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엘리베이터를 타기 시작하면 펼쳐서 읽는 소설이 있다. 그걸 주차장까지 아주 천천히 걸어가면서 읽는다. 그러면 대략 두 페이지 정도 매일 읽을 수 있다. 걸음은 아주 느리게 걷는다. 영화의 한 장면을 슬로모션으로 돌리는 것처럼 걷는다.


여름이라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가운데 천천히 걷고 있으니 바닥에 내려온 햇빛이 복사열이 되어 올라왔다. 그때 옆으로 여고생 두 명이 나를 앞질렀다. 그녀들도 걸음이 아주 느리다. 그 걸음걸이에는 더위와 함께 공부에 대한 무게 때문에 느린 것이다. 두 명의 여고생은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하는데 시간을 보낸 탓에 팔뚝과 다리가 하얗다. 한 명은 가방이 무거운지 앞으로 맸다. 마치 아기를 안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녀들의 걸음걸이는 나보다는 빠르지만 보통 사람들보다 느리다.


하얀 티셔츠에 체육복 반바지가 그녀들의 패션이다. 멋보다는 공부하는데 초점이 맞는 스타일이다. 나를 앞질러 나보다 조금 빠르게 걸어가는 그녀들이 하는 대화는 수학에 관한 것이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가 맞겠지만 그래도 여고생 두 명이서 길거리를 걸어가면서 그 녀석이나 그 오빠 이야기가 아니라 수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공부와 무더위가 그녀들의 어깨 위에 올라타 무겁게 짓누르는 게 보였다. 등이 약간 굽고 걸음걸이에서 의욕은 도통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여고생 특유의 밝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건 약간은 높은 톤과 그 시기만의 말투에서 나타났다. 그녀들은 학교로 가는 길로 가고 나는 주차장으로 가면서 그녀들과는 헤어지게 됐다.


나는 나대로 주차장으로 가는데 노인정 앞의 그늘이 진 평상에는 오전부터 더위를 피해 아버님들이 나와 있다. 나는 아침마다 이곳을 지나간다. 천천히. 책을 읽으며. 그러면 앉아서 무료한 아버님들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 꽂히는 걸 알 수 있다. 아버님들은 어머님들과 다르게 인원이 많으면 말 수가 오히려 더 적다. 그러다가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목소리가 큰 아버님이 나타나서 그 자리를 평정한다. 그러면 곁가지로 소심한 아버님들이 한 마디씩 한다. 그렇게 하면 비로소 아버님들이 하나의 주제로 열띤 대화를 한다.


아버님들이 '소. 심.'하고 매일 오전에 이곳에 우르르 나오는 이유는 집에 앉아서 에어컨을 틀어 놓고 티브이를 보는 것이 눈치가 보이는 것이다. 퇴직하고 난 후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아버님들은 소심해지고 아침을 먹자마자 집에서 나와 이곳에 모인다. 그렇게 소심한 아버님들이 모여있기에 담배를 피우거나 서로 분위기를 보며 무슨 이야기를 할까 하며 서로를 쳐다본다. 그러다가 걸걸한 목소리를 지닌 한사랑 산악회의 김영남 회장 같은 아버님이 오면 그제야 아파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발전된 땅의 이야기, 가족들 이야기를 거쳐 정치 이야기에서 모두가 정점을 찍는다.


그 사이를 책을 읽으며 사막 거북이처럼 천천히 지나가면 아버님들이 죄다 쳐다본다. 노인정 앞에 매일 나오는 아버님들의 뒷모습은 바닷가에 늘 나오는 노인들의 뒷모습과는 또 다르다. 바다를 바라보는 노인들의 뒷모습에는 일종의 세계가 도사리고 있는데 노인정 앞의 아버님들의 뒷모습에는 내리쬐는 볕을 피하는 것밖에 지금 할 게 없다는 듯 더위의 무게가 내려앉아 있다.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렇게 소심한 아버님들이 모여서도 각자의 세계에 빠져 있다가도 걸걸하고 분위기를 이끄는 한 명의 아버님이 딱 나타나서 허리춤에 양 팔을 올리고 분위기를 끌어내면 아버님들은 또 신나게 세상이 돌아가는 이야기를 한다. 

