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랑 친구가 됐어요! 아이즐 그림책방 8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잉그리드 나이만 그림, 김서정 옮김 / 아이즐북스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한 해 동안 유빈이와 그림책을 읽으며 아이도 나도 즐거웠던 책들이 있다. 그림책을 읽으면서 아이랑 같이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던 책. 하도 깊은 인상을 남겨서 그림책에 나오는 어떤 한 장면을 두고두고 따라하게 만드는, 그런 책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책이다. 화려한 원색의 표지와 일러스트가 아이의 시선을 잡아당기기도 했겠지만, ‘삐삐’라는 캐릭터를 처음으로 탄생시켰다는 그림작가 잉그리드 나이만의 그림이라서 그런지 ‘삐삐’의 느낌을 참 잘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찰리와 로라>로 유명한 로렌 차일드도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이라는 책을 냈는데 그림책은 아니고 원작에 일러스트가 바뀐 동화책이다. 직접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아무리 잘 나가는 로렌 차일드라도 ‘삐삐’의 맛을 잉그리드 나이만만큼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정가가 무려 2만4천원이다!!

이 책이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의 전체 내용을 다 담고 있지는 않다. 다섯 살 짜리 유빈이에게 읽어주기에 부담이 없을 정도로 몇몇 내용을 뽑아서 줄여놓았는데,  발췌와 요약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도 만족할만 했다. 이 그림책에 들어 있는 내용은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에서 삐삐가 이사 와서 토미와 아니카가 만나는 ‘엄마는 천사, 아빠는 식인종’ ,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바쁜 발견가’, ‘서커스 단원 뺨치는 묘기‘, ’도둑과 함께 춤을‘, ’생일 축하해, 삐삐!‘에 해당된다. 물론 그 내용도 다 실려있는 건 아니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축약되어 있다.

예를 들면 삐삐가 이사를 오는 장면에서 원작에서는 삐삐가 이사오는 날 토미와 아니카는 할머니 댁에 가 있어서 삐삐가 이사오는 걸 못 보는 걸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림책에서는 토키와 아니카가 울타리 너머에서 삐삐가 말을 번쩍 들고 이사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또 엄마는 천사이고 아빠는 식인종이라는 설명도 생략되어 있다.  

 

삐삐가 토미와 아니카에게 팬케이크를 구워주는 장면은 원작에서 삐삐가 중국과자를 굽는 장면과 섞여있다.  삐삐가 마루바닥에 반죽을 밀어서 중국과자를 굽는 것은 이사한 날이 아니라  세 아이들이 발견가가 되는 그 다음날이다. 


삐삐의 능력을 설명하는 장면이다.  한손으로 머리를 땋으면서 동시에 한 손으로 뒷단추를 풀 수 있는 삐삐, 음식을 의자에 놓고 식탁에 엎드려서 먹는 삐삐, 대야에 머리를 거꾸로 푹 담근 채 씻는 삐삐, 발에 솔을 묶고 스케이트 타듯 이리저리 밀고 다니는 삐삐, 한번에 다섯 조각으로 장작을 패는 삐삐, 굴뚝청소도 혼자서 척척 해내는 삐삐의 모습들이다.  유빈이는 이 부분에서 눈을 반짝반짝 빛낸다.  공주만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삐삐를 보면서도 무척 즐거워하고 흐뭇해한다. 

   

무엇보다도 유빈이가 즐거워하고 따라하는 부분은 '바닥 닿지 말기'놀이를 하는 부분이다.  처음 이 책을 읽어줄 때부터 이 장면을 꼼꼼히 보더니 어느 날 쿠션이며 식탁의자, 자기 책상 의자, 조그만 공부상까지 몽땅 가져다가 둥글게 놓더니 그 사이사이를 건너다니며 놀기 시작했다.  혼자 놀 때보다 친구까지 불러서 놀 때는 정말 난장판이 되고 마는데, 어찌나 재밌고 즐거워하는지 감히 그만하라고 말릴 수가 없다. 
(도서관에서 만나는 한 엄마의 일곱살 아들은 이 책을 읽고는 '의자에 음식 놓고 식탁에 엎드려 먹기'를 따라하며 좋아한단다.)

그 장면의 그림을 원작과 비교하면, 동화책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에 실린 롤프 레티시의 그림 보다 위에서 본 시각으로 그려져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이 여기서 저기로 건너 뛰어야 하는 동선이 둥근 모양으로 이어져서 그런 것 같다.  동화책 속 그림이 좀 더 아기자기하고 세밀한 맛이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미 말했듯이 글이 원작에 충실하지는 않다.  도둑 얘기에서도 삐삐가 도둑과 폴카춤을 추고 식사를 대접하는 장면은 빠져있다.  게다가 삐삐가 도둑에게 금돈을 한 닢씩 주기는 하는데 자기와 폴카춤을 추고 빗을 불어준 댓가로 "이건 아저씨들이 떳떳하게 번 돈이에요."하며 주는 게 아니라 그냥 삐삐가 너무 착해서 도둑들을 가엾이 여겨 사탕 먹으라고 주는 식이다.

