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그 기자는 사회부 기자답게 로펌의 생리와 속성을 환히 꿰뚫고 있었다. 로펌은 그 기자의 지적처럼 돈만 밝히는 곳이었다. 로펌이 돈만 되면 무슨 사건이고 맡고 나선다는 것은 로펌에 들어오고 나서야 알았다. 사건의 선별이 따로 없었다. 기준이 있다면 딱 하나, 오로지 돈이었다. 그러니까 대형 로펌이란 법조 정글 속의 하이에나였다. 그러니 로펌은 떼부자일 수밖에 없었고, 젊은 변호사들은 조심조심 수군수군 자기네 대표가 얼마나 부자일지 짐작하고 추측하고 상상하기 바빴다. 그들이 어림잡고 점친 대표의 재산은 몇천억을 헤아렸다.


(141)

우리는 왜 국가적으로 이런 조처를 취하지 못하는가. 영어 간판을 쓰되 위에는 반드시 한글로 쓰고, 아래에는 영어를 쓰게 하는 방법 말이다. 이것은 쇄국이 아니다. 그건 국가적 존엄성과 국민적 자주성을 스스로 지키는 일인 것이다. 이 나라의 이 정신없는 영어 범람 현상을 미국 사람들은 뭐라고 하며 바라볼까. 고마워할까, 기특하다고 할까, 스스로 문화식민지가 되려고 허둥거리는 꼴을 보며 불쌍해하고 경멸할까.


(154-155)

부모들이 자식들 교육에 열성이고 최선을 다하는 건 더할 수 없이 좋은 미덕인데, 그건 어디까지나 자식의 소질과 재능과 능력이 객관적으로 확인되고, 본인의 욕구와 의지와 선택이 선행된 다음에 따라야 할 뒷받침이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과정이 전혀 없이 부모들의 과도한 욕심만 앞서서 무작정 저질러지는 일이 그 교육열 아니오? 우리나라 부모들은 무작정 자식들이 출세하고, 부자로 잘살기를 갈망하고 있소. 그 신기루를 향해 부모들은, 불빛을 보고 무작정 달려드는 불나방 떼처럼 서울로 서울로 몰려가고 있는 것이오. 그러나 부모들이 소원하는 그 꿈을 이루어내는 자식들이 몇 퍼센트나 되겠소? 그 상위층이 된다는 것은 10퍼센트도 안 되는 숫자요. 나머지 90퍼센트는 다 실패고 헛수고요. 도시빈민으로 허덕거리며 죽을 둥 살 둥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지만 결국에는 빈손이기 십상인데, 그런 무모하고 어리석은 인생살이가 어디 있고. 그런 과욕이 자기 인생도 망치고, 자식 인생도 불구로 만드는 것이오.


(178-179)

이 과일(애플망고)이 맛만 좋은 게 아니라 몸에 좋기로, 한마디로 만병통치입니다. 비타민의 덩어리, 섬유질의 덩어리일 뿐 아니라 우리 건강에 좋은 중요 성분들이 다량 들어 있어서 각종 암 예방과 치료 효과가 크고, 특히 남자에게만 있는 전립선암에 특효니 이 형 많이 드시오. 그리고 피부 미용에도 효과가 크니 황 여사도 많이 드시고요. 그 외에 면역력을 강화시켜 주고, 변비를 해결해 주며, 혈관을 깨끗하게 해 고혈압 등 혈관계 질환의 예방과 치료에 효과가 큽니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신성한 과일로 특별 취급을 합니다.


(186-187)

그 말이 맞소. 사회학적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돈이 생겨난 이후 5천여 년에 걸쳐서 줄곧 돈의 노예였소. 그런데 자본주의가 등장하고, 사회주의와의 대결에서 사회주의가 스스로 몰락하면서 자본주의가 독불장군으로 세계 지배력을 장악하게 되고, 그 세월이 30년이 넘으면서 이 나라 청소년과 젊은이 들까지 돈의 마력에 완전히 휘말리게 되고 말았소. 돈의 괴력과 마성이 문제지 거기에 휩쓸리는 젊은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소. 종교마저 돈 앞에서 마구 휘둘리고 꼼짝을 못 하는 판이니 돈을 제일로 치는 젊은이들을 탓할 것도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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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수학책 - 그림으로 이해하는 일상 속 수학 개념들
벤 올린 지음, 김성훈 옮김 / 북라이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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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우연히 인터넷 서점에서 <더 이상한 수학책>이란 책을 알게 되었단다. 미적분을 그림과 함께 설명하는 책 같았어. 예전에 읽은 <친절한 과학책> 같은 류의 책 같았어. 재미있는 그림과 함께 미적분을 설명을 해주는 책. 이제 몇 년 후면 너희들도 미적분을 배우게 될 텐데, 미적분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책을 구매했단다. 알아보니 <더 이상한 수학책><이상한 수학책>의 후속편이더구나. 그래서 <이상한 수학책>도 구매를 해서 순서대로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고 <이상한 수학책>을 먼저 읽었단다.

