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학창 시절에 다운타운에는 음악감상실에 두 곳이 있었다. 한 곳은 규모가 꽤 되고, 지방의 라디오 디제이들이 돌아가면서 음악을 틀어주는 곳으로 주로 머라이어 캐리, 휘트니 휴스턴, 조지 마이클 같은 세계적인 팝 가수들의 노래와 뮤직비디오를 틀어주었다. 비교적으로 맨트와 음악적 소개가 전문적이었고 떠들썩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곳에 가면 뮤직비디오를 영화관처럼 큰 대형 화면에서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에어로 스미스의 ‘겟 어 그립‘ 앨범의 곡들 뮤직비디오를 볼 때면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쌍벽을 이루었던 건스 앤 로지스의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우리끼리는 누구의 뮤직비디오가 더 좋은지 내기를 하기도 했다.

 

에어로 스미스의 '겟 어 그립'의 앨범 뮤직비디오는 모든 노래의 뮤직비디오가 이어진다. 그래서 영화와 비슷했다. 아니 영화였다. 뮤직비디오 속에는 주인공 알라시아 실버스톤이 나온다. 당시 최고의 하이틴 인기 배우였다. 그리고 리브 타일러도 나온다. 근래에는 리브 타일러는 꾸준하게 활동을 하지만 알라시아 실버스톤은 인스타그램에서만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리브 타일러는 에어로 스미스의 스티브 타일러의 딸인데, 리브 타일러가 훌쩍 큰 다음 티브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세계 최고의 록스타가 자신과 너무 닮아서 찾아가서 따져 묻고 이런저런 우당탕탕 해보니 스티브 타일러의 딸이 맞더라, 그래서 그 후로 스티브 타일러는 리브 타일러의 길을 열어 주었다? 같은 이야기를 음악 감상실의 디제이 입을 통해야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기억이 생생한 걸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디제이들의 입을 통해서 쏟아져 나왔다.

 

미국 록 스타들에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머틀리 크루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더 디트’를 보면 당시 미국 록그룹 들은 미국 투어만으로 1년에 100회 이상 공연을 한다. 세계를 돌면 엄청난 공연을 하는데 그들의 공연하는 스타일이 밤 10시에 공연해서 새벽 2시까지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고 연주하고 3시부터 광란의 술 파티다. 그 속에는 여자 팬들도 있고 난장판이다. 누가 누구와 자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눈 뜨면 오후 5시 정도. 그리고 밥 좀 먹고 밤 10시가 되면 또 미친 듯이 공연을 하고 새벽에 광란의 약과 술 파티를 한다. 그들의 피지컬은 한창 20대 초반이며 이 모든 것들을 감당할 체격과 체력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 너의 자식이 저기 어디, 막 브라질 같은 곳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근래에는 록 스타뿐 아니라 호날두 녀석의 아들도 그렇게 얻었다.


그리고 또 한 군데가 중앙시장에 있는 한 군데 음악 감상실이다. 이곳은 경남에서 가장 많은 앨범을 보유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디제이도 전문적인 디제이들이 하지 않고 고등학교에서 음악을 좀 좋아하는 녀석들이 돌아가면서 했다. 그러다 보니 더 재미있었다. 엉망진창이지만 시끌벅적했고 난장판 같았지만 우리는 그곳을 거의 집처럼 들락거렸다.


그곳은 보통의 음악이나 록에서 벗어난 음악들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노르웨이의 데쓰 메틀이라든가, 요컨대 바쏘리의 음악이나 판테라, 알파타우루스 같은 깊이가 꽤 되고 기기묘묘한 록들을 들을 수 있었다. 거기서 알게 된 뮤지션이 히데였다. 묘하지만 히데의 노래가 나오면 따라 부르게 되는데 얼굴도 모르고 처음 보는 이들과 함께 히데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으면 알 수 없는 어떤 연대가 느껴졌다.


