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양장)
로버트 뉴튼 펙 지음, 김옥수 옮김, 고성원 그림 / 사계절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내가 사춘기라는 터널을 통과할 때 내 곁에 두었던 책들을 생각하면 요즘 청소년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시절에 읽을 수 있었던 건 소공녀나 비밀의 화원, 키다리 아저씨, 빨강머리 앤 등과 같은 고전이라 불리긴 하지만 기본서에 가까운 책들 뿐이었다.  그나마 내 처지가 조금 나았던 것은 나이 차이가 많은 오빠들을 둔 덕분에 초등학교 고학년 때 쯤부터 <모모>와 <딥스>,<꽃들에게 희망을>과 같은 책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 뿐이다.

요즘 서점가를 둘러보면 황홀할 정도로 좋은 책들이 많아서 어느 책을 먼저 읽을까하고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런데 좋은 책들은 많아졌건만 우리 아이들이 책 속에 푹 빠져들만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지 못하는 것 같아 무척 안타깝다.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은 독실한 세이커교도 집안에서 자라나는 로버트라는 이름의 열두살 짜리 남자아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말이 열두살이지, 내 주변에는 이런 열두살 짜리를 본적이 없다.  성실 그 자체에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지녔을 뿐 아니라 너무 의젓하고 사려깊어서 무늬만 열 두살 짜리 같은 그런 남자 아이다. 

세이커교가 문명의 이기를 멀리하고 근면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외부 사람들과 단절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영화나 TV외화 등을 통해서 본 것 같다.  그래서일까. 로버트의 친구가 등장하지 않는다.  에드워드 새처, 제이콥 헨리, 베키 테이트 등의 같은 또래 아이들의 이름이 잠깐 나올 뿐 구체적인 행동이 드러나질 않는다.  로버트에겐 이웃에 사는 태너 아저씨네 소의 출산을 도운 일에 대한 보상으로 받은 돼지 핑키를 친구로 삼고 마음을 나눌 뿐이다. 

로버트에겐 가난한 현실이 있다.  세이커 교도가 지켜야할 교본대로 행동해야할 규범에 수긍하지 못하는 면이 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바라보며 나릅대로 산다는 것에 대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노동의 가치를 알고 성실하게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로버트를 철부지 아이로 여기질 않는다. 매일 로버트가 책임져야 할 일거리가 있고 로버트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날마다 돼지를 죽여야 먹고 살 수 있고 자기 이름조차도 쓸 줄 모르는 문맹의 아버지지만 사랑하고 아껴주는 가족에 대한 가치를 알고 임무에 충실한 아버지이기에 로버트는 존경과 애정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친구와 다름없었던 돼지 핑키를 도살할 때도 로버트는 아버지에 대해 미운 생각이 들면서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아버지를 용서하고 이해하며 아직 피가 잔뜩 묻어있는 아버지의 손에 입을 맞춘다.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그만큼 깊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아버지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은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얼마쯤 비켜서있는 듯 하다.  오늘날의 도시 아버지들의 삶은 가족들과도 단절되고 소외되어 있다.  아버지들에겐  아내와 자녀들의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자신들이 밖깥 사회에서 부딪치고 경쟁해야 하는 일에 비하면 시시하고 하찮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고, 그래서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까지 짊어지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휴먼 펙과 같은 아버지가 그립다.  자녀들에게 자기만의 철학을 들려주고, 삶의 지혜들을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을 만큼의 깊이와 넓이를 가진 그런 아버지가 그립다.  물질적으로 잘 살기 위한 얄팍한 처세술보다 노동과 성실함의 가치를 먼저 가르쳐 줄줄 아는 그런 아버지가 보고 싶다.  가혹한 현실의 모습도 아들과 함께 나눌 용기가 있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  

아니, 나보다 아이들이 우리 기성세대에게 더욱 간절히 바라는 어른의 모습일 것이다. 나로서는 '어른답다'라는 말의 무거움을 느끼게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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