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의 탕에 몸을 담그고 얼굴에 땀이 흐를 때까지 참고 있는 것이 너무나 싫었을 어린 시절, 겨울이 되면 일주일에 한 번은 아버지와 동네 목욕탕에 갔다. 평일의 남탕은 한산하지만 토요일 저녁의 목욕탕은 분주했다. 계산을 하고 남탕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쏟아지는 목욕탕의 수증기 냄새가 먼저 반긴다.


목욕탕이 아니면 맡을 수 없는 수증기만의 냄새가 있다. 남탕에도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어색하고 초라하지만 작은 장식이 들어서곤 했다. 목욕탕에서 아버지의 등을 밀고 있노라면 신이 나서 더욱 손에 힘을 줬다. 아버지는 잘 민다며, 이제 다 컸네 같은 소리가 듣기 좋아서 양손으로 아버지의 등을 있는 힘껏 밀었다. 뜨거운 탕에는 정말 들어가기 싫었다.


발가락 하나만 넣어도 꼭 누가 때리는 것 같아서 탕 안에 몸을 담그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뜨거운 탕에 몸을 담그는 것이 좋아졌다. 그때는 이미 아버지는 곁에 없고 떠나고 난 후였다. 아버지는 나를 먼저 씻긴 다음 내 보냈다. 팬티를 입고 내복을 입고 있으면 그때부터 후끈후끈 몸이 덥다.


아버지는 수건을 돌돌 말아서 머리를 털어 주었다. 탁탁 털어주면 머리통이 얼얼할 정도였는데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그렇게 아버지가 머리를 터는 동안 머리는 말라갔다. 아버지가 내내 머리를 털어 주다가 언젠가 동네 이발소에서 아버지를 따라 이발을 하고 이발소 아저씨가 수건을 머리를 털어 줬는데 머리가 몸에서 분리될 것만 같았다.


목욕탕에서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이 아주 상쾌하고 좋았다. 맑고 쨍하고 날카로운 한기가 얼굴에 닿는 그 순간의 느낌이 괜찮다. 집에서 동네 목욕탕까지 걸어서 한 20분 정도 걸린다. 걸어서 오는 동안 나는 아버지에게 뭐라 뭐라 떠들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뭐가 신났는지 팔을 앞으로 뒤로 흔들며 20분 동안 걸어오는 그 길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도로와 학교의 담벼락, 전봇대, 작은 슈퍼. 이런 풍경을 생각하다 보면 가끔 꿈에 그 정경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게 집으로 오면 어머니가 저녁밥을 차리고 있다. 동생과 나는 저녁밥상 앞에 나란히 앉아서 밥을 먹었다. 겨울에는 마른 김에 밥을 싸 먹었다. 김이 혀에 딱 달라붙을 때 아버지는 된장찌개를 한 숟가락 떠 넣어 주었다. 네 가족이 조촐한 저녁밥을 먹으며 깊어가는 겨울밤을 따뜻하게 보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몰라도 하하 호호 즐거웠다. 그때의 추억을 연료로 조금씩 연소시키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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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싶을 때 시끄러움 속으로 들어간다 소음 속에서 나만의 하나의 소리를 찾는다. 소음공해는 시끄럽지만 소리는 마음을 고요하게 해 준다.

그것이 흐름이라는 거야. 그 흐름이라는 건 어느 지점을 통하고 나면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거야. 손을 쓸 수 없는 거야. 음악이 울리는 동안에는 어떻든 춤을 추는 거야. 의미 같은 건 애당초 없는 거야. 양사나이는 말했다.

거스턴의 그림, 커플인 배드가 세상에서 제일 로맨틱한 거 같애. 피곤에 찌들어 침대로 들어 사랑하는 이를 껴안고 잠이 들어.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더 사랑스러운 거 같아. 이불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보며 잠이 들거나, 입술을 보며 피곤에 겨워 깜빡 잠들어 가면서 사랑한다고 속삭일 수 있잖아.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여러 이야기를 상상하게 돼. 로맨틱하면서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저 그림 속에 있어. 그래서 안타까워, 그래서 사랑스러워, 그래서 덜 불행해 보여.