히데는 나방 같았다. 마치 불 속으로 뛰어들어 오늘 타버리고 나면 더 이상 미련도 없을 것처럼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보니 학창 시절에 어딘가 폭발해버릴 것 같은 마음을 대변해주기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히데는 액스재팬의 기타였고 더불어 액스재팬의 음악도 그곳이 아니면 들을 수 없었다. 히데의 노래를 들으면 뭔가 마음 저 밑에서 두구두구두구 하며 드럼을 치며 무엇인가가 올라오는 것이 느껴진다.

 

그렇게 듣게 된 히데의 음악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좀 우습게 들리겠지만 히데의 음악, 히데의 스타일, 히데의 개성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나면 아직 히데는 여기 현실에 어떤 끈을 남겨두어 우리가 그 끈을 잡을 수 있게 한다는 말들을 하곤 했다.


일본에서는 히데의 유전자를 이어받으려는 노력을 지금까지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의 음악이나 그의 개성 같은 것들. 음악적으로는 일본의 어떤 그룹이나 가수가 히데의 유전자를 이어가는지 모르겠지만 히데의 얼굴은 일본의 배우 나리야마 히로키가 닮았다. 어떤 각도에서 보면 흡사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히데와 얼굴이 가장 닮은 사람은 슈주의 김희철이다. 김희철은 아직까지도 소년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메이크업을 한다면 히데의 얼굴과 거의 같아진다. 또 스타일과 목소리(긁어서 내는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이런 목소리는 20대까지 밖에 하지 못한다)는 지드래곤이 아주 닮았다. 지드래곤의 탁월한 스타일을 보면 자연스럽게 히데가 떠오른다. 지드래곤은 이대로 60까지 나이가 들면 아마도 데이빗 보위처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음악적으로 닮은 유전자는 서태지다. 액스재팬의 베이스였던 타이지의 기타가 현재 서태지에게 있다는 소문이 있는데 진실인지는 모른다. 그만큼 서태지가 정현철이었던 시절 액스재팬의 스타일을 동경했을 것이다. 시나위 4집 활동 당시 김종서와 함께 베이스로 서태지가 있었는데 흡사 액스재팬의 이미지가 있다.

 

가수라는 건 노래를 잘 불러야 하지만 노래만 잘 불러서는 슈퍼스타는 될 수 없다. 가창력? 기타 연주? 물론 중요하지만 자기만의 매력이 있어야 한다. 히데의 여러 노래 중에 다우트라는 노래가 있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알겠지만 이게 20년이 넘은 스타일이라고? 그렇게나 된 노래라고?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이 강력한 해비 메틀은 서태지의 탱크를 들어보면 이 강력함이 서태지의 버전으로 또 나타나는 것 같다. 뭐 이건 물론 나만의 생각일 뿐이다.

 

밑으로는 내가 그려본 히데의 그림과 다우트 뮤직비디오를 올려본다.


https://youtu.be/2fv812v6TQ4

이렇게 목을 긁어서 내는 소리는 굉장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30대를 넘어가면 이런 목소리가 대부분 사라진다. 본 조비도 이런 목소리였다가 이제 나이가 들면서 이런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대부분의 록그룹이 그렇다. 하지만 이렇게 아직도 매력적인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서태지와 지드래곤이다. 하지만 한계가 온다. 사람이니까. 그때까지는 실컷 듣자라는 주의다.


히데의 큐포스켓


두근거리는 거야. 굉장히 두근거렸지. 보들레르에 취하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어. 다른 노래도 그렇지만 말이야 다우트를 부를 때 히데는 뭐랄까 카타스트로프적인 섹시함을 지니고 있어. 마치 양의 하얀 뇌로 만든 카레를 떠먹는 기분이 드는 거지


류가 그랬어. 양의 뇌로 만든 카레는 입과 혀와 목을 자극하면서 매끄럽게 내려가서 내장 전체를 뜨겁게 달군다고 말이야. 그리고 위장에 가서야 서늘하게 느껴지지. 아주 사치스런 불쾌함 말이야. 히데의 다우트는 마치 그래. 그런 느낌이라구. 두근거리게 만들어


