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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한 초콜릿
미리암 프레슬러 지음, 정지현 옮김 / 낭기열라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뚱뚱한 아이 에바. 에바에겐 뚱뚱하다는 건 친구를 가질 수 없다는 의미이고, 예쁜 옷을 입을 수 없다는 의미이고,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이고, 내가 남보다 못하다는 의미이고, 사랑받을 수 없다는 의미이고, 학교에서 도피할 수 있는 "자기구석"이 필요하다는 의미이고, 체육시간 팀을 짤 때 맨 마지막에 남는다는 의미이다.
똑똑하다는 것도,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이라는 것도, 숱 많고 아름다운 머릿결을 가졌다는 것도, 에바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장점들도 "뚱뚱하다"는 한 가지 사실 앞에서 모두 빛을 잃는다.
"문제 중의 문제인 이 문제 외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문제는 바로 비곗살이었다. 에바와 주변 세계 사이에 가로놓인 이 역겹고 물컹물컹한 지방층이 문제였다. 비곗살은 에바에게 완충지대이자 고치였다. 모든 게 오로지 비곗살 탓이었다. 비곗살은 비참, 소외, 냉대를 의미했으며 조롱과 두려움, 창피함을 뜻했다.
비곗살에 파묻혀 에바는 가려졌다. 지방의 무게를 짊어지지 않고 가볍게 살아가는 에바, 사랑스런 모습이어야 할 에바, 진짜 에바, 참된 에바가 말이다.
(중략)
언젠가 비곗살이 햇살에 녹아 역겹고 악취나는 기름투성이 액체가 되어 배수구를 흘러가 사라져버린다면 에바만이, 또 다른 에바만이, 발랄하고 쾌활한 진짜 에바만이 남게 될 것이다.
오직 행복한 에바만이. "
에바는 이렇게 자신의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기가 "뚱뚱하다"라는 사실에서 찾는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에바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도 하지 않고 더 고개를 숙이며 절친했던 친구가 다른 친구와 더 친해질 때에도 한 마디 말 없이 자리를 옮기는 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에바도 변한다. 전학생 프란치스카의 따뜻한 우정 안에서, 에바가 뚱뚱하다는 사실을 전혀 개의치 않는 남자친구 미헬의 애정 속에서 에바는 "문제 중의 문제"는 비곗살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져서 자기만의 고치 안에 숨어서 상처와 외로움을 허기로 인식하고 식욕으로 달래던 에바는 친구 프란치스카가 골라 준 평소엔 꿈도 꾸지 못했던 밝은 색의 바지와 분홍색 셔츠를 입고서 갑자기 자기 안에 숨어 있던 밝고 환한 긍정적인 자아를 깨닫는다.
"에바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뚱뚱한 가슴과 뚱뚱한 배, 뚱뚱한 다리를 가진 뚱뚱한 소녀가 보였다. 하지만 정말로 그 소녀는 못생겨 보이지 않았다. 약간 눈에 띄긴 했지만, 그렇긴 하지만 못생기진 않았다. 에바는 뚱뚱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뚱뚱하면서도 아름다운 사람도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었다. 대체 아름답다는 건 무엇일까? (중략) 눈에 보이는 변화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에바는 갑자기, 자신이 원했던 에바가 되었다. 에바는 웃었다.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남들이 보기에 사소한 이유들로 열등감을 갖는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런 낌새도 알아채지 못할 아주 작은 이유들로. 나에게도 열등감은 존재한다. 열등감은 밝은 햇살 속에서도 나를 구석진 어둠 속으로 몰아 넣는다. 나이가 들면서 "그래서 어쩌라구~"식의 배짱이 생기기도 했지만 간혹 난데없이 밀고 올라오는 열등감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진 못했다.
사춘기 시절의 소녀들은 더욱 그 증상이 심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외모, 가난, 불화, 성적 등등을 이유로 말이다. 내가 아는 어떤 아이는 발가락이 자기 마음에 안든다는 이유로 더운 여름철 자기 집 안에서도 결코 양말을 벗지 않는다.
하지만 우린 모두 에바처럼 "내가 여름날 같아 보여. 내가. 여름날 같아."라고 외치며 웃을 수 있는 날을 가져야 한다. 우리를 "자기구석"으로 몰고 가는 것은 외모나 가난, 불화, 성적, 못생긴 발가락 따위가 아니라 그런 것들을 열등화시키는 나를 향한 왜곡된 시선과 비뚤어진 마음인 것이다.
"더 이상 몰래 먹고, 몰래 배고파하지 않을 거예요. 아니, 절대로 더 이상 배고파하지 않을 거예요." 라는 에바의 말처럼 우리의 열등감은 우리의 문제를 "몰래" 감추려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물이다. 그래서 환한 곳에 드러내면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는 초록빛 풀숲을 기어가는 한 마리 개미만한 아주 사소한 것이라는 걸 깨닫고 왜 내가 이런 사소한 이유로 스스로를 오랫동안 괴롭혔는지에 대해 어이없어 할수도 있게 된다.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소피 생각이 난다. 마녀에 의해 할머니로 변한 뒤에도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고 말하고 열정적으로 행동할 때마다 조금씩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오던 소피 말이다. 우리 청소년들이 이 책을 통해서 자기 안에 웅크리고 있는 열등감에 대해 성찰해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아울러 몸짱, 얼짱이 최고의 가치 있는 인간으로 주목받고, 공부를 못하면 패배자,낙오자의 낙인을 찍어버리며,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을 얼만큼 가지고 있느냐로 그 사람의 가치와 인격을 판단하는 우리 사회에 대한 반성도 있었으면 한다.
"대체 아름답다는 건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