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우 옛집에 들어서기 전, 대문 앞 계단.
그 앞에 서서 떨림을 즐기다.
저 안으로 들어가 내가 보고 느끼게 될 것들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
비니를 계단에 앉혀 놓고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벌었다.
저 문턱을 넘는 순간에 대한 기대를 설레임을 좀더 오래 누리고 싶어서.
처음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저 우물.
우물 덮개 위에 놓인 물뿌리개가 좀 뜬금없어 보이긴 하지만,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게 예뻤다.
동으로 만든 물뿌리개 말고, 차라리 박으로 만든 바가지나, 나무 두레박 같은 게 있었다면 더 좋을텐데 하는 순간의 아쉬움이 스쳐갔다.
어린 시절에 살던 집 마당에 있던 우물 생각도 났다.
밤이면 그 우물에서 소복을 입은 머리 긴 여자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아 무서웠지만, 해 떨어지기 전까진 두레박을 떨어뜨려 우물 물을 치기도 하고, 하릴없이 낑낑거리며 물을 퍼내기도 하면서 놀았었다.
그 때, 우리집 마당에 있던 우물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예쁜 우물이다.
앞마당 가운데 작은 정원이 꾸며져 있다.
그 정원에 작게 마련된 연못.
땅을 파서 만든 연못은 물론 아니고..^^
저 작은 연못(?) 덕에 뜰의 표정이 훨씬 아기자기하고 정감있어 보인다.
최순우 옛집의 뜰과 마당 곳곳에는 이렇게 작은 소품 - 대부분 돌로 만든- 들이 자리 잡고 있어 집의 아름다움을 더 돋보이게 해준다.
최순우 옛집의 툇마루에 누워보는 호사를 누린 우리 비니.
나도 따라 벌러덩 누워 기와지붕의 고운 선을 따라 오려진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싶은 욕망을 꾹꾹 눌러 참느라 애를 먹었다.
집 내부로는 들어갈 수 없다. 저 유리 문을 통해서 들여다 볼 수 밖에 없는데, 유리에 밖의 풍경이 반사되어 그나마도 쉽지가 않다.
그리고 그렇게 꼭 기를 쓰고 들여다보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그저 이 고운 집 안에 내가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충분했다.
뒷뜰에 있는 '달항아리'다. 최순우님은 이 백자에 달빛이 어리는 모습을 사랑했다고 한다.
내 상상만으로도 무척 아름다울 듯..
저 백자가 '달항아리'로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더구나 이렇게 고운 집, 고운 뜰에 서서.
뒤뜰에 있는 장독대. 나이 먹으면서 달라지는 것 중에 하나가 장독대가 이뻐보이기 시작한다는 것.
서로 다른 키와 모양으로 올망졸망 모여 있는 장독항아리들을 보면 정감이 느껴진다.
근데.. 제발, 저 물뿌리개 좀 치워줘요~~~
장독대 옆에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듯한 커다란 원형 탁자가 있다. 탁자 주위로 작은 돌 의자가 있고, 그 돌의자 위에는 앙증맞은 동그란 짚방석이 놓여있다.
그 돌탁자 위에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며 놀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최순우님이 그렸다는 엽서 그림과, 달항아리, 김기창 화백의 말그림 등이 A4용지에 복사되어 한 쪽에 준비 되어 있는데, 100원에 두 장이다. (돈은 탁자 위에 놓인 대나무 통 속에 넣으면 된다)
비니는 따가운 햇볕이 그대로 내리꽂히는데도 아랑곳하지않고 그림그리기에 한동안 몰두했다.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에 이런 글이 나온다.
.... 나의 11월의 꿈도 외로움도 이 새하얀 겨울의 품 안에 포근히 안기면 삼동이 내내 나에겐 편안하고 기쁘 다. 안개의 장막이 투명한 하늘 중턱에 얼어붙은 겨울 달밤 그리고 시새우는 눈보라가 창 밖에 쌩쌩 바람을 휘몰아치는 한밤내 나는 따뜻한 장판방 위에서 웅숭그린 채 홀로 부스럭거리는 책장이나 원고지의 종이 소리에 스스로의 귀를 즐기면서 가을의 공허함을 채우는 것이다.
꽃내음이 이미 가셔 버린 내 방 창 밖에 어느 친구가 '매심사(梅心舍)'라는 고물 현판 하나를 걸어 주었는데, 매향이 돌아야 할 한겨울 내 방 안엔 이제 싸늘한 동심만이 서리서리 깃들여 있으니 봄은 영영 이 방 안에 다시 안돌아온다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내 마음은 그저 담담하기만 하다.
최국보(崔國輔, 당나라 때의 시인)의 옛 시구에 '적요포동심(寂寥抱冬心)'이란 것이 있으니 어느 친구 한 사람 나에게 멋진 선심으로 현판 한 장 '동심사(冬心舍)'라고 써 주면 '매심사' 현판을 갈아붙일 작정이지만 이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언제가 될 것인가.
나의 이 동심사 앞뜰에는 산사나무 한 그루가 있어 아침저녁으로 남창에 그늘져 주는데 봄날의 백설 같은 아가위꽃 무리도, 무성한 여름의 그늘도 그리고 가을날의 탐스러운 진홍색 열매 다발도 이 한겨울 빈 가지가 남창에 지어주는 그림자를 당해 내지는 못한다.
인용구가 길어졌지만 윗 사진의 현판에 대한 설명으로 충분하지 않을런지.. ^^
이제 군말않고 최순우 옛집에서 찍어온 사진들을 올려볼터이니 감상하시기를
쉽게 잊혀지지 않을 아름답고 고운 집이다.
내가 그 집에 들어간 게 아니라 그 집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는 느낌이 들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