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행의 순례자 캐드펠 수사 시리즈 10
엘리스 피터스 지음, 김훈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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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아빠가 가끔씩 이야기해주는 캐드펠 수사 시리즈, 어느덧 10권이란다. 9권의 이야기는 1141 2월의 이야기였는데, 10권의 이야기는 1141 5 25일에 시작한단다. 약 세 달이 지난 시점이구나. 이제는 슈롭셔 주 행정장관이 된 휴 베링어와 캐드펠 수사는 당시 국내 정세에 대해 이야기했어. 캐드펠 수사 시리즈 1권부터 이어진 내전은 여전했어. 스티븐 왕이 모드 황후 진영에 포로 잡혀 스티브 왕 진영은 난리가 났단다. 그 와중에 스티븐 왕의 아내 마틸다 왕비가 군대를 소집하여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단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단다.

슈루즈베리 성 바오로 수도원에서는 성 위니프리드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어. 성 위니프리드 수녀에 관한 이야기는 캐드펠 수사 시리즈 1권에서 이야기를 했었단다. 사람들은 웨일즈 지역에 가서 성 위니프리드의 수녀의 관을 슈루즈베리 성 바오로 수도원으로 모셔왔다고들 생각하고 있단다. 그런데 사실은 성 위니프리드 수녀는 원래 모셨던 웨일즈 지역에 있고, 슈루즈베리 성 바오로 수도원으로 가지고 온 관에는 사실 살인자의 관이었단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캐드펠 수사 시리즈 1권에서 이야기했으니 오늘은 생략할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캐드펠 수사는 약간의 죄책감도 있었지만 그것을 수도원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단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성 위니프리드 수녀님의 영혼도 알아 줄 것이라고 생각했어.

….

소설이 시작하는 시점으로부터 8주 전인 1141 4 9. 윈체스터에서는 성직자가 살해되는 살인 사건이 있었어. 당시 그 성직자는 모드 황후에게 붙잡혀 있는 왕을 풀어달라는 탄원서를 냈는데, 괴한들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모드 황후의 가신이었던 라이날드 보사르라는 기사는 괴한의 공격을 당한 성직자를 도와주다가 그도 괴한에게 공격을 받아 죽고 말았단다. 라이날드 보사르는 캐드펠 수사 시리즈 6권에서 잠깐 등장했던 로랑스 당제를 섬기던 기사였단다. 8주 전에 죽은 성직자와 라이날드 보사르에 대한 추도 미사가 슈루즈베리 성 바오로 수도원에서 진행될 예정이라고 했단다.

 

1.

성 위니프리드 축제는 6 22일에 열릴 예정으로 축제에 참석할 순례자들이 하나 둘 수도원에 도착했어. 그 중에는 웨일스 키아란과 매슈라는 젊은이들이 있었어. 키아란은 3주 동안 맨발로 걸어와서 발에 많은 상처가 나서 캐드펠 수사에게 치료를 받으러 왔단다. 키아란은 내면의 병이 더 고통스럽다면서, 자신은 죽을 병에 걸려서 이번 순례가 죽음의 순례길이라고 했어. 캐드펠 수사는 키아란에게 신발을 신어도 신의 특권을 받을 수 있다고 충고했단다. 매슈는 순례길 동안 키아란을 옆에서 함께 하면서 보호해 주었단다.

순례자들 중에 위버 부인과 조카들인 멜랑에흘과 흐륀 남매가 있었어. 멜랑에흘은 오는 길에 매슈를 알게 되었는데 둘은 사랑에 빠졌단다. 흐륀은 다리 뼈 통증을 앓고 있어서 목발을 쥐고 절룩거리며 걸었는데 신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 수도원에 온 것이란다. 축제 기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범죄 패거리들도 모여들었단다. 그 중에 시미언 포어라는 자가 있었어. 상인이라고 속이고 수도원에 왔지만, 그는 범죄자였어.

