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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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수업 하러 다니는 공부방 <완득이>가 있었다. 이 책이 뮤지컬로 나온다는 광고를 어디에선가 본 것 같아 무슨 책인가 궁금해 훑어보고 있는데 6학년 어린이가 자기는 너무 재미있어서 두 번 읽었다고 한다. 사실 난 아무리 재미있어도 책 읽어주기 할 때 빼고는 두 번 읽는 경우는 없다. 교과서도 아니고.....,

이렇게 읽기 시작한 <완득이>, 결국 그날 새벽 2시까지 잠도 못 자고 아작을 냈다. 책을 두 번 읽지 않는 것처럼 책을 단숨에 읽어치우는 일도 내게는 드문 일이다. 그런데 뒷이야기가 궁금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퇴근해 집에 와 저녁밥을 하는데도 완득이와 똥주 선생의 거친 말투가 자꾸 생각났다.

이런 경험은 중딩 때 구영탄과 독고탁이 나오는 만화이후로 처음이다. 그러고 보니 <완득이>가 바로 그 캐릭터다. 시대가 바뀌어 거친 욕을 해대는 선생이 나오고 이주노동자를 엄마로 설정했지만 우리 사회에 가장 빈곤한 가정환경에 자라는 소년이라는 것과 삐딱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단순하면서도 무게 있는 캐릭터, 이런 터프가이가 아직도 내 마음을 설레게 하디니, 잠깐 동안 6학년 00와 정신 연령이 같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공부 잘 하는 범생이 윤하가 여주인공인 것도 옛날 만화의 여주인공 캐릭터와 같다. 같으면 어떠랴 새벽잠을 설치게 할 정도로 즐거움을 주었으면 되지. 더욱이 이 책에선 금기시 되어있는 선생님에 대해 욕도 실컷 하고 선생님도 점잖은 척하지 않고 아이들 보다 더 저질처럼 나오지 않는가.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이 가장 먼저 비판하고 꼬투리를 잡는 것이 선생님의 이중성이다. 선생님들은 아무리 못 된 사람이라고 해도 학생들 앞에선 바른 길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사회적인 바람이다. 하지만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들은 어떻게든 선생님의 잘못을 들추어내려고 한다.
그런데 이 책에 나오는 똥주선생은 저질처럼 말과 행동을 한다. 특별히 꼬투리를 잡으려고 트집을 잡을 필요도 없다. 그래서 오히려 선생다운 면을 찾아보고 싶어진다. 소설은 독자를 실망 시키지 않았다. 저질 똥주선생에겐 숨겨진 천사의 날개가 있었다. 이건 내 표현이 아니라 <완득이>를 같이 읽은 6학년 책 친구의 말이다.



“처음엔 나쁜 선생님인데 나중엔 천사가 되는 이야기에요”

나의 책 친구의 말처럼 처음엔 처음부터 똥주선생이 착한 사람은 아이었을지도 모른다. 완득이와 난장이 완득이 아버지, 필리핀 어머니, 그리고 외모는 완벽하지만 머리가 좀 모자란 민구 삼촌처럼 어려운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천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

중세 유럽 사람들은 가난을 창피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가난한 것은 부자들을 천사로 만들어주기 위해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자들 역시 죽어서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많은 돈을 기부했다고 한다.

“내가 가난한 것은 부자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다”

