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판타지지만 몹시 현실적이다.


15살의 리쿠와 마나미는 어느 날 몸이 바뀐다. 처음에는 금방 원래대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15년이 흘러 두 사람은 어느덧 30살이 된다.


몸이 바뀌는 설정의 영화는 대개 그로 인해 벌어지는 소동을 코미디로 풀어간다. 내가 처음 본 바디 체인지 영화는 김소연과 정준이 출연한 우리 영화 [체인지]였다. 일본 영화 [전학생]을 각색한 작품이다. 할리우드에는 안나 페리스와 레이첼 맥아담스, 롭 슈나이더가 출연한 [핫칙]이 있다. 남녀의 몸이 뒤바뀌면서 벌어지는 온갖 소동이 꽤 재미있었던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몸이 바뀐다는 황당한 설정을 가져왔으면서도 정작 영화는 판타지의 즐거움에 기대지 않는다. 친구의 부모를 자신의 부모처럼 대해야 하고, 낯선 몸으로 살아가면서 그 몸을 관리해야 한다. 서로의 기억을 온전히 갖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두 사람은 자주 만나 기억을 나눠야 한다. 남자가 여자의 몸으로 살아가고, 여자가 남자의 몸으로 살아가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감당해야 하는 문제다.


돌아갈 날만 기다리던 두 사람에게 15년은 너무 긴 시간이었다. 첫사랑을 겪고, 진학하고, 취업하고,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했다. 어느새 바뀐 몸으로 살아가는 생활에 익숙해졌고, 그 삶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마음도 생겼다. 그런데 마나미가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낸다. 반가워해야 할 소식인데 마냥 그렇지도 않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한순간에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리쿠의 몸으로 살아온 마나미에게는 이미 직장도 있고 배우자도 있으며 딸까지 있다. 이제 와서 원래의 몸으로 돌아간다는 건 단순히 외모가 바뀌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일이다. 상실의 위협인 것이다.


영화는 두 사람의 시간을 교차해 보여준다. 어느 날 마나미의 몸으로 살아가는 리쿠에게 연락이 온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다. 장례식장을 찾은 리쿠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마음껏 울지도 못한다.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 펑펑 울었다가는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테니까. 슬픔조차 자기 모습으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 이런 장면에서 영화가 얼마나 집요하게 현실을 붙잡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타인의 삶을 대신 살아간다는 건 존중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매일 마주하는 사람들과 부딪히고, 자신이 내린 선택이 맞는지 고민하고, 때로는 그 삶에 짓눌리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다. 만약 내가 죽으면 내 몸으로 살아가던 친구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나면 자기 마음대로 삶을 바꾸거나 포기할 수도 없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누군가의 엄마로 불리고, 회사에 가면 이름보다 직함으로 불린다. 어느 순간 자신의 이름과 모습은 뒤로 밀려나고 맡은 역할에 맞춰 살아간다. 원하지 않아도 타인의 기대 속에서 살아야 할 때가 있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빌려 살면서도 그 삶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자기 것이 아니라고 내팽개칠 수 있는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몸은 바뀌었지만 그 안에 쌓인 시간과 관계까지 가볍게 여길 수는 없다.


영화는 꽤 영리하다. 두 사람이 원래대로 돌아갈 방법을 찾았다는 사실을 단순한 해피엔딩의 신호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동안 살아온 삶을 어떻게 할 것인지 다시 묻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런 질문을 받는 기분이었다.


