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날씨. 버스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내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좀 애잔스럽다. 그림책 <엄마 마중>에서 추운 겨울날 전차 정거장에서 코끝이 빨개진 채로 엄마를 오래오래 기다리고 있던 꼬마 생각이 나곤 한다. 겨울 버스정류장, 추위에 어깨를 잔뜩 옴추리고 발을 동동거리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옆엔 그 꼬마가 서 있는 것 같다.  내 옆에서 나와 함께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꼬마에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금방 올거야"하고 말을 걸면, 나혼자 버스를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힘이 덜 든다.

 

왜 운전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난 운전면허도 없다고 하면 다들 좀 놀란다. 운전면허를 따지 않은 건, 내가 길눈이 어둡고 겁이 많아서다. 조수석에 앉아 차를 타고 가다가도 옆에 커다란 트럭이 지나가면 바퀴 속으로 우리차가 빨려들어갈 것만 같고, 옆에 차가 갑자기 끼어들면 운전자보다 내가 더 놀란다. 그러니 내가 운전을 하면 서울시내 교통체증의 가장 큰 원인으로 내가 지목되고, 수배령이 내려지고, 결국은 체포되어 면허는 취소되고, 서울에서 추방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그건 운전을 하게 되면 차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오직 운,전,만, 할 수밖에 없다는 게 싫어서다. 바깥 풍경을 샅샅이 볼 수도 없고, 누가 내 입에 넣어주지 않으면 맛있는 걸 먹기도 힘들고, 장난을 치거나, 잠을 잘 수도 없고, 지하철을 타고 책을 읽을 수도 없다.  이런 이기적인 이유로 나는 운전면허따기를 포기하고 살고 있다.  그러니까 버스정류장에 서서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버스를 기다리는 것쯤은 기꺼이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함께 기다려주는 <엄마 마중> 꼬마도 있으니까 그럭저럭 할만 하고, 게다가 너무 춥다 싶은 날이면 외출을 안하고 버텨도 된다. 전업주부의 특권이다.

 

지난 금요일 아침, 도서관에 가려고 버스를 탔다. 버스 창문 밖으로 햇빛만 보고 있으면 마치 봄 같았다. 훈훈한 바람이 불고 며칠 있으면 나무에 새싹이라도 돋을 것 같은 햇빛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었고, 사람들은 두꺼운 패딩을 입고, 목도리를 두르고, 종종 걸음을 하고 있었다. 겨울잠 자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은 요 며칠동안 늘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생각을 했다. 더구나 요즘 읽고 있는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라는 책에서 이런 글도 읽은 참이었다.

 

겨울에는 침묵이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존재한다. 눈은 침묵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침묵인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은 눈에 점령당했고, 하늘과 땅은 순백의 침묵의 가장자리에 불과하다.

눈송이들은 허공에서 서로 만나 그 자체가 이미 침묵 속에서 하얗게 변해버린 땅 위로 함께 떨어져내린다. 침묵이 침묵을 만나는 순간이다.

사람들은 길가에 묵묵히 서 있고, 인간의 말은 침묵의 눈으로 덮여 있다. 인간에게서 남아 있는 것은 그 모습뿐이다. 그 모습은 침묵의 이정표 같다. 인간은 가만히 서 있고, 그 사이를 헤치며 침묵이 나아간다. (114쪽)

 

그러니까 겨울의 제맛은 침묵이다. 인류가 겨울잠 자는 습성을 가지는 쪽으로 진화를 했다면 어땠을까. 사람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과 함께 파티를 벌일 것이다. 고요하고 편안한 겨울잠을 빌어주며, 새봄에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면서, 포옹하고 어깨를 두드리며 따뜻한 담요와 푹신한 베개를 선물할지도 모른다. 마침내 모든 사람들이 겨울잠에 빠져들면 비로소 세상은 평화롭게 침묵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세상이 얼마나 고요하고 아름다워질까. 사람들은 잠을 자느라 그 광경을 보지 못하겠지만, 겨울잠을 자지 않는 새와 물고기와 동물들은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인간들이 잠든 사이에 자기들만의 평화로운 시간들을 보내겠지.

 

그렇게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사람들이 하나 둘 깨어날 것이다. 겨울잠에서 깬 사람들은 자기가 깨어났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베란다에, 지붕에, 창문에 노란색이나 분홍색 리본을 단다. 나는 겨울잠에서 깨어 베란다에 리본을 달면서 이웃 중 누가 잠에서 깨어났는지 리본을 보고 알아내려 할 것이고, 가까운 이웃집 베란다에 걸린 리본을 발견하면 반갑고 기뻐서 어쩔 줄 모를 것이다. 일찍 깨어난 사람들은 아직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을 기다리며 조용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나누면서 오랜 잠으로 허기진 배를 채울 것이다. 그렇게 봄은 진정한 의미의 축제같은 시간이 될 수 있을 거다.