경제학자이자 도덕 철학가인 애덤 스미스의 책을 보면 대략(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런 구절이 있는데 인간은 대체로 이타적이라 누군가의 기쁜 소식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보통 우리 인간은 질투가 많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고, 또 우리는 늘 그런 것을 느끼며 살고 있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는 이타적인 마음이 가득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누군가의 좋은 점을 보면 칭찬을 아끼지 않기도 한다. 설령 그것이 지금 행복하지 않은 나의 생활을 더 나아지게 하지 않더라도 타인의 좋은 점을 보면 칭찬을 한다.


아버님들이 앉아 있는 곳을 아침마다 지나가야 한다. 나의 습관 때문에 주차장까지 가는 동안은 늘 책을 읽으며 간다. 그러다 보면 아버님들은 일제히 나를 본다. 그리고 한 아버님이 한 마디를 한다. 걸어가면서도 공부하네, 참 보기 좋네. 같은 말을 한다. 그러면 옆의 아버님도 한 마디 거든다. 나를 모르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듣는 칭찬이 나는 나쁠 리가 없다. 그러면 고개를 들어 목례를 살짝 하고 지나간다. 그럼 한 동안은, 걸걸하고 분위기를 이끌어갈 아버님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버님들은 서먹하지 않게 소싯적 공부를 한 이야기 같은 것들을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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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심한 자갈치


편의점 탐방 중 자갈치가 눈에 딱 들어오기에 그대로 집었다. 자갈치를 도대체 얼마 만에 먹어 보는 거야. 야심 차게 뜯어서 맥주와 함께 먹으며 ‘인간은 왜 전전두엽이 도파민으로 넘치는가’라는 인문과학책을 읽는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고 읽고 있던 ‘태엽 감는 새’를 읽을 요량이었다.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는 방법 중에 조깅 후 뜨거워진 몸을 찬물로 잘 식혀준 다음 선풍기 바람 솔솔 맞으며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좋아하는 소설을 읽는 것이다. 거기에 자갈치를 곁들여 먹는다. 맥주를 한 잔 벌컥벌컥 마신 다음 자갈치를 와작 씹어 먹는데 아, 이런. 이럴 수가. 이런 제길.


도대체 사람들이 자갈치에 얼마나 악플을 달고 욕을 했기에 자갈치가 이렇게 싱거워졌다니. 자갈치 정도 매일 밥처럼 먹는 것도 아닌데. 매일 몇 끼 챙겨 먹어야 하는 밥이야 건강이니 어쩌니 하며 유난 떨어도 되지만 한 달에 한 두 봉지 정도 먹는 자갈치야 옛날 그 맛 그대로도 괜찮잖아.


그러니 수출하는 라면과 새우깡이 더 맛있다고 유튜브 영상이나 SNS에 올라오기도 한다. 나는 국도 거의 먹지 않고 설렁탕을 먹으러 가도 소금을 넣지 않고 그 밍밍하고 고소한 맛이 좋아 그대로 먹는다. 집에서 밥을 먹을 때에도 소금기가 거의 없을 정도로 싱겁게 먹는다. 하지만 라면이나 과자 정도는 짭조름한 맛으로 먹는 게 좋은데 과자와 라면도 변심을 했다.


짭조름한 소금기를 자갈치에서 뺐다고 해서 아파야 할 사람이 아프지 않거나 병에 걸릴 사람이 병에 안 걸리는 것일까. 제 아무리 청소년을 법으로 금연을 시키고 담배를 팔지 못하게 해도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늘 핀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과자는 양도 줄어들고 가격도 올라서 자주 사 먹을 수도 없는데 맛까지 변심을 하면 어떡하나.


라면에서 MSG가 빠지고 자갈치에서 짭조름한 맛이 빠지게 된 계기가 아마도 십여 년 전 먹거리 엑스파일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때는 지금처럼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이나 브런치가 없어서 주로 트위터를 했었다. 자랑 아닌 자랑을 하자면 나와 트위트 맞팔이 되어 있는 유명인이 몇 있었는데 가수 김종서, 당시 두산 박용만 회장, 당시 피디수첩 피디였는데 이름이 기억 않남, 일본 아브 배우 마리아 오자와 등 몇 있었다. 그들은 보통 자신을 팔로워 하는 일반인들은 많지만 그들이 팔로워 하는 수는 적은데 왜 나를 팔로워 했는지 그 이유를 나도 잘 모른다. 