읽은 지는 꽤 되었는데, 우리가 여행을 다녀와서 이제서야 너희들에게 책 이야기를 하는구나. 책 읽은 지 며칠만 지나도 기억이 잘 나는데, 한 달이나 지나서 이야기하려니 ㅠㅠ  기대했던 것 만큼 좋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은 짧게 마쳐야겠구나. 여행으로 인해 밀린 독서 편지가 어마어마하구나.

<이상한 수학책>의 지은이는 벤 올린이라는 사람인데, 수학 관련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이고, 여러 매체에 수학과 교육 관련 글을 쓰기도 한대, 학교에서도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대. 이런 경력으로 자신이 쓴 글들과 경험을 책으로 엮은 것이 바로 <이상한 수학책>인 것 같구나. 책의 시작은 수학과 수학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어. 별로 공감이 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전문가의 이야기이니까 발췌해 보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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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6)

하지만 수학은 적어도 한 가지 측면에서는 일반적인 언어라 할 수 있다. 이해력을 높이기 위해 수학자들은 대부분의 독자에게 익숙한 전략을 채용한다. 바로 심상 만들기다. 수학자들은 머리로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써 본다.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기술적 세부 사항들은 그냥 넘어간다. 그리고 자신이 읽고 있는 내용과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연결해 본다. 그러고 나서,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수학자들은 읽을거리에 감정을 이입하고 그곳에서 즐거움, 유머, 결벽증 같은 불편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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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학의 분야는 꽤 많은 편이란다. 너희들 수학 교과서의 차례만 봐도 꽤 되잖니. 이 책에서 다룬 수학의 분야는 기하학, 확률, 통계 이렇게 세 분야란다. 기하학, 확률, 통계에 관해서 이야기해준 이유는 이 분야들이 우리 일상 생활과 꽤 밀접한 분야이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런데 감탄사를 내뱉을 만한, 그런 내용들이 없어서 좀 아쉬웠단다. 마지막 장에서는 수학과 역사의 관련성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는데, 지은이는 수학을 전공한 이공계 출신이지만 사회문제나 역사 관련된 부분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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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9)

역사는 작은 규모에서는 단순하지만 큰 규모에서는 예측 불가능한 인생 게임과 비슷한 방식으로 카오스적일까? 아니면 하루 단위의 작은 규모에서는 거칠게 요동치지만 장기적으로 평균하면 기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날씨와 비슷한 방식으로 카오스적일까? 아니면 역사는 코흐 곡선과 비슷해서 모든 수준에서 카오스가 등장하고 모든 규모에서 복잡성이 드러날까? 머릿속에서 이런 비유들이 서로 경쟁을 벌인다. 마치 한 화면에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 파일 세 개가 동시에 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가끔은 내가 금방이라도 세상을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뉴스를 보면 세상은 어느새 파악할 수 없는 이상한 모양으로 또다시 바뀌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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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야기했지만, 읽은 지도 오래되었고 크게 감동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은 아주 짧게 독서 편지를 마치련다. 원래 너희들에게 미적분을 설명해주려고 구입했던 <더 이상한 수학책>도 조만간 읽어야할텐데, 그 책은 좀 더 재미있으면 좋겠구나.


PS,

책의 첫 문장: 이 책은 수학에 관한 책이다.

책의 끝 문장: 하지만 뉴스를 보면 세상은 어느새 파악할 수 없는 이상한 모양으로 또다시 바뀌어 있다.


어째서 수학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토대를 이루고 있을까? 수학은 어떻게 동전과 유전자, 주사위와 주식, 책과 야구 등 서로 상관없는 영역을 연결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수학이 생각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때 도움이 된다. - P8

비안네가 드무아브르의 정리를 나보다 더 잘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비안네는 자신을 지식을 명확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었던 만면 나의 통찰은 두꺼운 머리뼈 안에 갇혀 어눌한 혓바닥을 통해 빠져나오지 못했다.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할 능력이 없는 수학자는 그날의 나처럼 자기 생각 속에 섬처럼 혼자 고립되어 남에게 닿지 못하는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반면 자신이 아는 진리를 공유할 수 있는 수학자는 사람들에게서 감사의 마음과 영웅 대접을 받는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 P68

몸집이 큰 동물은 내부 비중이 높기 때문에 체온을 유지하기가 쉽다. 반면 작은 동물은 표면 비중이 높아서 체온을 유지하기가 만만치 않다. 손가락, 발가락, 귀 등 표면 비중이 높은 사지 말단이 추위에 제일 약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추운 지역에 북극곰, 물개, 야크(티베트산 들소-옮긴이), 무스(북미산 큰 사슴-옮긴이), 전설 속 설인 새스쿼치 같은 대형 포유류만 사는 이유도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표면 비중이 높은 생쥐가 북극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심지어 중위도 지역에 사는 생쥐도 열 손실을 감당하려면 하루에 자기 체중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먹이를 먹어야 한다. - P121

과학은 결과 절대적 확실성이나 슈퍼맨 같은 완벽함으로 정의되었던 적이 없다. 과학에서는 언제나 건강한 회의주의 시각에서 모든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 가능 중요했다. 이런 싸움에서 통계학은 없어서는 안 될 동맹이다. 통계학이 과학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데 한몫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데 한몫하리라는 점 역시 분명하다.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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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이 도저히 이를 수 없는 백만장자, 억만장자를 모두 부러워하는 동시에 두려워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그들에게 무의식중에 지배당하고 있다.’