 

따뜻하고 행복한 상상이었다. 하지만 문득, 만약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람들도 있을 터였다. 겨울이 오기 전에 노인들은 삶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기분으로, 다시 새봄을 볼 수 있을지 의심하면서, 이별의 말을 준비하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죽음만큼 깊은 겨울잠에서 죽음의 세계로 쉽게 훌쩍 건너가는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기를 바랄지도 모르겠다. 노인의 가족들은 겨울잠에서 깨어나 노인이 돌아올 수 없는 아주 깊은 침묵의 세계에 빠진 것을 알고 베란다에, 창문에, 지붕에 검은 리본을 단다. 그러면 이웃 사람들은 그걸 보고 슬퍼하며 진심어린 애도를 보낼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의 상상은 인간의 선함을 믿고 할 수 있는 상상이었다. 인간의 겨울잠에 대한 상상은 나쁜 쪽으로도 이어졌다. 누군가, 사람들이 모두 겨울잠에 빠지기를 기다리다가 나쁜 일을 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겨울잠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사람이 나쁜 짓을 할 수도 있다.  겨울이 없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겨울잠을 잘 수 없을 것이고, 그러면 겨울을 기다렸다가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 겨울과 여름이 반대인 북반구와 남반구는 어떨까. 결국, 인간은 겨울잠을 잘 수 있는 평화로운 족속이 못되기 때문에 그 쪽으로 진화할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우리를 믿을 수 없어서.

 

결국 한겨울에도 식량을 구하기 위해 칼날같은 눈바람 속을 헤매고 다녀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구석기 시대, 혹은 그보다 전에 살던 인류의 조상들의 삶을 이어갈 수 밖에 없는 거다.  버스에서 내려 도서관으로 가는 길,  나는 내가 곰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면서 차가운 겨울 속을 열심히 걸었다. 곰은 물러나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이 간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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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3일 즈음부터 우리집에 TV가 없다. TV가 사라진지 3주가 되었는데, 큰애들 둘은 TV가 있으나 없으나 별 상관을 하지 않는다. 각자 자기 노트북이 있으니까, 자기 방에서 노트북으로 할 일이 많은 것 같다. 아, 아니다. 가끔 아들녀석이 TV를 아쉬워한다. 얼마전 자기 용돈을 털어서 산 PS4를 하고 싶은데 TV가 없어서 못한다나 뭐라나.

막내가 가장 심심해 한다. 날이 추워져서 나가 놀기도 마땅치 않고, 해도 일찍 지고, 게다가 점점 같이 놀 친구가 없어지고 있다. 아이들이 점점 바빠지고 있다.  친구 만나게 해주려고 학원 보낸다는 말이 실감이 나지만, 막내는 일주일에 두 번 영어 교습을 받으러 가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든다. 자기는 자유가 중요하다나..  암튼, TV가 없어서 더욱 심심해진 막내가 요 며칠 책을 잡고 읽기 시작했다. 예전에 어느 분이 아이들 책 읽기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TV가 켜지면 책은 멀어진다'고 했었는데, 그 말이 맞는 말이었나 보다.

요즘 우리 막내가 읽고 있는 책은

 

 

 

 

 

 

 

 

 

 

 

 

 

 

학교 도서관에서 지가 골라 빌려온 책인데 하나같이 비문학 책들이다. 어려서도 옛이야기를 읽어주면 시큰둥하고, 도감류를 좋아하더니.. 우리 막내는 비문학파였나 보다. 큰딸은 그런 동생을 보고 자기랑 똑같다며 신기해 한다.  

 

12월 13일 쯤에 서울역사박물관에 차출되어 나갔던 우리집 TV 2대가 다시 돌아온다. 남편의 회사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2014 서울사진축제 서울 視 . 공간의 탄생의 시행을 맡았고, 전시에 TV가 필요해지자 우리집 TV까지 갖고 나간 것이다. 전시는 12월 13일에 끝나고 우리집 TV도 돌아올 텐데, 그것도 한 대는 더 큰 것으로 바뀌어 올지도 모르는데, 난 지금 이 상태가 맘에 든다.  책 읽는 우리 막내의 모습을 더 오래 보고 싶다.

 

**

 

오늘 2학년 아이들 책놀이교실을 하러 도서관에 갔다.

한 아이가 시간보다 일찍 와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갑자기 내 나이를 묻길래,

"나, 나이 많은데?" 했더니,

"정말요? 우리 아빠보다 많아요?" 한다.

"아마 그럴걸?"

"우리 아빠가 서른 여덟살인데... 그럼 마흔도 넘었어요?"

"그럼, 당연하지."

"정말요?"

아이가 놀란 듯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막 웃기 시작했다.

"OO야, 너 유진 샘 알지?" (큰딸은 도서관에서 고등학교 졸업 전부터 여러 프로그램에서 봉사하며 선생님을 했었다)

"네."

"유진 샘이 대학생인 것도 알지?"

"네"

"대학생이면 나이가 몇이야?"
"스물도 넘었죠."

"그래, 근데 유진 샘이 내 딸이잖아."

