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여자 친구는 내가 이곳에 오는 것을 싫어한다. 싫어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오면 저녁이 되기 때문에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없는 불만을 가지고 있다. 나 역시 여자 친구가 교회에 가는 게 별로다. 그런데 여자 친구가 교회를 나가야 가끔 명수와 일요일에 시간이 맞으면 동생을 보러 오는데 같이 올 수 있다. 그러나 명수와 약속이 없는 일요일에 여자 친구가 교회에 가면 나는 나대로 혼자 보내야 했다. 여자 친구가 교회를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좋아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명수와 동생 면회를 오는데 동행할 수 있으니까.      

여자 친구가 가는 교회에는 남학생들이 유난히 많다. 청년부에 주로 남자들이다. 지난번에 한 번 같이 교회를 간 적이 있었다. 유독 남학생들이 여자 친구에게 와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 싫어서 다시는 가지 않는다. 여자 친구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내 눈에는 종교를 핑계대로 치근대는 남자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남자애들 앞에서 여자 친구는 유독 활짝 웃었다. 일본에는 교회가 거의 보이지 않는데 우리나라에는 왜 이렇게 교회가 많을까. 신이 정말 살아 있다면 한국에 있는 교회를 전부 다니는데 정신이 없을 것이다.      


여자 친구에게 명수 동생에 관해서는 몸이 불편해서 요양소에 있다고만 했다. 그래서 여자 친구는 내색을 하지는 않지만 한 번 가면 늦게 돌아오는 곳으로 가는 내가 미울지도 모른다.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는 건 반드시 멀리 떨어져 지내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여자 친구를 좋아하다. 여자 친구도 나를 좋아한다. 여자 친구가 교회에 가게 된 건 순전히 여자 친구의 악몽 때문이다. 꿈속에 날개 달린 개미들이 왕창 나오는 꿈이다.


그 꿈을 꾸는 날이면 아침에 몸 여기저기가 마치 개미들에게 물린 것처럼 피부에 벌건 오돌토돌한 상처들로 가득했다. 치료를 받으러 간 병원에서 치료는 치료대로 받으면서 정신적인 안정을 위해 정신과 상담을 권했다. 상담받기를 꺼려하던 여자 친구는 결국 악몽을 자주 꾸는 바람에 상담을 받았다. 상담을 받으면서 조금씩 나아졌다. 그리고 상담받는 의사에게 기도 같은 것을 해보라고 권유받았다. 여자 친구는 그래서 교회에 나가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기도라고 해서 별 건 없었다. 그저 마음속에 눌러 담았던 말들을 끄집어내는 정도였다.

     

여자 친구가 악몽을 꾸고 올 때면 어딘가 다른 사람의 모습을 뒤집어쓴 것처럼 힘이 없고 연약해 보였다. 그때 그저 가만히 어깨를 빌려줘서 머리를 기댈 수 있게 해 주었다. 여자 친구의 머리에서 바람 냄새가 났다. 포도를 정제해서 잘 말렸다가 풀어놓은 듯한 기분 좋은 바람의 냄새였다. 이후 바람을 타고 포도의 미미한 향을 맡으면 여자 친구의 머리 냄새가 떠올랐다.      


여자 친구는 그렇게 어려운 자세로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밤새 칼과 방패를 들고 날개 달린 개미들과 격렬한 싸움을 한 것이다. 여자 친구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싱그러움이다. 깨끗한 얼굴이 그러했다. 하지만 악몽을 꾼 날이면 그 싱그러움이 한 움큼 빠져나가 있었다. 한 없이 나약하기 그지없는 그녀가 꿈속에서 작은 숲 속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날개 달린 개미들과 결투를 한다. 물론 우세한 쪽은 날개 달린 개미 쪽이다. 그러나 여자 친구는 작은 숲 속 사람들을 지켜주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 깨끗한 피부에 상처가 나는 일을 감수하면서 칼과 방패를 휘둘렀다.      


[나 악몽이 심해지면 약을 먹어야 할지도 몰라. 나 정신병이라고 아이들이 놀리면 어떻게 하지?]     


여자 친구는 악몽에서 날개 달린 개미들이 수백 마리가 나오다가 어느 날은 수천 마리가 나올 때가 있었다. 그때는 몸에 과부하가 걸렸다. 걷는 것도, 먹는 것도 힘들었다. 그때 같이 있어주었다. 목 넘김이 좋은 죽을 같이 먹고 부축해서 조금씩 걸었다. 여자 친구는 매미처럼 나에게 바짝 붙어 있었다. 여자 친구의 몸에서 흙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어깨를 꽉 껴안았다.   