언젠가 읽은 어느 심리학자의 글이었다.

 

(284-285)

그런데 교단 끝에서 휙 돌아선 교수가 칠판 빈 데다 쓰기 시작했어. ‘돈은 인간에게 실존인 동시에 부조리다.’ 이렇게 쓴 교수가 돌아서더니 오늘 강의는 끝!’ 하고는 강의실을 나갔어. 다른 것들 것 달리 아무 부연 설명도 없이. 그때 모든 학생들의 시선은 일제히 칠판의 그 짧은 문장에 박혀 있었어. 그 한 줄의 문장은 학생의 질문만큼 도발적이고 신선했거든. 그 처음 듣는 말에 학생들은 묶인 채 침묵은 꽤 오래 계속되었어. 학생들은 돈과 실존과 부조리와의 상관관계를 따지고 파악해 보려고 헤매고 더듬거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지. 나도 그랬으니까. 그러다가 누군가가 침묵을 깼어. ‘그거 그럴듯하네.” 또 누군가가 어렵다, 어려워하며 일어섰고, 또 어떤 사람은 아이고, 골치 아프다. 실존이든 부조리든하며 자리를 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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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미술 이야기 7 - 르네상스의 완성과 종교개혁 : 미술의 시대가 열리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7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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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양정무 님의 난처한 미술이야기 시리즈 7권을 읽었단다. 5권부터 이어지는 르네상스 시리즈의 마지막이라고 했어. 르네상스 이야기보다 보니 주로 이탈리아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데, 7권에서는 로마와 피렌체와 베네치아가 주로 이야기되었고, 북유럽과 종교개혁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었단다. 이 책을 읽을 즈음에 우리가 로마, 피렌체 여행 계획을 하고 있어서 그거에 맞춰 읽고 가기 전에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려고 했는데, 아빠가 게을러서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야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구나. 여행 중에 책에서 본 작품들을 많이 봤는데, 책의 내용이 잘 기억나질 않아서 너희들에게 설명을 못 해준 것이 안타깝더구나. 이 놈의 저질 기억력.

로마는 고대 로마 이후 오랫동안 세계의 수도라 불리며 이어졌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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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

그렇죠. 로마가 세계사에 끼친 영향이 대단하기 때문에 로마를 지칭하는 말도 다양합니다. 일례로 로마를 카푸트 문디라고도 부릅니다. 라틴어로 세계의 머리, 세계의 수도란 뜻이지요. 지금은 파리나 런던, 워싱턴 같이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는 도시가 많습니다만, 여전히 세계 수도의 원조는 로마일 것입니다. 오늘날 이탈리아 수도인 로마는 고대 로마제국의 수도였고, 로마제국 멸망 후에는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로 그 수도의 역사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로마라는 도시는 역사에 등장한 다음부터 지금까지 세계사의 무대에서 한 번도 내려온 적이 없습니다. 과거에도 위대했고, 지금도 위대하고, 앞으로도 위대할 도시를 손꼽으라면 그중 하나가 바로 로마일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터널 시티(eternal city), 즉 영원한 도시라는 별칭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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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로마가 14세기에는 암흑기를 겪게 돼. 쓰레기와 폐허의 도시로 불렸고, 인구도 2만도 안되었대. 당시 피렌체는 인구가 10만이라고 했으니 로마를 암흑기라고 할 만했지. 로마에 머물고 있던 교황도 이때는 로마에 안 있고, 프랑스 아비뇽에 있다고 하는구나. 15세기 초반이 되어서야 다시 로마로 왔대. 그리고 15세기 후반부터 변화의 물결이 일어났고, 16세기에는 최첨단 도시로 탈바꿈했다고 하는구나.  당시 교황이었던 율리오 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다시 지었다는데, 공사 기간이 본당은 1506년부터 1626년까지 120년이나 걸렸고, 광장을 정비하는데 50년이 더 걸렸다고 하는구나.

당시 교황 선출에 있어 영향력 있는 집안들의 알력 다툼도 있었는데, 그렇다 보니 영향력이 셌던 메디치 가문에서 많은 교황을 배출했다고 하는구나. 16세기에만 메디치 가문에서 3명의 교황을 배출했대. 교황이 바뀔 때마다 건축 붐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그로 인대 로마가 더욱 발전한 거 같구나.

