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안녕하려면] 서평단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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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안녕하려면 - 하이타니 겐지로 단편집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츠보야 레이코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7년 12월
평점 :
[서평단 도서입니다]
하이타니 겐지로는 <내가 만난 아이들>이라는 교육에세이집에서 ‘상냥함의 힘’을 강조했었다. ‘어린이는 작은 거인이다. 어마어마한 힘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어린이, 스스로 성장하려는 한없는 에너지를 지닌 인간으로서의 어린이, 내가 어린이를 이런 존재로 보게 된 바탕에 오키나와가 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진 어린이가 어떻게 낙천적일 수 있는가. 고통스러운 인생을 사는 어린이의 내면이 어떻게 상냥함으로 가득할 수 있는가’라고 말하면서 ‘나는 지금껏 나를 길러 준 상냥한 사람들의 고독과 절망을 먹으며 살아왔’으며 ‘상냥함은 정서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키고 타인까지도 변화시키는 힘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서 배웠다고 고백했었다.
작가의 고백이 얼마나 절절하고 아프게 다가왔었는지, 난 그 책을 읽고 난 후 하이타니 겐지로의 책을 다시 펴볼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도서관에서 <태양의 아이>나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같은 책들을 들었다 놓았다하다가 대출을 몇 번이나 미루곤 했다.
그러던 내가 <내가 만난 아이들>이후로 처음 그의 소설을 읽었다. ‘물 이야기’, ‘손’, ‘눈’, ‘소리’, ‘친구’, 이렇게 짤막한 제목을 가진 다섯 편의 단편이 실린 책이다. 역시나 작고 가난하고 상처 입었지만 따스하고 상냥하고 아름다운 아이들이 이 이야기들의 주인공이다.
그 아이들은 ‘공부할 수 있는 놈한테는 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지만, 슬픈 일이 하도 많아서 공부 따위 손에 잡히지 않는 놈한테는 슬픈 일을 같이 걱정해 주는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잖아. 우리 학교에 그런 선생님이 있나?“(p.14)하고 교육현실을 토로하며 학교의 해산 명령에도 불복한 채 수영부에 매달리는 문제아들이기도 하고, 2차 세계 대전 당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치열한 전투지였던 오키나와에서 어릴 때 폭탄을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손을 잃은 선생님을 기억하며 당시의 아픈 역사를 찾아가는 소녀들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가난과 폐허 속에서도 맑은 눈망울을 간직한 채 해맑게 살아가는 아이들, 장애가 있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아이들, 비열하고 가식적인 사회와 그 속에서 유유자적하며 살아가는 어른들에게 저항하며 순수의 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아이들이기도 했다.
책 속의 아이들은 동심을 잃은 지 이미 오래된 나에게 아픈 질문을 던지곤 했다. ‘스스로 맞서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남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다들 너무나 순순히 규칙을 따르고 너무나 욕망에 약해요.’(p.66)라며 나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했고 자식과 부모의 관계가 평행을 이루거나 어긋나지 않고 잠깐씩이라도 만날 수 있는 게 나의 희생이 아니라 ‘자식의 희생’ 덕분일 수도 있다는 사실(p.154)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주기도 했다. 아이들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비열하고 치졸한 모습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바람에 발가벗겨진 듯한 수치심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아프고 부끄러운 모습들이 슬프다거나 추하다고 느껴지기보다 따스함으로 감싸여져 아름답게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맑고 진솔한 느낌의 문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하이타니 겐지로가 소중히 여겼던 ‘상냥함의 힘’이 그의 문학 안에 크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상처와 고통을 녹아내어 따스한 상냥함으로 변화시키는 그의 삶과 문학 속 연금술이 너와 나, 서로에 대한 존재의 소중함을 확인하게 하고 우리 모두를 차별이나 편견 없이 하나로 묶어 놓는다.
오래전 나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던 사람이 생각났다. 그를 다시 만난다면 상냥함으로 그를 대할 수 있을까? 닫힌 마음을 열고 그에게 웃어줄 수 있을까? 아직도 남아 있는 상처를 딛고 그와 내가 ‘우리’라는 한 묶음이 될 수 있을까? 책을 향해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 마음을 향해서는 고개를 가로 젓는 내 모습이 참 씁쓸하다. (080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