그런데 키아란은 주교로부터 받은 반지가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났어. 이 반지는 키아란에게는 통행 허가증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이 반지가 없으면 순례를 할 수 없었단다. 키아란은 슈루즈베리 성 바오로 수도원을 거쳐 웨일즈까지 순례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단다. 수도원장은 키아란의 반지를 훔친 범인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수도원 문을 닫고 수도원 안에 있는 사람들의 소지품 검사를 했지만 반지를 찾지는 못했단다. 흐륀은 뼈 통증 증상으로 캐드펠 수사로부터 치료를 받았는데, 전날 시미언 포어가 키아란의 반지를 훔치는데 사용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단도를 가지고 있는 걸 봤다고 했어. 하지만 소지품 검사를 할 때는 그런 단도는 나오지 않았단다.  하기야 반지든 단도든 수도원 어딘가에 숨겨 놓으면 될 테니휴 베링어가 사기꾼들을 잡기 위해 수사망을 넓히자 시미언 포어는 도망가버렸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키아란이 잃어버렸던 반지를 가지고 있었어. 그에게 물어보니 시미언 포어에게 돈 주고 샀다고 했어. 키아란의 반지는 역시나 시미언 포어의 짓이였나 보구나.

황후의 사절 올리비에라는 사람이 도착했어. 올리비에도 캐드펠 수사 시리즈 6권에서 나왔던 사람으로 알고 보니 캐드펠의 숨겨진 아들이었지만 캐드펠은 아는 척을 하지 않았던 내용도 6권에 나온단다. 6권에서 이야기했듯이 올리비에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캐드펠도 최근에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을 아들에게는 여전히 비밀로 하고 있었단다. 그런 올리비에가 모드 황후의 사절이 되어 수도원에 다시 왔단다. 올리비에가 수도원에 온 이유는 앞서 이야기했던 살해당한 라이날드 보사르의 수하이자 법적 상속인 뤼크 메버렐이라는 사람을 찾으러 온 거야. 라이날드가 죽고 나서 뤼크 메버렐이 사라졌다고 했어. 그의 평상시 하던 행동으로 봐서는 라이날드의 죽음과 연관은 없어 보이지만 갑자기 사라져서 찾아다니고 있다고 했어.

 

2.

6 22일 성 위니프리드 축제일이 되었어. 기념 미사를 드리는 도중 흐륀이 목발을 짚고 성 위니프리드 관에서 기도를 드렸어. 그런데 그 기도를 마치자 흐륀은 목발 없이 꼿꼿하게 걸은 거야.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났다면서 눈물을 흘렸단다. 흐륀의 다리를 치료했던 캐드펠 수사도 놀랐단다. 누군가는 캐드펠 수사의 치료 때문에 다리가 나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도 있었지만, 직접 치료를 했던 캐드펠 수사는 자신은 근육의 피로를 풀어주는 수준이었다면서 목발 없이 걸을 수 있게 할 수는 없었다고 했단다.

한편, 키아란은 우연히 멜랑에흘을 만나게 되었는데 자신이 반지를 찾은 사실에 대해서 매슈에게 이야기하지 말아달라고 했어. 그리고 자신의 발이 어느 정도 나으면 혼자 길을 떠나겠다고 했어. 매슈가 더 이상 자신을 보호해 주지 않아도 되고 매슈와 멜랑에흘 두 사람의 행복을 빈다고도 했단다. 자신이 한 이야기도 매슈에게는 하지 말아달라고 했단다. 직접 이야기도 될 것 같은데, 왜 그랬을까?

매슈는 축제 내내 보이지 않는 키아란을 찾았단다. 멜랑에흘은 그제서야 키아란이 혼자 떠난 사실을 이야기해주었어. 그러자 예상밖에 매슈가 크게 화를 내며 자신에게 왜 이제서야 이야기를 했다면서 멜랑에흘을 때리기까지 했단다. 그리고는 키아란을 쫓아 길을 떠났단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을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8주 전 죽은 성직자와 기사와 관련이 있어 보였단다.