아주 두근거렸어. 히데의 다우트를 듣는다는 건 말이야. 첫 시작부터 데커던스적이지. 히데는 섹시해 섹시해. 속살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섹시해. 그런 속살이 아니야. 날에 베이면 벌어지는 살갗의 속살에 빠져드는 거야.  벌어진 살 속에 농염하게 숨어있는 붉은 형질의 표피와 세포 말이야. 농축된 섹시함을 히데는 다우트를 부르며 물처럼 흘려버려


히데스라는 토플리스 바에 가면 바의 상단에서 히데의 다우트가 퇴폐적으로 나왔어. 그곳에 오는 손님 중에는 이빨이 하나도 없는 여자도 있고 혀에 피어스를 24개 한 게이도 있어. 그리고 혈액과 골수 소스 위에 놓은 터키를 좋아하는 50살의 남자도 있어. 채찍으로 너무 맞아서 옷이 맞지 않아 항상 큰 사이즈의 옷을 입고 오는 외국인도 있어. 모두가 히데의 다우트를 들으며 데쳐진 시금치처럼 몸을 흔들어


자기혐오의 젤리 피시와 머릿속에서 소리치는 쌍둥이와 산산조각 나버린 카오스를 목에 쑤셔 넣으라고 히데는 노래를 불러. 다우트 다우트. 두근거릴 수밖에 없어. 나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서태지의 테이크 시리즈와 탱크에서 다우트의 오마주를 느꼈더랬지


97년까지 퇴폐적 섹시함으로 무장을 하고 다우트를 불렀어. 5월에 카오스로 가버리다니. 살이 부러지고 뼈가 줄어드는 기분이야. 너무 크게 틀었나 봐. 옆에서 욕을 하네. 히데는 어딘가를 향해,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향해 다우트라고 크게 소리를 질러  


- 히데의 다우트를 듣고 든 기분을 적었다. 히데에게는 퇴폐미라는 것이 있다.


이제부터는 허리 고 라운드의 이야기다.

이 영화는 히데의 다큐영화다. 일본의 20대 청년의 배우가 히데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히데를 추억한다. 그러면서 히데가 죽기 직전까지 히데와 관계한 사람들이 등장해서 히데와의 일화를 회상한다.


히데의 다큐는 거의 다 봐서 이거 뭐 별거 있을까 싶지만 팬심으로 보다 보면 또, 늘 그렇듯이 마지막에 가면 영화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과 비슷한 감정에 휩싸인다.


이 영화는 히데가 죽은 지 20년이 되던 해, 2018년에 제작이 되었고 일본의 청년 배우 야모토 유마라는 녀석이 히데의 자취를 따라 과거로 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허리 고 라운드는 히데의 마지막 노래이며 가사가 묘비에 새겨져 있다. 야모토는 히데가 활동할 당시 욕 들어가며 일을 배우던 히데의 로드 매니저인 히데의 동생(현 히데 소속사 대표)을 찾아가 히데가 엘에이에 머물며 음악 작업을 했던 곳으로 가게 된다. 그러면서 히데가 다녔던 거리를 현재의 야모토가 걸어간다. 그런 장면에 교차 편집되어서 나온다.


핑크 스파이더를 촬영했던 골목을 찾아가서 회상을 하다가 그 골목에서 쫓겨나기도 한다. 히데가 다니며 남긴 끈을 찾아서 추억여행을 한다.


히데의 이전 다큐들을 보면 히데가 장난기 가득한 모습으로 엘에이에서 음악 작업을 하며 술을 마시고 지내는 모습이 가득하지만 이 다큐는 교차편집으로 과거와 현재를 히데의 끈으로 이어준다.


히데가 좋아하던 바 ‘랠리’에 다시 모여 히데가 죽기 전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모습은 정말 옆에서 히데에 대해서 조근조근 말해주는 것 같아 좋았다.