너라면 어떻게 할래?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은 아니니까.  https://youtu.be/lYA-SIEZrYI?si=01pragU4q2T4a6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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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홍콩 액션영화의 향수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당시의 홍콩 액션에 요즘 격투기 스타일을 섞어놓았는데,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액션이 쏟아지고 마지막까지 좀처럼 쉴 틈을 주지 않는다. 두 시간 중 대략 20분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시간을 액션에 쏟아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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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영화라고 소개되지만 배경은 싱가포르인지 캄보디아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청각장애를 가진 아버지가 인신매매범들에게 납치된 딸을 구하는 이야기다. 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말을 하지 못한다. 사실 줄거리라고 할 것도 없다. 딸이 납치되고, 아버지가 찾아 나서고, 악당들과 싸우다가 결국 딸을 구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과정이 반복되는 단순한 액션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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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꽤 당차게 나온다. 아버지에게 무술을 배워 연습까지 해서, 나중에는 아버지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악당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른다. 조금 어이없지만 90년대식 홍콩 액션영화라고 생각하면 그냥 웃으며 넘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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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사묘와 조 타슬림이다. 조 타슬림은 이 영화에서 빌런이 아니라 주연으로 나온다. 늘 악당 역할을 맡아 엄청난 괴력과 격투 실력을 보여주던 배우라 그런지, 이번에는 오히려 약하게 느껴진다. 악당들과 싸우면서 꽤 많이 얻어맞기도 한다. 주인공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동안 봐왔던 모습과 비교하면 조금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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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션은 90년대 이연걸의 현대물에서 볼 수 있었던 스타일에 요즘 격투기를 섞어놓은 느낌이다. 한국 액션영화에 익숙해진 상태에서 보면 타격이나 움직임이 다소 대련처럼 보이기도 한다. 액션 장면은 쉴 새 없이 이어지는데 이상하게 타격감이 부족하다. 얼굴을 그렇게 얻어맞고도 멀쩡하고, 엄청난 무게의 돌이 몸 위로 떨어져도 툴툴 털고 일어난다. 효과음은 요란한데 오히려 그 소리 때문에 현실감이 더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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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묘는 오래전 영화 소림오조에서 이연걸의 아들로 나와 아버지와 함께 악당들과 싸웠다. 이번 영화에서도 후반부에 딸과 함께 악당들을 물리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아버지와 아이가 한편이 되어 싸우는 모습. 오마주인지 모르겠지만 그 장면에서는 조금 뭉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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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신매매를 취재하던 기자의 남편 조 타슬림이 사묘를 돕는다. 실종된 아내를 찾고 있었는데, 아내 역시 인신매매 조직을 취재하다 사라진 상황이다. 영화에는 부패한 경찰도 등장한다. 납치된 아이들이 탈출하는데도 경찰은 그저 지켜보고만 있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경찰을 향해 무능하다며 욕을 퍼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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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장면을 보고 있으면 요즘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일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범죄 조직에 한국인들까지 연루되고, 납치와 감금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얼마 전에는 현지에 있던 한국인들을 소환하는 일까지 있었다. 부패한 경찰과 정치인, 범죄 조직이 얽힌 나라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영화보다 더 끔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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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역마살 로드가 캄보디아를 찾아갔을 때의 장면도 생각난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데 하루 벌이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아이들도 굶고 어른들도 굶는 마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있었다. 왜 웃고 있느냐고 묻자, 지금 웃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지 않으냐고 대답했다. 그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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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는 엄청난 갑부가 어린아이들을 납치해 인신매매를 하는데, 문득 저렇게 아이들을 사고파는 일이 실제로 어떻게 돈벌이가 되는지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사고팔아 거대한 돈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영화는 그 부분을 깊이 파고들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저 악당을 때려눕히고 아이들을 구하는 데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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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판 테이큰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90년대 홍콩 액션영화를 좋아하고 사묘와 조 타슬림의 액션을 보고 싶다면 볼 만하다. 다만 잔인한 장면이 꽤 있어 청소년 관람불가다. 