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오후에 시내에 나왔다가 집으로 들어가는 그 풍경이 좋았다. 중학생시절이었다. 날은 맑지만 해가 숨어서 냉기가 흐르는 늦은 오후. 쓸쓸해야 해야 할 것 같지만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있어서 시내 중심가는 활기차고 떠들썩했다. 거리에 캐럴이 흐르고 가게마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가득 차 있어서 밖에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신났다.


나는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친구는 중학교에서 만났다. 집이 달라서 약속을 정하고 약속장소로 나왔다. 애리나 백화점 앞은 만남의 장소였다. 모두가 거기서 약속을 정하고 만났다. 흐린 날은 아니지만 해는 뜨지 않았지만 애리나 백화점 앞은 활기차고 북적였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에리나 백화점이 있는 시내 중심가에는 주말에 흘러나온 사람들로 걷기가 힘들 정도였다. 곳곳에서 크리스마스 카드와 장식을 팔고 있었고 극장 앞 작은 광장에는 쥐포와 오징어를 구워서 팔고 있었다.


나는 애리나 백화점 맞은편 제일 레코드사 앞에서 친구를 기다렸다. 1차선 도로를 하나 건넜을 뿐인데 백화점 앞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모두가 얼굴에 행복한 표정이 붙어 있었다. 레코드 앞 스피커에서는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흘러나왔다. 이런 분위기에 몸을 맡기고 그 흐름에 딸려 가는 것이 좋았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근심이나 걱정을 볼 수 없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시내에 나왔지만 목적지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평일에 만나지 못한 친구나 애인을 만나러 나온 것이다.


나 역시 친구와 만나기로 했다. 나는 목적이 있었다. 목적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아니다. 친구와 같이 있으면 재미있었다. 낄낄 거리며 시내를 거닐다가 백화점에 들어가서 크리스마스 카드도 골라보고, 피규어 파는 곳을 구경하고, 백화점 꼭대기에 올라가서 오락도 하고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뭐니 뭐니 해도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재미있었다. 구경을 하는 것은 돈이 없어도 가장 재미를 추구할 수 있는 놀이다. 그렇게 시내를 돌아다니다 시간을 보고 우리는 학생들이 많이 가는 유명한 분식집으로 갔다. 거기서 김밥과 쫄면을 먹기로 했다. 이 분식집의 김밥이 아주 맛있다. 분식집은 크고 넓다. 다운타운에서 가장 유명하다.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지만 직장인들도 먹는다. 단지 술을 팔지 않기 때문에 성인들은 주로 여자들이 많다.


타원형의 거대한 바 테이블이 있는데 그 안에서 김밥을 말고, 라면을 끓이는 아주머니들이 네 명이나 있었다. 네 명의 아주머니들은 분업화가 되어서 한 아주머니가 밥솥에서 밥을 꺼내서 큰 대야에서 식히고 나면 다음 사람이 양념을 하고 다음 사람이 김밥을 말았다. 그 움직임이 마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교한 움직임이었다. 바 테이블에 앉아서 그걸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우리는 빈자리에 앉아서 김밥과 쫄면을 주문했다. 쫄면은 친구가 무척 좋아했다. 분식집 쫄면의 맛은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다. 집에서는 어림도 없고 다른 분식집에서도 이런 맛이 나지 않는다고 친구가 말했다. 김밥도 맛있었다. 김밥은 밑간을 했는데 그 안에 무슨 양념으로 밥을 밑간 했는지 김밥 속에 들어가는 재료가 많지 않음에도 김밥은 정말 맛있었다. 딸려 나오는 계란 국도 맛있었다. 분식집 안에도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천장과 구석진 부분에도 크리스마스 장식이 보였다. 우리가 토요일 이 시간에 시내에 있는 학생들에게 유명한 분식집에 온 이유는 그녀를 보기 위해서이다.


그녀는 한 살 많은 고등학생이었다. 그녀는 친구와 함께 토요일 이 시간에는 늘 이 분식집에서 김밥을 먹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들은 신성여고 문예부로 학교 축제 때 나의 시선을 잡아 끈 시를 쓴 주인공이 둘 중에 있었다. 나는 그 시를 보기 위해 축제 3일 내내 신성여고에 갔었다. 마지막 날에는 그 시 밑에 나의 소감을 길게 써서 붙여 놨다. 그 뒤로 그녀가 내가 쓴 글을 보고 누구인지 궁금해한다고 친구에게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 앞에 선뜻 나설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나는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가 나를 찾는다는 소리에 그녀 앞에 한 번 나서려고 했는데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나는 그 남자친구를 싫어한다. 그 남자친구는 나의 형이기 때문이다. 형은 키가 크고 운동을 잘하고 얼굴이 잘생겨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여자 친구도 자주 바꾼다. 그런 형이 나는 싫다. 제대로 된 사랑을 하지 않는다.


그녀들이 대각선 맞은편 테이블 바에 앉아서 김밥을 먹고 있다. 그 주위만 환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중학생 주제에 사랑에 눈을 뜬 것이다. 친구는 이 정보를 나에게 알려줬다는 이유로 무척 뿌듯해하며 쫄면을 호로록 먹었다. 여기까지 왔다고 해도 그녀에게 가서 말을 걸 용기는 나지 않았다. 이렇게 바라볼 수만 있다는 것으로도 기분이 이렇게 좋을 수 있을까. 그녀는 김밥을 먹으면서 잘 웃었다. 내가 그 글을 적은 사람이야,라고 말한다면 분명 나의 모습에 실망할지도 모른다. 형에 비해 나의 외모는 형편없다. 나는 작고 초라하고 운동도 잘하지 못하는 그런 중학생이었으니까.


그녀 역시 비록 작고 연약해 보였지만 그녀가 쓴 시의 세계는 크고 넓고 강했다. 나는 그걸 알 수 있었다. 모든 걸 바꿔버릴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그녀의 시는 어딘가로 뻗어가고 싶어 했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그걸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시에는 굳건한 진실보다는 흔들림이 많은 가능성이 있었다. 가능성이 하늘을 날기 위해 손을 뻗었는데 그 손을 내가 잡았다. 그녀가 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나는 이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그녀가 뻗은 손을 잡고 우리는 뭐든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너 왜 안 먹냐?라고 친구가 말했다. 내가 다 먹는다며 친구는 김밥까지 야무지게 먹었다. 비록 그녀와 나란히 앉아서 김밥을 먹지는 않았지만 같은 공간에서 그녀와 나는 같은 김밥을 서로 먹었다. 그녀는 그녀의 친구와 이야기를 하며, 나는 나의 친구와 함께. 그날 집으로 오는 겨울의 거리는 몹시 겨울다웠다. 흐리지는 않았지만 해는 구름 저 편으로 숨었다. 거리의 모든 곳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면 나는 지금 쓰는 이 소설을 완성한다. 지금 이대로라면 분명 일 년 뒤에 끝맺을 할 수 있다. 그녀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된다. 우리는 같은 고등학생이 된다. 그때 그녀에게 정식으로 말할 것이다. 그녀 옆에 누군가 있다고 해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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