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거리는 온통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물들었다. 이제 이런 모습은 볼 수 없다. 법적규제 때문이다. 캐럴도 마찬가지다. 거리에서 카페에서 12월 내내 들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겨울에는 겨울만의 느낌이 있다. 겨울에는 또 겨울만의 음식도 있다. 겨울에 먹으면 더 맛있는 음식들 말이다. 겨울은 추우니까 따뜻한 음식이 좋다. 국물이 있는 음식들 말이다. 간단하게 해 먹을 수 있는 떡국이 거기에 속한다. 떡국이 하도 몸에 별로라고 하니 예전만큼 손은 가지 않지만, 어릴 땐 겨울에 집에서 자주 어머니가 해 주었다.

지금보다 난방이 덜 되었음이 확실한데 사진을 보면 방 안은 너무나 따뜻하고 포근해 보인다. 소고기가 잔뜩 들어간 떡국은 참 맛있었다.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어머니와 다 같이 밥상에 둘러앉아 떡국을 먹었다. 그 모습이 아버지 눈에도 행복해 보여서 사진으로 남겨 놨으리라. 행복이란 그런 거니까. 찰나로 지나가며 일상에서 느끼는 행복이 기쁨이라는 걸 아버지는 그때 알았다. 창문으로 해가 들어오고 밥상 위로 떡국에서 올라가는 연기가 엑토플라즘처럼 보였다. 동생과 나는 겨울 내복을 입은 채로 밥상 앞에 앉은 사진도 있고, 어떤 사진 속에는 따뜻한 겨울 털 옷을 입고 있다. 행복한 모습이다.

떡국 역시 추억의 음시이라 그런지 그 맛이 항상 기억 속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다가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예전에는 술을 많이 마신 날에는 새벽에 김밥천국에서 떡국을 한 그릇 먹고 집으로 갔다. 집에서 해 먹는 것만큼 고기가 들어있진 않지만 술에 취해 밥을 말아서 후루룩 먹으면 아주 맛있었다. 생각해 보면 예전에는 김밥천국도 24시간 영업하는 곳이 있었다. 내가 왕왕 갔던 김밥천국은 시내에 있었는데 작은 공간이었다. 테이블에 네 개 정도? 그 정도 있었고, 한 편에 쌀가마니도 쌓여 있었다. 작은 티브이가 있었고 사장은 오토바이 배달도 직접 했다.

아주 젊은 남자로 사장님으로 불렸지만 주방에 있는 아주머니가 실주인 같았다. 하지만 대화를 들어보면 아주머니는 그저 조리를 하는 직원을 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아주 젊은 남자가 사장이라고 생각했다. 김밥천국에는 술을 마시고 새벽에 가서 먹었다. 떡국보다는 떡라면을 주로 먹었다. 항상 늦은 새벽이었다. 김밥천국에서 술이 덜 깬 채 떡라면을 먹고 있으면 배달을 갔던 사장이 돌아와 [맛있으세요?]라고 말을 건넸다.

억양이 여기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젊은데 타지방으로 와서 김밥천국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를 보며 어정쩡한 눈인사를 했다. 나는 인사를 건네면서도 나의 얼굴이 얼마나 엉망인지 안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밥천국의 떡라면은 술이 취했을 때 진가를 발휘한다는 걸 안다. 젓가락을 멈출 수가 없다. 겨울에는 종종 그렇게 술을 마시고 김밥천국에서 떡라면을 먹곤 했다.

노래방에 자주 가던 시기였다. 노래방 화면에는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 영화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마이클 잭슨이 악당과 맞서 싸우기 위해 스포츠카에서 로봇으로 변신을 하는데 너무 멋진 것이다. 그리고 우주선으로 변신한다. 그 장면이 노래방 화면에 계속 나왔다. 그래서 노래를 부르지 않을 때 영상에 빠져 있었다. 노래방이 미용실만큼 많았다. 노래방은 전부 장사가 잘 되던 시기였다. 나 같은 사람이 노래방에 자주 갈 정도였으니까. 친구들 중에서 노래방에 가면 항상 부르는 노래만 부는 친구가 있었다. 임재범의 고해 같은, 듣기 힘든 노래. 게다가 술에 취했으니 어떻게든 목소리를 쥐어 짜낸다.

