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이 막걸리라면 그걸 그린 자화상은, 그나마 볼 만한, 증류식 소주 같은 거고 역사가 보리로 담근 발효주라면 소설은 그걸 증류한 위스키라고 할 수 있을 테죠. 히치콕이라는 영화감독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이란 지루한 부분을 오려 낸 인생이다. 영화가 인생을 그대로 옮겨 놓기만 한 거라면 사람들이 왜 그걸 보고 있겠어요? 더럽게 지루한데다 매일 신물나게 보고 겪는 게 그건데요. 저처럼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죠. 창밖의 소리가 아무리 싱그럽고 청량해도 그걸 그대로 옮겨 놓은 건 음악이 아니라는 걸요. 반대로 아무리 비싼 악기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해도 낯설고 기이하기만 한,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감정과 무관한 소리들 역시 음악이 아니죠. 그건 그냥 악기로 만들어 낸 소음일 뿐이니까요.


(8-9)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면 아무것도 겪지 않은 것과 다름없고, 아무것도 겪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과 다름없으니까요. 끝내주는 음악은 끝난 뒤의 침묵도 끝내주죠. 죽여주는 영화는 극장 불이 켜진 뒤에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잊어버리게 하고요. 음악이든 그림이든 영화든 소설이든 그제 제대로 된 작품이라면 체험을 만들어 내야 해요. 그게 아니라면 뭘 제대로 만든 게 아닌 거죠.


(17)

준연은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하나 마나 한 소리 같지만, 진실도 그 진실을 체험하는 것도 정말 중요해요. 한번 생각해 보자고요. 누가 자신이 죽는다는 걸 경험으로 알 수 있나요? 또 누가 태어남에 대한 기억이나 감각을 갖고 있나요? 우리는 태어났다는 것도 죽는다는 것도 이야기로만, 체험이 아니라 간접적인 증거로, 자료로만 알고 있어요. 시간도 마찬가지죠. 어떨 때는 1분이 한 시간 같지만 게임이라도 하면 사흘이 한나절 같잖아요. 그 두 가지 시간이 같은 건지, 다른 건지 우린 몰라요. 그저 같겠거니 생각할 뿐이죠. 태어남과 죽음에 대해서도 그러겠거니, 하듯이요. 사실 우리한테 발생한 어떤 사건보다 가장 크고 중요한 사건인데도 그렇죠. 준연은 나를 보며 말했다. 우리는 우리한테 가장 중요한 것들을 실은 말로만, 추측으로만 알고 있어요.


(27)

좋은 사람이란 그 한 사람만 있어도 살 만하다 생각이 드는 사람이죠. 싫은 사람이란 그냥 생각하기도 싫은, 결국엔 우리와 무관한 사람들일 뿐이고요. 제 생각에, 분명한 건 이거예요.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살 수는 있지만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잘, 열심히 살 수는 없어요. 그게 우리가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이유고 그런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싫은 사람에게도 자지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게 밑진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싫은 사람을 만나고 겪어 봐야 좋은 사람이 왜 좋고 어떻게 좋은지 알 수 있으니까요. 또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싫은 사람은 대가고 좋은 사람은 목표죠. 좋은 사람, 싫은 사람이란 글자 수만 같을 뿐 사실 그렇게나 다른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67)

압도적인 풍경을 볼 때 풍경과 그 풍경을 보고 있는 아주 작은 자신을 함께 지각하게 되는 것처럼, 침묵과 그 침묵을 드는 내가 거기에 있었다. 이전에 준연이 말했던, 음악이 끝나고 달라진다는 침묵이 바로 이런 것임을 나는 실감할 수 있었다. 무음이 아닌, 음악에 빗질이 된 것처럼 정갈하고 가지런한 고요함. 거긴엔 침묵이 주기 마련인 두려움도 의심도 없었다. 오직 파고들 듯 깊숙이 간직되는 환희만이 있었다. 연주회장에서 우리를 포효하듯 환호하게 하고 열렬히 박수치게 만드는 환희. 어쩌면 우리는 이런 침묵을 듣기 위해 음악을 듣는 건지도 몰랐다.


(109-110)

내가 누군가와 연애를 했던 건 늘 그렇게 예쁨을 발견할 때였다. 내 기준에서, 연애란 예쁜 여자와 하는 게 아니었다. 예쁜 데가 있는 여자와 하는 게 연애였다. 객관적으로 예쁘건 말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예뻐 보이려는 것도 나는 싫은 쪽에 가까웠다. 멋있어 보이려는 남자가 결코 멋있지 않듯 예뻐 보이려는 여자도 결국에는 예쁘지 않았다. 남자든 여자든 자기가 어떻게 보일지 의식하는 사람과 하는 대화는 금세 지루해졌고 대화가 지루하면 외모도 지루해졌다. 나이가 들수록 더 그랬다. 술자리가 끝나기도 전에 한창 술에 취해 있을 때조차 내가 왜 여기 앉아 이 술값과 시간을 버리고 있나 싶어졌다. 지금 내 앞에 있는 하진은 아니었다. 계속 얘기하고 싶은 여자, 웃게 해 주고 싶고 나를 웃게 해 주는 여자였다. 아무리 웃고 예기해도 지치지 않을 것 같은, 오히려 더 웃고 얘기하고 싶어지는 여자.


(127-128)

하진의 말대로 그때는 몰랐다. 어렸기 때문에 모르는 건 많고 아는 건 적었지만, 생각은 늘 반대였다. 다 안다고, 내가 아는 걸 사람들은 모른다고 생각했다. 실상은 사람들이 아는 걸 내가 모르는 것이었는데, 뭔가를 안다는 건 나만 안다고 게 아니라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조금 더 안다는 뜻에 불과한데도.


(137-138)

어렸을 때는 어른이 되면 모든 게 쉽고 가벼워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건 하나도 없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문제들은 어렵고 복잡해졌다. 가진 것도 지킬 것도 적은,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가 늘 더 쉽고 더 가벼웠다. 똑 같은 외도라도 연애할 때는 바람이지만 결혼하고 나면 불륜이 되듯.


(178-179)

친구와 연인이 다른 것 같지만 진실한 의미일 때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연인이란 내가 이성을 발견한 타인이었다. 친구란 내가 나 자신을 발견한 타인이었다. 친구는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연인은 이성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195-196)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실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준연이 말했다. 꿈과 이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라고요. 현실과 반대라거나 동떨어진 거라고들 생각하지만, 꿈이나 이상이 없다면 현실은 점점 더 시궁창이 될 수밖에 없고 또 현실이 온전하지 않으면 꿈이나 이상도 건강할 수가 없잖아요. 가난하고 못살았기 때문에 다들 희석식 소주밖에 마실 게 없었고 그래서 술이라고 하면 그런 소주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처럼요. 더 나은 건 늘 있어요. 현실에 아직 없기 때문에 꿈이나 이상이라는 망원경으로 볼 수밖에 없을 뿐이죠.


(214)

우리는 한 인생에서 오직 한 사람만 될 수 있어요. 인생은 하나고 우리의 시간은 하나니까요. 우리는 다 매여 있어요. 속박당해 있죠. 인생에, 시간에요. 그걸 벗어나려고 하면 방종이고 망상인 거고 거기에 갇히려고 하면 감상(感傷)이고 자박(自縛)인 거예요. 우리는 속박 안에서 생각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해요. 벗어나려 하지도 갇히려 하지도 않은 채로요. 그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속박이라는 뜻이죠. 어떤 속박을 선택하느냐가 우리의 자유예요.


(223)

우리에게, 남자들한테 사랑을 가르쳐 주는 건 늘 여자라고요. 안아 주고 보살펴 주는 최초의 어머니로서, 또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는 사람으로서도, 늘 여자들이 우리에게 사랑을 느끼게, 보여 주고 일깨워 주죠. 여자들이 아니라면 우리가, 남자가 사랑이라는 걸 알 수 있을까요? 애초에 우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잖아요.


(270)

맞아. 배부른 소리야. 하지만 배가 부르니까 해야 하는 소리지. 배가 부르다고 만족할 수 없는 게 우리니까. 인간이란 먹고 살기 위한 존재에 그쳐지지가 않으니까. 우리한텐 좋은 술이 필요해. 좋은 집, 좋은 차, 외식도 하고 드레스도 입어야 돼. 그래야 살았다가 아니라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으니까, 먹고 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 인간답게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건, 남들보다 더 많이 먹고 마시는 게 아니라 더 좋은 걸 먹고 마실 때니까. 물론 없어도 먹고사는 데아무 지장 없지. 하지만 그것뿐이면 우리가 먹고살기만 하는 존재 같아지는 거야.