16세기 유럽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다고들 한단다. 교황과 황제. 여기서 황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란다. 당시 양쪽의 권력이 엇비슷하여 교회 성직자의 인사권을 두고 갈등을 빚기도 했대. 황제 가문 중 유명한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15세기부터 300년 넘게 황제를 했다는구나. 합스부르크는 친족 결혼을 많이 해서 유전병이 발생했고, 심한 주걱턱으로 유명한 가문이었단다.  

합스부르크 출신 황제 중에 유명한 사람으로 카를 5세가 있었단다. 넓은 영지를 물려받아 막강한 힘을 갖게 되었어. 역시 땅이 힘이구나. 그렇게 막강한 힘을 갖게 되자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와 갈등을 빚다가 결국 전쟁까지 벌여졌어. 그런데 당시 동쪽에서 오스만이 진격하고 있던 때라서, 교황 바오로 3세가 화해시켜서 일단 갈등은 봉합되었단다. 로마가 발전하고 사람들도 모이다 보니 인문주의도 등장하였어. 특히 15세기 보급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많은 사람들이 책을 볼 수 있게 하는 책의 시대가 되었어. 이는 곧 지식혁명이라 할 수 있었지.


1.

당시 영향력이 많았던 메디치 가문은 신플라톤주의를 받아들였어. 신플라톤주의에서는 아름다움이란 완벽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생명력이 있냐를 기준으로 삼았대. 그래서 미술작품도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이런 작품의 대가가 다름 아닌 미켈란젤로였단다. 미켈란젤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화가란다. 그가 남긴 조각의 정의는 많은 사람들이 인용한단다. 너희들도 이미 들어봤을 지도 모르지만, 다시 한번 읽어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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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82)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돌에서 생명을 끌어냈습니다. 물론 비유적인 표현이지만요. 플로티노스의 사상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맥락에서 미켈란젤로의 회화나 조각상을 바라볼 수 있어요. 미켈란젤로가 남긴 말 중에 나는 대리석 안에 천사를 봤고 그 천사가 자유로워질 때까지 깎아 낸다.”라는 말이 유명한데요. 돌 안에 이미 형상이 깃들어 있고, 그 형상을 덮는 돌을 제거하는 작업이 조각이라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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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피렌체 출신이었는데 활동은 주로 로마에서 했단다. 그는 건축에서 큰 재능이 있었는데,

그의 건축물들로 이루어진 교황의 길이라는 곳이 있다는구나. 라테라오 대성당부터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이어지는 길이야. 중간에 콜로세움, 포로로마노, 카피톨리노 언덕도 있대. 그야말로 로마의 하이라이트로구나. 미켈란젤로는 칼피톨리노 광장과 주변 건물을 설계했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참여한 건축가 중에 한 명이라고 하는구나. 그곳에 있는 작품 중에는 <피에타>라는 유명한 작품이 있는데 이것을 미켈란젤로 24살에 만들었다고 하는구나. .. 여행 다녀온 지 얼마 안되어서 너희들도 익숙하지?^^ 미켈란젤로의 작품들을 보다 보면 이것이 사람이 만들 수 있는 작품인가, 싶어 미켈란젤로는 어쩌면 외계인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로마에서 활동하던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정부의 요청으로 잠시 피렌체에 돌아와 작품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 유명한 다비드 상이란다.  그 높이가 5.17미터나 되는데, 정말 살아 있는 것 같은 작품이란다. 시뇨리아 광장에 서 있던 다비드 상 기억나지?

다시 교황 율리오 2세의 요청으로 로마에 온 미켈란젤로. 율리오 2세 무덤 프로젝트를 시작했단다. 하지만 얼마 못가 중단되었어. 왜냐하면 더 큰 프로젝트가 있었기 때문이야. 성 베드로 대성당을 다시 짓기로 한 거야. 먼저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맡게 되었단다. 그 크기는 13.2x41.2미터라고 하니 그 크기가 엄청난데, 거기에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도대체 어떤 그림을 그려 채운단 말이야. 그런데 천장에 그려야 한다고 하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할 수 있었겠니.. 미켈란젤로는 처음에는 사양했대. 자신은 화가가 아니고 조각가라고 했거든.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그 전에도 그림을 그리긴 했었대. 1504년 피렌체 팔라초 베키오라는 곳에서 미켈로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각각 한쪽 벽면씩 맡아서 벽화를 그리는 일이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각자 다른 프로젝트가 생겨 중단되었대. , 그 프로젝트가 중단되지 않았다면, 엄청난 작품이 나왔을 텐데, 아쉽구나.