"어? 정말 그러네? 그럼 마흔도 훨씬 넘었겠네!"

하더니만 아예 책상에 벌렁 누워서 크게 웃어댔다. 뭐가 그렇게 웃길까? 아마 아이에게는 자기 아빠가 굉장히 크고 나이 많은 어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아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할머니' 같이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지고 볶고 하며 책놀이교실을 함께 했던 선생님이 아빠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고... 하긴 나도 내가 이 나이에 이르렀다는 게 신기하고 어이없고 이상하긴 하다. 그래서 아이랑 같이 웃었다.

 

***

 

남편이 5년만에 노트북을 바꿨다. 음.. 얇고, 가볍고, 마음에 든다. 내 마음에 든다고 내 저렴한 노트북과 바꿔주지는 않을 게 뻔하니까 별 관심 없는 척 했다. 흥!  조금만 일찍 바꿨으면 내가 노트북을 사지 않아도 됐을 텐데.. 난 인터넷 되고 한글이랑 엑셀이랑 파워포인트만 돌아가면 돼서 5년 중고 노트북이라도 괜찮았는데.. 아깝다. 막내가 남편이 쓰던 노트북을 탐내고 있는데, 어림없는 소리! 라고 단칼에 잘랐다. TV도 돌아오는데, 고물이라도 노트북까지 있으면 책은 영영 안녕~ 이 되어버릴 게 너무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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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14-12-05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집에 TV좀 없으면 좋겠어요.
근데 저희집은 애들보다 신랑이 더 좋아해서 아마 그런일이 없을거에요-_-
나의 나이가 누군가에게 즐거움이 될수 있다는게 저도 재있네요.ㅎㅎ

무스탕 2014-12-05 13:09   좋아요 0 | URL
어제 밤에 북플로 댓글을 적었는데 비밀댓글로 저장이 됐네요?
난 그런 기억이 없는데? -_-a
그래서 제 맘에 비밀스러운 글이 아니기 때문에 비밀해제 ^^

섬사이 2014-12-07 09:10   좋아요 0 | URL
저희집도 신랑이 TV를 너무 사랑해요.
집에 들어오면 TV부터 켜고 TV소리가 일상의 늘 배경음악처럼 깔려 있는 걸 좋아해요. ㅠ.ㅠ

책을사랑하는현맘 2014-12-05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이지...아이들에게 독서의 시간을 돌려주고 싶은데 노트북, 스마트폰, TV를 다 없애기에는 제가 결단력 부족입니다! ^^;;
막내가 비문학을 좋아한다니 정말 놀랍고(!) 신기하네요. 저희 아이 둘은 엄마가 책을 무지하게 좋아하는 것과는 너무 상관없이 책들을 안좋아해서요. 반작용일까요?ㅎㅎ

섬사이 2014-12-07 09:13   좋아요 0 | URL
저도 결단력 부족이에요.
스마트폰과 노트북은 고딩 졸업 전에는 안되는 게 우리집 원칙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TV는.... 특히나 남편이 TV시청을 즐기는 편이라서요.
막내가 책읽기를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책읽기보다는 나가서 노는 걸 훨씬 더 좋아해서 책은 어쩌다 가끔, 심심할 때만 읽어요. ^^

다락방 2014-12-05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문학을 즐겨 읽는 어린이라니. 크- 뭔가 아우라가 느껴지네요. 멋져요! >.<

섬사이 2014-12-07 09:19   좋아요 0 | URL
그거, 좀 문제있는 거 아닐까요?
아이는 천성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알고 있는데, 비문학이라니!!!!!
저는 좀 의아하고 당황스러웠거든요.
아이가 읽는 비문학이라는 게 주로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책인데요,
이야기에서 길어올릴 수 있는 수천수만가지 의미와 재미와 상징과 가치들에 아이가 충분히 젖지 못하고 자랄까 봐서요.


순오기 2014-12-07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V가 켜지면 어른이 나도 책을 안 읽어요. 혼자 있으니 밤에는 사람소리가 그리운지 TV를 켜게 되고...ㅠ
다행히 오늘은 지금까지 TV를 안 켰는데....이제 켜보려고요.ㅋㅋ

아이들이 가늠하는 나이가 많다는 건 자기 부모 기준이겠구나 싶어서 나도 막 웃었네요.
그럼 애들에게 나는 할머니로 보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흰머리 더 보이기 전에 코팅 한번 더 해야지...

비문학을 보는 막내가 넘 부러운대요. 우린 애들 다 타고난 문과생이라 비문학분야는 수능에서도 약하던걸요.ㅜ

섬사이 2014-12-07 16:42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저도 그래요. TV는 정말 막강한 힘을 가졌어요!!!
흰머리는... 저도 오늘 염색을 해야 하나...하고 있던 참이에요. ^^
 

 

 

12월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12월이 되자마자 추위가 득달같이 몰아쳤다.