그때에도 열심히 트위터에 140자 이내로 글을 올렸었다. 먹거리 엑스파일이 유행이었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런데 맹신 수준이었다. 조금이라도 “제가 한 번 먹어 보겠습니다”라는 말에 반기를 들면 악플과 공격이 들어왔다. 그때 MSG를 조금만 사용하면 그 식당은 아주 나쁘고, 먹는 것으로 몹쓸 짓을 하는 양 비쳤다. 너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몰래카메라로 온통 편집 질로(나는 편집을 주로 하는 일을 하기에 잘 안다) 사람들을 티브이 화면 앞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트위터에 그 점을 꼬집으며 글을 올렸는데 많은 사람들의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정말 맹신이었다. 나는 그래서 만약 MSG가 문제라면 MSG를 만드는 공장을 취재해야지 왜 그걸 사용하는 식당을 망하게 하는지 이유를 말해달라고 반문했다. 그렇지 않은가. 미원 만드는 공정은 다 개방이 되어 있고 예약을 하면 견학도 가능한 것으로 안다. 방송국 놈들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방송을 타게 되면 폭주는 하지만 멈추지를 못한다. 미원, 즉 조미료는 홈페이지에 모든 과정을 오픈해놨고 한 번이라도 들어가서 보고 나서 말을 하면 괜찮았을 텐데 사람들은 믿고 싶은 걸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그걸 각인한다. 그때 정말 무섭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라면에도, 자갈치에도 조미료가 사라지고 대체 양념이 들어가게 된 것 같다.


조미료의 역할은 이런 것이다. 떡볶이는 붉은색이다. 기본적으로 고춧가루가 들어간다. 그러니까 떡볶이는 매운 음식이다. 매운 걸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떡볶이가 먹고 싶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거기에 조미료를 넣으면 맛이 중화가 된다. 조미료는 감칠맛을 내는데 그 감칠맛이라는 맛이 밍밍한 맛, 닝닝한 맛을 말한다. 그래서 고춧가루가 들어간 떡볶이에 밍밍한 조미료가 들어가면 중화가 되어 달큼한 맛이 나는 것이다. 천연 조미료가 다시마인데 다시마를 많이 넣어서 국물을 우려내 보면 그 맛을 알 것이다. 조미료가 몸에 나쁘려면 많이 섭취를 해야 한다. 많이, 아주 많이 먹어야 한다. 그건 술을 많이 마시는 것과 담배를 많이 피우는 것보다 몸에 덜 해롭다. 무엇보다 어떤 과학잡지에도 조미료가 몸에 나쁘다는 보고가 없다고 한다.


다시 자갈치로 돌아와서, 편의점 탐방이 취미 중 하난데 늘 새로운 과자들이 가득가득하다. 마트에 가도 과자는 이미 수십 종이다. 선택의 폭이 아주 넓어졌다. 종류는 어마어마하고 맛도 다양하지만 보통 우리는, 인간은, 과자는 늘 먹던 걸 집어 오는 것 같다. 새로운 과자가 나오면 한 번 먹어보기는 하겠지만 과자 자체를 한 달에 한 두 봉지 정도 먹기에 자주 먹던 걸 먹게 된다.


어릴 때는 계란과자도 자주 먹었고 사브레도 자주 먹었고 죠리퐁도 자주 먹었지만 대학교를 가고 군대를 하고 사회인이 되면서 점점 멀리하게 된다. 그러다가 문득 떠난 여인을 떠올리듯 문득 자갈치가 먹고 싶어 한 봉지 사 먹었는데 이렇게 변심한 맛이면 좀 슬플 것이다.


자갈치는 현재 우리 모습의 단상이 아닌가 한다. 하고는 싶지만 타인의 눈치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는 없어서 절충안을 내밀어 수평을 맞추어서 하기는 하지만 내심 마음을 꽉 채우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생각이 나면 그 자리에 자갈치는 있으니 어떻게든 한 번씩 먹게 된다. 그 정도라도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줘서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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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은 슬픈 음식


라면은 슬픈 음식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라면은 슬프기만 하다.

상우와 은수의 첫 날밤의 팡파르는 라면과 함께 시작된다.

소주와 몹시 어울리는 라면은 슬프다.

화분의 꽃이 더디게 피듯 상우의 시간은 차근차근 흘러가지만 은수의 시간은 라면처럼 금세 끓어오른다.