약이 떨어졌다. 약을 먹어야 하는데, 약을 먹어야 할 텐데. 아픈 게 싫어서 아프기 전에 미리미리 약을 먹어야 하는데 약이 떨어졌다. 아파서 누워있는 것도 싫고, 아파서 모호한 정신으로 부옇게 보이는 세상도 싫어서 약을 먹어야 한다. 아무리 찾아도 약통에 약이 없다. 약이 떨어질 리가 없는데 약이 없다니. 이럴 때 무력감을 느낀다. 아픈 것과 다르게 무력감은 무럭무럭 자라서 생각을 갉아먹고 뇌를 씹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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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말한, 맛없는 토마토가 많아서 어떻게든 먹어치워야 했다. 맛이라고는 1도 없는, 돌처럼 딱딱해서 생으로 도저히 먹을 수 없는 토마토를 잘라서 소고기와 전복과 간장 양념을 넣고 폴폴 삶았다. 그러면 토마토에서 나오는 채수로 잘 끓어올라 고기와 전복의 맛이 훨씬 좋아져서 토마토 스튜 같은 맛이 날 거라는 나의 생각은 순전히 착각이었다. 간장양념이 토마토에 배고, 토마토의 신 맛은 또 고기와 전복에 배여 이도저도 아닌 맛이지만 이도저도 아닌 맛이라 괜찮은 것 같았다.


이렇게 밑도 끝도 없는 음식을 만들어 먹은 이유는 토마토가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토마토를 가득 넣어서 스튜 비슷한 것을 먹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해줘’를 봤다. 아니 정우성은 장태산으로 그렇게 멋있더니, 여기서는 또 차진우로 사랑스럽다. 어쩜 이리도 잘 어울릴까. 멋있다 멋있어.


나는 ‘사랑한다고 말해줘’의 원작을 오래전에 봤다. 파릇파릇한 토키와 타카코가 배우 지망생으로 나온다. 토키와 타카코는 90년대 정말 말도 안 되게 예뻤다. 만화나 잡지에서 갓 튀어나온 것 같았다. 성월동화에서 장국영과의 모습도 영화지만 만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원작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95년 작품인데 2000년대 중반에 보면 모든 배경이나 의상이 촌스럽게 보였는데 요즘 다시 보면 그다지 촌스럽지 않다. 그 당시의 유행이 요즘에 다시 유행하고 있어서인지 토키와 타카코가 입은 옷들이 잘 어울린다. 무엇보다 건드리면 터질 것 같지만 작정하고 활짝 웃으면 모든 세계가 행복할 것만 같은 토키와 타카코의 모습이 몽글몽글하다.

행복하지 않은데 행복한 이야기다.

그렇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지만 덜 불행하지도 않아서 T들은 뭐야? 할지도 모르지만 F들은 그저 빠져 들어서 볼 수밖에 없는, 그래서 이 차가운 겨울에 한없이 마음을 데워줄 그런 이야기다.


원작에서

청각장애 화가로 나오는 에츠시의 연기가 너무 좋아서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말보다 인간의 손동작이 이토록 사랑스럽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느꼈다. 어딘가를 쳐다보는 멍한 표정과 보고 싶어 하는 눈빛, 그리고 몸짓 하나하나가 사랑을 말하는 예술이었다. 말은 말이 하는 것 같은데 수어는 온 마음을 다해서 자신을 표현했다. 그게 너무 아름답고 안타깝고 애처롭게 보였다.


마지막에 그림으로 완성될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정우성과 신현빈이 다시 한다. 원작에서 시간이 많이 흘러 팩스와 편지에서 휴대전화로, 각색도 많이 되었지만 제주도에서 펼쳐지는 첫 화에서 우수에 찬 차진우의 눈빛과 진우를 보며 활짝 웃는 정모은의 모습에서 다음이 궁금해졌다.


차진우와 정모은의 이야기 사운드트랙이 너무 좋다 https://youtu.be/9Ae7T-JJjx4?si=_KjdWu7be-JX0z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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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무 다이스키 하면 귀여움의 끝판왕 포뇨와 소스케가 당장 떠오른다. 소스케가 좋아하는 햄을 소리를 지르며 같이 좋아하는 포뇨. 포뇨는 인어일까, 금붕어일까, 오염 변이체일까. 포뇨를 보면서 늘 생각했다. 소스케와 포뇨의 관계는 사랑일까, 우정일까. 관심일까. 포뇨 속에는 멋진 대사가 있다. 소스케와 포뇨를 남겨두고 양로원으로 가는 리사는 소스케에게 말한다.