아이들은 그 추위 속으로 걸어나가 학교를 갔고, 남편은 출근했다. 나는 집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들 추위를 무릅쓰고 자기 일을 하러 갔는데, 나 혼자 보일러까지 틀고 따뜻한 집안에 있기는 양심에 걸려서

보일러를 끄고 옷을 껴입고 수면양말을 찾아 신고 따뜻한 커피를 끓이고 내내 굴 속에 들어간 겨울 곰처럼 지냈다.

얼마나 좋을까. 겨울이 오기 전에 잔뜩 먹고 피둥피둥 살이 찐 다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겨우내내 따뜻한 굴 속에서 잠을 잔다면. 그리고 피둥피둥 쪘던 살은 다 말끔히 사라지고, 잠을 충분히 자서 피곤도 말끔히 사라진 밝고 건강한 얼굴로 새로 봄을 맞이한다면.

해마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 난 곰을 부러워했다.  추위 앞에서 끈질기게 곰을 꿈꾸는 걸 보면 나는 웅녀의 직계후손인 게 틀림없다는 생각도 했다.

 

**

 

12월이 된지 3일째. 오후에 눈발이 날렸지만 추위는 누그러졌다.  자료조사를 위해 구립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연체되어 반납해야 했고, 목요일 문학교실에서 쓸 책을 대출해야했다. '문학교실'보다는 '책놀이교실'이라는 명패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수업(?)을 위해 눈과 관련된 이야기가 담긴 그림책 3권을 골랐다.

 

 

 

 

 

 

 

 

 

 

 

 

 

<눈 결정체는 어떻게 생겼을까요?>는 과학책이라고 할 수 있지만 글도 적당하고 아름다운 눈 결정 사진들을 볼 수 있어서 좋다. <용감한 아이린>과 <눈 내리는 하굣길>에서 눈은 아이들이 극복해야할 재난으로 등장한다. <용감한 아이린>에서 아이린은 엄마가 만든 드레스를 공작부인에게 전달해야하고, <눈 내리는 하굣길>에 나오는 꼬마 유이는 우산도 장갑도 없이 쏟아지는 큰눈을 뚫고 혼자 집으로 돌아온다. 둘 다 아이의 용기를 보여주는 책이다. 아이들에게는 <용감한 아이린>보다는 <눈 내리는 하굣길>이 더 공감하기 좋은 책이 될 것 같다.

3월에 시작한 책놀이교실은 중간에 그만 두는 아이 하나 없이 계속되었고, 이제 12월 4회차 활동만 남아있다. 내년에는 책놀이교실을 원래 맡아 하시던 분이 돌아올 예정이라 난 올해가 처음이자 마지막 책놀이 선생님이다. 그만둬야 하는 게 아쉽냐고 묻는다면.. 글쎄.. 별로.. 아이들이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건 다행이지만, 아이들의 책 읽기에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이 서질 않기 때문이다.

 

***

 

알라딘 북플. 앱을 깔까 말까.. 고민하다가 깔지 않기로 했다. 난 이 서재 하나면 충분한 것 같았다. 이 서재 하나도 잘 가꿔가기가 쉽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또, SNS가 좀 피곤하달까..

심지어 나는 요즘 '묵묵부답', 이 네 글자로 된 낱말이 꽤 매력적으로 느껴질만큼 카톡으로 말하기가 싫어졌다. 그러니 지금 내 상황을 고려해볼 때, 북플은 무리다.

책으로 모이는 그 세상은 어떨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겨울동안은 굴 속에서 잠자는 겨울곰처럼 조용히 있어야겠다.

봄이 되면 또 모르겠다. 굴 속에서 기어나와 소근소근 도란도란 들리는 말소리를 따라 북플을 시작할지도.

겨울동안 굴 속에서 읽어볼까 하고 책장에서 뽑아놓은 책은,

 

 

 

 

 

 

 

 

 

 

 

 

 

 

 

책장 속에서 오랫동안 묵히고 묵힌 겨울곰 같은 책들.

어렵고 무거워 보이는 책들. 읽다가 졸며 자며... 읽기에 딱 좋은?

너무 재미있는 책은 겨울곰의 잠에 방해가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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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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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연이어 소설을 읽었다. 소설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만, 소설만 연이어 읽어댄 데에는 현실도피라는 불순한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일에도 지치고 사람에게도 지치고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에도 지쳐 있었다. 한동안 잠수를 타거나 아니면 모든 걸 두고 어딘가로 훌쩍 여행이라도 떠나거나.. 했으면 좋겠지만 그럴만한 여건이 안될 때,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소설 속에 푹 빠져 버리는 거다.

의기소침 무기력해져 있는 내게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라는 제목은 떨어진 당을 보충해 주고 '원기회복! 활력충전!'을 보장하는 한 병의 드링크제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이 책은 태양이 시뻘겋게 작렬하는 바다에서 갓 건져올린, 은빛 비늘을 눈부시게 반짝이며 펄떡펄떡 튀어오르는 크고 힘센 물고기 같았다.