노래방은 2차로 항상 들리는 곳이었다. 자주 가는 노래방이 있었고 주인과 친해지면 시간을 연장해 주었다. 이상하지만 연장해 주는 시간은 늘 아슬아슬한 느낌이었다. 대부분 1절만 불러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만큼 노래를 부르는 것에 목매는 시기였다. 시내는 밤이 되고 백화점이 문을 닫으면 백화점 앞에 포장마차가 들어섰다. 육개장, 선짓국을 팔았다. 술에 취한 사람들이 포장마차에 붙어 서서 선짓국을 먹었다. 후루룩 하며 맛있게 먹었다. 겨울에다가 술에 취하면 선짓국은 왜 두 배로 맛있어지는 것일까. 게다가 포장마차의 선짓국은 선짓국 전문점만큼 양도 많지 않았지만 먹고 나면 배가 불렀다.

새벽 두 시 가까이 되면 취객들이 난봉꾼으로 변하기도 했다. 술에 취한 채 서로 싸움을 하면 살벌했다. 도파민 때문인지 자신이 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의경들이 6인 1조가 되어 밤새도록 순찰을 했다. 술에 취하면 의경이고 뭐고 일단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행이 말려줄 거라는 기대 때문인지 상대방에게 더욱 험하게 달려든다. 시내에는 전화국이 있었다. 전화국 광장도 만남의 장소다. 그곳도 새벽에는 포장마차가 들어섰다. 백화점 앞의 포장마차와 다르게 전화국 앞의 포장마차는 테이블이 있고 국수와 각종 안주, 소주를 팔았다.

스무 살 시절 전화국 맞은편 건물 2층 당구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여름에는 거기서 먹고 자면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재미있었다. 당구를 일단 마음껏 칠 수 있으니 좋았다. 밤새도록 당구 연습을 했다. 포장마차는 겨울에는 난방이 되었지만 여름에 냉방은 안 된다. 그럼에도 당구장에 여름에 일을 마치고 내려가서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셨다. 분명 선풍기밖에 없을 텐데 그렇게 덥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겨울이 되면 시내가 전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물들었다. 어디든지 크리스마스 정식이 보였고 캐럴이 흘러나왔다.

요즘에는 전기문제나, 캐럴 저작권 같은 규제 때문에 사라졌다. 그래도 크리스마스 시즌 단 며칠만이라도 장식이 이곳저곳에 생겨났으면 하지만 이제 그럴 일은 없다. 지금도 12월이 훌쩍 지나가고 있지만 거리에 캐럴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 겨울에는 카페에 가는 재미도 있었다. 나는 카페에서도 일 년이나 아르바이트를 했다. 겨울의 카페가 겨울의 느낌이 가장 많이 나는 곳이었다. 시내는 카페로 가득한 장소 같아서 서로 경쟁이 심했다. 전투적으로 크리스마스 장식을 했고 트리를 만들었다. 우리가 자주 가는 카페도 있었는데 시내 중심가에서 약간 벗어난 거리에 있는 카페였다.

로컬 카페치고 실내가 넓었다. 주방이 두 군데가 있었다. 술이나 음식은 판매하지 않았는데 주방이 두 군데라니. 그 카페는 들어가면 홀이 나오고 그 안으로 길쭉하게 이어져 들어가면 또 다른 홀이 있다. 테이블이나 벽면이 전부 질 좋은 나무로 장식이 되었다. 아마 불이 난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할 것 같지만 그 카페는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났지만 인기가 좋았다. 길쭉한 북도 같은 곳에도 테이블이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입구에 있는 홀만큼 큰 홀이 있다. 그리고 한 구석에는 그랜드 피아노도 있어서 연주를 할 수 있다. 운이 좋으면 피아노 연주까지 들을 수 있었다.

고작 카페인데 꽤 질 좋은 문화를 누릴 수 있었다. 벽면에 가득 걸려있는 미술품은 잘 모르지만 유명 화가의 그림을 것이다. 물론 진짜는 아니겠지만, 그 그림들을 보는 재미도 좋았다. 우리가 앉은 테이블은 허리를 좀 구부리고 들어가는 자리였다. 중 2층 같은 자리인데 천장이 좀 낮아서 허리를 구부려야 했다. 하지만 일단 앉으면 너무나 편안했다. 흐르는 음악, 고요한 실내, 테이블을 챙기는 직원까지 모든 것이 좋은 카페였다. 그 카페도 겨울이면 장식이 들어섰는데, 고급스러웠다.

다른 카페는 대부분 머라이어 캐리 캐럴이 나왔는데 그 카페에는 빙 크로스비 화이트 앨범이 흘렀다. 카페는 요즘도 가끔 꿈에 나타난다. 물론 나타날 때마다 조금씩 형태가 달라졌지만 그만큼 그 카페에 대한 기억이 있다. 지금은 일 때문이라도 남자와 전혀 카페에 가지 않지만, 친구들끼리 카페에서 수다를 떨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시기가 있었다.

