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7)

(최재천)10년 전에 긍정심리학의 대가라 불리는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선생님과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사회의 고통은 과목별로 오지 않는데 아직도 교실에서는 20세기 방식으로 과목별로 가르친다. 그 점이 오늘날 복합적으로 융합하는 산업 사회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기 힘들게 한다라고 하셨어요. 생각해보니 시대에 발맞춰가지 못하는 교과목식 분류가 교실뿐 아니라 우리의 통치 프레임에도 깊게 새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39)

(최재천) 평소에 알면 사랑한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요. 자꾸 알아가려는 노력이 축적될수록 이해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공부와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입니다. 교육의 내용이 사실을 분별할 수 있도록 채워져야 하고요. 진실을 말하는 전문가들의 말이 일반인에게 신뢰를 받아 통용될 수 있도록 사회의 갈등이 잦아들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위정자들이 힘써 노력해야 하지요. 갈등의 골이 깊으면 진영논리로 사실을 외면하려는 경향이 커집니다. 저는 무엇보다 앎이 가져오는 사랑이 소중하다고 여겨요. 우리 인간은 사실을 많이 알면 알수록 결국엔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45-46)

(최재천) 지금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내용이 사회에서 정말 필요한 것일까요? 솔직히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삶의 중요한 시기에 있는 아이들의 시간을 우리가 지금처럼 빼앗아도 될까?’ 자주 의문을 가져요. 저는 어른들이 그들의 삶을 유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인권 문제라고 보는데요. 청소년 시절에는 왜 인권을 보호받지 못할까요? 먼저 살아봤다는 이유로 기성세대가 청소년에게 삶을 접고 공부만 해라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의 교육 제도는 위 세대가 아래 세대를 압박하는 장치가 됐습니다. 이제라도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게 뭔지 고민하고, 모두가 삶을 즐기면서 자라나도록 길을 내야 합니다. 왜 우리가 교육하고 공부하는지를 숙고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87)

(최재천) 30분 단위로 쪼개서 일해요. 학생 상담 30, 회의 한 시간, 그 중간에 30분이 비면 원고 재검토, 그러고는 약속된 곳으로 뛰어나갑니다. 집이 연희동인데 학교까지 매일 걸어 다녀요. 연세대학교 안으로 들어가 동산을 넘어 이화여자대학교 안으로 들어가 고개를 올라 연구실로 오죠. 10년 정도 이렇게 했어요. 3.5킬로미터를 30분 내에 걷습니다. 그 속도로 연구실에서 이대역까지 언덕을 내려와 지하철을 타고 강연장으로 갑니다. 강연이 끝나면 지하철을 타고 다시 연구실로 들어와 뒷일을 하고요. 오후 5시 반에 집으로 출발합니다. 그럼 오후 6시에 도착해요. 하루 평균 1 5천 보 정도는 걷는 일과입니다.


(146)

(최재천) 독서를 일처럼 하면서 지식의 영토를 계속 공략해나가다 보면 거짓말처럼, 새로운 분야를 공략할 때 수월하게 넘어드는 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날이 오면 스스로가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우실 거예요. 100세 시대에 20대 초에 배운 지식으로 수십 년 우려먹기가 불가능합니다. 학교를 다시 들어갈 게 아니라면 결국 책을 보면서 새로운 분야에 진입해야 하죠. 취미 독서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독서는 기획해서 씨름하는 입니다.


(166)

(최재천) 그런데, 적자생존이란 말이 부각되면서 진화에 대한 오해가 생겼습니다. 다윈이 친구인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의 표현을 받아들여 쓴 말이 적자생존입니다.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라고 최상급으로 썼어요. 이 말이 다윈 진화론의 존폐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요.

스펜서는 다윈의 진화론을 제대로 잘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흥분된 마음으로 견해를 열정적으로 풀어냈습니다. 저는 그를 다윈의 전도사 중에 한 명이었다고 표현하는데요. 다만 한 가지 단서를 붙이죠. 아직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다 이해하지 못한 전도사님이라고요. 그런 사람이 적자생존을 최상급으로 표현하는 사람에 우리가 무지무지 적응을 잘해야만 살아남는 것처럼 이해하게 됐어요.


(223-224)

(최재천) 문화인류학자 김정운 선생님은 모든 게 편집이다라고 말합니다. 상당히 의미 있는 말이에요. 지금 인터넷을 뒤지는 젊은 세대는 스스로 편집합니다. 기성세대는 명저 한 권을 붙들고 흡수했죠. ‘이 대가가 이렇게 이야기하시는구나라면서 쭉 읽고, ‘다 이해했어하며 책을 덮었습니다. 이해했다는 건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거죠. 젊은 세대는 스스로 여러 정보를 검색해 나름대로 취사선택하고, ‘뭐 이래?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야?’라고 판단도 하면서 그 화면은 닫고 다음 걸 읽죠. 자기가 편집합니다. 저는 그 방식이 결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232-233)

(최재천) 동물 세계에는 선생님이 없는 것 같아요. 선생님이 있어도 적극적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그냥 거기 있고 아이들이 보고 배웁니다. 저는 우리가 약간 동물스러운 교육을 하면 좋겠어요. 선생님은 먼저 가르치려고 덤벼들지 말고, 아이들이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일종의 촉진자가 되어 분위기를 만들어주면 어떨까 싶습니다. 엄마 침팬지가 새끼가 실패하는 것을 모르지 않아요. 관찰해보면 계속된 실패를 보는 엄마 침팬지의 표정이 착잡합니다. 마치 붙들고 가르쳐봐?’ 이런 고뇌를 하는 듯해요. 사실은 아니겠죠. 관찰하는 저의 감정이 이입됐을 텐데요. 엄마 침팬지는 실패하는 새끼 옆에서 자기 열매만 계속 깨먹고 있습니다. 가끔은 새끼가 엄마 침팬지 걸 뺏어 먹어요. 뺏기면 할 수 없지만 배고프지? 엄마가 까줄게그러지는 않습니다. 새끼는 배고프니까 어떻게든 기술을 익혀서 먹으려고 엄마 침팬지를 더 세심하게 관찰하겠죠. 마침내 자기가 혼자서 탁! 깨 먹는 순간이 오는 거예요.