다행히 미켈란젤로는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아서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성경 이야기를 구성하여 천장화를 그렸단다. 이 천장화에 유명한 그림이 많은데,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그림이 <아담의 창조>가 아닐까 싶구나. 이것도 기억 나지?^^ 당시 벽화를 그릴 때 프레스코 기법을 사용했는데, 이것 또한 쉽지 않은 기법으로 많은 시간을 요하는 기법이래. 그건 그렇고 천장에 그림을 그렇게 오랫동안 많이 그리면 목이 남아나지 않은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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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완벽주의자는 고독한 법이지요. 미켈란젤로는 이 벽화를 프레스코 작업 기업으로 그려야 해서 더 어려워했어요. 벽에 석회 반죽을 바르고 스케치를 한 후, 밑그림이 마르기 전에 재빨리 채색해야 했거든요. 프레스코(fresco)는 이탈리아어로 신선하다라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석회 반죽이 마르기 전, 벽이 신선할 때 그려야 하는 일이라 그야말로 시간과의 싸움이지요. 미켈란젤로도 제작 초기에는 프레스코화 기법에 익숙하지 않아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쳤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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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에게도 경쟁자가 있었으니, 라파엘로였단다. 바티칸 박물관의 정문 위에는 두 사람의 조각상이 있는데, 하나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이고, 하나는 라파엘로의 조각상이란다. 안타까운 것은 라파엘로는 1483년생인데 37살에서 요절을 했단다. 그에 반해 미켈란젤로는 1475년에 태어나 거의 90세까지 살았대.(1564년 사망) 라파엘로는 우르비노라는 곳의 출신이니 피렌체 출신의 미켈란젤로보다는 출신은 좋지 않았단다. 하지만 실력 하나로 주류가 되었어. 교황집무실의 벽화를 그렸대. 교황의 신임을 얻은 건축가 중에 브라만테가 있었는데, 브라만테가 라파엘로와 동향이라서 라파엘로가 그 일을 맡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실력은 뛰어났단다. 참고로 브라만테가 만든 건축물 중에 유명한 것은 우리도 본 바티칸 시국의 코르틸레 델 벨베데레라는 벨데데레 정원이라고 하는구나.

다시 라파엘로 이야기를 하면 그는 1504년부터 1508년까지 피렌체 유학을 가게 되는데, 이때 실력이 급상승했다고 했어. 이 시기가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활약하던 시기라고 하니 그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고 그것을 자신의 실력으로 승화시킨 것일 거야. 라파엘로가 그린 교황 집무실의 벽화 중에 유명한 작품으로는 <아테네 학당>이 있었지.

당시 고대 건축의 영향도 많이 받았는데, 콜레세움의 아치도 영향을 많이 받아서, 팔라초에 아치 형태가 많이 들어갔다고 하는구나. 팔라토는 유력 가문의 저택으로 궁궐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하는구나.


2.

북유럽과 종교개혁에 관한 이야기는 미안한데 건너뛰어야겠구나.

바로 피렌체로 넘어갈게. 피렌체라고 하면 아빠는 오래 전에 읽은 <열정과 냉정 사이>라는 소설이 떠오르는구나. 많은 인기를 끌어 영화까지 제작되었지만, 아빠의 취향은 아니었어. 아무튼 그 소설의 주요 배경이 피렌체였단다. 특히 두오모 대성당. 정식 명칭은 피렌체 대성당이란다. 피렌체 대성당에 대한 이야기는 난처한 미술 이야기 시리즈 5권 이야기하면서 해 준 것 같구나.

이번 책에서는 16세기의 피렌체 이야기를 해주고 있단다. 피렌체의 강력한 가문인 메디치 가문. 그들이 백성들에게 잘 대해주지는 않았나 보구나. 그들은 백성들에게 쫓겨난 적이 있는데, 그 일을 기념하여 시민들에 의해 추진하여 만든 것이 바로 미켈란젤로의 다비스 상이라고 하는구나.(1504) 메디치 가문이 다시 피렌체를 점령하고 다비드 상에 대항마로 만든 것이 반디넬리의 헤라클라스 상이라고 하는구나. (1534) 헤라클라스는 근육도 더 크고 무섭게 만들었는데, 메디치 가문이 가문의 힘을 작품에 표현하려고 해서 그렇다는구나. 두 조각상은 모두 시뇨리아 광장에 있다고 해서 우리가 시뇨리아 광장에 도착했을 때, 아빠는 두 동상부터 먼저 찾아보았단다.

르네상스 후기에는 하이 르네상스라고 해서, 고대 로마 작품을 비판하는 기류가 있었대. 그러면서 고대 로마 작품을 리모델링하는 만행도 했대. 하이 르네상스에서 바로크 시대로 넘어가기 전인 1520년부터 1600년 정도까지를 매너리즘의 시대라고 한다고 한대. 후기 르네상스라고도 하고피렌체의 대공 중에 코지모 1세라는 유명한 사람이 있었어. 그가 아내를 위해 지은 피티 궁전이 있는데, 그 크기를 보면 아내를 엄청 사랑한 것 같구나. 그리고 코지모 1세가 출퇴근하는 길을 회랑으로 만들었는데, 그 회랑을 바사리 회랑이라고 하는데 아직 그 길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우리가 함께 갔었던 베키오 다리의 그 길이 바로 바사리 회랑의 한 구간이었단다.

