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하루가 지나간다


하루가 오전 6시의 목욕탕처럼 고요하고 그림처럼 지나간다. 조용한 그림 속에서 나는 주인공은 아니지만 배경으로 한 부분으로라도 차지하고 있을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반짝이는 햇살 때문에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영하 10도 가까이 되는 날이다. 너무 차가운 공기 때문에 사람들도 드문드문 지나다니고 인파라는 말은 정말 오래 전의 말처럼 되어 버렸다. 이 고요를 깨는 건 라디오의 디제이들뿐이다. 일요일이 이토록 고요하게 흘러도 될까.


코로나는 사람들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 놓았다. 이동이 없어 고요하면 그만큼 코로나에서 조금 떨어져 안전망에 들어 있다는 기분이 들지만 생계의 위협 때문에 불안하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북적이면 생활은 괜찮으나 코로나와 조금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안전망에서 벗어났다는 불안이 든다. 사람이 오지 않아도 생계가 불안하고, 사람들이 많이 와서 혹시 코로나가 거쳐 갔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에 따른 절차를 따라야 해서 또 불안하다. 코로나는 사람들을 이래도 불안하고 저래도 불안하게 만들었다.


코로나가 덮친 이후 사람들의 유튜브 활동은 적극적으로 활발해졌다. 사람들과 대면하지 않고도 유튜브 영상만으로도 수익을 창출할 수 있으니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유튜브 영상을 제작하고 있다. 분명 좋은 패러다임이지만 또 단점은 확실하게 드러나고 그 단점은 점점 구멍이 커져간다. 유명 비제이와 배구선수가 악플을 감당하지 못해 극단적 선택을 했고 그에 따른 방송으로 또 다른 유튜버들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사람들은 대선 후보자들의 토론도 티브이보다는 유튜브로 시청하는 것을 선호한다. 실시간으로 직접적 참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달아 놓은 댓글은 남아서 기록이 된다.


코로나 시기와 맞물려 폭발적으로 늘어난 유튜브 영상을 보면 지금은 대비 구조가 확실한 사람들이 생겼다. 정확하게 동전의 양면처럼 확고한 대립구조를 이루고 이 대립은 거의 폭력 수준이다.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디카프리오의 ‘돈 룩 업’을 보면 미국 사회를 병맛으로 꼬집는데 엄청난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대립의 구조가 확실해지면 말도 안 되는 병맛 내지는 거의 폭력 수준이 되어야 사람들이 좋아하고 달려든다. 티브이 예능 프로그램을 봐도 그렇게 패러다임이 흘러간다. 그저 모여서 하는 이야기를 관찰 예능이라는 타이틀로 방송을 할 뿐이다. 그 속에는 모여있는 사람 외에 없는 누군가를 향한 이야기에 모두가 재미있어한다. 관찰 예능이지만 그 마저도 대본으로 짜고 치는 방송으로 전락을 하고 말았다. 드라마도 욕을 하면서도 보는 막장 드라마가 시청률이 높다. 곧 수익이 이루어지는 구조가 그렇다는 말이다.


국가의 큰 행사인 대선이 코앞이라 대립 구조는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고학력자들이 가득한 정치인들도 초등학생들처럼 싸운다. 도대체 이게 뭐지? 같은 수준으로 상대방을 비난하고 헐뜯는데 서류를 만들어 발표를 한다. 어쩌면 초등학생들보다 못한 수준으로 상대방을 비방한다. 이렇게 되면 메신저보다는 메시지에 사람들은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게 바로 대중 심리를 조종하는 광고 마케팅의 천재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방법이다.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그럴 것이다를 정말 그렇다로 만들어버린 마케팅의 천재였다. 괴벨스의 스승이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조카이기도 하다. 그가 만들어 놓은 마케팅은 아직도 전 세계에 널리 퍼져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다. 마치 불변처럼 절대 바뀌지 않고 있다. 그에 관한 책을 들여다보는 건 소설만큼 재미있다.


이런 일들이 코로나 이후 더 심해졌다. 뉴스를 장식하는 기가 막히는 일들이 매일 터지고 있다. 편의점에서 10시 이후 음식물을 못 먹게 하니 아르바이트에게 음식을 던진다던가, 손소독제를 시럽으로 잘못 알고 커피에 넣었다가 직원과 싸움을 했다던가. 이런 일들은 명확하게 누가 잘못했는지 나오지만 시간이 하루만 지나면 의견이 반반으로 갈리며 대립구조를 이룬다. 유튜브에서 누군가가 이런 사건을 다루면 그 밑에 사람들은 댓글을 활발히 단다. 그리고 의견이 갈린다. 어딘가에 분노를 표출하고 싶은 울분을 댓글을 통해 욕으로 푼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빌미를 제공하면 그 사람을 걸레가 될 때까지 공격을 한다. 대중은 폭주기관차가 된다. 어딘가, 어느 지점에서 멈춰야 하는데 폭주기관차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 욕받이가 무릎을 꿇고 잘못을 인정해도 멈출 수가 없다.


이런 복잡한 구조의 세계인데 눈으로 보이는 하루는 너무나 고요하고 조용하게 흘러간다. 그것처럼 나의 몸도 조금씩 조용하게 늙어간다. 어느 날 보니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많이 나면 그것대로 괜찮지만 귀 옆에 한 가닥씩 나는 게 보기 싫다. 뽑고 나면 일주일 정도 지나면 그 자리에 또 하나가 보인다. 시간도 1초씩 조용하게 흘러간다. 그러나 1년은 금방 지나가 버린다. 어느새 한 바퀴 돌아서 자동차보험을 다시 계약을 해야 한다.