중세를 암흑기라고는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지금보다 당당하게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부자들은 지옥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현대인에 비해 따뜻한 마음을 가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난 똥주선생처럼 날개를 달 자신이 없다. 혹시 나의 책친구가 내게 천사의 날개를 보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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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돌의 도시 - 생각이 금지된 구역
마누엘 F. 라모스 지음, 변선희 옮김 / 살림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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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미래뉴스>라는 어린이 도서를 보았다. <미래뉴스>에선 우리사회가 미래에 어떻게 변화 될지, 어린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고 있었다. 미래에는 종이 책이나 노트가 없어지고 전자기기가 그 역할을 대신 할 것이며, 모든 지식을 간편히 휴대할 수 있는 전자기가 영상으로 알려주기 때문에 문자도 사라지고 지금처럼 지식이 중요한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고 하였다. 전자기기에 저장되어 있는 지식을 지식은 필요에 따라 선택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의적이 작업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라 하였고 예술, 예능, 스포츠가 따위가 각광을 받을 시대가 올 것이라 예측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계는 하나의 나라로 통합될 거라고도 하였다.
그런 맥락에서 <둥근 돌의 도시> 본다면 작가 설정한 49세기라는 배경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문자와 음악, 사랑이 금지된 세상, 가상 멀티미디어로 교육을 받고 버추얼 비전이 보여주는 세상만 바라보는 사람들. 그들에게 남은 책은 세계의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둥근 돌 속에 숨겨진 세권의 책. <전쟁의 기술>,<건강한 인생을 위한 에로틱한 요리법>, 노래집이 전부이다.
발전된 미래 세상에서 보물처럼 여기는 것이 오래전에 사라진 책이라니!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삶에 너부러져 있는 책들이 미래디지털 세상에선 고대 중국의 갑골문자처럼 특별한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과거 역사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충분히 근거 있는 말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고대 문자들에 대해 우리는 너무 신비롭게 생각하고 있거나, 우리는 지금 고대인들이 지닌 평범하지만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니가하는 의심이 든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전쟁의 기술>,<건강한 인생을 위한 에로틱한 요리법>, 노래집일까? 둥근 돌 속에 숨겨진 책이 불경이나 성경, 코란 같은 경전도 아니고 고전도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그리 소중하게 여기는 책도 아니고 특별한 가치를 진다고 보지도 않는, 흔하고 흔한 책 중에서 무작위로 고른 것 처럼 보인다.
왜? 저자는 이 책들을 둥근 돌 속에 숨겼을까? 저자는 아마도 20세기와 21세기에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분쟁의 근원이 고대 문자를 숭상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미래에는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전쟁의 기술>,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요리책 <건강한 인생을 위한 에로틱한 요리법>, 그리고 사람을 감동 시키는 <노래집>만 남아 사람들에게 전해진다면 더 이상 분쟁이나 전쟁 같은 건 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코믹한 발상은 스토리 전개에서도 계속 된다. <둥근 돌의 도시>는 코믹하다 못해 황당한 스토리가 전개된다. 그래서 기존의 소설을 즐기던 독자는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읽을 때처럼 경망스럽게 느껴져 불쾌감마저 든다. 그러면서 스스로 ‘내가 현대 소설을 좇아가지 못할 정도로 사고 굳은 거야.’라고 자책 하게 된다.
더욱이 이 책에선 갑자기 등장인물이 저자를 불러 불만을 호소하기도 하고 저자는 변명을 늘어놓는가하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등장인물이 많고, 사건도 너무 복잡하게 엉켜있다. 인간의 내면을 천천히 들어내는 소설에 익숙한 세대로선 따라 가기가 너무 벅차다. 그러고 생각해보니, 이 소설은 49세기 비주얼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란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서 읽어 음미하기 보다는 영상처럼 보는 것이 적합한 그런 책이란 결론을 내렸다.
기존의 소설에 익숙해 있던 내게 <둥근 돌의 도시>이 특별히 재미있거나 감동을 주지는 못 했다. 하지만 낯선 느낌 때문에 오히려 문학적으로 가치가 있는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고 저자의 깊이 있는 사고와 의도가 담긴 작품이란 사실은 부인할 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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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제발 잡히지 마 - 끝나지 않은 이야기, 이주노동자들의 삶의 기록
