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길거리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지 않았다. 코로나 시기보다 더 길거리에 장식이 없고 캐럴은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라디오에도 이상하지만 다른 해보다 덜 나오는 거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한 마을버스 속에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커피를 투고하러 가는 길에 몇 년째 공사를 하고 있는 거대한 공터가 있다. 기존에 있던 소방서를 허물고 무슨 센터를 짓는 모양인데 공사현장 앞에는 늘 공사개요가 붙어 있어서 공기라든가, 그런 걸 다 알 수 있는데 점점 공사개요에 표기된 공사기간이라든가 벗어나더니 어느 순간 그 표지판이 없어지고 그대로 빈 공터인 상태로 코로나 전부터 이어지고 있다. 땅을 파고 다 허물어서 생명체라고는 자라지 않을 것 같은데 12월 어느 날 보니 나뭇잎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며칠 굉장히 추웠던 날이었다. 그런 날에도 조깅을 하러 나왔다. 다른 해의 한파보다 덜 한 것 같은데 그래도 막상 나오니 너무 추웠다. 하지만 늘, 언제나 그렇듯이 조깅을 하고 10분 정도 지나면 등이 후끈후끈해진다. 아무리 추워도 조깅을 하는 러너가 한두 명은 보이는데 이 날은 정말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던 날이다. 도로에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큰 도시에 홀로 떨어진 느낌이었을 것이다.


요즘은   전에 비해 비둘기들이 그렇게 많이 보이지 않는다한동안 닭둘기라고 해서 도심지에 가득해서 비둘기들에게 먹이를 주지 마시오 같은 글귀가 여기저기 붙었었다비둘기들이 싸질러 놓은  때문에 앓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그러더니 어느 순간부터 닭둘기들이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예전만큼 많이 보이지 않는다일행 중에  명은 비둘기들이 다가오면 저리 가 조류독감아 라고 외치기도 했다요즘 비둘기들도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여전하다예전 닭둘기들은 발로 툭툭 치면 옆으로 밀려갈 정도로 사람은 사람취급  했는데.


12월에 조깅하다 올려다본 하늘은 그대로 그림이었다. 고요하고 뿌옇고 포근해서 마치 4월 초 같은 날이었다.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마찬가지로 그림 같은 풍경이다. 실내에서 트래드밀로 달리면 이런 풍경은 절대 볼 수 없다. 불편한 점이 있지만 밖으로 나오면 이런 풍경을 접 할 수 있다.


매일 오전 비슷한 시간에 커피를 투고하러 가는 길이다. 햇살이 좋았던 12월의 어느 날이다. 날이 좋으면 커피 투고 하러 가는 이 길을 걷는 게 좋다. 다운타운이어서 한창 오전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매일 지나가니까 매일 비슷한 모습으로 하루를 여는 장면을 보는데 지겹지 않다.


아버님 아무리 술에 취해 잠이 오더라도 이런 데서 주무시지 마세요. 날이 포근하다고 해도 데카브리입니다 아버님. 신발까지 나란히 벗어 놓고 버스정류장에서 잠들어 있는 어르신을 보니 꺼져가는 12월이 더없이 안타까워 보인다.


책을 보면 정점을 찍으면 내려오는 길밖에 없으니 평행선을 이루면서 길게 살아가는 게 좋다는 말들이 많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정점을 찍지 않는 것이 아닐까. 비록 떨어질지라도, 바닥까지 추락하더라도 꼭대기에 올라 거기서 밑을 한 번이라도 내려다보고 싶지 않을까.


인간은 예전부터 마녀사냥을 해서 자기 위안을 삼으려는 유전자가 있어서 몰려들어 한 사람을 죽이는데 적극적이 된다. 죽이는 댓글 한 줄에 정의롭다는 뿌듯함으로 매일을 보내는 사람을 우리는 쓰레기라 부른다. 동료의 죽음을 추모하면 달려가는 쓰레기는 불에 태워야지.


