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정도 썼던 소설이 날아갔다.

기기의 문제로 돌리고 싶지만 나의 불찰이다.

이런 일 때문에 애플의 기기를 세 대나 쓰고 있다.

한 대에 글을 적으면 자동으로 다른 기기의 메모장에도 기록이 된다. 하지만 메일의 동기화가 실패한 후 서로 간에 이동이 안 된다. 늘 되던 것들이 되지 않으면 불안하다.

평소에도 불안한데 거기에 불안이 덧입혀진다. 불안은 늘 조금씩 덩치가 커져간다. 불안은 약간의 틈이 보이면 젤리처럼 들어와 틈을 메꿔버린다. 때에 따라 불안 때문에 무기력할 때가 있다. 의욕도 없고 여기서 저기까지 가는 것도 귀찮고 마음은 점점 어두워져 우물 밑바닥으로 꺼지고 싶다.

어쩌면 무기력보다 무력감일지 모른다. 무기력은 [어떠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기운과 힘이 없음]이고, 무력감은 [스스로 힘이 없음을 알았을 때 드는 허탈하고 맥 빠진 듯한 느낌]이다. 무기력과 무력함은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다. 지금은 허탈하고 맥 빠진 느낌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에서 오는 무력감이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어떤 일을 감당해야 하는 기운도 없다. 불안은 내게 무기력과 무력감을 동시에 주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을 때마다 몸에 상처를 내는 사람을 만났다. 나는 그 사람을 취재하기로 했다. 연락을 했을 때 흔쾌히 취재에 응해주었다.

몸을 보여 주었는데, 몸은 상처로 가득했다. 칼이나 유리에 베인 상처가 아문 자국이었다. 그 사람이 어린 시절 학대에 비관하여 죽음으로 가지 않고 견디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형이었다. 하지만 형이 죽고 나서 죽음 직전까지 갔던 이야기를 적고 싶었다. 그리고 여러 번의 인터뷰를 통해 소설의 절반 정도를 적었지만 전부 날아갔다.

다시 인터뷰를 하고, 다시 소설을 쓰면 된다지만 그 사람이 사라졌다. 그 사람을 찾으려면 내가 쓴 소설 속에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설은 사라졌다. 사라진 그 사람도 찾을 수 없다. 나의 문제라면 잠을 자지 않는 것이다. 꿈만 꾼다. 그래서 나는 항상 머리에 연기가 가득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잠을 자지 않을 때에 소설을 쓰고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면 좋으련만 연기가 들어와 있는 머리로 무엇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생각은 할 수 있다. 끊임없이 생각이 든다. 집요와 집착은 어떻게 다를까. 색을 맛보는 건 집요일까 집착일까.

나는 가끔 색에서 맛을 느낀다. 무의미한 회전, 지친 영혼, 욕망과 무지의 충돌의 맛까지 느낀다. 잠을 못 드는 대신 이제 소설의 세계로 나는 들어간다. 그 사람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무기력과 무력함, 집요와 집착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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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고구마의 계절이다. 뜨거운 군고구마를 후후 불어 먹는 맛이 좋다. 제대 후 그해 겨울에 군고구마를 팔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팔아치웠다]가 맞는 말처럼 엄청나게 팔렸다.

군고구마를 먹기 위해서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했다. 동네에서 장사를 했는데, 주위가 아파트 단지와 어린이 미술 학원 같은 학원이 가득하고 현대중공업 근처라서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줄까지 서서 군고구마를 사 간다는 게 지금생각하면 신기할 뿐이다.

저녁 몇 시간 잠시 장사를 했는데 하루에 20만 원에서 30만 원 정도 벌었다. 낮에 농산물 시장에서 군고구마 두 상자씩 떼 와서 그날 저녁에 다 팔아치웠다. 몇 번 가서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된 농산물 아저씨에게 늘 좋은 고구마를 두 박스씩 구입을 했다.

도대체 이렇게 많은 고구마를 하루 저녁에 다 팔아 치우나?라고 물었을 때 [잘 모르겠어요. 자정이 되기 전에 다 팔려요] 군고구마를 파는 장소가 동네 서점 문 앞이었다. 후배의 아버지 서점 앞이라 장사를 허락했다. 그리고 책도 마음껏 보게 해 주었다. 하지만 장갑을 껴도 손이 까맣게 탄 끼가 묻었고 사람들이 쉴 새 없이 고구마를 들고 가는 바람에 책은 전혀 읽지 못했다.

제대를 하기 전 군대에서 맞이한 두 번의 겨울에 나는 카드병력으로 차출되어서 겨울 내내 크리스마스카드와 연하장을 만드는 것으로 모든 훈련과 내무생활에서 열외였다. 크리스마스카드를 디자인이 간단하면서 예쁘게, 여러 수백 장을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나 쉬운 일도 아니었다.