(280)

살아 있는 것이라서 아름답다는 건, 사라지는 것이라서 아름답다는 뜻이기도 해. 이렇게 생생하고 울창하게 살아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메마르고 작아지겠지. 음악도 그래. 아름답지만 오직 만들어지는 그 순간에만 존재했다가 끝나면 사라져. 술도 아름다워. 솔직하고 속 깊은 얘기들, 울고 웃는 것들이 다 비워지는 술병과 함께 사라지지. 아름다운 건 다 살아 있고, 사라지는 것들이야. 그래서 우리는 그걸 만들지. 만들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으니까. 오직 사라지기만 할 테니까. 만든다는 건 사라진다는 걸 받아들인다는 뜻이기도 해. 거기에 만든다는 것의 아름다움이 있는 거지.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만든다는 것만큼 살아 있다는 걸, 사랑한다는 걸 증거하는 건 없으니까. 사람들은 아름다움이 무용하다고, 쓸모없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의 쓸모와 유용함을 일깨워 주니까. 우린 아름다운 걸 좋아해. 아름다운 걸 사랑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아름다운 걸 만들 수밖에 없지.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 그게 우리의 능력이야. 다른 어떤 생물에게도 없는, 오직 신만을 닮은 우리의 능력.


(293)

이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 흔히 <월광 소나타>라고 하는 곡이에요. 들어 본 적 있어요? 준연이 말하며 비장한 느낌의 셋잇단음표를 연주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유명한 곡이었다. 준연이 나를 보고 말했다. 이건 죽음의 선율이에요. 다가오는 죽음, 피할 수 없는 죽음, 억울하고 비통한 죽음이죠. 제 마음대로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베토벤이 모차르트에게서 빌려 온 선율이에요. 모차르트 오페라에 그렇게 나오거든요. <돈 조반니>에서 기사단장이 살해당할 때 거의 똑 같은 선율이 현악으로 연주되죠. 그리고 베토벤도 이 곡을 쓸 무렵 청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어요. 그런 음악가로서 죽음을 의미했죠. 역시나 다가오고 피할 수 없는, 억울하고 비통한 죽으미요.


(296)

음악 안에서는 아무것도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규칙이 있을뿐 모든 게 상대적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곡을 쓴다는 건 음표 하나하나가 아니라 이런 맥락들을 엮고 쌓아올린 총체적인 구조고요. 거기서 가지 위에 잎이 돋듯 음표들이 자라나는 거예요. 음들은 300년 전에도 있었고, 2000년 전에도 그보다 훨씬 오래전에도 이미 있었어요. 음악이라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표기법, 악기, 작곡법, 연주법 같은 것에 따라 발견되고 발전해 왔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맥락과 구조를 만들어 내는 게 한결같이 곡을 쓰는 사람의 몫이고 노동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았어요. 시대나 사조마다 달라지는 것도 음악이나 음들이 아니라 이런 맥락과 구조에 대한 것일 뿐이죠.


(346)

사랑은 인정이고 긍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 죽음에 반항하는 방식이었다. 사랑하고 있을 때, 단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을 열렬히 실감할 때, 죽음은 단지 침묵에 불과해진다. 하진의 연주가 끝났을 때 들였던 그 의심도 두려움도 없고 외로움마저 없는 침묵. 사랑은 환상이나 감상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것 없이도 사랑은 이미 사랑이었고 절실히 필요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만으로, 허기를 채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까. 살아 있다는 걸 실감할 때 죽음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니까. 자식들이 커 간다는 그 실감 속에서 부모들이 다 그런 거지, 한마디로 자신들의 늙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듯. 그 긍정, 인정이 슬프면서도 기쁜 것이듯 사랑도 기쁘고 그래서 슬펐다. 모두, 모든 것이.


(381-382)

최악이라는 건 생각하자면 끝이 없어. 우리 벌써 거기에 대해서는 얘기했잖아. 진짜 최악의 의미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뜻이고 뭐라도 할 수 있는 게 아직 있다면 최악은 아니야. 그러니 최악이란 늘 접어 놔야 하는 거지. 할 수 있는 건, 언제 어디서든 늘 있어. 그게 없다면 어차피 안 되고 안 될 거, 그냥 불운이고 불행일 뿐이야.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런 건 그저 마음과 시간을 스스로 좀먹는 짓일 뿐이지. 거기에 붙들리면 아무것도 해 나갈 수가 없어. 할 수 있는 만큼만, 그걸 피하고 대비할 만큼만 하게 되니까. 일이란 건, 그렇게 하는 게 아냐. 방어가 아니라 공격이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해야 하는 걸 해야 되는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일이 요구하는 걸 해야 하고, 그걸 할 때까지 해내는 거야. 그래야 성장이라는 게 되는 거니까, 그래서 성장이라는 게 힘든 거고. 하진은 진지하게 나를 봤다.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아니라 해내야 하는 걸 하는 거, 그게 일이야. 그걸 알면 할 수 있어. 죽고 사는 일도 아니고 다들 그렇게 뭔가를 해내니까.


(488-489)

아버지가 말했다. 세상만사 다 길이 있는 법이다. 왜냐하면 다들 이렇게 길을, 누가 봐도 아무 쓸 데 없는 길을 뚫어 놓으니까. 이렇게 뚫어야 알뜰살뜰 여기저기서 기름칠해 주는 사람이 생기거든. 시키지 않아도 똥 치워 주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우습지. 크고 빳빳한 기름종이들 살랑살랑 흔들어 주면 다들 혓바닥 내밀 듯 손을 내밀지. 아버지는 나를 봤다. 인간이란 다들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죄 한두 개쯤은 지어 가면서 사는 거다. 어느 자리쯤 올라서면 짓지 않을 도리도 없고, 짓지 않을 이유도 없지. 감당할 수 있으니까. 감당이 되면 죄가 아니니까. 감칠맛이 돌지. 남들 다 하는 거 하면서, 지키라는 거 지켜 가면서 남들 안 볼 때 한번씩 혀를 낼름, 낼름해서 핥아 보는 그맛이 혀에 감겨서 잊히질 않거든. 그럴 때야 사는 거 같으니까, 사는 맛이 그거니까. 남들 못하는 걸 나만 할 때, 남들 모르게 나만 아는 걸 하는, 바로 그때.


(500)

무엇을 사는지(購買)가 어떻게 사는지(生活)고 살 수 있는 능력이 살 수 있는 능력이다. 아버지는 톡톡 시가를 떨어 재떨이에 떨어진 재를 시가 끝으로 부쉈다. 그러고는 끄트머리를 세워 내게 보였다. 여기 있는, 요 타고 있는 까만 재, 이게 우리 인간이야. 그 가운데에 빨갛고 뜨거운 불이 세상이지, 불가에서 말하는 아수라. 아버지가 깊게 한 모금을 빨자 빠직거리며 담뱃잎이 타 들어갔다. 가운데가 빨갛게 환해졌다.


(566)

마음이라는 건 세면대 같아요. 거기엔 뭘 붓든 모두 한곳으로 흘러 들어가죠. 우리 자신이라는 그 구멍으로요. 하지만 그 구멍이 이어지는 곳은 결국 하수구, 하수도예요. 썩어 가고 악취를 풍기고 끈적거리고 질척거리는, 토악질 나는 것들밖에 없죠. 거긴 우리한테 묻은 더러운 걸 씻어 내는 데지 우릴 욱여넣어서 더러워지는 데가 아니에요.


(659)

사랑의 본연이 그런 것이기 때문에 사랑은 다른 사랑과 비교당하지도 평가당하지도 않았다. 가장 좋은 것, 값비싼 걸 해 주는 게 사랑이 아니니까, 최악을 지워 주고 최악이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 모든 수고를 다해 마지막까지 같이 있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니까, 같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게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의미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일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사람이 된다는 건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 믿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뜻이니까. 그게 늘 하진에게 해 주지 못한 것, 그래서 매번 틀리고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사랑한다면서도 이해하는 만큼만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만큼만 믿으려 했으니까. 그래서 그건 이해도 믿음도 아니었다. 알던 만큼만 아는 건 앎이 아니니까, 모르던 걸 아는 앎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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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노트르담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4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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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 그럼 오늘은 <파리의 노트르담> 2권을 이야기해줄게. 1권에서 카지모도가 라 에스메달라를 납치해갈 때 구해주었던 사람이 있었잖아. 기억나니? 그 사람은 중대장 페뷔스라는 사람이야. 페뷔스는 약혼녀와 약혼녀의 친구들과 베란다에 있다가 라 에스메달다가 춤추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약혼녀와 약혼녀의 친구들은 페뷔스에게 그 춤추는 이집트 아가씨를 불러서 이쪽으로 오라고 부탁했어. 그녀들은 에스메랄다를 조롱하고 놀리고 싶었거든.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부르는 페뷔스를 보았단다. 자신을 구해주었던 사람이란 걸 알았어.