내가 살았던 동네는 이제 이렇게 전부 싹 없어지고 아파트가 착착 들어서고 있다. 고층 아파트가 엄청 많은데 내 아파트는 없다는 것도 기운이 빠진다. 아파트는 살기 편하지만 한 번 불편하면 한도 끝도 없이 불편해진다. 층간소음이라든가, 담배연기라든가. 이런 문제는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으며 폭력으로 번진다.


2023년 데카브리를 보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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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을 앞두고 겨울 방학에 서울에 있었다. 고등학교 방학에는- 여름방학이든 겨울방학이든 방학에는 늘 상경해서 열흘정도 머무르곤 했다. 사진부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서울에 가서 백남준 비디오 아트를 관람했다. 3년 동안 일 년에 두 번씩, 나는 총 여섯 번 백남준 비디오 아트센터에서 그의 예술 세계를 둘러보았다. 사실 내가 백남준의 예술 세계를 아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경주의 우양 미술관에서도 백남준의 작품은 볼 수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사진부에 들어온 1학년들에게 2학년은 어떤 주제로 강연을 해야 했다. 강연이라고 하지만 그저 아이들을 모아 놓고 사진에 관한 이야기, 사진가 이야기나 사진이 아니더라도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후배들에게 백남준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호응도 좋았다.


나는 당시에 플럭서스에 심취(까지는 아니지만)해 있었다. 관심이 많았다. 백남준은 70년대 장발은 잘라버리는 한국에서는 예술활동을 할 수 없다며 독일로 건너가서 일종의 문화 새마을운동을 하는 1세대 예술가가 되었다. 거기서 같이 공부를 했던 사람이 오노 요코였고 그녀의 남편이 존 레넌이었다. 존 레넌의 친구가 팝 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이었고 그들과 같이 작업을 할 정도로 전부 친구였다.


백남준의 아트센터에 가면 도슨트가 설명을 해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갔을 때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도슨트는 설명을 잘해주었지만 나는 백남준의 예술세계에 전혀 접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집요하게 질문을 했다. 한 바퀴 돌고 난 다음 잠깐 쉴 때 도슨트는 나를 불렀다. 나에게 음료를 하나 건네주었다. 사실은 나도 백남준의 예술에 대해서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예술은 눈으로 보지 말고 마음으로 보면 된다. 보고 이상하면 이상한 대로, 삐딱하면 삐딱한 대로 받아들이면 백남준의 예술이 조금은 편해질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거짓말처럼 그 뒤로 백남준의 예술이 생각하는 것처럼 엉망이지는 않았다.


가끔 답답하고 내 마음처럼 말도 나오지 않고 나의 옆에 내 편이라고는 1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 백남준의 전위예술을 보면 이상하지만 괜찮아졌다. 가끔 대형마트에 아파트처럼 쌓아 놓은 라면들을 무너뜨리고 싶을 때가 있는데 백남준의 전위예술 중에는 바이올린을 연주다가 미친 듯이 부숴버렸다. 그럴 때가 있다.


서울의 이문동에 있는 고모 댁에 가서 인사를 드렸다. 멀리 떨어져 살아서 거의 볼 수 없기에 고모는 내가 하루 묵고 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고모가 편하게 대할수록 어쩐지 더 불편해졌다. 대궐 같은 집과 연예인 같은 형과 누나들 때문에 주눅이 들었다. 후에 의사가 되었지만 그때는 대학생이었던 사촌 형이 나를 데리고 하루 동안 같이 놀아 주었다. 서울을 구경시켜 주었고 극장에서 영화도 보았다. 그리고 헤어질 때 나에게 브라이언 아담스의 앨범을 하나 사주었다. 형은 형의 친구들을 불러서 나를 데리고 당구장으로 갔다. 형과 친구들은 가죽재킷에 청바지를 입었는데 정말 배우를 보는 것 같았다. 분명 날씨가 굉장히 추워서 나는 파카에 내복까지 입었는데 형들은 그렇게 추워 보이지도 않았다. 당구장은 내가 당구를 100 정도 친다고 해서 갔는데 나의 당구실력은 형편없었다.