   

[악몽이 언젠가는 없어지겠지? 없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너는 내가 귀찮지 않아? 모두가 나를 귀찮게 여기는데]라고 여자 친구가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물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옆에서 아픈 곳을 내내 어루만져주고 힘들 때 안아주는 일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고 힘든 일이라고 명수가 말했다. 그러나 명수는 자신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동생을 옆에서 지켜주고 싶어 했다. 한두 달에 한 번씩 오는 것도 부모님 대신 명수가 꼭 왔다.


[너도 숲 속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날개 달린 무시무시한 개미들과 싸웠잖아. 너도 힘들지만 하잖아. 너도 하는데 나라고 못 할거 같아?]


[바보구나 너, 그건 꿈이고 말이야]라며 여자 친구는 힘없지만 웃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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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외버스는 앉아서 갈 수 있었다. 시외버스의 장점은 도심지를 벗어나 외곽지역으로 빠져 마을마다 전부 정차를 한다는 점이다. 그 사이에 시골의 시장까지 들어가는데 그런 풍경을 구경할 수 있다. 지나치면 기억에서 사라질 정경이지만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아슬아슬한 개울을 지나서 가기도 하고, 오래된 역사를 지나서 구불구불 돌아서 마을마다 정차하여 사람들을 내리고 사람들을 태웠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사람들의 승하차가 있은 후 국도로 올라간다. 그리고 다시 한 시간 정도 달려간다. 단점이라면 장점과 같다는 점이다. 모든 정류장에는 전부 정차를 했다.     

 

[동생은 그때 12살이었어]     


명수가 최초로 동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가 1년 전이었다. 명수와 나는 1학년 때에도 같은 반이었다. 명수는 축구를 잘한다는 이유로 2학년 선배들에게 불려 가서 클럽활동을 강제로 권유받았다. 하지만 명수는 클럽활동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선배들의 말을 듣지 않다가 구타를 당했다. 그때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늦게 까지 명수를 기다렸다. 명수는 씩씩하게 걸어오면서 클럽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웃으며 말했다. 얼굴은 엉망이었지만 명수는 기분 좋아 보였다.


명수가 중 3이었을 때 친구들과 노는데 동생이 따라온다는 거였다. 명수는 친구들과 축구를 하기로 했는데 동생이 따라와도 명수는 같이 놀아줄 수 없다며 집에 있으라고 했다. 동생은 심심하다며 결국 명수를 따라나섰다. 명수는 학교에서 축구를 했다. 전반전이 끝났다. 전반전을 뛰는 동안 동생은 가만히 있기 너무 심심했다. 동생은 명수에게 자신에게도 공을 달라고 했다. 명수 친구가 공은 저기 체육관 지하실 창고에 많으니까 가서 하나 들고 오라고 했다. 동생은 신이 나서 체육관 지하 창고로 내려갔다.


그 안에는 농구공, 축구공, 배구공 등 많은 공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럭비공이었다. 럭비공을 가지고 놀다가 떨어트렸는데 땅이 닿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튀었다. 동생은 그쪽으로 럭비공을 찾으러 갔다. 그때 학교를 순찰하던 경비아저씨가 창고가 문이 열린 것을 보고문을 닫고 불을 껐다. 그리고 올라가 버렸다.    

  

명수가 동생을 찾았을 때 이미 동생은 어둠에 잠식된 상태였다. 얼굴은 엉망이었고 극도의 불안에 떨었다. 집에서도 구석에 몸을 말고 몇 시간이나 있었다. 정밀검사를 한 병원에서는 스트레스성 자극이 심해서 해마에 문제가 생긴 것 같으니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치료를 해보자고 했다. 그러나 동생의 증상은 심해졌다. 일단 어둠을 너무 무서워했다. 동생은 불을 끄고 잠들지 못했으며 낮에도 집의 모든 전등을 켜 두어야 했다. 혼자일 때는 허공을 보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으며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같이 있는 이이게 히스테리를 부렸고 공격적이 되었다.


낮에도 밤에도 전부 불을 켜놔야 하는 문제는 아버지와 마찰을 겪게 되었다. 어느 날 정전이 되었다. 동생은 암전 된 집에서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동생은 통원치료가 불가능했다. 공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동생은 학교형 요양시설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곳에서는 불을 마음껏 켜놔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공부도 할 수 있었다. 동생과 비슷한 아이들이 많았다. 동생은 요양시설에서 지내는 동안 많이 안정이 되었다. 동생에게서 더 이상 히스테릭한 반응이나 혼잣말 그리고 무서워하는 어둠 앞에서 한 없이 초라해지지 않게 되었지만 동생은 집으로 오지 않고 시설에 머물러 있기를 바랐다.  