소스케, 우리 집은 폭풍 속의 등대야.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집 불빛으로 용기를 얻고 있어. 그러니까 누군가 지켜야 해. 신기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지금은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어. 그치만 알게 될 거야.”

소스케는 포뇨에게 아마 등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마지막에 소스케는 아무런 조건 없이 포뇨를 받아들인다. 물고기인 포뇨라도, 인어인 포뇨라도, 사람이 아닌 포뇨라도.


그 무엇이 됐건 간에 포뇨는 포뇨이기 때문에 소스케는 포뇨를 사랑할 것이라고 했다. 이 두 귀여움 존재들에게 사랑이라는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것 같다.


해무다이스키 하면 포뇨가 떠오르는데, 그것과는 다르게 포털 뉴스 기사 여러 꼭지에 느닷없이 햄을 비롯한 가공식품이 어쩌고 하는 기사가 떴다. 아무튼 몸에 너무 안 좋데. 자주 먹으면 큰일 난데. 그래서 여러 꼭지에서 다루었다. 가공식품은 사람들, 아니 현대인에게 어떤 식으로 안 좋은지 말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몸에 안 좋은 걸 경쟁하듯 엄청 만들어서 그로서리 가판대에 잔뜩 올리게 하고 맛있다고 연예인들이 나와 온갖 광고를 하면서 먹으면 안 좋으니 선택을 하는 건 너의 의지야,라고 하는 게 여하튼 마음에 들지 않는다.


햄 같은 이런 가공식품은 맛있기도 하지만 다른 식품보다 오래 보관할 수 있기 때문에 선물용으로 좋다. 들어온 선물을 몸에 안 좋으니 난 받을 수 없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를 읽어 보면 대충 지구가 멸망하고 먹을 것과 신발을 찾으러 다는 게 삶의 유일한 목적이 된 아버지와 아들이 나온다. 먹을 것이 극도로 부족하기 때문에 인간의 무리를 만나면 큰일 난다. 그럴 때 빨리 도망가려면 신발이 필요하다. 소설은 정말 재미있고 마음이 우~리 했다. (우리하다, 이거 사투린데 모르는 사람이 많겠지만) 두 사람은 끊임없이 먹을 것을 찾으러 다니는데 아버지와 아들에게 기쁨을 주는 건 무너진 건물에서 찾아낸 캔으로 된 콜라였다. 아들은 온통 불행인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달콤한 맛을 본다. 그렇게 욕을 들어 먹었던 콜라를 난생처음 먹어보는 아들에게 크나큰 기쁨이었다.


코맥 매카시도 올해 유월에 세상을 떠났다. 더 로드는 영화로도 재미있었다.


햄 같은 가공식품은 1인 가구에게는 꽤 요긴하고 필요한 식품이다. 보관을 오래 할 수 있고 간단하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어떤 영화에서 세상이 멸망한 지구에서 100년이 지난 햄통조림을 발견해서 따서 먹는 장면도 나오겠지. 햄은 그냥 먹어도, 아니 그냥 먹는 게 제일 맛있는 것 같다. 짭조름하면서 뜨거운 밥 위에 올려 먹으면 너무 맛있다. 하지만 보통 그렇게 잘 먹지 않는다. 이런 기사가 뜨기 전에도 햄이나 스팸, 소시지 같은 가공연육을 잘 먹지 않았을뿐더러 직접 사 먹어 본 적도 없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나는 날 때부터 좋지 못한 위를 달고 태어난 탓에 햄이나 스팸 같은 가공식품을 먹고 나면 어김없이 위가 소화장애를 일으켰다. 한 번에 50번 정도 씹으면 모를까. 그러나 그렇게 씹어 먹기란 전두광 얼굴에 똥을 던지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소화가 안 되면 괴롭다. 그저 더부룩하고 체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지럽고 모든 행동에 제약을 받는다. 위장장애가 그렇다.