외삼촌의 딸인 사촌누나에게는 고모 댁에서 하루 보내고 온다고 나왔지만 막상 고모 댁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 자신이 없었다. 나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지만 당장 대학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앞일이 불투명했다. 딱히 걱정은 들지 않았는데 라면을 먹고 나면 밑에 깔리는 미미한 찌꺼기처럼 막연한 불안 때문에 뭐든지 척척 해내고 멋있는 고모 댁의 형과 누나들과 하룻밤을 보내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저녁에 고모에게 인사를 드리고 고모댁을 나왔다. 둘째 외삼촌의 집에도 가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어딘지로 모를 서울의 거리를 떠돌아다니다가 늦은 밤에 되어서 구로공단 쪽으로 가서 허름한 여관에서 하루를 묵었다. 1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고모댁에는 외삼촌 집으로 잘 왔다고 연락을 드리고, 외삼촌의 사촌 누나에게는 고모댁에서 하루 자겠다고 했다.


여관이었지만 여인숙만큼 허름했다. 나는 그날 가출을 한 셈이다. 바닷가가 있는 집에서 500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가서 친척집에는 잘 있다는 연락을 한 채 혼자서 12월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여관의 방에는 침대는 없고 바닥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이불이 곱게 몇 겹으로 개 있었고 방에 난 창문은 앉아서 여는 여닫이 창문이었다. 앉은 채 창문을 여니 차가운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작은 창으로 보이는 서울의 밤하늘의 별이 냉정하게 반짝였다. 그 별들을 보니 이 세상에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티브이도 틀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은 채 작은 창으로 12월 마지막 밤을 서울의 밤하늘을 보며 있었다. 나는 몹시 외로웠고 어디에도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누구도 반기지 않을 것 같았고 나는 1과 0 사이에 낀 존재 같았다.



자주 만나는 카페에 은주가 나오지 않았다.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은주는 좋아하는 남자애가 있으면서 잘 안 될 때는 꼭 나에게 뭔가를 털어놓거나 내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 얄미운 모습이 보기 싫으면서도 또 며칠 연락이 없으면 카페에서 만나서 수다를 떨곤 했다. 은주는 늘 원피스 같은 옷을 입고 다녔다. 아래위로 붙은 치마 같은 옷. 나는 그 옷을 입은 은주를 약 올렸다. 뚱뚱해 보인다고 그 옷에서 좀 벗어나라고 했다.


은주가 그 녀석을 왜 좋아하는지 나는 몰랐다. 단지 덩치가 커서? 이유를 말하라면 그 이유가 가장 컸다. 깡패 같은 놈에다가 늘 싸움이나 하고 다니는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을 좋아하다가 잘 안 되면 나를 찾아와서 울곤 했다. 아무튼 알 수 없는 게 은주였다. 은주가 카페에 나타나지 않은 지 일주일이 넘었다. 집에 전화를 하니 은주의 언니가 원래 심장이 안 좋았는데 지금 너무 안 좋아져서 병원에 입원을 했다고 했다.


은주가 심장이 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은주는 그것 때문에 심하게 운동을 하거나 달리거나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녀석 때문에 술도 마시기도 했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달려서 그 녀석을 만나러 가기도 했다. 은주는 나에게 심장은 다 괜찮다고 했다. 은주가 그렇게 말을 하니 그렇게 믿었다. 입술은 립스틱 덕분인지 생기가 돌았다.


고 3은 모두에게 중요한 시기였다. 대학이니 미래니 같은 분위기가 등에 붙어서 어깨를 짓누르기 때문이다. 고 3 여름방학이 끝나고 은주를 거의 볼 수 없었다. 그 녀석과 잘 되는 모양이다. 그러나 여름방학에 그 녀석이 다른 여자애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다니는 모습을 나는 봤다. 졸업을 앞두고 은주는 영영 카페에 나타나지 않았다.


