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울 일이 없을 것 같은 오래된 영화에서 문득 눈물이 떨어질 때가 있다. 이 영화가 그랬다. 몇십 년 만에 다시 봤다. 베이다가 토마스를 잃고도 그 슬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모습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오래전에는 미처 몰랐던 감정인지 아니면 그때는 알지 못했던 슬픔을 이제야 알아보게 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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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맥컬리 컬킨이 [나 홀로 집에] 1편을 끝내고 2편이 나오기 전에 출연한 작품이다. 당시에는 맥컬리 컬킨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극장을 찾은 관객이 많았을 것이다. 케빈의 기발한 장난과 유쾌한 소동을 기대했다면 당황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맥컬리 컬킨은 전혀 다른 아이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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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다는 태어날 때 엄마를 잃었다. 엄마에 대한 기억이 있을 리 없다. 그러니 베이다가 그리는 엄마는 온통 상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직 남은 사진 한 장을 들고. 아빠는 장의사다. 죽은 사람을 보내는 일을 하는 아빠가 정작 살아 있는 딸의 마음은 알아주지 못한다. 그런 아빠가 장례식장 분장사로 들어온 쉘리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반지까지 선물하자 베이다는 아빠가 밉다. 아빠에게는 새로운 사랑이 생겼지만 베이다에게 엄마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엄마를 생각하고, 시를 쓰고 싶어 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말로 꺼내기 어려운 마음을 시로 옮기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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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다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른들의 것이다. 어른들은 자기들끼리 사랑하고, 결혼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아이의 슬픔은 그 와중에 자꾸 뒷전으로 밀린다. 베이다가 왜 아픈지, 무엇을 그리워하는지 누구도 진지하게 들여다보지 않는다. 아이에게도 어른들이 모르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은유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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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베이다 곁에는 토마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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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는 베이다와 잘 맞는 구석이 별로 없는 아이다. 요즘 말로 하면 완전한 T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고,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밤이 되면 집에 가야 한다. 베이다가 상상력을 한껏 펼칠 때마다 토마스는 현실적인 말로 찬물을 끼얹는다. 온갖 알레르기를 달고 사는 녀석이라 베이다의 모험에 투덜거리기도 한다. 그런데도 결국 따라나선다. 둘 중 누가 더 용감한지 따질 것도 없이, 베이다가 가는 곳에 토마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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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베이다에게 토마스는 친구 이상의 존재다. 말하지 않아도 자기 옆에 있어 주는 아이. 베이다의 마음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해도 그 마음을 혼자 내버려 두지는 않는 아이. 치매를 앓는 할머니 역시 그런 존재다. 할머니는 베이다의 사정을 말로 풀어 주지 않는다. 그저 곁에 있다. 베이다에게는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자신을 고치려 들지 않고, 설명을 요구하지도 않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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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이가 벌집을 건드리는 장면이 있다. 벌떼를 피해 도망치다가 강물에 뛰어들고, 그 소동 속에서 베이다는 자신이 아끼던 요술 반지를 잃어버린다. 아이에게 반지는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다. 손에 쥐고 있으면 무언가 특별한 힘이 생길 것 같은 물건이다. 베이다가 믿는 세계의 일부이기도 하다. 베이다는 자신이 느끼는 상실을 시를 통해 마음을 붙잡으려 한다. 시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사랑한다고 토마스에게 고백하며 결혼하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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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의 대답이 재미있다. 선생님과 결혼하는 건 불법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시험 점수를 백 점 받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아이답고, 엉뚱하고, 어딘가 토마스답다. 베이다가 아무리 심각한 이야기를 해도 토마스는 자기가 아는 방식으로 대답한다. 두 아이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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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는 힘으로도 덩치로도 베이다를 이기지 못한다. 겁도 많고, 현실적이고, 어른들 말을 잘 듣는 아이지만 베이다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깊다. 베이다가 잃어버린 반지를 찾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혼자 벌집이 있는 곳으로 간다. 