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못된 장난 마음이 자라는 나무 22
브리기테 블로벨 지음, 전은경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못된 장난>

오늘 낮에 인터넷에서 중학교 2학년 남학생이 같은 학교 남학생 3명에게 폭행을 당해 사망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저녁 뉴스에선 한 여학생이 여러 명의 남녀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상의가 벗겨지고 그 위에 케찹을 뿌리는 장면이 동영상에 찍혀 인터넷에 떠돈다는 보도를 들었다. 인터넷을 켜니, 메인 화면에 뉴스에서 말하던 장면이 떠있다. 여러 명의 남녀학생들이 둘러서 있고 흐릿하게 장면이 처리되었지만, 그 안에 상의가 벗겨진 누군가가 누어있다.

그 아이는 내 아들일 수도 있고 내 조카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안에 누어있는 아이가 내 아이인 것 보다, 그 아이에게 옷을 벗기고 케찹을 뿌린 아이, 그런 장면을 보면서 방관하거나 동조하며 즐거워하는 아이가 내 아이 일수도 있다는 것이 더 두렵다.

왕따 문제는 비단 우리 문제만은 아니다. 가끔 인터넷에 올라오는 중국의 학생들의 집단 폭력사건을 보아도 그렇고 일본은 ‘이즈메’로도 유명하니 말이다. 그렇지만 독일 같은 유럽 국가는 좀 다를 거라는 생각했는데 그 곳 역시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특히, 이주민에 대한 곱지 않은 십대들의 시선은 <못된 장난>에서 고스란히 나타난다.

스베트라나 올가 아이트로마토바는 열네 살의 소녀로 우크라이나에서 이주해온 이주민이다. 그런 스베트라나가 공부를 잘해서 교장선생님의 추천으로 명문인 김나지움에 장학금을 받고 다니게 된다. 모든 왕따의 원인은 ‘너는 우리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열등이고 어느 쪽이 우등이고 간에. 이런 경우 일단은 알아서 기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니까 좀 어수룩하게 보여야 한다. 모르는 것도 아는 척, 아는 것도 모르는 척. 불행히도 스베트라나는 그런 처세술에 익숙하지 못했다.

결국 일은 점점 꼬여 사이버 스토킹이 시작된다. 아이들이 놓은 덫에 걸려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스베트라나는 그 무리에 소속되기 위해 도둑질을 하게 된다. 유명 메이커 옷이나 장신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람의 수준을 판단하는 중요한 잣대인 것은 독일의 아이들이나 우리나라 아이들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스베트라나는 훔친 옷을 학교 마구간에 숨겨두고 등하교 길에 갈아입었다. 사건의 절정은 그 장면을 반 아이 중 누군가가 사진으로 찍어 인터넷에 올리면서 시작된다.

이 사건이 선생님들에게 알려지자, 스베트라나는 모든 사실을 밝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철로에 눕는다. 다행이 아들의 가방을 찾으러 철로를 걷던 사람에게 발견 되 목숨을 건지게 되지만, 스베트라나는 정신병동에 입원하게 되고 이 소설은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쓴 글로 설정되어 있다.

책을 읽으면서 스베트라나는 왜 진작 선생님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받는 고통을 털어 놓지 않을까하며 답답해했다. 하지만 14살 소녀로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싶기도 했다. 선생님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더 궁지로 몰아갈 승산이 크고,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가난한 부모님을 마음 아프게 할 수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스베트라나에겐 김나지움에 있는 다른 학생들과 같아지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었기 도둑질을 시작했고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들었다.

학교를 포기하든, 도둑질을 해서라도 그 아이들과 같아져야 하는 상황이라면 학교를 포기할 수 있어야한다. 그 상황에서 도둑질을 한다는 것은 수단과 방법을 다리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겠다는 의지이다, 불쌍하게도 어린 소녀가 운명 덫에 걸려들었다. 물로 스베트라나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수많은 순간 수많은 유혹에 노출되어 살아간다. 그런 유혹에서 온전히 나를 지키는 것은, 최선의 선택은 욕망을 버리고 올바름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른에게 설명하고 진지하고 의논해야한다.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할 정말 중요한 일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왕따를 당고 있다든지, 스베트라나 같은 아이가 못 마땅하게 보인다든지 하는 이야기이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아이들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고 대처할 수 있다. 그래야 집단 따돌림이라는 끔찍한 일을 만들어 서로에게 상처받는 일을 줄일 수 있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dame 2010-09-10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즈메 가 아니고 이지메 입니다.