액션에 모든 것을 걸었지만 한국 액션영화의 타격감에 익숙하다면 조금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두 시간 내내 싸우는데도 어딘가 허전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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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니콜 키드먼[로미]이 도로에서 개에게 위협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해리스[사무엘]가 개를 부르는데, 그 순간 영화 [언페이스풀]이 떠올랐다. 아, 부러울 것 없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중년 여성이 젊은 남자에게 빠지는 이야기구나. [언페이스풀]은 불륜으로 시작해 점점 스릴러로 변해갔다. 이 영화도 그렇게 흘러가려나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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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 키드먼이 연기하는 로미에게는 멋진 남편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부족할 게 없는 삶이다. 하지만 남편과의 잠자리는 만족스럽지 않다. 그러던 중 자신의 회사에 젊은 사무엘이 들어오고, 로미는 그에게 먼저 접근해 육체관계를 맺는 데 성공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젊은 육체의 맛을 알아버린 로미는 좀처럼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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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이 로미에게 메조킥 성인영화에서나 볼 법한 체형을 요구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쯤 되면 뭔가 일이 터질 것 같았다. 젊은 남자에게 빠진 여자가 점점 궁지에 몰리고, 결국 파국을 맞는 스릴러. 나는 그런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길 기대하며 봤다. 후반부로 갈수록 섹스에 중독된 로미의 망가지는 모습이 드러나는데, 이때는 [세브린느] 같은 영화가 떠올랐다. 결혼도 했고 아이들도 다 컸다. 사회적으로도 이룰 만큼 이뤘다. 그런데 그런 여자가 섹스에 중독돼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 여러 영화를 섞어놓은 듯한 느낌이 들어 감독이 무슨 영화를 리메이크했나 싶었는데, 감독은 자신의 이야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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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는 사무엘이 젊은 여직원과 함께 있는 모습만 봐도 질투에 사로잡힌다. 남편이 따로 있는데도 그렇다. 자신에게는 젊은 섹스 파트너가 필요하고, 그 남자가 다른 여자를 바라보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욕망이라는 게 참 이상하다. 내게 없는 것을 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빼앗길까 봐 안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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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로미는 남편도 있고 수많은 사람이 모인 파티에서 사무엘과 끌어안고 있다가 들킨다. 그 과정에서 남편은 사무엘에게 몇 대 얻어맞기까지 한다. 로미는 들키기 전부터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다. 한 번도 당신에게 흥분을 느낀 적이 없다고. 그러고는 사무엘과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킨 뒤 남편에게 울면서 매달린다. 이쯤 되면 남편도 로미도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가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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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이상하게 힘이 빠진다. 로미가 파멸하든 사무엘이 파멸하든, 아니면 둘 다 무언가를 잃든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남편과의 관계도 어떻게든 수습하고, 일도 계속하며, 로미는 그럭저럭 살아간다. 경험에서 출발한 이야기라서 그런 걸까. 오히려 [세브린느]처럼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리면서 인물을 끝까지 밀어붙였으면 어땠을까 싶다. 지금의 결말은 로미가 겪은 일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조차 흐릿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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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 키드먼이 홀딱 벗고 나오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복근이며 근육이며, 몸을 얼마나 관리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몸이 묘하게 낯설다. 가슴은 보형물의 흔적이 너무 도드라지고, 얼굴과 손에서는 세월이 느껴진다. 젊어 보이려고 애쓴 흔적과 감출 수 없는 나이가 한 몸에 공존하는 느낌이다. [서브스턴스]의 데미 무어를 볼 때와는 또 다른 감정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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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골적인 섹스 장면이 많이 나오는 영화는 아니다. 대신 메조킥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있고, 욕망에 빠져들면서도 불안해하는 니콜 키드먼의 연기를 볼 수 있다. 겉으로는 성공한 남편과 화목한 가정, 사회적 지위까지 갖춘 사람이다. 그런데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타인의 삶을 너무 쉽게 판단하는지도 모르겠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저 사람은 행복하겠거니, 저 정도면 충분하겠거니 생각한다. 정작 당사자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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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결론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영화가 던진 질문은 흥미로운데, 그걸 풀어가는 방식도 마지막에 도달한 자리도 영 시원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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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속마음을 누가 다 알 수 있을까. 가장 가까이 지내는 아내나 남편이라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다. 같이 산 세월이 길다고 마음까지 저절로 읽히는 건 아니니까. 결국 대화를 해야 한다. 싫든 귀찮든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계속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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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남자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대화를 귀찮아하고 피하려 든다.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건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는 건지. 