그리고 달려드는 벌떼에 쏘여 목숨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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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영화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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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베이다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엄마를 잃고 태어난 아이에게 또 하나의 상실이 찾아왔다. 하지만 엄마는 베이다가 태어나기 전에 떠났고, 토마스는 베이다가 함께 웃고 떠들며 지냈던 시간 속에서 사라졌다. 엄마는 상상으로라도 그려 볼 수 있었지만 토마스는 다르다. 어제까지 곁에 있던 아이가 이제는 어디에도 없다. 같이 모험을 떠날 수도,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도,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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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다는 슬프다고 말하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어쩌면 슬픔이 너무 커서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일부터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상실이다. 밝고 엉뚱했던 베이다의 세계가 한순간에 무너진다. 토마스를 잃은 베이다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 아이에게 앞으로 세상은 어떻게 보일지. 한참을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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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후반, 베이다는 자신이 쓴 시를 낭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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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흘리는 버드나무여, 왜 울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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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는 그 자리에 서서 말없이 울고 있다. 어쩌면 토마스도 그런 아이였는지 모른다. 자기 마음을 멋지게 설명하지도 못하고, 베이다가 겪는 일을 모두 이해하지도 못하지만, 늘 그 자리에 있던 아이. 크지도 않고 특별히 강하지도 않았지만 베이다의 삶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누구보다 컸다. 그 아이가 사라지고 나서야 베이다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조금씩 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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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시 낭독 장면이 좋다. 베이다가 슬픔을 완전히 극복해서가 아니다. 토마스가 돌아온 것도 아니고, 없어진 자리가 다른 무언가로 채워진 것도 아니다. 그저 베이다는 자기가 느끼는 것을 시로 썼다. 마음속에서 도무지 정리되지 않던 감정이 문장으로 나왔다. 어쩌면 그게 베이다가 할 수 있는 전부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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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면서 새삼 놀란 건 맥컬리 컬킨의 연기였다. 같은 해 겨울에 개봉한 [나 홀로 집에 2]의 케빈을 떠올리면 더 그렇다. 케빈은 영리하고 장난기 넘치는 아이였지만, 여기서 토마스는 유약하고 단순하며 어딘가 답답할 만큼 직선적이다. 베이다의 상상력을 따라가지 못하면서도 그 애를 위해서는 혼자 위험한 곳까지 찾아가는 아이. 맥컬리 컬킨은 그 모습을 과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토마스가 더 사랑스럽고, 그 아이가 사라진 뒤의 빈자리도 더 크게 느껴진다. 케빈의 얼굴은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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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영화를 다시 본다는 건 가끔 이상한 일이다. 줄거리는 기억나고 결말도 알고 있는데,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장면에서 갑자기 마음이 무너진다. 영화가 달라진 건 아닐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가 달라졌거나, 그동안 살아오면서 조금씩 알게 된 감정들이 화면 속 아이의 얼굴과 겹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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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다는 토마스를 잃고 마음의 공백이 커졌다. 그 공백을 메꾸게 해 줄 무언가도, 그 슬픔을 없애 줄 사람은 없다. 다만 베이다는 시를 썼고, 우리는 그 시를 듣는다. 베이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서 눈물이 났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그 비슷한 성장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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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전면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영화 내내 흐르는 기저는 '죽음'이다. 베이다가 느끼는 죽음, 어린이의 시선으로 보는 죽음에 관해서 이토록 깊이 있게 다루었다. 마지막 베이다는 토마스의 엄마를 안아 준 다음 말한다. 토마스는 걱정하지 마세요, 하늘에서 우리 엄마가 지켜 줄 거예요. 이 계절에 눈물을 흘리고 싶다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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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니스는 굉장히 많은 함축적 의미와 은유가 가득한 영화다. 겉으로는

