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할 정말 중요한 일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왕따를 당고 있다든지, 스베트라나 같은 아이가 못 마땅하게 보인다든지 하는 이야기이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아이들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고 대처할 수 있다. 그래야 집단 따돌림이라는 끔찍한 일을 만들어 서로에게 상처받는 일을 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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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me 2010-09-10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즈메 가 아니고 이지메 입니다.

글 잘읽고가요

오타쿠 2010-09-10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 지금 이 책 읽고 있는데 애들 하는 짓이 우리 학교 애들이랑 비슷해서 우리 학교에서 이런일이 일어날까봐 겁나네요...

dfff 2010-09-10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dame님 이즈메 맞는말입니다

zz 2010-09-11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왕따당했다고 학교를 그만두라니...과연 제정신입니까,

수양버들 2013-03-31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의 문맥을 잘 읽고 다시 생각해 보심이, 전후 문맥을 생략하고 함부로 말씀하시는 경향이 있는듯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 프랑스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드니 디드로 외 지음, 이규현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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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니 디드로의 소설을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를 읽고 오노레드 발자끄를 대하니 묘한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디드로의 소설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에 대해 해설서에서 ‘소설이자 소설론’이라는 이중성 갖고 있다고 하지만 내 보기엔 소설이 아닌 실제 이야기를 적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소설처럼 보인다. 반대로 소설은 실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소설인 것이다. 그러니 디드로가 시험적으로 발표한 이 작품은 실제 이야기를 그대로 옮겼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고는 반응을 살폈을 것이다. 실제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과 가상으로 소설을 쓰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하고 말이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는
“아주 착한 남자들과 아주 못돼먹은 여자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p38쪽)로 시작하여 이 두 가지 사례를 대비시켜 한 가지씩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상사는 거의 그렇게 되어 있소 선량한고 성실한 따니에 같은 남자 있으면, 신은 그런 남자를 레메르 같은 여자에게 보내오. 착하고 정숙한 라 쇼 같은 여자가 있으면, 그런 여자는 카르데유 같은 남자의 몫이 될 것이오. 그래야 모든 것이 아주 훌륭하게 풀려나가지 않겠소.”(p38)

못된 남자는 착한 여자를 만나고 착한 남자는 못된 여자를 만나는 것이 세상에 이치라며 소설 같은 현실 속 이야기를 들은 후, 발자끄를 대하니 씁쓸한 미소를 짓게 된다.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천재적인 소설가 발자끄는 여성편력가로도 유명하다. 발자끄는 33세에 유부녀인 폴란드 백작부인과 사귀기 시작해 18년 만인 51세에 결국 결혼했지만 5개월 만에 병으로 숨졌다. 늙은 우크라이나 지주와 결혼한 백작부인 한스카는 남편이 죽으면 발자크와 결혼하기로 맹세했고, 발자크는 그녀에게 사랑의 편지를 지속적으로 보냈다. 그 편지는 발자크 사후 ‘이국 여인에게 보낸 편지’로 발표됐다.

굳이 발자끄를 못된 남자라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어느 것이 더 소설적인가 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 그 자체만큼 소설적인 것인 있는가 말이다.
디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소설도 바로 이 소설 같은 현실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모든 소설이 현실적이지만은 않다.

마르그리뜨 유르스나르의 <어떻게 왕부는 구원 받았는가>처럼 신비스러운 이야기도 있으니 말이다. 한나라 시대 화룡점정(畵龍點睛) 실현해 낸다고 소문난 왕부라는 화공과 그의 그림에 매료되어 많은 재산가 아름다운 부인까지 잃고 제자가 된 링의 이야기다. 링은 스승을 자기 목숨보다 아끼고 사랑해 마치 입안에 혀처럼 살갑게 왕부를 모셨다. 어느 날 왕부와 링은 느닷없이 황제에게 불려가 죽게 되었다. 이유인즉슨 황제는 어려서 궁속에 갇혀 그 화공의 그림만 보고 자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이 그 그림과 같은 줄 알았는데 세상을 나와 보니 그림만큼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다.

“왕부야, 요술을 부려 짐으로 하여금 짐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혐오하게 하고 짐이 소유하지 못할 것을 열망하게 한 너에게 무슨 형별을 내리는 것이 합당할지 모색하다가, 오아부야, 너의 두 눈은 너에게 네 황국을 열어주는 마법의 문이니, 너를 빠져나올 수없는 유일한 가옥에 가두려면 네 눈을 불로 지져 못 보게 해야겠다고 결정 했노라, 또한 네 손은 너를 네 제국의 심장부로 이끄는 열 갈래 중 두 길이므로, 너의 두 손을 잘라야겠다고 결정했노라. 알아들었느냐, 늙은 왕부야?”(p293)

황제가 왕부를 죽이려하자, 링은 칼을 들고 황제에게 덤벼들었고 호위병에게 잡혀 목숨을 잃는다. 황제는 마지막으로 왕부에게 젊은 시절 그리다만 그림을 다시 그릴 기회를 준다. 왕부는 수평선을 그리고 바다를 그리고 물결을 그리자 궁 안이 물에 잠긴다. 조각배를 그리자 링이 살아나 왕부를 태우고 그림 속으로 사라진다.

참으로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소설이다. 그러면 <어떻게 왕부는 구원 받았는가>는 디드로가 말하는 소설이 아닌가? 디드로가 쓰고 싶어 했던, 아니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어 했던 소설은 어쩌면 이처럼 비현실적인 이야기 일지 모르겠다. 너무나 현실적인 것은 소설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소설 같은 실제 이야기를 작품으로 보이고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소설을 읽고 싶은가, 후자이다. 소설 속에서나마 현실을 떠나 가상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고 싶다. 황제처럼 현실세계가 그림과 같지 않냐 하는 것은 투정에 불과하다. 링처럼 누더기에 구걸로 생계를 이을망정 즐거운 마음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짊어지고 다니는 구도자의 모습으로, 현실엔 없지만 허구 속에서나마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심정으로, 소설을 읽는다. 사실이 아니라 허구를 즐기고 실물이 아닌 그림을 보는 것은, 허무하게만 느껴지는 현실을 잠시나마 벗어나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즐기고 간직하고 싶은 마음일 게다. 어쩌면 그 것이 현실에서 재현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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