글 잘읽고가요

오타쿠 2010-09-10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 지금 이 책 읽고 있는데 애들 하는 짓이 우리 학교 애들이랑 비슷해서 우리 학교에서 이런일이 일어날까봐 겁나네요...

dfff 2010-09-10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dame님 이즈메 맞는말입니다

zz 2010-09-11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왕따당했다고 학교를 그만두라니...과연 제정신입니까,

수양버들 2013-03-31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의 문맥을 잘 읽고 다시 생각해 보심이, 전후 문맥을 생략하고 함부로 말씀하시는 경향이 있는듯
 
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독서수업 하러 다니는 공부방 <완득이>가 있었다. 이 책이 뮤지컬로 나온다는 광고를 어디에선가 본 것 같아 무슨 책인가 궁금해 훑어보고 있는데 6학년 어린이가 자기는 너무 재미있어서 두 번 읽었다고 한다. 사실 난 아무리 재미있어도 책 읽어주기 할 때 빼고는 두 번 읽는 경우는 없다. 교과서도 아니고.....,

이렇게 읽기 시작한 <완득이>, 결국 그날 새벽 2시까지 잠도 못 자고 아작을 냈다. 책을 두 번 읽지 않는 것처럼 책을 단숨에 읽어치우는 일도 내게는 드문 일이다. 그런데 뒷이야기가 궁금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퇴근해 집에 와 저녁밥을 하는데도 완득이와 똥주 선생의 거친 말투가 자꾸 생각났다.

이런 경험은 중딩 때 구영탄과 독고탁이 나오는 만화이후로 처음이다. 그러고 보니 <완득이>가 바로 그 캐릭터다. 시대가 바뀌어 거친 욕을 해대는 선생이 나오고 이주노동자를 엄마로 설정했지만 우리 사회에 가장 빈곤한 가정환경에 자라는 소년이라는 것과 삐딱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단순하면서도 무게 있는 캐릭터, 이런 터프가이가 아직도 내 마음을 설레게 하디니, 잠깐 동안 6학년 00와 정신 연령이 같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공부 잘 하는 범생이 윤하가 여주인공인 것도 옛날 만화의 여주인공 캐릭터와 같다. 같으면 어떠랴 새벽잠을 설치게 할 정도로 즐거움을 주었으면 되지. 더욱이 이 책에선 금기시 되어있는 선생님에 대해 욕도 실컷 하고 선생님도 점잖은 척하지 않고 아이들 보다 더 저질처럼 나오지 않는가.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이 가장 먼저 비판하고 꼬투리를 잡는 것이 선생님의 이중성이다. 선생님들은 아무리 못 된 사람이라고 해도 학생들 앞에선 바른 길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사회적인 바람이다. 하지만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들은 어떻게든 선생님의 잘못을 들추어내려고 한다.
그런데 이 책에 나오는 똥주선생은 저질처럼 말과 행동을 한다. 특별히 꼬투리를 잡으려고 트집을 잡을 필요도 없다. 그래서 오히려 선생다운 면을 찾아보고 싶어진다. 소설은 독자를 실망 시키지 않았다. 저질 똥주선생에겐 숨겨진 천사의 날개가 있었다. 이건 내 표현이 아니라 <완득이>를 같이 읽은 6학년 책 친구의 말이다.



“처음엔 나쁜 선생님인데 나중엔 천사가 되는 이야기에요”

나의 책 친구의 말처럼 처음엔 처음부터 똥주선생이 착한 사람은 아이었을지도 모른다. 완득이와 난장이 완득이 아버지, 필리핀 어머니, 그리고 외모는 완벽하지만 머리가 좀 모자란 민구 삼촌처럼 어려운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천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

중세 유럽 사람들은 가난을 창피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가난한 것은 부자들을 천사로 만들어주기 위해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자들 역시 죽어서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많은 돈을 기부했다고 한다.

