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기행은 이름도 경주고 지명도 경주다. 미국 영화에서는 지명을 사람 이름으로 쓰는 경우가 흔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드물다. 경주라는 이름이 사람 이름으로도 꽤 잘 어울린다. 영화 제목부터 묘하게 재미있다. 얼핏 보면 경주여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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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블랙코미디를 표방한 가족 복수극이다. 8년 전 수학여행을 갔던 막내딸 경주가 사이코패스에게 살해당한다. 시간이 흐른 뒤 엄마와 세 딸은 범인을 납치한다. 약물을 먹여 기절시킨 뒤 경주로 데려가 가족여행으로 가장하고, 그곳에서 죽인 뒤 알리바이를 만들려고 한다. 그런데 일이 계획대로 될 리가 없다. 사이코패스 살인마 백상현이 세 모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면서 영화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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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다. 그런데 굉장히 재미있지는 않다. 이게 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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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만 놓고 보면 더 재미있을 수 있는 영화다. 세 모녀는 전문적인 납치범도 살인범도 아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딸과 동생을 죽인 놈을 직접 죽이려고 나선 것이다. 그러니 계획에 구멍이 생기고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오히려 그 부분이 이 영화의 가장 재미있는 지점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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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알리바이는 어떻게 만들 것인지, 경찰의 수사는 어떻게 피할 것인지 하나하나 신경 써야 한다. 법대를 졸업한 둘째가 이 일에 관여하는 것도 그래서 흥미롭다. 그런데 가족 사이의 갈등과 복수 계획이 맞물리면서 다음 장면을 기다리게 만드는 힘이 조금 부족하다. 잘만 끌고 갔다면 세 모녀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긴장감이 되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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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복수극의 힘이 조금 빠진 뒤에는 백상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스릴러처럼 밀어붙여도 괜찮았을 것 같다. 문제는 그가 정말 무서운 살인자라는 느낌이 생각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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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의 하정우나 '악마를 보았다'의 최민식처럼 등장만 해도 불안해지는 종류의 악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후반부에 셋째와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하면서 본색을 드러내기는 한다. 하지만 영화 속 뉴스에 도배될 만큼 무시무시한 범죄자라는 설정에 비하면 폭력성이 충분히 느껴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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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영화가 밋밋하게 느껴진다. 재미가 없는 건 아니다. 볼 만하다. 다만 ‘이 영화는 꼭 봐야 한다’는 데까지는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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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아쉬운 것은 이 시나리오가 2021년 영화진흥위원회 공모전에서 3등을 했다는 점이다. 막내딸을 죽인 범인을 납치한 엄마와 세 딸이 가족여행을 가장해 경주로 복수여행을 떠난다는 한 줄만으로도 상당히 흥미롭다. 영화가 되려면 그 여행길에 사건이 하나씩 터지고, 그것들이 서로 얽히면서 처음의 복수 계획이 엉망이 되어야 한다. 영화에는 이미 8년이라는 시간이 있다. 8년이면 복수를 준비하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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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긴 시간 동안 네 모녀가 무엇을 준비했고, 무엇을 숨겼고, 무엇 때문에 서로 갈라지는지를 조금 더 깊게 파고들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복수를 하러 가는 길에서 가족이 오히려 무너지는 과정도 더 극적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배고픔 같은 아주 사소한 문제와 예상하지 못한 사고가 계속 끼어들었다면 영화의 블랙코미디도 훨씬 살아났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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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영화가 좋았던 건 무거운 소재를 주인공들이 무겁게만 끌고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딸을 죽인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뒤에 해결해야 할 일이 더 많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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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것도 그렇다. 내 몸에서 떼어낸 것처럼 지켜주고 싶은 존재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돌아서서 신경 쓰지 않고 살고 싶은 존재이기도 하다. 가까워서 더 잔인하고, 가까워서 쉽게 놓을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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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기행은 경주로 가는 여행이면서 경주에게 마지막 여행을 보내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옥실은 8년 동안 붙잡고 있던 경주를 마지막에 그렇게 놓아준다. 그 장면은 뭉클했다. 옥실의 삶은 세 딸과 달리 8년 전에 멈춰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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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가 없어서 아쉬운 영화가 아니다. 재미가 있어서 더 아쉬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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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영화로 나오다니, 하고 생각했는데 은혼도 있고 시티헌터도 있고 진격의 거인까지 실사화된 마당에 이제 와서 이상할 것도 없다. 일본은 정말 만화라면 일단 실사영화로 만들어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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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액션 그래픽이 마녀 같은 느낌이라면 일본은 시티헌터 같은 느낌이 강하다.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액션과 과장된 움직임을 그대로 가져오는 쪽이다. 사카모토 데이즈도 그렇다. 말도 안 되는 만화를 영화로 옮기다 보니 말도 안 되는 그래픽이 화면을 계속 뒤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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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데이즈는 애니메이션으로 꽤 재미있게 봤다. 