그러면서 상대가 왜 변했는지는 궁금해한다. 참 모순이다. 우리는 그런 모순을 안고 살면서도 정작 그 모순을 들여다보는 일은 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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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롤러스는 거미에 관한 영화다. 스파이더맨처럼 거미의 능력을 가진 영웅이 나오는 영화가 아니라, 거미가 사람을 죽이는 영화다. 거미가 아파트 안에 있는 사람들 몸에 알을 낳고 사람 몸을 뚫고 나오고 징그러운 장면이 꽤 있는 B급 호러영화다. 거미가 떼로 몰려나와 인간을 공격하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본 건 오래전 [아라크네의 비밀]이었다. 90년대 초에 나온 영화인데, 어릴 때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줄 알았다. 알고 보니 프랭크 마샬이었다.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와 [백 투 더 퓨처] 시리즈의 기획에 참여했던 사람이다. 어쩌면 그때는 감독보다는 영화 속 거미에게 온 마음을 다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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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롤러스 이 영화에는 작은 새끼거미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의 몸속으로 기어들어 갔다가 다시 빠져나오는 모습도 있다. [아라크네의 비밀]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다. 거미 한 마리만 방바닥을 기어가도 신경이 쓰이는데, 그 조그만 것들이 수십 마리씩 한꺼번에 움직인다고 생각해 보라.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이미 거미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은 기분. 그런 장면이 무서우면서도 재미있었다. 무서워서 눈을 찌푸리면서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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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나온 거미 공포영화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파트나 건물처럼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드나드는 곳이 어느 순간 거미의 영역으로 바뀐다. 밖으로 도망치면 될 것 같지만, 막상 나가려고 하면 이미 길이 막혀 있다. 이번에 본 영화도 그런 이야기였다. 거미가 사람을 공격한다는 설정 자체는 새로울 게 없는데, 이상하게 이런 영화는 볼 때마다 신경이 쓰인다. 거미가 무서운 데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다른 벌레들은 징그럽다는 생각부터 드는데 거미는 좀 다르다. 징그럽기도 하지만,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날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사람의 생활공간 안으로 들어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생김새라는 점도 한몫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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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어릴 때 거미에게 물린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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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랫입술이 퉁퉁 부어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몰랐다. 입술이 조금 부은 정도가 아니었다. 입술 안에 뭔가를 집어넣은 것처럼 두툼하게 튀어나와 있었고, 감각도 이상했다. 돌덩이 같은 게 입술에 매달려 있는 기분이었다. 만져도 내 입술 같지가 않았다. 얼마나 부었는지 마스크를 써도 앞으로 불룩하게 튀어나올 정도였다. 지금이야 마스크를 쓰는 일이 낯설지 않지만, 그때는 그런 걸 쓴다고 감춰질 만한 모양도 아니었다. 거울을 봤을 때의 모습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입술이 그렇게까지 부풀어 오른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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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동네 병원에 갔다. 자는 동안 거미에 물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거미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집 안에 거미가 있었던 건지, 잠든 사이 어디선가 기어 들어온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방구석 어딘가에 숨어 있었을 수도 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시간이 지나자 부풀었던 입술은 거짓말처럼 원래대로 돌아왔다. 다행히 별일 없이 지나갔지만, 입술이 부어 있던 감각은 오래 남았다. 아프다기보다는 이상했다. 입술에 돌멩이 하나를 붙여 놓은 것처럼 둔하고 낯선 느낌. 내 몸인데도 내 몸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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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으면 휴대전화로 사진이라도 찍어 뒀을 텐데 그 시절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사진 한 장 없이 기억으로만 남아 있으니 지금 와서는 얼마나 심하게 부었는지 나조차 확신하기 어렵다. 그래도 마스크를 써도 가려지지 않을 만큼 튀어나왔다는 건 기억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게 그렇다. 정작 중요한 순간의 앞뒤는 흐릿한데, 몸으로 겪은 이상한 감각 하나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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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집 안에서 거미를 발견하면 지금도 반갑지는 않다. 바깥에서 거미줄을 치고 있는 건 그나마 괜찮다. 그런데 사람이 사는 집 안에 나타나는 거미는 다르다. 분명 내가 사는 공간인데, 어느 구석에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거미가 사람을 일부러 노리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제 할 일을 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모습을 드러내는 것뿐일 텐데도 그렇다. 그렇다고 지금 집에 거미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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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주차장 천장 구석에도 거미줄이 가득하다. 청소하는 사람이 걷어내는지, 누군가 긴 막대기로 쓸어내는지 한동안 깨끗해 보일 때가 있다. 그런데 며칠 지나 다시 보면 어느새 거미줄이 촘촘하게 쳐져 있다. 거미는 그 한가운데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다. 