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에게 상처받고 이고르에게 위로받은 아노라



이번 쾌거를 올린 아노라를 보면 이반이 일주일같이 있어 달라며 만 달러를 부른다. 그때 애니가 만이천 달러를 달라고 하고, 이반이 오케이를 한다. 이어서 애니는 이반 네가 만 달러만 달라고 해도 나는 오케이였어,라고 말하고, 이반은 삼만 달러라도 주려고 했지, 같은 대사를 한다. 이 장면이 꽤 유쾌하게 흘러간다. 나는 이 장면이 아주 좋았는데 션 베이커는 이 장면을 ‘귀여운 여인’을 오마주 했다.


귀여운 여인에서 에드워드가 비비안에게 일주일같이 지내자 한다. 그때 비비안은 큰 마음먹고 삼천 달러를 부르는데 에드워드는 흔쾌히 오케이 한다. 그리고 비비안은 에드워드에게 이천 달러라도 응했을 거라고 말한다. 그때 에드워드는 사천 달러라도 줄 뻔했지라며 아주 유쾌하게 그 장면을 연출했다.


귀여운 여인은 안 그런 것 같지만 청불이다. 비비안 역시 몸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한다. 아노라만큼 시각적인 장면은 없지만 대사가 매운맛이 많다.


콘돔을 종류 별로 꺼내서 어떤 곧휴에는 어떤 콘돔이 어울린다부터, 루카라는 친구는 비비안이 있는 호텔에 와서 노부부에게 부인이 보는 앞에서 곧휴를 입으로 하면 얼마라며 흥정도 막 한다.


아노라와 귀여운 여인을 보면서 우리나라 요즘 영화는 뭐 하나 그런 생각이 든다. 무슨 말이냐 하면 ‘검은 수녀들‘ 같은 경우 무서운 건 차치하더라도 전혀 맵지 않다. 재미가 없으면 흥미라도 있어야 하는데 둘 다 없는 그 어려운 길을 간다. 악마가 욕 도 못 한다. 1975년에 나온 엑소시트의 악령은 너네 엄마 벌봐에 어쩌고 하며 개쌍욕을 퍼붓는다.


근래 우리나라에서 만든 우리나라 영화는 전부 밍숭맹숭하다. 독립영화를 많이 보는데 독립영화는 요즘 잘 만들어서 거의 상업영화 수준인데, 상업영화 수준이라서 밍숭맹숭하다. 아주 못 만들면 열나게 비난하고 조롱하고 까겠는데 밍숭맹숭하게 만들어서 까는 것도 기운이 떨어진다.


재미가 없지는 않은데 잘 만들지도 못했다. 근래에 나온 한국 영화가 전부 그렇다. 밍숭맹숭하다. 영화를 보는 이유는 현실에서 못 하는 거 영화를 통해 한 번 겪어 보자는 건데, 욕도 못 해, 액션도 이상해, 대사도 그렇고 그래. 영화 만드는 사람들아 좀 미쳐서 만들어줄래.  


션 베이커 자리에 한국 감독이 있었다면 아노라는 어떻게 변했을까. 감독들아 대중 눈치 보지 말고 만들고 싶은 거 만들어.  https://youtu.be/pPYbwiZaOkk?si=y5_NyzIOrkTQ6H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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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뷰가 좋은 카페에 간다. 카페에 앉아서 바다 뷰, 도심지 뷰, 또는 논 뷰 등 탁 트인 경치를 바라보는 카페를 좋아한다. 그런데 내가 가는 카페는 골목에 있는 아주 작은 카페로 창문으로 오래되고 단단한 골목의 벽이 보인다. 나는 벽 뷰를 좋아한다. 앞이 딱 막힌 벽을 보는 게 좋다. 벽은 마치 나에게, 푸른 하늘이 보고 싶어? 하지만 볼 수 없어.라고 하는 것만 같다. 아직 계절의 추위가 사람들의 옷깃에 매달려 카페로 딸려 들어온다. 그 느낌을 받으며 벽을 멍하게 보고 있으면 벽이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의 피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카페에는 책이 있다. 나는 그 책을 뽑아 들었다. 어제도 읽었고 오늘도 읽는다. 제목이 벽 속의 다른 벽이다. 벽을 깨고 싶어 하는 벽의 이야기다. 초현실이며, 극사실주의에다가 온통 은유로 가득한 모호한 책이다. 모더니즘을 깨는 이야기다. 해체에 가깝다. 형식과 틀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다. 그래서 어렵다. 인간도 단단한 벽을 두르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벽이 더 완고해진다. 그러다 보면 도저히 깰 수 없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카페에 앉아서 벽을 보는 건 좋다. 골목의 벽은 봄이 되면 벽과 벽 사이에서 생명의 태동을 볼 수 있다. 녹색의 그것들이 고개를 들고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면 벽을 보는 재미가 최고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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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봄눈이 떨어지고, 얼굴을 건드리는 바람이 기분 좋아질 것 같다. 여기는 다른 지역보다 이른 벚꽃의 만개를 본다. 해가 붉은 깃의 꽁지를 달고 하루를 달에게 반납하고 나면 팡이 팡이 열린 봄송이가 그림처럼 펼쳐서 초현실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 것이다.