나의 문제점을 말해보자. 사람들에게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라는 말을 근래에 한다. 참으로 무난한 말이다. 행복하세요, 만큼 안전한 말이 없다. 하지만 매일 행복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삶의 목표를 행복으로 두고 있다. 매일 행복할 수 없는데 그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나는 날 수 없지만 가끔 어떤 장치를 통해 가끔 하늘을 날기에 하늘을 나는 것이 목표인 것과 비슷할까. 어떻든 행복하자고 우리는 우리에게 늘 말한다. 그게 잘 못된 것은 아니지만 옳은 것인가, 하는 문제에 들어가면 역시 제대로 말을 할 수는 없다. 행복은 순간이며 금방 지나가버리기 때문에 행복과 행복 그 사이를 좁히려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하고 노력 속에는 고통과 아픔, 심지어는 불행이 도사리고 있다. 나는 꼭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게 오래되었고 내 주위는 나를 그런 인간으로 알고 있고 받아들이고 있다. 행복을 좇다 보면 지친다. 일단 한 번 지치고 나면 다시 일어나서 영차 하기가 쉽지 않다. 행복하기보다 덜 불행하기를 바라며 매일 덜 불행하다면 그게 행복에 맞먹는 기쁨이라 여기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소소한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 퇴근길에 포장해온 통닭 한 마리에 가족들이 행복해하고, 오전에 한 잔의 커피에 소확행을 즐기게 되었다.


근래 이전에는, 한 때는 사람들에게 덜 불행한 하루가 되세요, 했는데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약 짓는 약사 시인이 있는데 그녀만 덜 불행한 것에 크게 공감을 해 줄 뿐이었다. 행복은 인간에게 끔찍한 것일지도 모른다. 찰나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나 이외의 사람들을 괴롭히고 불행하게 만들기도 한다. 모두가 행복할 수 없는데 우리는 모두 행복하세요, 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뻔 한 얘기지만 누군가 행복하려면 누군가는 지하에서 햇빛도 못 받으며 열심히 페달을 밟아야 한다.


우리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빨리 잊는다. 에르메스를 구입하거나, 새 차를 뽑거나, 집을 계약했을 때의 그 행복감이 지금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망각을 한다. 이 망각 때문에 우리가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다. 사고로 크게 다치거나 병에 걸려 심하게 아팠던 경험이 있는 사람은 다행히도 다쳤을 때 죽을 것만 같은 그 아픔은 이미 다 잊었다. 아픔 때문에 따라오는 힘들었던 기억은 있으나 아픔 그 자체는 기억하지 못한다. 만약 죽을 것만 같았던 아픔을 기억한다면 인간은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조물주가 인간은 참 잘 빚었다. 신이 있다면 참으로 인간을 기가 막히게 프로그래밍했다. 행복이라는 순간의 감정도 시간이 지나 일상이 되면 잊어버린다. 행복한 가정은 그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가족의 누군가가 죽을 만큼 힘을 내고 있다는 것도 우리는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렇게 조용한 일요일이 고요하게 흘러간다. 어딘가에서는 포탄이 터지고 누군가는 울부짖으며 죽어갈지라도 지금 오늘은 이렇게도 고요하게 흘러간다. 라디오에서 사베지 가든의 노래가 나온다. 고요해서 따뜻하지만 슬프고 차가운 하루이기도 하다. 그런 하루 속에 각자 각각의 장소에서 보내고 있다.

메타버스 세계에서 사람들의 대립을 볼 수 있다면 현실에서는 보색의 대비를 볼 수 있다. 해넘이 직전 추위를 무릅쓰고 조깅을 하러 나오면 밤하늘과 낮의 하늘이 만나 그러데이션을 만드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다음 날에도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곧 어둠으로 바뀔 것이다. 냉기가 얼굴을 할퀴지만 이렇게 잠시 서서 하늘의 얼굴색이 바뀌는 걸 본다. 저기 아파트에 살면 매일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겠지. 하지만 막상 눈앞에 있으면 소홀하게 된다.

하루는 바닷가를 달렸다. 정말 추웠는데 그래서 그런지 해안에 붙어 있는 술집과 카페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밖에는 사타구니가 얼마큼 춥지만 카페 안에는 따뜻해서 겉옷을 벗고 모두가 삼삼오오 테이블에 앉아 소주와 맥주를 마시고 있다. 행복하게 보였다. 바람이 심하면 바닷가는 정말 춥다. 하지만 9시까지 열심히 마셔야겠지.

이는 하천에 반영된 불빛의 모습이다. 날이 너무 차고 하천이 너무 고요해서 그대로 멎은 것 같아서인지 반영된 불빛이 마치 하천 밑에서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보통날이 추워서 오리들 때문에 물결이 있지만 이날은 조깅을 하다 보니 정말 고요했다. 날이 생각 이상으로 차가우면 사람도 동물도 대체로 움직임이 없어서 세상은 정말 멎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제 곧 날이 풀리겠지.


기묘하지만 이 구도에서 사진을 담으면 이렇게 누군가 가로등 밑을 지나가고 저기 아파트 단지 위에 뜬 달과 함께 꼭 그림처럼 보인다. 그리고 늘 고요하다. 조깅 코스지만 여기서 이 구도로 사진을 담으면 사람도 차도 아파트도 하늘도 달도 별도 고요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올해 가장 추운 날 조깅을 하니 평소보다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늘 나오는 사람들은 늘 와서 자전거를 타거나 운동을 한다. 가장 추운 날이지만 바람이 없어서 또 달리다 보면 등에서 땀이 난다. 서쪽을 향해 달리면 해가 지면서 오렌지빛이 하늘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며 죽 달릴 수 있다.