저 작은 몸으로 언제 저렇게 넓은 집을 지었을까 싶다가도, 가까이 가서 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거미줄이 사라진 자리에 다시 줄을 치는 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내가 보지 못했을 뿐, 늘 그 근처에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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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크네의 비밀]에서 마지막에 나오는 대왕 거미도 생각난다. 거대한 거미가 갑자기 날아오듯 달려들고, 불붙은 화살촉이었던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무언가가 날아가 거미를 맞힌다. 거미는 벽에 탁 박힌 채 불에 탄다. 그 장면이 어릴 때는 꽤 통쾌했다. 그렇게 끔찍한 거미가 마침내 죽었으니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지금 다시 보면 특수효과가 어땠는지부터 눈에 들어올지 모르겠다. 그래도 작은 거미들이 사람의 몸속을 드나들던 장면과 마지막 대왕 거미가 날아오던 순간만큼은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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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사이 거미에게 물려 입술이 부풀어 올랐던 일도 그 영화와 어딘가 붙어 있는 기억이다. 실제로 겪은 일과 영화에서 본 장면은 전혀 다른데, 머릿속에서는 이상하게 한데 엉켜 있다. 거미가 무서운 이유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한 번은 내 입술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고, 그 뒤로도 거미는 내가 사는 곳의 구석구석에 조용히 나타난다. 지하주차장 천장에 매달린 거미를 볼 때면 가끔 그때 생각이 난다. 저 녀석이 내 입술을 그렇게 만들었을 리는 없겠지만, 거미라는 건 아무래도 가까이 두고 싶지 않다. 사실 스파이더맨도 거미에게 물린 후 이상하지만 짠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 영화가 어떻냐고 한다면 그냥저냥 볼만하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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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울 일이 없을 것 같은 오래된 영화에서 문득 눈물이 떨어질 때가 있다. 이 영화가 그랬다. 몇십 년 만에 다시 봤다. 베이다가 토마스를 잃고도 그 슬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모습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오래전에는 미처 몰랐던 감정인지 아니면 그때는 알지 못했던 슬픔을 이제야 알아보게 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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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맥컬리 컬킨이 [나 홀로 집에] 1편을 끝내고 2편이 나오기 전에 출연한 작품이다. 당시에는 맥컬리 컬킨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극장을 찾은 관객이 많았을 것이다. 케빈의 기발한 장난과 유쾌한 소동을 기대했다면 당황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맥컬리 컬킨은 전혀 다른 아이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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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다는 태어날 때 엄마를 잃었다. 엄마에 대한 기억이 있을 리 없다. 그러니 베이다가 그리는 엄마는 온통 상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직 남은 사진 한 장을 들고. 아빠는 장의사다. 죽은 사람을 보내는 일을 하는 아빠가 정작 살아 있는 딸의 마음은 알아주지 못한다. 그런 아빠가 장례식장 분장사로 들어온 쉘리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반지까지 선물하자 베이다는 아빠가 밉다. 아빠에게는 새로운 사랑이 생겼지만 베이다에게 엄마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엄마를 생각하고, 시를 쓰고 싶어 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말로 꺼내기 어려운 마음을 시로 옮기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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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다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른들의 것이다. 어른들은 자기들끼리 사랑하고, 결혼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아이의 슬픔은 그 와중에 자꾸 뒷전으로 밀린다. 베이다가 왜 아픈지, 무엇을 그리워하는지 누구도 진지하게 들여다보지 않는다. 아이에게도 어른들이 모르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은유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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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베이다 곁에는 토마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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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는 베이다와 잘 맞는 구석이 별로 없는 아이다. 요즘 말로 하면 완전한 T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고,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밤이 되면 집에 가야 한다. 베이다가 상상력을 한껏 펼칠 때마다 토마스는 현실적인 말로 찬물을 끼얹는다. 온갖 알레르기를 달고 사는 녀석이라 베이다의 모험에 투덜거리기도 한다. 그런데도 결국 따라나선다. 둘 중 누가 더 용감한지 따질 것도 없이, 베이다가 가는 곳에 토마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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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베이다에게 토마스는 친구 이상의 존재다. 말하지 않아도 자기 옆에 있어 주는 아이. 베이다의 마음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해도 그 마음을 혼자 내버려 두지는 않는 아이. 치매를 앓는 할머니 역시 그런 존재다. 할머니는 베이다의 사정을 말로 풀어 주지 않는다. 그저 곁에 있다. 베이다에게는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자신을 고치려 들지 않고, 설명을 요구하지도 않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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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이가 벌집을 건드리는 장면이 있다. 벌떼를 피해 도망치다가 강물에 뛰어들고, 그 소동 속에서 베이다는 자신이 아끼던 요술 반지를 잃어버린다. 아이에게 반지는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다. 손에 쥐고 있으면 무언가 특별한 힘이 생길 것 같은 물건이다. 베이다가 믿는 세계의 일부이기도 하다. 베이다는 자신이 느끼는 상실을 시를 통해 마음을 붙잡으려 한다. 