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표지


최근에 나온 무라카미 라디오의 전신 같은 책이다. 2001년도 책이니까 이 책도 나이가 스무 살이나 먹었다. 도서출판 ‘까지'는 현재 인문학 위주의 책만 출판하고 있는 모양이다. 최근에 출판사 까치의 창립자 대표의 안타까운 기사도 있었다. 도서출판 까치는 ‘까치글방’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까치에서 출판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무라카미 라디오’가 현재 묶음으로 되어 있는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의 전신 격이다. 사람들이 하루키의 소설보다는 에세이를 좋아하게 만든 책이 이 에세이 집일지도 모른다. ‘슬픈 외국어’처럼 깊은 고찰이 있는 에세이가 아니라 하루키가 룰루랄라 하며 적어 놓은 일상적인 이야기가 가득하다. 

하루키가 여러 에세이에서 말하는 것을 한 줄로 요약을 하면 ‘인간이라는 실체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다, 무엇인가의 계기로, 자 오늘부터 달라지자!라고 결심을 해봤자, 그 무엇인가가 없어져 버리면 원래의 모습으로 엉거주춤 돌아가버리고 만다, 결심 따위는 어차피 인생의 에너지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로 요약할 수 있겠다.

요컨대 사람들은 행복하기를 바라며 그 행복이라는 건 저축과도 같아서 필요할 때 주머니에서 꺼낼 수 있다고 착각한다. 계획이나 결심이니 하는 건 좋지만 행복은 그 당시, 그 시점에 다 써버려야 한다. 여기서 행복이 흥청망청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만 이렇게 말을 하면 사람들은 행복을 소진하는 것을 ‘흥청망청’과 묶어 버린다. 인간이란 달라지지 않는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어떻든 무라카미 라디오는 다들 알겠지만 깊은 생각 따위 없이 읽을 수 있는 글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독자들의 바람이 이루어져 이 무라카미 라디오가 실제 라디오 방송이 되었다. 그날은 역사적인 날로 하루키가 1일 디제이가 되어서 도쿄 FM 라디오에서 ‘런 앤 송’을 해버렸다. 하루키는 음악을 직접 선곡해서 틀었고 중간중간 음악에 대해서 짤막하게 언급을 했다. 독자들은 환호를 했고 1회 성으로 끝날 것 같았던 무라카미 라디오는 아직까지도 하루키가 직접 육성으로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하루키는 작년 2월 뉴요커지에서 ‘일큐팔사 4권의 주인공은 덴고의 16살 딸‘이라는 인터뷰를 했는데 직접 들어가서 읽어보시면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뭐? 일큐팔사 4권? 덴고의 딸? 정말 소설 '일큐팔사'를 좋아한다면 환호를 즐길만한 인터뷰가 실려있다. https://www.newyorker.com/culture/the-new-yorker-interview/the-underground-worlds-of-haruki-murakami


하루키가 '무라카미 라디오'라고 말하는 것이 이제는 어색하지 않은 지금 코로나 잘 이겨내고 있지요. 독자들은 언제나 당신의 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속표지



https://www.bilibili.com/video/BV1k7411r7vG/?spm_id_from=333.788.videocard.0

하루키의 육성으로 음악을 소개하는 무라카미 라디오를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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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2021-01-15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관님은 하루키 덕후??
 


골목의 겨울밤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어리광을 부릴 수 없을 만큼의 차가움과 투정을 부려도 좋을 비켜간 포근함이 동시에 있다. 골목을 비추는 가로등 불빛은 오랜 시간 잘 손질된 기품 있는 구두처럼 조금 위에서 노랗게 떠 있고, 저 먼 하늘의 별빛은 너무 추운지 골목까지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골목에 새어 나오는 집집의 빛은 다 씹고 잘 싸서 뭉쳐 버려 놓은 껌처럼 존재감이 미미하기만 하지만 그래서 실체를 더 돋보이게 한다. 그런 골목 세계는 전설 속 그림자가 없는 요정들이 자연스럽게 드나들 수 있도록 노란빛을 발산하는 것이다.

