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영현 지음 / 지식과감성#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물리적 세계에도 정신세계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심심한 날들이 소원이다. 시간이 넘쳐서 지루하고 실컷 자고 나니 할 일이 없고, 뭐 그런 상상. 그러니 제목에 끌렸다. 어떤 날이 그랬는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데 궁금했다.

 

그리고... 정신을 못 차리게 별별 일이 다 일어나는 세계에서 어리둥절하게 머물렀다. 어쨌든 주인공의 양가에 한정한 이야기인데 사람마다 이렇게 시난고난 극적인 일들이 이어지다니... 도약 없이 뛰어내린 높이처럼 아찔했다. 어지러워서 속이 울렁거렸다.

 

펼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갑시다! 하는데... 고독사 상태로 오래 지난 죽음의 현장이다. 심드렁한 태도와 주변 풍경 역시 낯설고도 팍팍하다. 죽음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필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뉴스 보도로 접할 듯 엄청난 아버지를 만난다.

 

밤새 술을 마시다 새벽에 건축 공사장으로 나가는 아버지, 혼자 먹고 자고 학교에 다니는 아들, 장사를 다니다 낯선 남자를 데려오기도 하는 어머니, 아버지가 귀가와 어머니의 가출, 다시 반복되는 일상...

 

아버지가 배설 조절을 못하게 되자 기종(주인공)은 집을 떠난다. 흔히 기대하는 바와는 다르지만 생득적 부자관계라는 것 외에 쌓인 소중한 감정은 전혀 없는 것 같아서 그냥 이해가 되었다. 동거, 말 그래도 한 공간에 기거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진 관계라는 것.

 

어머니보다 살갑게 자신을 받아준 동거남, 형편이 어려워지자 어머니는 아들을 두고 떠났고, 기종은 생판 남인 그에게서 트랙터일을 배우고 개간지를 함께 다닌다. 기종의 직업은 그렇게 정해졌다. 극적인 경우가 아니라도 가족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는 타인은 분명히 있다.

 

기종은 그의 유언을 듣고 임종을 보고 상례를 치른다. 그리고 다시 아버지의 소식... 다행히도 사촌형이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입원시킨다. 이 작품에서는 드문 캐릭터라 어색할 지경이다. 다들 살기위해 죽을 정도로 악다구니를 하고, 기존의 규범 정도는 가볍게 무시하니까.

 

상상 이상의 폭력 사건을 일으킨 그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연락을 받은 기종이 처음으로 기분이 좋아해서 사연(?)을 알긴 하지만 희소식이라고 부르는 대목에서 잠시 감정이 복잡했다. 이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이 시작된 건 아니고...

 

나는 좀 지쳤는데 이야기는 아랑곳없이(?) 범상치 않은 외할머니로 넘어간다. 대체로 이 작품의 커플들은 한쪽이 갑자기 사망하거나 있어도 남보다 못하거나 안부를 모르고 따로 살거나... 지극하게 쓸쓸할 풍경이다. 사연이 얼마나 구구절절한지 읽는 것만으로 힘이 죽죽 빠진다.

 

그럼에도 주인공이 유일하게 혈육의 정을 느끼고 안기는 대상이라서 그 친밀감은 어떤 끌림일까... 궁금해하며 부디 서로 마주보고 웃는 시간이 길어지길 응원했다. 이 작품의 분위기상 그럴 가능성이 적어 보여 불안했다.

 

나도 대단한 효도를 해본 자식은 아니지만 제 어머니 머리채를 휘어잡고 끌고 나가 덫에 걸린 생쥐를 버리듯이 내팽개쳤다는 대목에서는 소스라치는 감각이 가슴을 흩고 지나갔다. 욕하려는 게 아니고... 그런 반응을 보이기까지의 무거운 사연이 눈물겹고 아프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이 자신의 어머니 봉분에 누워 잠든 고모를 업고 어둠 속 길을 내려오는 장면이라는 것이 이해가 간다. 비로소 안심이 된다. 그들은 그렇게 집으로 갔을 것이다. 함께 먹고 쉬고 잘 수 있는, 함께 살 수 있는 집으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국의 법고전 산책 - 열다섯 권의 고전, 그 사상가들을 만나다
조국 지음 / 오마이북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전으로 분류된 책들을 읽다보면 현실과의 거리감이 흐려진다. 인간의 수명은 짧고 변화는 느리다는 실감을 한다. 헛헛하기도 하고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 미래를 염려하며 평생 노력해온 분들이 놀랍도록 존경스럽다. 가능하다면 그 부류의 인간군에 속하고 싶어진다.