어린이들의 모험을 다루고 있지만 그 속을 잘 벌리면 낙오자, 차별,

불평등에 대해서 말한다. 구니스라는 이름은 주인공 아이들이 살고 있는

동네 이름 [구운 독스]에서 유래한 말이다.


영화 속 배경인 오리건주 아스토리아의 [구운 독스]라는 지역에 모여 사는

아이들이 스스로 [구니스]라 부르며 모험을 시작한다. 영어 속어로

[구니]는 얼간이, 바보, 멍청이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류 사회나

부유층 아이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말썽꾸러기 개구쟁이 아이들이 스스로를

유쾌하게 자조하며 부르는 의미도 있다.


어릴 때 봤던 구니스는 재미있고 무서웠지만 눈을 뗄 수 없는 순수

모험 이야기였다. 그러나 근래에 다시 보면 구니스가 꼭 그렇지 만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손치콕비디 유튜브도 말했지만 이 영화는 강제철거라는

자본주의 앞에 내몰린 아이들의 생존기였다.


영화는 당시 이민자들, 키 호이 콴이 연기하는 아시아인 데이터는 기괴한

발명품이나 만드는 광대로 묘사되었고, 집에서 일하는 멕시코 가정부

아줌마는 잠정적 범죄자로 취급을 한다. 리처드 도너가 감독인데

슈퍼맨으로 히어로의 상징 같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티와 인디애나존스로 상상력의 끝판왕이었던 스필버그와

손을 잡았다. 이야기 줄기는 스필버그의 상상력에서 나왔다. 당시 바쁜

부모세대의 보호와 관리가 소홀했기에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들만의

아지트와 소통을 통해 어른들이 모르는 모험을 떠난다.


돈만 좇는 어른들의 세상에서 모험을 통해 스스로 히어로가 되는 건

스필버그가 아니라면 당시 나올 수 없는 이야기다. 거기에 리처드 도너는

통제가 불가능한 아이들의 생 날 것의 거친 모습을 담아냈다.

그리하여 나온 장면이 아이들이 보물선을 처음 봤을 때 놀라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위해 감독은 아이들에게 그 엄청난 보물선에 관해서 비밀로 했다.

그리하여 아이들이 처음 보는 거대한 해적선을 보고 놀라는 그 모습을

담아낼 수 있었다. 이 거대한 해적선을 그래픽이나 미니어처로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6개월 동안 800만 달러를 들여 동굴 안에 전장 70미터,

무게 300톤에 달하는 실물 크기의 해적선을 통째로 지어버린다.


세트가 지어진 첫날부터 리처드 도너 감독은 아이들에게 비밀로 하여

마지막까지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해적선을 실제로 만났을 때,

그 한순간의 장면을 위해 이 미친 짓을 해버린 것이다. 리허설 한 번 없이

워터 슬라이스를 타고 내려온 아이들이 해적선을 봤을 때 놀람과 리액션은

연기가 아니라 실제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아이들은 정말 놀라서 거의 기절할 뻔했다고 후에 가장 큰 형으로 나온

타노스 역의 조슈 브롤린이 말했다. 이 아이들이 모험을 하게 되는 동기가

중요하다. 아이들은 그저 모험을 떠나 금화를 찾으려는 게 아니다. 자본주의

정부에 의해 마을은 철거 될 운명에 놓이고 내일이라도 당장 걸 거리에

나가게 될 판이었다.


부모들은 대출금을 갚지 못해 전전긍긍했다. 아이들은 절박했다. 그 절박함이

모험으로 이끌었기에 영화는 내내 긴장감이 흘러 한낱 아이들의 순수한

모험 영화로만 보이지 않는다. 가족을 위해 모험을 떠나는 아이들과 대비를

이루는 사람이 마마 플라텔리다. 플라텔리는 자기 아들들을 채찍과 폭력으로

군림한다.


막내 슬로스는 외형적인 외모라는 이유로 지하에 가둔다. 영화는 가족을

대하는 모습을 대조적인 구조로 보여주면서 보는 이들의 생각할 기회를

준다. 지난 영화를 다시 보는 건 추억인 동시에 불편한 골짜기이기도 하다.


구니스 이야기는 당시 할리우드가 소외된 자들, 이민자들, 아시아 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너무 잘 보여주고 있다. 각본을 쓴 크리스 콜럼버스는

당시에도 아시아인들이나 백인 이외의 인종을 웃음거리로 소비한다는

비판을 자주 받았다.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흉측한 외모로 괴물로 여겨졌던 슬로스가

웃통을 찢고 그 안의 슈퍼맨 로고가 등장하면서 아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장면이었다. 영화는 겉모습으로 세상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의미를