어제는 원작과 비교해볼 겸해서 집에 있던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을 꺼냈다.  읽는 김에 유빈이에게 "이 책도 삐삐 책인데, 엄마가 읽어줄까?"했더니 선뜻 곁에 다가와 앉았다.  아무리 삐삐라지만 글이 잔뜩 들어있는 이 책을 다섯 살 아이가 잘 들을까, 했는데 첫 장 '엄마는 천사, 아빠는 식인종'을 다 읽어줄 때까지 잠자코 듣고 있더니 더 읽어달라고 난리다.  그래서 연이어 두번째 장 '세상에서 가장 바쁜 발명가'를 읽었는데, 이 내용도 그림책 속에서 맛을 본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림책에는 없던, "땅바닥에 있는 거면 뭐든지 가져도 돼"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풀밭에 누워 잠자고 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하고는 "얼른 잡아가자"하고, 할아버지를 잡아다가 토끼장에 가둬놓고 민들레를 줄 거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유빈이는 한참동안 웃음을 터뜨렸다. 더 계속 읽어달라는 아이에게 '내일 더 읽어줄게'하며 간신히 달랬다.  (삐삐는 정말 놀랍다!!)

사실 이 그림책을 사주면서 제일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 발췌되고 요약된 그림책이라는 부분이었다.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사면서도 이걸 읽어줄까, 말까, 고민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유빈이에게는 원작 동화책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으로 연결해주는 근사한 다리가 되어준 것 같다. 

그림책으로 나온 삐삐가 하나 더 있다.  <삐삐가 공원에 갔어요!>라는 책이다.  그 책도 함께 유빈이에게 읽어주고 있는데, 유빈이는 <삐삐랑 친구가 됐어요!>를 더 좋아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11-11 1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1 1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섬 2009-11-12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이름은 삐삐롱스타킹>은 정말 재미있죠. 우리 조카에게 선물했었는데 너무 좋아하더라구요. 근데 우리 아이도 볼 수 있는 삐삐 그림책이 있다니 반가운데요. 우리 아이도 다섯살이니 아무래도 재미있게 볼 것 같네요.^^

섬사이 2009-11-13 03:36   좋아요 0 | URL
'바닥 닿지 말기'놀이를 한다거나 '의자에 음식 놓고 식탁에 엎드려 먹기'같은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저도 아이도 재미있게 잘 읽은 그림책이에요.
원색의 화려한 그림도 삐삐와 잘 어울리구요. ^^

순오기 2009-11-17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삐삐가 그림책으로도 있군요.
유빈이가 들어도 재밌는 삐삐는, 언제 누가 읽어도 재밌어요.ㅋㅋ

섬사이 2009-11-18 02:59   좋아요 0 | URL
정말 그래요. 우리 동화 속에서도 삐삐같은 인물이 하나 탄생했으면 좋겠어요. ㅋㅋ
 

    

 

 

 

 

 

 

'그림책 상상'이라는 이름의 잡지가 있다.  계간지인데 이 잡지를 알게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유빈이랑 자주 다니는 어린이도서관 선생님이 말씀해주셔서 알았고, 선생님이 개인적으로 구독해서 보는 이 책을 나더러 먼저 읽으라고 주셨다.  10월 말일에 어린이 도서관 행사 '나랑 같이 놀자'를 준비하시느라 읽으실 틈이 없다면서.   그래서 처음 만나게 된 그림책 잡지.  첫 소감은 "오호~~~ 괜찮은데~~"였다.   

2009년 10월에 나온 통권 8호는 논픽션 그림책에 대한 이야기가 길게 이어진다.  그림책 전문가라고 불리는 신명호 씨가 '논픽션 그림책에 대해서'라는 제목으로 쓴 그림책의 논픽션과 픽션에 대한 글은 읽기 쉽지는 않았으나 꽤 흥미롭기는 했다.  신명호의 <그림책의 세계>라는 책이 2만7천원이라는 고가라서 살 엄두를 내지 못하고 궁금해하고만 있던 차에 이렇게라도 작가의 글맛을 보게 된 것도 나름 뿌듯 했고.  

'그림책의 대부분이 사실을 근거로 상상의 세계를 더하거나 상상의 세계를 기본으로 하여 현실성을 더한 콜라보레이션'이라고 하면서 '논픽션은 아이들을 현실에서 상상으로 자연스럽게 이끄는 신뢰의 요소이며, 픽션은 일상에서 억제되고 제한받는 호기심과 흥미를 한바탕 놀이로 풀어주는 자유의 요소'로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어린이는 억압된 자아를 해방시키고 현실적인 불만을 해소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픽션과 논픽션의 콜라보레이션은 가장 이상적인 그림책의 구조'라고 강조한다.   

그러고 보니 어느 그림책이라도 순수하게 픽션이거나 전적으로 논픽션인 경우는 좀 드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표적인 논픽션 그림책, 픽션 요소를 즐기는 그림책, 논픽션 요소를 즐기는 그림책으로 나누어 책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아윽~ 보고 싶은 그림책이 한 두 권이 아니다.  이런 글들을 읽을 때 일어나는 부작용이다.  소개된 책들 속에는 외국 원서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뛰어넘을 수 없는 외국어의 장벽이 새삼 너무 높아 보이기도.. 끙. 

논픽션 그림책 작가들에 대한 인터뷰 기사들도 뒤따라 나온다.  <갈릴레이 갈릴레오>, <마들렌카>등으로 유명한 피터시스, <큰 동물 작은 동물>, <진짜 얼마만 해요>등의 책으로 유빈이의 관심을 받았던 스티브 젠킨스, 일본 작가인데 아는 책들이 없어 더 궁금한 미우라 타로, <와글와글 떠들썩한 생태일기>, <톡 씨앗이 터졌다>를 지은 곤도 구미코, 세밀화로 유명한 권혁도, 유빈이의 사랑을 받았던 <우리 몸의 구멍>의 작가 허은미의 면면을 살펴보는 기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특히 허은미 작가는 노무현 대통령의 노제가 열리던 날 어린이도서관에 강의를 하러 오셨었다.  강의를 하러 올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약속은 지켜야 할 것 같아 왔다며 강의가 끝나자마자 노제현장으로 달려가셨었다.  난 그날 검정 옷을 입고 강의를 들었었다.  강의를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편치 않았던 그 시간이 떠올랐다.  