후루룩 입으로 빨려 올라오는 라면은 어느 순간 바닥을 보이는 냄비의 허무를 나타낸다.

“라면이나 끓여" 은수의 말에 이제 고작 라면이나 끓이는 놈이 된 상우.

누군가와 마주하고 먹으면 더 없는 행복한 라면이지만 혼자 먹으면 더 맛있기에 라면은 슬픈 음식이다.

사랑하는 이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 끓이는 라면은 슬프다.

결국,

상우는 은수에게 “내가 라면으로 보이냐고!”

라면은 그 렇 게 슬프다.

라면이 끓어오르면 비로소 외로움과 마주하게 된다.

스프를 넣고 팔팔 끓일수록 자극은 극에 달한다.

라면은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젓가락으로 자꾸 휘젓게 된다.

몸부림을 바라는 라면은 외로워서 슬픈 음식이다.

라면의 많아진 종류만큼 슬픔도 전부 제각각이다.

오늘도 우리는 라면을 마주하며 슬픔을 젓가락질한다.

https://youtu.be/JJTTr17zaMM


영화 속에서는 라면이 그렇게도 슬프게 나온다.

선생 김봉두에서 불쌍한 녀석 소석은 라면이 그렇게 좋다.

김봉두가 김치 없는 라면이 맛없어서 먹지 않을 때 소석은 그 맛없다는 라면을 맛있게 허겁지겁 먹는다.

사실 지나고 나서 보면 라면을 맛있게 먹는 것처럼 보인다.

황비홍 1편을 지금 보면 이연걸 대역의 티가 너무 나는 것과 비슷하다.

소석은 비가 쏟아지는 날에 김봉두에게 바칠 삼을 캐다가 들어와서 부뚜막에서 쭈그리고 앉아 라면을 끓여 먹는다.

라면은 소석의 삶을 파고든 곰팡이와 같다.

라면은 슬픈 음식이다.

https://youtu.be/yKDQz_v1VDQ


천하의 나쁜 노무 새끼 필제는 화를 내도 웃기고, 짜증을 내면 더 웃기고, 웃기면 대책 없이 웃겼다.

세상 무서울 것 없고 껄렁해 보이는 그 역시도 그럴수록 더 슬프다.

그런 필제가 좋아하는 건 왕뚜껑 라면.

필제는 기가 찬 동네에 왔지만 기똥 찬 동네라는 것을 알게 되고 거기서 어떻게 해야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지 알게 된다.

그 중심이 슬픈 라면이 있었다.

라면은 필제의 슬픔을 같이 했다.

하지만 필제에게 라면이 없었다면 해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절망의 끝에서 날개를 달고 날아가면 희망이 보인다는 것을 화면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https://youtu.be/1FuzcwV3AN4




라면을 끓여 밥상 위에 올려놓다 밥상 다리가 힘이 없어 기울면서 라면이 전부 방바닥에 쏟아졌다.

그저 멍하게 바라봐야만 했다.

그저 멍하게.


5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아침밥은 고사하고 씻고 옷을 입고 마을버스를 타고 대로변까지 나가서 다시 416 버스를 타야 한다. 늘 그 버스를 그 시각에 타지만 언제나 사람들로 터져 나간다. 양보라든가 친정을 찾다가는 버스를 타지 못한다. 버스를 놓치면 그다음을 상상하기도 두렵다. 버스 문에 매달리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든 올라타야 지하철을 탈 수 있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버스 속은 사람들이 뿜어내는 숨 냄새와 비 비린내로 먹은 것도 없는데 구토가 인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지옥철에 오르는 순간 전혀 다른 세계가 되어 버린다. 보이는 건 사람들의 등과 길고 짧은 머리카락이 달린 머리통뿐이다. 고개를 꺾어 천장을 바라보며 오늘도 무사히 회사에 도착하기를 빈다. 이렇게 난리를 피워야 회사에 제대로 출근할 수 있다. 소변이 마려워도 참아야 하고 앞사람의 머리에서 냄새가 나도 참아야 한다.


이렇게 모든 걸 참아가며 서울에서 생활한지도 벌써 7년째다.

하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나에게 편지를 쓰며, 힘없이 서 있던 나를 안아주며 나의 길을 두려움 없이 상경했지만 현실은 나의 발끝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기만 한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이 미래인 현재에 오직 희망 하나만 믿고 달려왔다.