겨울밤 골목의 어둑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오래전, 이 차가운 시기가 지나고 봄이 골목에 밤처럼 내릴 때면 - 김승옥의 '역사'의 한 구절에 따르면 - 아낙네들은 풍로를 밖으로 내놓고 그 위에 얹은 냄비 속에 요리 책에는 없는, 그들의 그때그때의 사정이 허락하는 신기한 요리 재료를 끓인다. 이 냄비와 저 냄비 속에서 끓고 있는 음식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풍토보다 더 다르다. 마치 마귀할멈이 냄비 속에 알지 못할 재료를 넣고 마약을 끓여 내듯이 그네들도 가지가지의 마약을 끓이고 있는 것이다.

일을 마치고 골목으로 모여드는 골목의 주인공들은 그 마약에 취해 밤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골목의 작은 틈을 고집스럽게 벌리고 나온 멜로디에는 달콤한 멜로디의 팝이나 사랑을 잃어버린 예술가의 노래가 있었다. 십이월 골목의 추위는 투명한 곡사 탄도 같아서 그 속에 잠시만 서 있으면 그 포물선에 그만 빨려 들어가서 영영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사람이 사라지고 나면 사람의 형상이 한동안 그곳에 남아 골목의 겨울 추위를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추위의 겨울 골목을 느끼는 것일까.

골목의 어떤 집에는 기능이 있기나 할까 싶은 자물쇠로 닫힌 문이 보인다. 술이 취한 누군가가 발이나 돌로 툭 치면 탁 떨어질 것 같은 열쇠를 열고 들어가면 바로 방이 나온다. 발로 차면 떨어지는 열쇠를 걸어두지 마세요, 그대로 방이 나오니까요, 마치 구슬픈 노래 가사 같다.

저기 먼 곳으로 도심의 불빛이 보인다. 골목을 빠져나가는 자들과 다시 골목으로 들어와 몸을 눕히는 자들이 뒹구는 이 세계는 꼭 마법의 세계.

지독한 냄새에 취하면 마약 같은 향기.

변함없지만 변화도 없는 색채.

골목의 겨울밤 속으로 깊게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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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OJVXS0_pdDY



폭력은 공포 최상위에 있다. 폭력의 질이라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없고 드러나지 않으며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 서서히 하나의 굳건한 체제를 완성해 간다. 그리하여 폭력은 최고의 공포다.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은 그런 폭력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책 속에는 ‘알파빌’이라는 모텔에서 떡이 되도록 구타를 당한 중국 여자를 돌봐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알파빌’이라는 곳에서 폭력이 이루어진다. 하루키가 따온 알파빌은 장 뤽 고다르의 65년작 ‘알파빌’을 말한다. 안나 카리나가 주연으로 미래 세계에서 범인을 찾는 레미라는 탐정의 이야기다. 

그 영화 속 미래도시 ‘알파빌’에서는 감정을 가지는 일은 용납되지 않는다. 폭력만이 가득한 도시가 알파빌이다. 눈물을 흘리거나 우는 사람은 체포되어 공개처형이 된다. 그래서 알파빌에서 감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랬다간 폭력의 지배를 받는다. 사립탐정 레미는 실종된 과학자들을 찾기 위해 기자로 위장하고 미래도시 ‘알파빌’로 간다. 65년도 작이라 어떤 특수촬영이나 그래픽적인 요소는 없다. 하지만 장 뤽 고다르의 고다르식 영화를 좋아하면 빠지게 되는 영화다.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 애프터 다크'를 이해하는데 영화 ‘알파빌’을 보면 크게 도움이 된다. 바로 그 이야기의 축소판이 어둠의 저편에 나오는 모텔 알파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폭력, 언어의 폭력으로 인해 티브 저편의 세계 속에 갇혀 잠만 자는 아사히 에리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른들의 칭찬에 잘못된 자아가 만들어져 간다. 아사히 에리는 칭찬을 받기 위해 자아를 말살시키며 가면을 쓰는 법을 알았다. 그리하여 어른들이 원하는 대로 보이는 페르소나를 가지게 된다. 영화 ‘소리도 없이’에서 가장 무서웠던 캐릭터 초희가 그렇다. 인질로 잡혔지만 아무렇지 않게 잘 놀고 잘 먹고 잘 지낸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원래 자신의 집에서도 삼대독자만 좋아하는 부모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부모의 언어폭력으로 인해 가면을 쓰며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소설 속 마리는 다카하시가 왜 음악을 관두고 법에 대해서 공부를 하는지에 대해서 듣는다. 다카하시는 법학도로 법원에 공개방청을 하러 갔다가 기묘한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법원에서 옳고 그른 것을 심판받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하고는 다른 종류의 인간들이라고. 나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재소자들이다,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다카하시 자신은 흉악범죄를 일으킬 가능성 같은 건 없고, 평화주의자였고, 성격도 온화하고, 너그럽고, 어렸을 때부터 누구에게도 손을 대지 않는 그런,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폭력은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주인공 다카하시는 재판소에 다시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 있다. 우리 자신 내부에 ‘저쪽 세계’가 아마 몰레 숨어 들어와 있지만 그런 것을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겉으로 봐서 누가 나쁜 사람인지, 범죄자인지, 살인자인지 분간을 할 수 없다. 모텔 알파빌에서 중국 여자를 불러서 사정없이 구타를 한 남자 역시 아주 평범하고 아내에게 다정한 이웃집 사람이었다. '악의 평범성'은 겉으로 절대 드러나지 않는다. 