 

충격에 충격을 더하는 현실을 어리둥절한 채로 살아 2023년을 본다. 이토록 위태로운 세상에서 뭘 그리 안심하고 태연하게 살았나 싶어 소름이 끼지는 순간들이 적지 않다. 이게 정말 현실인가, 운이 좋아 누군가는 훨씬 오래 전에 한탄했을 진짜 현실을 경험한다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불구하고, 법치국가를 모두 부정할 생각이 아니라면, 이 지경에 이른 민주정democracy의 절차적 방식 또한 부정할 게 아니라면, 본래 목적에 맞는 법감정을 가진 민주시민으로 스스로를 교육 시키는 방법 말고는 다른 할 일도 없다.

 

어릴 적 젊을 적엔 옛날 사람들의 의견이라 여겼던 고전들에서 2023년에도 만나지 못한 이상ideal을 안타깝게 배운다. 이 책에 담긴 법고전들은 고전이나 고전만이 아니다. 복잡한 감정을 맛보며 버티고 견디는 많은 민주시민들이 함께 휴식처럼 차분히 읽고 서로 배울 수 있기를.

 

대한민국 최고의 형법학자를 법기술자들이 작업을 걸어 법정에 넘기고 모욕하고 가족을 해치는 상황에서, 저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학자만이 할 수 있는 글쓰기를 통해 살아남았구나 싶다. 살기 위해 쓸 수밖에 없는 이들이 더 많아지지 않는 세상이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좋은 책은 좋은 결심보다 사람을 더 잘 변화시킨다. 법을 존중하지 않는 법기술자들 천국세상에서 느슨하게 법고전을 읽는 연대가 온라인에 생기면 좋겠다. 새해소원목록에 넣어둬야지.

 

- 자유

- 평등

- 법치

- 사회계약

- 평화

- 소수자 보호

- 시민불복종

- 저항권

- 죄형법정주의

- 사법심사

 

모두 제대로 필요한 것들, 간절한 것들이다. 언젠가 이 모든 것이 구현된 심심한 천국에서 옛 이야기하며 지루해할 시간이 있기를. 부디 애 쓰는 모두들 쓰러지지 말고 함께 걷기를.





내 의견이 공적인 일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아무리 미약하다고 해도 나는 한 자유국가의 시민이자 주권자의 한 사람으로 태어나 그것[공무에 관해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으므로 거기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의무 역시 당연히 갖게 된다.”

 

누군가가 나랏일에 관해 ˝그게 나랑 뭔 상관이야?˝라고 말하는 순간 그 나라는 끝장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노예가 되어 있으면서도 자기가 그들의 주인이라고 믿는 자들이 있다. 어떻게 해서 이처럼 뒤바뀐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루소 <사회계약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래층 소녀의 비밀 직업 우리학교 소설 읽는 시간
스테이시 리 지음, 부희령 옮김 / 우리학교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 애틀랜타, 1890. 가난한 열일곱 살 (소위)유색인종 소녀, 이중차별이란 표현도 부족하다. 유감스럽게도 복합은 골절에만 붙는 말이 아니다. 문제가 없는 시절은 없으나, 현재에도 인식과 대응과 비판과 처벌 양상은 종종 시대적 퇴행을 의심하게 한다.

 

스위트 포테이토가 뒤틀린 다리를 갖고 태어난 것처럼, 우리는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백인이 아니라는 장애. 그것은 스위트 포테이토의 경우와는 달리 교정할 수 없는 장애다.”

 

바이러스 무색하게 창궐하는 가짜뉴스 중에는 성차별에 관한 내용도 풍성하다. 그럼에도 차별과 혐오가 근래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뿌리 깊은 역사를 찾아보고, 현재 진행 중인 바로 곁의 사례들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림자 속에 사는 이들은 하늘을 향해 주먹을 쳐들지 않는다. 눈에 띄지 않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진다 해도, 동양인들은 여전히 뒤에 남을 것이다.”

 

아름다운 표지와는 결이 다른 무거운 주제이고 분량도 적지 않아서 우리 집 십대들이 언제 일독할 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겁쟁이인 어른 독자가 알고도 늘 아픈 풍경을 먼저 들여다보았다. 역사와 현실에서 불가능했던 속 시원한 해법을 몹시 고대하였다.

 

노예제는 폐지되었으나 인종주의는 활활 타올랐던 19세기, 나라면 숨만 겨우 쉬고 숨고만 싶었을 시절, 차별이 비일비재하고 만연한 환경에서, 열일곱 살 주인공은 항복하지 않는다. 뜻밖에 가명(필명)이 달콤해서 - 스위티sweety - 그 괴리가 행복한 결말의 암시이길 바랐다.

 

사회의 최상층에서 바닥에 이르기까지, 안과 밖을 모두 바라보는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다.”