마지막에 가면 야모토에게 한 통의 메일이 오고 거기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히데의 허리 고 라운드의 오리지널과 다른 버전이 들어있다. 20년 동안 누구도 듣지 못하고 잠들어 있던 노래, 히데의 목소리로 부르는 다른 버전의 허리 고 라운드를 팬들에게 들려주라며 끝이 난다, 그리고 그 노래가 나온다.


히데를 좋아한다면 볼만한 다큐영화 ‘허리 고 라운드’였다. 가사의 말미에는 봄에 다시 만나요, 봄에 만나요, 봄에 만나요.라는 후렴구가 있는데 봄이 되면, 5월이 되면 히데를 다시 만나게 된다.https://youtu.be/mwriPOK3Tw

예고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콘택트는, 조디 포스터의 눈을 관통하는 우주는 그야말로 존재론적으로 관철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콘택트를 봤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칼 세이건도 몰랐을 때였다. 콘택트를 다시 보았고 그때서야 소름이 돋았고 조금 불편했지만 조디 포스터가 보는 우주, 그 속에 몸을 던진다고 해도 어쩌면, 정말 어쩌면 괜찮은 사멸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흘러,

알폰소 방식의 우주를 산드라 블록의 눈을 통해서 바라보았다.


그래비티를 내식으로 한 줄로 표현하면 '시야에 들어오는 감각에 대한 도취'라고 하고 싶다.


점 같은 인간이 모여 사는 거대한 행성, 헬멧에 손바닥만 하게 비칠 때 다시 오래 전의 존재론적 인식에 대해서 떠올려보았다.


나는 스톤 박사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은 적이 있었나.


인생에 있어서 1년은 간호 때문에 병실에서 난 창밖을 바라보며 크리스마스를 보냈고 그다음 해는 중환자실 복도에 난 작은 창밖을 보며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그리고 죽음을 옆에서 지켜봤다. 상황이 생각 밖으로 펼쳐지면 대체로 판단이 흐려지게 된다.


쥐가 뱀에 쫓겨 필사적으로 도망을 다닌다. 그렇게 도망을 다니다가 궁지에 몰리면 발악을 하지만 그 경계를 넘어서고 나면 뱀의 아가리에 들어가는 순간 쥐는 이루 설명할 수 없는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 죽음이 곧 나르시시즘 절정에 이르는 순간.


스톤 박사는 그 절망의 끝에서 서서히 딸의 곁으로 다가가려 한다. 경험에 대한 기준치도, 오감을 통한 감각적인 통념의 선이 허물어지려고 한다. 그때, 매트가 나타나 보드카를 들이대며, 자식을 잃는 것보다 큰 슬픔은 없지, 하지만 가기로 했으면 계속 가야 해. 두 발로 딱 버티고 서서 살아가는 거야.


스톤은 그때 깨닫는다. 오늘 죽으면 더 이상 내일부터 죽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내가 두 발로 땅을 밟고 서서 살아가는 것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 죽음에 당당하게 악수를 청할 수 있다는 것을.


진짜로 절망에 빠지면 나 힘들다는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 절망의 끝에 희망이 살을 찌울 수 있는 동력이 있다. 그래서 우리들, 인간은 두발로 땅을 디디고 서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염원하는 아름다운 우주에서 두 발 없이 유영하는 것보다 훨씬 값지기 때문이다.


그래비티란 그런 것이다.

영원불멸의 우주로 살아가기보다 비록 소명이 다해서 죽어 버릴 지라도 한 인간으로 사는 게 값진 것이다.

애드 아스트라를 보면서 브래드 피트의 눈동자는 지구가 아닌가, 그리고 영화 속 아버지인 토미 리 존스의 눈동자는 우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독하고 한 없이 떠도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우주에서 인간의 낙관적인 세포는 점점 소멸해가는 것 같다. 토미 리 존스의 눈동자는 광대하고 넓고 끝을 알 수 없는 고독한 우주를 닮았다.