    

요양소는 터미널에서 내려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들어가야 한다. 숲 속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학교형 전문 요양소였다. 가방을 하나씩 울러 매고 시설로 가는 동안 명수의 말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4월이라 숲 속의 모든 꽃들이 활짝 피어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꽃은 숲보다는 인간 가까이 있는 화단이나 사람의 손을 거친 도로변에서 많이 피었다. 숲 속에는 풀과 나무가 그 세계를 점령하고 있었다.   

   

시설은 너무나 깨끗하고 좋았다. 리조트라고 해도 믿을 것만 같았다. 시설로 들어가면 큰 연못이 있었다. 주위에는 벤치가 있고 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과 면회를 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거나 음식을 먹고 있었다. 나는 명수가 동생을 만나러 가는 동안 늘 여기서 기다렸다. 여기서 바라보는 풍경 속에 어떤 호러블 한 기운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건 사람들에게서도 그랬다. 여기서 보는 요양소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뇌에 문제가 생겨 누군가를 공격하고 내뱉지 말아야 할 말을 끊임없이 뱉어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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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월의 어느 일요일이었다. 친구와 나는 친구의 부탁으로 친구 동생을 만나러 가는 길에 같이 가기로 했다. 4월은 봄의 중간에 있어서 언제나 꿈을 꾸게 한다. 미래의 꿈이 아니라 잠이 들면 꾸는 꿈을 말한다. 부옇고 희미하고 코가 간질간질 거리는 계절에 까무룩 잠이 들면 꼭 꿈을 꾸게 된다. 전혀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친구와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나는 부옇고 코끝을 간질이는 공기를 맡으며 봄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봄의 중간에 있으면 언제나 공중으로 부양할 것 같은 기분이다. 이런 기분은 4월에만 느낄 수 있다. 가만히 앉아서 흐음 하고 봄기운을 들이마시면 꿈을 꾸는 것 같다. 주위가 온통 4월의 냄새로 가득하다. 일요일 오전이라 아직은 광장에 사람들이 별로 없지만 곧 약속장소로 유명한 이곳은 사람들도 가득 찰 것이다. 약속을 하고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그들의 표정이 부드럽게 빠져나와 나의 가슴에 꽂혔다. 기분 나쁘지 않은 통증을 느낄 수 있었다.     

  

친구는 가방을 두 개 들고 왔다. 동생에게 가져다 줄 물품이 들어있는 가방이었다. 하나는 무거웠다. 그 가방은 친구가 들고 비교적 무겁지 않은 가방은 내가 들었다. 그러나 등에 맸을 때 다리에 힘을 줘야 했다. 뭐가 이렇게도 많이 들었을까.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했다. 친구의 동생은 생활하는데 필요한 것들은 전부 생활하는 곳에 다 있다. 음식도 집에서 먹는 것보다 훨씬 잘 나오고 맛있다고 했다. 음식을 가져가지도 않고 옷도 필요 없는데 늘 가방은 항상 무거웠다. 친구와 나는 광장에서 만나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갔다. 시내버스를 탔는데 자리가 없어서 일어서서 갔다. 우리는 평일에도 학교에 갈 때 버스에서 늘 일어서서 갔다.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 속에서 앉아서 가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친구는 동생에게 물품을 한 달에 한 번씩 동생이 있는 곳에 갖다 주었다. 별일이 없는 한 나는 친구와 동행을 했다. 나에게 별일이라는 건 여자 친구를 말한다. 일요일에 같이 보내기를 바라는데 여자 친구가 교회에 가게 되면, 그리고 그 일요일에 친구가 동생에게 가자고 하면 나는 친구를 따라나섰다. 그렇게 친구와 친구의 동생에게 갔다 오면 대체로 저녁이었다.      


친구의 이름은 명수다. 명수는 친구들이 많은 녀석이다. 인기가 좋다. 운동을 잘하고 공부도 잘한다. 특히 수학을 잘해서 커닝이지만 우리의 수학 점수를 책임지고 있어서 주위에 친구들도 많다. 그러나 동생에게 갈 때면 다른 친구들보다 내가 동행을 했다. 오직 나만이 동생의 사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동생을 만나러 가는 것에 혼자서 가기보다 내가 따라와 주기를 바랐다.    