(250)

(안희경) ‘메기 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북유럽 해역에서 많이 잡히는 생선이 청어인데, 바다에서 잡은 청어는 항구에 도착하는 동안 대다수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연히 따라 들어온 메기가 있던 수족관의 경우 꽤 많은 청어가 항구까지 살아 있었다고 해요. ‘한 조직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효과메기 효과라는 말을 씁니다. 누군가 선생님 말씀을 언뜻 들으면, ‘공부 잘하는 아이를 위해 공부 못하는 아이가 희생해야 하는가? 성적은 낮지만, 창의력이 뛰어나거나 특기가 있는 아이들이 또 희생해야 하는가?’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성적 중심으로 뽑는 대학 입시가 바뀔 가능성이 없는 지금,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할 수 있도록 숨통을 여는 작업은 양쪽 모두에게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경쟁에 매몰된 교육 문화를 흔들 단초가 될 것 같습니다.


(271)

(최재천)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한때 공개적으로 불평한 적이 있었어요. 대학 교육이 엉망이라서 기업들이 신입사원들을 재교육시켜야 한다고요. 제가 신문에 이런 요지의 칼럼을 썼어요. ‘내가 알기로 외국의 유수한 기업들은 신입사원을 뽑아서 재교육을 시킨다. 당신들은 왜 국가의 세금으로 당신들 회사를 위한 교육까지 시켜달라고 하느냐. 그럴 거면 모든 대학생이 등록금 없이 다니도록 대학에 돈을 내라. 당신들이 다시 교육시키는 게 맞다. 세금은 내 돈이다. 왜 내 돈을 가지고 당신들 회사에서 일할 사람을 교육시켜 달라고 떼를 쓰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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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것은 수백 년에 걸쳐 벌여온 재판을 세상 밖으로 다시 꺼내는 일과 같다. 진실과 정치가 한 지붕 아래에 같이 산다는 건 보기 드문 일이다. 선동을 목적으로 한 인물이 그려질 때, 여론과 그 추종자들로부터 정의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영혼의 진실은 대개 중간 그 어디쯤에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왕실의 위대한 성인도 아니었고, 특별히 똑똑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은 평범한 성격에, 불타는 열정도 얼음 같은 차가움도 없는 사람이었다. 착한 뜻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악한 의도를 품은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의 평범한 인물이었기에 비극의 대상이 되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비극적인 긴장감은 인간과 그의 운명 사이에 존재하는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불균형은 영웅이나 천재들이 그들에게 내려진 사명에 비해서 너무나 좁고 적대적인 주위 세계와 충돌할 때 생겨난다.


(10)

운명은 평범한 사람도 뒤집어 놓을 수 있고, 한계를 넘어 나아가도록 강제로 몰아가기도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이 바로 그러한 역사의 예시이다. 명랑하고 구김살 없던 그녀의 세계 안에 혁명이 들이닥치지만 않았더라면, 이 합스부르크의 여인은 수많은 다른 황녀들처럼 평범하게 인류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을 것이다. 더 큰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먼저 밖으로 내던져야 한다. 그 목적을 위해 운명이 쥐고 있는 것이 바로 불행이라는 채찍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불행의 손길은 비정하게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곁을 좀처럼 떠나려 하지 않았다. “불행 속에서야 겨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진정한 나를 알게 된다.”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하찮은 평범한 삶이 후세에 어떠한 본보기가 되리라는 예감이 엄습했다. 책임 의식을 느끼며 그녀는 자신을 초월하여 성장한다. 필며의 형체가 부서지기 직전에, 영원히 지속되는 예술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27-28)

세상사는 대개 개개인의 내적 갈등의 결과물들일 뿐이다. 아주 작은 계기가 엄청난 결과를 불러오게 되는 것은 역사가 지닌 위대한 비결 중 하나이다. 1차 세계대전의 나비효과라고 불리는 세르비아의 알렉산다르와 드라가 마신의 결혼, 두 사람의 암살, 카라조르제비치의 즉위, 오스트리아와의 적대. 빈틈없이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과 세계대전. 역사란 거미줄처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다. 정교하게 조합된 역사라는 장치 속에서는 아주 작은 톱니바퀴라도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렇듯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 가운데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들, 결혼 이후에 몇몇 해들은 세상의 모습을 바꾸게 되었다.


(29)

오늘날에도 베르사유는 절대 왕정의 가장 웅장하고 도전적인 모습으로 남아있다. 도심에서 떨어진 시골 한가운데, 별다른 이유 없이 언덕 위에 자리한 궁전에는 수백 개의 창문들이 인공 운하와 정원을 바라보고 있다. 이곳에는 원래 도로도 기차도 이어지지 않았었다. 한순간의 기분으로 굳어진, 무의미하게 거대한 호화로움이었다. 바로 이것이 루이 14세의 절대 왕정이 원하던 것이었다. 이러한 의지는 국왕 개인에게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에 모든 영광은 그 개인에게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짐이 곧 국가다.” 그는 지위의 무한함을 표출하기 위해 궁전을 의도적으로 파리 밖으로 옮겼다. 그가 팔을 뻗어 명령만 하면 모래밭은 정원과 숲으로 변하고, 아름다운 궁전이 세워졌다.