….

마지막으로 베네치아의 이야기도 했는데 베네치아의 대표적인 화가인 티치아노와  베네치아의 대표적인 건축가인 팔라디오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면서 마무리를 했단다.

….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이 책을 읽고 직접 그곳에 가서 작품들을 보았더니 감회가 새롭더구나. 아는 만큼 보인다고, (비록 아빠의 저질 기억력으로 많이 안 보였지만) 작품들도 새롭게 보였단다. 여행 다녀온 지도 꽤 지났는데, 아직 그 작품들을 보았을 때의 감동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그 작품들이 괜히 명작이 아닌가 싶다. 기회가 되면 또 가고 싶지만

,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이번 강의는 로마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책의 끝 문장: 바로크 미술과 문명에 대한 이야기는 별도의 장에서 이어지게 될 겁니다.


율리오 2세는 로마를 기독교의 심장이자 동시에 강력한 정치권력의 중심지로 만들고 싶어 했죠. 건축은 교황의 막강한 권위를 보여주기에 더없이 적절한 수단이었고 성베드로 대성당을 새롭게 짓는 일은 로마를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프로젝트에 정점을 찍을 만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신축은 단기간에 끝나는 공사가 아니었습니다. 본당만 해도 1506년에 시작해 1626년까지 120년이 걸렸고 대성당 앞쪽의 광장을 정비하는 데만 또다시 50년이 걸렸습니다. - P32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가 죽은 지 한참 후에도 라파엘로를 견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일흔 살 가까운 나이에 수십 년 전 과거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쓰기도 했어요.
"교황 율리오 2세와 나 미켈란젤로 사이에 있었던 모든 불화는 라파엘로와 브라만테의 질투 때문이었다. 나를 파멸시키기 위해 이들은 교황을 속여 무덤을 세우는 계획을 중지하도록 시켰다. 라파엘로도 충분히 이런 일을 꾸몄을 것이다. 라파엘로가 미술에서 이룬 모든 것은 바로 나한테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 P143

라파엘로의 묘비명에도 "이제 그가 죽었으니 그와 함께 자연 또한 죽을까 두려워 하노라"라고 남겨져 있으니까요. 이건 교환청에서 일하던 당대의 인문주의자 피에트로 벰보가 쓴 글입니다. 자연이 라파엘로와 함께 죽었다는 말은 좀 과장처럼 들리지만 적어도 화려했던 로마 르네상스의 전성기, 하이 르네상스는 라파엘로의 죽음과 함께 서서히 눈을 감습니다. - P195

미켈란젤로는 1546년부터 그가 죽은 해인 1564년까지 18년 동안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에 매달리게 됩니다. 150년 동안 이어진 성베드로 대성당 건축 기간 중 미켈란젤로가 맡은 18년은 어떻게 보면 미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은 최초에 브라만테가 설계했고, 최종적으로는 카를로 마데르노가 완성했지만, 가장 중요한 뼤대를 만든 사람이 미켈란젤로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크게 보면 이 대성당이 미켈란젤로의 성당이라는 데 동의한다는 말입니다. - P365

이 건물은 처음부터 미술관은 아니었습니다. 우피치라는 단어가 이탈리아 말로 ‘오피스’란 뜻인데요. 코지모 1세는 사실 관공서를 지으려 했기에 이런 이름을 붙인 겁니다. 팔라초 베키오 옆에 자신이 업무를 보는 공간을 별도로 만들려고 한 것이죠. 새로운 오피스는 3층짜리 건물인데 2층에는 사무공간이, 3층에는 긴 화랑이 있습니다. 이 회랑에 메디치 가문이 소장한 미술품을 전시했어요. - P417

확실히 그런 점도 있다고 봐요. 그런데 이 매너리즘이라는 용어는 대단히 논쟁적이기도 해요. 일부 학자들은 이 시대를 특징지을 때 적극적으로 매너리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반대하는 이들도 있거든요. 소위 매너리즘 양식의 미술이 베네치아 등 다른 곳에서는 피렌체만큼 적극적으로 나타나지 않았기에 매너리즘을 한 시대를 규정짓는 양식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보는 학자고 많아요. - P422