정말 아름답다. 아름다운 색감이다. 화려하지 않은 보색 대비가 주는 이 멋진 컬러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풍경에 그림이라도 그리듯 오리 가족이 선을 그으며 지나간다. 평화롭고 고요하다. 바쁜 세상의 일과는 무관하게 이토록 고요하고 조용한 하루가 흘러간다. 우리도 그에 맞춰서 조금씩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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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축구를 보면 인간의 진화가 얼마나 진일보했는지 알 수 있다. 그건 정말 대단하다고 새삼 느낀다. 발은 손에 비해 진화가 거의 되지 않았다. 손이라는 것은 어찌나 정확하고 정교한지 농구 같은 경우 공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바구니에 멀리서 던져도 획획 들어간다. 심지어 감각적으로 버저비터도 성공시킨다.


발이라는 건 인간의 신체를 지탱해주는 대신 손처럼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한다. 파워는 손의 두 배가 넘는 대신 정확도는 늘 뒤처졌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간은 발의 움직임을 진화시켰다. 축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대단한 진화다. 공을 가지고 드리블을 하는 모습에 우리는 그만 모든 신경을 빼앗겨 버리고 만다. 심지어는 예능에서 발로 공을 차서 농구 골대에도 넣어 버린다. 물론 몇 번의 실수를 거쳤겠지만 이건 실로 대단한 진화다.


그러는 동안 현실에서도 인간의 상상력이 실현 가능해졌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70시간 이상 비행에 성공했고, 영화감독인 제임스 카메룬이 과학자들보다 먼저 잠수정 챌린저호를 타고 마리아나 해구로 내려가 바다 저 깊은 곳을 탐사했다. 그 깊이가 무려 3천 미터가 넘는다고 한다. 생명체가 압력 때문에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견해를 무시하듯 수많은 생명체가 그 깊은 바다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로봇이 서빙을 보고, 원격으로 재택 치료가 가능해졌고, 폰으로 티브이를 보며 주식을 하고 영화예매도 가능해졌다. 전기차가 길거리를 다니고, 편의점에서 명품 골프채나 스마트 워치, 고급 기기를 단 기간 빌려서 사용을 할 수 있다. 상상은 상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생활에 적용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용하는 키보드는 처음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비슷한 모습이다. 상상력의 접근이 허락지 않고 있다. 키보드를 제외한 컴퓨터와 컴퓨터 주변기기들은 모두 진화를 했다. 어째서 그럴까. 분명 키보드를 지금보다 더 효율적이고 간편하게 타이핑이 가능하게 진화가 이루어져야 하지만 키보드는 디자인이나 키감이 발전되고 달라졌을 뿐, 진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한 손 키보드가 있고, 인체 공학적으로 타원형으로 나온 키보드가 있지만 게임용이거나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릴 때 단축키로 사용하는 목적이다.


기묘하지만 키보드의 진화에 상상력으로 접근하려면 전혀 가 닿지 않는다. 현재 사용하는 키보드의 스타일이 자판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아직은 최고이며 제일이라 다른 방법적인 상상의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애니메이션이나 미래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키보드 역시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매트릭스 속 모든 부분은 지금과 다르지만 키보드는 지금과 같다. 만약 한 손으로 지금처럼 이렇게 활자의 입력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는 트랙패드 같은 곳에 손가락으로 한글을 슬슬 쓰면 화면에 그 글자가 타이핑이 되어도 괜찮을 것 같지만 이런 상상은 곧 허공으로 사라지고 만다.

마이크로소프트 Surface Ergonomic Keyboard. 사진 출처: 마이크로소프트 공식 홈페이지



내가 살아있는 동안 진화된 키보드를 볼 수 있을까. 지금 같은 키보드로도 괜찮지 않아?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10년 전의 자동차로도 괜찮고, 냉장고, 폰도 괜찮았고 지금도 괜찮다. 오히려 소설은 10년 전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내면에 진화하기를 바라는 신경조직이 있는지도 모른다. 좀비도 신나게 진화했다.


인간은 시간과 함께 끊임없이 진화해 왔다. 이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키보드는 탄생된 그 모습 그대로다. 어떻게 봐도 아이러니다. 꼭 바닥에 놓지 않고도 자판을 두드릴 수 있는 키보드가 나와야 하는데 전혀 키보드의 진화에 대한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패드나 폰으로 들어온 키보드는 음성지원으로 타이핑이 가능해졌다. 조깅을 하다가 뭔가가 떠올라서 메모장을 열어 음성으로 메모를 종종 하는데 발음이 똥 멍청이 같아도 거의 정확하게 활자를 기입해준다. 그렇지만 키보드 진화에 대한 갈증은 있다. 분명 나만 그렇지는 않겠지. 조이스틱이나 권총 손잡이처럼 간편하게 한 손으로 잡고 몇 개 되지 않는 자판을 눌러 한글이 입력이 된다면 꽤나 진화된 타이핑 방법이 될 터이다. 하지만 접근이 불가능하다. 누군가는 이런 키보드의 갈증을 안고 패러다임 변화의 연구를 하고 있을 거라 믿어본다.


사진 출처: 마이크로소프트 공식 홈페이지



사진 출처: Jestik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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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개는 집에서도 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 밖에서까지 찌개를 사 먹어야 해,라고 생각하지만 사 먹는 찌개는 맛있다. 찌개는 어려운 음식이 아니기 때문에 식당 찌개는 집에서 한 찌개보다 이상하지만 훨씬 맛있다. 집 밖에서 먹는 찌개는 뭐든 맛있지만 나 같은 경우는 특히 구치소 찌개는 아주 맛있었다. 구치소에서 군 생활을 한 나는 구치소에서 점심에 찌개가 나오면 꼭 한 그릇씩 더 먹었다. 한 그릇이라고 해봐야 밥그릇보다 약간 크다. 따지고 보면 구치소에서 나오는 음식은 전부 맛있었다. 추어탕도 미꾸리가 아닌 고등어를 갈아서 만든 추어탕인데 아주 맛있었고, 복날에는 갈비탕이나 반계탕이 나오는데 역시 맛이 좋았다. 모든 반찬과 음식을 형을 살고 있는 여자 기결수들이 하는데 집밥처럼 맛있었다.  