캐럴 하니까 크리스마스가 되면 한국 가수들은 캐럴 앨범을 발표했다. 좋은 겨울 노래 하나를 내놓으면 겨울만 되면 그 노래가 효자 노릇을 한다. 우리나라에는 미스터 투의 [하얀 겨울]이 그렇다. 시내에 나가는 순간 이곳저곳에서 터보의 캐럴, 이수만 회사의 캐럴 등 흘러넘쳤다. 지금은 나처럼 하루 종일 라디오를 듣고 있으면 라디오에서 캐럴이 나오는 정도다. 그래도 라디오가 사리지 않고 남아서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캐럴을 간간이 들려준다. 유튜브로 찾아서 틀어 놓으면 되는데, 이상하게도 계속 캐럴을 들어도 그렇게 좋다는 느낌이 없다.

올해는 계엄이 터졌던 작년보다 더 크리스마스 기분이 덜하다. 이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그냥 지나가는 게 다행인지도 모르지만 오랫동안 크리스마스가 지녀온 그 분위기와 모습이 떠올라서 아쉽기도 하다. 재작년까지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직접 만들었지만 작년에는 만들지 못했고 올해도 전혀 만든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 이렇게 마음마저 점점 따분하고 재미없는 어른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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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정도 썼던 소설이 날아갔다.

기기의 문제로 돌리고 싶지만 나의 불찰이다.

이런 일 때문에 애플의 기기를 세 대나 쓰고 있다.

한 대에 글을 적으면 자동으로 다른 기기의 메모장에도 기록이 된다. 하지만 메일의 동기화가 실패한 후 서로 간에 이동이 안 된다. 늘 되던 것들이 되지 않으면 불안하다.

평소에도 불안한데 거기에 불안이 덧입혀진다. 불안은 늘 조금씩 덩치가 커져간다. 불안은 약간의 틈이 보이면 젤리처럼 들어와 틈을 메꿔버린다. 때에 따라 불안 때문에 무기력할 때가 있다. 의욕도 없고 여기서 저기까지 가는 것도 귀찮고 마음은 점점 어두워져 우물 밑바닥으로 꺼지고 싶다.

어쩌면 무기력보다 무력감일지 모른다. 무기력은 [어떠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기운과 힘이 없음]이고, 무력감은 [스스로 힘이 없음을 알았을 때 드는 허탈하고 맥 빠진 듯한 느낌]이다. 무기력과 무력함은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다. 지금은 허탈하고 맥 빠진 느낌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에서 오는 무력감이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어떤 일을 감당해야 하는 기운도 없다. 불안은 내게 무기력과 무력감을 동시에 주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을 때마다 몸에 상처를 내는 사람을 만났다. 나는 그 사람을 취재하기로 했다. 연락을 했을 때 흔쾌히 취재에 응해주었다.

몸을 보여 주었는데, 몸은 상처로 가득했다. 칼이나 유리에 베인 상처가 아문 자국이었다. 그 사람이 어린 시절 학대에 비관하여 죽음으로 가지 않고 견디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형이었다. 하지만 형이 죽고 나서 죽음 직전까지 갔던 이야기를 적고 싶었다. 그리고 여러 번의 인터뷰를 통해 소설의 절반 정도를 적었지만 전부 날아갔다.

다시 인터뷰를 하고, 다시 소설을 쓰면 된다지만 그 사람이 사라졌다. 그 사람을 찾으려면 내가 쓴 소설 속에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설은 사라졌다. 사라진 그 사람도 찾을 수 없다. 나의 문제라면 잠을 자지 않는 것이다. 꿈만 꾼다. 그래서 나는 항상 머리에 연기가 가득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잠을 자지 않을 때에 소설을 쓰고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면 좋으련만 연기가 들어와 있는 머리로 무엇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생각은 할 수 있다. 끊임없이 생각이 든다. 집요와 집착은 어떻게 다를까. 색을 맛보는 건 집요일까 집착일까.

나는 가끔 색에서 맛을 느낀다. 무의미한 회전, 지친 영혼, 욕망과 무지의 충돌의 맛까지 느낀다. 잠을 못 드는 대신 이제 소설의 세계로 나는 들어간다. 그 사람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무기력과 무력함, 집요와 집착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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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고구마의 계절이다. 뜨거운 군고구마를 후후 불어 먹는 맛이 좋다. 제대 후 그해 겨울에 군고구마를 팔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팔아치웠다]가 맞는 말처럼 엄청나게 팔렸다.

