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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잠자, 그후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 중 ‘사랑하는 잠자’ 그 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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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집을 나서려고 했다. 오겠다던 시계공 꼽추 아가씨가 한 달이 지나도록 오지 않아서 잠자는 시계공 아가씨를 찾아 나서려고 했다. 잠자는 아가씨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은 심장의 문제가 아니라 머리가 사고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보고 싶다고 계속 생각하면 언젠가는 틀림없이 다시 만날 수 있어요.라고 말한 것이 잠자의 뇌의 한편에 곱게 쌓인 먼지처럼 머물러 있었다.


시계공 아가씨가 말한 세계의 난리가 더 깊어졌는지 크르르하는 소리가 등을 훑고 지나갔다. 잠자는 가운에서 벗어난 옷을 입고 계단을 내려왔다. 매일 한 시간씩 계단을 오르고 내려갔다. 몸의 총체적 균형을 잡고 걷는 것에 집중을 한 덕분에 이제는 계단을 잘 내려갈 수 있게 되었다.


몸이라는 것이 적응을 하니 이렇게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고 움직인다는 것이 신기했다. 잠자가 그녀를 만나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시계공 꼽추 아가씨와 헤어지면서 그녀가 굼실굼실 입체적으로 몸을 뒤틀며 브래지어를 바로잡는 동작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그녀의 몸 여기저기를 만져보고 싶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온 세상의 여러 계단을 둘이서 나란히 오르내리고 싶었다. 원하면 된다는 그녀의 말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크게 머리에 새겨졌다.


어쩌면 누군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또는 누군가 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그 누군가는 여전히 자신이겠지) 못으로 판자 몇 장으로 창문을 막아 놓은 방에서 모든 것을 치우고 그녀와 같이 잠이 들고 판자를 치운 창으로 들이치는 빈약한 햇살을 받으며 같이 일어나는 상상을 했다.


이봐 잠자, 지금 나가면 안 돼.


잠자는 자신에게 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삐걱거리는 복도의 저편에서 나는 소리였다.


나에게 말을 하는 건 누구지? 이 집에 나 말고 누가 또 있었어?


잠자는 소리 쪽으로 삐죽 나온 귀로 최대한 소리를 들으려고 확실하게 고개를 삐딱하게 돌렸다. 이제 처음 눈을 떠서 움직일 때처럼 관절과 근육의 사용이 미성숙하지 않았다. 만약 공격성을 띠고 새가 날아온다고 해도 지팡이와 쟁반 같은 것으로 방어를 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이봐 잠자, 잘 들어보라고. 나는 자네가 눈을 떴을 때부터 죽 자네를 지켜봐왔어. 자네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도 알았지.라고 복도 어딘가에서 소리는 잠자를 보고 말했다.


사랑,라고 잠자는 조용하게 말했다.


그래, 사랑 말이야. 하지만 잠자 자네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확실하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 내 말이 맞지?


소리는 음폭의 변화가 없었다. 반드시 잠자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야 하겠다는 노력이 없어 보이는 동시에 소리는 반드시 잠자에게 소리를 전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누구십니까?


잠자는 계단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류하고 복도를 걸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끼익 끼익하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수리를 한다며 자물쇠를 들고 가버려 뻥 뚫린 문의 공백이 눈에 들어왔다.


잠자는 잠깐 만났던 그녀가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브래지어라는 것을 움직여 가슴을 고정하는 굼실굼실한 동작을 떠올리니 바지의 앞섶이 부풀어 올랐다. 잠자는 다시 당황스러웠다.


당신, 머리가 좀 모자란 모양이네. 그래도 고추만은 여전히 씩씩하시고.라는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이봐, 잠자. 그래 그녀와 퍽이 하고 싶은가?


복도 저 끝에서 소리는 말했다.


그녀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퍽이 뭔지 모릅니다. 당신도 퍽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 것 같군요.


잠자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조금씩 걸으며 말했다. 오른손에는 인간 잠자로서 다시 걸음을 걸을 때 도움을 받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잠자는 지팡이를 꼭 쥐었다.


당연하지, 나는 퍽이 뭔지 알고 있지. 아마 잠자 자네만 빼고 어린아이라도 퍽이 뭔지 알고 있을 거야.


저기, 부탁이 있습니다.


잠자가 말했다.


부탁이 뭐냐고 소리는 되물었다.