슬로스와 아이들을 통해 말하고 있다.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겉모습으로만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https://youtu.be/lYLAGAwcpSQ?si=ZThfVCQFbCsfzD5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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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수정이 고공행진이다. 원작인 다이몬 미치코와 비교가 많이 되는데, 다이몬은 판타지 요소가 짙다. 그래서 더 웃기도 재미있는 부분도 있다. 계수정 1, 2화는 다이몬 시즌 1의 에피소드를 각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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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몬은 시즌 2까지 가면서 이히히힝 말도 수술하고, 햄스터도 수술하는데 계수정도 그렇게 할까? 그랬으면 흥미롭겠지만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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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몬은 큰 키에 먹보임에도 늘씬한 데다 파격에 가까운 섹시한 옷을 입고 병원을 엑스걸음으로 천하무적 돌아다닌다. 다이몬 버전에는 병원장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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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시즌 2의 병원장 역으로 나오는 니시다 토시유키는 코믹 캐릭터를 기가 막히게 해냈다. 20년 넘게 [낚시 바보 일지]에 출연하면서 국민 배우로 거듭난 니시다 토시유키의 귀엽고 얄미운 병원장 캐릭터가 다이몬을 더 돋보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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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다 토시유키는 24년에 안타깝게 고인이 되었다. 다이몬 버전은 계수정 버전에 비해 병원의 정치질이 거대하다. 계파를 몹시 따지고, 한 번 줄을 탔으면 거의 목숨까지 걸 정도로 교의를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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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의 명성에 누를 끼치는 환자는 받지 않거나 수술을 허락하지 않는다. 환자들이 있어도 계파 수장에게는 인사를 구십 도로 하고, 대답도 크게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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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대 문화나 비서와의 밀회 같은 분위기도 계수정 버전에 비해 과감하다. 다이몬의 목욕장면도 자주 나온다. 목욕탕에서 긴 다리를 휙 들어 올린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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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수정도 다이몬만큼 먹보지만 다이몬이 좀 더 많이 먹는 장면이 나온다. 둘 다 먹는 게 수술 다음으로 좋다. 맛있는 거 앞에서는 뭐 물불 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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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수정이 나오자마자 글로벌 인기를 얻는데 반해 우영우 일본 버전인 미나미는 시작 전부터 일본에서 기대가 컸는데 기대에 기대에 못 미치고 있어서 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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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몬 버전에서 병원장이 코믹 캐릭터였다면 계수정 버전에서는 김영민이 그 역을 하고 있다. 첫 화의 카리스마는 회를 거듭할수록 사리지고 귀엽다 못해 햄스터가 된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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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4화까지밖에 못 봤는데, 6화가 공개되고 스레드는 난리가 난 모양이다. 계수정과 다이몬이 수술 후에 마시는 캡슐 역시 화재다. 단맛을 더하는 액상 슈가시럽으로 알려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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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심하게 하면 몸에 있는 지방과 단백질을 운동 에너지로 바꾸는데, 너무 많이 운동을 하거나 심하게 운동을 하면 몸속에 있는 당을 끌어당겨 에너지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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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런 이유로 운동선수들이 은퇴 후에 살이 많이 찌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다이몬과 계수정 역시 수술할 때에는 집중과 에너지를 전부 소진하듯 수술하니 슈가시럽으로 당을 충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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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신은 펄 맥신 3부작의 마지막 편이다. [엑스]와 [펄]도 고어가 만만치 않았지만 영화 내내 그런 장면이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후반부나 몇몇 결정적인 순간에 잔인함을 몰아치는 식이었다. 그런데 [맥신]은 다르다. 시작부터 붕가붕가 장면과 나체가 화면을 채우더니 고어와 섹시함이 영화 전체를 장악한다. 20분쯤 지나면 남자의 중요 부위를 하이힐로 짓밟아 으깨는 장면까지 나온다. 이쯤 되면 작정하고 밀어붙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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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에서 오즈의 마법사에서나 볼 법한 화사한 색채, 늘 웃는 얼굴의 펄. 그런 여자가 도끼를 들고 사람을 내리찍는다. 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묘하게 무서웠다. 예쁜 화면 안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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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신]에는 앞의 두 편에서 보기 어려웠던 낯익은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 엘리자베스 데비키, 케빈 베이컨, 릴리 콜린스, 할시까지 나온다. 미아 고스 혼자 영화를 끌고 가던 전작들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다. 이야기는 앞의 두 편에서 이어지지만 굳이 전부 챙겨 보지 않아도 이해하는 데 큰 문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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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바다가 된 농장에서 살아남은 맥신은 로스앤젤레스로 온다. 