사람을 네거티브하게 변화시키는 것은 ‘폭력’이다. 그런 폭력은 영화 ‘캐빈에 대하여’에서 나오는 것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어둠의 저편’에서 나오는 알파빌이라는 모텔은 '댄스 댄스 댄스'의 돌고래 호텔처럼 상징이 대단하다. 장 뤽 고다르의 영화 ‘알파빌’을 고스란히 하나의 모텔로 함축해놨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폭력으로 인해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리하여 영화 속 ‘알파빌’과 소설 속 ‘알파빌’에서는 섹스는 가능하지만 사랑하는 감정을 소유해서는 안 되는 곳이다. 


읽고 나면 그 속에 깔린 폭력성에 대해서 부르르 떨리는 소설이지만 하루키는 어둡기만 할 것 같은 이야기를 자신만의 유머를 통해서 가림막을 쳐놨다. 다카하시가 마리를 알파빌로 데려다줄 때 문 앞에서의 두 사람의 대화라든가. 마리와 새벽에 이야기를 하고 알파빌로 데려다줄 때, 문 앞에서 진지한 표정을 한 다카하시는 마리에게, 한 가지 고백해 줄 일이 있어.라고 말한다.

 뭔데?라고 마리가 말하니, 지금 내 생각은 마리하고 같다는 거야.라고 다카하시는 말한다.

 하지만 오늘은 안 되겠어. 깨끗한 속옷을 입지 않았거든.라고 말하니 마리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농담은 그만두라는 말을 한다.


하루키는 세상에 자행되는 모든 폭력, 타격이 있는 폭력이던 언어폭력이던, 이전의 소설에서처럼 둘로 쪼개 놓고 그걸 독자들이 찾아가는 방식으로 잘 풀어냈다. 진실이라는 것을 입으로 정직하게 말하려고 하지만 늘 그것은 어긋나고 제대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재미있는 점은 ‘1973년의 핀볼’에 나온 쥐가 한 대사를 그대로 다카하시가 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걸 찾는 재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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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루가 지나간다. 아무 일 없이, 재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어제와 다를 바 없이 평범하고 평온하게 하루가 지나간다. 그래서 얼마나 고맙고 다행인지 모른다. 허기를 느끼며 따끈한 된장국에 밥을 말아먹을 생각에 집으로 가는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선셋이 보이는 전망 좋은 방에서 와인 잔을 부딪힐지도 모른다. 오늘 행복하다고 해서 내일도 행복하라는 보장이 없다. 오늘 절망 속에 있더라도 내일은 벗어날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부질없다는 것을 잘 안다. 행복이라는 것이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찰나의 행복한 순간이 왔을 때는 전부 소진해야 한다. 소리 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당신이 나의 곁으로 얼마나 가까이 왔는지 알 수 없다. 그래도 가슴의 떨림을 느끼고 손을 뻗어 격렬하게 당신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래야 내 그림자가 빛에 얼마나 밀려났는지 알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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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골목길에서 하늘과 골목의 모습을 찍었는데 꼭 나를 닮은 것 같다. 정확히는 메리 엘렌 마크의 사진을 들여다봤을 때 들었던 감정이 들었다. 불안하고 더 이상 쓸모없어진 느낌. 어쨌든 '흐린 날의 오래된 골목'은 나를 닮았고 이 풍경을 담은 사진은 메리 엘렌 마크를 닮은 것이다. 어딘지 다양한 모순이 가득하고, 불편한 진실이 숨겨져 있는, 그렇지만 자연스럽고 예리한 자연의 모습과 시간의 흐름이 느껴졌다. 


