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것은 수백 년에 걸쳐 벌여온 재판을 세상 밖으로 다시 꺼내는 일과 같다. 진실과 정치가 한 지붕 아래에 같이 산다는 건 보기 드문 일이다. 선동을 목적으로 한 인물이 그려질 때, 여론과 그 추종자들로부터 정의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영혼의 진실은 대개 중간 그 어디쯤에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왕실의 위대한 성인도 아니었고, 특별히 똑똑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은 평범한 성격에, 불타는 열정도 얼음 같은 차가움도 없는 사람이었다. 착한 뜻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악한 의도를 품은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의 평범한 인물이었기에 비극의 대상이 되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비극적인 긴장감은 인간과 그의 운명 사이에 존재하는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불균형은 영웅이나 천재들이 그들에게 내려진 사명에 비해서 너무나 좁고 적대적인 주위 세계와 충돌할 때 생겨난다.


(10)

운명은 평범한 사람도 뒤집어 놓을 수 있고, 한계를 넘어 나아가도록 강제로 몰아가기도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이 바로 그러한 역사의 예시이다. 명랑하고 구김살 없던 그녀의 세계 안에 혁명이 들이닥치지만 않았더라면, 이 합스부르크의 여인은 수많은 다른 황녀들처럼 평범하게 인류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을 것이다. 더 큰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먼저 밖으로 내던져야 한다. 그 목적을 위해 운명이 쥐고 있는 것이 바로 불행이라는 채찍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불행의 손길은 비정하게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곁을 좀처럼 떠나려 하지 않았다. “불행 속에서야 겨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진정한 나를 알게 된다.”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하찮은 평범한 삶이 후세에 어떠한 본보기가 되리라는 예감이 엄습했다. 책임 의식을 느끼며 그녀는 자신을 초월하여 성장한다. 필며의 형체가 부서지기 직전에, 영원히 지속되는 예술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27-28)

세상사는 대개 개개인의 내적 갈등의 결과물들일 뿐이다. 아주 작은 계기가 엄청난 결과를 불러오게 되는 것은 역사가 지닌 위대한 비결 중 하나이다. 1차 세계대전의 나비효과라고 불리는 세르비아의 알렉산다르와 드라가 마신의 결혼, 두 사람의 암살, 카라조르제비치의 즉위, 오스트리아와의 적대. 빈틈없이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과 세계대전. 역사란 거미줄처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다. 정교하게 조합된 역사라는 장치 속에서는 아주 작은 톱니바퀴라도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렇듯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 가운데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들, 결혼 이후에 몇몇 해들은 세상의 모습을 바꾸게 되었다.


(29)

오늘날에도 베르사유는 절대 왕정의 가장 웅장하고 도전적인 모습으로 남아있다. 도심에서 떨어진 시골 한가운데, 별다른 이유 없이 언덕 위에 자리한 궁전에는 수백 개의 창문들이 인공 운하와 정원을 바라보고 있다. 이곳에는 원래 도로도 기차도 이어지지 않았었다. 한순간의 기분으로 굳어진, 무의미하게 거대한 호화로움이었다. 바로 이것이 루이 14세의 절대 왕정이 원하던 것이었다. 이러한 의지는 국왕 개인에게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에 모든 영광은 그 개인에게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짐이 곧 국가다.” 그는 지위의 무한함을 표출하기 위해 궁전을 의도적으로 파리 밖으로 옮겼다. 그가 팔을 뻗어 명령만 하면 모래밭은 정원과 숲으로 변하고, 아름다운 궁전이 세워졌다.


(58)

네가 얻은 새로운 지위에 대해 축하의 말은 하지 않겠다. 그것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얻은 것이다. 시할아버지의 자비와 관용으로 지난 3년동안 누려온 평안한 생활, 그리고 프랑스 국민들이 너희에게 안겨준 사랑. 그 감사한 일들을 앞으로도 계속 이어 나가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할 때에는 더욱더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국민의 지지와 사랑을 받는 것은 너의 지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은 그 지위를 유지하며, 국왕과 국가의 안녕을 위해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너희 둘은 아직 너무 어린데…… 이 어미는 걱정이구나. 지금 내가 너희에게 조언할 수 있는 것은 너무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스스로의 눈으로 살펴보고 아무것도 바꾸려 하지 말고, 흐르는 대로 두거라. 그렇지 않으면 혼란과 음모가 끊이질 않을 것이다.”


(64)

하지만 부정은 못 해도 용서할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올곧은 성격의 사람이라도 이런 유혹은 뿌리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궁궐의 뒷방에서 정신적으로 채 성장하기도 전에 하룻밤 사이 최고 권력의 자리에 부름을 받은 그녀. 게다가 18세기라는 이 시대는 그녀를 유혹하기에 절묘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비가 된 첫날부터 자신을 신격화하는 숭배의 향연에 휩싸였다. 그녀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현명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녀의 행동은 곧 법이 되었으며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변덕을 한번 부려주면 그다음 날에는 벌써 유행이 되어 있었다. 어리석은 짓을 하더라도 궁중은 열광적으로 따랐다. 허영심에 찬 아들에게는 그녀 곁에 한 번 서는 것이 소원이었다. ‘지불한다는 단어 한마디를 종이 위에 휘갈겨 쓰기만 하면 수천 두카트가 쏟아져 나왔다. 빛나는 날개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어찌 경솔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144-145)

왕비에게는 적자 부인(Madame Defizit)’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다. 미국 독립전쟁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민주적인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궁정이나 왕, 귀족은 없고 오직 시민만이 있는 나라, 완전한 평등과 자유가 있는 나라를 말했다. 그리고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볼테르, 디드로의 저서에서 말하다시피 왕권은 결코 신이 부여한 유일한 정치체제가 아니었다. 존경심은 호기심으로, 두려움은 분노로 바뀌며 귀족과 시민들은 점점 확신했다.