사실 에스메랄다는 페뷔스가 자신을 구해준 이후 페뷔스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단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불렀으니, 얼마나 떨렸을까.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반려 동물인 염소 잘리를 데리고 페뷔스에게 갔단다. 며칠 전 밤에 구해주었을 때 에스메랄다의 얼굴을 제대로 못 봤던 페뷔스는 이제서야 에스메랄다를 제대로 보고 호감을 가졌단다. 하지만 집시인 에스메랄다를 진심으로 사랑할 생각은 없었단다. 그것도 모르는 에스메랄다는 페뷔스도 자신을 사랑하는 줄 착각하게 되었어. 그런데 에스메랄다가 광장에서 춤추고 있던 모습을 노트르담 성당 꼭대기에서 몰래 훔쳐보고 있던 이가 있었어. 바로 클로드 부주교란다. 버려진 아이 카지모도를 데려고 와서 키워준 클로드 부주교. 그는 에스메랄다와 어떤 사이길래, 1권에서는 납치를 하려고 했고, 또 에스메랄다의 춤을 몰래 보고 있는 것일까.

클로드 부주교는 우연히 그랭구아르를 만나게 되었어. 그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거든. 그랭구아르는 거지 소굴인 기적궁에 잡혔다가 에스메랄다와 형식적이지만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지금은 거지들과 함께 지낸다면 최근 자신의 안부를 이야기를 했어. 그러자, 클로드 부주교는 격분을 했어. 어떤 부분이 클로드 부주교를 격분하게 했냐고? 바로 에스메랄다와 결혼했다고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야. 클로드 부주교는 에스메랄다 이야기만 나오면 예민해지고 감정이 격해졌단다. 어느날 클로드의 망나니 동생 장이 돈을 빌려달라고 찾아왔단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 장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어 답답하지만, 그의 부탁을 안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었어. 돈을 주고 돌려보냈지. 그렇게 얻은 돈으로 장이 하는 것은 술집에 가서 술을 먹는 것.. 장은 페뷔스와 알고 지내고 있었어. 둘이 함께 만나 술도 먹었단다.


1.

에스메랄다는 페뷔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이후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어. 결혼을 하게 된다면 페뷔스와 하고 싶어했어. 페뷔스도 에스메랄다를 가끔 만났단다. 하지만 페뷔스는 그냥 즐기기 위해 만나는 것이었어. 집시 아가씨와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 에스메랄다는 이제 열여섯 살로 순진하고 사람 볼 줄도 모르고페뷔스와 에스메랄다가 데이트를 하다가 포옹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클로드 부주교가 나타나서 페뷔스의 등과 목을 찌르고 도망갔단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고, 놀란 에스메랄다는 정신을 잃었어.

경찰이 그 현장에 들이닥치고, 에스메랄다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에스메랄다는 살인자가 되어 있었어. 괴한이 침입을 했고, 자신이 괴한의 얼굴을 보았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아무도 에스메랄다의 말을 믿지 않았어. 결국 에스메랄다는 페뷔스를 죽인 죄로 재판까지 받게 되었단다. 재판장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클로드 부주교였단다. 에스메랄다는 클로드 부주교를 알아보았지만, 그녀의 말을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자신이 결백하다고 계속 이야기를 했지만, 고진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페뷔스를 죽였다고 거짓 자백을 했단다. 거기에 에스메랄다는 마녀라고 판결받았단다.

유럽의 중세시대에는 마녀사냥이라고 해서, 기독교 교리와 어긋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 특히 여자들을 마녀로 몰아 죽인 일이 있었어. 에스메랄다도 마녀로 지목되어 판결되었단다. 에스메랄다의 반려 동물인 염소 질다가 재주가 많은데, 그것이 마녀인 에스메랄다가 마법을 썼기 때문이라고 했어. 마녀로 판결을 받으면 교수형을 받아야 했단다. 그렇게 에스메랄다는 감옥에 갇히게 된단다.

….

감옥에 갇힌 에스메랄다를 찾아온 클로드 부주교. 지금까지 클로드 부주교가 에스메랄다에게 보였던 행동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스토킹 같은 짓들이었어. 클로드 부주교는 왜 그런 일들을 했을까. 클로드 부주교는 신학이 독실한 사람이었어. 평생 신부로 살아가기로 마음 먹었지. 그런데 어느날 에스메랄다를 보고 자신의 마음이 심하게 흔들렸단다. 에스메랄다를 깊이 사랑하게 된 거지. 클로드 부주교도 괴로워했어. 평생 신학과 함께 살려고 했는데, 사랑이라니자신이 이런 모습에 정신이 혼미해졌어. 감옥에 갇혀 있는 에스메랄다를 찾아와 이런 이야기들을 했단다. 그러면서 지금이라도 자신이 에스메랄다를 탈출시켜줄 수 있다면서 자신과 함께 살자고 했어. 클로드 부주교는 에스메랄다와 함께 한다면 신학도 버릴 수 있었던 거야.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클로드가 페뷔스를 죽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런 클로드와 함께 할 수 없었지. 그를 경멸했어. 클로드는 에스메랄다를 결국 구해주지 않았단다. 에스메랄다가 자신의 뜻에 동의했다면 신학을 버리고 살아가려고 했고, 만약 에스메랄다가 자신의 뜻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에스메랄다를 죽게 나둘 생각이었단다. 에스메랄다가 죽는 것은 마음 아프겠지만, 그렇게 되면 다시 신학에 몰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야. 클로드 부주교는 완전 사이코패스 스토커였구나.


2.

에스메랄다가 교수형에 처하는 날이 되었어. 그레브 광장에서 진행되었단다. 클로드는 신부 자격으로 참가하였고, 에스메랄다에게 다시 한번 권유를 했단다. 자신을 사랑해준다면 살려줄 수 있다고 말이야. 그런데 그때 에스메랄다는 멀리 한 저택의 발코니에서 페뷔스를 보았단다. 죽은 줄 알았던 페뷔스가 그곳에 있었어. 사실 페뷔스는 살아 있었단다. 클로드에게 찔려 중상을 입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고 몇 달 치료를 받고 다시 회복을 한 거야. 에스메랄다는 당연히 페뷔스가 자신을 구출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페뷔스는 에스메랄다과 마주쳤던 눈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단다. 이에 에스메랄다는 배신감에 큰 충격을 받았단다. 이제서야 페뷔스의 거짓 사랑을 알게 된 거지.

이제 에스메랄다는 죽을 일만 만났어. 그런데 교수형 직전에 카지모도가 나타나서 에스메랄다를 납치해서 도망갔어. 에스메랄다를 데리고 노트르담 성당으로 피신했단다. 당시 성당 안은 성역으로 죄수들이 성당 안에 있어도 잡아가지 못했어. 하느님의 보호하고 있는 곳이니까 말이야. 그래서 카지모도는 에스메랄다를 그곳을 데리고 온 거야.

1권에서 형벌을 받고 있는 카지모도를 모두 무시하고 조롱했는데, 에스메랄다만이 카지모도에게 물을 전해주었잖니. 카지모도는 아마 그때부터 에스메랄다를 진심으로 사랑했을 거야. 그래서 에스메랄다를 구출해서 노트르담 성당으로 피신할 생각까지 한 거지. 에스메랄다는 성당 안에 있었지만, 그 밖을 나갈 수는 없었어. 나가면 곧장 잡히니까 말이야. 어쩌면 성당이 아니라 감옥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겠구나.

정신을 잃었던 에스메랄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카지모도를 보고 깜짝 놀라 다시 정신을 잃을 뻔 했어. 에스메랄다는 카지모도를 두려워했고, 시선을 피했어. 그러면서 자신을 죽게 놔두지, 왜 구해주었냐고 울면서 말했어. 카지모도는 자신도 예전에 도움을 받아서 그렇게 했다고 했어. 사랑, 이런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단다. 에스메랄다는 성당 안에 머물면서 안정을 찾아갔어. 자신을 싫어하는 것을 알고 카지모도는 에스메랄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단다. 할 말이 있을 때는 문 밖에서 이야기를 했어. 에스메랄다가 자고 있을 때만 와서 잠자고 있는 에스메랄다를 바라보았지.

에스메랄다는 페뷔스가 자신을 외면했지만,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카지모도는 페뷔스를 찾아갔단다. 페뷔스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에스메랄다를 만나러 가자고 했지만, 페뷔스는 거절했단다. 에스메랄다가 마음 아파할까 봐 카지모도는 페뷔스를 만나지 못했다고 이야기했단다.

클로드 부주교도 에스메랄다가 노트르담 성당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되어 찾아왔단다. 더는 참지 못하고 에스메랄다를 겁탈하려고 했어. 에스메랄다는 카지모도가 준 호각을 힘껏 불었단다. 그 호각은 에스메랄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불라고 카지모도가 준 것이거든. 카지모도가 귀머거리이지만, 높은 호각 소리를 들을 수 있었어. 카지모도는 호각소리를 듣고, 에스메랄다에게 달려왔는데, 에스메랄다를 겁탈하려는 사람이 있는거야. 그 사람을 공격하고 죽이려고 했는데, 그 사람이 자신의 스승인 클로드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 카지모도는 잘못을 했다면서 사죄를 했단다. 카지모도에게 클로드는 절대적인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에스메랄다가 더 중요한 사람일지도 몰랐어. 심한 갈등을 하는 카지모도.