그런데 이 시기 피렌체의 매너리즘 미술을 논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피렌체가 공화제에서 군주제로 급속히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런 작품들이 나왔다는 점입니다. 물론 메디치 가문은 15세기에도 피렌체에서 독주했다고 하지만 정치적으로 여전히 공화제 체제하에 있었습니다. 피렌체 시민과 메디치 가문 사이에서 일종의 힘의 균형이 있었던 거죠. 그러나 16세기에는 피렌체의 지배권이 메디치 가문에게 완전히 넘어가 버립니다. 피렌체는 결국 공작의 지배를 받는 공국이 되면서 1인 절대 지배 체제로 전환됐고 미술도 변화했죠. - P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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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929년의 대공황은 인류 문명사에도 한 가지 큰 변화를 몰고왔으니, 그건 바로 소비(comsumption)라는 개념의 재탄생이었다. “소비 14세기 초에 만들어진 단어로 ‘consume’이라는 동사의 본래 뜻은 파괴하고, 약탈하고, 정복하고, 소진시킨다는 의미였다.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소비(consumption)’라는 단어는 낭비, 약탈, 탕진, 고갈 등과 같은 부정적인 뜻으로 쓰였으며, 심지어 폐병을 뜻하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비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는 대공황 이후 대중광고와 마케팅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긍정적 이미지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소비라는 단어는 선택과 동일시되면서 축복으로 다시 태어났다.


(74)

반민생단투쟁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열광으로 전개되어 심지어 4살짜리 어린애까지도 죽였다. 결국 자신을 보호하고 적극성을 표현하기 위해 고문, 타살까지 자행했던 것이다. …… 자기보호 혹은 지나친 불안감이나 과시욕에서 나온 적극성의 과잉표현으로 중국인들 앞에서 조선인을 믿을 수 없음을 고백하며 조직에 자신의 청백함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심리가 민생단 적발과 비판투쟁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의 혁명성을 나타내기 위해 조그만 일도 큰 문제로 고발하고 또 거짓진술을 해댄 것이 반민생단투쟁을 확대, 지속시킨 중요한 원인이라고 인정된다.”


(116-117)

당시 신문이 누린 권력과 신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 월간 <동광> 1931 12월호에 실린 <신문 비판 특집>은 주목할 만하다. 이 기사는 대화형식으로 신문에 대한 세평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조선의 신문계에 사장이면 판서 격은 되고 중역이면 참판 격은 된다는 말을 못 들었나? 그 밑에 국장도 있고 부장도 있으니까 벼슬 못한 조선 민간 유지에게는 이것이나마 훌륭한 벼슬자리인 줄을 모르는가? …… 연전에 모 신문에서 수재금을 모집하니까 푼푼이 들어온 것이 5만여 원이요, 또 요새 이충무공 성금모집도 2만 원을 돌파했으니, 이 돈 없는 조선에서 그만한 돈을 모은다는 것은 신문의 위력이 아니고는 못할 일이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시골 가서 보면 석유 등잔 희미한 불빛 밑에서 동리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신문지가 해지도록 돌려가며 읽고, 신문에 난 말이면 만고의 진리로 듣는 형편이니.”


(138-139)

167센티미터의 큰 키를 가졌던 최승희는 1937년부터 5년간 세계 공연을 나섰으며, 이때에 반도의 무희’ ‘동양의 진주’ ‘동양의 이사도라 던컨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전성기 당시 최승희는 톱스타답게 각국의 최정상급 명사 예술인들과 교류를 맺었다. 그와 교류한 서양인으로는 미국 공연 시절 사귄 지휘자 스토코프스키, 소설가 존 스타인벡, 루이스 레에나, 존 그로프,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 로버트 테일러, 게리 쿠퍼 등이 있다. 유럽에서는 화가 피카소를 비롯하여 시인 장 콕토, 소설가 로맹 롤랑, 미셀 지몽, 영화배우 샬 보아에이 등이 그녀와 친교를 맺었다. 파리 공연 때 파카소로부터 그림 한 점을 선사받았는데, 시가로 수억대를 호가하는 이 그림의 행방을 두고 나중에 안씨 집안(시댁)과 최씨 집안(친정) 간에 한 때 불화가 있었던 적도 있다.


(161-162)

그러나 1929년 주식시장 붕괴는 우생학의 기본 사상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제레미 리프킨에 따르면 이탈리아계, 폴란드계, 유태계 이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금융 엘리트들의 실직사태가 벌어지고, 중산계층 전문가와 학자들도 이들과 나란히 실업자 대열에 들어서게 되자, 어떤 인종은 다른 인종보다 생물학적으로 우월하다는 신화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대공황은 수백만 미국인들을 평등하게 하여, 북유럽계 인종이든 남유럽계 인종이든, 백인 앵글로색슨 신교도들이건 유태인이건 모두 똑같이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181)

첫째, 신채호의 무정부주의는 사회진화론의 내적 모순을 해결하는 이념으로서 수용되었다기보다는, 시대적 조건의 변화와 독립 이후의 새로운 사회 건설에 대처할 수 있도록 저항적 민족주의의 내용과 방법 그리고 목표를 심화하는 발전적 계기로서 수용되었다. 둘째, 신채호의 무정부주의는 그의 민족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양자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채호에게 있어서 무정부주의가 민족주의의 방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정부주의는 민족주의의 발전된(혹은 민족주의가 지양되는( 단계로서 간주함이 타당하다. 셋째, 신채호의 무정부주의는 좌우 양쪽을 모두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과정에서 수용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종합하여 지양하는 제3의 가능성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193)