메리 엘렌 마크의 사진 한 장은 십 분 이상 쳐다보게 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11년에 한국에서 전시회를 할 때 그런 경험을 했었다. 사진 속 사람들은 어째서 그토록 비극적이게 보이는 것일까. 이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이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메리 엘렌 마크의 사진 한 장에는 수많은 생각을 불러내게 한다. 다이안 아버스의 사진 확장판 같은 기분이다. 메리 엘렌 마크는 죽은 지가 고작 5년 전이다. 그녀는 다큐멘터리 작가이지만 그녀의 사진에는 친밀함이 잔뜩 묻어있다. 그 속에는 ‘휴머니티’가 사진 속 인물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역시 다이안 아버스의 사진에도 그러했듯이.


그녀의 사진 속 아이들의 모습은 중화 단계 없이 어른으로의 항해 같은 느낌이 강하다. 빨리 어른이 되고픈 아이들의 모습이다. 카메라 앞에서 당당하게 담배를 피우는 모습도 그렇고. 


남아있는 골목의 모습도 변화 단계 없이 그대로 신도시로 바뀌어 버릴 것 같다. 그렇게 보기 싫었던 전봇대와 전깃줄도, 벽의 금도, 아차 하는 순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날까지 흐려 음험하고 불우한 기운이 있다. 그 꼴이 정말 나 같다. 이런 기운은 메리 엘렌 마크의 사진을 처음 들여다봤을 때의 딱 그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사진 속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밀착된 비관은 없다. 우리는 아주 건강한 존재야, 우리는 생동감을 가지고 삶에 임하고 있어,라고 말하고 있다. 


식물을 풍성하게 자라게 하려면 역설적이게도 가지를 잘라내면 된다. 그래야 식물은 더욱더 성장을 한다. 메리 엘렌 마크는 사진을 잘라내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그녀는 프레임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성장은 사진을 잘라내지 않는 것이 식물의 가지를 잘라내는 것과 흡사하다. 골목은 쓸쓸하고 불우하지만 골목의 방 안에서 따뜻하게 이불을 덮고 꿈을 키우던 적이 있었다. 인공 불빛은 밝고 따뜻하게 보이지만 광합성이 없고 자연광은 생명력이 강하지만 그만큼 눈과 피부에 좋지 않다. 모순은 어디에나 있고 세상은 불편한 진실이고, 이 모든 것이 역설이며 그 속에서 맛있는 음식 하나 먹을 수 있다면 우리는 덜 불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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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업과 취미 그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묘한 무엇인가가 도사리고 있다.


생업을 하는 어부는 오늘 그물에 고기가 걸리지 않으면 이틀이 힘들다. 하루 물고기가 낚이지 않으면 하루가 힘들어야 하지만 이틀이 힘들고, 이틀을 못 낚아 올리면 5일이 힘들 수 있다. 만선을 이루어도, 전혀 낚이지 못해도 그물은 헝클어져 있으니 매일 손질을 해줘야 한다. 고기를 매일 낚아 올리는 일, 그건 어부의 생명을 바다에 매일 조금씩 나눠주는 일이다.


취미로 하는 낚시는 어떤가. 낚시를 하면서 책을 읽거나 폰을 만지작거리며 낚시에 집중하는 것도 애매하다. 고기가 낚이면 고기를 바늘에서 빼고 지렁이를 끼워야 하고 고기를 낚지 못하고 지렁이만 빠져버리면 그것대로 손에 지렁이의 진액을 묻혀가며 낚시에 열을 쏟아야 한다. 비록 취미라 할지라도.


신은 양과 호랑이 모두를 창조했다. 양은 순수의 상징이고 호랑이는 야만의 상징이다. 두 가지 모두 완벽하고 필요한 존재다. 야만의 호랑이가 늘 이기는 삶을 살고 살육을 할 수 없다. 그 세계에서 도태된 호랑이는 무리에서 버림을 받게 된다.


생업과 취미는 분명하게 다르고 대조를 이루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낚시는 어떤 면으로 그 경계가 모호한 지점이 있다. 취미 낚시꾼들을 위해 생업의 낚싯배들은 취미의 낚시꾼들을 실어 나른다. 그런 모호한 지점이 각자 제멋대로인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고 있다. 인간의 삶이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도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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