그에 비해 브래드 피트의 눈동자는 전 우주의 고독이 주는 욕망보다 내가 잡을 수 있는 행복이 있는 지구를 닮았다. 중력이 끌어당기고 안간힘을 써야만 움직일 수 있는 지구가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저항 없이 유영을 할 수 있는 멋진 우주보다 아름답고 살만하다는 것을 기이하게도 마지막 장면 브래드 피트의 눈동자가 말을 하는 것만 같다.


제목의 뜻을 찾아보니 ‘별까지”라는 말인데 뜻은 “어려움을 뚫고 별까지”다. 여기서의 어려움은 현재 우리 인간생활 전반에 깔린 어려움과는 다른 질을 말하고 있다.


영화 속 시대는 지금보다 미래이다. 그것이 멀던 가깝던 지금보다 훨씬 앞선 미래다. 영화 속 태블릿이나 우주 해적이나 우주 정거장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거기서 죽 커가고 있거나. 그런 먼 미래에도 지구에서 우주의 한 지점으로 가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간단하게 비행선에 올라 슝하고 갈 수는 없다.


브래드 피트는 참 멋있다. ‘멋있다'라는 건 배우, 진짜 배우 같다는 말이다. 피지컬이나 말투나 얼굴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더 그래 보인다. 정말 스크린 속에서만 존재할 법한 사람 같다. 브래드 피트는 영화 ‘옥자’도 기획했다. 브래드 피트도 참 알 수 없는 인간이다. 그런 알 수 없는 인간들이 모여 사는 지구가 광활한 우주보다 훨씬 낫다는 말이다.


우주로의 발걸음이 빨라진 요즘, 너도나도 우주에 대한 관심이 깊지만 영국의 윌리엄 윈저 왕세손의 말처럼 우주로 가는 것도 좋지만 자본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망가져가는 지구에게 좀 더 시선을 돌리는 게 낫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이와이 슌지의 영화를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거의 다 봤으며 봤던 영화를 계속 보는 편인데 하나와 엘리스는 도대체 몇 번을 봤는지 모를 정도다. 그래서 이 글은 지극히 주관적인 팬심으로 쓴다.


이와이 슌지의 립반 윙클의 신부가 나왔을 때 혹평이 가득했다. 이와이 슌지와 서태지와 보브 딜런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이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 냈을 때 혹평을 듣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기분 나쁠 정도로 즐긴다는 걸로 알고 있다.


풍경 사진보다 보도사진이 존경받는 이유는, 새벽의 일출을 촬영한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모두가 멋지고 아름답고 잘 나왔다는 ‘감탄’이 있다. 하지만 보도사진을 본 사람들은 이상하거나, 보기 싫거나, 이해가 되지 않거나, 무슨 사진이지? 하는 다양한 반응들이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감동’을 주기 때문에 보도사진이 존경을 받는다.


세상의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뉜다면 이와이 슌지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때 나는 당연하지만 전자에 속한다. 이와이 슌지의 영화를 처음 접하고 그 사람의 영화는 소설처럼 읽혀서 피부로 흡수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두와 피크닉으로 빠져들어간 이와이 월드에서 만난 릴리 슈슈에서 하늘을 날고 싶었던 츠다를 두드려 깨워 밝은 모습의 하나와 엘리스로, 첫사랑을 찾은 사월의 이야기를 넘어 조금은 답답하지만 립 반 윙클의 신부를 거쳐 스왈로우 테일 버터 플라이의 미래에서 모두가 애벌레가 되는 것이다.


영화는 잘 만들어야 한다. 늘 하는 말, 정말 잘 만들어야 한다. 영화라는 예술은 영화 속에 나오는 모든 예술에 신세를 진다. 영화 속에 나오는 의상, 건축, 음악, 미술 이 모든 예술이 영화보다 선배다. 영화는 이 선배 예술들에게 조금씩 빌려 쓰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인원이 붙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든다. 그런 점에서 이와이 슌지는 아주 착실하게 그 점을 이행하고 있다.