이란주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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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란주님은 현재 <아시아인권문화연대> 대표로 일하고 있고 15년과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했다. 전작으로『 말해요. 찬드라 』가 있다.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는 나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전철이나 거리에서 거무틱틱한 피부에 커다란 눈을 가진 사람들과 마주치는 일은 이제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이방인이고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 아빠, 제발 잡히지마 』에서 실은 저자의 글 한마디가 이주노동자와 내가 어떤 관계인지를 깨닫게 하였다.
우리는 현대를 살아오면서 깊은 열등의식에 빠져있는 것 같다. 백인 중심 세계로부터 유색인종이라는 열등감, 중국 대륙으로부터 주변국가라는 열등감, 일본인들로부터 받는 침략의 상처 따위로 열등감에 쌓여 스스로 다른 민족을 착취하거나 경멸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 역시 우리보다 나약한 민족 앞에서 얼마나 거만한지, 그리고 얼마나 악랄한지 거울 속에 나를 들여다보는 느낌이 든다.
저자는『 아빠, 제발 잡히지마 』134쪽에서 외국인 연수제도가 ‘현대판 노예제도’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고 하였다. 이주노동자와 관련 있는 일을 하는 이들에게 일상적인 이야기이겠지만 나에겐 생소하게 다가왔다. 낯설어서 강렬하다고나 할까, ‘현대판 노예제도’란 말을 통해, 갑자기 내가 그동안 그렇게 경멸했던 악의 축이 그들에겐 우리의 모습으로 그려질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마치 흑인노예를 부리고 아시아 곳곳을 식민지로 지배했던 백인인 것처럼 느껴졌고, 소수민족을 오랑캐로 업신여기는 중국인처럼 느껴졌다, 우리민족을 침략하고 악랄하게 착취한 일본인처럼도 느껴졌다. 물론 모든 백인이나 중국인 일본인이 직접적으로 다른 민족을 학대하거나 착취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식민지배인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본국의 평범한 소시민이라 할지도 간접적인 혜택을 보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부의 일부가 어디에서 기원하는지 알아야한다. 아직은 만족스럽지 못하더라도 복지부분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래서 저소득층의 생계뿐만 아니라 교육문제에도 힘쓰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 이주 해와 살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은 가족의 목구멍에 풀칠하기 위해, 국가의 내란을 피서 살고자, 우리나라 저소득층도 기피하고 있는 3D업종에서 일하고 있다.
이런 힘들고 위험한 일이라도 오랫동안 계속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그들의 바람이지만, 계약기간 만료로 인해 강제추방을 당한다. 그런 강제추방이 두려워 목숨을 건 사투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 그들의 현실이다.
『 아빠, 제발 잡히지마 』에선 이러한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이 생생히 그려져 있으며, 우리 또한 그들의 고통으로 인해 얻는 이익의 수혜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특별이 이 책이 다른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책에 비해 좋았던 것은 단순이 그들과 함께 하며,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있지 않고 그들이 지닌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돕고 해결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답답한 푸념이 아니라, 희망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진취적인 기상이 느껴진다.
작가 이란주는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일을 하면서 외국인 노동자를 구출하는 첩보작전을 벌이기도 하고 상주가 되기도 한다. 법원을 드나드는 일은 일상이고,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그들의 고향을 찾는 위험한 일을 감수하기도 하고, 죽은 이의 사인을 알아내기 위한 부검현장에 직접 참여하기도 한다. 그런 그라고 해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항상 반가운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하기 버거운 일들이 태반이고 그런 일들을 마냥 지켜볼 수밖에 없는 답답한 심정을 고백하기도 한다.
그래도 그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새로운 희망을 품는다. ‘꼬마도서관’을 만들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찾아가 책을 빌려준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지적능력 향상뿐만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들이 무슨 책을 보냐고 하는 주변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이다. 또한 이주노동자 연대를 결성하여 그들이 귀환해서 잘 살 수 있도록 돕고 송출비용을 최대한 낮추고 충분한 교육을 통해 이주노동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문제를 최소화하도록 노력하는 등 다양한 일들을 모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우리나라가 간호사를 송출하는 것과 관련지어, 외국인 노동자 한 사람이 다른 나라에 가서 일을 하는 것은 국가에서 키워 놓은 인적자원을 빼앗기는 것과 같다고 역설하고 있다. 