구로공단 쪽으로 난 여관의 작은 창으로 밤하늘을 보니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고요하고 조용한 성격인가 봐] 하지만 조용한 성격이란 없다. 사람 앞에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앞에 있는 그 사람이 말을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보통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말 수가 적은 아이도 마음에 맞는 친구와 함께 있으면 말을 많이 했다. 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말을 하지 않을 때는 상대방이 나의 말을 대체로 무시했기에 그러한 것이다. 은주는 그 녀석 앞에서는 말 수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내 앞에서는 조잘조잘 잘 도 떠들었다.


나는 술을 사 와서 마실까 하다가 그냥 그대로 서울의 12월 마지막 밤하늘을 바라보기만 했다.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반짝이는 별은 유난히 크게 보였다. 인간의 삶은 왜 이렇게 힘들까. 우리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다. 내일은 백남준 아트전을 보러 갈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방 안에는 물이 담긴 주전자가 있었다. 주전자의 물을 따라 마셨다. 보리차였다. 보리차를 오랜만에 마셨다. 맛이 좋았다. 구로공단이 보이는 허름한 여관방에서 마시는 보리차가 이렇게 맛있다니. 별거 아닌 보리차가 갈증을 시원하게 내려가게 했다.


시간을 보니 11시 55분이었다. 5분이 지나면 해가 바뀐다. 나는 보리차를 마시며, 작은 창으로 보이는 서울의 밤하늘을 보며 해가 바뀌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안타까워한다고 해서, 운다고 해서 해가 바뀌는 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눈물을 아무리 흘린다고 해도 별이 된 은주가 살아서 돌아오지는 않는다. 그저 조잘조잘거리던 은주의 추억을 연소 삼아서 조금 태워가며 늙어가야 한다. 세상은 나와는 무관하게 흘러간다. 나는 그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한다.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무렵 나는 그대로 몸을 말고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은주가 나타나서 나를 운다고 놀리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다음 날 사촌누나가 일하는 곳을 찾아갔더니 누나는 [나는 다 알아]하는 얼굴을 한 채 짬뽕을 시켜 주었다. 너 소주 마실래?라고 하기에 나는 괜찮다고 했다. 사촌누나와 함께 사촌누나가 일하는 사무실에서 앉아서 짬뽕을 한 그릇씩 먹고 나는 나와서 고모에게 연락을 드렸다.


그리고 오후 내내 백남준의 아트 센터에서 그의 작품들을 구경했다. 작은 화면 속에서 사람들이 갇혀 소리를 지르고 나오려고 했다. 우리는 갇혀 있지만 자유한 존재다빛은 만질  없지만 리는  만질  없는 빛을 다룰  아는 존재다. 손에 카메라만 있다면 그 빛을 원하는 대로 사람의 머리 위에 떨어트릴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상실을 극복하고 견디며 살아낸다. 그게 인간이 신에게 부여받은 운명이며 동시에 능력이다.


조금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백남준의 예술 세계에서 나왔다. 나는 그때야 알았지만 내가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했던 12월 31일은 31일이 아니라 30일이었다. 졸지에 나는 그해 하루를 더 살게 되었다. 둘째 외삼촌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부천이었다. 이상하지만 부천에는 일 년에 한두 번씩 와서 그런지 익숙하고 마음에 편했다.


둘째 외삼촌은 뇌가 망가져 집에서 누워서 지낸 지 오래되었다. 동네에서 작은 슈퍼를 하던 외숙모가 나를 위해서 어려운 살림에 파티를 열어 주었다. 외가 쪽에도 나의 사촌들이 있었다. 우리는 거의 얼굴만 알아서 그런지 데면데면했다. 외숙모는 음식솜씨가 좋아서 차린 음식들이 아주 맛있었다. 중간에 케이크도 있었다. 케이크는 무엇을 위해 올라온 케이크인지 몰라도 사촌 동생들이 맛있게 잘라먹었다. 그날 밤 사촌동생들과 한 방에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자게 되었다. 31일 밤에 모두가 이불을 덮고 반쯤 누워서 티브이를 봤는데 스타워즈가 했다.