전설적인 킬러 사카모토가 어느 날 편의점에 들렀다가 한눈에 반한 여자에게 고백하고 결혼한다. 그리고 킬러 생활을 그만둔다. 이후 행복하게 딸과 함께 편의점을 운영하며 살아간다. 왕년의 날렵한 킬러는 어디 가고 엄청나게 푸짐해진 아저씨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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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킬러들이 사카모토를 죽이러 찾아오면서 이야기가 달라진다. 몸은 예전 같지 않은데 실력은 그대로다. 초능력자가 나오고 총알을 이리저리 피하고 방탄 안경에 무술에 총질까지 나온다. 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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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역은 메구로 렌이 맡았고 일본에서 잘나가는 젊은 배우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은혼이나 진격의 거인도 그랬다. 일본에서 이름 있는 배우들을 잔뜩 데려다가 만화 속 인물을 연기하게 한다. 배우들을 보는 재미는 있는데, 그것과 영화가 재미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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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가 지키려는 건 가족이다. 아내와 한 약속도 있다. 이제 다시는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그래서 아무리 자신을 죽이려는 킬러들이 달려들어도 예전처럼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원작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왔으니 액션이 벌어지는 방식도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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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액션영화라기보다 코미디에 가깝다. 피식 웃게 만드는 장면이 계속 나온다. 사카모토를 죽이러 온 킬러와 사카모토, 그리고 능력자 신을 나란히 앉혀 놓고 아내가 훈계하는 식의 장면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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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나 저러나 만화에서는 재미있었을 법한 장면인데 사람이 실제로 연기하고 CG를 입히니 묘하게 어색하다.그래서 어떠냐고 묻는다면 재미가 없다. 영화로서는 실패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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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만화를 실사화하는 데 상당히 적극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원작을 얼마나 똑같이 옮기느냐가 아니라 영화로 옮겼을 때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에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 웹툰 실사화 작품들을 보면 원작의 설정이나 캐릭터를 가져오면서도 실사영화에 맞게 이야기를 바꾸는 경우가 있다. 원작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과 원작을 영화로 만드는 것은 다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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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데이즈는 애니메이션으로 보면 만화적인 과장이 재미가 된다. 그런데 그 과장을 실제 배우와 실제 공간에 그대로 갖다 놓으면 재미가 아니라 어색함이 될 때가 있다. 이 영화가 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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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일본은 계속 실사화를 할 것이다. 사카모토 데이즈도 이 한 편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원작이 있으니 다음 이야기도 만들 수 있고, 등장인물도 많다. 다만 다음에는 원작을 그대로 옮기는 것보다 영화가 되는 방법을 먼저 생각했으면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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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레드에 14년 동안 붕가리스로 살아온 아내가 자신의 사연을 올렸다. 결혼 생활의 행복을 상식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해도 아내나 남편은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가족들이 행복하다면 나 정도의 불행은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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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라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곰팡이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조금씩 영역을 넓힌다. 그러다 어느 날 서로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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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을 올린 아내는 남편과 잠자리를 가지려고 할 때마다 컨디션이 안 좋다는 핑계, 아이들 핑계, 씻지 않았다는 핑계, 오늘은 운이 안 좋다는 핑계까지 들으며 14년을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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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도 아찔한 관계를 다룬 블랙코미디다. 리메이크작이고 우리나라에서는 하정우와 이하늬 주연의 [윗집 사람들]로 다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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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은 달랑 네 명이다. 그런데 이 네 명이 아주 탄탄하다. 코미디 연기의 천재 세스 로건, 이번에는 감독까지 맡은 올리비아 와일드, 페넬로페 크루즈, 에드워드 노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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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온 부부를 집으로 초대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특별히 와일드한 액션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사건이 터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조마조마하다. 다른 부부의 아내와 남편의 품에 안기기까지 두 사람이 살아온 결혼생활이 무너져가는 과정이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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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보면 조와 엔젤라는 너무 다정하고 행복한 부부다. 하지만 이미 1년이 넘도록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 부부 사이에 성관계만 없고 다른 모든 것이 행복하다면 괜찮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을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일은 단순히 육체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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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는 피아노 연주가다. 