식사 양의 제한이 없기 때문에 먹고 싶으면 배부를 때까지 먹으면 된다. 뷔페식이며 일주일 동안 매일 아침, 점심, 저녁이 같은 음식으로 나온 적이 없다. 그런 것을 보면 요즘에 군인들의 부실한 식사가 인터넷에 올라오면 안타깝고 이해할 수가 없다. 오래전에도 이렇게나 우리는 군생활을 하면서 잘 먹었는데. 또 구치소에서 나오는 찌개에는 고기가 많이 들어가 있다. 구치소 군생활은 법무부 소속이고 육군 내지는 공군이나 해군은 국방부 소속인데 어떻든, 어디든지 비리는 있지만 예전부터 국방부의 비리가 가장 심하다, 라는 말이 요즘 인터넷의 군인들 식사를 보면 그럴싸하게 들린다.

 

찌개는 한국인의 소울푸드다. 냉면처럼 어딘가에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도 아니며 집집마다 맛이 다른 김치나 깍두기가 있으면 그것을 넣어서 끓이면 된다. 거기에 고기, 채소, 두부 따위를 넣고 된장이나 간장 고추장도 같이 넣어서 끓이면 된다. 냉장고의 반찬을 처리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이 찌개를 끓이는 것이다. 자취방에 모여 소주 한 잔 돌리기에 찌개만 한 것도 없다. 찌개에 치약을 넣어서 끓이지 않는 이상 찌개는 뭘 어떻게 해도 맛이 좋다. 한 번에 다 먹지 않고 남으면 다음 날에 다시 거기에 비계가 붙은 돼지고기를 넣고 각종 채소와 마늘과 이것저것 넣어서 끓이면 기묘하지만 그 전날 먹었던 것보다 더 맛있다. 그리고 탕반 문화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찌개에 밥을 말아먹었다.


살이 찌니 어쩌니 해도 추운 겨울날 뜨거운 찌개에 밥을 말아 후후 불어 먹고 나면 몸도 마음도 따뜻해졌다. 그래서 티브이 화면 속에서 찌개가 가장 맛있게 보이는 영상은 추운 겨울날 먼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는 어선에서 찌개를 팔팔 끓여 둘러앉아 후루룩 먹는 장면이다. 거기에는 삶이 있다. 거기의 찌개는 별미가 아니라 생존이다. 살아남기 위해 추위를 이겨가며 후후 불어 찌개에 밥을 말아서 후루룩 먹는다. 나는 찌개는 안 먹어, 맛이 없어,라고 말하는 어른들에게는 아마도 젊은 시절 찌개가 생존에 바짝 붙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찌개는 한국인에게는 소울 푸드다.


캠핑을 가면 마지막은 찌개를 먹었다. 물놀이 후 식은 몸을 데워줄 만한 좋은 음식이 찌개다. 반쯤 건져 먹은 후에 라면을 넣어서 다시 폴폴 끓인다. 찌개는 다시 한번 태어난다. 우리는 모여들어 푸릅푸릅 찌개를 먹었다. 찌개를 먹으면서도 온통 끓인 찌개 얘기뿐이다. 그 얘기를 채우는 건 맛있다는 말이 전부다.

 

어린 시절 연탄불에 팔이 들어가 한쪽 팔이 쪼그라든 김 씨 아저씨를 만난 건 구치소의 취장 계호를 맡으면서였다. 492번이었지만 취장에 같이 있을 땐 김 씨 아저씨라 불렀다. 김 씨 아저씨는 한쪽 손이 어린아이처럼 작고 쪼그라들었지만 그 손으로 취장에 들어온 각종 음식 재료를 손질하고 잘도 썰었다. 보고 있으면 꼭 마법을 부리는 것만 같았다. 김 씨 아저씨는 미결수만 있는 구치소에서 형을 살고 있는 기결수였다. 사람 좋아 보이는 김 씨 아저씨는 사기를 당해 그만 들어오게 되었다. 사기를 당해서 사기를 저질렀다. 자신도 모르게 거기에 가담하게 되었다. 취장은 새벽 5시 전에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모두가 잠든 시간 취장 근무자들은 굽은 등을 이끌고 겨울의 차가운 취장으로 온다. 냉기가 가득한 취장에 온기를 불어넣는 사람은 김 씨 아저씨와 음식을 만드는 재소자들이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 몸이 땀으로 전부 젖는다.


취장은 재소자들이 먹을 음식을 만드는 곳으로 일종의 공장이다. 음식 공장의 가동이 김 씨 아저씨와 취장 근무자들에 의해서 열심히 돌아간다. 우리는 계호를 한다지만 사실 크게 두 눈을 뜨고 계호를 할 것이 없다. 의자에 앉아 있다 보면 잠이 솔솔 오기에 팔짱을 끼고 그만 스르륵 잠이 든다. 그동안 취장, 공장은 열심히 돌아간다. 스팀기로 돌아가는 대형 찜통에서 쌀이 밥이 되고, 각종 나물 요리와 국이 만들어진다. 김 씨 아저씨는 티브이에 나온 스라소니 역의 그 배우를 닮았다. 말 수가 적었지만 잘 웃고 같이 일하는 취장의 근무자들을 챙겼다. 구치소의 재소자들 아침식사는 8시에 일괄 시작된다. 그전에 음식이 전부 만들어지면 샘플을 담아서 보안과장에게 가서 검시를 맡는다.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면 각 사방으로 음식들이 올라간다.