 

'백리향 냄새와 월계수 잎사귀 향, 고수 향, 끓는 우유 향, 마늘 향과 함께 파스타를 넣은 수프 냄새가 진동을 하는 가운데 부엌 식탁 위'에서 태어난 티타는 그녀의 탄생이 예고했던대로 요리에 마술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신비한 재주와 능력을 타고 났다. 책을 읽어가면서 티타는 우리가 억눌러온 아름다운 본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인간의 식욕과 성욕. 식사 예절이라든가 체면이라든가 하는 것들 때문에 우리가 가진 탐욕스러운 식욕을 우아하게 포장하고, 성욕 또한 사회적 제도와 도덕적 규범의 틀 안에서 감춰거나 어두운 음지로 숨는다.  티타도 요리는 '요리법'이라는 틀에, 성욕은 '막내딸은 결혼하지 않고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관습에 갇혀 있다.

 

 한편 티타도 페드로에게 기다리라고, 자신을 멀리 데려가 달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곳으로, 따라야만 하는 관습이 없는 곳으로, 어머니가 없는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말은 목구멍에서 뒤엉켜서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사그라졌다. (65쪽) 

 

티타는 이런 기분을 잘 알았다. 요리법에 나온 대로 따르지 않고 요리할 때 느끼는 두려움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럴 때마다 티타는 마마 엘레나가 기필코 틀린 부분을 찾아내서 자기가 만든 음식을 칭찬하기는커녕 조리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고 호통을 칠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부엌과.... 그리고 인생에서 무조건적으로 강요하는 법칙들을 깨고 싶은 유혹도 뿌리칠 수 없었다.

(208~209쪽)

 

티타의 어머니 마마 엘레나는 티타를 억누르는 감시자이자 억압자이다. 크고 강하다. 그런 어머니에게 억눌려진 티타는 마법적인 요리를 통해 해방을 꿈꾼다. 사람들은 티타가 만든 음식을 먹고 타오르는 성적 욕구를 억누르지 못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페드로가 로사우라와 결혼할 때에는 티타가 만든 음식이 신랑신부를 포함 하객들 전체의 구토를 유발하기도 했다.

싱싱한 성욕과 식욕은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다. 언니 헤르트루디스는, 티타가 페드로에게 받은 장미꽃으로 요리한 음식을 먹고 온몸에서 장미향을 풍기며 알몸으로 벌판으로 달려나간다. 열에 들떠 장미향을 풍기며 달려오는 헤르트루디스를 혁명군 장교가 말에 태워 떠난다. 황당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장면을 책에서 얼마나 꿈같이 아름답게 그려놓았는지.

하지만 그 후에 창녀촌에서 살게 된 헤르트루디스를 타락한 비운의 주인공으로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 나는 더 마음에 들었다. 헤르트루디스는 책의 말미에서는 혁명군의 여대장으로 등장하여, 페드로와 존브라운 박사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티타에게 훌륭한 조언을 해주는 씩씩하고 밝고 건강한 인물로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페드로와 티타의 관능적이고 열렬한 사랑도 인상적이었지만 난 존 브라운 박사의 따뜻하고 편안한 사랑도 좋았다. 이건 분명 내가 나이 들고 늙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아무튼 브라운 박사는 지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마마 엘레나가 규범과 관습의 폭력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이해와 관용의 따뜻함이다.  책을 읽으면서 마마엘레나와 존 브라운 박사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생각해보니 나는 자주 이성을 '사회적 규범을 따른다'는 것과 혼동했던 것 같다. 마마 엘레나와 존 브라운 박사가 천지차이의 인물인 것처럼 '지적이고 이성적'이라는 것과 '사회적 규범과 관습'은 서로 다른 것일 수 있다는 게 당연한데 말이다.

 

브라운 박사는 말을 하고 있다고 해서 성냥을 만드는 과정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그는 정신 활동과 육체적 활동을 아무 문제 없이 별개로 분리할 수 있었다. 손놀림을 멈추거나 실수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가장 심오한 철학적 문제까지도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티타에게 계속 얘기를 하면서도 성냥 만드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123쪽)

 

