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도 학교에 가야 한다 난 책읽기가 좋아
수지 모건스턴 글, 세르주 블로흐 그림, 김진경 옮김 / 비룡소 / 1997년 8월
평점 :
절판


알뤼에스테르 공주는 구두를 벗고 운동화를 신는다.   드레스를 풍선처럼 부풀게 만드는 철사 속옷도 벗어던지고, 치렁치렁한 드레스 치맛단도 싹뚝 잘라버린다.  궁전에서 벗어난 공주는 학교에서 친구를 만나고 세상 속에 섞여들며 공주가 아닌 "아이"가 된다.

지엄하고 근엄한 왕의 뼈대만 남았을 뿐 파산한 왕 조르주114세는? 말그대로 폼생폼사의 왕으로, 그것도 경의를 표하는 사람도 없고 왕이라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 그저 왕이라는 허울에 목을 맨 스스로의 왕일 뿐이다.  자기가 왕이라는 사실은 조르주 114세 그 자신에게만 중요한 사실이 된지 오래다.  그러나 그 틀을 깨지 못할 뿐 아니라 그 틀을 지켜내기 위해 안감힘을 쓴다.   알뤼에스테르 공주가 혹시라도 공주라는 사실을 잊을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자기의 온 존재가 "왕"이라는 직함(?) 하나에 걸려 있기라도 하듯.

때가 잔뜩 탄 석고상처럼 굳어버린 존재인 조르주 왕과 포르투나 왕비, 그리고 알뤼에스테르 공주가 살아 있는 존재가 되는 순간은 "왕"이라는 폼생폼사의 틀을 깨는 순간이다.   알뤼에스테르 공주가 구두와 철사 속옷을 벗고 기다란 치맛단을 잘라내는 순간,  조르주 왕이 알뤼에스테르 공주의 성화에 못이겨 학교로 입학서류를 내러 집을 나서는 순간, 그리고 포르투나 왕비가 딸의 운동화를 사러 시장으로 나서는 그 순간.

나에게 그 순간은 언제일까.  나는 어떤 틀 속에 갖혀 있을까.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싶은 모습과 내가 되고자 하는 나의 모습, 그 틀 속에 지금 현재의 내 모습을 가둬두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게 된다.  나 또한 조르주 왕처럼 남들은 전혀 신경도 안쓰는 허울 뿐인 내가  만들어 놓은 그 틀에 스스로 갇혀서 전전긍긍하며 내 소중한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지금의 내모습 그대로 세상으로 나아가 사람들과 어울리며 웃고 즐기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비결인지도 모르겠다.  남들에게 내 눈꼽도 보여주고, 내 이에 낀 빨간 고추가루도 보여주고,  책을 베고 자다가 뺨에 생긴 책 모서리 자국도 보여주면서 말이다.  그래서 내가 너랑 다를 게 없고, 너 또한 나만큼의 단점을 가진 사람이란 걸 서로 확 펼쳐보이면 우리가 서로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수지 모건스턴의 책을 읽다보면 가벼움 속에 담긴 삶의 짜릿한 진실들과 만나곤 한다.  너무 무겁지 않고 경쾌하게 느껴지는 마법에 걸린 삶의 진실, 그것을 읽는 즐거움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이 순간이 바로 나의 구두와 철사속옷을 벗어던지고 기다란 치맛단을 잘라내며 행복을 만나는 그 순간일지도 모른다.  모두 벗어던지고 경쾌하고 유괘하게 걸음을 옮기는 나를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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