릴리 슈슈에서 마지막 장면.

공연을 시작하기 전의 장면에서 엑스트라 수천 명이 공연장 앞에 모여 대기를 한다. 이와이 슌지는 그 수천 명에 달하는 엑스트라에게 전부 다른 대사가 적힌 대본을 준다. 그리고 누가, 어떤 장면으로 촬영이 되어 영상으로 나올지 모르니 열심히 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이와이 슌지는 그렇게 영화를 만들었고, 현재 만들고 있고, 앞으로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것이 이와이 슌지의 힘, 내지는 록웰 아이즈가 가지는 특별함이다.


위에서 사진의 예를 든 것처럼 감독의 사상이나 의도를 떠나 영화를 보고 느끼는 감정이 하나가 아닌 여러 개가 된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일본 특유의 말보다는 이와이 슌지 특유의 음악이 영화 속에 가득하다. 영화에서 중요한 요소 중에서 영화음악이 제1순위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보는 입장은 이와이 슌지 만의 특별한 영화음악은 그의 영화를 완성하는 마법이라고 생각한다.


립반 윙클의 신부의 미나가와는 마시로가 배우라는 사실이라는 걸 들었지만 금방 잊어버린다. 듣고 나면 미나가와는 사람들에게서 외면을 받았지만 마시로는 그런 미나가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좋아한다. 미나가와는 이런 사람들이라면 언제나 같이 있어도 좋다고 느낀다. 그것에 여자 남자는 중요하지 않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사랑이든, 친구든 그것은 상관없다. 미나가와는 마시로와 함께 있을 때 가장 웃음이 많다. 그 모습은 하나와 엘리스에서 아리스가 혼자서 인상을 쓰며 밥을 먹는 것과 마크와 하나와 함께 도시락을 먹는 모습이 오버랩된다.


과연 내가 큰 불행이 닥쳤을 때 나를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내 옆에 몇이나 있을까. 마시로 같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이와이 슌지는 불가능할 것 같은 것을 해내고 만다.


립반 윙클의 미나가와를 당신이 어떻게 보느냐, 그것은 당신의 시선에 달린 것이다. 타인에게 나의 모습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봐주길 바라지만 그럴 일은 없다. 타인을 보는 시선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미나가와는 마시로에게 자신을 소중히 여겨 달라고 말한다. 내 주위에 그렇게 나에게 말해 주는 이가 있을까.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못한다면 타인에 대해 편견만을 지니고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달라진 나를 발견함이다. 전과 후의 내가 전혀 변화가 없다면 책 따위는 소용이 없을지도 모른다. 보는 내내 알 파치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던 영화 대니 콜린스에서 동료이자 친구인 매니저가 아들인 톰에게 피아노를 건네주며 말한다. 대니는 천성이 착한 사람이다. 하는 일마다 그르쳐서 그렇지. 그런 대니를 당신이 어떻게 보느냐에 달렸다.


개연성이니 맥락이니 전개니 불안이니 같은 단어로 이와이 슌지를 논하지 말자. 적어도 당신이 이와이 슌지의 팬이라면 의심하지 마라. 미나가와는 당신의 또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영화를 수식하는 말은 여러 개다. 고양이 티티가 나오지만 고양이가 주인공이 아닌 영화. 한국 영화를 말할 때 빠트려서는 안 되는 영화. 자극적인 장면이 하나도 없음에도 우리를 자극하는 영화. 그리하여 이 영화를 얼마나 사랑하게 되는지 영화를 보고 난 후 알게 되는 영화. 이 이야기는 스무 살에 머문 이야기가 아닌 스무 해가 지난 우리 모두의 영화. 누군가는 가슴에 꼭꼭 품고 있는 영화.