 

페미니즘이 교양이던 대학시절(혹은 그렇다고 믿은 시절)부터 읽고 만난 인물들과 역사적 변화들이 이곳저곳에 자연스럽게 드러나 있다. 아는 만큼만 연상이 가능한 구조라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사람들이 우리를 대해 주길 바라는 방식으로 우리가 먼저 행동해야 해.”

 

소설로서의 재미와 동시에 힘이 넘치는 확신과 행동으로 바라던 결말로 향하는 반가운 이야기를 스포일링 없이 재밌게 전달하기가 어렵다. 문해력/필력 부족이 안타깝다. 청소년 대상이고 소설이라 논픽션의 잔혹함은 없지만, 인간관계의 진상은 충분히 충격적이다.


 

주제의 진지함과 중요성을 희화하지 않으면서도 영민한 위트로 배치된 스토리는 추리소설 작품을 읽듯 흥미진진함과 몰입감과 추론의 재미도 준다. 주인공이 담대하고 활기에 차서 기쁘면서도 끼어드는 현실에 헛헛했다.

 

정의와 공평은 우리가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한 것이고, 정해진 사람에게만 씌워지는 우산이다.”

 

촘촘하게 의미 설정된 재밌는 이 작품처럼, 어린이 청소년들은 기성세대와는 달리 축제를 벌이듯 즐겁게 힘차게 세상을 바꿔나가면 좋겠다. 쉬운 건 없겠지만 덜 지치고 끝까지 갈 수 있는 결의를 잃지 않으면서. 꼭 그럴 수 있기를 미안함을 더해 간절히 응원한다.

 

! 알파벳 G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몸과 여자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4
이서수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고 나서 한 주가 지나도록 글이 써지지 않았다. 새해인데 새로운 것이 부재한, 힘이라곤 나지 않는 무겁게 내려앉은 시간 탓을 해보았다. 짐작한 이야기들이라 모르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모두가 새롭게 아픈 이야기들이었다.

 

황사, 미세먼지, 초미세먼지 경고가 울리고 눈앞이 희뿌연 주말에 <헤어질 결심>을 두 번째로 보러 갔다. 첫 관람 시엔 호러영화 같았고 이젠 스릴러로 보였다. 행복이 끼어들 틈이 없이 촘촘하고 질긴 수많은 계급 차이들이 비극으로만 향해 있었다.


 

<몸과 여자들>에서 목격한 몸에 대한 폭력이 영상 속 서래의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직접 몸에 가해진 폭력도 피해자가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도 모두 선명하게 보였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묻던, 제 몸을 묻고 사라지는 서래는 입막음 당하고 지워진 책 속 다른 몸들로 느껴졌다.


 

스토리로 제공되지 않은 어머니의 삶이 서래 삶의 풍경과 그리 멀었을까. 미복과 어머니의 몸에 대한 기억과 삶이 닮았듯이. 끊임없이 타인(사회)의 평가를 받고, 그 시선에 맞게 정서 훈련이 되는 삶. 형성된 섹슈얼리티의 주체와 소유는 몸의 당사자일 수 없다. 추행과 폭력에 항의할 수 없었던 것은 그렇게 구성된 소외의 결과물이다.


 

창작자의 의도는 아닐진대(아는 바 없음) 작품 속 로맨스(혹은 멜로)는 비극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도구로 느껴졌다. 나는 계급의 틀로 세상만사를 보는 사람이 아닌데(볼 줄 모름) 상영 시간 내내 피할 길이 없었다. 과거에 외면한 모든 순간을 마주하듯 체온이 점점 떨어졌다.


 

내가 현실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이 망상이었다고 비웃듯 2023년의 대한민국에서 나는 매일 길을 잃고 말문이 막힌다. 성범죄 처벌과 판결은 농담인지 장난인지 모르겠고 성매매는 성황 중이고 리얼돌은 수입통과되고 보건 과목에서 섹슈얼리티용어는 사라진다.


 

공감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연대의 방식은 어때야할까. 당장 나의 현실이 아닌 것에 대해 동시대를 산다는 사실만으로 나눌 수 있는 생각의 분량은 얼마일까. 공교육에서 사라질 섹슈얼리티는 이제 개인의 문제로만 인식되고 차이점들만 부각될까.

 

소설인데 고백록처럼 읽었다. 혼곤昏困해진 정신이 뱉은 내 하소연이 길어졌다. <몸과 여자들>은 계속 발굴되어야 할 잠긴 목소리를 기록하고 되살린 귀중한 문학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콜드브루 헤밍웨이 (원액) - 500ml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2월
평점 :
품절


재구매... 이상하다.. 첫 구매의 강렬함이 사라졌다... 입맛은 너무나 변덕이 심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