올리비에는 수도원장을 만나서 자신이 수도원에 온 목적을 이야기했단다. 그러면서 뤼크 메버렐을 찾는 것에 협조를 요청했단다. 그리고 올리비에는 예전에 만난 적이 있는 캐드펠을 만나러 왔어. 올리비에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캐드펠은 살짝 놀라기도 했단다. 갑자기 멀리 있는 줄 알았던 아들이 불쑥 들어왔으니올리비에는 자신이 수도원에 온 이유를 캐드펠에게도 이야기를 하고 뤼크의 외양에 대해 설명을 했는데, 나이대로 보아 키아란과 매슈 중 한 명이 뤼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그래서 올리비에와  캐드펠이 키아란과 매슈를 찾아보았는데 그들은 이미 수도원을 떠난 뒤였단다.

캐드펠은 키아란과 매슈가 남기고 간 소지품을 확인해 보니 뤼크의 것이 있었어. 이로써 키아란과 매슈, 둘 중에 한 명이 뤼크일 가능성이 더 높아졌어. 너희들은 누가 뤼크일 것 같니? 그래서 올리비에와 캐드펠은 그들을 쫓아 길을 나섰단다. 휴 베링어도 나중에 소식을 듣고 길을 나섰단다. 매슈는 키아란을 쫓고, 올리비에와 캐드펠 수사는 매슈를 쫓고, 휴 베링어는 캐드펠 수사를 쫓고 있구나.

가장 앞서 떠났던 키아란은 혼자 길을 가다가 시미언 포어 일당에게 잡히고 말았단다. 키아린은 시미언 포어 일당에게 목걸이도 빼앗겼어. 그때 매슈가 나타나서 시미언 포어 일당과 싸웠단다. 이어서 캐드펠, 올리베에까지 와서 싸움에 합류하고 휴 베링어 일행이 오는 소리를 듣자 시미언 포어 일당은 도망쳤단다. 키아란의 목걸이는 결국 시미언에게 빼앗기고 말았어. 올리비에는 매슈가 그가 찾고 있는 뤼크라는 것을 알아 보았단다.

그렇다면 키아란은 누구인가. 키아란은 자신이 이제 목걸이를 하지 않고 있으니 매슈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이야기했단다. 이건 무슨 소리? 캐드펠, 올리비에, 휴 베링어는 키아란이 한 말에 대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궁금했어. 그제서야 키아란과 매슈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단다. 키아란은 헨리 주교를 모시던 사람인데 어떤 성직자가 헨리 주교를 모욕해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를 죽이려고 했는데 그때 라이날드 보사르가 말렸고 그러다가 라이날드는 카아란의 칼에 찔려 죽고 말았어. 뤼크는 자신이 모시는 기사 라이날드가 죽자 그를 죽인 키아란을 추격하였고 키아란은 헨리 주교를 찾아가 자신이 한 일에 이실직고를 했어. 헨리 주교는 자신이 아끼던 키아란이 그런 중죄를 저질렀지만 상대 진영에 넘기는 것은 탐탁지 않게 생각했어.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도 없는 일이었지. 그래서 헨리 주교는 키아란에게 자신이 직접 죄를 주었단다. 무거운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맨발로 순례길을 떠나라고 한 거야. 신발을 신거나 무거운 목걸이를 빼면 누구든 너를 죽여도 좋다는 이야기도 했어. 그 이야기를 매슈, 아니 뤼크가 우연히 들은 거야. 그는 원수를 갚고 싶지만 헨리 주교의 말도 거역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키아란에 옆에 붙어 다니면서 그가 신발을 신거나 목걸이를 빼면 죽이려고 한 거야. 키아란이 신발을 신거나 목걸이를 뺐을 때 누구든 죽여도 좋다고 헨리 주교가 이야기했으니 말이야.

