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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3일 즈음부터 우리집에 TV가 없다. TV가 사라진지 3주가 되었는데, 큰애들 둘은 TV가 있으나 없으나 별 상관을 하지 않는다. 각자 자기 노트북이 있으니까, 자기 방에서 노트북으로 할 일이 많은 것 같다. 아, 아니다. 가끔 아들녀석이 TV를 아쉬워한다. 얼마전 자기 용돈을 털어서 산 PS4를 하고 싶은데 TV가 없어서 못한다나 뭐라나.
막내가 가장 심심해 한다. 날이 추워져서 나가 놀기도 마땅치 않고, 해도 일찍 지고, 게다가 점점 같이 놀 친구가 없어지고 있다. 아이들이 점점 바빠지고 있다. 친구 만나게 해주려고 학원 보낸다는 말이 실감이 나지만, 막내는 일주일에 두 번 영어 교습을 받으러 가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든다. 자기는 자유가 중요하다나.. 암튼, TV가 없어서 더욱 심심해진 막내가 요 며칠 책을 잡고 읽기 시작했다. 예전에 어느 분이 아이들 책 읽기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TV가 켜지면 책은 멀어진다'고 했었는데, 그 말이 맞는 말이었나 보다.
요즘 우리 막내가 읽고 있는 책은
학교 도서관에서 지가 골라 빌려온 책인데 하나같이 비문학 책들이다. 어려서도 옛이야기를 읽어주면 시큰둥하고, 도감류를 좋아하더니.. 우리 막내는 비문학파였나 보다. 큰딸은 그런 동생을 보고 자기랑 똑같다며 신기해 한다.
12월 13일 쯤에 서울역사박물관에 차출되어 나갔던 우리집 TV 2대가 다시 돌아온다. 남편의 회사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2014 서울사진축제 서울 視 . 공간의 탄생의 시행을 맡았고, 전시에 TV가 필요해지자 우리집 TV까지 갖고 나간 것이다. 전시는 12월 13일에 끝나고 우리집 TV도 돌아올 텐데, 그것도 한 대는 더 큰 것으로 바뀌어 올지도 모르는데, 난 지금 이 상태가 맘에 든다. 책 읽는 우리 막내의 모습을 더 오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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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2학년 아이들 책놀이교실을 하러 도서관에 갔다.
한 아이가 시간보다 일찍 와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갑자기 내 나이를 묻길래,
"나, 나이 많은데?" 했더니,
"정말요? 우리 아빠보다 많아요?" 한다.
"아마 그럴걸?"
"우리 아빠가 서른 여덟살인데... 그럼 마흔도 넘었어요?"
"그럼, 당연하지."
"정말요?"
아이가 놀란 듯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막 웃기 시작했다.
"OO야, 너 유진 샘 알지?" (큰딸은 도서관에서 고등학교 졸업 전부터 여러 프로그램에서 봉사하며 선생님을 했었다)
"네."
"유진 샘이 대학생인 것도 알지?"
"네"
"대학생이면 나이가 몇이야?"
"스물도 넘었죠."
"그래, 근데 유진 샘이 내 딸이잖아."
"어? 정말 그러네? 그럼 마흔도 훨씬 넘었겠네!"
하더니만 아예 책상에 벌렁 누워서 크게 웃어댔다. 뭐가 그렇게 웃길까? 아마 아이에게는 자기 아빠가 굉장히 크고 나이 많은 어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아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할머니' 같이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지고 볶고 하며 책놀이교실을 함께 했던 선생님이 아빠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고... 하긴 나도 내가 이 나이에 이르렀다는 게 신기하고 어이없고 이상하긴 하다. 그래서 아이랑 같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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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5년만에 노트북을 바꿨다. 음.. 얇고, 가볍고, 마음에 든다. 내 마음에 든다고 내 저렴한 노트북과 바꿔주지는 않을 게 뻔하니까 별 관심 없는 척 했다. 흥! 조금만 일찍 바꿨으면 내가 노트북을 사지 않아도 됐을 텐데.. 난 인터넷 되고 한글이랑 엑셀이랑 파워포인트만 돌아가면 돼서 5년 중고 노트북이라도 괜찮았는데.. 아깝다. 막내가 남편이 쓰던 노트북을 탐내고 있는데, 어림없는 소리! 라고 단칼에 잘랐다. TV도 돌아오는데, 고물이라도 노트북까지 있으면 책은 영영 안녕~ 이 되어버릴 게 너무 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