그래서 가끔 이렇게 선물로 들어온 햄을 먹을 때에는 작정하고 약간 조리를 해야 한다. 일단 펄펄 끓는 물에 푹 삶는다. 잘 삶는다. 햄 따위는 부대찌개를 먹어보면 알겠지만 가열되면 맛이 좋아진다. 대충 삶아도 된다. 물을 버리고 난 후 한 번 구워서 먹으면 된다. 그리고 부들부들하기에 몇 번 씹지 않고 그대로 넘어갈 수 있으니 나물과 함께 먹으면 여러 번 씹을 수 있다.


간편한 가공식품을 먹을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를 만들어 놓고 이건 먹으면 안 된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좀 이상하다. 구조가 옳은 방향으로 바뀌는데 정말 오래 걸린다. 지금은 자동차 기름을 넣으러 가면 무연휘발유와 고급휘발유가 있다. 이 무연휘발유의 ‘연’은 무엇일까. 이 녀석이 햄 먹다가 도대체 무슨 이야길 하나 싶겠지만 – 여하튼, 연은 납을 말한다. 그러니까 무연휘발유는 연기가 없는 휘발유가 아니라 납이 없는 휘발유를 말한다.


기름의 옥탄가를 높이는데 납이 들어갔다. 그런데 그동안 기름에 들어간 납이 타들어 가면서 전부 공기로 나왔는데 이게 사람들이 흡입을 하게 되고 후에 큰 문제가 될 것이 뻔했다. 그렇게 휘발유가 국회를 통과해서 전부 무연휘발유로 바뀌는데 50년이 걸렸다고 했나? 아무튼 나쁜 구조가 올바르게 바뀌는데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린다. 그러나 망가지는 데는 금방 걸린다.


햄 같은 가공식품이 인간에게 썩 좋지 못한 식품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는 사회구조다. 맛있는 식품이라며 대대적인 광고로 대량으로 만들어서 풀어 넣고 너네가 알아서 사 먹어라, 선택은 너네의 몫이야.라고 하는 구조는 어떻게든 괴이하다. 종이빨대를 쓰네 마네 하면서 사람들 괴롭히지 말고 이런 직접적으로 와닿는 식품 같은 것에 좀 더 신경을 쏟아 줬으면. 그리고 바지 좀 어떻게 챙겨 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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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흐린 겨울의 날 오전에 거부할 수 없는 귤을 까먹으며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마당을 본다. 마당은 개념 없는 웅덩이다. 마당에 강아지가 앉아 있으면 그건 강아지의 집이 되고, 바람이 불어 마당의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이 깔리면 그건 그것대로의 세계가 된다. 그런 마당에 편지가 한 통 도착했다.


편지봉투에 보낸 사람은 없고 받는 사람의 이름에 나의 이름이 또박또박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편지봉투를 뜯어 편지를 보았다. 편지지에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곧 떠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저 안부였다. 특별한 것도 없고 못 잊은 사랑이라는 가슴 떨리는 말 따위도 없었다.

   

그저 그녀는 어느 날 가슴에 멍울이 잡혀 병원에 갔는데 암이 길어질 대로 깊어졌다고 했다. 받아들이기까지 2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는 말도 있었다. 담담하게 말하는 투로 적어 나갔다. 그녀는 아직도 내가 준 책을 들고 있다는 말도 했다. 내가 줄을 죽죽 그어가며 읽었던 책을. 그녀는 자신의 시간이 임박했으니 괜찮다면 편지를 한 통 부탁한다는 말을 하며 마쳤다.


그러나 나는 이 편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첫 째, 그녀와 내가 만난 건 십 년도 훨씬 전의 이야기다. 둘째, 우리는 삼일동안 만난 것이 고작이다. 삼 년도 아니고, 삼주도 아닌 딱 삼일을 같이 지냈을 뿐이다. 삼일이었다, 삼일. 삼일이라는 단어가 마치 학명도 없는 심해 바닥에 붙어사는 물고기의 이름처럼 느껴진다. 물론 그때 나는 그녀를 사랑했었다. 사람이 사랑에 그대로 빠진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녀의 작고 보드라운 손을 잡는 것이 좋았다. 그 작은 손바닥 안에 크나큰 세계가 들어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통해 그 세계로 들어갔다. 그 세계는 내가 보지 못하는 것들과 경험할 수 없었던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윌리 왕카 세계 못지않았다.