(58)

네가 얻은 새로운 지위에 대해 축하의 말은 하지 않겠다. 그것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얻은 것이다. 시할아버지의 자비와 관용으로 지난 3년동안 누려온 평안한 생활, 그리고 프랑스 국민들이 너희에게 안겨준 사랑. 그 감사한 일들을 앞으로도 계속 이어 나가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할 때에는 더욱더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국민의 지지와 사랑을 받는 것은 너의 지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은 그 지위를 유지하며, 국왕과 국가의 안녕을 위해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너희 둘은 아직 너무 어린데…… 이 어미는 걱정이구나. 지금 내가 너희에게 조언할 수 있는 것은 너무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스스로의 눈으로 살펴보고 아무것도 바꾸려 하지 말고, 흐르는 대로 두거라. 그렇지 않으면 혼란과 음모가 끊이질 않을 것이다.”


(64)

하지만 부정은 못 해도 용서할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올곧은 성격의 사람이라도 이런 유혹은 뿌리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궁궐의 뒷방에서 정신적으로 채 성장하기도 전에 하룻밤 사이 최고 권력의 자리에 부름을 받은 그녀. 게다가 18세기라는 이 시대는 그녀를 유혹하기에 절묘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비가 된 첫날부터 자신을 신격화하는 숭배의 향연에 휩싸였다. 그녀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현명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녀의 행동은 곧 법이 되었으며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변덕을 한번 부려주면 그다음 날에는 벌써 유행이 되어 있었다. 어리석은 짓을 하더라도 궁중은 열광적으로 따랐다. 허영심에 찬 아들에게는 그녀 곁에 한 번 서는 것이 소원이었다. ‘지불한다는 단어 한마디를 종이 위에 휘갈겨 쓰기만 하면 수천 두카트가 쏟아져 나왔다. 빛나는 날개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어찌 경솔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144-145)

왕비에게는 적자 부인(Madame Defizit)’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다. 미국 독립전쟁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민주적인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궁정이나 왕, 귀족은 없고 오직 시민만이 있는 나라, 완전한 평등과 자유가 있는 나라를 말했다. 그리고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볼테르, 디드로의 저서에서 말하다시피 왕권은 결코 신이 부여한 유일한 정치체제가 아니었다. 존경심은 호기심으로, 두려움은 분노로 바뀌며 귀족과 시민들은 점점 확신했다.


(241)

오래된 비법: 국가나 정부는 내부적인 위기를 더 이상 통제할 능력이 없을 때, 외부 세계와의 긴장을 조성하면서 눈을 돌린다. 이 불변의 법칙에 따라, 혁명의 지도자들은 내란을 피하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요구했다. 헌법을 받아들이며 루이 16세의 왕권은 약화되었고 라파예트 같은 순진한 사람들은 이제 혁명은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입법의회를 지해하고 있던 지롱드당은 공화정을 바라고 있었다. 왕국을 아예 없애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쟁보다 더 좋은 수단이 없었다. 전쟁이 나면 왕실 가족과 국민을 완전히 갈라놓을 수 있었다. 최전선에는 시끄러운 왕의 두 형제가 나설 것이고, 적군은 왕비의 오빠가 지휘할 것이기 때문이다.


(254)

왕정과 공화정 사이에 마지막 결전이 일어난 이날, 튈르리 궁 앞 사람들 속에 젊은 소위 한 명이 서 있었다. 코르시카 출신의 장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누군가 그에게 자네는 언젠가 루이 16세의 후계자가 되어 이 궁전에서 살게 되리라 말했다면 바보 같은 소리라며 무시했을 것이다. 그는 마친 근무 중이 아니었기에 양쪽 진영을 예리한 눈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두세 발 대포를 쏘아대기만 하면 이 폭도들을 쓸어버릴 수 있을 텐데.’ 왕이 이 보잘것없는 포병 소위를 기용하기만 했다면 그는 파리 전체를 상대로 맞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왕궁 안에 나폴레옹처럼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공격은 하지 말고 단단히 버티면서 강력하게 수비하라!” 이것만이 병사들에게 내려진 명령이었다.


(266)

혁명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넒은 의미를 포괄하는 단어이다. 이 개념은 최상의 이상주의에서부터 현실적인 잔악함에 이르기까지, 위대함에서부터 무자비함에 이르기까지, 정신적인 것에서 폭력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며 변색됐다. 프랑스 혁명에는 두 부류의 혁명가가 있었다. 이상주의적인 혁명가와 복수심에 불타는 혁명가였다.


(295)

대체 언제 너는 진짜 네가 될 작정이냐?” 20년 전 절망에 빠진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이제 죽음을 눈앞에 둔 마리 앙투아네트는 스스로 존엄을 되찾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법 절차를 빠뜨리지 않으려는 심문자 푸키에 탱빌은 그녀에게 체포되었을 당시 어디에 살았냐고 묻는다. 그녀는 자신은 결코 체포된 것이 아니며 국민의회의 요청에 따라 탕플 탑으로 옮겨갔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본격적인 질문이 시작되었다. 왕비의 죄목은 혁명 이전부터 오스트리아의 국왕과 정치적인 관계를 맺은 것, 민중의 땀과 열매인 프랑스 재정을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해 반역자인 대신들과 공모하여 낭비한 것, 황제에게 돈을 보내 자신을 섬긴 백성들을 공격한 것 등이었다. 혁명 이후 프랑스에 대항하여 외국 밀사와 거래하고 남편인 국왕을 선동해서 거부권을 쓰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비난을 마리 앙투아네트는 강력히 부정했다.