어쩌면 그는 성냥 만드는 일을 멈추고 티타를 애무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삶의 가장 심오한 철학적 문제'같은 건 집어치우고 열렬한 사랑의 말을 쏟아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야 티타의 마음을 사로잡고 사랑을 이룰 확률이 더 높아졌을 것이다. 그가 티타의 사랑을 얻어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브라운 박사가 좋았다. 티타와 결혼할 수 없다고 티타의 언니 로사우라와 결혼해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찌질하다면 찌질하다고 할 수 있는 페드로 보다는. 하지만 티타는 젊고 관능적이고 아름답기 때문에 페드로를 선택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두 가지 욕구, 식욕과 성욕은 억누름을 강요받는 동시에 생명을 이루는 기본적인 욕구들이다. 조카에게 젖을 물리자 처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젖이 쏟아져 나온다거나, 또는 마마 엘레나의 망령을 물리치자 다시 생리가 시작되는 것 같은 장면들을 통해서 티타는 생명과 풍요의 여신 같은 모습도 보여준다. (어려서부터 음식에 대해 까다롭고 잘 먹지도 않았던 로사우라가 뚱뚱하고 입냄새가 심한 인물로 묘사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티타는 밀이나 콩, 자주개자리의 씨앗은 자기 모습이 완전히 일그러지고 바뀌는 것도 아랑곳 않고 계속 싹을 틔운다고 생각했다. 이제 티타는 씨앗이나 곡물들이 새 삶을 주기 위해 자기 몸을 터트려 가며 껍질을 벌여 물을 깊이 빨아들이는 게 놀랍고 존경스러웠다. 씨앗이나 곡물들은 자기 몸속에서 첫 번째 뿌리 끝이 삐죽 튀어나오는 것을 너무나도 자랑스러워하며, 자신의 원래 모습이 망가져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새싹을 당당하게 세상에 보여주었다. 티타는 자신도 그런 단순한 씨앗이었더라면 하고 바랐다. 그러면 자기 몸속에서 뭐가 자라고 있는지 아무에게도 얘기할 필요가 없고, 사회적 비난을 감수한 채 부른 배를 안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씨앗에게는 이런 고민이 없었다. 특히 무서워해야 할 어머니도 없었고, 도덕적으로 비난할 사람들도 없었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티타에게도 어머니가 없었다. 그렇지만 마마 엘레나가 내린 저주가 언제 어느 때 저승에서 떨어질지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208쪽)

 

따지고 보면 섹스를 하고 음식을 먹는 행위 자체야 무슨 잘못이 있으랴.  우리가 씨앗이 아닌 게 문제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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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4-12-01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올해 마지막 달의 첫날에 이 리뷰를 보게 되네요.
우리가 씨앗이 아닌 게 문제일 뿐... ^^
좋은 날 보내세요^^

섬사이 2014-12-03 15:55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반가워요~!!!
12월 첫날 프레이야님이 제 서재에 찾아와 주시다니
요즘 뭔가 추욱 처져있었는데, 기운이 나네요. ^^
프레이야님도 좋은 날 보내세요.

알맹이 2014-12-01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고 싶어져요.^^

섬사이 2014-12-03 15:57   좋아요 0 | URL
네, 재미있고, 신비롭고.. 읽기 좋은 책이에요.
날이 춥지만 책과 함께 따뜻한 시간을 보내기엔 더 좋지요. ^^
 
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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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직장 파티에서 서로에게 이끌리게 된다. 그 둘은 직장 내에서 그다지 인기가 없었고, 괴짜 취급을 받았는데 그 이유를 책에서는 '섹스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해리엇은 '처녀란 올바른 사람에게 사려깊게 줄, 예쁜 종이로 여러 겹 포장한 선물 같은 것'(p.10)이라고 생각했고, 데이비드는 '마지못해 사랑하게 된 한 여자와 길고도 어려운 관계를 한번'(p.9)가진적이 있지만 그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런 두 사람이 서로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들이 꿈꾸는 가정의 모습은 전통적인 의미의 가정이었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의 모습을 지켜보자면, 자식을 많이 낳아 사랑으로 키우고, 올바르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서 존경을 받고, 그들에게 둘러싸여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행복해하는 서양 중산층 이상의 가정이 떠오른다. 손님을 초대해서 함께 식사와 차를 마시고, 손님들에게 자기들이 이루어놓은 화목한 가정의 정경을 자랑스러워하는 모습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떠한 여성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알았다. 해리엇은 자신의 미래가 구식이라고 생각했다. 남자가 왕국의 열쇠를 그녀 손에 쥐어줄 것이고 그곳에서 자신의 본성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발견할 것이며, 그것은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었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그녀는 인생의 모든 굴곡이나 진창을 처음에는 잘 모르면서 그러나 점차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그곳으로 나아갔다. 반면에 데이비드에게 미래는 그가 목표로 삼고 보호해야 하는 어떤 것이었다. 자기 부인은 이런 점에서 그와 같아야만 했다. 즉 그녀는 행복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지키는가를 알아야만 했다. 해리엇을 만났을 때 그는 서른 살이었고 야심찬 남자가 지닌 완고하고 절제된 방식으로 일해 왔었다. 그러나 그가 일해 온 목표는 가정이었다. (p.13~14)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호텔로 써도 좋을만한 아주 커다란 빅토리아식 저택을 구입하고 아이를 낳고 친지들을 초대한다. 머리 속에 그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해리엇은 갓난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좀 흐트러진 모습으로 천장이 높은 거실 한 쪽에 놓은 편안하고 푹신한 안락의자에 앉아 있고, 데이비드는 그 안락의자에 살짝 몸을 기대고 서서 따뜻한 눈빛으로 미소지으며 해리엇과 아기를 바라보고 있고, 놀러온 친척들은 소파에 앉아 새로 태어난 아기와 크고 고풍스러운 집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겠지. 다른 아이들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저희들끼리 웃고 떠들며 놀다가 우르르 정원으로 뛰어나가기도 할 것이다.