'재미있는 논픽션 그림책'이라는 제목이 붙은 장에서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사람 이야기가 담긴 논픽션 그림책',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생명의 세계-지구를 넘어 우주까지-'로 나누어 그림책을 소개하고 있다.  나오는 책들을 모두 리스트로 만들어 보관해두어야 할 것 같다.    







 

 

  







  

 

 

  

 그 외의 그림책이야기도 알차고 재밌다.  '나쁜 아이를 사랑하는 그림책', '그림책 속 아빠 모습', 신화나 설화 속에 나타나는 뱀의 상징에 대한 글 '뱀, 강물처럼 굽이치는 생명력의 근원', 그리고 '그림책화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하여'라는 기사까지.   

'그림책 화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하여'라는 글은 <둥그렁뎅 둥그렁뎅>을 지은 김종도 작가가 썼는데 내용이 뭉클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어린이 책 분야에 종사한다는 이유로 사회문제를 외면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사회적 역할을 제한하는 것이고, 나아가 스스로를 고립 내지는 부정하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그림의 내용 자체가 우리가 사는 현실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의 부조리를 외면한 채로 아이들이 보는 책에서만 정의와 아름다운 진실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 땅의 그림책 화가로서 갖는 본연의 사회적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이는 절름발이 화가에 다름아니다.'라고 하면서 역사에서 작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사회참여에 기여했던 예들을 열거한다.  지난 7월 24, 용산참사 현장에서 있었던 그림책 작가들의 전시회 (권윤덕, 김병하, 김종도, 김환영, 이광익, 이상권, 이승현, 이억배, 장호, 조은영, 조혜란, 홍기한)인 '그림책 화가, 촛불을 들다' 전의 사진과 작품들도 볼 수 있다.   





 

 

 

 

 

북카페 그림책상상 http://www.imagination.kr/04.html 이 있고, 네이버에 따로 운영되는 블로그가 있다. http://blog.naver.com/sangbooks   이것도 모두 어린이도서관 선생님이 가르쳐주셨다. ㅎㅎㅎ

이번 호에 소개된 논픽션 그림책들은 따로 페이퍼로 꾸려보거나 리스트로 묶어봐야할 것 같다. 
두고두고 참고가 될만 하지 않을까.


댓글(4) 먼댓글(1)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그림책상상 vol.8
    from EST's nEST 2010-04-12 23:26 
    그림책 전문지 통권 8호가 나왔습니다. 이번 호 권두 특집은 '놀라운 논픽션 그림책의 세계'입니다. 사실 그림책의 세계는 픽션과 논픽션이 콜라보레이션을 이루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모르는 것을 쉽게 알려 주기 위한' 목적으로 출발한 그림책의 속성에 충실한 논픽션 그림책의 세계를 좀더 세심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논픽션 소재를 다루고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건조할 것 같다는 선입견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아름다우면서도 밀도 높은 그림...
 
 
순오기 2009-11-10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탕색이 어두워서 글씨 읽기가 힘들어요.ㅜㅜ
그래서 패쓰~~~

섬사이 2009-11-11 10:39   좋아요 0 | URL
저 위의 그림, 강아지풀 세상이 마음에 들어서 스킨으로 선택했는데,
이런 단점이 있군요.. .^^;;
겨울이 오면 스킨을 바꾸려고 하니까 조금만 참아주세요~~
아직은 저 누렇게 시들어가는 강아지풀에 마음이 끌려요...

마노아 2009-11-11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잡지가 있군요. 도서관에 비치해 두면 읽어볼 사람이 많을 것 같아요. 리스트를 그럼 기다려볼게요.^^

섬사이 2009-11-11 11:30   좋아요 0 | URL
네, 속이 꽤 알차더라구요.
도서관 선생님한테 부탁해서 앞으로도 빌려 볼 생각이에요.
리스트, 곧 정리해서 올리려고 하니까
기다려 주세요~~
 

1.  11월 4일 수요일 오후  (조짐이었을까...)
명보가 몸이 찌뿌둥하다며 학원에 가기 싫다고 했다. 
잠깐 고민을 했는데, 아무래도 학원가기 싫어서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아 그냥 다녀오라고 했다.  비염 때문에 늘 콧물에 재채기는 기본으로 달고 사는 녀석이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게다가 연하녀네 두 아이들이 놀러와 있기도 해서 더 그랬다.    

2. 11월 5일 목요일 (첫째날)
오늘은 연하녀네서 유빈이가 저녁때까지 노는 날이다.  11시쯤 유빈이를 연하녀네 데려다 주고 오늘은 꼭! 중앙박물관에 가서 나홀로 조용히 100주년 기념 특별전을 보리라 결심했는데,,,  11시가 조금 넘어서 명보가 초인종을 눌렀다.  허걱, 얘가 왜 이시간에 집에 오는 거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명보에게 "너 이 시간에 집에 오고 무슨 일이야?" 했더니 선생님이 열이 있다고 집에 가라고 했단다.  열을 재보니 38도.  허겁지겁 챙겨서 같이 병원에 갔다.  거점병원에 가면 하루종일 걸린다고 해서 일반내과로 갔는데, 신종플루인지 검사하는 키트가 다 떨어져서 검사할 수는 없다고 한다.  
진료를 받아보니 귀와 목에 염증이 좀 있다고.  의사 말이 하루 정도 경과를 더 지켜보자고 했다.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이고 약을 먹였는데 오후 늦게부터 39도가 넘는 고열이 시작되었다. 
밤 10시 39.2도  -  아무래도 안되겠어서 집에 있는 타이레놀을 하나 더 먹였다.   