나 말이야 사실 수많은 영화 중에서 ‘고양이를 부탁해’가 내 인생 영화 중 하나야.라고 술을 마시고 이야기한다면 꽉 안아주고 싶다.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서로 말없이 공감하고 있다는 무언의 단단한 결속 같은 것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영화는 당시에 인기가 없어서 ‘고양이를 부탁해’ 마니아들이 ‘고양이를 부탁해’ 영화 보기 운동을 했을 정도였다.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어 마지막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영화다. 비용의 문제로 필름 카메라 한 대로 찍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우리가 느끼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처음 주워온 고양이 티티와 비슷한 신세를 살아가고 있는 주인공들. 넷플 디피가 어떤 남자들의 과거이자 미래라면, 고양이를 부탁해는 어떤 여자들의 과거이며 미래다. 왜냐하면 20년 전의 청춘에서 지금의 청춘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재은 감독의 데뷔작으로 감독은 이후 고양이 시리즈를 지치지 않고 만들어내고 있다. 고양이를 돌려줘, 고영이들의 아파트 등.


지영이는 울지 않는다. 힘들어서 한 번쯤 울 수도 있지만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지영이는 청춘을 지나 현재 40대가 되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고양이를 부탁해와 함께 지금 여기에 생존해 있는 것이다.


고양이를 부탁해가 2001년 10월 13일에 개봉했는데 20년이 지난 2021년 10월 13일에 리마스터링으로 재개봉한다. 이미 이번 부국에서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누군가의 꿈일지도, 누군가의 꿈이었던 푸르고 찬란(하고팠던)한 스무 살의 이야기, 요즘 너는 어때?라고 묻는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였다.


네 명이 바람을 맞으며 걷던 장면에서 흐르던 음악 모임별의 진정한 후렌치 후라이의 시대는 갔는가를 들어보자. 불안하고 명확하지 않은 청춘들의 모습을 잘 대변하는 노래였다.   

https://youtu.be/mgtAGplClcY

모임별 - 진정한 후렌치 후라이의 시대는 갔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징어 게임이 호불호가 나뉜다는데 불호인 것은 아마도 지루한 장면과 어떤 부분의 연기, 어디선가 본 듯한 영상과 내용, 앞으로 나갈수록 보이는 결말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특히 1번 노인이 혼자 게임에 참가했을 때 눈치를 안 채려고 해도……


그러나 나처럼 오징어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 영화에서처럼, 비슷한 처지에 놓인 경험이 있지 않았을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오징어 게임 속에서처럼 죽음의 갈림길에 놓인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체생활 같은, 요컨대 군대에서 훈련을 나가기 전에 잠시 대기 탈 때 저 앞에는 조교들이 진을 치고 있고 통과하지 못하면 난리가 날 것 같은 분위기, 기다리는 동안의 두려움과 초조가 사람을 미치게 한다.


또는, 취업의 문턱에서 면접관 앞에 서기 직전의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그 초조와 불안, 옆의 응시자들은 모두 나보다 스펙이 놓아 보이고 다 자신감 있는 모습에 점점 조여 오는 압박감. 이런 모든 총체적 분위기를 오징어 게임을 보며 예전의 그 불안하고 초조한 느낌을 다시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좀 살아본? 사람들은 재미있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본성,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모든 인간성을 다 보여준다.


도대체 인간성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낱낱이 보여준다. 인간이 가지는 대부분의 감정이 다 나온다. 폭력성, 이타성, 배려와 욕심, 배신, 협동심, 본능, 인간의 처절한 본성이 툭툭 튀어나온다. 어제까지 내 편이었는데 오늘은 기회만 있으면 나를 죽이려 든다.


좀 살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좀 살아보니 인간의 더러운 모습, 인간 그 너머의 인간 이하의 모습을 보게 된다. 배신이라는 건 나를 모르는 생판 남이 아니라 나를 아주 잘 아는 나와 친한 동료가 배신을 하고 사기를 친다. 그러니 오징어 게임에서처럼 배신 때문에 빚을 떠안게 된 사람들은 인간에 대한 불신이 커져 내가 살기 위해 타인을 죽이는 일을 스스럼없이 하게 된다. 살인이라는 것도 게임으로 교묘하게 덮으면 계속할 수 있다.