드르르륵 음식을 실은 거대한 바퀴가 굴러간다. 보안과장에게 올라갈 때 김 씨 아저씨는 졸고 있는 나를 깨운다. 우리는 일어나서 김 씨 아저씨가 따로 만든 찌개를 같이 앉아서 먹는다. 오전을 알리는 명멸하는 빛이 취장에 난 작은 창으로 비치고 안개와 같은 수증기가 취장에 한가득 피어난다. 우리는 그 사이에 식탁을 마련해서 둘러앉아 찌개를 먹는다. 김 씨 아저씨는 연신 맛있다는 소리에 수줍어하며 고기가 많은 부분을 우리 그릇에 덜어준다. 김 씨 아저씨의 앞주머니에는 딸의 사진이 들어있다. 딸은 이제 초등학생으로 아주 귀엽게 생겼다. 작고 쪼그라든 손으로 딸의 사진을 쥐고 나갈 날 만 기다리는 김 씨 아저씨가 만든 찌개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찌개였다. 겨울의 구치소 취장 한 구석 테이블을 마련해 둘러앉아 먹었던, 한 손이 쪼그라든 김 씨 아저씨의 찌개.

 

요즘은 찌개가 조금 천대받고 있다. 살이 찌는 주범이고 건강에 좋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든 소울 푸드는 건강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가끔씩 맛있게 먹는 찌개는 맛과 추억을 다 머금고 있다. 누구나 찌개에 관한 추억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추억 속에는 분명 눈물이 나는 기억도 있고 행복한 기억도 있을 것이다. 이상하지만 불편한 사람과는 찌개를 먹지 않는다. 찌개를 빙 둘러앉아서 같이 먹는 사이라면 분명 많은 것을 나눠도 좋을 관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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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2-07 1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점심시간.부근에.읽으니...찌개맛집 검색하고싶어지네여

교관 2022-02-08 10:37   좋아요 0 | URL
찌개는 언제나 맛있죠 ㅎㅎ

2022-02-08 0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교관 2022-02-08 10:38   좋아요 0 | URL
교도대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ㅎㅎ 저도 그때가 생각이 납니다 ㅎㅎ
 

넷플릭스의 ‘지금 우리 학교는’이 절찬리 상영 중이다. 나는 7회 정도까지 봤다. 학교가 아주 엉망진창인데 이 엉망진창이 학교 밖으로 퍼져 나가고 나비의 날갯짓이 폭풍을 몰고 온다. 그 와중에 이유미가 연기한 이나연은 최고의 빌런이다. 악역을 마치 그렇게 태어난 사람처럼 해버린다면 그건 연기를 잘하는 거겠지. 오징어 게임에서도 히트를 날렸지만 어쩐지 이 영화는 박화영 1, 2에서 세진이의 모습이 좀 이어지는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이겠지.


곽부성과 기무라 타쿠야와 강남을 절묘하게 섞어 놓은 듯한 잘생긴 청년은 누구인가. 이런 시원시원한 마스크는 꽤나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장동건 이후에는 영화판에서는 이렇게 조각 같은 외모는 피하려는 것 같은데, 이 시리즈가 전 세계 동시 방영이라 음, 그렇군, 하며 납득이 된다. 유치원 어린이 좀비들에게 좇기는 유튜버의 모습은 단비 같은 웃음을 준다. 수능에 대한 경멸적인 모습을 보이는 욕 잘하는 거친 미진도 극의 재미를 준다. 이렇게 욕을 듣기 좋게 기가 막히게 연기하면 최애 캐릭터가 된다. 특히 조삼모사(본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안다). 대수 역시 지옥 같은 학교 안에서 아이들과의 대화와 행동으로 보는 이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노래도 잘 부른다. 가수가 꿈인 대수가 직접 만들어 옥상에서 다 같이 부르는 노래 가사는 고등학생들의 마음을 잘 표현했다.


7화까지 보면서 관통하는 대사들이 몇 개 있었다.

“희망은 삶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고문이다.”

“그 절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다.”

“너, 너 먹고 싶어.”

“과학은 상상에서 시작해 미스터리로 끝난다. 퇴근길에 무당을 찾아갔다. 이거 하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한다.”

“우리를 구할 사람은 우리밖에 없어.”


몇 화 남지 않은 나머지가 긍금하다. 생각해보면 어쩌다가 좀비가 전 세계의 영화를 점령해버렸다. 왜, 어째서 그렇게 되었을까. 좀비 이전에는 뱀파이어가 있었는데, 섹시하고 하늘도 날아다니고 이빨도 뾰족해서 좀비보다는 덜 아프게 목덜미를 물어 피만 쪽쪽 뽑아 먹었는데, 그랬는데 어느 날 좀비가 한 두 마리 늘더니 순식간에 뱀파이어를 영화 속에서 몰아내 버렸다. 왜 그럴까.


사람들은 내일이 오는 게 싫어졌다. 휴대폰의 전화번호는 늘어나는데 막상 전화를 할 사람은 줄어들고, 학교 다닐 때 들었던 불안은 졸업하면 사라질 줄 알았는데 더 큰 불안이 뒤 따른다. 그래서 매일 이어지는 오늘이 잔인해졌다. 어제의 나는 어떻든 살아있고 하루를 정리할 필요도 없고 불안과도 이별을 하고 있다. 하지만 눈뜨면 잔인한 오늘이 시작되고 불안은 눈두덩처럼 불어나기만 했다. 사람들은 잔인하고 불안한 오늘보다 행복한 과거에서 살고 싶었다. 인간의 삶에 싫증난 사람들이 뱀파이어가 되기를 바라기 시작했다. 뱀파이어는 인간처럼 사고하며 아름답기까지 하며 무엇보다 영생한다. 공포의 최고에 있는 뱀파이어가 오면 도망가는 게 아니라 사람들은 인간의 삶에 지쳐 뱀파이어가 되길 바랐다.