모두가 두꺼운 한 이불에 발을 집어넣고 귤을 까먹으며 스타워즈에 빠져들었다. 스타워즈의 캐릭터와 몬스터들에 대해서 떠들며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몰랐는데 같이 보는 영화가 이렇게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솔로가 너무나 멋지게 보였다. 젊디 젊은 해리슨 포드가 빛이 났다. 티브이 속 밀레니엄 팔콘이 쏘아대는 빛과 츄바카의 움직임이 마치 백남준의 아트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눈으로 보지 말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세계도, 그리고 사람들도. 그러면 곧 봄이 올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바뀌는 해를 맞이했다. 바야흐로 진짜 31일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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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누군가 나에게 귤을 주었다. 옆에서 귤과 음료를 마시던 가족이었다. 나에게 3개나 주었다. 4월에 귤이라니. 4월에도 귤을 먹을 수 있다. 뭐든 가능한 세계가 된 것일까. 나는 하나를 까먹었다. 손에서 나는 귤향이 좋았다. 연약하고 단조롭지만 껍질이 있고 껍질을 까니 귤은 살아있는 것처럼 과육에서 나온 끈적거림이 손에 묻었다. 어쩐지 생명력이 느껴졌다. 그때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가슴에서 느껴졌다. 이런 기시감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마치 6세가 되어 4월에 낮잠이 든 것 같은 기분이었다. 4월의 귤향은 그녀를 닮았다. 이질적인데 상쾌했다. 교회에서 기도를 잘하고 있을까. 남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겠지. 그녀가 보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숲 속에 둘러싸여 있어서 그런지 여기서 바라본 하늘은 그야말로 하. 늘.이었다. 출발할 때 맑았던 하늘은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하늘이 흐려지니 사방에서 풀 내가 나는 것 같았다.      


보통은 한 시간 안에 명수가 나오는데 오늘은 동생과 이야기가 길어지는 모양이었다. 명수는 그날을 잊지 못하고 있다. 명수는 축구를 하다가 상대 편 수비수에게 걷어차여 정신을 잃은 적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업혀 양호실에 실려 갔다. 명수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며칠 지나서 물어보면 별거 아닌 것처럼 이야기를 했다. [괜찮아, 아무렇지 않아. 부딪힐 때의 느낌만 조금 날 뿐이야. 아마 내년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 걸]라고 명수가 말했다.   

   

하늘은 완전히 흐려졌다. 나는 소변이 마려워 일어나서 화장실에 갔다가 오면서 커피부스에서 라테를 사 왔다. 라테가 한 잔에 천 원이었다. 가격이 저렴했다. 요양소 안에는 자판기가 없고 커피부스가 있었다. 바리스타가 커피를 만들었다. 풍채가 좋은 50대 남성이었다. 만드는 동안 나에게 누구 면회를 온 모양이냐고 물었다. 과하지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면회 온 가족에게 대하는 말투였다. 이곳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전부 교육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곳에서 오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문제를 고치려고 하기보다 자신의 문제를 받아들이려고 해요. 일단 나의 문제를 받아들이면 편하죠. 저도 저의 문제를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좀 걸렸지요]라고 바리스타가 말했다.


라테를 받아 들고 연못 근처 벤치에 앉았다. 라테의 맛이 좋다. 날씨의 영향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아침도 거르고 아직 점심도 먹지 못한 탓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가 됐든 라테가 아주 맛이 좋았다. 평소에는 라테 같은 음료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러고 보니 뜨거운 음료를 마셔본지도 언제인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마시는 뜨거운 라테는 흐린 날씨를 벌리고 나의 마음속 통증을 없애주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다. 아직 세상에 내가 모르는 것들이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나의 가까이에 내가 모르는 것들이 아직 많이 있었다.      


명수가 나왔다. 나를 일어났다. 명수는 나를 벤치에 앉히고 자신도 옆에 앉았다. [날이 흐려졌네]라고 명수가 말했다. [오전에 맑았는데 어땠는지 기억나?]라고 내가 물었다. [아니, 몰라. 그런 거 기억날 리가 없어]라며 명수가 웃었다. 이렇게 동생을 만나고 나오자마자 말을 하며 웃는다는 건 동생과 이야기가 잘 되었다는 증거다. 명수는 어쩌면 반가운 소식을 집에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우리는 버스 시간을 확인 한 다음 벤치에 앉아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눴다.      


