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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랑 친구가 됐어요! ㅣ 아이즐 그림책방 8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잉그리드 나이만 그림, 김서정 옮김 / 아이즐북스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한 해 동안 유빈이와 그림책을 읽으며 아이도 나도 즐거웠던 책들이 있다. 그림책을 읽으면서 아이랑 같이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던 책. 하도 깊은 인상을 남겨서 그림책에 나오는 어떤 한 장면을 두고두고 따라하게 만드는, 그런 책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책이다. 화려한 원색의 표지와 일러스트가 아이의 시선을 잡아당기기도 했겠지만, ‘삐삐’라는 캐릭터를 처음으로 탄생시켰다는 그림작가 잉그리드 나이만의 그림이라서 그런지 ‘삐삐’의 느낌을 참 잘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찰리와 로라>로 유명한 로렌 차일드도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이라는 책을 냈는데 그림책은 아니고 원작에 일러스트가 바뀐 동화책이다. 직접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아무리 잘 나가는 로렌 차일드라도 ‘삐삐’의 맛을 잉그리드 나이만만큼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정가가 무려 2만4천원이다!!
이 책이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의 전체 내용을 다 담고 있지는 않다. 다섯 살 짜리 유빈이에게 읽어주기에 부담이 없을 정도로 몇몇 내용을 뽑아서 줄여놓았는데, 발췌와 요약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도 만족할만 했다. 이 그림책에 들어 있는 내용은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에서 삐삐가 이사 와서 토미와 아니카가 만나는 ‘엄마는 천사, 아빠는 식인종’ ,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바쁜 발견가’, ‘서커스 단원 뺨치는 묘기‘, ’도둑과 함께 춤을‘, ’생일 축하해, 삐삐!‘에 해당된다. 물론 그 내용도 다 실려있는 건 아니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축약되어 있다.
예를 들면 삐삐가 이사를 오는 장면에서 원작에서는 삐삐가 이사오는 날 토미와 아니카는 할머니 댁에 가 있어서 삐삐가 이사오는 걸 못 보는 걸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림책에서는 토키와 아니카가 울타리 너머에서 삐삐가 말을 번쩍 들고 이사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또 엄마는 천사이고 아빠는 식인종이라는 설명도 생략되어 있다.
삐삐가 토미와 아니카에게 팬케이크를 구워주는 장면은 원작에서 삐삐가 중국과자를 굽는 장면과 섞여있다. 삐삐가 마루바닥에 반죽을 밀어서 중국과자를 굽는 것은 이사한 날이 아니라 세 아이들이 발견가가 되는 그 다음날이다.
삐삐의 능력을 설명하는 장면이다. 한손으로 머리를 땋으면서 동시에 한 손으로 뒷단추를 풀 수 있는 삐삐, 음식을 의자에 놓고 식탁에 엎드려서 먹는 삐삐, 대야에 머리를 거꾸로 푹 담근 채 씻는 삐삐, 발에 솔을 묶고 스케이트 타듯 이리저리 밀고 다니는 삐삐, 한번에 다섯 조각으로 장작을 패는 삐삐, 굴뚝청소도 혼자서 척척 해내는 삐삐의 모습들이다. 유빈이는 이 부분에서 눈을 반짝반짝 빛낸다. 공주만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삐삐를 보면서도 무척 즐거워하고 흐뭇해한다.
무엇보다도 유빈이가 즐거워하고 따라하는 부분은 '바닥 닿지 말기'놀이를 하는 부분이다. 처음 이 책을 읽어줄 때부터 이 장면을 꼼꼼히 보더니 어느 날 쿠션이며 식탁의자, 자기 책상 의자, 조그만 공부상까지 몽땅 가져다가 둥글게 놓더니 그 사이사이를 건너다니며 놀기 시작했다. 혼자 놀 때보다 친구까지 불러서 놀 때는 정말 난장판이 되고 마는데, 어찌나 재밌고 즐거워하는지 감히 그만하라고 말릴 수가 없다.
(도서관에서 만나는 한 엄마의 일곱살 아들은 이 책을 읽고는 '의자에 음식 놓고 식탁에 엎드려 먹기'를 따라하며 좋아한단다.)
그 장면의 그림을 원작과 비교하면, 동화책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에 실린 롤프 레티시의 그림 보다 위에서 본 시각으로 그려져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이 여기서 저기로 건너 뛰어야 하는 동선이 둥근 모양으로 이어져서 그런 것 같다. 동화책 속 그림이 좀 더 아기자기하고 세밀한 맛이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미 말했듯이 글이 원작에 충실하지는 않다. 도둑 얘기에서도 삐삐가 도둑과 폴카춤을 추고 식사를 대접하는 장면은 빠져있다. 게다가 삐삐가 도둑에게 금돈을 한 닢씩 주기는 하는데 자기와 폴카춤을 추고 빗을 불어준 댓가로 "이건 아저씨들이 떳떳하게 번 돈이에요."하며 주는 게 아니라 그냥 삐삐가 너무 착해서 도둑들을 가엾이 여겨 사탕 먹으라고 주는 식이다.
어제는 원작과 비교해볼 겸해서 집에 있던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을 꺼냈다. 읽는 김에 유빈이에게 "이 책도 삐삐 책인데, 엄마가 읽어줄까?"했더니 선뜻 곁에 다가와 앉았다. 아무리 삐삐라지만 글이 잔뜩 들어있는 이 책을 다섯 살 아이가 잘 들을까, 했는데 첫 장 '엄마는 천사, 아빠는 식인종'을 다 읽어줄 때까지 잠자코 듣고 있더니 더 읽어달라고 난리다. 그래서 연이어 두번째 장 '세상에서 가장 바쁜 발명가'를 읽었는데, 이 내용도 그림책 속에서 맛을 본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림책에는 없던, "땅바닥에 있는 거면 뭐든지 가져도 돼"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풀밭에 누워 잠자고 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하고는 "얼른 잡아가자"하고, 할아버지를 잡아다가 토끼장에 가둬놓고 민들레를 줄 거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유빈이는 한참동안 웃음을 터뜨렸다. 더 계속 읽어달라는 아이에게 '내일 더 읽어줄게'하며 간신히 달랬다. (삐삐는 정말 놀랍다!!)
사실 이 그림책을 사주면서 제일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 발췌되고 요약된 그림책이라는 부분이었다.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사면서도 이걸 읽어줄까, 말까, 고민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유빈이에게는 원작 동화책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으로 연결해주는 근사한 다리가 되어준 것 같다.
그림책으로 나온 삐삐가 하나 더 있다. <삐삐가 공원에 갔어요!>라는 책이다. 그 책도 함께 유빈이에게 읽어주고 있는데, 유빈이는 <삐삐랑 친구가 됐어요!>를 더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