하지만 희망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배신을 잘한다는 것을 알아버린 순간 이 세계에서 홀로 되어 버렸다.

언제부턴가 세상은 점점 빨리 변해가기만 하는데 나만 같은 곳에 머물러 있다.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아들을 잃어버린 하워드와 앤이 된 느낌이다.


마음의 심한 공백이 생기면 마왕의 노래를 들었다.

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 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에 더 이상 도움 될 것이 없다고 마왕이 말했다.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구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 척도인가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휘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라며 늘 나의 등을 토닥여 주었는데.

마왕도 가 버리고 남은 것이 없다.


이젠 지친다.

라면이 쏟아졌다.

밥상 위에서 흐르는 라면 국물이 바닥으로 퍼지는 꼴이

마치 머리가 터져 뇌하수체가 흐르는 모습처럼 보인다.


https://youtu.be/CyT4Kjint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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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북사랑 2021-07-26 1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교관님 페이퍼에 오면 자주, 음식 사진, 먹을 거리 이야기가 올라와서 좋은데 이 글 유독 좋습니다!!

전 영화는 안 봤지만, “내가 라면으로 보이냐고!” 요 대사 상황 안에서 들으면 더 뇌리에 박히겠어요

교관 2021-07-27 12:28   좋아요 0 | URL
허진호 감독의 예전 영화들을 좋아해서 봄날은 간다는 몇 번 봤어요 ㅎㅎ. 이영애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예쁘고, 유지태는 뭐야? 할 정도로 젊으네요 :)
 

하루키도 매킨토시를 좋아해서 작업실 내부를 보면 사과농장이다. 애플은 이미 우리 삶을 깊게 파고들었다. 이제 곧 안경이나 입는 옷까지 애플사의 기기가 들어간 물품이 나오지 않을까. 한 간에는 80만 원 정도의 맥북이 나온다는 소리까지 들린다. 그것이 사실이건 루머이건 매킨토시는 우리의 삶에 대한 질을 평균에서 높여주는 건 확실하다. 물론 돈이 많이 들긴 하지만.


하루키도 에세이에서 매킨토시에 대해서 글을 썼다. 에세이를 읽어 보면 알겠지만 원래 미국의 매킨토시라는 사과는 가장 저렴한 사과라서 샐러드를 해서 먹거나 잼 같은 걸 만들어 먹는다고 한다. 사과 매킨토시는 스펠링이 Mclntosh이고, 컴퓨터 애플의 스펠링은 Macintosh이다. 상표 관계로 철자가 조금 다르다고 하루키가 말했다.


상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렇게 스펠링을 다르게 만든 사람이 스티브 잡스다. 스티브 잡스는 픽사를 만들 때에도 픽셀과 아트라는 단어에서 픽사를 만들었다. 스티브 잡스가 픽사를 만들었을 때는 위기였다. 애플 사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사에서 쫓겨나기 전 83년에 자신이 만든 매킨토시 1호 ‘리사’를 들고 한국으로 온다. 누구를 만나러 오느냐 하면 바로 호암 이병철이다.

아이폰과 갤럭시는, 그러니까 애플과 삼성은 초반에 서로 죽기 살기로 물어뜯고 전투를 하던 사건을 생각하면 잡스가 호암을 찾아갔던 일화는 신기하기만 하다. 그 이야기를 하자면 몹시 기니까 궁금하면 검색하면 알 수 있다. 많은 곳에서 잡스가 호암을 찾아온 배경과 이야기를 많이 해놨기 때문에 검색하면 알 수 있다. 그때 호암은 젊은 잡스에게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았다고 한다. 잡스는 호암을 찾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미국으로 돌아가서 애플사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리고 85, 6년도쯤 픽사를 만든다. 그때 회사에 조지 루카스 필름의 그래픽 부서에서 당시에 스타워즈에 삽입할 그래픽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던 천재 존 라세티를 데리고 오면서 픽사의 모양새를 갖춘다. 존 라세티는 당시에 디즈니 사에 자주 들락거리면서 그래픽과 만화의 조합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다. 잡스는 라세티와 손을 잡고 가장 먼저 한 작업이 ‘토이 스토리’였다. 토이 스토리가 나오기 전에 3D 단편 영화 ‘룩소 주니어’를 선보이게 되는데 평단에 반응이 좋았다.