3.

클로드는 아직도 에스메랄다를 포기하지 않았어. 언제까지 에스메랄다가 성당 안에 있을 수도 없을 거라 생각했어. 기적궁이라고 하는 거지 소굴에 있던 그랑구아르에게 이야기하여 노트르담 성당을 공격하게 했어. 그랭구아르는 기적궁의 리더인 클로팽에게 이야기하기를, 에스메랄다도 원래 기적궁 소속이었으니, 그녀를 구해주고 노트르담 성당에 보물도 훔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했어.

이에 클로팽을 일당들을 데라고 노트트담 성당을 공격했단다. 이 공격에 클로드의 동생 장도 참여했단다. 카지모도는 노르트담 성당을 공격하는 기적궁 사람들이 적인 줄 알고 열심히 싸웠단다. 그 와중에 장은 죽고 말았어.

어수선한 틈에 그랭구아르와 클로드는 에스메랄다를 성당에서 빼갔단다. 클로드는 다시 한번 에스메랄다에게 자신을 사랑해 준다면 살려줄 수 있다고 설득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죽음보다 싫다는 대답이었어. 클로드는 다시 그녀를 경찰에 넘기기로 한단다. 경찰을 불러오는 동안 클로드는 에스메랄다를 귀딜 수녀에게 잠시 맡겨주었어.

1권에서 귀딜 수녀 이야기했었는데, 기억나니? 본명은 파게트이고 자신의 어린 딸을 이집트 집시에게 빼앗긴 이후 이집트 집시들을 경멸하던 사람. 클로드의 부탁을 당연히 들어주었어. 에스메랄다는 이집트 집시 아가씨였으니 말이야. 그런데 에스메랄다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죽은 줄 알았던 자신의 딸이었던 거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기 신발 한 짝의 다른 쪽을 에스메랄다를 가지고 있었단다. , 이런 운명이….

귀딜 수녀는 에스메랄다가 경찰에 잡힐 위험에 빠진 것을 알고 숨겨 주었어. 그리고 클로드와 헌병대가 도착했을 때, 에스메랄다가 도망을 갔다고 했단다. 아빠도 제발조마조마하면서 읽어났단다. 귀딜 수녀의 에스메랄다 숨기기는 거의 성공할 뻔했어. 헌병대에 함께 온 페뷔스의 목소리가 들려 오기 전까지는 말이야. 페뷔스의 목소리를 들은 에스메랄다는 반가운 마음에 뛰어나갔지만, 에스메랄다는 헌병에 붙잡히고 말았단다. 귀딜 수녀는 엄마의 마음으로, 에스메랄다를 구해보려고 헌병대에 매달리다가 내동댕이쳐져서 그만 뇌진탕으로 죽고 말았단다. 그리고 결국 에스메랄다도 교수형에 처해져서 적었어. 에스메랄다를 지켜보며 기뻐하던 클로드 부주교. 그런 클로드를 보고 분노한 카지모도를 클로도를 종탑에서 밀어 떨어뜨렸단다. 그렇게 클로드도 죽고 말았단다. 그리고는 카지모도도 사라졌어.

….

세월이 흐르고 사형수들의 시체를 보관하는 납골당. 그 안에 꼭 껴안은 두 사람의 뼈가 발견되는데,

하나는 교수형을 당한 사람의 뼈이고, 나머지 하나는 등이 굽은 꼽추의 뼈였단다. 카지모도는 죽은 에스메랄다를 꼭 껴안고 자신도 죽은 것이란다.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단다.

아빠는 <파리의 노트르담>이런 줄거리의 소설인 줄 처음 알았단다. 예상 밖의 줄거리구나. 지은이 빅토르 위고의 또 다른 명작 <레 미제라블>의 뜻이 불쌍한 사람들인데, <파리의 노트르담>에도 불쌍한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구나. 카지모도도 불쌍하고, 에스메랄다도 불쌍하고, 에스메랄다의 엄마인 파케트 귀딜 수녀도 참 불쌍한 사람이구나. 클로드 부주교의 빗나간 사랑만 아니었다면, 위 세 사람의 운명이 그렇게 비극적이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소설을 읽다 보니, 지난 여행에서 본 파리의 노르트담 성당이 다시 생각났어. 몇 년 전에 정신 나간 방화범에 의해 많은 부분이 불타서, 여전히 복원작업 중이지만 말이야. 다행히 앞쪽의 석조건물은 피해를 입지 않아서 그 위상을 볼 수 있었잖니. 그렇게 아픈 역사를 갖게 된 노트르담 성당에는 여전히 많은 관광객들이 있더구나. 나중에 기회가 될 지 모르겠지만, 노트르담 성당이 다 복원이 되고 나면, 내부에도 한번 들어가 보고 싶더구나. 파리 여행 기념으로 읽었던 <파리의 노트르담> 많은 늦었지만, 그래도 여행도 다시 한번 떠오르게 해서 좋았단다.


PS,

책의 첫 문장: 여러 주일이 흘러갔다.

책의 끝 문장: 그가 껴안고 있는 송장에서 그를 떼어내려고 하자, 그것은 먼지가 되어버렸다.


중세에는, 하나의 건물이 완전한 경우에는, 땅속에도 바깥과 거의 같은 정도의 건물이 있었다. 노트르담처럼 말뚝 위에 세워져 있지 않다면, 궁궐이나 요새나 성당은 으레 이중의 토대가 있게 마련이다. 대성당에는, 밤낮으로 파이프오르간과 종소리가 울리고 불빛으로 넘쳐흐르는 지상의 홀 아래에, 낮고 캄캄하고 신비롭고 빛 없고 소리 없는, 말하자면 또 하나의 지하 대성당이 있었다. 궁궐이나 성에는, 감옥이 있었고, 때로는 분묘가 있었으며, 또 때로는 그 두 가지가 다 있었단다. - P159

신부는 숨이 막혀 또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러고 나서 계속했다.
"벌써 반쯤 홀린 나는 무엇엔가 매달려서 추락을 막으려고 해봤어. 나는 사탄이 이미 내 앞에 파놓은 함정을 생각했어. 내 눈 아래 있던 여자는 하늘이 아니면 지옥에서밖에 올 수 없는 그런 초인적인 미인이었어. 거기에 있는 것은 약간의 우리 흙으로 만들어진, 그리고 내면에서 여자의 넋의 가물거리는 빛으로 희미하게 밝혀진 하잘것없는 처녀가 아니었어. 그것은 천사였어! 그러나 암흑의 천사, 불꽃의 천사였어. 광명의 천사는 아니었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당신 옆에서 염소 한 마리가, 마술사의 야연의 짐승 한 마리가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어. 한낮의 태양은 그 염소의 뿔을 새빨갛게 만들어주고 있었어. 그때 나는 악마의 함정을 보는 듯했고, 당신이 지옥에서 왔다는 것을, 당신이 지옥에서 온 것은 오직 내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어. 나는 그렇게만 믿었어."
- P171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마음속을 파고 들어가면서, 자연이 거기에 얼마나 널따란 자리를 정열에게 준비해 놓았는지 보았을 때, 그는 한결 더 고통스럽게 비웃었다. 그는 자기 마음의 밑바닥에서 자신의 모든 증오를, 자신의 모든 악의를 휘저어 보고, 환자를 진찰하는 의사와 같은 냉철한 눈으로 그 증오는, 그 악의는 부패한 사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간의 모든 미덕의 원천인 이 사랑은 신부의 가슴 곳에서는 끔찍한 것으로 변한다는 것을, 그리고 자기와 같이 생긴 인간은 신부가 됨으로써 악마가 된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그는 소름 끼치게 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는, 자신의 숙명적인 정열, 결국 한 여자에게는 교수대를, 한 남자에게는 지옥을 가져다주어 그 여자는 사형수가 되고 자기는 영벌 받는 사나이가 되는 결과밖에 초래하지 못한 그 부식적이고 유독하고 증오에 넘친, 빙탄 같은 사랑의 가장 끔찍한 면을 생각하고는 다시 창백해졌다. - P225

여러분은 저를 가엾게 여겨주실 거예요. 네, 나리들? 이집트 계집들이 제 딸을 훔쳐 갔어요. 그년들은 십오 년이나 그 애를 감추고 있었어요. 저는 그 애가 죽은 줄로만 믿고 있었어요. 상상을 좀 해보세요. 좋은 친구 양반들, 제가 그 애를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는 걸 말이에요. 저는 십오 년간을 여기서, 이 지하실에서, 겨울에 불도 없이 지냈어요. 그건 참 힘든 일이에요. 이 조그맣고 가련한 사랑스러운 신짝! 제가 하도 울부짖었더니 하느님께서 제 소원을 들어주셨어요. 오늘 밤, 하느님은 제 딸을 돌려주셨어요. 하느님의 기적이지요. 제 딸은 죽지 않았어요. 여러분은 어 재를 제게서 뺏어 가지 않겠지요. 저는 확신해요. 그것도 저라면, 아무 말 않겠어요. 하지만 제 딸은 열여섯 살짜리 어린애라고요! 햇빛 볼 시간을 그 아이에게 남겨주세요! 저 애가 여러분에게 무슨 짓을 했다는 거예요? 전혀 아무 짓도 한 게 없어요. - P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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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본적인 인권과 자치권을 회복하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평화적, 법적 노력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수십 년간 냉소와 경멸로 일관하고 있고 국제사회는 무관심하거나 방관하는 상황에서,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사람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들은 선거를 통해서 권력을 잡은 가자지구의 합법적 통치세력이었다. 저항하는 테러리스트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토벌하겠다는 이스라엘의 식민정책 속에서 하마스전사들이 끊임없이 양성되고 있다.