날개 달린 개미들이 숲 속의 사람들을 공격한 것은 숲 속의 사람들이 먹을 것이 모자라 땅을 파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고 생김새가 달라서 서로는 전쟁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 사이에 떨어졌을 때 날개 달린 개미들은 그녀를 자신들에게 해를 끼칠 존재로 알고 옆 나라의 붉은 날개 달린 개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날개 달린 개미들은 병사개미들 말고도 일개미까지 전부 나와서 그녀를 공격했다. 숲 속 사람들은 너무나 약하여 날개 달린 개미들이 공격을 하면 도망을 가야 했다. 물리면 그 자리에서 부풀어 올라 움직이지도 못하고 병들어 죽을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해서는 전쟁이 끝날 것 같지 않고 서로 상처만 남을 것 같았다. 그녀는 날개 달린 개미들의 왕에게 휴전을 권했다.


그러나 왕은 휴전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우리의 세계에 먼저 침범을 했다]라고 날개 달린 개미의 왕이 말했다. [아닙니다, 추위 때문에 먹을 것이 떨어져 땅 속에 있는 뿌리를 캐 먹으려고 그랬던 것입니다]라고 숲 속의 사람들이 말했다. 그녀는 왕에게 해결할 방법을 알려 주었다. 숲 속의 사람들이 잡은 동물을 먹고 남은 부위를 개미들에게 주었다. 개미들은 숲 속의 사람들에게 사냥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알려 주었다. 그렇게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그녀는 두 나라의 휴전을 확인하고서야 그곳을 나올 수 있었다. 그때는 피부에 났던 상처들이 조금씩 아물기 시작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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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자 친구는 내가 이곳에 오는 것을 싫어한다. 싫어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오면 저녁이 되기 때문에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없는 불만을 가지고 있다. 나 역시 여자 친구가 교회에 가는 게 별로다. 그런데 여자 친구가 교회를 나가야 가끔 명수와 일요일에 시간이 맞으면 동생을 보러 오는데 같이 올 수 있다. 그러나 명수와 약속이 없는 일요일에 여자 친구가 교회에 가면 나는 나대로 혼자 보내야 했다. 여자 친구가 교회를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좋아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명수와 동생 면회를 오는데 동행할 수 있으니까.      

여자 친구가 가는 교회에는 남학생들이 유난히 많다. 청년부에 주로 남자들이다. 지난번에 한 번 같이 교회를 간 적이 있었다. 유독 남학생들이 여자 친구에게 와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 싫어서 다시는 가지 않는다. 여자 친구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내 눈에는 종교를 핑계대로 치근대는 남자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남자애들 앞에서 여자 친구는 유독 활짝 웃었다. 일본에는 교회가 거의 보이지 않는데 우리나라에는 왜 이렇게 교회가 많을까. 신이 정말 살아 있다면 한국에 있는 교회를 전부 다니는데 정신이 없을 것이다.      


여자 친구에게 명수 동생에 관해서는 몸이 불편해서 요양소에 있다고만 했다. 그래서 여자 친구는 내색을 하지는 않지만 한 번 가면 늦게 돌아오는 곳으로 가는 내가 미울지도 모른다.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는 건 반드시 멀리 떨어져 지내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여자 친구를 좋아하다. 여자 친구도 나를 좋아한다. 여자 친구가 교회에 가게 된 건 순전히 여자 친구의 악몽 때문이다. 꿈속에 날개 달린 개미들이 왕창 나오는 꿈이다.


그 꿈을 꾸는 날이면 아침에 몸 여기저기가 마치 개미들에게 물린 것처럼 피부에 벌건 오돌토돌한 상처들로 가득했다. 치료를 받으러 간 병원에서 치료는 치료대로 받으면서 정신적인 안정을 위해 정신과 상담을 권했다. 상담받기를 꺼려하던 여자 친구는 결국 악몽을 자주 꾸는 바람에 상담을 받았다. 상담을 받으면서 조금씩 나아졌다. 그리고 상담받는 의사에게 기도 같은 것을 해보라고 권유받았다. 여자 친구는 그래서 교회에 나가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기도라고 해서 별 건 없었다. 그저 마음속에 눌러 담았던 말들을 끄집어내는 정도였다.