이 룩소 주니어가 후에 픽사의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등장하는 마스코트가 된다. 애기 애기 전등이 픽사 영화의 마스코트가 되었지만 디즈니사로 흡입되고 나서도 룩소 주니어는 언제나 픽사 영화 앞에 등장한다. 잡스는 우디와 버즈의 이야기 ‘토이 스토리’ 하나에 10년을 투자한다. 10년 동안 기술자들이 잡스 하나를 믿고 지치지 않고 척박한 애니메이션 세계에 3D 애니메이션을 위해 노력을 한다.


당신들이 창조해내는 우디와 버즈는 비록 생명이 없는 장난감에 지나지 않지만 영혼을 불어넣을 수 있다. 세계의 아이들은 우디와 버즈를 좋아하게 될 것이며 언젠가 우리의 이 허황된 노력을 전 세계가 알아주는 날이 올 것이다. 잡스는 기술자들과 그래픽 디자이너들에게 신념을 전했고 우디와 버즈를 만드는 이들의 감성이 10년 동안 이어져 그들의 감성이 주인공에게 스며들었다.


잡스의 신념 하에 애니메이터들은 밤낮 가리지 않고 10년 동안 토이스토리에 매달리게 된다. 잡스는 자신을 믿어준 직원들을 위해서 10년간 월급을 꼬박꼬박 주었다고 한다. 잡스는 직원들에게 투자를 했던 것이다. 마침내 95년 ‘토이스토리’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미국의 평단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브리와 비교해가며 곧 망할 것이라 예측했지만 사람들은 우디와 버즈를 보기 위해 아이들의 손을 잡고 극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열광 그 자체였다. 아이들과 어른들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았다.


픽사는 벌어들인 자본으로 토이스토리 2, 3을 제작한다. 잡스는 픽사를 디즈니사에 넘기게 된다. 그리고 다시 애플로 돌아온 잡스는 아이폰을 만들고 아이패드를 만들었다. 디즈니사의 픽사 영화가 시작할 때 룩소 주니어가 등장하는 건 잡스와 디즈니의 약속이었다. 토이 스토리 3에는 멋진 대사가 우르르 나오는데,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던 바비가 이런 말을 한다.


Authority should derive from the consent of the governed, not from the threat of force!


이 대사는 분명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며 그 누군가는 새겨 들어야 할 말이다. 토이스토리 3에서 마지막에 대학생이 된 앤디는 우디와 버즈를 두고 떠나게 된다. 우디는 일어나서 떠나는 앤디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


So long partner


이 대사는 픽사가 떠나간 잡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루키의 작업실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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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태엽 감는 새’를 다시 꺼냈다. 엽서까지 붙어 있는 책이라 오래전 책이고 벌써 여러 번 읽었는데 책은 방금 구입한 것처럼 너무나 깨끗해서 놀라고 내용은 또 처음 읽는 것 같아서 또 놀랐다. 안 그래도 놀라는 일 투성인데 놀라는 일은 늘 곁에 매복하고 있는 것 같다.


그동안 전시회를 끝내고 운이 좋게 지역 신문사 여러 곳에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해서 불려 다니며 인터뷰를 했다는 말은 거짓말이고, 집 구석에 있는 김영하 책들을 꺼내서 읽어보니 시간이 또 흘렀다. 김영하의 소설은 다 있었는데 또 몇 권이 사라졌다. 책에 발이 달려있는지 가만두는데도 시간이 지나 보면 사라지고 없다. 이 세상에 그런 물품들은 늘 존재한다.


여름이라 집 앞 바닷가에서 뒹굴뒹굴하며 김영하의 소설을 읽다 보니 또 타 버렸다. 살이 타고나면 피부에서 태양의 냄새가 난다. 태엽 감는 새는 4권이나 되니까 바닷가에서 여러 날 동안 읽고 나면 아마도 새까맣게 되어 있지 않을까. 일행은 바닷가에서도 온몸을 다 감고 있고 나는 그 반대다. 그래서 둘이 다니면 흑과 백. 태엽 감는 새의 초반에 스파게티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이 스파게티에 도가 틴 사람으로 10분을 삶아야 하는데 9분은 너무 짧고, 그렇다고 11분은 너무 길다. 삶도 늘 그런 순간에 봉착한다. 축구도 10명이 뛰기에는 너무 모자라고 12명이 뛰기에는 흘러넘친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옷을 입을 때 왼쪽 다리 먼저 집어넣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이불의 끝자락을 침대 끝에 맞추는 것처럼 우리는 늘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순간을 경험한다. 그것을 균형이라 한다면 우리는 균형을 잡음으로 해서 조화를 이루고 있을지도 모른다.