시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사랑한다고 토마스에게 고백하며 결혼하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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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의 대답이 재미있다. 선생님과 결혼하는 건 불법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시험 점수를 백 점 받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아이답고, 엉뚱하고, 어딘가 토마스답다. 베이다가 아무리 심각한 이야기를 해도 토마스는 자기가 아는 방식으로 대답한다. 두 아이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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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는 힘으로도 덩치로도 베이다를 이기지 못한다. 겁도 많고, 현실적이고, 어른들 말을 잘 듣는 아이지만 베이다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깊다. 베이다가 잃어버린 반지를 찾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혼자 벌집이 있는 곳으로 간다. 그리고 달려드는 벌떼에 쏘여 목숨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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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영화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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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베이다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엄마를 잃고 태어난 아이에게 또 하나의 상실이 찾아왔다. 하지만 엄마는 베이다가 태어나기 전에 떠났고, 토마스는 베이다가 함께 웃고 떠들며 지냈던 시간 속에서 사라졌다. 엄마는 상상으로라도 그려 볼 수 있었지만 토마스는 다르다. 어제까지 곁에 있던 아이가 이제는 어디에도 없다. 같이 모험을 떠날 수도,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도,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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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다는 슬프다고 말하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어쩌면 슬픔이 너무 커서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일부터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상실이다. 밝고 엉뚱했던 베이다의 세계가 한순간에 무너진다. 토마스를 잃은 베이다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 아이에게 앞으로 세상은 어떻게 보일지. 한참을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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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후반, 베이다는 자신이 쓴 시를 낭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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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흘리는 버드나무여, 왜 울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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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는 그 자리에 서서 말없이 울고 있다. 어쩌면 토마스도 그런 아이였는지 모른다. 자기 마음을 멋지게 설명하지도 못하고, 베이다가 겪는 일을 모두 이해하지도 못하지만, 늘 그 자리에 있던 아이. 크지도 않고 특별히 강하지도 않았지만 베이다의 삶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누구보다 컸다. 그 아이가 사라지고 나서야 베이다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조금씩 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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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시 낭독 장면이 좋다. 베이다가 슬픔을 완전히 극복해서가 아니다. 토마스가 돌아온 것도 아니고, 없어진 자리가 다른 무언가로 채워진 것도 아니다. 그저 베이다는 자기가 느끼는 것을 시로 썼다. 마음속에서 도무지 정리되지 않던 감정이 문장으로 나왔다. 어쩌면 그게 베이다가 할 수 있는 전부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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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면서 새삼 놀란 건 맥컬리 컬킨의 연기였다. 같은 해 겨울에 개봉한 [나 홀로 집에 2]의 케빈을 떠올리면 더 그렇다. 케빈은 영리하고 장난기 넘치는 아이였지만, 여기서 토마스는 유약하고 단순하며 어딘가 답답할 만큼 직선적이다. 베이다의 상상력을 따라가지 못하면서도 그 애를 위해서는 혼자 위험한 곳까지 찾아가는 아이. 맥컬리 컬킨은 그 모습을 과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토마스가 더 사랑스럽고, 그 아이가 사라진 뒤의 빈자리도 더 크게 느껴진다. 케빈의 얼굴은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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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영화를 다시 본다는 건 가끔 이상한 일이다. 줄거리는 기억나고 결말도 알고 있는데,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장면에서 갑자기 마음이 무너진다. 영화가 달라진 건 아닐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가 달라졌거나, 그동안 살아오면서 조금씩 알게 된 감정들이 화면 속 아이의 얼굴과 겹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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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다는 토마스를 잃고 마음의 공백이 커졌다. 그 공백을 메꾸게 해 줄 무언가도, 그 슬픔을 없애 줄 사람은 없다. 다만 베이다는 시를 썼고, 우리는 그 시를 듣는다. 베이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서 눈물이 났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그 비슷한 성장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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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전면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영화 내내 흐르는 기저는 '죽음'이다. 베이다가 느끼는 죽음, 어린이의 시선으로 보는 죽음에 관해서 이토록 깊이 있게 다루었다. 마지막 베이다는 토마스의 엄마를 안아 준 다음 말한다. 토마스는 걱정하지 마세요, 하늘에서 우리 엄마가 지켜 줄 거예요. 이 계절에 눈물을 흘리고 싶다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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