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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예전에 다 올렸던 사진들인데 다시 올려 보는 거야. 사진이라는 게 나는 노래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사진은 그때 그 시간을 붙잡아두잖아. 현실에서 보는 비현실이 사진이야. 노래도 그래. 그 노래를 들으면 그때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만 같잖아. 시가 그렇지. 시에 음을 갖다 붙인 게 노래니까.


우리는 뭔가 기대할 존재 같은 게 필요해. 아이에게는 엄마와 아빠, 애인, 의사, 종교인, 정치인. 우리는 늘 기대야 할 어떤 무언가를 찾아서 헤매곤 해. 그러나 대부분 배신을 당하고 말아. 거기에서 오는 배신의 고통은 파괴적이지. 그런데 가장 오랫동안 곁에서 배신하지 않는 게 ‘시’거든. 시는 사실 시인들의 고통으로 써낸 거야.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야. 시는 태어나는 순간, 시를 읽는 사람의 것이 되거든. 그래서 시는 배신하지 않고 나의 고통을 나눠갖기도 해.


이 사진은 나의 영국 친구가 아기를 낳았을 때 [손안에 피어난 작은 꽃]이라는 제목으로 사진을 담아 줬어. 아기의 이름은 찰리 로즈. 찰리 로즈의 엄마가 아주 좋아했지.



사진은 때때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을 담아내곤 해. 지구상 대부분의 생물체는 태어나자마자 일어나서 걸어 다녀. 어미가 새끼가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기도 해. 그런데 인간만이 태어나도 아무것도 할 줄 몰라. 그저 웅웅 거리기만 할 뿐이지. 그런데 엄마와 아기의 교감 같은 거 말이야. 엄마가 입술을 갖다 대면 뭘 아는지 웃는다고.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할까. 설명은 불가능하지만 사진은 그걸 포착해 내지. 결정적인 순간. 앙리 카르티에 브레숑의 사진 철학이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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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내게 너무 써


겨울의 하루가 지나간다. 12월의 첫 주말이 지나간다. 시간은 어 하는 사이 벌써 저 뒤로 가버리고 만다.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겠냐만은 대부분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나는 너무 무력하다. 그저 할 수 있는 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인데 그것마저 추위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추위는 더위와 달리 끝에서 찾아온다. 더위는 몸이 한 번에 더운 것에 반해 추위는 손가락 끝, 발가락 끝부터 파고 들어온다. 추위는 점진적으로 조금씩 지치지 않고 확장하고 강해진다. 더위는 몸을 더 움직여 땀을 쏟은 다음 선풍기 바람만으로도 시원하지만 추위는 그렇지 않았다. 추위는 확실하게 영역을 넓혀 가고 한 번에 물러가지 않는다. 몸을 움직여도 그때뿐이거나 땀을 흘린다고 해서 추위가 멈추지는 않는다. 추위가 발가락 끝에 도달했을 땐 이미 추위가 확장의 강한 기운을 장착한 후다. 추위는 나에겐 너무 쓰다. 겨울은 왜 이토록 쓸까. 겨울은 영리해서 해가 비치면 도망을 다닌다. 건물 안으로 들어와 해가 들어오지 않는 구석에 웅크리고 있다가 발가락에 들러붙는다. 겨울은 그 쓴 맛을 끝에서부터 서서히 맛보게 한다. 너무 쓰다. 몸을 돌려 전기난로에 발을 갖다 대고 있지만 쉽게 겨울이 물러가지 않는다. 겨울은 너무 써서 너무 싫지만 너무 싫어한다고 해서 피할 수 없다. 그게 너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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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물이 되려면

얼마나 흘러야 하는 걸까


추억은 시들었다 싶으면

처음처럼 다시 꽃을 피워

기억의 자양분을 만들고


기억이 물이 되고 먼지가 되려면

얼마나 눈을 감아야 하는 걸까


눈을 감으면 다시 하얗게 시작된 세계

사랑과 상처의 들숨과 날숨의 사이에

나를 끼워놓고 하루에도 몇 번씩

내 몸통을 조여 오고


하얗게 시작된 세계에서 만나는 수많은 너는

나의 기억을 만지고


너의 손길이 닿은 내 기억은

우리의 시간이 되고


우리의 시간은 단단한 연무가 되어

마음을 딱딱하게 채우고


너에 대한 에움의 길은

기억을 물로 만드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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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환이 묻어있는 사진을 담아오라고 학창 시절 사진부 선배들은 우리를 그렇게 닦달했다. 캔디드 인물사진 속의 장점은 슬픔과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다큐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를 보면 2015년에 죽은 세계적인 사진작가 메리 앨런 마크가 비비안의 사진을 보며 그녀는 사람들에게서 기쁨도 볼 줄 알고, 슬픔과 그리고 위트와 유머까지 사진으로 담을 줄 알았다고 했다.


메레 앨런 마크는 인물사진을 찍었던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주로 소외된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풍경사진이 아니기에 피사체를 담으려면 피사체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풍경사진은 비싸고 좋은 망원렌즈로 여기서 저어어기를 죽 당겨서 촬영을 하면 되지만 인물을 담으려면 그 인물 가까이 가야 하고, 인물을 담기 위해서는 그 인물과 어느 정도 친밀감이 있어야 한다.


학창 시절 사진부 선배들에게 혼나지 않으려면 사진 속에 슬픔과 기쁨이 묻어나는 사진을 담아가야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이 전통시장이었다. 그때는 선배들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는 것이 중요했다. 일단 선배들의 눈에 든 사진을 담아오면 살아남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날은 사진부 암실은 거의 지옥이다. 요즘 사진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대형마트에도, 같은 말을 하지만 일단 요즘은 이렇게 인물 사진을 캔디드 방식으로 담는 것은 거의 어렵게 되었다. 또 담으려면 일일이 말을 해야 하니 서로에게 불편하고 제대로 된 자연스러운 모습을 포착할 수 없다.


대형마트와 전통시장의 가장 다른 점은 대형마트에서 물품을 파는 사람들은 대체로 늙은 사람들은 없다. 전통시장에서 가판대에서 식품을 파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인들이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다. 아무래도 그들의 모습 하나하에는 슬픔과 기쁨이 도사리고 있다. 매일매일 나와서 장사를 하지만 쉽게 주머니에 돈은 들어오지 않고, 그러나 하루만 장사를 하지 않으면 이틀을 굶어야 하는 이상한 구조의 사회에서 그들은 무엇인가와 타협을 하고 매일 그 자리에 나와서 장사를 한다.


전통시장이 위태위태하다고 해도 지역마다 전통시장은 몇 개씩 있고 또 5일장이 열리는 곳도 있다. 5일장이 열리면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곳이 전통시장이다. 평소에 한산하던 시장에도 5일장이 열리면 사람들이 바글바글한다.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시장에 한가득이다. 이제 코로나도 서서히 물러가는 분위기니까 코로나 이전 같아져야 할 텐데. 전통시장을 돌아다니다가 국밥 한 그릇이나 파전 한 판을 막걸리와 함께 먹는 맛이 있다.


시장에는 삶이 있다는 말을 듣곤 한다. 그건 아마도 시장에 가면 삶이라는 형태를 직관적으로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진은 어떻든 포토그래프, 즉 빛으로 그린 그림이니까 빛을 잘 다루는 자가 사진을 잘 담는다. 잘 담는다, 라는 의미 속에는 사진이 말하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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