  

[동생이 그렇게 된 건 나 때문이야]     


명수와 나는 가끔 가는 이 길을 좋아한다. 평소에 다니지 않는 생소한 도로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길거리 풍경을 말이다. 도로변의 가게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뒤로 달려갔다. 한두 달에 한 번씩 가는 길이라 바뀐 가게나 없어진 점포가 눈에 띄기도 했다. 명수와 나는 시외버스 터미널에 가는 동안 버스에서 보는 풍경을 일일이 외우기라도 하듯이 바라보았다. 사춘기 또래처럼 우리는 평소에는 말이 많았지만 동생을 만나러 가는 길에는 말수가 줄어들었다. 대신 신기한 것을 훔쳐보는 단단한 시골의 토마토처럼 지나치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명수는 반에서도 가장 활기찬 녀석이다. 일단 축구를 잘해서 우리 반뿐만이 아니라 학년에서 제일 인기가 좋은 축에 속했다. 3학년 선배들하고 축구를 해도 명수가 해트트릭을 성공하기도 했다. 그런 명수도 동생을 보러 가는 날에는 평소의 명수 같지 않았다.     

 

[동생을 그렇게 혼자 둬서는 안 되는 거였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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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오후에 시내에 나왔다가 집으로 들어가는 그 풍경이 좋았다. 중학생시절이었다. 날은 맑지만 해가 숨어서 냉기가 흐르는 늦은 오후. 쓸쓸해야 해야 할 것 같지만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있어서 시내 중심가는 활기차고 떠들썩했다. 거리에 캐럴이 흐르고 가게마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가득 차 있어서 밖에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신났다.


나는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친구는 중학교에서 만났다. 집이 달라서 약속을 정하고 약속장소로 나왔다. 애리나 백화점 앞은 만남의 장소였다. 모두가 거기서 약속을 정하고 만났다. 흐린 날은 아니지만 해는 뜨지 않았지만 애리나 백화점 앞은 활기차고 북적였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에리나 백화점이 있는 시내 중심가에는 주말에 흘러나온 사람들로 걷기가 힘들 정도였다. 곳곳에서 크리스마스 카드와 장식을 팔고 있었고 극장 앞 작은 광장에는 쥐포와 오징어를 구워서 팔고 있었다.


나는 애리나 백화점 맞은편 제일 레코드사 앞에서 친구를 기다렸다. 1차선 도로를 하나 건넜을 뿐인데 백화점 앞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모두가 얼굴에 행복한 표정이 붙어 있었다. 레코드 앞 스피커에서는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흘러나왔다. 이런 분위기에 몸을 맡기고 그 흐름에 딸려 가는 것이 좋았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근심이나 걱정을 볼 수 없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시내에 나왔지만 목적지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평일에 만나지 못한 친구나 애인을 만나러 나온 것이다.


나 역시 친구와 만나기로 했다. 나는 목적이 있었다. 목적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아니다. 친구와 같이 있으면 재미있었다. 낄낄 거리며 시내를 거닐다가 백화점에 들어가서 크리스마스 카드도 골라보고, 피규어 파는 곳을 구경하고, 백화점 꼭대기에 올라가서 오락도 하고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뭐니 뭐니 해도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재미있었다. 구경을 하는 것은 돈이 없어도 가장 재미를 추구할 수 있는 놀이다. 그렇게 시내를 돌아다니다 시간을 보고 우리는 학생들이 많이 가는 유명한 분식집으로 갔다. 거기서 김밥과 쫄면을 먹기로 했다. 이 분식집의 김밥이 아주 맛있다. 분식집은 크고 넓다. 다운타운에서 가장 유명하다.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지만 직장인들도 먹는다. 단지 술을 팔지 않기 때문에 성인들은 주로 여자들이 많다.


타원형의 거대한 바 테이블이 있는데 그 안에서 김밥을 말고, 라면을 끓이는 아주머니들이 네 명이나 있었다. 네 명의 아주머니들은 분업화가 되어서 한 아주머니가 밥솥에서 밥을 꺼내서 큰 대야에서 식히고 나면 다음 사람이 양념을 하고 다음 사람이 김밥을 말았다. 그 움직임이 마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교한 움직임이었다. 바 테이블에 앉아서 그걸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우리는 빈자리에 앉아서 김밥과 쫄면을 주문했다. 쫄면은 친구가 무척 좋아했다. 분식집 쫄면의 맛은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다. 집에서는 어림도 없고 다른 분식집에서도 이런 맛이 나지 않는다고 친구가 말했다. 김밥도 맛있었다. 김밥은 밑간을 했는데 그 안에 무슨 양념으로 밥을 밑간 했는지 김밥 속에 들어가는 재료가 많지 않음에도 김밥은 정말 맛있었다. 딸려 나오는 계란 국도 맛있었다. 분식집 안에도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천장과 구석진 부분에도 크리스마스 장식이 보였다. 우리가 토요일 이 시간에 시내에 있는 학생들에게 유명한 분식집에 온 이유는 그녀를 보기 위해서이다.