제가 당신 곁으로 가고 싶습니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 당신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잠자는 소리를 만나서 시계공 아가씨를 만나는 도움을 받기로 했다. 잠자는 소리의 정체를 몰라 두려웠지만 시계공 아가씨를 만날 수 있다면 두려움 같은 건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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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갑충이로 변해 죽었던 그레고르 잠자를 되살렸다. 하루키의 단편 집 ‘여자 없는 남자들’의 모든 이야기가 좋지만 나는 특히 이 단편 ‘사랑하는 잠자’가 너무 좋다. 갑충이로 변해서 죽어 버린 그레고르 잠자를 되살렸기 때문이다. 그래고르 잠자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었다. 아마도 카프카가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살아난, 아무것도 모르는 잠자 잎에 시계공 아가씨가 나타나지만 아가씨가 집으로 돌아가면서 끝이난다. 여러 하루키의 소설처럼 칼로 두부를 자르듯 아쉽게 끝나고 만다. 그래서 그 뒤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서 이어서 한 번 적어 보았다.


이 표지는 카프카의 ‘변신’ 초판의 표지다. 1914년인가 카프카가 표지를 만드는 일러스트레이터에게 부탁해서 만들어진 책 표지이다. ‘변신’이라는 소설은 안 읽어본 사람도 어떤 내용인지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한 고전 명작이다. 소설이란 본디 답이 확실하게 있지 않아서 ‘대답’보다는 ‘질문’이 많아야 한다. 카프카의 ‘변신’은 어쩌면 확실한 답보다는 책을 덮고 난 후 던지는 질문이 더 많은 소설이다.​


이 ‘변신’이라는 소설을 읽은 사람 중에 제대로 읽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중에는 변신을 다시 책으로 만들어내는 출판사도 그중 하나다. 문지혁 작가도 말했지만 특히 책 표지에 벌레나 해충을 그림으로 일러스트 해놓은 카프카의 ‘변신’은 제대로 그 소설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최초 카프카의 1914년 초판 표지를 만들 때 카프카는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절대로 표지에 벌레를 그리면 안 된다고 했다. 벌레가 어디에도 나와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왜 그랬을까​. 백석의 시를 알려면 백석을 알면 시가 무엇을 말하는지 아는 것처럼 카프카의 ‘변신’을 잘 읽으려면, 그러니까 제대로 읽으려면 카프카를 알고 나서 소설을 읽으면 좀 더 이 소설을 읽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카프카는 독일계 유태인으로 이 소설을 독일어로 썼는데 그레고르 잠자를 ‘운거지퍼’라고 표현을 했다. 해충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히틀러가 유태인들을 가리켜 운거지퍼라고 했다고 한다. 카프카는 잘 알겠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살아있는 동안 꽤 고심을 했고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그 중심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카프카의 정체성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마치 운거지퍼를 보듯이​.


카프카는 그로 인해 세 번이나 파혼을 하는 등 정신적으로 고초를 겪었다. 카프카의 변신이나 여타 소설을 읽어보면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쓴 소설이 아니다. 대부분의 작가 내지는 소설가는 나 이외의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글을 쓴다. 하지만 카프카는 오로지 소설을 쓰는 것은 하나의 유희로서, 자신이 쓴 소설을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즐기는 것으로 썼다. 그리하여 친구였던 막스 부르트에게 내가 죽으면 소설들을 모두 태워달라고 했다. 카프카는 자신의 선택이 없이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일을 하고 생활을 했다​.


소설의 첫 문장은 뭐 이렇다.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의 참대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신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라며 시작한다​.


학자들은 벌레나 동물이 되는 소설을 비커밍언에니멀이라고 하는데 이 동물로의 변신은 어떤 정체성을 가진 자아가 또 다른 정체성을 가진 자아로 변신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사람이라는 정체성에서 벌레라는 정체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린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각각의 기능이 있다. 그것은 교육이나 환경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인격체의 한 부분인데 카프카의 변신에서는 그 ‘기능’을 잃어버린 정체성을 말한다. 그 ‘기능’을 잃어버린 사람을 ‘호모 사케르’라고 한다​.


인간도 짐승도 아닌 정체성을 ‘호모 사케르’라고 하는데 소설 ‘변신’에 나오는 그레고르 잠자는 호모 사케르를 말한다. 영화로 친다면 봉준호의 영화에 이 호모 사케르가 잘 나온다. 생명은 가지고 있지만 기능을 잃어버려 사회적으로 유효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레고르 잠자 같은 호모 사케르 같은 사람은 인간사회에 가득하다. 그리고 그들을 만드는 것 또한 사람들이다. 현대 사회는 엄청난 사람들을 소외시킨다. 요컨대 치매환자, 노숙자, 장애를 가진 사람을 기능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치부하고 벌레 보듯 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변신이란, 변신이 이루어진 그것이 확실하게 어떤 무엇이라고 딱 말할 수는 없지만 사람은 아니다. 호모 사케르는 자신의 집과 자신의 사람들 또는 자신을 모르는 이들과 과거와 현재로부터 추방된 자이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의 정체성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집을 청소해주는 아주머니다. 그레고르를 보자마자 벌레라고 한다.