키아란은 헨리 주교의 죄값을 받기 위해 발이 상처투성이가 되어도 신을 신지 않았고, 살갗이 벗겨져도 무거운 목걸이를 하고 다녔단다. 그리고 뤼크가 자신의 옆에 붙어 다니는 이유도 알고 있었어. 그리고 자신이 목걸이를 빼앗기게 되자, 이제는 자신의 목숨을 보호할 장치가 사라졌기 때문에 뤼크에게 죽이라고 했던 거야. 한참을 생각하던 뤼크는 키아란을 용서하기로 했단다. 이미 키아란은 고행의 순례를 통해 자신의 죄값을 치렀다고 생각했어. 키아란도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고 다시 맨발로 고행의 순례길을 떠났단다. 뤼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왔어. 그리고 멜랑어흘을 다시 만나 사과하고 멜랑어흘은 그를 용서해 주었단다. 둘은 다시 사랑의 결실을 맺어 결혼했단다. 역시, 캐드펠 수사 시리즈에 사랑이 빠지면 안 되지.

올리비에는 다시 돌아가기 전에 캐드펠을 찾아와 인사를 했어. 올리비에가 잠시 머물다가 돌아갔는데, 휴 베링어는 올리비에가 캐드펠을 닮은 것 같다고 이야기하자, 캐드펠이 이야기하기를 엄마를 더 닮았다고 이야기했단다. 캐드펠은 휴 베링어에게 진실을 이야기해주었어. 올리비에는 자신의 아들이라고...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단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를 읽다 보면 늘 그렇듯이 10권 역시 중세시대 영국을 여행하면서 캐드펠과 함께 범인을 찾아보는 그런 기분을 느껴볼 수 있었단다. 그나저나 스티븐 왕과 모드 황후 사이의 내전은 언제 끝나려나? 캐드펠 수사 시리즈가 끝날 때 같이 끝나려나? 부지런히 독서 편지를 써서 캐드펠 수사 시리즈 11권 이야기도 얼른 해줄게.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1141 5 25일 오후, 캐드펠 수사와 슈롭서 행정 장관 휴 베링어는 슈루즈베리 성 바오로 수도원 허브밭의 오두막에서 만났다.

책의 끝 문장: 저 친구는 내 아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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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우리는 산신령과 죽어버린 동무에게 술 대신 한잔씩의 물을 바쳐 죽은 짐승의 넋이 편히 쉬기를 빌고, 해질 무렵에 시체를 묻었다. 호박 크기만한 무덤이 다 만들어졌을 때, 나는 무척 슬픔을 느꼈다. 거북은 오랜 생명을 가지며 수천 년이나 산다고 한다. 그러나 희귀한 동물이 우리 집에서 죽었을 때에는 아마 좋은 것을 뜻하지는 않으리라.

 

(82)

그렇지, 원님께서 몸소 나와서 그렇게 무기도 없이 적에게 대했더라면 그야 옳았을 것이야말고. 아마 다른 원님 같았더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원님은 무척 겁쟁이였거든. 유감스럽게도 그건 원님이 아니라 그 손자였더란 말이야. 바로 김삿갓이란 거야. 그렇고말고.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지? 그렇지만 참으로 원님의 손자였다는 거야. ‘적군을 물리치자!’고 그는 조부에게 요구했으나 조부는 들은 체도 않고 적군에게 항복해버렸지 그만...... 그러므로 적군은 계속해서 딴 고을을 무찔렀고 김삿갓은 임금에게 충성하였으므로 조부와 적대하여 도모하지 않고 그만 걸인과 방랑의 시인이 되어버렸지.”

 

(89)

언제든 하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거든 조심스럽게 들어라. 그것은 아주 높은 학문이다.”

제가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영혼은 언제나 맑아야 한다.”

 

(178)

과거를 너무 생각지 마라.”

끝으로 어머니는 말하였다.