자신의 실패가 점점 자신과 가족의 삶을 조여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실패가 쌓일수록 그는 움츠러들고, 그 좌절감은 결국 부부관계에도 금이 가게 만든다. 엔젤라 역시 그런 남편을 지켜보는 일이 힘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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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는 영화 같은 장면이었다. 데이트 상대가 엔젤라를 집까지 바래다줬지만 엔젤라는 곧바로 조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던 퍼브까지 뛰어간다. 조가 너무 보고 싶어서였다. 조는 그때를 떠올리며 그렇게 땀을 많이 흘리는 여자는 처음 봤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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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 돌아가면 두 사람은 열렬히 사랑했다. 매일 서로를 안고 뒹굴던 사이였다. 그런데 눈을 뜨고 보니 현실에는 갈등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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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두 사람은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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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큰 줄기는 원작이나 우리나라 리메이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멀리서 동경하던 야한 모습을 실제로 마주하게 되면 오히려 낯설고 힘겨워질 때가 있다. 익숙함은 편안하지만 어느 순간 권태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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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만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도 도발과 자극이 꽤 세다. 그래서 보는 내내 묘하게 긴장하게 된다. 블랙코미디답게 웃기면서도 그 웃음 뒤에 씁쓸한 맛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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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에서 가을 운동회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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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시절 시월은 가을 운동회의 달이었다. 운동회 날이면 학교 앞에 병아리 아저씨, 잉어 아저씨, 솜사탕 아저씨가 진을 치고 아이들을 유혹했고, 운동장 하늘에는 만국기가 걸렸다. 지금 생각하면 왜 만국기를 걸었는지 모르겠다. 어느 나라를 기념하는 것도 아니었고, 우리가 특별히 국제적인 행사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형형색색의 만국기를 보면 알았다. 아, 오늘 운동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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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집을 나서면 가을 햇살이 체육복 위에 내려앉았다. 하얀 체육복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이상하게도 그 시절 가을 운동회 날에는 늘 날씨가 좋았다. 요즘처럼 덥지도 않고, 비가 올 것처럼 흐리지도 않았다. 딱 운동회 하기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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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다리기, 박 터뜨리기, 장애물 달리기, 기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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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회의 꽃은 역시 계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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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 되면 엄마가 김밥이나 찬합에 도시락을 싸서 운동장으로 왔다. 돗자리를 깔고 가족끼리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가족이 많은 집은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전부 나왔다. 운동회는 학교만의 행사가 아니었다. 학교가 있는 동네 전체가 하루 동안 들썩이는 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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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 끝나면 매스게임이 시작됐다. 매스게임을 하는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유난히 새까맸다. 여름 내내 남아서 연습했기 때문이다. 한여름 운동장에서 매일 연습한 아이들의 얼굴에는 가을이 와도 여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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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상하게도 육 년 전부 청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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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쯤은 백군이 되고 싶었다. 체육복도 하얗고 운동화도 하얀데 모자까지 하얀색이면 얼마나 예쁠까.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육 학년이 되어서도 나는 청군이었다. 내게 백군은 끝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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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회에는 별일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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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만 한 모래주머니를 힘껏 던졌다가 엉뚱하게 날아가 얼굴에 맞고 우는 아이도 있었다. 부모님과 함께 달리는 순서에서는 자식 체면을 살려주겠다고 마음만 앞선 엄마 아빠들이 넘어졌다. 나이를 잊은 사람들처럼 달리다가 운동장에 그대로 나뒹굴었다. 아이들은 웃었고, 부모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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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던 아이가 청군과 백군으로 갈리면 그것도 일이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사이인데 그날만큼은 묘하게 경쟁심이 생겼다. 청군이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아이가 백군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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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회가 끝나면 먼지가 잔뜩 묻은 체육복을 벗고, 씻은 다음 방바닥에 엎드렸다. 