브나로드운동을 주도한 것은 편집국장 이광수였으며, 그 운동의 시범작으로 쓴 것이 <>이다. 지수걸은 <>에 대해 이광수가 <>에서 표방한 하면 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아는 것이 힘’ ‘티끌 모아 태산등의 헛구호는 제국주의 지배모순을 은폐하기 위하여 일제가 선전한 자력갱생운동 구호와 거의 동일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이러한 구호는 안 해도 이미 되어 있는 자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 될 사람들에게 안주 삼아 내뱉는 비아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215)

시인 심훈은 8 10일 새벽 <조선중앙일보>가 발행한 신문 호외를 받아들고 그 뒷장에 그대들(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첩보를 전하는 호외 뒷등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들의 심장 속에 솟음치던 피가 2300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세계의 인류를 향해 외치고 싶다. 인제는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라고 갈겨썼다. 감격에 몸을 떤 심훈은 그 즉흥시를 들고 <조선중앙일보>의 편집실을 찾아가 한바탕 읽어 들려주고는 사라졌는데, 그 이튿날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226)

<동아일보>는 일장기 말소 사건 후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여 친일 어용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물론 <조선일보>의 경우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조선일보>는 일제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찬양하기에 바빴다. 1937 1 1 <조선일보>는 일왕 부부의 사진을 1면에 크게 싣고 같은 지면에 총독의 새해 기념사와 휘호를 실었다. 이후 해마다 1 1일자 1면에 일왕 부부의 사진을 커다랗게 실었다.


(249)

김원봉은 1937 12월 초에 김구 중심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 가담하지 않은 중간파, 좌파세력을 결집해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

한상도는 이로써 1930년대 후반기, 중국 관내 지역 한인들은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김구의 우파그룹과, 상대적으로 진보적 민족주의 성향으로 가던 김원봉 중심의 중간좌파그룹으로 양극화되어갔다.”고 했다. 1938년엔 장제스가 직접 나서 한인세력의 단결과 재편성을 촉구하게 된다. 끝없는 분열! 당시 독립군세력이 처해 있던 최악의 열악한 상황을 감안하면 이해 못할 것도 없지만, 잘했다고 박수를 쳐주긴 어렵겠다.


(252)

1934년 사할인에서 출생해 <고려일보>의 사장을 지낸 조영환은 러시아는 한인 이주민을 교묘히 이용하여 연해주 일대의 미개간지를 개척한 후에는 이 개간지에 러시아인을 이주시킨 다음 한인들을 다시 오지인 미개간지대로 추방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35년 이후 연해주에 상주하는 한민족 수가 근 30만 명이었는데 그 후에도 인구수가 증가하고 있었다. 조국이 인접한 이 지대가 장래에는 한민족의 자치지역으로 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스탈린 체제는 1932년부터 한민족 중 인텔리, 기술자, 농업전문가, 당 관리요원, 군무자 등 민족의 두뇌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일제 스파이라는 것이다. 한평생 조선의 독립을 위해 반일투쟁에 몸바쳐온 연해주 한민족들에게 역사의 철천지원수인 일제의 스파이라는 혐의는 만인의 단죄를 받는 야수적인 행위였다. 그 때문에 1932~1937년까지만해도 한민족의 핵심 지식인 2000여 명이 학살되었다.


(306-307)

<한국통사>는 대원군시대부터 한일합방까지 50여년의 뼈아픈 망국사로, 국가는 비록 망하였지만 국혼(국가의 정신적인 힘)인 국교, 국가 등을 보존하고 교육과 독립투쟁을 통해 끊임없이 노력하면 결국 국백인 국가를 되찾을 수 있다는 정신사적인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이어 박은식은 1920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간행했다. 이 책은 글자 그대로 쓴 독립운동사다. 1919 3.1독립운동에 고무되어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까지의 독립투쟁사를 서술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선 민중의 힘과 민의의 결집이 독립실현의 중요수단임을 강조했다.


(337-338)

로마 교황청은 1932 9월 일본 천주교회에 신사참배는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교육목적으로 실시되는 것이므로 신자들의 신사참배는 정당하다는 해석을 내렸다. 이 결정을 기초로 교황청은 1936 5 18일 천주교 신자들이 신사에 참배하여도 좋다는 훈령을 내렸다. 이 훈령이 나오기 1개월 전인 1936 4월 한국 천주교회는 기관지 <경향잡지>를 통해 천주교 신자들의 신사참배를 공식 허락하였다. 천주교는 중일전쟁 이후엔 신사참배를 더욱 강조하였고, 1940년 다시 한번 신자들에게 신사참배를 권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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