(305-306)

사랑하는 아가씨, 이것이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입니다. 나는 방금 선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범죄자들에게 내려지는 치욕적인 선고가 아닌 당신의 오빠를 다시 만날 수 있는 안도의 선고입니다. 그분은 결백합니다. 나도 그분처럼 최후의 순간을 잘 처신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겠지만 나는 아주 평온합니다. 불쌍한 아이들을 남기고 떠나야만 한다는 것이 정말이지 마음이 걸리는군요.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아이들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다정하고 마음씨가 착한 아가씨, 당신을 위해서도 나는 살아왔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 온 당신을 담겨두고 떠나게 되다니! 재판의 변론을 통해서 내 딸이 당신과 떨어져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불쌍한 어린 것! 그 아이에게는 편지를 쓰지 않으려 합니다. 쓰더라도 전해지지 않을 테니까요.

이 편지가 당신에게 전해질지도 알 수 없습니다. 부디 아이들에게 나의 축복을 전해주세요. 신념을 지키고 의무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 서로를 신뢰하고 화합하면 행복해지라는 것을 가르쳐주세요. 아이들이 어떤 처치에 놓이더라도 서로 힘을 합하면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이 우리를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고통 가운데에도 우리들의 우정은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행복이란 친구와 함께 나눌 때 배가 되는 것이지요.

아들이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을 절대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훗날을 위해 다시 한번 말하자면, 우리들의 죽음에 복수할 생각은 절대 품지 말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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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7권 - 간토대학살에서 광주학생운동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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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어느덧 한국 근대사 산책 7권이구나. 7권의 부제는 <간토대학살에서 광주학생운동까지>란다. 일제 시대에 일어난 사건들이 다 억울하고 가슴 아픈 사건들이긴 한데, 간토대학살이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아닌가 싶구나. 일본 도쿄와 그 주변 지역을 한자로 관동(關東)이라고 하는데 관동을 일본말로 간토라고 한단다. 그래서 간토대학살은 관동대학살이라고 해. 1923년 일어난 관동 대지진 이후 사람들의 불안과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일본정부 지휘아래 자경단이 만들어지고 그 자경단이 조선인들을 마구 죽인 사건을 이야기한단다. 7권의 이야기를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시작하였단다.

1920년대 중반이 되었는데,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한지도 10년이 훌쩍 넘어서면서 독립의 희망은 점점 보이지 않던 시기였단다. 의열단원은 계속된 의거를 일으키면서 우리의 독립운동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단다. 1923년 김익상, 오성륜, 김상옥의 의거가 이어졌어. 하지만 그들의 단발성 폭력적 의거가 무슨 효과가 있냐고 목소리도 나왔는데, 이런 의열단의 흔들리는 입지를 굳게 세워준 이가 단재 신채호였단다.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으로 의열단에 힘을 실어주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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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4)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잡고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强盜) 일본의 통치의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서 사회를 약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 고유적 조선의, 자유적 조선 민중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 2000만 민중은 일치하여 폭력 파괴의 길을 매진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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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하여 일제 점령의 세월이 길어지다 보니 변절자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광수와 최남선도 그 대열에 합류하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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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최남선은 1928 10월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으로 임명되었고, 12월에는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되었다. 한국 최고의 단군 연구가이자 조선학의 제창자인 최남선이 식민사학의 총본산으로 들어갔으니 논란이 없을 리 만무했다. 정인보(1893~?)최남선이는 죽었다며 조문(弔文)을 썼으며, 일부 사람들은 종로의 명월관에 모여 굴건(屈巾), 제복(祭服) 차림으로 제상(祭床)을 차려놓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최남선 장례식을 지냈다. 최남선은 이후 일본에 가서 조선인 대학생의 학병을 권유하는가 하면 중추원 참의, 만주 건국대 교수, 만주 <만선일보> 고문 직책을 맡는 등 노골적인 친일 행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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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똑똑한 친일파 양성을 위해 경성제국대학을 만들었단다. (1924 5) 이 대학을 통해서 친일세력을 길러내고자 했고, 일제 치하에서 출세하려는 자들은 경성제국대학을 목표로 했단다. 이런 경성제국대학이 해방 후 서울대가 되는데 연관성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서울대학교의 설립년도를 검색해보면 1946년으로 나오지만, 당시 경성제국대학을 포함하였다고 했거든. 경성제국대학 출신들은 광복 후 서울대 출신이라고들 했다고 하는데 그 연관성에 대해서는 쉽게 단절하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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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공식적인 서울대학교사는 개교를 1946년으로 잡고 있지만 한편으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사>, <서울법대백년사>에서 볼 수 있듯이 경성제국대학을 그 뿌리로 간주하는 이중적 인식의 대학사를 가지고 있다. , 국립 서울대학교의 설립 주체는 명백히 대한민국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법학부와 의학부는 개별적인 단과대학사를 통해 경성제국대학을 그 모체로 간주하고 동문의 범위를 경성제국대학 출신자에게까지 확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립 서울대학교는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스스로의 대학 정체성에 대한 치열한 반성과 고찰을 가지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서울대학교가 그동안 이루어낸 많은 업적들에도 불구하고 대학 정체성의 반성 부재에서 비롯된 식민지적 엘리트 의식은 여전히 왜곡된 형태로 남아 서울대학교를 중심축으로 하는 현재의 대학교육 체제와 문화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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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0년대 국내 사회의 흐름을 좀 이야기해줄게. 1920년대에 전세계적으로 유행인 사회주의가 우리나라에도 유행했단다. 사회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등 단체가 만들어졌고, 당시 우리나라 공산주의자의 대표격인 박헌영의 인기도 높았대. 기독교가 점점 세를 확장해가면서 기독교와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반기독교의 대립도 심화되었대. 1926 6 10일에는 조선의 부끄러운 마지막 왕 순종이 죽고 장례식이 있었단다. 이 때를 맞춰 좌우가 합작하여 다시 한번 독립 만세운동을 기획했으니 6.10 만세 운동이었단다.