(18-19)

정부는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는다. 정부가 만드는 정책이 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시민들이 폭넓게 개입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개입을 허용하는 틀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중요한 예를 들어보자.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는 농업, 농촌, 식품산업 기본계획은 농정에 있어서 유일한 종합적 중기적 계획이다. 그런데 이 계획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철저히 농림축산식품부의 집안일이었다. 국책연구기관이 연구용역의 형태로 기본적 틀을 만들었고 최종 단계에서 이른바 전문가들의 의견을 형식적으로 청취하기는 했지만 결국은 농림축산식품부의 자체 판단으로 만들어졌다. 계획의 수립 주체가 정부인 것은 법이 정하고 있는 바이지만, 문제는 그 과정이다. 5년간 농정의 기본적 틀을 만드는 일에 농민, 농촌 주민, 소비자, 환경에 관심을 가진 시민들은 의견을 표명할 기회조차 제대로 갖지 못하였다.


(51)

우리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한다. 민주와 공화의 개념을 합쳐놓은 것이다. 그런데 민주(民主, demokraita)와 공화(共和, res publica)는 기원과 담기는 내용이 서로 같지 않다. 기원에서, 전자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정치, 후자는 로마의 공화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내용에서는, 전자가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다소간 시민들 간의 불평등을 전제로 한 귀족공화정에서 유래한다.


(59)

아리스토텔레스도 공동체의 선을 중시하였으나, 그 선은 국가의 획일적 제도가 아니라 개인의 덕성에 의해 실천되는 것이었다. 그는 개인의 타고난 능력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 경제적 소유 등에서 불평등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불평등은 어디까지나 기능적인 적으로서, 사회적으로 부여되는 역할, 책무의 수행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불평등이 바로 정치권력의 지배, 피지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권력은 국가의 목적 실현을 위한 공동체적 기여에 비례해서 배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타자를 지배하는 배타적 특권이라기보다, 공동체를 위한 봉사를 동반하는 것이다.


(60)

민주정치의 핵심은 민중주권이며, 그것은 민중에 의한 정책 결정권과 결정 절차로서의 다수결을 원칙으로 한다. 현재 한국에서 민중주권을 현실화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담론이 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민중을 우매한 존재로 보고 민중이 직접 결정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며, 그래서 남달리 현명하고 도덕적인 사람을 뽑아 권력을 대신 행사하게 해야 한다는 대의제 담론이다. 둘째, 민중은 날 것 그대로서가 아니라 심사숙고하거나 교육과 훈련을 받아서만 올바른 결정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관점도 민중을 완결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지도자 혹은 어떤 다른 기제에 의해서 교도되어야 한다고 보는 점에서 대의제와 같은 맥락에 있다.


(111)

예술은 인간을 넘어서 모든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문학이 사람을 갑자기 변화시킬 수야 없겠지요. 그래도 문학은 끊임없이 인간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문학도 없고, 예술이 없다면 인간은 더욱 무서운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짐승과 다를 바가 없어질 것입니다. 저는 그런 맥락에서 이 시대 교육과 문화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오늘날 세계 어디에서나 문학을 비롯해서 교육과 문화가 타락하면서 인간이 대단히 왜소해졌어요. 뭔가 대중문화가 인간을 작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더 좋은 문학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36)

그린뉴딜은 최근 수십 년래에 등장했던 어떤 제안보다도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그것은 실업문제와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 전 국민에게 의료보험과 주거를 보장하고 학자금 대출을 탕감해주면서 전례없는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제안에는 장애물이 있다. 어떤 형태가 됐든 에너지를 생산하는 일은 자연과 인간 삶의 파괴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세계인의 삶의 질을 고양하면서 동시에 화석연료를 비롯한 에너지원의 사용을 줄이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진보적인 그린뉴딜이라면 에너지 삭감, 즉 에너지 보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에너지 사용 총량을 줄이는 것은 인류가 존속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173-174)

맞아, 애들이 안 움직이잖아요. 어제 TV를 보니까 서울시내 애들 중 놀 데가 없는 애들이 80%가 넘어요. 먹고 뛰어노는 게 기본인데 하루에 필요한 활동량을 계산한 게 있어요. 13세까지는 일일 활둉량이 2만보 이상이래요. 그래야 건강한 몸이 된답니다. 19세까지는 1 8,000보고, 어른들은 7,000보 이상이면 괜찮대요. 그런데 기분 좋게 걸을 데가 마땅치 않아요. 난 조금만 살펴보면 생명사회를 만들 수 있는 생활운동은 아주 쉽다고 봐요. 문제는 지나친 디지털화예요. 이런 연구결과가 있어요. 아이가 태어나서 5살이 될 때까지 4만 회 이상 질문을 해야 뇌가 정상적으로 발육이 된다. 그런데 온갖 디지털 기기가 아이들의 호기심을 차단하고 있어요. 애들이 자극적으로 빠른 것에만 반응을 해서 즉자적인 인간이 되어버린다고.


(198-199)

나는 물건을 파괴하지 않는 아류 러다이트주의자다. 다시 말해 멈춤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찰적 과작자의 질문, “다시 묻는다. 인공지능 그리고 그 다음을 이어갈 또다른 과학의 발전은 당연히 아니다이다. 과학 기술은 발전하면 할수록 인류는 불행하게 한다. 이익을 보는 이들은 지구를 버리고 화성에 가서 살고 싶은 극소수 자본가뿐이다.


(216)

그러나 윤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양곡법 개정안은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 농가소득을 높이려는 농정목표에도 반하고, 농업인과 농촌 발전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전형적인 포퓰리즘 법안이라며 시장의 쌀 소비량과 관계없이 남는 쌀을 정부가 막대한 혈세를 들여 모두 사들여야 한다는, 남는 쌀 강제 매수법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에서는 대기업 미분양 아파트 구매하는 데는 혈세를 10~20조 원 들이면서 농민 쌀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혹독하냐?”고 항의했다. 실제로, 전국 곳곳의 미분양 아파트는 6만 가구에 육박하고, 이것을 정부가 사들이면 47조 원대에 이르는 주택도시기금(주택채권, 청약저축, 세금전입 등으로 구성)이 거론된다.


(239)

어느 인터뷰에서 현기영은 이렇게 말한다. “역사는 제주 4.3 3만의 피해 통계로 쓰지만, 문학은 3만의 개개 사건으로 보는 거다라고, 얼마나 엄청난 선언인가. 3만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의 죽음이 제주 곳곳에서 3만 번 벌어진 것이라니. 그는 이 같은 자신의 신념을 작품 속에 그대로 투영하여 등장인물들이 각기 다 개별적으로 자기역할을 수행하도록 세심하게 배려한다. 이창동 감독이 추천사에, “수많은 개인들의 삶과 목소리와 내면을 담아내는 섬세하고 인간적인 시선이라고 표현하면서, “읽는 내내 숨이 뜨거워지면서 거장의 숨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고 적었는데, 이는 결코 과찬이 아니다. 현기영은 최선을 다해 작품 속 인물들에게 독자성을 부여한다. 하나의 세계가 스러진 게 아니라, 3만 개의 세계가 그때 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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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불교에서 인간은 부처를 숭배해야 하지만 동시에 인간도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칙적으로 부처의 눈으로 보아야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눈으로 볼 수도 있다는 가르침, 종교로서는 정말 개운치 않은 종교가 불교입니다. 분명한 것은, 승려들에게 복이 있으려면 중생들은 부처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면, 중생들이 사찰을 찾아 시주할 일도 없을 테니까요.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되면 붕괴되는 종교! 탄생할 때부터 그 내부에 시한폭탄을 장착했던 종교! 그것이 불교입니다. 시한폭탄의 초침이 돌아가고 있다는 긴박감 때문인지, 종교성과 함께하는 불교의 인문성은 더 극적인 데가 있습니다.