우리는 호모 사케르를 보고 청소부 아주머니처럼 벌레 보듯 한다. 내가 사회에서 소외당하면서도 누군가를 호모 사케르 취급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는 아주 끔찍하다. 돈 잘 벌어오던 잠자가 죽고 난 후 가족은 아무 일 없는 듯이 소풍을 간다. 딸을 바라보며 다 컸구나, 이제 시집만 가면 되겠어. 라며 운거지퍼였던 그레고르 잠자가 없어진 자리에 또 다른 호모 사케르가 들어옴으로 사회는 유지가 된다. 카프카의 말처럼 책은 우리 내면에 얼어붙은 바다에 던져지는 한 자루 도끼여야 한다고 했는데 변신은 참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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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하루키가 메리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를 전합니다. 슈퍼든지 몰이든지 백화점이든지 어디나 새해까지 캐럴을 듣게 되는 것은 확실히 피곤한 일입니다. 그 마음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근래에는 그마저도 그립게 되었습니다. 코로나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한없이 무너지는 인류를 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번 크리스마스에는 피곤하기만 하던 캐럴이 더 간절합니다.  


음악을 듣는다는 건 어떤 면으로 ‘치유’가 아닌 ‘용서’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내가 삶을 통해서 또는 쓰는 일을 통해서 지금까지 저질러온 수많은 실수와 상처 입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음악은 한꺼번에 용서해 주고 있는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할까요.


이제 그만 됐으니까 잊어버려요,라고. 그것은 ‘치유’가 아닙니다. 나는 절대로 치유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용서될 수 있을 뿐입니다.


음악의 힘은 꽤 크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무라카미 라디오를 하며, 기분이 정말 편안해졌다, 용기를 불어넣어 줬다 등 반응을 보인 사람이 많았습니다. 음악은 논리를 넘은 것이며 공감시키는 능력이 큽니다.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이러스와 싸움은 선과 악, 적과 아군의 대립, 서로 죽이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서로 살리기 위한 지혜의 싸움이 되어야 합니다. 적의와 증오는 여기서 불필요한 것입니다. 코로나가 앞으로 내 작품에 어떻게 반영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상황의 공기를 마시고 내뱉고 있는 한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도 코로나에 지지 않도록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뜨겁게 추구해 주십시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입니다. 저는 지금부터 와인을 마실 것입니다. 밝은 내일을 위해 건배를 하며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들을 겁니다. 여러분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하루키가 하지 않았을까. 하며 써봤습니다. 

카드를 부랴부랴 만드느라고 좀 엉성하지만 뭐 괜찮습니다. 

올해는 카드를 여러 개 만들었습니다. 여러 개의 디자인을 했습니다. 

하루키의 인사는 하루키의 인터뷰 이곳저곳에서 한 말에, 제 사견을 입혀서 써본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메리메리 크리스마스.

하루키 그림 클릭해도 아무것도 없어요. 헤헤.



그래서 오늘의 선곡은 2014년 버전의 Do They Know It's Christmas입니다. 30년이 지난 후에 또 한 번 아프리카를 살리기 위해 당시의 유럽의 스타들이 뭉쳤습니다. 보노를 제외하고 모두가 라인업이 바뀌었죠. 새미(샘 스미스), 엘리 굴딩, 한때 그녀의 연인이었던 에드 시런, 크리스 마틴(역시 목소리 좋아) 등 유럽의 슈퍼스타들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필 콜린스의 영혼을 건드리는 드럼 소리는 없지만 이 바보들의 노래는 그렇게 우주로 뻗어갑니다. 이런 바보들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는 한 정말 세계는 바뀌지 않을까요. 하루키가 말한 것처럼 음악이란 소설처럼 논리를 넘은 것이며 공감시키는 능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노래는 약하지만 노래의 힘은 대단합니다. 모두가 소리를 내서 노래를 부르면 불편한 진실은 없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이 바보들의 노래에 빠져 보세요.  https://youtu.be/-w7jyVHoc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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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자이 미즈마루를 검색하면 내 글이 제일 처음으로 나온다. 그게 누구야? 안자이? 뭐? 마루?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 혼자서는 괜히 큭큭 거리며 뿌듯하다. 우리끼리만 아는 뭐 그런 게 있다. 그래서 우리끼리만 알아서 좋은 그런 거 말이다. 