“내가 가난한 것은 부자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다”

중세를 암흑기라고는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지금보다 당당하게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부자들은 지옥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현대인에 비해 따뜻한 마음을 가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난 똥주선생처럼 날개를 달 자신이 없다. 혹시 나의 책친구가 내게 천사의 날개를 보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소년을 위한 마지막 강의
윤승일 지음 / 살림Friends / 200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청소년을 위한 마지막 강의>는 랜드 포시가 쓴 <마지막 강의>가 아니다. 랜드 포시 이야기는 여덟 인물의 이야기 중 마지막 부분에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랜드 포시의 <마지막 강의>가 전 세계인에게 감동을 주었던 까닭은 췌장암으로 앞으로 6개월 밖에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고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고 그 꿈이 어떻게 실현 가능한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인간에게 다가오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죽음 앞에 서있는 사람이 ‘자신은 지금도 내일을 꿈꾸고 있다’는 역설적인 삶의 자세를 보인다. 그런 그의 앞에서 아직도 긴 세월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은 숙연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청소년을 위한 마지막 강의>에서는 랜드 포시의 꿈의 실현이외에도 산악인 엄홍길, 컴퓨터 의사 안철수, 소프라노 조수미, 생각대통령 이어령, 나눔 전도사 박원순, 역사학자 이이화가 꿈을 어떻게 실현해 왔으며 그들이 이룬 꿈을 어떻게 사회에 환원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중학생 아들에게 이 책을 권했더니 산악인 엄홍길 이야기를 읽더니, 이내 흥미를 잃고 책을 손에서 내려놓고 소설책을 찾는다. 나에게 꿈을 실현해 가는 8명의 멘토 이야기가 구구절절한 감동으로 새겨지는데, 정작 꿈을 키워 나가야 하는 아이에겐 관심 밖이라고 생각하니 잠시 답답하게 느껴졌다. 무엇이 문제인가?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물고 가다보니, 이 책 역시 아침형 인간이나 시크릿 처럼, 누구든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그러기 위해선 꿈을 키우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며, 어떤 상황에서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라는 따위의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사람만 바꿔 진열해 놓은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야기는 비록 실천은 하고 있지 못하지만, 아이들도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매일매일 엄마한테 듣고 학교나 학원 선생님들한테 듣는 이야기다.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다.

어쩌면 아들은 도전이니, 끊임없는 노력이니, 성공이니, 사회 기여니 하는 것에서 벗어나 책을 찾는 것인데, 자신이 피하고자 하는 것과 대면시켜 놓으니 흥미를 잃고 책을 손에서 내려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 책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을 위한 책이라는 제목이 붙여졌지만, 청소년들 보다 부모들 자녀들에게 읽히고 싶은 책으로 보인다는 거다.

그런 선상에서, 이 책에 등장하는 앞의 7명의 인물에 비해 랜드 포시 꿈 이야기는 좀 색다른 감동을 준다. 그의 꿈은 앞의 7명이 이룬 꿈처럼 거창하지 않다.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고난을 겪거나 엄청난 노력이 필요해 보이지도 않다. 그는 아주 소박한 꿈을 꾸었고 우연히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왔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선 크고 작은 장애가 있었지만 포기하지 적극적으로 나서서 장애를 제거한다. 그러다 보니 마술처럼 꿈이 이루어지고 누군가의 꿈을 실현시켜주는 멘토가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세게 최고의 14좌를 오르지 않더라도, 세계 최고의 가수나, 옥수수 박사나 존경받는 업적이나 대단한 봉사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꿈을 향해 전력질주하기 보다는 랜드 포시처럼 내게 주어진 삶을 성실히 살다가 기회가 찾아오면 그 기회를 잡는 것, 그래서 소박한 꿈을 하나하나 이루어가는 거라면, 우리 아이들에게도 설득력을 얻지 않을까 싶다.

그런 꿈이기에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의 아름다운 꿈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공감 받는 것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림자를 판 페터 슐레밀 책벌레만 아는 해외 걸작 2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지음, 배인섭 옮김, 채기수 그림 / 아롬주니어 / 200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저자 아델베르트 폰 사미소는 1781년 프랑스 북부 샹파뉴 지방에 있는 봉크루 성에서 귀족으로 태어났다. 1780년 일어난 프랑스 혁명을 피해 독일로 망명해 베를린 대학에서 의학과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1819년에 베를린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림자를 판 페터 슐레밀>은 1827년에 쓴 작품으로 괴테의 <파우스트>을 동화로 풀어 낸듯했다.