그 괴리 사이를 뚫고 좀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좀비가 되면 모두가 똑같다. 뱀파이어처럼 사고하며 이리저리 재지 않는다. 부모고 자식이고 사랑하는 사람이고 뭐고 간에 전부 그저 하나의 먹이일 뿐이다. 뱀파이어는 하급, 상급 계급으로 나뉘지만 좀비는 그야말로 평등, 평등하다. 뱀파이어처럼 옷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씻지도 않고 잠도 안 자고 지치지도 않는다. 오로지 하나의 신념으로만 움직인다. 맥스 브룩스의 ‘세계 대전 Z’를 읽어 보면 전 세계에 좀비가 일어나고 20년이 지난 후의 각 국의 정치적, 경제적으로 대처한 방법에 대해서 서술해 놓았는데 거기에 좀비에 대해서 아주 현실적으로 접근해있다. 하나의 군인을 만들고 유지하려면 비용이 들지만 군인을 좀비로 대처하면 군복, 잠을 자야 하는 막사, 식사 같은 것이 전혀 필요가 없다. 비용이 절감된다. 좀비는 구덩이에 쥐가 들어가면 거기에 머리를 박고 3일 동안이나 쥐를 찾으려고 으르렁 거린다. 좀비는 그런 것이다. 오로지 하나의 신념! 그 하나로 움직일 뿐이다. 이 세계 대전 Z 속 전 세계에 좀비가 일어난 일을 영화로 만든 것이 ‘월드 워 Z’였다. 영화 속에서도 각국이 좀비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는지 잘 나온다. 좀비라는 매개를 통해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좀비라는 카테고리를 빼고 그 안에 재해를 넣으면 더 와닿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오늘 이 시기에 코로나 대신 좀비를 넣어도 각 나라에서 어떤 식으로 대처를 하며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 수 있다.


공포영화의 아이템으로 좀비는 최고인 것이다. 지금 우리 학교를 5편 정도까지 봤을 때는 정유정의 ‘28’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정유정의 소설을 통틀어 나는 ‘28’이 가장 좋았다. 개와 사람이 같이 걸려 버린 인수 공통 감염병으로 28일 동안 폐쇄된 도시 화양에서 일어나는 대재앙 같은 일. 정말 재미있었다. 개들과 인간의 사랑이 개들과 인간의 같은 감염병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절묘한 문체로 끌어당겼다. 지. 우. 학처럼 도시를 폐쇄하고 군이 투입되고. 하지만 6화가 지나고 7화가 지날수록 모든 효산시의 모든 사람들을 무증상 감염자로 지정을 해버린다.


재난 영화에서 영화의 태도는 늘 시스템과 절차를 문제 삼는다.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정부부처 관계자들이 책상에 앉아서 방법을 제시하고 시스템을 만드니 현실을 살아가는 일반국민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 현재 코로나 시기에 방역 대책을 매번 내놓는 정부와도 비슷하다. 전혀 다르지 않다. 지. 우. 학은 기가 막히게 정부를 꼬집고 있다. 대재앙이 불어닥치면 언제나 노인과 서민들이 맨 앞에서 그 감당을 해야 한다. 죽어나가도, 폐업을 해도, 부작용이 심해도, 후유증을 앓아도 그저 하나의 숫자로 기록될 뿐이다. 국가는 국민을 생각하지 않는다. 국가시스템은 늘 그렇게 작동하고 있다. 우리는 시스템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느냐 하는 것이 현재 시대의 숙제가 되었다. 지. 우. 학을 잘 벌려서 보면 그런 모습을 볼 있다. 그러고 보면 정유정의 28을 읽은 지가 아주 오래되었는데 아직 영화가 되지 않는 게 이상하다.


전 세계의 좀비 영화가 가지는 실수, 오점은 현대 시대의 좀비는 탱크나 총기나 화기에 이길 수가 없다. 그 이빨로 들이대도 철판을 물어뜯을 수가 없다. 실제로 현실에 좀비가 나타난다 해도 총이나 대포에 살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좀비물을 만드는 감독은 그 부분에 있어서 늘 고민을 하고 있다. 고민한 흔적이 엿보이는 좋은 좀비 영화가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못한 좀비 영화들이 대부분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설득력이 있는 게 ‘킹덤’ 시리즈다. 옛날에는 칼과 창으로 좀비를 막아내야 하니 설득이 된다. 그리고 이 시리즈다. 지. 우. 학의 시작은 학교다. 학교 역시 총과 칼보다는 책상과 대걸레 같은 것뿐이라 좀비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있다. 거기서 주인공들은 고립된다. 그리고 그 고립에서 누구도 구하러 오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고 충격을 받은 주인공들은 자신들을 구할 사람은 오직 자신들밖에 없다는 걸 안다.


잘 만든 좀비물은 좀비 그 자체에 중점을 두지 않고 좀비, 그 밖의 배경에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현실과 아주 밀접하다. 오직 하나의 신념으로만 움직이는 것들- 자연재해, 바이러스, 세균 같은 것들은 인간사회에서 떨어질 수 없는 것들이다. 지. 우. 학은 구멍이 보이고 단점도 보이지만 일단 좀비물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로서는 재미있다. 악질스러운 빌런과 나오고, 물렸으되 좀비가 되지 않은 빌런도 나오고, 학교까지 노트북을 찾아가려는 옹고집 형사도 나오고, 고구마 캐릭터도 있고, 어디서 봤던 장면도 있고, 웃음이 나오는 장면도 있다.


