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북경에 가다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천지인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1920년 버트런드 러셀은 북경에 1년간 생활을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쓰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놀라웠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90여 년 전, 중국이란 거대 문명을 인정하고 서양인이 중국의 미덕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는 것이다. 1920년이면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로 서양의 제국주의가 팽팽해있던 시기이다. 이 시기 서양인은 동양을 하나의 문명으로 보기 보다는 미개한 인종으로 약탈과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그런 서구적 시각에서 벗어나 수천 년간 공자의 도와 덕을 숭상해온 중국의 문명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서구는 스스로를 우월한 문화를 전파하는 설교사로 여기는 태도는 물론이고, ‘열등한’ 중국인을 착취하고 억압하고 등골을 우려낼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오만한 태도를 벗어던져야 한다.‘ ( 본문 22 쪽 )
하지만 러셀은 중국이라는 나라를 너무 미화시킨 경향이 있다. 더욱이 우리처럼 중국 옆에 붙어 있는 약소국으로서는 다음과 같은 러셀의 표현에 결코 동의 할 수 없다.
어떤 사회를 판단할 때는 내부적으로 선이나 악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에 내재하고 있는 선이나 악을 증대시키는 데 그 사회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그리고 그 사회가 누리고 있는 선은 다른 사회에 존재하는 악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중략-
중국인들은 다른 나라에 해를 끼칠 만큼 강하지 않으며, 그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그들 자신의 힘과 노력에만 의지해서 확보되는 것이다. -중략-
중국인은 서구가 개입하기 전까지는 진보와 능률에 무관심한 덕분에 평화로운 삶과 인생의 기쁨을 누렸다. ( 본문 24~25쪽)
러셀은 이처럼 중국에 대해선 호의적인 반면에 일본에 대해선 반대의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내 보기엔 러셀이 중국에 보다 일본의 실체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현대의 일본은 서구가 만들어낸 작품임에 틀림없다. 일본이 중국에게 하고 있는 행동들은 따지고 보면 일본을 가르친 백인 교사들에게 책임이 있다. 그렇지만 일본은 유럽이나 미국과는 크게 다르고, 일본이 중국에 대해 품고 있는 야심은 유럽이나 미국의 야심과는 전혀 다르다. 따라서 우리는 세 가지 가능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 중국이 하나 혹은 두 개의 백인 국가에 종속된. 둘째 중국이 일본에 종속된다. 셋째, 중국이 자유를 되찾고 그 상태를 유지한다. 일시적으로 보면 네 번째 가능성, 즉 일본과 서구 강대국들의 연합체가 중국을 관리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일본은 궁극적으로 영국.미국과 협조할 수 없을 것 같다. 일본은 궁극적으로 영국.미국과 협조할 수 없을 것 같다. 일본은 극동을 지배하거나 아니면 패망할 것이다. 만일 일본인이 지금과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예상을 빗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인은 야심의 속성 대문에 배타적이고 비우호적이다. 나는 중일 관계를 다룰 때 이런 관점을 근거로 삼을 것이다. (본문 25~26쪽)
러셀의 중국에 대한 특별한 애정은 이계라는 사람이 쓴 표의문자인 한자에 대한 칭송을 소개하는데 이른다.   

중국어는 표음문자 어족에 속하지 않는다. 중국어에는 표음문자 언어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점이 없다. 그러나 중국어는 간결하면서도 최종적인 진리를 구현학고 있기 때문에, 폭풍과 스트레스에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중국어는 4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중국 문명을 보호해왔다. 중국어는 그 문자가 대표하는 정신만큼이나 정연하고 확고하며 훌륭하다. 정신이 언어를 만들어 낸 것인지, 언어가 정신을 강화시킨 것인지 확실치 않다.( 본문 52쪽 )  

이 글을 읽으면서 표의문자인 한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갖게 되었다. 한자 문화권에 살면서 이제야 비로소 표의문자인 한자에 대한 긍정적인 근거를 찾아낸 것이다.