엄마가 싸준 김밥이 남아 있으면 그걸 마저 먹으면서 만화를 봤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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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운동회가 그렇게 시끄러운 행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운동장은 원래 시끄러운 곳이었고, 아이들은 원래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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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시끄러워서 민원이 들어와 축소되거나 운동회를 하지 않는 초등학교가 많다고 하니 예전 가을 운동회가 그립기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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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미래에 가을 운동회가 다시 돌아온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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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바쁜 부모들 대신 휴머노이드가 운동장에 나와 아이를 응원할지도 모른다. 다른 집 휴머노이드가 우리 집 것보다 더 다정하고, 더 재미있고, 더 좋은 말을 해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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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주인공 아이가 자기 부모보다 다른 집 휴먼로이드를 더 좋아하게 되고, 그걸 본 다른 아이가 화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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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누르지 말아야 할 버튼을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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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말살 프로젝트가 실행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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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러시아에서 만든 공포 액션 영화다. 등장인물이라고 해봐야 네 명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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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있는 젊은 부자 막스가 애인 리나를 별장으로 데려간다. 둘이 한창 즐기고 있는데 사냥을 하러 온 막스의 동생과 또 다른 남자가 합류한다. 그러면서 리나를 바라보는 남자들의 눈빛이 조금씩 달라진다. 결국 여자를 건드리기 시작하고, 일이 꼬이면서 리나를 죽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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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리나는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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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은 리나는 자신을 죽이려던 남자들을 하나씩 상대한다. 결국 남자 셋은 차례로 저세상으로 간다. 이야기는 이게 전부라고 해도 될 만큼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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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 간단한 이야기를 한 시간이 훨씬 넘도록 끌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시작부터 리나와 막스의 정사 장면을 꽤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재미있는 건 이 두 배우가 영화 [서큐버스]에도 함께 나온다는 점이다. 그 영화에서도 비슷하게 거의 벗다시피 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공포보다 다른 쪽에 신경을 쓰게 만들더니, 여기서도 시작부터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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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가 별장에 들어오고 리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야릇해진다. 그리고 결국 강제로 겁탈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이후부터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다. 산속에서 살아남은 리나가 남자 셋을 하나씩 상대하고, 영화는 그 과정에서 고어한 장면들을 꽤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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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예산 영화에다 내용도 어디선가 한 번쯤 본 것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이상하게 리나를 응원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냥 또 이런 영화인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부터 남자들이 빨리 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끝까지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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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러나 공포 액션 영화가 저예산으로 만들어졌다면 아무래도 재미의 한계가 생긴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극한의 공포를 느끼는 인물의 심리 변화를 오래 붙잡고 가거나, 수중 촬영처럼 배우들이 몸을 아끼지 않은 장면을 집어넣었다. 제한된 공간과 네 명의 배우만으로 영화를 끌고 가려는 감독의 고생도 어느 정도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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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의 첫 장편영화라고 한다. 별장과 산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인간의 폭력성을 ‘사냥’이라는 방식으로 풀어내려 한 영화다. 거창하게 말하면 그렇고, 그냥 보고 있으면 한 여자가 자신을 죽이려던 남자들을 차례로 잡아 죽이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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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여자는 자나 깨나 남자를 조심해야 한다. 남자도 남자를 조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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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정말 좋은 사람 하나 만나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악독한 인간들도 처음부터 얼굴에 ‘나는 나쁜 사람입니다’라고 쓰고 다니지는 않는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의 감정이 죽을 때까지 그대로 간다는 보장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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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사이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믿기 어려운 사건들이 벌어진다. 결국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는 아주 뻔한 이야기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그게 제일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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