3. 11월 6일 금요일 (둘째날)
밤 12시 30분  38.4도 - 타이레놀 덕에 열이 좀 떨어진 듯.  기침 때문에 깊은 잠을 못 자는 듯.
새벽 3시 40분  39.2도 - 음..  타이레놀을 하나 더 먹일까,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놔뒀다.
아침 7시 39.6도 - 깨워서 아침을 먹이고 병원에서 처방한 약을 먹였다.  열이 떨어지지 않고 기침이 심해진다.  
아침에 남편이 출근하면서 병원에 미리 접수를 해주겠다고 했다.  그 병원이 꽤 평판이 좋은 병원이라 사람이 무지 많다.  자고 있는 유빈이를 깨워서 데리고 갔다 올까, 했지만 아무래도 유빈이에게도 좋지 않을 것 같아 고민하고 있는데, 남편이 명보 혼자 다녀오라고 하란다.  
불쌍한 명보.  남편이 출근하고 8시 30분쯤 명보를 깨웠다. 
"유빈이가 아직 자고 있고, 병원에 유빈이까지 데리고 가서 오래 기다리는 것도 신경이 쓰여서 그러는데 너 혼자 다녀올 수 있겠어?"  했더니  그러겠단다.
일어나서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혼자 현관문을 나서는 아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짠하다.  
10시가 좀 넘어서 돌아온 명보는 타미플루를 처방받아서 가지고 왔다.  간이검사조차 받지 못했는데 타미플루부터 처방이다.    


(네가 그 유명한 타미플루구나...)

어쩔 수 없지...간이검사키트도 동이 나서 없다고 하고, 거점병원에 가서 하루종일 기다려 정밀검사를 한다고 해도 검사결과를 확인하는 데까지 빨라야 3,4일, 늦으면 일주일이 걸린다니, 확진받고 약을 쓰면 이미 늦는 셈이 되니까 말이다. 
오자마자 약을 삼키더니 방에 들어가 누웠다.  1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고열이 뚝 떨어졌다. 
약이 엄청 센가보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약을 먹여도 되는 건가, 잠시 흔들렸다.  
학원에 전화해서 다음주 화요일이나 수요일까지 결석하게 될 거라고 얘기했다.

4. 11월 7일 토요일 (셋째날)
명보는 자기 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더니 답답해 죽으려고 한다.  거실에 나오는 대신에 마스크 착용을 하기로 했다.  나오자 마자 컴퓨터부터 켠다. 
유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점심을 챙겨먹고, 명보랑 둘이서 병원에 갔다.  의사는 열을 재보더니 타미플루를 먹고 열이 금방 뚝 떨어졌다면 신종플루가 거의 확실하다고 했다.  가족간의 전염률은 20%정도.  앞으로 3,4일간 주의깊게 가족들을 체크해볼 필요가 있단다. 
예방접종은 어떻게 해야되냐고 물었더니 약을 먹지 않고 끙끙 앓고 나았다면 예방접종을 할 필요가 없지만 명보의 경우 타미플루를 복용했기 때문에 예방주사를 맞아야 한단다.   
약을 먹고 금방 열이 떨어지는 걸 보니 타미플루라는 약이 무척 독한 약인 것 같아 무섭다고 했더니 그건 타미플루가 독한 게 아니라 바이러스랑 약이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냥 끙끙 앓고 낫게 놔둘 걸 그랬나봐요."했더니 타미플루를 먹지 않았어도 충분히 앓고 난 후에 나았겠지만 워낙 고열을 하기 때문에 몸이 곯고,  48시간 안에 타미플루를 복용해야 효과가 있으니까 되도록 빨리 약을 먹는 게 더 현명하다면서 의사가 웃었다.  그렇구나, 몸이 곯는구나...  하지만 몸의 면역체계는 더욱 단단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까지 질문을 하지는 못했다. 
나머지 3일치 타미플루와 기침약을 처방받아 가져왔다.  지금은 비교적 멀쩡해보인다.  기침을 아직 좀 하는데, 그건 신종플루와 별개인 증상이란다. 
수건을 따로 쓰거나 밥을 따로 먹거나 하진 않는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종플루가 그렇게 겁나진 않다. 한편으로는 빨리 앓아버리고 신종플루로부터 놓여나고 싶은 무모한 생각도 든다. 
사망율은 60%의 조류독감보다는 훨씬 낮고, 독감보다도 낮은 0.2~0.6%.  신종플루가 무서운 이유는 전염력 강한 새로운 질병이기 때문인 것 같다.(그래서 어떤 사람은 조류독감 바이러스와 신종플루 바이러스가 합체되어 변형을 일으켰을 경우가 더 무섭다고  말한다.  신종플루의 전염력과 조류독감의 사망율... 생각만해도 끔찍하긴 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너무 예민한 반응이 아닌가 싶다.  언론에서도 사망자가 나올 때마다 속속 보도하고 집계하면서 오히려 공포심을 더 키우는 것 같고.  고미숙씨가 쓴 <이 영화를 보라>라는 책을 보면 영화 '괴물'을 가지고 '위생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그 책에 쓰여진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아무튼 명보도 그렇지만 나머지 식구들도 모두 지켜봐야 할 상황이다.  유진이는 학교에서 신종플루 예방주사 접종 희망자를 조사한다며 맞을까 말까 물어왔다.  의사들 사이에서도 맞지 말라는 사람 있고, 맞으라는 의사 있고.. 갈팡질팡이다.  나는 맞으라고 했다.  예방주사를 견딜만큼 유진이가 충분히 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빈이는 좀 생각을 해봐야겠다.  