(241)

오래된 비법: 국가나 정부는 내부적인 위기를 더 이상 통제할 능력이 없을 때, 외부 세계와의 긴장을 조성하면서 눈을 돌린다. 이 불변의 법칙에 따라, 혁명의 지도자들은 내란을 피하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요구했다. 헌법을 받아들이며 루이 16세의 왕권은 약화되었고 라파예트 같은 순진한 사람들은 이제 혁명은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입법의회를 지해하고 있던 지롱드당은 공화정을 바라고 있었다. 왕국을 아예 없애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쟁보다 더 좋은 수단이 없었다. 전쟁이 나면 왕실 가족과 국민을 완전히 갈라놓을 수 있었다. 최전선에는 시끄러운 왕의 두 형제가 나설 것이고, 적군은 왕비의 오빠가 지휘할 것이기 때문이다.


(254)

왕정과 공화정 사이에 마지막 결전이 일어난 이날, 튈르리 궁 앞 사람들 속에 젊은 소위 한 명이 서 있었다. 코르시카 출신의 장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누군가 그에게 자네는 언젠가 루이 16세의 후계자가 되어 이 궁전에서 살게 되리라 말했다면 바보 같은 소리라며 무시했을 것이다. 그는 마친 근무 중이 아니었기에 양쪽 진영을 예리한 눈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두세 발 대포를 쏘아대기만 하면 이 폭도들을 쓸어버릴 수 있을 텐데.’ 왕이 이 보잘것없는 포병 소위를 기용하기만 했다면 그는 파리 전체를 상대로 맞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왕궁 안에 나폴레옹처럼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공격은 하지 말고 단단히 버티면서 강력하게 수비하라!” 이것만이 병사들에게 내려진 명령이었다.


(266)

혁명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넒은 의미를 포괄하는 단어이다. 이 개념은 최상의 이상주의에서부터 현실적인 잔악함에 이르기까지, 위대함에서부터 무자비함에 이르기까지, 정신적인 것에서 폭력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며 변색됐다. 프랑스 혁명에는 두 부류의 혁명가가 있었다. 이상주의적인 혁명가와 복수심에 불타는 혁명가였다.


(295)

대체 언제 너는 진짜 네가 될 작정이냐?” 20년 전 절망에 빠진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이제 죽음을 눈앞에 둔 마리 앙투아네트는 스스로 존엄을 되찾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법 절차를 빠뜨리지 않으려는 심문자 푸키에 탱빌은 그녀에게 체포되었을 당시 어디에 살았냐고 묻는다. 그녀는 자신은 결코 체포된 것이 아니며 국민의회의 요청에 따라 탕플 탑으로 옮겨갔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본격적인 질문이 시작되었다. 왕비의 죄목은 혁명 이전부터 오스트리아의 국왕과 정치적인 관계를 맺은 것, 민중의 땀과 열매인 프랑스 재정을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해 반역자인 대신들과 공모하여 낭비한 것, 황제에게 돈을 보내 자신을 섬긴 백성들을 공격한 것 등이었다. 혁명 이후 프랑스에 대항하여 외국 밀사와 거래하고 남편인 국왕을 선동해서 거부권을 쓰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비난을 마리 앙투아네트는 강력히 부정했다.


(305-306)

사랑하는 아가씨, 이것이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입니다. 나는 방금 선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범죄자들에게 내려지는 치욕적인 선고가 아닌 당신의 오빠를 다시 만날 수 있는 안도의 선고입니다. 그분은 결백합니다. 나도 그분처럼 최후의 순간을 잘 처신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겠지만 나는 아주 평온합니다. 불쌍한 아이들을 남기고 떠나야만 한다는 것이 정말이지 마음이 걸리는군요.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아이들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다정하고 마음씨가 착한 아가씨, 당신을 위해서도 나는 살아왔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 온 당신을 담겨두고 떠나게 되다니! 재판의 변론을 통해서 내 딸이 당신과 떨어져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불쌍한 어린 것! 그 아이에게는 편지를 쓰지 않으려 합니다. 쓰더라도 전해지지 않을 테니까요.

이 편지가 당신에게 전해질지도 알 수 없습니다. 부디 아이들에게 나의 축복을 전해주세요. 신념을 지키고 의무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 서로를 신뢰하고 화합하면 행복해지라는 것을 가르쳐주세요. 아이들이 어떤 처치에 놓이더라도 서로 힘을 합하면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이 우리를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고통 가운데에도 우리들의 우정은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행복이란 친구와 함께 나눌 때 배가 되는 것이지요.

아들이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을 절대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훗날을 위해 다시 한번 말하자면, 우리들의 죽음에 복수할 생각은 절대 품지 말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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