우리나라 땅에 들어와 사는 일본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근대 문물들도 많이 들어오게 되었고, 돈 있는 친일파들 중심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대중화를 이루게 되었단다. 대표적으로 축음기가 유행하였고, 가수들도 인기를 끌었는데 <사의 찬미>를 부를 윤심덕이 당시를 대표하는 가수였단다. 신파극과 무성영화도 많이 인기를 끌었다는구나. 문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1925 8월에는 KAPF라는 진보적 문학예술단체도 생겨났고, 1926 6월에는 <개벽>이라는 잡지가 창간되었고, 그 잡지에 이상화 시인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저항시를 발표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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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41)

<개벽> 1926 6월호 발표된 이상화(1901~1943)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다. 정끝별은 이 시의 매력은 굳세고 비장한 의지와 어우러진 섬세한 감각에 있다. 가르마 같은 논길, 입술을 다문 하늘과 들, 삼단 같은 머리를 감은 보리밭, 살진 젖가슴 같은 흙 등 빼앗긴 들을 온통 사랑스런 여성의 몸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니 온몸에 햇살을 받고 이 들()을 발목이 저리도록 실컷 밟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야말로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관능적인 연애시의 옷을 입은 지극한 애국애족의 저항시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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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가 영화 <아리랑>을 만들어 많은 사랑을 받았고, 백성들은 노래 아리랑을 부르며 나라 잃은 서글픔을 달랬단다. 나운규의 <아리랑>이 성공하면서 영화 산업의 붐을 일어났다고 하는구나.

일제 시대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참다 못한 소작농들이 소작쟁의를 일으키기도 했대. 1929년에는 423 , 1930년에는 716건의 쟁의가 일어났다고 하는구나.

이 시절 전화도 어느 정도 대중화를 이루었다고 하는구나. 그러면서 전화를 이용한 범죄들도 성행했다. 그때도 보이스 피싱이 있었나 보구나. 스포츠 종목도 많이 유행했는데 축구도 유행을 했고, 당시에도 승부에 예민들 하셔서 심판의 판정에 시비가 붙어 응원단들이 패싸움을 하기도 했다는구나. 축구는 인기가 좋아서 대학에도 축구팀을 만들었는데,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일본의 대학 축구팀이 우리나라에 와서 연희전문대학과 한판 벌였는데, 4 0을 지고 나서 부랴부랴 일본으로 도망을 갔다고 하는구나. 그때도 한일전은 질 수가 없지. 당시 이 경기를 본 백성들은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 나라 빼앗긴 설움을 잠시나마 잊지 않았을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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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287)

1927년부터는 사학의 명문 연희전문과 보성전문의 맞대결이 연보전(훗날의 연고전)이 세인의 관심을 끌었으며 이후 정기전을 갖게 되었다. 1927 9월 상하이에서 열린 제8회 극동올림픽대회에서 필리핀을 누르고 우승한 일본 와세다대학 축구 팀이 경성에 들러 17일부터 19일까지 3차전을 갖기로 했다. 첫 경기 상대는 연희전문이었는데, 와세다대학 팀이 0 4로 대패하고 말았다. 크게 놀란 와세다대학 팀은 남은 경기 일정을 취소하고 도망치듯 일본으로 떠나고 말았다. 박경호, 김덕기는 이 같은 소식을 접한 국민은 잠시나마 피지배민족으로서의 설움을 잊을 수 있었다와세다 팀을 완전히 제압한 사실에 대해 국민들은 극동올림픽 쟁패전은 우리의 승리라고 외치고 승리감을 만끽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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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뿐만 아니라 야구도 인기가 있었어. 1922년 미국 프로야구올스타 팀이 서울에 방문했었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조선 대표와 시험도 했대. 23 3으로 미국 프로야구올스타 팀이 이기긴 했는데, 조선의 야구팀도 무려 3점이나 뽑았다니

….

그 밖에 모던 걸, 모던 보이가 유행하고 미용실이라는 것도 생겨나서 여자들도 단발 머리로 자르는 이들이 있었고, 남자들은 장발이 유행하기도 했대. 박가분이라는 화장품이 크게 인기를 얻었고, 다방과 카페도 유행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우리나라는 점점 일본 식민지화가 되어 갔단다. 이대로 일본에 동화되어 하나가 되면 안될 텐데 말이야.


2.

한동안 뜸했던 의열단의 의거는 1926 12 28일 나석주 의거의 성공으로 건재함을 알렸어. 나석주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고,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여 7명을 죽이고 자신도 죽고 말았단다. 장진홍이라는 분은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던져 터트렸고, 조명하라는 분은 타이완에서 육군대장을 독 묻은 칼로 공격했단다. 그 육군대장은 이 사건의 후유증으로 8개월 뒤에 죽었어. 안타까운 것은 조명하 의사가 그보다 먼저 사형으로 돌아가시고 말았단다.

