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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소녀 ㅣ 카르페디엠 8
벤 마이켈슨 지음, 홍한별 옮김, 박근 그림 / 양철북 / 2006년 6월
평점 :
앞표지 날개에 있는 작가의 사진. 커다란 곰에게 파묻히듯 안겨서 웃고 있다. 그런데 작가보다도 곰이 더 행복해하는 것 같다. 작가에 대한 소개글을 읽어보니까 작가는 입양한 지 20년이 된 350킬로그램의 검은 곰 버피를 기르며 살고 있다고.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싶었다. 그래서였을 게다. 이 책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서 전쟁에 대한 심각함보다 자연친화적인 마야인들의 정신세계 쪽에 더 무게를 실은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건. 제목부터가 '나무소녀'니까.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어서 전통을 지켜가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마야인들의 삶이 나무소녀 가브리엘라 가족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두 분 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가브리엘라가 존중해 마지않는 품위와 지혜를 지닌 부모님, 서로서로 돌봐주고 도와주는 다정한 형제들과 함께 문명과 조금 떨어져 살아가는 가브리엘라의 삶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가브리엘라의 평화는 잔혹한 내전의 바람을 맞으며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책을 읽다가 몇 번을 차마 읽어내리지 못하고 덮곤 했다. 가슴이 저릿저릿 아파서, 콧날이 시큰해져서, 인간의 잔인한 광기에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이 책에 담긴 이야기가 아직도 진행 중인 이야기라는 게 무엇보다 가슴 아팠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과테말라 내전은 1996년에 끝이 났다고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그 곳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언제였더라. TV뉴스에서 이스라엘 군의 총격 장면이 나온 적이 있다. 팔레스타인 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와 그의 아들이라는 어린 소년이 총격을 피하기엔 너무 허술해 보이는 드럼통 뒤에 몸을 피하고 있었다. 총격이 멈춘 후 남자는 죽은 어린 아들의 시신을 끌어안고 넋이 나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그런 식으로 죽음을 맞이한 아이에 대한 안쓰러움보다 남겨진 아버지의 슬픔과 절망이 더 깊이 전해졌었다.
이라크와 미국의 전쟁은 이제 아무런 명분도 없는 전쟁이 되고 말았다. 명분도 없는 전쟁에 사람들이 죽어가고 미쳐가는 모습을 보며 끔찍해 한다. 그 어떤 이유, 어떤 명분으로도 전쟁을 합리화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합리화되기엔 너무 잔인하고 치뤄야할 희생이 너무 크다.
이 책에선 군인들이 등장하기 전부터 해온 전쟁에 대해서도 말한다. 각종 차별과 불평등으로 이름붙여진 전쟁 말이다. 여성과 남성의 차별, 인종과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과 억압, 강대국과 약소국간의 불평등한 힘의 논리, 가진자와 못가진 자의 불평등,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부조리들.. 결국 그런 것들이 군인들이 등장하는 전쟁을 불러오는 건 아닐까..군인들이 등장하기 전부터 해온 전쟁 역시 잔혹하고 비참하기는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가족 중에 희생당하지 않고 남아있던 동생 알리시아를 잃어버리고 가브리엘라는 혼자서 국경을 넘어 멕시코의 산미겔 난민 수용소에서 생활하게 된다. 살기 위해서는 인간다움을 포기하고 다른 이들을 밀쳐내야 하는 또다른 가혹함이 계속되는 곳이었다. 그 곳에서 알리시아와 다시 만나게 된다. 엄마에게 '다정함이 사랑보다 더 소중하다'고 배운 가브리엘라는 알리시아와 수용소의 다른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 공놀이를 시작한다. 그리고 학교를 만든다. 그렇게 희망을 심기 시작한다. 가브리엘라도 자기의 희망을 찾는다. '언젠가는 과테말라로 돌아가, 어린 시절 그 곳에 남겨 두고 온 아름다움을 다시 찾을' 거라고, '학살에 대해 알릴 것이고, 우리 민족의 노래를 찾을' 거라고.. 나무소녀 가브리엘라는 동생 알리시아와 함께 나무에 오른다. '나무에 오르면 , 하늘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엄마의 말을 동생 알리시아의 귀에 속삭이면서.
어디에서나 희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그러나 나는 견디기 어려운 잔혹한 현실 속에서 피어나는 위태로워보이는 희망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저마다의 희망이 지켜지고 더 커다랗게 자라고,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희망이 협박당하거나 짓밟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세계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을 보고 싶다.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약한 이들의 평화도 존중받고 지켜지는 그런 세상.
이 책이 내 마음에 아픈 가시 하나를 남겨둔 것 같다. 다 읽고 덮은 후에도 가시처럼 아프게 마음을 찌른다. 가시가 잘 빠질 것 같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