5. 11월 8일 일요일 (넷째날)
배우 이광기의 아들 석규군이 신종플루로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났다.  불특정 익명의 누군가가 사망했다는 기사보다는 충격이 크다.  도대체 이 놈의 신종플루는 종잡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석규군에게 신종플루가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만한 기저질환이 있었는지 조사한다는데, 자식을 잃고 난 부모 입장에선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가슴에 맺힐 아픔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해진다.  우리집 아들이 무난히 넘고 있는 그 병이, 일곱살 어린 아이에게는 너무나 혹독했나 보다.    
인터넷으로 기사를 검색해보니 간이 검사에선 음성반응이 나왔었단다.  그래서 더 타미플루 처방이 늦어졌던 것 같다.  아이가 위급한 상태에 이르러서야 정밀검사에 들어갔다는데 아이가 죽고 나서 핸드폰으로 '신종플루 확진'이라는 문자를 받았다는 이광기씨 가족은 또 얼마나 가슴을 쳤을까.   사람들이 몰려와 애도를 표하고 위로를 한다고 한들, 그 마음이 오죽할까.
명보는 밥 먹을 때 말고는 계속 마스크를 쓰고 있고, 나머지 가족들도 외출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있다.  유빈이는 밖에 나가지도 친구랑 만나지도 못하니 심심하고 지겨워 하루에 서너번씩 조그만 게 신세한탄을 하고 있다.  남편이랑 유진이도 회사와 학교에서 돌아오면 외출금지, 특히 남편은 당뇨가 좀 있기 때문에 고위험군에 속해서 집에 들어오면 거의 감금상태로 안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게 하고 있다.   부디 다른 가족들에게는 전염되지 않고 이대로 잘 끝나줬으면 좋겠다.  전염이 된다면 명보와 가장 가까이서 많이 접촉한 내가 전염확률이 제일 높겠지..   아이고, 제발...
남편이 자기가 쓰는 노트북을 가지고 들어왔다.  일하는 데 쓰는 노트북이라 다른 사람들 손에 맡기질 않는 편인데, 명보가 하도 답답해하니까 방에서 인터넷이나 들여다 보라고 내줬다.  명보는 신나서 웹툰부터 쫙 훑어나갔다.    
명보는 수요일부터 학교에 갈 수 있다. 그런데 목요일이 수능이라 수요일은 오전수업만 할 것 같고, 목요일은 또 학교에 안가는 날.  아주 신났다. 
신종플루보다 기침이 더 길게 가는 듯 하다.  

6. 11월 9일 월요일 (다섯째 날) 
명보는 늦게 일어나 아침을 먹고 샤워를 하고 타미플루 한 알을 먹고(하루에 2번 아침 저녁으로 한 알씩 복용하고 있다.) 자기 방으로 들어가더니 감감...  혹시 다시 아픈 걸까, 걱정이 되어서 방으로 들어가 이마를 짚어봤다.  열은 없고, 그냥 다시 잠자는 중.. 한창 자라는 청소년기엔 잠이 많아진다지만,,  저리도 졸릴까.  뭐, 학교도 학원도 안가는데 이 참에 푹 자고 쉬는 것도 좋을 것 같기는 하다. 
아침엔 연하녀가 전화를 했다.  주말을 잘 지냈는지, 명보는 좀 어떤지.. 물어봐주니 고맙기만 하다.  지난 금요일이 유진이가 연하녀에게 수학공부를 하러 가는 날이었는데 명보가 아픈 바람에 혹시 연하녀네 집에 전염이 될까 무서워 못 가게 했었다.  오늘 또 공부하러 가는 날인데, 한 3,4일만 더 지켜보고 보내겠다고 했다.  유진이가 연하녀와 공부하는 대신, 연하녀네 애들 둘을 우리집에서 놀게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확실히 안전하다고 생각될 때까지는 조심해야 할 것 같아서다.   
거의 매일 만나서 놀던 연하녀네 아이들을 못보니 유빈이도 지루하고 심심해서 난리다.  책 주문을 최대한(?) 자제해오던 중이었지만 '더 이상 못참겠다~'하고 <나의 체리나무 집>을 두 권 신청해버렸다.  하나는 유빈이더러 가지고 놀라고 하고, 하나는 연하녀네 딸 신이에게 선물로 줄 생각이다.  내일 배송될 테니, 한동안은 그 화려한 팝업북을 가지고 놀겠지....
명보는 팔팔하다.  신종플루가 다 나았다는 의사의 진료가 있을 때까지, 명보는 안방 출입금지 조치를 피해갈 수 없었는데, 오늘 저녁부터 슬슬 안방을 들락날락하기 시작한다.  어지간히 답답한 모양이다. 
저녁엔 명보 학원에서 전화가 왔다.  명보는 좀 어떠냐고, 언제부터 다시 나올 수 있냐고..  내일 병원에 가서 마지막으로 진료를 받고 괜찮다고 하면 수요일부터 나갈 거라고 했더니, 명보가 집에 있는 동안 할 숙제를 내주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묻는다.  명보를 보낼 수도 없고, 유진이더러 가라고 하면 싫다고 할 게 뻔하고, "제가 가지요.."했다.  수학과 영어 문제 프린트가 꽤 도톰하다.  집에 돌아와 명보에게 숙제를 내밀면서 "좋겠다. 심심하고 지루했는데, 할 일이 생겼으니 얼마나 좋니.."했더니 어이없이 웃는다. 
이제 다시 별탈 없이 무사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 내심 기분이 좋았다.   