챔피언 권투 선수가 있다고 치면 도전하는 상대방이 강하면 강할수록 오히려 안심이 된다. 정보가 노출이 되어 있으니까 대비가 된다. 하지만 정보가 전혀 없는 신인이 올라오면 당황하고 두려움이 들기도 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떤 게임인지 알 수 없는 ‘죽음’의 시간 앞에 놓이면 두려움에 떨고 초조함이 정신을 지배한다. 그리고 그 시기를 지나면 죽음을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타인을 죽이려 든다.


초반에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혼비백산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잠을 자고 일어나는 것처럼 받아들인다. 마치 코로나 시대 초기에 그렇게 두려워하던 감염병에 사람들이 죽어 나가도 이제 무뎌진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오징어 게임 속 사람들은 온통 빚을 지고 어디 하나 기댈 곳이 없어서 게임을 하러 왔다. 처음에는 저기서 죽는 사람들이 나와 같은 동료라는 생각에 놀라고 소리치고 무서웠는데 시간이 지나 저 사람들이 없어지면 내가 살 확률이 높아지는 것을 깨닫는다. 무엇보다 거액의 돈까지 준다.

주인공 기훈은 지질하고 무엇하나 잘하는 것 없는 루저다. 그런데 루저이지만 또 인간에 대한 믿을 가지고 있다. 이런 모습이 꼭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나도 어디 하나 쓸모없는 인간에 잘하는 것 하나 없는 지질한 인간이다. 소심하고 작은 일에 감정의 높낮이가 조절이 되지 않고 화가 나도 화를 낸 후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무서워 화를 내는 것조차 힘겨워한다. 그래도 약간의 오지랖은 있어서 조깅을 하다 폭염에 쓰러진 사람을 옮겨 119에게 인계하기도 했고, 박스 할머니의 박스를 옮겨주고 주머니에 오천 원을 꺼내 음료수 드시라고 손에 쥐어 주기도 했다. 지갑을 주워서 돈이 있어도 꺼내지 않고 그대로 지구대에 갖다 줘서 주인이 나타나 고맙다는 소리도 들었다. 정말 지질한 인생이고 가진 것은 개뿔도 없는데 남에게 손을 내밀기도 하는 그런 인생이다. 영화 속 기훈과 참 닮았다. 중요한 건 영화 속 기훈은 무쓸모 인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 닮은 것에서 놀라지 않았다.


이런 무쓸모 인간인 기훈이 주인공인 것은 그나마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일 것이다. 또 알게 모르게 동료들에게도 믿음을 준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두 가지를 가지면 살아남는다. 그것은 ‘힘’과 ‘믿음’이다. 그런데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없다. 덕수는 힘을 쟁취하지만 믿음을 얻지 못해 결국 죽고 만다.


오징어 게임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시간이 갈수록 서로가 동료라는 생각이 없다. 동료라면 다 같이 살아야 하는데 이 게임에서는 다 같이 살 수가 없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너무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서 한 집 건너 누가 죽었다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자영업자들이 대거 자살을 했는데 자기 일처럼 슬퍼하고 계속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몇 있을까 싶다. 만약 죽기 전에 길에 나와서 도와달라고 하면 선뜻 만원 하나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으니까. 동료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내가 너무 놀란 기훈과 가장 닮은 부분은 영감님과 일대 일로 구슬치기를 할 때 영감이 치매가 걸렸다는 걸 알고 자기가 죽어야 하는데 그만 영감을 속이는 그 모습이 닮아서였다. 나는 주위에서 안 그런 척 하지만 막다른 골목에 막히면 실은 나 살고자 다른 사람을 구덩이로 몰아넣는 그런 인간인 것이다. 기훈이 잠시 고민하더니 영감님을 속이는 그 장면, 그 처절하리 만치 생과 사가 갈리는 그 순간의 기훈의 이중적인 모습에서 나를 보고 말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