(39-40)

정주가 대답했다. “지금까지 나는 드러난 것을 지키며 나 자신을 잊으려 했고, 혼탁한 물을 보며 맑은 연못에 매료되어 있었다. 게다가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이미 그 사회에 들어가서는 그곳의 규칙을 따르라고 하신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얼마 전 조릉에서 노닐 때 나는 나 자신을 잊었다. 기이한 까치가 이마를 스치고 날아들었을 때 나는 밤나무 숲에서 노닐며 나의 실제상황을 잊었다. 아니나 다를까, 밤나무 숲을 지키던 사냥터 관리인은 나를 범죄자로 여겼다. 이것이 내가 마음이 편하지 않은 이유다.”


(74)

어쨌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주변에 존재하는 사람이나 사물 혹은 사건들과 제대로 관계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겁니다. 자신감을 상실한 그는 집 밖으로 나가기를 피할 테니까요.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그래서 타자나 사건과 마주치지 않는다면, 그래서 타자나 사건과 마주치지 않는다면, 그는 새로운 삶을 만들 수 없습니다. 50대 중년은 20대의 젊음에 집착하느라 지금 여기(now & here)’ 50대의 삶을 허비하고 있는 겁니다.<대종사> 편의 현해 이야기가 이 중년에게 힘이 될지도 모릅니다. 세상에는 없는 것은 없고 오직 있음만 있다는 걸 가르쳐주니까요.


(85)

공수가 선을 그리면 양각기와 곱자에 부합했고, 그의 손가락은 사물에 따라 변할 뿐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영재(靈臺)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만 막혀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발을 잊는 것은 신발에 딱 맞은 것이고, 허리를 잊는 것은 허리띠에 딱 맞는 것이다. 앎에서 옳고 그름을 잊는 것은 마음에 딱 맞는 것이고, 내면의 변화도 없고 외부 사람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은 마주친 사태에 딱 맞는 것이다. 처음으로 딱 맞았지만 일찍이 딱 맞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느끼는 것은 딱 맞음의 잊음에 딱 맞는 것이다.    <달생>


(87)

장자에게 ()’, ‘()’, 혹은 ()’ 등은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세 개념은 모두 마음을 대상으로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잃어버리고, 마음을 잊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불교를 제외하고 동서양 사유의 전통과는 어딘가 이질적인 주장입니다.


(125)

어쩌면 장자도 수레와 맞서던 사마귀였는지도 모릅니다. 폭주하는 전거와 그것이 남긴 바퀴 자국 바깥에 거대한 초원과 우거진 산림이 있다는 걸 아는 순간, 장자는 대붕이 됩니다. 물론 그곳에서도 위험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여유와 당당함으로 충분히 살아낼 수 있는 정도입니다. 국가를 너무 과대평가하지 말고, 폭풍우나 산불 혹은 맹금 정도로 보아야 합니다. 천하로 상징되는 국가 질서쯤은 가볍게 날아 넘어가는 대붕의 길입니다. 바퀴 자국에도 잠시 머물고, 수레 위에도 잠시 머물고, 아니면 끝이 보이지 않는 먼 어딘가에도 머물 수 있는 대붕입니다. 수레에 잠시 날아든 대붕은 타인을 자유롭게 만들 수 없다는 걸 압니다. 그저 자유로운 삶을 보여주며 그들이 자유를 결단하기를 바랄 뿐! 잠시 뒤 대붕은 그 광막한 초원으로 바람만 남긴 채 날아갑니다.


(203)

(羿)는 아주 작은 표적이라도 활로 맞추는 데 능숙했지만, 사람들이 자기를 찬양하지 않도록 하는 데는 서툴렀다. 성인은 자연적인 것()’에 능숙했지만, ‘인위적인 것()’에는 서툴다. 자연적인 것에도 능숙하고 인위적인 것에도 잘 대처하는 것은 오직 완전한 인간(全人)’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오직 벌레만이 벌레일 수 있고, 오직 벌레여야 자연적일 수 있다. 완전한 인간은 자연적인 것을 싫어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자연적이라고 여기는 것도 싫어하는데, ‘나는 자연적인가? 아니면 인위적인가?’라는 의문에 대해서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경상초>


(229)

젊은 내가 나이고, 사지가 멀쩡한 내가 나이고, 살아 있는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게 바로 장자가 말한 헛된 꿈입니다. 이런 자의식은 늙음을 젊음의 부재로, 불구가 정상의 부재로, 죽음을 삶의 부재로 느끼게 됩니다. 늙음은 늙음으로, 불구는 불구로, 그리고 죽음은 죽음으로 긍정해야 합니다. 물론 젊음을 늙음의 부재로, 정상을 불구의 부재로, 삶을 죽음의 부재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젊음은 젊음으로, 정상은 정상으로, 삶은 삶으로 긍정해야 하니까요.


(250)

장자가 복수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초나라 왕은 두 사람의 대부(大夫)를 먼저 보내 그에게 말을 전했다. ‘국가 안의 모든 일을 선생에게 맡기고자 합니다!’ 장자는 낚싯대를 쥐고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초나라에 죽은 지 이미 3000년이나 된 신령한 거북이 있는데, 왕이 이것을 상자에 넣고 비단보에 싸서 묘당(廟堂) 안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내가 들었습니다. 이 거북은 죽어서 뼈를 남겨 귀하게 되기를 원했을까요, 아니면 차라리 살아서 진흙탕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원했을까요?’ 두 사람의 대부는 말했다. ‘차라리 살아서 진흙탕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원했을 테지요.’ 장자가 말했다. ‘그만 돌아가시오! 나는 앞으로도 진흙탕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닐 것이오.’”


(320)

덕이라는 것은 조화로움을 이룬 결과물입니다. 드러나지 않는 사람에게서 타자는 떨어져 나올 수가 없는 법이죠.” 누구와 있어 기뻤고 어느 곳에 있어서 상쾌했다는 것이 바로 덕이라는 설명이 인상적입니다. 매력은 기쁨과 행복의 흔적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애태타는 유목민적 심성을 갖춘 자유인입니다. 그 행복의 기억을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장소에 드러내지 않습니다. 과거에도 여물위춘했고, 바로 지금 여기에서도 여물위춘하는 사람이니까요.


(337)

장자가 곧 죽으려 할 때, 제자들은 장례를 후하게 치르려고 했다.

장자가 말했다. “나는 하늘과 땅을 관곽으로, 해와 달을 한쌍의 옥으로, 별들을 다양한 구슬로, 그리고 만물을 부장품으로 생각하고 있네. 내 장례용품에 어찌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무엇을 여기에 더 보태려 하는가!”

제자들이 말했다. “저희는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을 쪼아 먹을까 두렵기만 합니다.”

장자가 말했다. “땅 위에서는 까마귀와 솔개의 먹이가 되고, 땅 밑에서는 땅강아지와 개미의 먹이가 되는 것이네. 그런데 까마귀와 솔개의 먹이를 빼앗아 땅강아지나 개미에 주려고 허니, 어찌 이렇게도 편파적인가!”  <열어구>


(351)

옛날 장주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나는 나비였고 스스로 유쾌하고 기분이 좋았기에 자신이 장주라는 걸 알지도 못했다. 갑자기 깨어나니 분명히 장주였다.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다. 이것을 타자와 함께 변화한다.(物化)’고 말한다.     <제물론>


(362)

<제물론>편 여희 이야기에서 장자는 단지 크게 깨어날 때만, 우리는 큰 꿈을 꾸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20여 년 동안 지속되었던 장자꿈에 대한 최종 보고서를 마무리하는 날, 애틋함과 아련함이 교차하는 작은 느낌마저 상쾌한 바람으로 씻어보는 날입니다. 안녕! 장자! “지금까지 나는 장자가 된 꿈을 꾸었다. 자유롭게 당당한 장자였고 스스로 유쾌하고 기분이 좋았기에 자신이 나라는 걸 알지도 못했다. 갑자기 깨어나니 분명히 나였다. 내가 장자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장자가 내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와 장자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다. 이것을 타자와 함께 변화한다고 말한다.”