이 때 독립운동은 좌우의 합작 노력이 있었대. 그래서 만들어진 것인 1927 2 15일 결성된 신간회란다. 신간회는 민족주의, 사회주의를 모두 아우르는 단체였고, 신간회와 함께 여성단체인 근우회도 결성되었다고 하는구나.

광주에서 일본인 학생이 우리나라 여고생을 희롱하고 모욕을 준 일이 있어났어. 이를 본 우리나라 남학생들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싸우게 되었는데 집단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어. 이 일로 경찰서에 갔는데, 경찰은 무조건 우리나라 학생들한테 잘못을 빌라고 했대.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는데 그것이 바로 1929 11 3일에 일어난 광주학생 항일운동이었단다. 이 운동은 전국의 학생들을 자극하여 1930 3월까지 전국 각지에서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났단다. 이 날을 기념하여 11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했단다. 아빠의 학창 시절 왜 학생의 날은 쉬지 않는 거냐고 투덜거렸던 것이 생각하는구나.

1926년 최현배를 중심으로 한글을 만든 날을 기념하여 가갸날을 지정했어. 당시에는 훈민정음 반포일이 정확히 몰라서 음력 9 29일로 했다는구나. 1928년에 가갸날을 한글날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던 광복 후인 1946년부터 10 9일을 한글날로 지정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단다. 한 동안 한글날에 쉬지 않아서 마음이 아팠는데, 다시 쉬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구나.

대충 여기까지가 한국 근대사 산책 7권의 이야기란다. 빼먹은 부분도 많은데, 늘 그렇듯이 이해 바라고이제 한국 근대사 산책은 3권이 남았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조선에서 먹고살 길이 없어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 조건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늘 죽음의 공포와도 싸워야 했다.

책의 끝 문장: 1930년대에 일제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한국을 전시 체제의 소용돌이로 몰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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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모든 것이 삶의 덧없음을 강조하는 데 집중됐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던 만발한 꽃이나 잘 익은 과일들이 이젠 기쁨이 아니라 삶의 덧없음을 강조하는 데 이용됐다. 만발한 꽃은 곧 시들 듯, 우리도 곧 죽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가장 전형적인 소재가 정물화 속의 해골, 모래시계, 그리고 촛불일 것이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지면 또 촛불이 다 타고 나면, 그 다음은 말 그대로 ()’만 남는 것 아닌가? 우리가 문리를 깨우치려고 붙잡고 씨름하던 ’, 그리고 과학 관련 도구들도 바니타스의 단골 소재였다. 파우스트가 책 더미에 둘러싸여 진리를 깨우친 뒤, 결국 삶의 허무에 슬퍼했듯, 책과 과학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 모두 허무하다고 화가들은 그린다.


(80-81)

미술사가들에 따르면 로코코의 시작은 태양왕 루이 14세의 죽음(1715)과 일치한다. 베르사유 공전의 장대하고 영웅적인 17세기의 바로크와 고전주의가 물러나고, 파리의 살롱을 중심으로 작고 예쁜 실내 장식 같은 예술들이 18세기 초엽부터 시작됐다. 절대 권력자의 독재에 질린 귀족들이 궁전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 자신들의 고향인 파리로 돌아간 뒤, 궁전 예술과는 아주 다른 사적인 취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작품들을 좋아했는데, 이를 예술사에선 로코코라고 부른다.


(160)

마르크 샤갈(1887~1985)도 경계인이다. 그는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지금의 벨로루시공화국의 비텝스크에서 태어난 샤갈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자유시민으로 살지 못하고 일종의 불법체류자처럼 숨어 살았다. 당시 유대인은 러시아 시민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인도, 그렇다고 유대인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에서 방황한 인물이다.

샤갈의 세상은 집시의 세상과 닮았다. 이성과 상식은 없고, 마법적인 환상으로 가득 차 있다. 결혼한 신랑 신부는 하늘을 날고, 동물의 머리를 한 신랑은 가냘픈 신부의 뺨에 입맞춘다. 집보다 닭이 더 크게 그려져 있고, 바이올린 연주자는 늘 지붕 위에 앉아 있다. , 황소, 양들은 사람의 가장 절친한 이웃인 듯 빠짐없이 등장하고, 이들이 사는 마을은 늘 축제로 흥청망청이다. 샤갈의 세상은 쿠스투리차의 영화처럼 카오스의 미학이 지배하고 있다.


(180)

19세기 말, 데카당스의 세련되고 퇴폐적인 기운이 가득한 도시, . 문학, 음악, 미술에서 세기 말 낭만주의의 정점에 있던 예술가 세 명이 바로 쇠락의 도시 빈에서 서로 이름을 떨친다. 아르투어 슈니츨러(1862~1931), 구스타프 말러(1860~1911), 그리고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가 바로 그들이다. 슈니츨러와 클림트는 동갑이고, 말라는 이들보다 두 살 위다. 말러는, 레퀴엠보다 더 비극적인 <교향곡 5>에서 잘 보여줬듯, 지독한 비관주의자다. 그의 검은 음악은 우리를 죽음의 고요 속으로 이끈다. 반면, 클림트는 생명이 넘치는 황금빛 회화로 우리를 에로스의 환희로 초대한다. 이 두 예술가의 사이에, 곧 죽음과 에로스 사이에 슈니츨러의 문학 세계가 걸쳐 있다.