샘플링만 잘해 놓으면 그다음부터는 수월하다. 그래서 12월에는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어서 고구마를 사는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카드가 예쁘니까 카드만 사러 오는 사람도 있었다. 고구마는 11월부터 팔기 시작해서 2월까지 팔았다. 몇 개의 샘플링 카드를 만들어서 군고구마통 위에 죽 걸어 놓고 원하는 카드를 고르면 그걸 주었다.

그리고 고구마를 팔면서 음악을 틀었다. 웸이나 머라이어캐리의 캐럴을 비롯해서 많은 캐럴을 틀었다. 터보의 캐럴은 신났다. 어린이 학원이 많았는데 어린이 손님이 고구마 하나를 달라기에 하나를 쥐어 줬는데 그냥 가버리는 것이다. 밤에 아이의 엄마가 와서 미안하다며 만원 어치를 사갔다.

그런 식의 해프닝이 거의 매일 일어났다. 아파트 단지 근처라 중공업에서 퇴근하는 아버님들이 연말에 거하게 한잔 후 1, 2만 원어치씩 사갔다. 잔돈은 됐다,라고 하는 아버님들도 많았다. 또 고구마를 사러 왔다가 대기를 해야 하면 아파트 주소를 받았다가 고구마를 배달했다. 암튼 그때에도 열심히 달렸다.

좀 더 예쁜 크리스마스카드는 근처 학원의 예쁜 선생님들이 고구마를 사러 오면 주었다. 자정이 가까워지면 고구마도 거의 다 팔리고 사람도 줄어들어서 도와준 친구들과 치킨과 맥주를 마셨다. 매일이 파티였다. 그렇게 마시다가 필 받으면 근처가 바닷가이니 바닷가 술집으로 달려갔다.

2월까지 군고구마를 팔아서 번 돈으로 7번 국도를 타고 전국(까지는 아니지만) 일주를 했다. 그러다가 강릉에 갔을 때가 기억에 남는 엄청난 일이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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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문세가 예전처럼 오전에 라디오 디제이를 한다. 날이 너무 좋았던 날에 이문세가 오늘 같은 날은 모든 걸 잠시 내려놓고 김밥 싸들고 소풍을 가야 한다고 했다.

지금은 일 년 중 가장 좋은 계절이고, 그 속에 서 있다. 역사 속에 서 있으면 사실 알아채기가 힘들다. 어릴 때 소풍을 가면 김밥과 사이다였다. 소풍은 당일이 다가오기 일주일 전부터 두근거리다가, 소풍 전 날에 도파민이 터진다.

도형이는 우리 반은 아니었지만 같은 동네였다. 동네에서 같이 자란 도형이는 여자애로 소풍날에도 김밥을 못 싸 올 때가 있었다. 도형이는 아빠만 있었는데, 아빠는 아침 일찍 일하러 나갔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셨기 때문이었다.

도형이는 털팔이 같은 성격이라 그런 거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 김밥을 뺏어먹으면 되니까. 김밥을 먹으려고 도시락을 열었을 때 김밥은 여기저기 부딪쳐 모양이 찌그러졌다. 하지만 도형이는 두 개씩 집어 입에 넣었다. 나도 질세라 한가득 김밥을 입에 욱여넣었다.

그러다 목이 막히면 사이다를 마셨다. 사이다 쟁탈전 역시 치열했다. 김밥과 사이다는 잘 어울린다. 김밥을 입에 가득 넣고 사이다를 마시면 입 안이 소풍이었다. 둘이 서로 놀려가며 김밥을 먹고 사이다를 마셨다. 도형이는 묘한 아이로, 나와 동생이 집에서 아직 자고 있을 아침에도 가끔 우리 집에서 엄마와 함께 초파일에 김밥을 말았다.

부스스 일어났을 때 도형이가 접시에 김밥을 잔뜩 올려서 들고 왔다. 발로 나를 차면서 티브이를 보자고 했다. 우리는 일어나자마자 도형이와 함께 김밥을 먹으며 티브이를 봤다. 김밥을 먹고 냉장고에서 사이다를 꺼내 마셨다. 당시에는 그게 행복인지 몰랐다. 도형이는 가족처럼 스며들었다.

우리 집에서 뭘 하든 이상하지 않았고 같이 어울려 저녁도 먹고 그렇게 지냈다. 도형이는 늘 씩씩했고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든든했다. 그런 도형이가 우는 모습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때 도형이에게 괜찮으냐고 물어보지 못했다. 그날이 지나고 도형이는 여전히 씩씩했지만, 나는 내내 마음에 걸렸다.