(365-366)

떠날 수 있는 힘! 장자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자유의 소중한 의미입니다. 국가에서도,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심지어 우리 자신의 삶에서마저 우리는 떠날 수 있습니다. 떠나면 불행할 것 같고, 떠나면 살지 못할 것 같고, 떠나면 외로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떠나본 적 없는 불행한 영혼들의 착각입니다. 떠나서 행복할 수 있고, 떠나서 살 수 있고, 떠나서 새로운 누군가와 든든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강박적으로 떠나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떠날 수도 있지만 머무는 것도 진정한 자유의 또 다른 의미니까요. 그래서 자유인의 머물기는 가치가 있는 겁니다. 억지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머물고 싶어서 머무는 것이니까요. 자유롭게 떠나고 자유롭게 머뭅니다. 그래서 자유인의 거동은 여러모로 유목민과 유사합니다. 유목민이 어딘가를 떠났다면 그는 그곳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가 어느 곳에 머물고 있다면 그곳의 풀들이, 바람들이, 물들이, 구름들이, 그리고 석양의 장관이 그를 행복하게 했기 때문일 겁니다. 자신이 삶의 주인일 수 있는 곳, 자신에게 충만한 삶의 뿌듯함을 안겨주는 곳에서 자유인은 머물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체의 불만과 투정도 없이 그냥 쿨하게 떠나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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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노트르담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3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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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유럽으로 여행을 다녀왔잖니. 여행을 가기 전에 그곳에 관련된 책을 하나 읽고 가면 좋겠다는 생각에 떠오른 책이 <파리의 노트르담>이란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고, 영화, 만화, 뮤지컬 등으로 각색되어 많은 사람들이 접했단다. 소설 속 등장인물인 카지모도가 꼽추라서, <노틀담의 꼽추>의 제목으로 각색이 많이 되었고, 아빠도 그 제목이 더 익숙하구나. 그런데, 아빠는 이 유명한 작품을 본 적도 없고, 소설로도 읽어본 적이 없구나. 동화로 각색되어 아이들도 많이 읽는데, 그런 것도 읽지 않은 것 같구나.

지은이는 그 유명한 빅토르 위고란다. 그의 소설 <레 미제라블>을 읽었는데, 장엄함이 느껴지는 줄거리와 인문학적 내용으로 읽기 어려웠지만, 재미있던 기억이 있구나. <레 미제라블>을 읽고 나서, 그의 또 다른 대표작 <파리의 노트르담>도 읽으려고 알아보았던 기억이 있어. 그런데, 우리나라에 출판된 책들의 평이 번역이 안 좋다는 평들이 많았어. 그래서 나중에 제대로 된 번역이 나오면 그때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미뤘단다. 그러다가 이번에 여행을 앞두고 더 이상은 미룰 수 없겠다 싶어서, 아빠가 읽은 <레 미제라블>과 같은 출판사인 민음사 판 <파리의 노트르담>을 읽었단다. 옛말이 많이 섞인 부자연스러운 번역이라는 독자평이 있었는데, 아빠는 그런 것은 별로 느끼지 못하고 읽었단다. 아빠가 나이를 먹어 옛사람이 된 건 아닌지 싶다.

여행 가기 전에 다 읽긴 했는데, 너희들에게는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도 한참 지나고서야 이야기하는구나. 소설에 나오는 노트르담 성당도 직접 보긴 했는데, 몇 년 전에 방화로 불탄 본채에 대한 보수 공사가 여전히 진행 중이더구나. 그래서 성당의 앞쪽은 불에 안타고 있어서 다행이었지. 그곳에서 너희들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아빠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노트르담 성당과 성당의 앞 광장, 인근 건물 들 속에 있었던 것을 상상해 보았단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다 생각나지는 않지만, 소설 속 장면을 그곳에 펼쳐서 상상해 보기도 했지. 여행 가기 전에 읽은 소설로 잘 선택했던 것 같구나. , 그럼 이제 다시 소설과 여행을 되씹으면서 너희들에게 <파리의 노트르담>을 이야기해줄게. 오늘은 1권을 먼저 해주마.


1.

전에 읽은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의 경우, 주인공들의 이야기 이외에 인문학적 내용이 엄청 많이 나왔는데, 이번에 읽은 <파리의 노트르담>에서도 3장의 경우는 거의 대부분이 당시 파리의 건축물과 노트르담 성당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이야기해주었고, 6장에서는 옛 사법관직에 관한 이야기도 해주었단다. 주인공들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데, 빅토르 위고의 글을 그냥 건너뛸 수도 없고, 꾹 참고 읽는데 읽기가 그리 편한 것도 아니어서 시간이 좀 걸렸단다.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건너뛰고, 아빠는 주인공들의 이야기 중심으로 이야기해줄게.

1482 1월 파리 광인절에 이야기는 시작한단다. 광인절은 시민들이 재미 삼아 광인들의 교황을 뽑는 그날 날이었단다. 재판소에서는 낮 12시에 연극이 예정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많은 군중들이 재판소에 모여 있었단다. 하지만 12시가 되었는데됴, 연극은 시작하지 않았어. 추기경이 오지 않았다는 이유였지. 시간이 지나도 연극이 시작하지 않자, 궁중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까지 갔고, 연극을 시작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어. 그래서 시나리오 작가인 그랭구아르가 연극을 시작하겠다고 했고, 추기경이 뭐라고 해도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했단다.

그렇게 시작은 연극풍자극이긴 한데, 연극이 어려워 군중들이 집중을 제대로 하지 못했어. 연극이 한창 진행 중일 때, 브로봉 추기경이 온다는 소식에 연극은 중단되었단다. 브로봉 추기경은 오스트리아 사절단과 함께 도착을 했어. 그랭구아르는 연극을 계속하라고 소리쳤지만, 다들 연극에는 관심이 없어서 중단되었단다. 다시 연극이 재개되었지만 그리고 노트르담 성당의 종지기인 카지모도가 나타나면서, 그의 괴상한 모습을 구경하느라 연극은 또 중단되었단다. 카지모도는 꼽추에 귀머거리에 애꾸눈이었고, 얼굴도 흉측하게 생겼단다. 광인절, 광인의 교황으로 그보다 적합한 사람이 없다고 사람들은 그를 광인교황으로 선발했어.

연극은 그렇게 중단되어 버리고, 시나리오 작가인 그랭구아르는 좌절했단다. 카지모도가 광인의 교황이 되어 행렬을 하고 있었는데, 노트르담 성당의 부주교인 클로드가 나타나서 카지모도를 데리고 가버렸단다. 카지모도는 클로드 부조교에게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비는 듯했어.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그랭구아르는 의아하게 생각했단다. 어떤 사이이길래

연극이 끝나고 그랭구아르는 아름다운 집시 무리를 보고 쫓아갔는데, 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이집트 아가씨가 두 명의 괴한에게 붙잡혀 가는 것을 보게 되었어. 그랭구아르는 그 이집트 아가씨를 구해주려고 가다가 오히려 괴한들에게 한 대 맞고 정신을 잃었어. 다행히 기병대에 의해 이집트 아가씨는 구출되었고, 괴한 중 한 명을 잡았는데, 바로 카지모도였단다. 그런 괴한 중 나머지 한 명은 누구였을까? 바로 클로드 부주교였단다. 왜 클로드 부주교는 그 이집트 아가씨를 납치하려고 했을까. 그 이집트 아가씨의 이름이 바로 라 에스메랄다란다.

정신을 잃었던 그랭구아르는 거지 집단에 붙들렸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교수형에 처할 위기에 빠졌어. 그들의 규칙에는 그랭구아르를 가지겠다고 하는 여자가 있으면 목숨을 구할 수 있는데, 그 이후에는 그 여자와 결혼도 해야한다고 했어. 괴상하게 생긴 여자가 구하겠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을 하고 있는데, 다름 아닌 라 에스메랄다가 그랭구아르와 결혼하겠다고 했어. 목숨도 구하고 미녀와 결혼도 하고그랭구아르는 이런 복도 없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라 에스메랄다는 그랭구아르의 목숨을 구하려고 그런 거지, 실제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했어. 어렸을 때 잃어버린 어머니를 찾아야 한다고 했지. 그리고는 라 에스메랄다는 사라졌단다.


2.

카지모도는 노르트담 성당의 종지기라고 했는데, 어떻게 노트르담 성당의 종지기가 될 수 있었을까. 클로드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모두 역병으로 돌아가시고, 갓난 동생인 장과 돌이 살아가야했어. 클로드는 동생 장에게 형이자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지. 클로드는 동생 장을 보살피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어. 클로드는 나중에 신부가 되었고, 괴물이라고 버려진 아이 카지모도를 입양하여 키웠단다. 그것이 16년 전 일이었어. 카지모도라는 이름도 클로드가 지어 주었어. 카지모도는 부활절 이후 첫 일요일을 뜻한단다. 카지모도를 데리고 온 날이 그날이었어.

카지모도는 노트르담의 종지를 하면서 종소리를 너무 좋아했단다. 하지만 그 종소리 때문에 그만 귀도 멀게 되었어. 그의 흉측스러운 외모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그를 혐오했고, 카지모도를 사람으로 대해주는 사람은 오직 클로드 부주교뿐이었단다. 그래서 카지모도는 클로드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한편 성인이 된 클로드의 동생 장은 행실이 안 좋고 막무가내였단다. 완전 문제아였어. 클로드 부주교는 신학에 대한 믿음이 충만했단다. 당시 유행했던 점성술, 연금술을 믿지 않고 비판하였고, 어떤 이와 그것에 관한 언쟁이 벌어질 때는 과격한 말까지 쏟아내면서, 신학의 믿음이 강했단다. 오직 신학과 종교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어.

