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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순 씨네 아파트에 온 새
박임자 지음, 정맹순 그림, 김성현 감수 / 피스북스 / 2023년 7월
평점 :
참 사랑스러운 책이다.
여든두 살 맹순 씨와 딸 임자 씨, 그리고 우리 가까이에서 함께 살아가는 새들의 이야기가 따뜻하게 담겼다. 얼마 전 정세랑 작가의 소설 《시선으로부터, 》에서 이런 글을 읽었었다.
네, 여든 살입니다. 농담이 아니라 여든 살에도 변화는 옵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매일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이 있어요. 고된 행운인 셈이죠. 하여튼, 일종의 도약 지점 같은 것일까요?
(중략)
그러니 여러분, 앞으로 이십 년을 버텨내세요.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모퉁이가 찾아오면 과감히 회전하세요. (중략) 모든 면에서 닳아 없어지지 마십시오. p.229
이 문장을 읽고 나에게도 과감하게 회전할 모퉁이가 정말 찾아올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여든두 살의 맹순 씨가 이 책을 통해 몸소 보여줬다. 정말 가능한 얘기라고.
심장 수술 후 회복 중에 심정지가 오는 바람에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맹순 씨는 새를 좋아하는 딸 임자 씨의 권유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맹순 씨가 떨리는 손으로 그린 첫 그림은 나무 숟가락. 그 아래에는 자식들이 걱정하지 않게 밥을 맛있게 먹고 건강을 지키겠다는 맹순 씨의 어여쁜 다짐이 적혀있다.
그렇게 시작한 그림 그리기는 임자 씨와의 환상적인 팀 워크(?)로 맹순 씨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코로나로 탐조 다니기가 힘들었던 임자 씨는 아파트 단지 안을 날아다니는 새들에게 눈을 돌렸고, 맹순 씨는 임자 씨가 숙제처럼 내주는 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파트 베란다 난간에 새에게 줄 물과 모이를 챙겨주고 찾아오는 새들을 바라보며 정을 붙였고, 모녀가 다정하게 아파트 단지 내 정원과 숲을 함께 돌며 새들을 만났다. 심장 수술 후 기력을 잃고 "늙은 사람들은 다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어. 노상 이렇게 시간만 보내다 죽는 건가 싶네."라며 삶의 추동력을 잃었던 맹순 씨에게는 딸들(가까이에 임자 씨의 언니 경희 씨가 산다)과 함께 새들을 만나고 그림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였겠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전시회를 열었고, TV에 출연했으며, 최초로 아파트 새 지도를 만들었고, 아파트 탐조단을 꾸렸으며, 이렇게 책까지 출판하게 되었다.
맹순 씨와 임자 씨가 너무 궁금해서 유튜브로 영상을 찾아봤다.책에 임자 씨가 엄마 맹순 씨를 예쁘다고 칭찬하는 글이 나오는데, 영상으로 확인해 보니 맹순 씨의 웃는 얼굴이 정말 예뻤다. 그리고 엄마 맹순 씨를 챙기는 임자 씨는 정말 '다정한 임자 씨'다. 임자 씨의 이런 다정함이 이 책을 더욱 사랑스럽게 만든다. 이 책에는 아파트 단지에서 살아가는 새들 이야기뿐 아니라 맹순 씨의 인생 이야기도 함께 담겨 있는데, 임자 씨는 엄마의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을 세심하게 헤아리고 위로하고 존중하며 엄마 맹순 씨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났다. 난 엄마와 그렇게 다정하지 못했다. 엄마도 나도 사랑을 표현하는 데 서툴렀고, 사랑을 순수하고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잘 해내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책에서 맹순 씨와 임자 씨가 다정히 살아가는 이야기를 읽다 보니 난 내가 인생에서 누려야 할 큰 축복 중 하나를 영영 놓쳐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로서 엄마와의 다정한 시간은 영영 놓쳐버렸지만, 엄마로서 내 아이들과의 다정한 시간을 잘 지켜야겠단 다짐도 해보게 되고.
임자 씨는 '탐조 책방'이라는 새 관련 전문 책방을 열어 운영 중이라고 한다. 관심과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삶이 참 많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맹순 씨와 임자 씨다. 아파트를 날아다니는 새에 대한 관심과 시선이 맹순 씨와 임자 씨의 삶을 바꿔놨으니 말이다.
오늘 아침 아파트 베란다를 기웃거렸다. 책을 읽고 나니 목마른 새들을 위해 물이라도 놔주고 싶어져서였다. 우리 집은 아파트 1층이라 화단으로 길고양이들이 가끔 지나가기도 해서 물그릇을 어디에 놔줘야 할지 고민이 됐다. 그러다가 몇 년 전 겨울에 식빵을 구워 땅콩 버터를 바르고 그 위에 새 모이를 붙여서 나뭇가지에 달아줬던 기억이 나서 사진을 찾아봤다.
2015년의 일이다. 거실에 가만히 서서 새들이 와서 먹는지 궁금해하며 화단을 바라보다가 박새가 날아와 먹는 걸 보고 무척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기쁜 인생을 살고 싶으면 기뻐할 일을 많이 만들면 된다는 단순한 원칙을 이 책에서 배우게 된 것 같다. 우리는 작은 새 한 마리를 보면서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예전보다 자주, 좀 더 관심 있게 새들을 보게 될 것 같다. 어쩌면 새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일이 나의 또다른 즐거움과 관심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