7. 11월 10일 화요일 (여섯째 날)
수건을 따로 쓰고, 식기를 열탕소독하고, 식사를 따로 하고,  집안을 구석구석 소독하고, 이불을 뜨거운 물에 빨아서 햇볕에 내다 말리고,,,,  그런 일을 안,했,다.  생각해보면 전염을 막는 기본적인 일들을 무시한 건데,,,  문득 문득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무사태평 안일할 수 있었던 건 "어디서든 걸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버스 안, 마트, 학교, 회사..  안전한 곳이 없을 테니 내 집을 통째로 무균실로 만든다고 해도 바이러스의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명보에게 안방출입금지 조치를 내리고 집안에서도 마스크를 쓰게 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물론 전염확률은 높아졌을 테지만... 아직은 다른 가족들 모두 무사하다.
오전에 <나의 체리나무 집>이 배송되어 왔다.  유빈이에게 그 책이 유효했던 시간은 단 15분 정도?  역시 유빈이는 정적인 놀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게 맞구나, 했다. 
명보는 아침을 먹고 병원에 갔다.  유빈이를 데려갈 수 없어서 명보 혼자 갔다.  가기 전에 의사에게 말해야 할 것들을 주지시켰는데, 첫째는 기침이 계속 나오고 있는데 다 나은 건지, 둘째는 다른 가족들이 아직 모두 괜찮은데 좀 더 지켜봐야 하는지 아니면 사람들과 접촉을 해도 되는지였다.  
오전에 병원에 간 녀석이 2시가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사람이 무지무지 많았단다.  계속되는 기침은 염증이 아직 있어서 그런거니까 신종플루랑 상관이 없고, 신종플루는 다 나았으며, 기침이 나을 때까지는 찬바람을 쐬지 않는 게 좋고, 가족들도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도 좋다고 하셨단다.  
이제 정말 다 끝난 건가?  긴장이 풀리면서 몸이 축 쳐진다.  이러면 안되는데...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무스탕 2009-11-10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며칠동안 가족분들 모두 고생 많으셨어요.
명보군 어여 기침도 깨끗하게 낫고 가족분 모두 잘 넘기시길 바랍니다.

지성이가 10월 말에 열이 많이 나서 거점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고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복용하라고 감기약을 지어 줬는데 병원 약사가 그러더군요. 병원에서 준 약을 먹어도 열이 내리지 않으면 브루펜을 더 먹이래요.
워낙 조제 해 준 약에 해열제가 있는데요. 물었더니 병원에서 준 약이랑 브루펜은 성분이 틀리다고 먹여도 된다고 그러더라구요. 으흠.. 그런게 있나.. 하고 알았다고 했지요.
다행스럽게 병원 약 으로 열도 내리고 더 다행스럽게 플루가 아니라고 해서 이틀 쉬고 다시 학교엘 다녔지요 ^^

섬사이 2009-11-10 18:39   좋아요 0 | URL
고생이라고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막상 다 나았다는 얘길 들으니 몸이 축 처지는 것 같아요.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나봐요. ^^
정성이, 지성이가 신플이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그래도 예방접종이 이루어지고 어느정도 진정이 될 때까지는 마음을 쉽게 놓을 수 없을 것 같죠?^^;;

순오기 2009-11-10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유~ 정말 맘 졸이며 애쓰셨네요. 토닥토닥~
가족들은 무사히 잘 지나가리라 믿어요.
긴장이 풀리면 엄마가 몸살 날 수도 있으니 님도 좀 푹 쉬세요.


섬사이 2009-11-11 10:41   좋아요 0 | URL
별로 애쓴 것도 없어요. ^^
다행히 다른 가족들 모두 별탈이 없네요.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꾸벅~

2009-11-11 0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1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9-11-11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교적 긴장하지 않고 보내신 듯한데, 무사히 플루가 떨어져나가서 참 다행이에요.
그래도 혼자서 병원 다녀온 명보가 좀 짠하긴 해요.
긴장 풀려서 섬사이님이 아프시면 안 돼요..ㅠ.ㅠ
근데, 명보가 몇 학년이에요???

섬사이 2009-11-11 10:50   좋아요 0 | URL
예, 긴장을 지나치게 안했어요. ^^;;
그래도 다행히 가족들 모두 아직은 무사합니다.
저도 어제 하루 축 처지더니 오늘은 좀 낫네요.
명보는 중2랍니다.
제 키를 훌쩍 넘을만큼 크긴 했는데,
고열하는 아이를 혼자 병원에 보내자니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꿈꾸는섬 2009-11-13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 많으셨네요. 지금은 괜찮은거죠. 신종플루가 너무 퍼져있어서 정말 걱정이에요.