하루키는 그간 유명한 삽화가들과 같이 소설과 에세이를 펴냈다. 독일의 삽화가 카트 맨쉬크와 함께 펴 낸 이상한 도서관, 잠, 빵가게 시리즈가 있다.


또 오하시 아유미라는 40년에 태어나 64년 주간 [헤이본 펀치]의 표지 일러스트로 데뷔한 작가와 함께 펴낸 에세이 시리즈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하루키 하면 안자이 미즈마루 씨다.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점, 선, 면으로 그려진 무표정의 하루키를 보는 재미가 너무 좋다.


하루키는 에세이에서 안자이 미즈마루 씨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그중에는 숙떡숙떡 거리는 이야기도 있어서 재미있다. 술을 좋아하네, 여자만 있으면, 같은 농담을 제대로 했다.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본명은 와타나베 노보루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와타나베, 와타나베 노보루, 와타야 노보루는 하루키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다. 일단 노르웨이 숲의 주인공 녀석의 이름도 와타나베다.


태엽 감는 새에서 주인공 오타다 도루의 아내의 오빠 이름도 와타야 노보루다. 아주 경멸하는 인간으로 나온다. 큭큭. 고양이 이름으로 와타나베 노보루가 나올 때도 있고,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단편 ‘코끼리의 소멸’에서도 사육사 이름이 와타나베 노보루이고, 단편 ‘패밀리 어패어'에서도 여동생의 애인 이름이 와타나베 노보루다.


미즈마루 씨를 생각하면 호이, 같은 단어가 어울리는 사람인데 소설 속의 와타나베 노보루는 꽤나 심각하거나 아주 철두철미한 인간미가 없는 사람으로 나온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여러 소설에서 다른 캐릭터의 같은 이름들이 나오면 반갑기도 해서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일큐팔사에서 덴고를 감시하며 묵직하게 등장해서 묵직하게 죽음을 맞이한 우시카와는 태엽 감는 새에서도 주인공 오카다 도루를 감시하고 와타야 노보루의 뒷일을 봐준다. 거기서 살아남아서 일큐팔사까지 간다. 그런 보이지 않는 연결을 하면서 하루키의 세계에 매료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처럼 많은 사람들이 다양하게 말하는 단편의 정수, 하루키의 ‘토니 타키타니’는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들어온 만큼 뺐는데 그 공백이 빼기 전보다 더 커져버린 인간의 상실을 말하는 영화. 감독은 하루키의 문체를 영상으로 재현하기 위해 같은 공간에서 실내장식을 다 뜯어서 바꿔가며 촬영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하루키의 그 상실에 대한 분위기를 끌어내기 위해 사카모토 류이치가 음악을 맡았다. 한 시간이 조금 넘는 러닝타임인데 영화는 기가 막히게 좋다.


호텔 풀사이드의 고요한 수면 같은 단편 토니 타키타니라는 이름은 어이없게도 하루키가 하와인가, 해변에서 아내와 어슬렁 거리며 돌아다니다가 한 잡화점에 들어가서 거기의 티셔츠 하나를 들었는데 티셔츠 앞에 ‘토니 타키타니’라는 글자가 프린트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저 그 이름이 떠올라서 소설의 제목과 내용이 되었다고 한다.


미즈마루 씨는 42년에 태어났다. 일본대학교 예술학부 미술학과를 거쳐 광고회사와 출판사에서 아트디렉터로 탄탄한 경력을 쌓았다. 그러다가 38세에 독립을 하게 된다. 미즈마루 씨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대충 그리는데 마음을 다하고 있다. 이 부분은 하루키의 에세이에도 잘 나온다. 뭐든 쉽게 대충대충 거려대는 미즈마루 씨가 미워서 하루키는 어느 날 이거 그려봐라, 저거 그려봐라, 흥, 하며 쫄래쫄래 협박 겸 부탁을 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책도 있는데 제목이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이다. 슬슬 그림의 대가라는 타이틀이 너무나 재미있고 사랑스럽고 딱이다. 게다가 이런 타이틀은 멋지며 존경스럽다.


