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날씨. 버스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내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좀 애잔스럽다. 그림책 <엄마 마중>에서 추운 겨울날 전차 정거장에서 코끝이 빨개진 채로 엄마를 오래오래 기다리고 있던 꼬마 생각이 나곤 한다. 겨울 버스정류장, 추위에 어깨를 잔뜩 옴추리고 발을 동동거리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옆엔 그 꼬마가 서 있는 것 같다.  내 옆에서 나와 함께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꼬마에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금방 올거야"하고 말을 걸면, 나혼자 버스를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힘이 덜 든다.

 

왜 운전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난 운전면허도 없다고 하면 다들 좀 놀란다. 운전면허를 따지 않은 건, 내가 길눈이 어둡고 겁이 많아서다. 조수석에 앉아 차를 타고 가다가도 옆에 커다란 트럭이 지나가면 바퀴 속으로 우리차가 빨려들어갈 것만 같고, 옆에 차가 갑자기 끼어들면 운전자보다 내가 더 놀란다. 그러니 내가 운전을 하면 서울시내 교통체증의 가장 큰 원인으로 내가 지목되고, 수배령이 내려지고, 결국은 체포되어 면허는 취소되고, 서울에서 추방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그건 운전을 하게 되면 차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오직 운,전,만, 할 수밖에 없다는 게 싫어서다. 바깥 풍경을 샅샅이 볼 수도 없고, 누가 내 입에 넣어주지 않으면 맛있는 걸 먹기도 힘들고, 장난을 치거나, 잠을 잘 수도 없고, 지하철을 타고 책을 읽을 수도 없다.  이런 이기적인 이유로 나는 운전면허따기를 포기하고 살고 있다.  그러니까 버스정류장에 서서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버스를 기다리는 것쯤은 기꺼이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함께 기다려주는 <엄마 마중> 꼬마도 있으니까 그럭저럭 할만 하고, 게다가 너무 춥다 싶은 날이면 외출을 안하고 버텨도 된다. 전업주부의 특권이다.

 

지난 금요일 아침, 도서관에 가려고 버스를 탔다. 버스 창문 밖으로 햇빛만 보고 있으면 마치 봄 같았다. 훈훈한 바람이 불고 며칠 있으면 나무에 새싹이라도 돋을 것 같은 햇빛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었고, 사람들은 두꺼운 패딩을 입고, 목도리를 두르고, 종종 걸음을 하고 있었다. 겨울잠 자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은 요 며칠동안 늘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생각을 했다. 더구나 요즘 읽고 있는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라는 책에서 이런 글도 읽은 참이었다.

 

겨울에는 침묵이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존재한다. 눈은 침묵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침묵인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은 눈에 점령당했고, 하늘과 땅은 순백의 침묵의 가장자리에 불과하다.

눈송이들은 허공에서 서로 만나 그 자체가 이미 침묵 속에서 하얗게 변해버린 땅 위로 함께 떨어져내린다. 침묵이 침묵을 만나는 순간이다.

사람들은 길가에 묵묵히 서 있고, 인간의 말은 침묵의 눈으로 덮여 있다. 인간에게서 남아 있는 것은 그 모습뿐이다. 그 모습은 침묵의 이정표 같다. 인간은 가만히 서 있고, 그 사이를 헤치며 침묵이 나아간다. (114쪽)

 

그러니까 겨울의 제맛은 침묵이다. 인류가 겨울잠 자는 습성을 가지는 쪽으로 진화를 했다면 어땠을까. 사람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과 함께 파티를 벌일 것이다. 고요하고 편안한 겨울잠을 빌어주며, 새봄에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면서, 포옹하고 어깨를 두드리며 따뜻한 담요와 푹신한 베개를 선물할지도 모른다. 마침내 모든 사람들이 겨울잠에 빠져들면 비로소 세상은 평화롭게 침묵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세상이 얼마나 고요하고 아름다워질까. 사람들은 잠을 자느라 그 광경을 보지 못하겠지만, 겨울잠을 자지 않는 새와 물고기와 동물들은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인간들이 잠든 사이에 자기들만의 평화로운 시간들을 보내겠지.

 

그렇게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사람들이 하나 둘 깨어날 것이다. 겨울잠에서 깬 사람들은 자기가 깨어났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베란다에, 지붕에, 창문에 노란색이나 분홍색 리본을 단다. 나는 겨울잠에서 깨어 베란다에 리본을 달면서 이웃 중 누가 잠에서 깨어났는지 리본을 보고 알아내려 할 것이고, 가까운 이웃집 베란다에 걸린 리본을 발견하면 반갑고 기뻐서 어쩔 줄 모를 것이다. 일찍 깨어난 사람들은 아직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을 기다리며 조용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나누면서 오랜 잠으로 허기진 배를 채울 것이다. 그렇게 봄은 진정한 의미의 축제같은 시간이 될 수 있을 거다.

 

따뜻하고 행복한 상상이었다. 하지만 문득, 만약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람들도 있을 터였다. 겨울이 오기 전에 노인들은 삶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기분으로, 다시 새봄을 볼 수 있을지 의심하면서, 이별의 말을 준비하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죽음만큼 깊은 겨울잠에서 죽음의 세계로 쉽게 훌쩍 건너가는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기를 바랄지도 모르겠다. 노인의 가족들은 겨울잠에서 깨어나 노인이 돌아올 수 없는 아주 깊은 침묵의 세계에 빠진 것을 알고 베란다에, 창문에, 지붕에 검은 리본을 단다. 그러면 이웃 사람들은 그걸 보고 슬퍼하며 진심어린 애도를 보낼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의 상상은 인간의 선함을 믿고 할 수 있는 상상이었다. 인간의 겨울잠에 대한 상상은 나쁜 쪽으로도 이어졌다. 누군가, 사람들이 모두 겨울잠에 빠지기를 기다리다가 나쁜 일을 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겨울잠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사람이 나쁜 짓을 할 수도 있다.  겨울이 없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겨울잠을 잘 수 없을 것이고, 그러면 겨울을 기다렸다가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 겨울과 여름이 반대인 북반구와 남반구는 어떨까. 결국, 인간은 겨울잠을 잘 수 있는 평화로운 족속이 못되기 때문에 그 쪽으로 진화할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우리를 믿을 수 없어서.

 

결국 한겨울에도 식량을 구하기 위해 칼날같은 눈바람 속을 헤매고 다녀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구석기 시대, 혹은 그보다 전에 살던 인류의 조상들의 삶을 이어갈 수 밖에 없는 거다.  버스에서 내려 도서관으로 가는 길,  나는 내가 곰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면서 차가운 겨울 속을 열심히 걸었다. 곰은 물러나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이 간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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