그녀는 한 살 많은 고등학생이었다. 그녀는 친구와 함께 토요일 이 시간에는 늘 이 분식집에서 김밥을 먹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들은 신성여고 문예부로 학교 축제 때 나의 시선을 잡아 끈 시를 쓴 주인공이 둘 중에 있었다. 나는 그 시를 보기 위해 축제 3일 내내 신성여고에 갔었다. 마지막 날에는 그 시 밑에 나의 소감을 길게 써서 붙여 놨다. 그 뒤로 그녀가 내가 쓴 글을 보고 누구인지 궁금해한다고 친구에게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 앞에 선뜻 나설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나는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가 나를 찾는다는 소리에 그녀 앞에 한 번 나서려고 했는데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나는 그 남자친구를 싫어한다. 그 남자친구는 나의 형이기 때문이다. 형은 키가 크고 운동을 잘하고 얼굴이 잘생겨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여자 친구도 자주 바꾼다. 그런 형이 나는 싫다. 제대로 된 사랑을 하지 않는다.


그녀들이 대각선 맞은편 테이블 바에 앉아서 김밥을 먹고 있다. 그 주위만 환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중학생 주제에 사랑에 눈을 뜬 것이다. 친구는 이 정보를 나에게 알려줬다는 이유로 무척 뿌듯해하며 쫄면을 호로록 먹었다. 여기까지 왔다고 해도 그녀에게 가서 말을 걸 용기는 나지 않았다. 이렇게 바라볼 수만 있다는 것으로도 기분이 이렇게 좋을 수 있을까. 그녀는 김밥을 먹으면서 잘 웃었다. 내가 그 글을 적은 사람이야,라고 말한다면 분명 나의 모습에 실망할지도 모른다. 형에 비해 나의 외모는 형편없다. 나는 작고 초라하고 운동도 잘하지 못하는 그런 중학생이었으니까.


그녀 역시 비록 작고 연약해 보였지만 그녀가 쓴 시의 세계는 크고 넓고 강했다. 나는 그걸 알 수 있었다. 모든 걸 바꿔버릴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그녀의 시는 어딘가로 뻗어가고 싶어 했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그걸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시에는 굳건한 진실보다는 흔들림이 많은 가능성이 있었다. 가능성이 하늘을 날기 위해 손을 뻗었는데 그 손을 내가 잡았다. 그녀가 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나는 이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그녀가 뻗은 손을 잡고 우리는 뭐든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너 왜 안 먹냐?라고 친구가 말했다. 내가 다 먹는다며 친구는 김밥까지 야무지게 먹었다. 비록 그녀와 나란히 앉아서 김밥을 먹지는 않았지만 같은 공간에서 그녀와 나는 같은 김밥을 서로 먹었다. 그녀는 그녀의 친구와 이야기를 하며, 나는 나의 친구와 함께. 그날 집으로 오는 겨울의 거리는 몹시 겨울다웠다. 흐리지는 않았지만 해는 구름 저 편으로 숨었다. 거리의 모든 곳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면 나는 지금 쓰는 이 소설을 완성한다. 지금 이대로라면 분명 일 년 뒤에 끝맺을 할 수 있다. 그녀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된다. 우리는 같은 고등학생이 된다. 그때 그녀에게 정식으로 말할 것이다. 그녀 옆에 누군가 있다고 해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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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를 안 건 꽤 오래전의 일이다. 하지만 연락도 끊기고 서로 만나지 않게 된 건 15년도 훨씬 넘었다. 아니 17년은 더 되었을 것이다. 그는 나보다 두세 살 많았다. 하지만 정확한 나이는 알지 못한다.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만나면 악수를 하며 이름을 밝히고 나이를 물어보거나 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알게 되거나 설령 나이나 더 나아가 이름을 알지 못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름을 모르면 그저 별명을 부르면 되니까. 그는 나보다 두세 살 많았으니 형이라 부르면 된다.