과학교사로 나온 김병철이 좀비가 되었을 때, 그 모습은 영화 28주 후의 돈 역으로 나온 로버트 칼라일이 좀비가 되었을 때의 모습과 흡사하다. 로버트 칼라일은 아무리 봐도 톰 요크와 닮았고. 영국인들은 꼭 그렇게 생긴 것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좀비 물이라 진짜 주인공들은 좀비들이다. 좀비 역할을 훌륭하게 해 낸 배우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짝짝짝.



까지가 1월 31일에 쓴 글인데, 지금은 다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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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눈과 귀와 몸으로 스치는 것들에 대해서 적어본다. 적기 전에 미리 호러블 하거나 낙관적이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의 일과 생활에 비관하지는 않지만 낙관하지도 않는다. 반드시 행복을 좇지도 않는다. 행복 노동자보다는 덜 불행하면 그만이다. 라는 게 언제나 나의 입장이다.


요즘은 속보라는 말에 무뎌졌다. 속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속보다. 속보가 매일 같이 뜨는, 요즘 같은 시기가 또 있었을까. 매일 기가 막히는 사건사고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오는 것에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많아졌다. 인터넷이 발달해서 그런 거잖아요!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근간의 매일같이 쏟아지는 속보는 5, 6년 전 그때에도 인터넷이나 와이파이가 발전해 있었지만 매일 속보가 터지지는 않았다. 이렇게 속보가 현관문 앞에 버려진 피자집 전단지처럼 보이는 건 요즘이라서 가능하지 싶다.


도대체 개를 왜 트럭에 매달아서 달리는 것이며 어째서 얼어붙은 호수에 묶어 두는지. 소시지에 낚싯바늘을 넣어서 공원에 뿌려 놓는지, 얼마나 비정상적인 인간이기에 이렇게 하는 걸까. 이런 인간들에게 법이라는 건 어째서 관대하기만 한 것일까.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법이 제대로 심판을 못하니까 슈퍼 빌런이 계속 나오는 것이다. 악질 범죄자들에게 법의 효력이라는 건 제대로 닿지 않는다. 나는 구치소에서 2년 동안 근무를 해서 잘 안다. 출소를 할 때 다음 주에 또 올게, 하며 나간 재소자는 어김없이 그때에 다시 들어온다. 마블의 미드 시리즈 중 루크 케이지를 보면 “언제 법이 우리 편에 선 적이 있어요?”라고 루크 케이지가 말한다. 하지만 우리 같은 일반인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러다 보니 이제 속보를 밥 먹다가 봐도 그저 광고처럼 보게 된다. 수잔 손탁의 책에 이런 이야기가 가득하다.


엘리베이터 안에 보통 층수 버튼이 문쪽에 있고, 또 벽면 쪽에도 층수 버튼이 있다. 내가 일하는 건물에 엘리베이터는 3기가 가동하는데 한 엘리베이터는 야외가 다 보이는 통유리라 한쪽에만 층수 버튼이 있다. 그런데 층수 버튼을 누르고 계속 그 앞에 바짝 붙어 있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걸까. 문제는 다른 층수를 누르려고 좀 비켜달래도 마치 이스터 석상처럼 그 앞에 꼭 붙어 있다. 참 알 수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파트 엘리베이터의 11층 버튼이 있는 자리에 늘 침이 말라 붙어 있었다. 매일 저녁에 거기에 침을 뱉는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주의, 경고를 해도 변함없이 가래를 뱉었다. 요즘 같은 시기에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그 아주머니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서 그 아주머니의 자식들이 사죄를 하고 어느 날부터는 그러지 않았는데 그게 한 6개월 정도 지속됐다.


이건 코로나 전의 이야긴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릴 때에는 안에 있는 사람이 먼저 내린 다음에 올라타는 게 보통 엘리베이터의 예절 같은 것이다. 하지만 문이 열리면 내리는 사람이 나오기 전에 후다닥 타는 사람들이 있다. 이게 한 두 명이면 그러려니 하는데, 일하는 건물 꼭대기층에 한 번은 다단계 회사가 들어왔던 적이 있었다. 문이 열리니까 우르르 타기에 저, 저 좀 내리고;; 까지 말했지만 그냥 삐, 소리가 날 때까지 타버린다. 할 수 없이 꼭대기까지 그대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


일하는 건물 같은 층에 가끔 이야기를 하는 사장님이 있는데 몹시 착하다. 사람들에게 싹싹하고, 삭삭하다가 맞는 말인가. 아무튼 좋은 사람인데 나에게 이런저런 공구가 많아서 자주 빌려 달라고 한다. 그래서 빌려주면 함흥차사다. 보통 일주일 정도 그냥 가지고 있다. 내가 사용할 일이 없어서 굳이 달라고 하지는 않는데 한 번 빌려 가면 바로 돌려주지 않는다. 특히 줄자 같은 경우는 꽤나 좋은 물건이라 이건 누구에게도 빌려주기 싫은데 빌려가서 쓰고 나면 자신의 책상 서랍 안에 넣어 버린다. 시간이 훌쩍 지나가서 달라고 하면 어떤 재스처나 소리도 없이 꺼내서 준다. 그게 아마도 그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스타일인 것 같다. 스타일은 좀체 바뀌지 않는다. 천성이나 성격은 후천적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스타일은 누군가 앞에서 나타나는 관념이라 쉽게 바뀔 수가 없다. 하지만 빌려간 물품을 쓰고는 바로 돌려주었으면.