사회에서 한 사람의 인적자원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경비를 투자하는데 그런 인력을 선진국에서 얼마간의 돈을 더 주고 데려간다면 선진국만 이익이라는 것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선진국의 지식과 기술을 익혀 자국으로 돌아와 보급해야 국가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력 송출국이나 도입국에선 이주노동자 송출 제도를 정비하여 저임금에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것을 박고, 국민과 이주노동자의 권리에 차별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책을 읽은 뒤, 전철이나 거리에서 보이는 외국인들이 친근감 있게 느껴졌다. 그들이 길을 묻거나 도움을 청한다면 선뜻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고 이웃에 있다면 가깝게 지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마 저자 역시 이런 작은 변화를 바라며 바쁜 와중에 책을 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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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버들 2009-07-07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이버 콩기부도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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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북경에 가다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천지인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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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20년 버트런드 러셀은 북경에 1년간 생활을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쓰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놀라웠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90여 년 전, 중국이란 거대 문명을 인정하고 서양인이 중국의 미덕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는 것이다. 1920년이면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로 서양의 제국주의가 팽팽해있던 시기이다. 이 시기 서양인은 동양을 하나의 문명으로 보기 보다는 미개한 인종으로 약탈과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그런 서구적 시각에서 벗어나 수천 년간 공자의 도와 덕을 숭상해온 중국의 문명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서구는 스스로를 우월한 문화를 전파하는 설교사로 여기는 태도는 물론이고, ‘열등한’ 중국인을 착취하고 억압하고 등골을 우려낼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오만한 태도를 벗어던져야 한다.‘ ( 본문 22 쪽 )
하지만 러셀은 중국이라는 나라를 너무 미화시킨 경향이 있다. 더욱이 우리처럼 중국 옆에 붙어 있는 약소국으로서는 다음과 같은 러셀의 표현에 결코 동의 할 수 없다.
어떤 사회를 판단할 때는 내부적으로 선이나 악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에 내재하고 있는 선이나 악을 증대시키는 데 그 사회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그리고 그 사회가 누리고 있는 선은 다른 사회에 존재하는 악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중략-
중국인들은 다른 나라에 해를 끼칠 만큼 강하지 않으며, 그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그들 자신의 힘과 노력에만 의지해서 확보되는 것이다. -중략-
중국인은 서구가 개입하기 전까지는 진보와 능률에 무관심한 덕분에 평화로운 삶과 인생의 기쁨을 누렸다. ( 본문 24~25쪽)
러셀은 이처럼 중국에 대해선 호의적인 반면에 일본에 대해선 반대의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내 보기엔 러셀이 중국에 보다 일본의 실체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현대의 일본은 서구가 만들어낸 작품임에 틀림없다. 일본이 중국에게 하고 있는 행동들은 따지고 보면 일본을 가르친 백인 교사들에게 책임이 있다. 그렇지만 일본은 유럽이나 미국과는 크게 다르고, 일본이 중국에 대해 품고 있는 야심은 유럽이나 미국의 야심과는 전혀 다르다. 따라서 우리는 세 가지 가능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 중국이 하나 혹은 두 개의 백인 국가에 종속된. 둘째 중국이 일본에 종속된다. 셋째, 중국이 자유를 되찾고 그 상태를 유지한다. 일시적으로 보면 네 번째 가능성, 즉 일본과 서구 강대국들의 연합체가 중국을 관리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일본은 궁극적으로 영국.미국과 협조할 수 없을 것 같다. 일본은 궁극적으로 영국.미국과 협조할 수 없을 것 같다. 일본은 극동을 지배하거나 아니면 패망할 것이다. 만일 일본인이 지금과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예상을 빗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인은 야심의 속성 대문에 배타적이고 비우호적이다. 나는 중일 관계를 다룰 때 이런 관점을 근거로 삼을 것이다. (본문 25~26쪽)
러셀의 중국에 대한 특별한 애정은 이계라는 사람이 쓴 표의문자인 한자에 대한 칭송을 소개하는데 이른다.   