해리엇의 친정어머니 도로시의 헌신과 데이비드의 아버지 제임스의 재정적 지원이 없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정경이지만 그래도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자기들이 이룩한 가정의 모습에 행복해하고 뿌듯해한다.

 

행복. 행복한 가정. 로바트 가는 행복한 가족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선택한 것이었고 누릴 자격이 있었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얼굴을 맞대고 누워 있으면 때로는 그들의 가슴속 대문이 활짝 열리면서 아직도 자신들을 놀라게 할만큼 엄청나게 강렬한 안도감과 감사의 정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 아주 오랜 기간처럼 보이는 그 시간 동안 인내하기란 사실 쉽지 않았다.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60년대의 시대 정신이 그들을 비난하고 고립시키고 자신들의 가장 좋은 면을 축소시키던 때에,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기가 어려웠었다. 이제 보아라, 자신들의 완고한 개성을 방어하려고 사력을 다한 것이 옳았다. 그 개성은 너무나도 고집스럽게 가장 최상을 선택했다 - 바로 이 삶.  (p.30~31)

 

그리고 해리엇은 폴을 출산한 이후 곧바로 다섯째 아이를 임신한다.

 

그녀는 쉽게 토라지고 화를 냈다. 복받치게 울기도 했다. 데이비드는 그녀가 턱을 괴고 식탁에 앉아 뱃속의 아기가 자기에게 독을 퍼뜨린다고 중얼거리는 것을 보았다. 폴은 아무도 돌보지 않아 유모차에 누워 낑낑대며 울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보름 간 휴가를 내어 집안일을 도왔다.  (p.44)

 

다섯째 아이는 처음부터 좀 달랐다. 도로시는 해리엇의 자매인 사라를 도우러 가서 없었고, 해리엇은 처음으로 곤란을 겪고 예민해졌는데 이것은 데이비드가 바라던 '행복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지키는가를 알아야만' 하는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이 아니었다.  데이비드는 현실적인 문제들에 부딪치고 따져보게 된다.

 

사실 그는 3주나 한 달 동안은 사람들로 집안이 가득 차지 않기를 바랐다. 돈도 너무 많이 들었고, 또 자신들도 항상 돈이 모자랐다. 그는 부수입을 위해 일을 더 했고 또 오늘 같은 날은 집에서 유모 노릇까지 하고 있었다. (p.45)

 

온갖 폭력이 난무하고 도덕적 가치관이 무너지는 바깥 세계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지는 행복한 공동체로서의 가정은 서서히 균열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섯째 아이 벤은 해리엇의 태중에서부터 심상치않은 태동으로 해리엇을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만들고,  태어난 후에도 가족의 행복을 파괴해나가지만 의사나 학교선생님, 다른 가족들은 벤이 '정상 범위 안에 있다'고 하면서 오히려 해리엇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아니, 그는 볼 수 없었다. 어쩌면 보기를 원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요점이었다. 그 의사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번 경우가 얼마나 다른지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시골길을 활보하거나 질주할 때 그녀는 커다란 부엌 칼을 잡고 자기 배를 갈라서 애를 꺼내는 상상을 했다. 마침내 이 긴 맹목적인 투쟁 끝에 실제로 서로 눈을 마주칠 때 그녀는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p.66)

 

의사의 얼굴에서 그녀는 자신이 기대했던 것을 보았다. 그 여인이 느끼고 있는 것이 투영된, 어둡고 고정된 시선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한 정상인의 거부, 이질성에 대한 공포, 또한 벤을 낳은 해리엇에 대한 공포였다. (p.143)

 

이 책을 읽으면서 섬뜩하게 느껴지는 건, 공포와 불안을 조장하는 아이 벤이 아니었다. 벤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중성이었다. 사람들은 벤에게서 뿜어져나오는 파괴력과 괴기스러움을 잘 느끼고 있으면서도 그게 너무 공포스러운 나머지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해리엇에게 아니라고, 그럴 리 없다고, 네가 히스테릭한 거라며 진정제를 처방하는 것으로 공포를 피하는 것이다. 해리엇 또한 벤에 대한 모성과 두려움 사이에서 자신의 이중성을 확인한다.