조깅을 하다 보면 군데군데 산스장 같은 곳에서 몸을 푸는데, 공중화장실이 1분 정도만 걸어가면 닿는 저곳에 있는데 그냥 산스장 근처에서 소변을 보는 아버님'들'이 있다. 웃긴 건 이렇게 오줌을 갈겨 놓으면 여름이 되면 거기서 오줌 지린내가 심하게 난다. 폭염인 날에는 더없이 지독하다. 아이씨 욕이 정말.


오전에 커피를 투고하러 가는 길목에는 아주 좁은 골목을 하나 통과한다. 둘러가도 되지만 그 골목이 좋아서 내내 거기로 다니고 있다. 골목은 사람 3명이 지나가면 꽉 차는 그 정도. 그런데 오전 시간에 느닷없이 근처 휴대폰 대리점에서 직원들이 나와서 담배를 피우는 경우가 있다. 3명이서 이야기를 하며 담배를 피우고 나면 그 밑에 가래와 침이 홍수를 이룬다. 전자담배를 피우는데도 그렇게 가래와 침을 단전에서 끌어올려 뱉어야 한다니.


그래도 늘 복잡한 주차장에 비상식적으로 주차하는 인간은 아직 못 만났고, 층간소음 문제도 없고, 쓰레기를 내 앞에 버리는 인간도 없고, 빌려간 물건을 일단 다 받았고, 대기가 오염되고 있지만 방독면을 쓸 정도까지는 아니고, 오존층이 완전히 파괴되지도 않았고, 소음 때문에 모두가 보청기를 필요로 하지도 않고, 사람들의 신경이 곤두서서 총을 구입하여 쏴대지도 않고, 지하자원의 고갈은 좀 시간이 남아있다.

조깅을 하면서 매일 보는 풍경인데 작년 이맘때와 똑같고, 3년 전 이맘때와. 5년 전 이맘때와 똑같다. 변화가 없다. 늘 이 구도에 이런 모습이다. 하지만 매일 다르다. 매일 바람이 다르고 구름이 다르고 반영이 다르다. 색감이 다르고 듣는 노래가 다르다. 달리다가 중간에 스쾃을 하는데 할 때마다 다리가 끊어질 것 같다. 이 정도면 이제 괜찮지 않아?라고 할 법도 한데 할 때마다 다리가 끊어질 것 같고, 플랭크는 할 때마다 중력의 힘을 너무나 느낀다.

가로등과 가로등 밑을 지나치는 사람과 벤츠와 강건네 아파트 단지와 인공광원과 작은 자연광의 별빛이 만들어낸 이런 사진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기묘하게도 다양한 컬러로 채색되어있지만 쓸쓸하고 고독하다.

한파였던 날이었는데 고양이가 야외에 나와서 웅크리고 있다. 길고양이는 늘 시선을 두게 만든다. 저들은 이렇게 추운 날 어디서 몸을 말고 잠이 드는 걸까. 고양이의 일생은 70%가 느슨한 잠으로 보내는데 이렇게 추워서야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일단 생존을 헤야 한다. 하지만 고양이는 인간보다 나은 심장을 가지고 있다. 작은 심장이 팔딱팔딱 빨리 뛰고 있다. 우리도 힘낼 테니 닝겐도 힘을 내봐,라고 한다. 고양이나 인간이나 하루를 보내는 게 아니라 하루를 견디고 있다. 어디서 얼마나 잘 견디는지가 요즘의 관권이다.

이 도시는 95년도에 광역시가 되고 난 이후 오래전에 지어진 건물과 집은 전부 철거를 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도시 전체가 30년에 걸쳐 리모델링되어서 낡고 보기 싫은 옛것들은 다 사라져 간다. 그래도 아직 구석으로 가면 지는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는 곳이 있다. 이런 대비를 보는 건 언제나 좋다. 왜냐하면 역사의 한 페이지에 서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이런 곳을 많이 사진으로 남겨두었는데 이제는 그곳에 전부 새로운 건물과 아파트가 들어섰다. 사진으로만 남아있어서 아 이곳에 이런 집이 있었지, 하게 된다. 이 집도 허물 이지기 일보직전이다. 공포 유튜버들은 어서 출동해서 귀신 영상을 촬영하라고.

그렇게 돌아서 오다 보면 여기 동네도 예쁜 곳이 많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3월부터 겨울이 오기 직전까지 도로를 막고 매주 주말에 축제가 열린다. 축제는 다양하며 오래되어서 꽤나 즐길거리가 많다. 아직도 크리스마스 시즌에 설치해 놓은 인공조명이 밤이면 반짝이지만 거리는 쓸쓸하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매일 저녁 복적 거리는 도로인데 언젠가 그런 모습을 또 보겠지.

이곳도 아직 골목이 남아있다. 80년대 지어진 집들이 데면데면 붙어있다. 80년대 2층 집에 산다고 하면 와 잘 사는 집 아들내미네, 같은 말을 들었다. 이층의 방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열심히 연애편지를 쓰고 방황했던 아이들은 지금은 다들 어른 중의 어른이 되어 있겠지. 그리고 명절에나 집을 한 번 찾을지도 모른다. 집의 대문을 통과하는 순간 중고등학생이 되어서 그 옛날을 추억하고. 골목에서 친구를 큰 소리로 부르면 누군가가 야 이놈아 시끄럽다! 며 더 크게 소리치고. 골목에 기대어 친구를 기다리던 시간은 아직 골목에 그대로 있는 것만 같겠지.

그렇게 영차영차 달려서 들어오면 하루의 달리기가 끝이 난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은 없지만 매일 느끼는 감촉은 다르기 때문에 조금은 특별하다. 오늘은 플랭크를 하면 몇 분부터 몸이 떨릴까, 이런 생각을 달리기 전에 한다. 좀 웃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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