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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도록 우리나라 소설을 읽지 않았다. 나의 우리나라 소설 읽기는 저기 저만큼, 이청준님과 윤대녕님, 박완서님, 이문열님 등등의 8,90년대 작품 쯤에서 멈춰있는 것 같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지만, 참으로 시건방지게도 어느 순간 소설의 말장난스러움을 느껴서였나보다. 긴세월의 군부정치에 대한 민주항쟁의 어렵고도 슬픈 한복판을 지나야했던 시대상황 속에서 그것을 외면할 수 없었던 이 시대 작가들의 표현들이 왜 치열하지 못한지, 애써 에둘러 모호함의 극치로 내달리는지, 비탄과 통회의 눈물을 쥐어짜고 있는지.. 짜증이 났었던 것 같다.
아니다. 작가들 탓이 아니다. 내 탓이다. 소설 속에서 위선적인 내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고 그런 내 자신이 답답해서였다. 주변에서 서성대고 있는 한심스런 나의 초상이 소설 속에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소설을 집어들었다. 시간이 이만큼 흘렀으니 소설계에도 새로운 물결이 유입되었을 것이고, 그만큼 새로워졌으리라고 기대했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 제목이 맘에 들었다. 그리고 나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이야기는 동구라는 남자아이를 통해 이어진다. 읽고 쓰는 것에 장애를 일으키는 난독증을 가진 아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 알겠지만 난독증은 동구 혼자만 가진 장애가 아니다.
작게는 동구네 가족,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가 심각한 난독증 증세를 보인다. 그건 단순히 글자를 읽고 쓸수 없는 난독증이 아니다. 서로의 마음을 읽고 이해하는 데 장애를 보이는 난독증이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동구네 가족은 늘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위태롭고 불안하다.
크게는 소설 속의 1980년 전후의 시대가 안고 있는 사회적 난독증이다. 정치가들은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읽어내지 못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군부의 정치적 욕망을 읽어내지 못한다. 그 예로 동구네 학교 교장선생님은 민주화 시위를 빨갱이와 간첩의 소행이라고 아이들에게 부르짖으며 자신의 난독증을 과시한다. 그 시대의 난독증은 지독한 전염병같은 것이었다.
이 소설 속에서 난독증에서 자유로운 두 인물이 있다. 하나는 동구가 사랑하는 박영은 선생님이고 다른 하나는 동생 영주다.
박영은 선생님은 동구의 난독증을 치료해 준다. 난독증의 치료는 박영은 선생님이 동구를 이해해주고 마음 깊은 곳 구석구석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착하고 마음깊은 동구의 고운 심성을 인정해주는 데서 비롯된다. 동구는 박영은 선생님에게 난독증을 치료받고 그 후로 가족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엄마와 아빠의 갈등을, 희망을 갖지 못한 할머니의 분노를, 아빠의 번민과 고뇌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해결해나가려고 노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영주는 난독증이 있는 동구와는 대조적으로 3살때부터 능숙하게 글을 줄줄 읽어 동네사람들에게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영특한 아이다. 읽기 능력이 탁월한 영주는 불협화음의 심각함이 극에 달하는 가족들 사이에서도 유일하게 소통이 가능한 아이로 묘사된다. 그리하여 영주가 불의의 사고로 가족 곁을 떠났을 때 동구는 이렇게 말한다.
"영주는 우리 식구들 중에 유일하게 애정 표현이 자유롭던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 아이가 벌리는 팔과 그 아이가 내미는 입술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그 아이를 통하지 않고는 웃지도, 이야기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게 길들여져 있었다. 우리 가족들은 마치 신호등이 고장난 네 갈래 길에 각각 서 있는 당황한 사람들처럼, 서로 말을 걸거나 상대방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로 바라만 보게 되었다. 우리의 소통이 엉키지 않도록 요술 같은 방법으로 누군가를 기다리게 하고, 누군가는 직진하게 하고, 누군가는 좌회전하도록 지도하던 우리의 푸른 신호등은 영원히 잠들어버렸다. 우리는 신호등 없이는 교차로를 지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난독증에 걸리지 않은 두 사람, 박영은 선생님과 영주가 사라진 뒤 박영은 선생님으로부터 난독증을 치유받은 동구만이 유일한 희망이 된다. 동구는 드디어 읽고 이해하고 행동하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선생님과 영주가 깃들어 있는 유년의 아름다운 정원의 철문은 닫히고 혹독한 겨울, 인왕산 아래 산동네의 칼바람을 맞으며 어른이 다 되어버린, 그러나 아직 어린 동구는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의 난독증을 치료하러 떠난다.
난독증의 뿌리는 깊다. 가족에 대한 난독증을 앓고 있는 건 아닐까. 친구나 이웃에 대해 유별난 난독증이 발작처럼 찾아오는 경우는 없었을까. 중증의 난독증이 나와 그들 사이에 거미줄같은 장막을 치고 따뜻하게 오고 가야할 감정의 교류와 소통을 막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소설이 너무 말장난스럽다며 멀리 했던 그 시간동안 난 소설에 대한 난독증을 앓았던 건 아닐까. 또한 군부정치의 막은 내려졌으나 또다른 이 시대의 아픔과 소외의 고통을 읽지 못하는 난독증을 갖고 있지는 않을까.. 아직도 난독의 시대는 계속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은 자꾸 가지를 뻗고 난독증이라는 낱말 하나가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