중국어는 표음문자 어족에 속하지 않는다. 중국어에는 표음문자 언어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점이 없다. 그러나 중국어는 간결하면서도 최종적인 진리를 구현학고 있기 때문에, 폭풍과 스트레스에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중국어는 4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중국 문명을 보호해왔다. 중국어는 그 문자가 대표하는 정신만큼이나 정연하고 확고하며 훌륭하다. 정신이 언어를 만들어 낸 것인지, 언어가 정신을 강화시킨 것인지 확실치 않다.( 본문 52쪽 )  

이 글을 읽으면서 표의문자인 한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갖게 되었다. 한자 문화권에 살면서 이제야 비로소 표의문자인 한자에 대한 긍정적인 근거를 찾아낸 것이다.
다음 글에서 러셀은 중국은 애국보다 효를 강조하는 나라라고 소개하면서 중국의 효 사상에 관해서는 서구의 애국주의와 견주어 우호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서구의 애국주의에 비하면 중국의 효는 그다지 해로운 것이 아니다. 물론 효와 애국심은 모두 인류의 일부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 전체를 배제하라는 의무를 가르친다는 점에서 잘못이 있다. 그러나 애국심은 인간의 충성심을 전투 부대로 향하게 하지만 효는 (아주 원시적인 사회의 경우를 제외하면)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애국심은 아주 쉽게 군국주의, 제국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 자기 나라의 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살인이다. 자기 가족의 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부패와 음모다. 따라서 가족의식은 애국심에 견주면 덜 해로운 것이다. 중국의 역사와 현 상황을 유럽에 견주어 보면 이런 생각이 나올 수밖에 없다. ( 본문 56~57쪽 )
이글을 보면서 러셀이 애국주의와 가족주의를 모두 비판하고 있다는 것에서 놀라웠다. 그런 그의 탁견이 있었기에 애국주의를 강조하는 일본인의 속성을 읽어낼 수 있었고 그들이 제국주의 야심을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레셀은 당시 일본인들의 태도에 대해서 세세한 근거를 제시하면서 일본인들의 비열하고 잔인하며 교활한 태도를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인에 대한 부정적인식이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역추적이 가능하다는 거다.
외국인이게 속을 내주지 않고 실익만 챙기는 외교전술 (본문 159~160쪽) 상징적인 인물인 천황을 내세워 국민에겐 애국주의 강조하면서 막후 실세를 휘두르는 고도의 정치술(본문 136~137쪽), 오래전부터 집요하게 이루어진 역사외곡의 실체(본문 133~134쪽)까지 흥미롭게 기술되어있다.
이 책은 1926년에 발표된 글이기에 그 후 중국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당시 청나라의 붕괴와 외세의 침략으로 무정부상태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에 대한 우려로 러셀은 중국이 군사 국가가 되거나 외국 강국이 사회주의화되지 않는 이상, 중국은 외국의 경제적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 했다. ( 본문 85쪽 ) 하지만 중국은 스스로 사회주의를 선택했다. 당시 러셀의 강연을 경청하던 모택동 학생은 다음과 같이 비판하면서 자신들만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유산계급의 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교육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면서, 그 방법을
사용하면 자유를 제한하거나 전쟁과 유혈 혁명에 의존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러셀의 의견에 대한 나의 반박은 몇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교육을 하려면 돈, 사람, 수단이 필요하다, 현대 세계에서 돈이란 돈은 모두 자본가들이나
자본가의 노예들이 장악하고 있다. 현대 세계에서 중요한 두 가지 교육 수단인 학교와 신문 역시 자본가들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다시 말해 현대 세계의 교육은 곧 자본주의 교육이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자본주의를 가르친다면, 이 아이들은 자라서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다시 자본주의를 가르칠 것이다. 결국 교육은 자본가의 수중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본문 9~10쪽)
모택동의 반론은 공산주의체제가 유지되는 동안은 러셀의 견해에 비해 올바른 선택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을 생각한다면 모택동은 중국이 지닌 힘을 너무 과소평가 했다. 생각을 할 것이다.
<러셀 북경을 가다>는 내가 감당하기엔 좀 지루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예를 들어 일본과 엉킨 당시 국제정세 부분이 그렇다. 이 부분은 좀 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 큰 감동을 줄 것 같다.
끝으로 90년 전에 가졌던 러셀의 해안과 진보적인 사고에 놀랐고 그이 해박한 지식과 치밀한 기술 방식에 놀랐다. 아쉬운 것은 나의 역량부족으로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언젠가 다시 한 번 읽었을 땐 이런 아쉬움이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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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구 삼촌 산하작은아이들 18
권정생 지음, 허구 그림 / 산하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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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구삼촌은 서른 살이 넘었지만 다섯 살배기보다 어린애 같은 바보다. 바보 삼촌이 하는 일은 누렁이를 몰고 가 풀을 먹이는 일인데, 실상은 풀을 찾아 가는 누렁이 뒤를 쫓아다니는 일을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누렁이가 고삐를 땅바닥에 끌고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용구삼촌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용구삼촌은 온 가족과 온 동네를 발깍 뒤집어 놓은 다복솔 나무 밑에 아주 평화롭게 잠들어 있다. 엄마 토끼 대신 아기 토끼를 가슴에 품은 체.
권정생선생님의 대부분의 동화는 불쌍하고 여린 생명들이 자신들의 삶의 가치를 찾아 가야한다는 내용들이 많다. 그래서 동화 못난 주인공들은 가족과 친구들로부터도 멸시를 받지만,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아야하는 것은 권정생선생의 동화 속 주인공들의 숙명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책의 주인공 용구삼촌은 그런 주인공들에 비해 좀 행복해 보인다. 다섯 살배기 보다 못한 바보지만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살고 있으며, 그가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자 걱정하며 찾아 나선 동네 사람들이 있다. 더욱이 그는 엄마 잃은 토끼가 안심하고 안겨 함께 밤을 보낼 수 있는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있다.
다른 동화에서는 숙명과도 같은 비참한 현실을 인내해야 하는 답답하고 서글픔 현실을 보여주고 그런 현실에서 새로운 깨달음으로 존재가치를 확인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었다. 반면 <용구삼촌>에게선 가족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 다섯 살배기 아이만큼이나 순수한 용구삼촌의 아름다운 심상을 자연스럽고도 긴장 있게 풀어내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강아지 똥>에선 작가가 ‘강아지 똥에게 그렇게 슬퍼하고 있지만 말고 너의 존재가치를 찾아야해’ 라고 말하며 존재가치를 효용성에서 찾았다면, <용구삼촌>에선 “네가 좀 모자라긴 했어도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다워, 우린 그런 너를 아끼고 사랑해”라는 좀 더 세련되고 순화된 인간존재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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