     

여자 친구가 악몽을 꾸고 올 때면 어딘가 다른 사람의 모습을 뒤집어쓴 것처럼 힘이 없고 연약해 보였다. 그때 그저 가만히 어깨를 빌려줘서 머리를 기댈 수 있게 해 주었다. 여자 친구의 머리에서 바람 냄새가 났다. 포도를 정제해서 잘 말렸다가 풀어놓은 듯한 기분 좋은 바람의 냄새였다. 이후 바람을 타고 포도의 미미한 향을 맡으면 여자 친구의 머리 냄새가 떠올랐다.      


여자 친구는 그렇게 어려운 자세로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밤새 칼과 방패를 들고 날개 달린 개미들과 격렬한 싸움을 한 것이다. 여자 친구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싱그러움이다. 깨끗한 얼굴이 그러했다. 하지만 악몽을 꾼 날이면 그 싱그러움이 한 움큼 빠져나가 있었다. 한 없이 나약하기 그지없는 그녀가 꿈속에서 작은 숲 속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날개 달린 개미들과 결투를 한다. 물론 우세한 쪽은 날개 달린 개미 쪽이다. 그러나 여자 친구는 작은 숲 속 사람들을 지켜주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 깨끗한 피부에 상처가 나는 일을 감수하면서 칼과 방패를 휘둘렀다.      


[나 악몽이 심해지면 약을 먹어야 할지도 몰라. 나 정신병이라고 아이들이 놀리면 어떻게 하지?]     


여자 친구는 악몽에서 날개 달린 개미들이 수백 마리가 나오다가 어느 날은 수천 마리가 나올 때가 있었다. 그때는 몸에 과부하가 걸렸다. 걷는 것도, 먹는 것도 힘들었다. 그때 같이 있어주었다. 목 넘김이 좋은 죽을 같이 먹고 부축해서 조금씩 걸었다. 여자 친구는 매미처럼 나에게 바짝 붙어 있었다. 여자 친구의 몸에서 흙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어깨를 꽉 껴안았다.   

   

[악몽이 언젠가는 없어지겠지? 없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너는 내가 귀찮지 않아? 모두가 나를 귀찮게 여기는데]라고 여자 친구가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물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옆에서 아픈 곳을 내내 어루만져주고 힘들 때 안아주는 일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고 힘든 일이라고 명수가 말했다. 그러나 명수는 자신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동생을 옆에서 지켜주고 싶어 했다. 한두 달에 한 번씩 오는 것도 부모님 대신 명수가 꼭 왔다.


[너도 숲 속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날개 달린 무시무시한 개미들과 싸웠잖아. 너도 힘들지만 하잖아. 너도 하는데 나라고 못 할거 같아?]


[바보구나 너, 그건 꿈이고 말이야]라며 여자 친구는 힘없지만 웃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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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외버스는 앉아서 갈 수 있었다. 시외버스의 장점은 도심지를 벗어나 외곽지역으로 빠져 마을마다 전부 정차를 한다는 점이다. 그 사이에 시골의 시장까지 들어가는데 그런 풍경을 구경할 수 있다. 지나치면 기억에서 사라질 정경이지만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아슬아슬한 개울을 지나서 가기도 하고, 오래된 역사를 지나서 구불구불 돌아서 마을마다 정차하여 사람들을 내리고 사람들을 태웠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사람들의 승하차가 있은 후 국도로 올라간다. 그리고 다시 한 시간 정도 달려간다. 단점이라면 장점과 같다는 점이다. 모든 정류장에는 전부 정차를 했다.     