(200)

1916년 스위스의 취리히. 모든 유럽이 전쟁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을 때, 전쟁이 싫다는 이유로 몇몇의 삐딱한 젊은이들이 영세중립국 스위스의 이 도시로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규모의 학살 전쟁을 겪으며 이들은 우리 인류가 이룩한 모든 긍정적인 가치들을 거부하는 극단적인 예술 운동을 전재한다. 소위 거부의 미학운동이라 하는 아방가드르 다다(Dada)’는 이렇게 전쟁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206-207)

어떻게나 악당이 실감 나게 연기를 해대는지, 주인공 배트맨의 존재는 잘 기억나지도 않고 조커의 인상만 강렬하게 남은 영화가 <배트맨>이기도 하다. 만약 조커 일당이 무고한 사람들만 죽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주인공인지 헷갈릴 정도로 캐릭터들 사이의 중심은 조커에게로 쏠려 있다. 조커 일당이 배트맨과 싸우는 방법도 아주 인상적이다. 배트맨은 첨단과학과 거대자본이 있어야만 소유할 수 있는 무기들을 지고 하늘을 날고 땅 위를 쏜살같이 달린다. 반면에, 악당들은 재래식 소총을 들고 맨몸으로 배트맨과 싸운다. 어찌 보면 요즘 세상과 참 많이 닮은 전투 장면이기도 하다.


(306)

연애소설 주에 토머스 하디의 <테스>만큼 인기가 높은 작품도 드물 것이다. 특히 여성 독자들에겐 더하다. 여성이 과거를 고백하는 게 과연 잘한 것인가 아닌가같은 소재는 우리처럼 가부장적인 사회에선 더욱 먹혀들었다. 테스는 잘 알려져 있듯이 그 과거를 고백한 대가로 인생을 망치는 순진한 처녀다. 이런 간단한 연애 이야기의 소설이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은 문학적으로 승화된 언어 때문이지, 이야기의 독특함 때문은 아닌 듯하다. 특히 토머스 하디는 영국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처럼 자연의 감정을 묘사하는 데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선배 워즈워스가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은 뛴다며 자연에서 희망을 찾았다면, 하디는 이와 반대로 고독을 맛본다. 하디의 자연에는 절망이 있다. 쓸쓸한 고독 속에 방황하는 농촌 사람들의 무너진 인생이 하디 소설의 테마다. <테스>는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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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1-16 06: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읽었던 도서가 소개되어 내 서재를 한참 둘러 보았어요. 이 도서를 찾으려고. 안타깝게도 없네요. 아마도 누군가에게 주었나 봅니다. 옛 일을 떠올리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bookholic 2024-01-16 23:30   좋아요 0 | URL
저는 최근에 친구의 추천으로 알게 된 책입니다.
소개된 영화를 많이 보지 않아서, 궁금증 잔뜩 유발한 책이었습니다!!! ^^
따뜻한 하루 되세요~~~
 
런어웨이
장세아 지음 / 아프로스미디어 / 2023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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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우연히 인터넷 서점에 평점이 좋은 책을 하나 읽었단다. 장세아 님의 <런어웨이>라는 소설이야. 인터넷 서점에서 지은이 장세아 님으로 검색을 해 보면 이 책 한 권만 조회가 되어 신인작가인가 싶었는데, 회사원으로 웹소설도 쓰고 북리뷰 채널을 운영하는 등 내력이 꽤 되시는 분인 것 같더구나. <런어웨이>는 책이 두껍지만 책장이 휙휙 넘어가는 것이 재미있구나. 다만 다른 소설에서 본 듯한 구성과 예상되는 결론이 다소 아쉬움이 있었단다. 그래도 작가의 다음 작품도 기대가 된단다.


1.

, 그럼 책 이야기를 해볼게. 동거 중인 폭력적인 남자친구 현욱의 폭행에 참지 못하고 반격을 가하다 돌발적인 사고로 치명상을 입고 남자친구를 두고 도망친 재영. 어쩌면 남자친구가 죽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 무작정 그곳을 떠나려고 기차를 탔는데, 기차에서 갓난 아기를 데리고 탄 같은 나이 또래의 여자를 만났단다. 갑부집 아들과 도둑 결혼을 한 후 아이까지 낳았는데, 그 남자한테 배신을 당해서 아이만 시댁에 맡기려고 하는 길이라고 했어. 그 사람 또한 처지가 만만치 않구나. 그런데 잠시 아이를 재영에게 맡기고 화장실에 간 그 여자가 사라져 버렸단다. 아기 옆에는 쪽지가 있었는데, 재영에게 아기를 시댁에 데려다 달라는 부탁의 내용이었어. 얼떨결에 재영은 아이를 맡을 수밖에 없었어.

재영은 아이를 데리고 그 여자가 적어 놓은 주소를 찾아갔는데, 그 집은 그냥 갑부집이 아닌 것 같았어. 누가 봐도 으리으리한 저택이었어. 재영은 자신이 아이를 데리고 온 사연을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그 전에 재영을 형수님, 며느리라고 생각들 하고 있었어. 재영은 지금 이 곳을 나가면 마땅히 갈 곳도 없고 해서, 하루 이틀 머물 생각에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그냥 두었어.

그 저택의 가족구성원을 간단히 이야기해줄게. 그 저택의 주인과 관련된 사람은 두 사람인데 그 관계가 좀 복잡하단다. 집 나간 첫째 아들이 있는데, 그가 바로 재영이 데리고 온 아기의 아빠 되는 사람이란다. 첫째 아들이 집 나간 지 7년이 되었고, 한 번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연락도 안 된다고 했어. 그리고 재영이 데리고 온 아기의 할아버지 되는 최 회장님이 있는데, 최 회장님은 중풍에 걸려 말도 제대로 못하고 휠체어 생활을 하고 있었어. 재영을 스스럼 없이 진짜 형수님처럼 대해준 이가 있는데 둘째 아들 수현이 있었어. 그런데 수현은 최 회장님의 혼외자였단다. 엄마와 밖에서 따로 살다가 엄마가 죽고 나서 열 살 때 이 집에 들어온 거야. 그때 이복형이 잘 보살펴주어 그를 잘 따랐고, 수현의 우상이 되었어. 그런 수현은 성격이 밝고 싹싹해서 재영을 진짜 형수님처럼 스스럼 없이 대했단다.