군고구마를 먹기 위해서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했다. 동네에서 장사를 했는데, 주위가 아파트 단지와 어린이 미술 학원 같은 학원이 가득하고 현대중공업 근처라서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줄까지 서서 군고구마를 사 간다는 게 지금생각하면 신기할 뿐이다.

저녁 몇 시간 잠시 장사를 했는데 하루에 20만 원에서 30만 원 정도 벌었다. 낮에 농산물 시장에서 군고구마 두 상자씩 떼 와서 그날 저녁에 다 팔아치웠다. 몇 번 가서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된 농산물 아저씨에게 늘 좋은 고구마를 두 박스씩 구입을 했다.

도대체 이렇게 많은 고구마를 하루 저녁에 다 팔아 치우나?라고 물었을 때 [잘 모르겠어요. 자정이 되기 전에 다 팔려요] 군고구마를 파는 장소가 동네 서점 문 앞이었다. 후배의 아버지 서점 앞이라 장사를 허락했다. 그리고 책도 마음껏 보게 해 주었다. 하지만 장갑을 껴도 손이 까맣게 탄 끼가 묻었고 사람들이 쉴 새 없이 고구마를 들고 가는 바람에 책은 전혀 읽지 못했다.

제대를 하기 전 군대에서 맞이한 두 번의 겨울에 나는 카드병력으로 차출되어서 겨울 내내 크리스마스카드와 연하장을 만드는 것으로 모든 훈련과 내무생활에서 열외였다. 크리스마스카드를 디자인이 간단하면서 예쁘게, 여러 수백 장을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나 쉬운 일도 아니었다.

샘플링만 잘해 놓으면 그다음부터는 수월하다. 그래서 12월에는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어서 고구마를 사는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카드가 예쁘니까 카드만 사러 오는 사람도 있었다. 고구마는 11월부터 팔기 시작해서 2월까지 팔았다. 몇 개의 샘플링 카드를 만들어서 군고구마통 위에 죽 걸어 놓고 원하는 카드를 고르면 그걸 주었다.

그리고 고구마를 팔면서 음악을 틀었다. 웸이나 머라이어캐리의 캐럴을 비롯해서 많은 캐럴을 틀었다. 터보의 캐럴은 신났다. 어린이 학원이 많았는데 어린이 손님이 고구마 하나를 달라기에 하나를 쥐어 줬는데 그냥 가버리는 것이다. 밤에 아이의 엄마가 와서 미안하다며 만원 어치를 사갔다.

그런 식의 해프닝이 거의 매일 일어났다. 아파트 단지 근처라 중공업에서 퇴근하는 아버님들이 연말에 거하게 한잔 후 1, 2만 원어치씩 사갔다. 잔돈은 됐다,라고 하는 아버님들도 많았다. 또 고구마를 사러 왔다가 대기를 해야 하면 아파트 주소를 받았다가 고구마를 배달했다. 암튼 그때에도 열심히 달렸다.

좀 더 예쁜 크리스마스카드는 근처 학원의 예쁜 선생님들이 고구마를 사러 오면 주었다. 자정이 가까워지면 고구마도 거의 다 팔리고 사람도 줄어들어서 도와준 친구들과 치킨과 맥주를 마셨다. 매일이 파티였다. 그렇게 마시다가 필 받으면 근처가 바닷가이니 바닷가 술집으로 달려갔다.

2월까지 군고구마를 팔아서 번 돈으로 7번 국도를 타고 전국(까지는 아니지만) 일주를 했다. 그러다가 강릉에 갔을 때가 기억에 남는 엄청난 일이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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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문세가 예전처럼 오전에 라디오 디제이를 한다. 날이 너무 좋았던 날에 이문세가 오늘 같은 날은 모든 걸 잠시 내려놓고 김밥 싸들고 소풍을 가야 한다고 했다.

지금은 일 년 중 가장 좋은 계절이고, 그 속에 서 있다. 역사 속에 서 있으면 사실 알아채기가 힘들다. 어릴 때 소풍을 가면 김밥과 사이다였다. 소풍은 당일이 다가오기 일주일 전부터 두근거리다가, 소풍 전 날에 도파민이 터진다.

도형이는 우리 반은 아니었지만 같은 동네였다. 동네에서 같이 자란 도형이는 여자애로 소풍날에도 김밥을 못 싸 올 때가 있었다. 도형이는 아빠만 있었는데, 아빠는 아침 일찍 일하러 나갔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셨기 때문이었다.