 

[동생은 그때 12살이었어]     


명수가 최초로 동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가 1년 전이었다. 명수와 나는 1학년 때에도 같은 반이었다. 명수는 축구를 잘한다는 이유로 2학년 선배들에게 불려 가서 클럽활동을 강제로 권유받았다. 하지만 명수는 클럽활동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선배들의 말을 듣지 않다가 구타를 당했다. 그때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늦게 까지 명수를 기다렸다. 명수는 씩씩하게 걸어오면서 클럽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웃으며 말했다. 얼굴은 엉망이었지만 명수는 기분 좋아 보였다.


명수가 중 3이었을 때 친구들과 노는데 동생이 따라온다는 거였다. 명수는 친구들과 축구를 하기로 했는데 동생이 따라와도 명수는 같이 놀아줄 수 없다며 집에 있으라고 했다. 동생은 심심하다며 결국 명수를 따라나섰다. 명수는 학교에서 축구를 했다. 전반전이 끝났다. 전반전을 뛰는 동안 동생은 가만히 있기 너무 심심했다. 동생은 명수에게 자신에게도 공을 달라고 했다. 명수 친구가 공은 저기 체육관 지하실 창고에 많으니까 가서 하나 들고 오라고 했다. 동생은 신이 나서 체육관 지하 창고로 내려갔다.


그 안에는 농구공, 축구공, 배구공 등 많은 공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럭비공이었다. 럭비공을 가지고 놀다가 떨어트렸는데 땅이 닿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튀었다. 동생은 그쪽으로 럭비공을 찾으러 갔다. 그때 학교를 순찰하던 경비아저씨가 창고가 문이 열린 것을 보고문을 닫고 불을 껐다. 그리고 올라가 버렸다.    

  

명수가 동생을 찾았을 때 이미 동생은 어둠에 잠식된 상태였다. 얼굴은 엉망이었고 극도의 불안에 떨었다. 집에서도 구석에 몸을 말고 몇 시간이나 있었다. 정밀검사를 한 병원에서는 스트레스성 자극이 심해서 해마에 문제가 생긴 것 같으니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치료를 해보자고 했다. 그러나 동생의 증상은 심해졌다. 일단 어둠을 너무 무서워했다. 동생은 불을 끄고 잠들지 못했으며 낮에도 집의 모든 전등을 켜 두어야 했다. 혼자일 때는 허공을 보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으며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같이 있는 이이게 히스테리를 부렸고 공격적이 되었다.


낮에도 밤에도 전부 불을 켜놔야 하는 문제는 아버지와 마찰을 겪게 되었다. 어느 날 정전이 되었다. 동생은 암전 된 집에서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동생은 통원치료가 불가능했다. 공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동생은 학교형 요양시설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곳에서는 불을 마음껏 켜놔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공부도 할 수 있었다. 동생과 비슷한 아이들이 많았다. 동생은 요양시설에서 지내는 동안 많이 안정이 되었다. 동생에게서 더 이상 히스테릭한 반응이나 혼잣말 그리고 무서워하는 어둠 앞에서 한 없이 초라해지지 않게 되었지만 동생은 집으로 오지 않고 시설에 머물러 있기를 바랐다.  

    

요양소는 터미널에서 내려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들어가야 한다. 숲 속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학교형 전문 요양소였다. 가방을 하나씩 울러 매고 시설로 가는 동안 명수의 말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4월이라 숲 속의 모든 꽃들이 활짝 피어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꽃은 숲보다는 인간 가까이 있는 화단이나 사람의 손을 거친 도로변에서 많이 피었다. 숲 속에는 풀과 나무가 그 세계를 점령하고 있었다.   

   

시설은 너무나 깨끗하고 좋았다. 리조트라고 해도 믿을 것만 같았다. 시설로 들어가면 큰 연못이 있었다. 주위에는 벤치가 있고 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과 면회를 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거나 음식을 먹고 있었다. 나는 명수가 동생을 만나러 가는 동안 늘 여기서 기다렸다. 여기서 바라보는 풍경 속에 어떤 호러블 한 기운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건 사람들에게서도 그랬다. 여기서 보는 요양소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뇌에 문제가 생겨 누군가를 공격하고 내뱉지 말아야 할 말을 끊임없이 뱉어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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