그러나 만개한 벚꽃을 보는 건 너무 아름다워서 슬프다. 벚꽃과 불꽃은 닮았다. 불꽃과 벚꽃은 찰나적이다. 오직 우리 의식에 지워지지 않는 점을 찍는다고 김혜리 기자도 말했다. 완성의 순간 수십만 개의 소멸로 흩어진다. 절정은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벚꽃의 만개와 꼬리를 흔들며 비명을 지르며 올라 한 지점에서 터지는 불꽃은 무섭도록 닮았다.


불꽃의 색이나 형태는 잊어버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 보는 것이다. 불꽃놀이하는 날 누구와 보냈는지 만큼은 계속 생각나서 추억이 되니까. 불꽃은 금방 사라져 버리지만 추억은 영원하니까. 벚꽃 역시 그러하다. 그리하여 너무 아름다워서 슬프다. 세상에는 그런 기묘한 것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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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4개월 동안 끊었던 

찌개와 마요네즈를 듬뿍 먹었습니다. 

반찌개세력의 밥상 장악, 

브로콜리의 식당장악 시도, 

채소폭거 등 

세계에서 콜레스테롤을 몰아내려는 

파쇼행위에 대한 상황을 

알리기 위한 대국민 호소에, 

저는 개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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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에도 슬픈 라면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어쩌면 라면은 너무 맛있어서 슬픈 음식일지 모릅니다.


‘봄날은 간다’에 나오는 라면은 슬픈 음식입니다. 상우와 은수의 첫날밤의 팡파르는 라면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소주와 몹시 어울리는 라면은 금세 식어버리지만, 또 금방 끓어오릅니다.


상우와 은수는 그 뜨거운 사랑을 합니다. 화분의 꽃이 더디게 피듯 상우의 시간은 차근차근 흘러가지만, 은수의 시간은 라면처럼 빠르게 끓어오릅니다.


후루룩 입으로 빨려 올라오는 라면은 어느 순간 바닥을 보이는 냄비의 허무를 나타냅니다. “라면이나 끓여” 은수의 말에 이제 상우는 고작 라면이나 끓이는 놈이 되어버렸습니다.


누군가와 마주하고 먹으면 더없이 행복한 라면이지만 혼자 먹으면 더 맛있기에 라면은 슬픈 음식입니다. 사랑하는 이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을 끓이는 라면은 슬픕니다.


결국 상우는 은수에게 “내가 라면으로 보이냐고!” 소리를 지릅니다. 라면은 그렇게 슬픕니다.

   

라면이 끓어오르면 비로소 외로움과 마주하게 됩니다. 스프를 넣고 팔팔 끓일수록 자극은 극에 달합니다. 라면은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젓가락으로 자꾸 휘젓게 됩니다.


몸부림을 바라는 라면은 외로워서 슬픈 음식입니다. 라면의 많아진 종류만큼 슬픔도 전부 제각각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라면을 마주하며 슬픔을 젓가락질합니다.


그대에게 닿지 않을 거라는 걸 압니다. 그래도 또 편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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