성인영화 배우였던 과거를 지우고 진짜 할리우드 스타가 되고 싶다. 오디션에도 합격한다. 이제 꿈에 한 발짝 다가섰나 싶지만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자신을 쫓아다니는 미친놈도 모자라, 맥신의 과거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탐정까지 나타나 숨통을 조여 온다. 맥신은 살아남기 위해 점점 더 잔혹한 선택을 한다. 펄을 떠올리게 하는 살인자의 얼굴이 슬그머니 겹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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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1985년 로스앤젤레스는 화려하면서도 위험하다. 화면은 번쩍이고 거리는 매혹적이지만 그 안쪽에는 퇴폐와 폭력이 들끓는다. 맥신의 몸속에 광적인 살인마 펄과 순수한 맥신이라는 서로 다른 얼굴이 공존하듯 도시도 그렇다. 할리우드 영화가 있는 곳에 포르노 영화가 있고, 스타가 빛나는 무대 뒤에는 이름조차 제대로 불리지 않는 성인 배우들이 있다. 겉으로는 전혀 다른 세계 같지만 실은 한 도시 안에 붙어 있다. 영화는 그 간격을 꽤 그럴듯한 미장센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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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장면은 아프게 다가오고, 공포 장면은 불쑥 튀어나온다. 특히 갑자기 분위기를 뒤집는 연출이 좋았다. 스릴러로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도 있지만, 중간중간 공포영화의 감각을 과감하게 끌어들이는 대목이 더 기가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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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결국 눈길이 가는 건 미아 고스다.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기다가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순진한 얼굴을 한다. 그 둘이 한 사람 안에서 번갈아 나타나는데, 어느 쪽이 진짜인지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펄과 맥신을 모두 연기하는 배우의 얼굴 자체가 이 3부작의 가장 흥미로운 구경거리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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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가 엉뚱한 곳에서도 눈이 멈췄다. 맥신이 형사 두 명을 만나고 집으로 들어가려는 장면이다. 문을 여는 순간 문짝이 무척 낯익었다. 우리나라 옛날 집에서 보던 나무 여닫이문과 비슷해 보였다. 할리우드의 퇴폐적인 세계를 구경하다가 갑자기 오래전 한국의 집 문짝을 떠올리게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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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일본 배우와 한국 배우가 함께 드라마에 나온다고 해서 화제가 되지는 않는다. 서로 오가며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하는 일이 흔해졌고, 한일 합작이라는 말도 예전만큼 특별하게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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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그런 조합만으로 화제가 됐던 드라마가 있었다. 원빈과 후카다 쿄코가 출연한 작품이다. 나는 아직도 그 드라마를 보지 못해서 무슨 내용인지 모른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방영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만 해도 한일 합작이라는 말이 꽤 그럴듯하게 들리던 시절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떤 이야기였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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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는 지창욱과 이마다 미오가 나오는 판타지 로맨스다. 두 배우의 팬이라면 두 사람의 얼굴만 보고 있어도 입꼬리가 한껏 올라갈 테지만, 그렇지 않다면 조금 심심할 수도 있다. 주인공 둘을 빼고 나면 나머지 인물들은 죄다 오징어가 되는 식이다. 이런 드라마는 대놓고 그렇게 밀어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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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느낌으로 떠오르는 작품이 [이 사랑도 통역되나요]다. 다만 두 드라마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기는 어렵다. 이사통은 코미디도 재미있지만,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꼬이는 방식이나 이중인격적인 모습,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제법 깊게 들어간다. 그래서 이야기를 따라가는 재미가 있었다. 후쿠시 소타가 등장해 고윤정과 러브라인이 펼쳐질 듯한 대목도 있는데, 이런 구성을 참 잘 살렸다. 후쿠시 소타는 여러 이유로 일본 우익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던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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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드라마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심장병을 앓고 있는 이마다 미오는 딸기 농사를 성공시키려는 야심 찬 젊은 농부다. 지창욱은 그 땅이 자기 것이라고 여기며 일본까지 건너가 땅을 차지하려 한다. 그러다 둘이 부딪치고, 티격태격하다가 사랑에 빠진다. 이런 설정에 현실성을 따지는 건 별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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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은 오히려 옛날 드라마를 떠올리게 한다. 2000년대 초반 로맨스 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분위기랄까. 두 사람이 함께 있기만 하면 화면에 몽글몽글하고 샤랄라한 빛이 번진다. 인물 주변으로 반짝이는 공기까지 만들어 놓은 느낌이다. 요즘 드라마에서 이런 연출을 만나니 조금 낯설면서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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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현실적인 건 지창욱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잘생겼다고 하는 장면이다. 그건 현실 고증이 제대로 됐다. 한국판 [닥터 엑스]의 김지원을 보면서 예쁘다고 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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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도 나온다. 총 10부작이다. 복잡한 이야기나 묵직한 주제보다 지창욱과 이마다 미오가 알콩달콩 붙어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롸잇 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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