다음 글에서 러셀은 중국은 애국보다 효를 강조하는 나라라고 소개하면서 중국의 효 사상에 관해서는 서구의 애국주의와 견주어 우호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서구의 애국주의에 비하면 중국의 효는 그다지 해로운 것이 아니다. 물론 효와 애국심은 모두 인류의 일부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 전체를 배제하라는 의무를 가르친다는 점에서 잘못이 있다. 그러나 애국심은 인간의 충성심을 전투 부대로 향하게 하지만 효는 (아주 원시적인 사회의 경우를 제외하면)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애국심은 아주 쉽게 군국주의, 제국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 자기 나라의 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살인이다. 자기 가족의 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부패와 음모다. 따라서 가족의식은 애국심에 견주면 덜 해로운 것이다. 중국의 역사와 현 상황을 유럽에 견주어 보면 이런 생각이 나올 수밖에 없다. ( 본문 56~57쪽 )
이글을 보면서 러셀이 애국주의와 가족주의를 모두 비판하고 있다는 것에서 놀라웠다. 그런 그의 탁견이 있었기에 애국주의를 강조하는 일본인의 속성을 읽어낼 수 있었고 그들이 제국주의 야심을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레셀은 당시 일본인들의 태도에 대해서 세세한 근거를 제시하면서 일본인들의 비열하고 잔인하며 교활한 태도를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인에 대한 부정적인식이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역추적이 가능하다는 거다.
외국인이게 속을 내주지 않고 실익만 챙기는 외교전술 (본문 159~160쪽) 상징적인 인물인 천황을 내세워 국민에겐 애국주의 강조하면서 막후 실세를 휘두르는 고도의 정치술(본문 136~137쪽), 오래전부터 집요하게 이루어진 역사외곡의 실체(본문 133~134쪽)까지 흥미롭게 기술되어있다.
이 책은 1926년에 발표된 글이기에 그 후 중국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당시 청나라의 붕괴와 외세의 침략으로 무정부상태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에 대한 우려로 러셀은 중국이 군사 국가가 되거나 외국 강국이 사회주의화되지 않는 이상, 중국은 외국의 경제적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 했다. ( 본문 85쪽 ) 하지만 중국은 스스로 사회주의를 선택했다. 당시 러셀의 강연을 경청하던 모택동 학생은 다음과 같이 비판하면서 자신들만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유산계급의 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교육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면서, 그 방법을
사용하면 자유를 제한하거나 전쟁과 유혈 혁명에 의존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러셀의 의견에 대한 나의 반박은 몇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교육을 하려면 돈, 사람, 수단이 필요하다, 현대 세계에서 돈이란 돈은 모두 자본가들이나
자본가의 노예들이 장악하고 있다. 현대 세계에서 중요한 두 가지 교육 수단인 학교와 신문 역시 자본가들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다시 말해 현대 세계의 교육은 곧 자본주의 교육이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자본주의를 가르친다면, 이 아이들은 자라서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다시 자본주의를 가르칠 것이다. 결국 교육은 자본가의 수중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본문 9~10쪽)
모택동의 반론은 공산주의체제가 유지되는 동안은 러셀의 견해에 비해 올바른 선택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을 생각한다면 모택동은 중국이 지닌 힘을 너무 과소평가 했다. 생각을 할 것이다.
<러셀 북경을 가다>는 내가 감당하기엔 좀 지루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예를 들어 일본과 엉킨 당시 국제정세 부분이 그렇다. 이 부분은 좀 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 큰 감동을 줄 것 같다.
끝으로 90년 전에 가졌던 러셀의 해안과 진보적인 사고에 놀랐고 그이 해박한 지식과 치밀한 기술 방식에 놀랐다. 아쉬운 것은 나의 역량부족으로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언젠가 다시 한 번 읽었을 땐 이런 아쉬움이 없기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