클로드는 건축물에 대한 사랑도 남달랐는데, 그 이유는 글을 모르고 책을 접할 수 없는 시민들이 건축물에 그림으로 표현된 신학의 이야기를 보고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건축은 책이라고까지 이야기를 했는데,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건축술이 죽었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클로드는 인쇄물에 대한 반감이 컸단다.


3.

라 에스메랄다를 납치하다가 잡힌 카지모도의 이야기를 해줄게. 카지모도는 이 일로 재판을 받게 되었어. 배석판사로는 플로리앙인데, 그도 귀머거리였는데, 주변 상황에 따라 행동을 해서 아무도 그가 귀머거리인 줄 몰랐어. 그런데 주변에서 카지모도가 귀머거리이니까 형벌을 가볍게 주라는 조언을 했는데, 잘못 알아 듣고 더 무거운 벌을 주어서, 카지모도는 2시간동안 태형을 받고 벌금도 내야했어. 그레브 광장에서 카지모도의 태형이 집행되었단다. 2시간 태형을 맞은 카지모도는 기진맥진하고 정신을 잃었딴다. 이 광경을 클로드 부주교도 지켜봤는데, 아는 척하지 못했단다.

그런데 라 에스메랄다가 카지모도에게 가서 물을 주었단다. 앞서도 그랭구아르를 살려주었던 그 심성으로 카지모도가 불쌍해서 물을 주었던 것이란다. 사람들은 그런 라 에스메랄라를 비난했는데, 그 중에는 파케트라는 창녀 출신 귀딜 수녀도 있었어.

파케트는 이집트 집시라고 엄청 싫어했고, 특히 젊은 이집트 집시 아가씨는 거의 경멸했어. 왜냐하면 사연이 있었단다. 파케트는 젊은 시절 딸 아녜스를 낳았는데, 그 딸을 무척 애지중지했단다. 그런데 어느날 아녜스를 잃어버렸어. 이집트 집시들이 훔쳐 갔어. 아녜스를 데려가면서 꼽추의 괴물 같은 아이를 두고 간 거야. 이후 파케트는 딸을 찾으려고 미친 듯이 헤맸단다. 하지만 결국 딸을 찾지 못했어.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그 일이 일어난 지 16년이 지났는데, 여전이 딸을 잊지 못하고, 은둔하면서 지냈단다. 반 정도 정신이 나간 상태로 말이야. 그러다가 지나가는 이집트 집시들을 보면 욕을 해대고 그랬지. 파케트가 왜 이집트 젊은 집시 아가씨를 싫어하는지 알겠지? 그런데, 아무래도 파케트와 라 에스메랄다가 모녀 사이 같지? 파케트는 16년 전에 어린 딸을 잃고, 라 에스메랄다는 어렸을 때 잃어버린 엄마를 찾는다고 했잖아. 그들의 이야기는 2권에서 더 해주어야겠구나.

….

1권의 줄거리는 대충 여기까지란다. 앞서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가 여행가기 전에 이 책을 읽어서 시간이 꽤 지난 다음 이야기를 해 주려다 보니 기억이 정확하지 않은 부분도 있을 것 같구나. 메모를 조금씩 하긴 했는데, 중간중간 기억에 의존해서 적은 부분이 많아서, 아빠가 이야기해준 부분에 틀린 부분도 있을 것 같구나. 파리의 노트르담. 생각보다 재미있었고, 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작품인지 알겠더구나. 아빠가 부지런을 떨어서 2권의 이야기도 조만간 해줄게.


PS,

책의 첫 문장: 시테 섬과 대학과 장안으로 이루어진 삼중의 성내에서 모든 종들이 요란스럽게 울려 퍼지는 소리에 파리 사람들이 잠을 깬 지가 오늘로 꼭 348년하고도 여섯 달 열아흐레가 되었다.

책의 끝 문장: 가자, 우리 큰 용사님.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은 아직 오늘날에도 장엄하고 숭고한 건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늙어가면서도 아무리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최초의 돌을 놓은 샤를마뉴와 최후의 돌을 놓은 필리프오귀스트에 대한 경의를 저버리고, 세월과 인간들이 동시에 이 존경할 만한 건축물에 가한 무수한 풍화와 훼손 앞에서 한숨을 쉬지 않고 분개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 P203

그 꼭대기에 숨을 헐떡거리면서 도착하는 구경꾼에게 그것은 맨 먼저 눈부신 지붕과 굴뚝과 거리와 다리와 광장과 종루 들이었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눈을 사로잡았다. 깎아지른 듯한 합각머리, 뾰족한 지붕, 성벽 모퉁이에 매달린 소탑, 11세기의 피라미드식 석조 건물, 15세기의 판암 오벨리스트, 아성의 꾸밈없는 둥근 탑, 성당의 장식 네모탑, 큰 것, 작은 것, 육중한 것, 경쾌한 것 등등. 눈길은 오랫동안 그 미궁 속에 깊이깊이 잠겨 드는데, 거기에는 저마다 제 나름의 독창성과 동기와 특성과 아름다움이 없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고, 전면에 물감 칠과 조각을 하고, 바깥으로 뼈대가 불거지고, 문이 반궁륭이고, 위층들이 앞으로 불쑥 나온, 작디작은 가옥에서부터 당시에는 탑이 즐비했던 장엄한 루브르 궁에 이르기까지, 예술에서 오지 않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 P229

그런데 현재의 파리는 아무런 공통성도 없다. 그것은 여러 시대의 견본들의 집합체인데,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사라져버렸다. 수도는 가옥들로만 커져가고 있거니와, 무슨 가옥들이 그 모양인가! 파리는 이대로 가다가는 오십 년마다 새로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파리의 건축물의 역사적 의의는 날마다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기념적인 대건축물들은 더욱더 드물어져가고, 집들 속에 잠겨서 차츰 삼켜져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선조는 돌의 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 자손은 회반죽의 파리를 갖게 될 것이다. - P256

그 반면 연금술은 가지가지의 발견을 하였소. 다음과 같은 결과들에 나리는 이의를 내세우시렵니까? 1000년 동안 땅 아래 갇혀 있던 얼음은 바위 수정으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납은 모든 금속들의 선조입니다. (왜냐하면 금은 금속이 아니고 빛이니까요.) 납은 각각 200년의 기간만 있으면 차례차례로 납의 상태에서 적비소(赤砒素)의 상태로, 적비소에서 주석으로, 주석에서 은으로 옮아 갑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실이 아닙니까? 그러나 <작은 열쇠>를 믿고, 충만한 선을 믿고, 별들을 믿는다는 것은, 옛중국 사람들과 더불어, 꾀꼬리가 두더지로 변하고, 밀알이 잉어과의 물고기로 변한다고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이란 말입니다!" - P324

모든 문명은 신정(神政)으로 시작되고 민주주의로 끝난다. 통일성에 뒤이어 오는 이 자유의 법칙은 건축술에 쓰여 있다. 왜냐하면, 이 점은 강조해 두거니와, 벽돌 공사가, 신전을 건축하고 신화와 성직의 상징체계를 표현하고 그 돌의 책장들에 율법의 신비로운 일람표들을 상형문자로 옮겨 쓰는 데만 효력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모든 인류 사회에는, 신성한 상징이 자유사상 아래 닳아 없어지고 인간이 성직자를 피하고 철학과 제도들의 부속물이 종교의 얼굴을 갉아먹는 시기가 오게 되므로, 건축술은 인간 정신의 이 새로운 상태를 재현할 수 없을 것이고, 그 책장들은 표면은 가득 차 있되 이면은 텅 비어 있을 것이고, 그 작품은 온전하지 못할 것이고, 그 책은 불완전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 P337

그러므로 인쇄술이 발명된 때부터 얼마나 건축술이 시나브로 여위어가고 오그라져가고 발가벗겨져 가는지 보라. 물은 줄어들고 진(津)은 밭아 들고 시대와 국민의 생각은 건축술에서 물러가는 것을 사람들은 얼마나 절감하고 있는가! 냉각은 15세기에는 거의 지각할 수 없다. 인쇄술은 아직 너무도 허약하여, 고작 해봤자 강력한 건축술의 잉여생명력을 우려먹는다. 그러나 16세기부터는 건축술의 병이 눈에 보이고, 건축술은 이미 절대적으로 사회를 더 이상 표현하지 못하고, 비참하게도 고전 예술이 되고, 갈리아의 건축술, 유럽의 건축술, 토착의 건축술에서 그리스와 로마의 건축술이 되고, 진정하고 근대적인 건축술에서 의(義)고대적 건축술이 된다. 이러한 쇠퇴를 사람들은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그러나 화려한 쇠퇴다. -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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