 

어느 날 아침 일찍 해리엇은 어쩐 일인지 재빨리 침대에서 나와 아기방으로 갔다. 거기서 그녀는 벤이 창문턱에 균형을 잡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높은 곳이었다. 그 애가 어떻게 그 위에 올라갔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일이었다. 창문은 열려 있었다. 일순간 그 애는 밖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해리엇은 생각했다. 하필이면 이때 내가 들어오다니.... 그러는 자기 자신에게 대해 충격을 받지도 않았다. (p.81~82)

 

그 애는 갑자기 이유도 없이 정원으로 달려 내려가 문 밖의 길로 뛰어나가곤 했다. 어느 날 그녀는 그 애를 잡으려고, 빵빵대는 차들이나 경고하는 사람들의 비명을 무시하고 신호등을 건너는 뭉퉁하게 웅크린 작은 모습만 보면서 1마일 이상 뛰었다. 그녀는 울면서 숨을 헐떡였고 반쯤 정신이 나가서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 애를 잡으려고 결사적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오, 그 애를 치어요, 제발, 그래요... 하고 기도하고 있었다. (p.85)

 

책 중간에 데이비드가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길 잃은 아이와 연못에 대한 이야기도 이중적 자아에 대한 은유로 느껴졌다. 해리엇과 다른 사람들의 이런 이중성은 극단의 결정을 하기도 한다. 벤을 공포영화에 나올 법한 요양소로 보내는 것이다. 거기서 벤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걸 알면서. 해리엇의 모성이 요양소에서 벤을 구해내지만 벤이 집에 돌아온 이후 해리엇의 가정은 빠르게 해체되어버린다. 그리고 벤은 더이상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통제가 불가능할만큼 자라고 빅토리아식 커다란 저택은 벤의 패거리들의 아지트처럼 변해버리고 만다.

책 속에서 해리엇은 나름대로 자신들이 원하지 않았던 벤같은 아이가 태어난 것에 대해 이유를 찾아보려고 애쓴다.

 

그녀는 데이비드에게 말했다. "우리는 벌 받는 거야. 그 뿐이야"

"무엇때문에?" 그녀의 목소리에 그가 증오하는 톤이 있었기 때문에 방어적으로 그가 물었다.

"잘난 척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행복해서."

"헛소리" 그가 말했다. 그는 화가 났다. 이런 해리엇이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이건 우연이야. 누구나 밴 같은 애를 가질 수 있어. 그건 우연히 나타난 유전자야. 그것뿐이야."

"난 그렇게 생각 안해." 그녀가 완고하게 주장했다. "우린 행복해지려고 했어!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아니, 나는 행복한 사람을 만나 본 적이 결코 없어.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되려고 했지. 그래서 바로 번개가 떨어진 거야." (p.159)

 

하지만, 우리가 불행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고 내내 내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은 그것이었고, 나는 우리는 불행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올해 우리에게 닥쳤던 불행들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불행 그 자체는 물론이고,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관련법을 제정하고.. 그런 일련의 과정 속에 드러난 여러 문제들까지도 나는 이해하기 어렵다.

해리엇은 아주 오래전 이 지구에 살던 난쟁이나 거인이나 도깨비 같은 것들의 유전인자가 우리 속에 남아 있다가 벤과 같은 아이를 태어나게 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펴곤 한다. 그렇다면, 불행을 만드는 유전자도 우리 안에 깊이 숨겨져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 우리가 맞닥뜨렸던 불행은 우리가 가진 유전자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해할 수 없다'는 핑계 속으로 나는 또 도망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문장 하나에 뜨끔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그를 제대로 보는 일을, 그의 본질을 인식하는 일을 거부할 것인가? (p.177)

 

사람들이 벤을 거부했던 것처럼 나도 '제대로 보는 일'을, '본질을 인식하는 일'을 거부하면서 살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본다는 것은, 본질을 인식하려고 애쓴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불편한 일이니까.

 

루쉰의 <광인일기>에서 모씨 형제 중 아우는 사람들이 자기를 잡아먹으려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설 말미에 이런 글이 나온다.

 

사천 년간 내내 사람을 먹어 온 곳. 오늘에서야 알았다. 나도 그 속에서 몇 년을 뒤섞여 살았다는 걸. 공교롭게도 형이 집안일을 관장할 때 누이동생이 죽었다. 저자가 음식에 섞어 몰래 우리에게 먹이지 않았노라 장담할 순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누이동생의 살점 몇 점을 먹지 않았노라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젠 내 차례인데.....

사천 년간 사람을 먹은 이력을 가진 나. 처음엔 몰랐지만 이젠 알겠다. 제대로 된 인간을 만나기 어려움을!

사람을 먹어본 적이 없는 아이가 혹 아직도 있을까?

아이를 구해야 할 텐데....  <광인일기>

 

<다섯째 아이>에서 말하는 유전이 <광인일기>의 식인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불행에 대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비록 그 불행을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런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 사람을 먹어 본 적이 없는 아이가 아직도 있을까?

 

이제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다섯째 아이>를 들어야겠다. 이 책을 다 읽고 리뷰를 쓰는 대신 빨간책방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는데, 처음에 김중혁 작가가 이걸 듣기 전에 책을 읽고 글을 써보고 생각해 본 다음 듣는 게 좋겠다고 하는 거다. 하, 그래, 정리해볼게. 리뷰를 써 볼게. 그리고 나와 네가 어떻게 다르게 읽었는지 확인하러 다시 올게.

난 빨간책방 들으러 간다. (듣고나서 이 리뷰가 부끄러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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