섬사이 2009-11-13 03:34   좋아요 0 | URL
예, 지금은 모두 괜찮아요.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예방접종이 시작되었으니 조금만 더 견디면 진정되겠지요.
으랏차차, 힘내요, 우리. ^^
 
<더불어 사는 행복한 정치>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더불어 사는 행복한 정치 더불어 시리즈 1
서해경.이소영 지음, 김원희 그림 / 청어람주니어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변이 시끄럽다. 재벌언론 조중동의 방송진출을 위한 미디어법 개정을 두고 “절차상 위법이지만 유효하다.”는 너무나 어정쩡해서 어이가 없는 헌재의 결정이 한참 도마에 올랐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갑작스런 추위 속에서 용산참사 유가족과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죽은 자와 죽어가는 생명들을 위한 위령미사’를 드렸다. 그런가 하면 아프간 재파병을 두고 갑론을박이 한창이고 세종시 백지화니 박정희의 만주군 혈서지원이니 해서 또 한편이 왁자지껄이다. 국민들은 신종플루 때문에 바싹 긴장하느라 삶이 편안치 않다. 이런 와중에 ‘더불어 사는 행복한 정치’라니... 눈물겨운 꿈처럼 책 제목이 아련했다.

인도의 초대 총리인 지와하를랄 네루는 ‘정치란 국민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라고 했고 공자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했다. 이 책의 지은이는 ‘정치란 사람들의 서로 다른 생각을 모아서, 문제를 잘 해결해 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놀이의 규칙을 정하거나 학교에서 학급회의를 하거나 동네 반상회를 하는 것 모두가 다 정치라고. 그러고 보면 정치는 정말 좋은 것이어야 했다. 우리가 염증을 느끼고 분통을 터뜨리고 냉소를 보내야할 만큼 나쁘지 않았어야 했다.

생각이 모이려면 대화를 나눠야 하고, 대화가 잘 되려면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 처지를 보자면 들어주는 사람도, 대화도 없어 공연히 외롭고 처량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우리끼리 알아서 눈물도 닦아주고, 어깨동무도 하고, 때론 허허, 허탈하게 웃으며 술잔을 기울이고, 따뜻한 촛불을 밝히기도 했나 보다.

이 책을 읽으며 좋았던 것은 아이들에게 ‘정치’라는 것의 기본을 차근차근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각 장 맨 앞에 옛이야기나 우화, 아이들 생활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역사적 사건 등등을 예화로 제시하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방법도 마음에 들었다. 지은이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관심’과 ‘참여’다. 그 ‘관심’과 ‘참여’는 나라 안의 정치를 넘어서 국제사회의 평화를 이루는 데까지 확장된다.

그렇다고 이 책이 민주주의 정치의 이상적인 모습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언론사에 출판사, 세 개의 상업방송국을 가진 이탈리아 최대재벌이었다가 총리가 된 베를루스코니를 예로 들며 편법과 꼼수에 능란하고 과도한 권력을 탐하고 우리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자를 경계하며 감시하라는 주의사항도 잊지 않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우리가 가진 하나하나의 투표권 행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 투표권을 어떤 사람에게 써야 하는지도 생각해보게 한다. 특히 각 장 끝에 <생각이 깊어지는 자리>라는 코너가 있어서 아이들이 질문에 대해 생각하고 자기 의견을 적어보게 되어 있는데, 그 질문들 중에 어떤 것은 꽤 매섭고 날카롭다.

그러고 보면 지난 약 2년 남짓 동안 우리는 정치적 참여의 기회를 참 풍성하고 다양하게 누려온 것 같다. 촛불집회, 거리행진도 있었지만 가장 많은 서명을 했고, 댓글을 달았으며, 여기저기서 성명이 발표되고, 많은 이들이 애도의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이런 참여들이 부디 ‘더불어 사는 행복한 정치’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이 책을 통해서 정치참여의 ‘아픔’을 겪었던 많은 분들이 자라나는 세대들로부터 이해받고 존경받기를 바라는 욕심도 부려본다. 그러고 보니 살아가면서 피할 수도 없고 떼어낼 수도 없는 게 정치라면, 아이들에게 ‘정치란 이런 것이다’하고 제대로 가르쳐줄 책 한 권이, 요즘 가장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 221쪽 / 하지만 앞 장에서 다룬 4.19혁명 역시 마산의 중,고등학생에게 시작되어
; 앞 장에서 4.19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없어 앞부분을 처음부터 뒤적였었다. 혹시 내가 두 장을 한꺼번에 넘기는 바람에 못 읽었나, 싶어서. 하지만 4.19혁명에 대한 이야기는 앞쪽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순간 좀 당황스럽고 의아했지만 그냥 계속 읽어나갔더니 4.19혁명에 대한 이야기가 238쪽에 나온다. ‘앞 장’이 아니라 ‘뒷장’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소년을 위한 고려유사>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청소년을 위한 고려유사 박영수의 생생 우리 역사 시리즈 3
박영수 지음 / 살림Friends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학생시절 국사나 세계사 같은 역사 과목들은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에 따라 아주 재미있거나 아주 따분해지곤 했다. 중학생 시절의 선생님이 한 분 떠올랐다. 세계사를 맡았던 중년의 아줌마 선생님이셨는데, 수업 중간 중간 재미있는 일화들을 들려주시곤 했다. 아이들은 모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숨죽이며 이야기를 들었고, 그 선생님 덕에 세계사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되었다. 적어도 그 선생님이 세계사를 가르치셨던 동안은.

이 책이 꼭 그 선생님을 닮았다. 역사는 죽은 자들의 기록이 아니라 살아서 사랑하고 싸우고 질투하고 야망을 불태웠던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빨리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라고 하는 것만 같다.