도형이는 털팔이 같은 성격이라 그런 거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 김밥을 뺏어먹으면 되니까. 김밥을 먹으려고 도시락을 열었을 때 김밥은 여기저기 부딪쳐 모양이 찌그러졌다. 하지만 도형이는 두 개씩 집어 입에 넣었다. 나도 질세라 한가득 김밥을 입에 욱여넣었다.

그러다 목이 막히면 사이다를 마셨다. 사이다 쟁탈전 역시 치열했다. 김밥과 사이다는 잘 어울린다. 김밥을 입에 가득 넣고 사이다를 마시면 입 안이 소풍이었다. 둘이 서로 놀려가며 김밥을 먹고 사이다를 마셨다. 도형이는 묘한 아이로, 나와 동생이 집에서 아직 자고 있을 아침에도 가끔 우리 집에서 엄마와 함께 초파일에 김밥을 말았다.

부스스 일어났을 때 도형이가 접시에 김밥을 잔뜩 올려서 들고 왔다. 발로 나를 차면서 티브이를 보자고 했다. 우리는 일어나자마자 도형이와 함께 김밥을 먹으며 티브이를 봤다. 김밥을 먹고 냉장고에서 사이다를 꺼내 마셨다. 당시에는 그게 행복인지 몰랐다. 도형이는 가족처럼 스며들었다.

우리 집에서 뭘 하든 이상하지 않았고 같이 어울려 저녁도 먹고 그렇게 지냈다. 도형이는 늘 씩씩했고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든든했다. 그런 도형이가 우는 모습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때 도형이에게 괜찮으냐고 물어보지 못했다. 그날이 지나고 도형이는 여전히 씩씩했지만, 나는 내내 마음에 걸렸다.

도형이는 나를 위해 옆 동네 남자애들에게 대들기도 했었다. 그때 도형이가 아니었으며 나는 그 애들에게 해코지를 당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도형이가 울고 있을 때 위로 한 번 못해줬다. 말해야지 말해야지 했지만 도형이는 어느 날 이사를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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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겨울에 나오는 넷플 오리지널 애니메숑으로 재미있다. 보면 여러 영화들이 스쳐 지나간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가 [슬럼버랜드]다.

거기서도 꿈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며 침대를 타고 다니는데, 이 영화에서 남매도 침대를 타고 비슷한 여정을 한다.

또 크리스마스 영화들, 폴라익스프레스도 생각나고 또, 암튼 여러 영화들이 스쳐간다. 6살 터울의 남매 이야기다.

누나와 동생이 꿈속 세상으로 가서 샌드맨을 찾아 완벽한 가족을 만들어달라고 하는 이야기다. 누나 스티비와 남동생 엘리엇은 여느 집안의 남매처럼 우당탕탕이다.

누나와 함께 하고 싶지만 누나는 싫다. 그러다가 어느 날 샌드맨이 모든 꿈을 현실로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적힌 그림책을 발견하고 꿈의 세계로 들어간다.

하루는 동생 엘리엇이 누나의 꿈에 나타나는데 같은 꿈을 꾸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면서 남매는 꿈속으로 들어가 여행을 하는데 만만찮다.

이런저런 모험을 하고 나중에 동생과 손을 잡고 합을 넣으면 무시무시한 몬스터도 물리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뭉클함이 올라온다.

영화에 나오는 음악들이 좋다. 우리가 대부분 알고 있는 팝이 나온다. 사실 완벽한 가족이란 있을 수 없다. 완벽한 가족이란 무엇일까.

화목하게 지내는 게 완벽한 가족인데, 화목하다는 건 가족의 누군가는 양보를 한다는 말이다. 자식을 위해 부모가 양보를 하던지, 부모를 위해 자식이 양보를 하던지.

누나, 오빠를 위해 동생이 양보를 하던지, 동생을 위해 형이나 누나가 양보를 하던지. 그러나 마냥 양보만 할 수는 없다.

그러다 보면 어딘가 삐끗거리게 된다. 가족이니 삐끗함이 친구보다 더 아프고 고통스러울지 모른다. 남매가 완벽한 가족을 만들어 달라고 모험을 떠난 이유가 엄마아빠의 불길한 긴장감으로 헤어질 거라는 불안이 스티비를 덮쳤기 때문이다.

스티비는 12살이지만 방관자 어린이가 아닌 해결자로 나서게 된다. 그리고 조력자 동생이 있다. 무너져가는 현실을 제대로 돌리려면 꿈속 샌드맨을 이용하는 것이다.

무의식 세계는 현실의 불안이 만든 세계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등장하는 캐릭터들부터 이야기까지 재미있는 영화 [인 유어 드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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