그는 꽤 묘한 사람이다. 외로워 보이는 등을 지니고 있었다. 등은 볼품없을 만큼 초라했고 그 작은 등에는 외로움이 기분 좋게 올라타 있었다. 그의 등에 올라탄 외로움은 주위 사람들에게서 조금씩 나눠 받은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시절에는 모두가 외로워했고 그 외로움에 하루를 겨우 견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두에 나와 그가 속해 있었다. 물론 아닌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모여서 술을 마시게 되면 외로움에 몸부림을 쳤던 시기였다.


그는 학원에서 알게 되었다. 학원은 단과 학원으로 영어, 수학 그리고 다른 과목도 수업을 하고 있어서 학생들로 북적이는 학원이었다. 학원은 방학이 되면 미어터질 정도로 교실에 학생들이 바글바글했다. 학원은 쉬는 시간에 피아노 곡을 틀어 줬는데 그 곡이 카펜터스의 리처드 카펜터가 연주하는 피아노 곡이라는 건 후에 알게 되었다. 나는 리처드 카펜터가 개시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카렌을 거식증과 몸에 대한 집착으로 이끈 장본인이 리처드가 아닌가 싶다. 어린 시절부터 착한 콤플렉스를 덮어 씌워 카렌은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게 하고 그저 음악적 능력이 탁월한 오빠가 시키는 대로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노래만 불렀다. 카렌은 비상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그와 알게 된 후에 술자리에서 술에 취해서 한 번 했다가 핀잔만 들었다.


그와 나는 성문종합영어를 들었다. 그는 늘 구석진 자리에 홀로 앉아서 수업을 들었다. 수업이 끝나면 대부분 마음 맞는 몇몇이 같이 어울려 밥을 먹거나 당구장을 가거나 술을 마시러 갔지만 그는 늘 혼자였다. 나 역시 어울리는 건 별로라서 혼자서 학원을 나오곤 했다. 학원의 지하에는 식당이 있어서 학생들이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라면을 먹었다. 분식집 라면만큼 맛있어서 대부분 라면에 밥을 먹었다. 하지만 그는 라면을 먹지 않았다. 그는 항상 얼마간 저렴한 허여멀건한 국수를 먹었다. 그는 김밥이나 다른 건 전혀 먹지 않고 오직 국수만 먹을 뿐이었다. 그와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왜 항상 국수만 먹냐고 물었을 때 그는 단순히 국수가 맛있어서라고 했다.


나는 그의 행색이 늘 초라하고 국수만 먹고 있어서 가난해서 그러는 줄 알았다. 가방도, 옷도, 신발도 심지어 쓰고 있는 안경도 너무나 초라했다. 누가 봐도 나 초라해,라고 알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와 친해진 후 그의 집에 한 번 갔을 때 대문을 열고 드러나는 큰 마당을 지나 나타나는 저택 그리고 현관문을 열자마자 세워져 있는 많은 골프채가 그는 가난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행색을 초라하게 하고 다니는 것일까.


그의 아버지는 당시 3급 공무원이었고 그는 막내였다. 형과 누나들은 그와는 다르게 명품으로 스타일을 내는 사람들이었고 그와는 무척 달랐다. 다르다는 말은 얼굴에서 형과 누나들은 서로 닮았는데 그 혼자만 어디서 주워 온 것처럼 얼굴이 달랐다. 막내인 그의 얼굴이 큰 누나보다 더 나이 들어 보였다. 그 외 모든 면이 그와 형제자매들은 달랐다. 그는 막내였지만 수명이 다해가는 노인의 콩팥처럼 볼품없는 얼굴에 남루한 행색으로 다녔다. 학력 또한 너무 달랐다. 형과 누나들은 전부 SKY 대학을 나왔는데 그는 상고에 진학을 했다. 뜻하는 바가 있어서 상고에 진학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성적이 너무 좋지 않아 겨우 상고에 들어갔고 그때 아버지와 마찰이 심했다고 했다. 그 때문에 성문종합영어를 듣고 전문대 시험을 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성문종합영어 시간에 수업에 집중하지는 않았다. 그저 멍하게 수업시간을 보냈다.


그는 집에서도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밥을 먹을 때 빼고는 방에서 나오지도 않는다고 했다. 아버지와 형과 누나들이 그의 주위에 많은 사람들을 대동해서 다가왔지만, 그의 초라한 행색에 다가온 사람들이 마음을 한 번 돌리고 그의 말투와 형편없는 언변에 남아있는 마음도 돌려 버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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