나는 삼일 내내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녀도 나의 손을 잡는 것을 좋아했다. 많은 얘기를 나눴지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은 없다. 기억의 줄을 잡고 잡아당기면 많은 이야기를 했다는 것. 그녀는 갓 생명을 부여받은 커피처럼 신선한 향이 나는 여자였다. 이른 새벽까지 술을 마셨지만 다음 날 그녀의 눈동자는 바이칼 호수처럼 맑고 투명했다. 그날 오전 맥도널드에 앉아서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발기하고 있었다. 그때 그런 나 자신을 창피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맑은 그녀를 보면서 발기 따위나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발기는 나의 의지와는 무관했다. 마치 반사 신경이 교신을 통하는 무선통신처럼 그쪽으로 온 신경을 바짝 쏟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커피 잔을 사이에 두고 박정대 시인의 슬라브식 시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역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기억이 없다. 그저 슬라브식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는 기억만 있다. 기억이란 늘 제멋대로다. 기억이란 언제나 그렇다. 편지를 받고 떠올린 그녀에 대한 기억은 바람 같은 여자가 그녀라는 것이다. 바람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불어오는지도 모르게 와서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옷을 더욱더 여미게 했다. 그리고 왔을 때처럼 소리소문 없이 가버린다. 바람 같은 여자인 그녀를 한 순간에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건강한 여자였다. 아름다웠고 늘씬했다. 그녀의 모습에서 아픔의 냄새 따위는 나지 않았다. 찬란한 빛이 잠시 내려와 그녀를 빚어 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삼일이 지난 후 그녀는 다시 올게라고 떠난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다 다음 해인가, 그녀가 결혼했다는 소식이 마지막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막연하지만 행복하게만 지낼 줄 알았던 그녀가 침묵의 시간으로 들어가야 할 때라고 편지지에서 말하고 있다. 그녀는 편지에 우리가 손을 잡고 해변에 앉아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본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녀가 보낸 편지는 그녀의 남편이 나에게 부쳤을 것이다. 편지지 글씨체와 편지봉투의 글씨체가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어쩌면 나를 증오할지도 모른다. 동시에 그녀의 아내를 몹시 사랑하여서 그녀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하는 자신의 아내를. 내가 그녀의 남편이라면 나는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고작 삼일 만난 남자에게, 그것도 십 년도 훨씬 이전에 만남 남자에게 편지를 써 보내야 한다니. 아내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남편은 그런 아내를 미워할 수만은 없지만 나는 미워하고 증오할 수 있다. 나는 남편의 고독을 이해한다.


그녀는 밝고 건강하고 아름다웠지만 표백해 놓은 마당 같은 얼굴을 할 때가 있었다. 그녀는 고독했던 것이다. 그녀는 분명 나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무관하게 그녀는 고독했던 것이다. 그 고독은 나로 하여금 사라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나의 가슴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그녀의 고독을 달래줄 수는 없었다. 그때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사실과 본질이 같다고만 생각했다. 본질은 사실에서 다른 경우가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바보였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상실이 몸과 마음에 내려와 있었다. 어쩌면 삼일 동안 나로 하여금 그녀 자신의 상실을 덜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깊어지는 상실을 내가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그녀는 나에게 상처 주기 싫어 그대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다. 상실의 시대는 이름만 다르고, 표정만 바뀌었지 언제나 우리 옆에 머물러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11월이었다. 해운대의 물결은 투정 부릴 수 없을 정도로 햇빛을 튕겨 내고 있어서 눈부셨다. 그녀가 그 앞에 서 있으니 현실감은 떨어졌다. 그녀 역시 햇살처럼 빛났지만 그 빛에 내가 다가갈 수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그저 바라보는 것뿐이다. 그뿐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행복했지만 동시에 불안이 거대하게 밀려들었다. 마치 돈이 많아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불안에 떠는 것과 비슷했다. 실존적 불안에 가까웠다. 이데아적 불안은 아니었다. 한 번에 사용하기에는 나에게 큰돈인 백만 원이 손에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졌다. 나에게 들어온 돈은 늘 그렇게 사라진다. 그래서 늘 가난하다. 이런 가난은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던지면 돌아오는 부메랑과 같은 것이다. 그녀의 웃음만 보고 싶었지만 삶이라는 것은 언제나 바늘을 대동하고 우리의 연약한 피부를 찌르기 마련이다.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은 행복했다. 행복할수록 불안의 짐짝이 붙어 있는 것처럼 불행했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 그녀는 텅 빈 동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그녀의 잔상만 남아서 무형태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빛처럼 손에 잡히지도 않고 그저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녀가 나에게 온 삼일 동안, 잠깐 있으면서 우리는 상실의 냄새를 안 것이다.