“매력적인 그림이란 그저 잘 그린 그림만이 아니라 역시 그 사람밖에 그릴 수 없는 그림이 아닐까요. 그런 걸 그려가고 싶습니다”라고 미즈마루 씨는 말했다. 미즈마루 씨를 말하면 하루키가 딸려 나오고, 하루키를 언급하면 미즈마루 씨가 어어 나는 왜? 하면서 질질 끌려 나온다. 아쉽게도 미즈마루 씨는 14년도에 고인이 되었다. 더 이상 미즈마루 씨의 슬슬 그림을 볼 수 없지만 그간 사람들을 점, 선, 면의 세계로 풍덩 빠지게 한 것만으로도 좋다. 안녕 미즈마루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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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2-19 1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즈마루씨의 두부그림을 좋아합니다 ~

교관 2021-12-20 11:38   좋아요 1 | URL
이제 미즈마루 씨의 그림을 볼 수 없어서 안타까워요 흑흑
 

하나레이 베이는 우리나라에서 '하나레이 '으로 하루키의 단편 소설집 '도쿄 기담집' 실린 단편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하나레이 베이를    봤다그림은 사치가 타카시의 헤드셋을 쓰고 음악을 들었을  감정이 순식간에 바뀌는 장면을 마우스로 그려본 것이다글은  감정을 사치의 마음으로  나름대로  봤다.

내 마음에 뚫린 공백은 나도 알 수 없다.

길을 잃어버려 뱅뱅 맴도는 느낌일 뿐이다.

이 공허하고 손에 닿을 것 같은데 끝에 도달할 수 없는 이 기분을 어떻게 할까.

나는 10년 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온 것일까.

나는 지금 누구이며, 지금 이전에는 누군가의 엄마였고 어떤 남자의 아내였다.

병신 같은 남편이 듣던 헤드 셋이 아들을 건너 내가 결국 듣고 있다.

앞이 보였던 내 인생을 깡그리 망가트리고 깨버린 내 삶에 들어온 남자들을 증오한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

그 남자들은 나에게 먼지만큼도 행복을 주지 않았다.

타카시를 가진 것을 알고도 마약에 빠져 있던 남편도, 남편의 모습을 그대로 물려받은 타카시도 어쩌면 내가 원하는 바대로 신이 있다면 신이 데리고 가버렸다.

낡은 티브이처럼 죽은 후에도 하얀빛이 화면 위로 깜빡깜빡 헤매다가, 어느 날 갑자기 뚝 끊어지는 경우처럼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좋은 것만은 아니다.

성실하게 설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불성실한 먼지가 안개처럼 가득 껴서 주변을 떠돈다.

남편과 타카시를 떠올리면 그렇다.

불성실한 공기다.

입구는 있지만 출구는 없는 이미 들어와 버린 내 인생의 낙인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트린 그 남자들이 듣던 헤드 셋을 끼고 음악을 듣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는 새 그들이 내게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다.

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도 모르는 새.

그리고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소리 내어 울고 싶지만 나는, 나는 바보라서... 다리 한쪽이 잘린 일본인 서퍼를 본 순간 나는 내 마음속의 공백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내 자신이 먼 옛날에 죽어 풍화되어 바짝 말라버린 거대한 생물의 미궁과도 같은 체내를 방황하고 있는 듯한 느낌에서 나는 시간의 구멍을 빠져나와 그 한가운데에 쑥 빠져버렸지만 타카시가 듣던 음악을 듣는 동안 나는 다리 한쪽이 없는 서퍼가 타카시라는 확신이 들었다.

타카시는, 내 아들은 10년 동안 나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당신의 소중한 아들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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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엽 감는 새를 꺼내서 이렇게 사진을 찍으니 꼭 마크 로스코 그림 같았다.  


마우스로 마크 로스코의 그림 몇 개를 오마주 했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에 형태는 없다. 형태가 아닌데 형태가 있다.


그건 바로 풍부한 색감이다.


흘러넘치는 색감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는 새 매료되어 초현실 세계에 빠져들고 만다.


글을 쓴다면 이런 초현실을 경험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발끝부터 지우개로 지우듯 어둠 속에 조금씩 내 몸이 융해되어 사라지는 기쁨을 느끼며 풍부하고 아름다운 색감으로 나는 남는다.


이처럼 풍부함이 가득한 색감도 사라지고 만다.


따스하면서도 늙어가는 햇살이 아련하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보는 것이 아니라 젖어드는 것이다.


그렇게 형태는 사라지고 명상만이 남는다.


태엽 감는 새는 형태는 없지만 형태를 이룬다.


경험으로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터프한 세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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