삼국시대나 신라에 대한 이야기는 신화나 전설의 느낌이 들어서 매력적이고 조선시대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시대와 가까워서 기록이며 유물이 풍성한 편인데다가 자주 드라마나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해서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고려는? 왠지 어정쩡한 느낌이었다. 지은이도 이 점이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머리말에서 ‘....고려시대는 상대적으로 친밀도가 떨어져서 재미없다고 속단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건 오해나 편견에서 나온 판단이며 고려시대 역사를 살펴보면 흥미롭고 유익한 이야기가 가득하다.’고 말하는 걸 보면 말이다.

고려 초기, 고려 중기, 고려 말기의 세 장으로 구분해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 그 이야기가 무려 37가지다. 고려 건국 전, 왕건이 궁예 밑에서 장군으로 있을 때 주변의 모함으로 위기에 처한 왕건을 기지를 발휘해서 구한 최응의 이야기를 첫 번째로 해서 청렴하고 강직했던 3대정승 서필, 서희, 서눌의 이야기, 8대 현종 때의 강감찬의 탄생부터 거란과의 전쟁에서의 용맹함으로 강감찬이 무속신으로 추앙받게 된 사연이 이어진다. 특히 17대 인종 때의 이자겸과 묘청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된 이자겸이 왕비가 된 넷째 딸을 이용해서 인종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했던 계획이 실패하는 이야기나 서경천도를 꿈꾸었던 묘청이 뜨거운 기름을 넣은 큰 떡을 만들어 강물 속에 던져 넣은 후에 기름에 새어나와 오색무지개 무늬가 강물위에 둥둥 뜨게 만들고는 ‘용의 침’이라고 너스레를 떨다가 신중한 인종에게 딱 걸리는 이야기는 웃음을 짓게 만든다.

고려 중기로 들어서면 무신정권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무신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의 이야기로 문을 여는데, 이 사건은 19대 명종 제위시절 무신정변이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 노비출신이나 힘도 세고 출세욕도 강해서 장군자리에 올라 권력을 쥐었지만 최충헌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이의민, 23대 고종 시절 실권을 쥐었던 최우의 사위로 다음 후계자로 지목되었지만 장인의 여인들과 잘못 어울렸다가 아내의 음모에 걸려들어 죽임을 당한 김약선, 호적조차 없었던 천민중의 천민 양수척 출신의 미인 자운선의 불행, 뛰어난 문장가 이규보, 그리고 몽고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충’자 돌림의 왕들의 이야기는 파란만장 우여곡절의 격랑의 시대를 드러낸다.

고려말기는 31대 공민왕 시절의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공민왕이 사랑했던 노국대장공주를 잃고 슬퍼하자 승려 신돈이 노국대장공주를 닮은 여종 반야를 공민왕에게 소개해 그 사이에서 32대왕인 우왕이 탄생하게 되는 이야기인데, 같은 여자로서 노국대장공주도 반야도 안쓰럽지 않을 수 없다. 문익점의 목화씨 밀반입에 대한 진실과 목화재배와 보급을 위해 각고의 연구와 노력을 거듭했던 문익점의 장인 정천익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로웠고, 용맹하고 후덕했던 장수 최운해가 마누라가 무서워 달아난 사연, 황금보기를 돌같이 했던 청렴한 최영 장군 집의 음식의 맛의 비결은 슬며시 웃음을 짓게 만든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패망을 맞은 고려. 두 임금을 섬길 수는 없다며 만수산으로 들어가 불을 질렀어도 나오지 않았다는 72명의 충신 두문72현, 그리고 빠뜨릴 수 없는 정몽주의 단심가와 선죽교 죽음으로 책은 끝을 맺는다.

물론 정치적인 일화 외에도 내기 바둑에는 능했으나 겁이 많아 낭패를 본 홍순의 이야기라든가 ‘벼락 맞은 집의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부자가 된다’는 미신 때문에 일어난 끔찍하고 엽기적인 사건 이야기, 형제투금 설화에 얽힌 여러 가지 주장들, 아내를 극진히 사랑했던 손변, 왕비와 후궁들 간의 골치 아픈 질투 싸움에서 받은 상처를 동성애로 위로받았던 왕들,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갔다가 순제의 황후가 된 기씨소녀의 이야기 등도 이어진다.

이야기 끝마다 실려 있는 ‘문화이야기’라는 팁도 읽어볼만 하다. 정자가 모두 팔각정인 이유, 조기를 ‘굴비’라고도 부르게 된 데 얽힌 사연, 벼락 맞은 대추나무가 행운의 상징인 까닭, 옥새의 유래 등등을 아이들에게 슬쩍 이야기해주자 금방 흥미를 보였다

야사나 일화는 자칫하면 역사의 큰 줄기를 놓치고 말초적인 흥미 중심의 이야기로 빠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역사에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도구가 되어주지 않을까. 중학생 때의 그 세계사 선생님처럼, 단단하고 차가운 돌 위에 새겨진 듯했던 역사에 피가 돌고 온기가 퍼지고 사르르 결을 세워 감동의 질감이 드러나는 걸 느끼게 해주니까 말이다.  마치 갓 구워 따끈한 페스츄리의 냄새와 그 결을 느끼며 맛을 만끽하는 기분이랄까.

이야기에서 좀 더 힘을 뺐다면 더 재미나고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다. 글이 ‘이야기’ 로서 자족하지 않고 역사가 주는 교훈이나 학습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서희와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의 외교담판 이야기에서 “서희가 소손녕을 설득한 비결은 뭘까?”하며 갑자기 지은이가 독자에게 ‘가르치기’를 시도하는 부분이 그렇다. 그러나 이 책이 불러일으키는 고려사에 대한 흥미에 비하면 이는 사소한 결점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