<그림자를 판 페터 슐레밀> 이해하기 위해선 중세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이 책의 저자가 살았던 시대는 중세와 르네상스를 지나 과학기술이 혁명적으로 발전해 가는 근세이다. 이런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작가는 귀족으로 태어나 프랑스 혁명을 경험하고 의학과 자연과학을 경험한다. 작가의 이러한 경험은 작품 구석구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의도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근대적 과학지식을 알려주는 과학기구와 용어들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근대이전엔 신비스럽게만 생각했던 자연현상을 과학적으로 풀이하고자 하는 자세가 엿보인다.

둘째, 자신의 그림자를 팔고 그 대가로 황금주머니를 얻는다는 설정과 악마가 영혼마저도 팔라고 유혹한다는 설정이 그렇다. 그림자를 다양한 각도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필자는 그림자를 양심으로 보았다. 돈을 얻기 위해 양심을 버려야 하는 근대적 가치의 한 측면을 작가가 그려 내고자 했던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근대 과학의 발전은 중세의 절대 가치였던 신을 죽이고 돈을 위해 양심마저 버리게 한다. 하지만 신을 버리고 양심을 버린 사람에게 평화란 있을 수 없다. 악마는 또 다른 욕망을 채우라고 계속해서 유혹하자 주인공 슐레밀은 더욱 고뇌한다. 하지만 악마를 따라 영혼마저 판다면, 자신에게 어떤 최후가 찾아올지 선임자 토마스 존의 처참한 최후를 보고 깨닫고 악마의 유혹을 뿌리친다.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이 다시 중세의 가치로 돌아 갈 수 는 없는 일이다. 그러기엔 너무나 많은 과학적 사실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에겐 먼 곳도 쉽게 오갈 수 있는 7마일 구두라는 신비스러운 구두가 나타난다. 주인공은 페터 슐레밀은 7마일 구두를 신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동식물에 대한 연구를 하기 시작한다. 덕분에 자신이 잃어버린 그림자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일을 잊고 살아간다.

여기에서 7마일 구두라는 무엇일까? 작가는 상상으로 7마일을 가는 구두를 만들어졌지만 당시 과학기술의 발달로 그 전에 비해 대륙 간의 이동이 빨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 도 있다. 그리고 당시 지식인들은 종교적 고뇌를 하기보다는 인류의 발전이라는 근대적 가치 아래 과학 연구와 체계를 잡는데 몰두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작가의 근대성은 작품 말미에 친구 샤미소에게 보내는 편지에 여실히 들어난다.

하지만 자신이 신뢰하던 신복이자 친구 벤델이 슐레밀이 남기 돈으로 자선사업을 한다는 것과 사랑하던 여인이 미망인이 되어 어려운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산다는 이야기에서는 중세에서 만들어진 기부문화를 읽어 낼 수도 있었다.

필자 <그림자를 판 페터 슐레밀>을 읽으면서 작가가 살았던 근대 가치관을 읽어내고 중세의 가치와 향수 속에서 고뇌하는 근대 지식인의 고뇌를 읽어낸 까닭은 얼마 전에 중세를 기반으로 일어난 근세 가치를 읽어낸 까닭은 얼마 전 아베 긴야가 지은 <중세 유럽 산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중세 인들이 어떤 가치관과 생활양식으로 살았는지 그림과 함께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필자는 <중세 유럽 산책>을 읽지 않았다면 <그림자를 판 페터 슐레밀>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책을 읽으면서 필자의 무지로 인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이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필자의 우매함을 매울 수 있는 길은 오직 책을 깊고 넓게 읽는 일 뿐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4살 철학소년 - 생각의 스위치를 켜라
김보일 지음, 구연산 그림, 고흥준 편집 / 북멘토(도서출판)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14살 소년이 생각할 수 있는 철학적 사유를 담을 글이다. 그동안 저자가 선보였던 문체나 글의 내용 비해 눈높이를 낮추었다. 요즘처럼 수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는 때에 좋은 책 만드는 방법은 책을 읽을 독자층을 겨냥해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모든 이가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든다는 것은 중구난방이 되기 싶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이 성공하지 않았나 싶다. 첫째 글이 어렵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고른 난이도를 갖고 있다는 점. 둘째 내용 역시 14세 학생이라면 이해할 것을 다루었다는 것. 셋째, 감성에 호소하기보다 과학적 사실들을 보여줌으로써 설득력을 갖고 있으며, 흥미를 끌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 책의 매력은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의견을 전개하고 있지만, 언제든 설득력 있는 반론을 제기한다면 받아 드리겠다는 자세가 갖고 있어 좋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