재영이 그곳에 며칠 머무르기로 결정한 것은 수현의 이런 접대 때문이었을 거야. 7년 전 형이 집을 나간 이유는 형의 어머니가 충격적인 일로 돌아가신 이후라고 했어. 형의 어머니는 알레르기가 있는 음식을 먹고 돌아가셨어.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그 음식을 만든 것도 실수인데, 하필 그때 비상약이 보이지 않아서 응급처지를 못했던 거야. 그 일이 있고 형이 집을 나가고 아직 한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고 했어. 그 외에 이 저택에서는 최회장님의 수발을 들어지는 주는 사람들, 집안 일과 부엌 일을 하는 분들이 계셨어. 재영은 며칠 동안 그 집에 머무르면서 상황을 봐서 그 집에서 나오려고 했단다. 마음 바뀐 아기의 엄마가 찾아올 수도 있고, 집 나간 첫째 아들이 들어오기라고 하면 큰일 나니까 말이야.


2.

특별한 직업이 없어 보이는 수현은 재영을 따라 다니면서 쇼핑도 도와주고, 브런치도 같이 먹고 그랬어. 재영은 태어나서 처음 누려보는 생활을 며칠 하다 보니 자꾸 이곳에 머물고 싶은 위험한 생각이 들었단다. 재영은 일단 자신의 옛흔적을 남기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핸드폰 속 사진을 지우고 있었는데, 언제 왔는지 수현이 그걸 보고 있네재영은 당황하며 어찌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수현이 사진 속 재영의 남자친구를 보면서 형은 여전하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야.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 자신이 때려눕히고 온 남자친구인 현욱이 집 나간 이 집 큰 아들이라고? 재영은 잠시 당황하였지만, 침착하려고 노력했단다. 뭐야, 그 남친 새끼가 양다리였고, 아기까지 낳은 거야?

그러면서 누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것은 아닌가, 생각했단다. 재영의 핸드폰으로 잘 지내냐는 안부 메시지를 받고 이런 생각은 더 심해졌단다. 이런 문자를 보낼 사람은 남자친구 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남자친구가 죽지 않은 건가? 그렇다면 최소한 자신은 살인자 혐의에서 벗어나게 되는 건가? 이런 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단다. 이제 어떻게 행동해야지? 근데 분명 피칠을 한 남자친구가 정신을 잃었는데재영은 떨리는 마음에 몰래 남자친구가 쓰러져 있던, 함께 동거하던 반지하집을 찾아가 보았단다. 뭐야.. 집이 아주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어. 남자친구도 사라지고 그 많던 피도 모두 깨끗하게

그런데 재영이 깜짝 놀랬단다. 수현이 그녀를 몰래 따라왔던 것이야. 재영은 깜짝 놀랐는데, 수현은 미안하다면서 재영을 따라 오면 형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이야기 안하고 따라온 것이라고 했어. 뭐야.. 점점 수현의 행동이 이상하잖아. 얼른 이 저택에서 탈출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때 또 새로운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단다. 최회장님의 수발을 들던 사람이 그만 두고 최효진이라는 사람이 새로 왔는데 바로 아기 엄마였단다. 이젠 앞뒤 보지 말고 무조건 이 집에서 도망가야 하는데, 이상한 것은 그 효진이라는 사람이 모르는 척 연기를 하는 거야. 자신이 아기 엄마라는 사실도 이야기하지 않고, 재영을 보고도 처음 뵙겠다고 하고이건 또 무슨 꿍꿍이 속?


3.

자 이제부터 사람들 관계는 더 꼬이고 꼬인단다. 효진은 사실 이 저택에 오래 전에 머무른 적이 있었어. 효진의 엄마가 이 곳에서 머물면서 일하셨거든. 그러니까 효진은 어린 시절부터 수현과 그의 형, 그러니까 재영의 남자친구였던 현욱과 아는 사이였던 거야. 무척 친했던 것 같아. 이런 인연으로 효진은 나중에 커서도 최회장님을 보살펴 드렸던 거란다. 이 정도 사이였는데, 효진은 왜 아기를 재영에게 두고 간 것인가. 효진은 왜 모른 척 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처음부터 효진은 재영을 알고 접근한 것은 아닌가. 이 모든 시나리오는 누가 짠 것인가? 소설을 읽어가다 보면 한 사람이 자꾸 의심이 된단다.

현욱이 집을 나간 이유, 현욱의 엄마가 알레르기 음식을 죽고 죽은 이유, 효진이 아이를 재영에게 맡긴 이유이 모든 일들은 결국 한 사람에 귀결이 되는데아빠가 이야기해준 이후 소설은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난단다. 아빠가 보통 스포일러 무시하고 결론까지 다 이야기를 해주긴 하는데, 이 소설은 여기까지 하고 스포일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밖에 이유도 있지만 말이야. 아무튼 지은이께서 소설의 결말을 깔끔하게 마무리 하신 것 같구나.

,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인생을 리셋할 수 있을까?”

책의 끝 문장: 어떤 인생은 새롭게 바뀌기도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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