그녀는 내가 있는 모든 주위에 존재했다. 사물에, 노래에, 시에, 나의 주위 모든 것에 그녀가 존재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나는 그녀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늘 없는 존재였다. 그녀의 이름은 말하지 않기로 한다. 그녀의 최종 목적은 이름의 거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믿고 싶었다. 그녀의 이름에 그녀가 당도하고 나면 그 이후에는 아마도 더 이상 상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잘 알아서 척척 헤쳐나가리라. 그녀가 좋아하는 시의 세계에서, 겨울의 조각케이크의 세계에서 잘 헤쳐나가리라.


그녀는 십 년 전에 삼 일간의 만남을 뒤로하고 사라졌다. 그녀는 지금 그녀가 있는 그 자리에서 그녀의 모습으로 잘 살아왔을 것이다. 나는 나대로 내가 있는 이곳에서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불안하기는 해도, 불안을 잔뜩 끌어안고 지내고 있지만 그 불안의 덩어리가 대단히 커지지 않고 고만고만한 덩어리를 유지하며 지내고 있었다. 매일 불안하지만 죽을 때까지 껴안고 가야 할 관념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문득 불안해야 하는데 불안하지 않으면 왜 불안하지 않지? 하며 불안했다. 그런데 지금은 도대체 왜 덜 불안하지. 이대로 나는 괜찮을까.


나에게 도착한 그녀의 편지는 덜 불안하고, 더 불행한 나의 삶을, 그런 나의 삶에 파동을 주었다. 그렇게 강한 파동은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파동의 진폭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한다. 나는 그것을 감지하고 있다. 편지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존재를 증명했다. 서랍에 넣어 두었는데 책상 밖으로 나와 있었다. 항상 편지를 보관하는 통에 넣어두었는데 컴퓨터 옆에 있기도 했다.


한 사람이 사라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녀는 나에게서 한 번 사라졌다. 사라졌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다. 지금 그녀는 이제 온전히 사라지려고 한다. 그녀는 나에게서 사라졌을 뿐이다. 세상에서 사라지진 않았다. 그녀는 나에게 그 본질을 증명하려고 편지를 보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그녀에게 온 편지를 서른 시간 만에 태우고 말았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나의 편지보다 그녀의 곁에 있어줄 수 있는 그녀의 남편이다.


가끔씩 생각하고 있었다. 시간이 훌쩍 지나 모습이 변한 나에게 그녀가 안부를 묻게 된다면, 그저 '잘 지내'라고 대답하겠다고. 비록 잘 지내 그 뒤에는 복잡하고 시끄러운 일들이 있겠지만 그녀에게는 잘 지낸다고 그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사랑이라는 거 너무 모호하고 손으로 잡히지 않아서 다시는 이런 사랑하지 않겠다 맹서를 하더라도 그녀를 다시 보게 된다면 무모한 나방처럼 불 속으로 뛰어들게 뻔하다.


이륙과 착륙이 있는 가장 공허한 느낌들, 술에 매달리는 실망한 표정의 사람들 너머로 바닥에서 부서진 벌레들처럼 실망하고 배회하는 이곳, 껍질은 박살 나고, 체액이 흐르고 날개를 꺾이고, 다리는 어디 가고 없는 벌레들을 보며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날개가 돋아날 거라고 믿으며 라디오 헤드의 렛 다운을 좋아했던 그녀와 다시 한번 바닷가에 앉아 렛 다운을 듣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설령 기회가 온다고 해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너는, 너는 네가 어디 있는지 알 거야, 땅이 무너져도 다시 떠올라서 튀어 오를 거야.

 



눈물 나게 좋아하는 곡, 라디오 헤드의 렛 다운 https://youtu.be/HMrIRpWMaoU?si=QQoDzrBH5u200Dq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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