도형이는 나를 위해 옆 동네 남자애들에게 대들기도 했었다. 그때 도형이가 아니었으며 나는 그 애들에게 해코지를 당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도형이가 울고 있을 때 위로 한 번 못해줬다. 말해야지 말해야지 했지만 도형이는 어느 날 이사를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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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겨울에 나오는 넷플 오리지널 애니메숑으로 재미있다. 보면 여러 영화들이 스쳐 지나간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가 [슬럼버랜드]다.

거기서도 꿈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며 침대를 타고 다니는데, 이 영화에서 남매도 침대를 타고 비슷한 여정을 한다.

또 크리스마스 영화들, 폴라익스프레스도 생각나고 또, 암튼 여러 영화들이 스쳐간다. 6살 터울의 남매 이야기다.

누나와 동생이 꿈속 세상으로 가서 샌드맨을 찾아 완벽한 가족을 만들어달라고 하는 이야기다. 누나 스티비와 남동생 엘리엇은 여느 집안의 남매처럼 우당탕탕이다.

누나와 함께 하고 싶지만 누나는 싫다. 그러다가 어느 날 샌드맨이 모든 꿈을 현실로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적힌 그림책을 발견하고 꿈의 세계로 들어간다.

하루는 동생 엘리엇이 누나의 꿈에 나타나는데 같은 꿈을 꾸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면서 남매는 꿈속으로 들어가 여행을 하는데 만만찮다.

이런저런 모험을 하고 나중에 동생과 손을 잡고 합을 넣으면 무시무시한 몬스터도 물리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뭉클함이 올라온다.

영화에 나오는 음악들이 좋다. 우리가 대부분 알고 있는 팝이 나온다. 사실 완벽한 가족이란 있을 수 없다. 완벽한 가족이란 무엇일까.

화목하게 지내는 게 완벽한 가족인데, 화목하다는 건 가족의 누군가는 양보를 한다는 말이다. 자식을 위해 부모가 양보를 하던지, 부모를 위해 자식이 양보를 하던지.

누나, 오빠를 위해 동생이 양보를 하던지, 동생을 위해 형이나 누나가 양보를 하던지. 그러나 마냥 양보만 할 수는 없다.

그러다 보면 어딘가 삐끗거리게 된다. 가족이니 삐끗함이 친구보다 더 아프고 고통스러울지 모른다. 남매가 완벽한 가족을 만들어 달라고 모험을 떠난 이유가 엄마아빠의 불길한 긴장감으로 헤어질 거라는 불안이 스티비를 덮쳤기 때문이다.

스티비는 12살이지만 방관자 어린이가 아닌 해결자로 나서게 된다. 그리고 조력자 동생이 있다. 무너져가는 현실을 제대로 돌리려면 꿈속 샌드맨을 이용하는 것이다.

무의식 세계는 현실의 불안이 만든 세계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등장하는 캐릭터들부터 이야기까지 재미있는 영화 [인 유어 드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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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에 캐럴을 비롯한 따뜻한 음악이 나온다. 겨울이라 그렇다. 곧 크리스마스라 더 그렇다. 요즘은 길거리에서 캐럴이 소멸했지만 겨울이면 거리에 캐럴이 왕창 흘러나올 때가 있었다. 그게 정말 오래전 같이 느껴진다. 2016년도인가 배캠에서 배철수 디제이가 캐럴이 흘러나오지 않는 겨울의 거리가 쓸쓸하다는 뉘앙스로 멘트를 했었다. 10년 정도가 지나는 동안 이제 크리스마스 시즌에도 캐럴이 나오지 않는 게 당연시되어서 어쩐지 따뜻함도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더 분노하고, 더 삭막하고, 더 폭력을 휘두르는 것만 같다. 겨울의 따뜻함을 느끼려고 끈을 놓지 않고 꽉 잡고 있다. 이 끈을 놓치면 나 역시 분노와 폭력의 바닷속으로 휩쓸려 가버릴 것만 같다. 바람이 불었다. 겨울의 바람이었다. 겨울바람은 당연하지만 차고 시리다. 겉 옷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있다. 나의 살갗까지 와서 닿는다. 순간 몸을 부르르 떨게 만든다. 그런 바람이 존재한다. 지금은 당연시 여기던 것들이 허물어지거나,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당연하던 크리스마스 시즌에 캐럴이 거리에 나오지 않아도 이제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당연하게 되었다. 그래서 당연하다는 것이 뭔지 이제 애매하다. 누군가 당연히 그래야죠,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당연하다는 건 언젠가는 당연하지 않게 된다고 말하고 싶다. 오늘은 쌀쌀하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황금빛 햇살이 강으로 떨어졌다. 아름다운 광경이다. 이 아름다운 모습은 금방 사라진다. 아, 하는 행복도 금방 사라진다. 당연할 것 같았던 크리스마스 캐럴처럼. 그렇지만 살아있는 이상 앞으로 나가야 한다. 일어나기 싫어도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외면하는 순간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캐럴을 듣자. 어떤 캐럴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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