태엽 감는 새는 크고 넓게 보면 주인공이 그런 조화와 균형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아닐까.

태엽 감는 새에서 구미코는 주인공에게 결혼생활에서 오는 어떤 무엇에 대해서 결국 터지고 만다. 주인공은 자신의 아내가 그것을 그동안 싫어했는지 조차 모르고, 왜 싫어하는지도 모른다. 어째서 그냥 휴지는 되는데 꽃무늬 휴지를 그토록 싫어하는지, 왜 소고기와 피망을 같이 볶는 걸 싫어하는지 왜 그동안 말 하지 않았는지, 왜 오늘, 지금 문득 그 모든 것들을 토해내는지 주인공은 모른다.


구미코는 화나는 일이 있어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화가 나기 때문에 화를 내는 걸 주인공은 잘 모른다. 그저 나와 몸을 나누고 결혼생활을 하는 아내라 모든 것이 평안하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주인공도 속에서 올라오는 어떤 무엇 때문에 기껏한 음식을 다 버리고 화를 내고 싶지만 구미코에게 다가가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한다. 하지만 구미코는 테이블에 엎드려 얼굴을 묻고 만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위로는 위로를 하지 않을 때 일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건 사고의 장애, 망상, 환각, 현실과의 괴리, 기이한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 과학자들이 사랑에 빠진 이들의 뇌파를 추적 조사하니 조현병에 걸린 사람과 흡사하게 나왔다고 한다.


사랑의 도달점에서 미쳐버릴 것 같은, 미치고 싶지만 미쳐지지 않는, 인간에 대해서 모르고 알 수 없는 앞날에 자신을 던질 때 가능한 것이 사랑의 중독이다. 이런 제정신이 아닌 사랑을 결혼으로 인해 묶어 두려 하지만 보통 3년이면 유통기한이 다 끝난다.


잠시 벗어난 얘기로 모딜리아니와 14살이나 어린 그의 아내 잔 에뷔테론은 표층적으로는 아주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 모딜리아니의 목이 긴 여자의 그림들에 눈동자가 없다. 왜 눈동자를 그리지 않아요? 나는 당신을 알게 되면 그때 눈동자를 그릴 겁니다. 에뷔테론은 말했다. 난 당신의 영원한 모델이 되고 싶어요.


잔 에뷔테론도 화가다. 그리고 요즘의 기준으로 봐도 아름답고 예쁜 여성이었다. 표층적으로는 이렇게나 아름다운 두 사람의 사랑이지만 심층적으로는 엉망진창이었다. 이럴 수 없을 정도로 개판이었다. 예술사에서 가장 막장으로 생활한 인간이 모딜리아니였다. 알콜 중독에 마약에 각종 질병에 여성 편력이 상당했다.


심지어 에뷔테론 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아서 기분이 좋아 이름을 지으러 가는 도중에도 여자와 눈이 맞아서 이름 짓는 걸 포기하고 바람을 피러 간 인간이었다. 에뷔테론과 모딜리아니는 알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신접살림을 차린다. 그때 모딜리아니의 나이는 33세, 잔은 19세였다. 잔 에뷔테론의 부모가 반대하고 난리 났다. 그럼에도 결혼했지만 맨날 던지고 부수고 엄청난 전쟁과도 같은 사랑이었다.


어쩌면, 어쩌면 평온하고 규범적인 삶을 원하지만 그 안에서 화산처럼 터지고 폭발하는 것이 살아있는 것, 사랑 일지도 모른다. 에뷔테론은 인간으로는 전혀 쓸모없는 모딜리아니의 곁을 끝끝내 안 떠난다. 같이 있는 동안 두 사람은 자기애가 폭발하는 시기였다, 모딜리아니가 질병으로 37살인가 죽고 만다. 그리고 다음 해에 아름다운 에뷔테론도 자살로 모딜리아니를 따라간다. 죽음으로 끝내 곁을 지킨다. 사랑의 여러 유형 중에 진짜 사랑을 했을 수도 있다. 사랑은 금방 고갈된다. 그 뒤를 이끌지 못하는 무엇이 없다면 구미코처럼 살아있으되 죽은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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