네가 자주 말한 것처럼 시대가 변하였다. 과거는 새 문화에 앞서 갔다. 새 문화는 자주 분수를 모른다. 그러나 네가 그것에서 무엇을 배우려고 하든지 그것이 생소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아야 하며, 또 언제나 온화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195)

그런 고귀한 한방 의원은 병자의 신체를 거의 만지지조차 않았다. 그들은 등을 두드리지도 않았고, 내부 기관을 청진하지도 않았다. 다만 병자의 얼굴을 보았고 병자가 이야기하는 것을 조심스레 듣고는 맥을 짚었다. 그러고는 처방을 썼고 처방에 따라 조수가 약을 곧 준비하였다. 조제실에는 모든 필요한 약초며 뿌리며 구근이 보관되어 있었고, 거기에서 환약이며 고약이며 즙을 의원의 감시 아래 만들 수 있게 해 두었다. 병자에게는 그 외 아무 일도 없었다. X-레이는 물론, 수술, 주사도 한방 의원은 몰랐다. 다만 특정한 병에만 여러 곳에 침을 놓았다. 이런 곳은 생명선 위에 있어야 했고 그 방해가 병이 된다고 했다.

 

(210-211)

어머지는 오랫동안 잠자코 걷다가 말하였다.

너는 자주 낙심하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충실히 너의 길을 걸어갔다. 나는 너를 무척 믿고 있단다. 용기를 내라! 너는 쉽사리 국경을 넘을 것이고, 또 결국에는 유럽에 갈 것이다. 이 에미 걱정은 말아라. 나는 네가 돌아오기를 조용히 기디라겠다. 세월은 그처럼 빨리 가니, 비록 우리가 다시 못 만나는 한이 있더라도 슬퍼 마라. 너는 나의 생활에 많고도 많은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 내 아들아, 이젠 너 혼자 가거라.”

 

(249)

너는 너무 말이 없고 너무 많이 생각한다.”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침묵은 오래된 동방에서는 아직도 미덕으로 인정되나, 서방에서는 그렇지가 않아. 여기선 그게 비사교성의 표시로, 심지어는 거만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언제나 이야기하는 데에 섞여 같이 대화를 나누어라. 무엇에 관한 이야기든 간에. 날씨나 기후나 또는 음식이나 옷에 이르기까지. 다른 사람과 사교하는 동안에는, 땅에서 살고 있는 이상엔 언제나 철학적인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는 없단다. 유럽 사람도 땅위에서 살고 있으며 즐겨 세상 이야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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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 / 이덴슬리벨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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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라는 책에 대해 이야기할게. 이 책에 눈에 끌린 것은 감자껍질파이라는 독특한 책제목 때문이란다. 그리고 책제목에 있는 북클럽도 관심을 갖게 했어. 아빠는 독서 모임을 해 본 적은 없지만, 독서 모임이 등장하는 소설들에 관심이 있단다. 소설 속이긴 하지만 그 독서 모임에서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재미있고, 특히 아빠가 읽었던 책들이 나오면 더 집중해서 읽게 된단다. 그리고 그들이 추천한 책들 중에 아빠의 리스트에 추가하는 책들도 있었어. 그래서 북클럽에 관한 소설이라고 하면 더 관심이 가서 읽곤 해. 아무튼 이 책도 책제목을 보고 읽게 되었단다.

지은이를 보니 두 명이더구나. 메리 앤 셰퍼, 애니 배로스. 책소개를 읽어보니 그들은 이모와 조카 사이였어. 이 책은 이모 메리 앤 셰퍼가 쓰시다가 건강 악화로 마무리를 하지 못한 것을 조카 애니 배로스가 이어서 마무리를 했다고 하는구나. 이모는 메리 앤 셰퍼는 악화된 건강을 회복하면 좋았을 텐데, 이 책이 출간되기 직전인 2008년에 돌아가셨다고 하는구나. 안타깝구나. 하지만 이 책은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더구나. 그렇게 많이 사랑을 받아서 우리나라에도 출간되었고, 아빠도 읽을 수 있게 되었구나. 이런 것도 인연인 듯 싶구나. 전혀 모를 뻔한 사람을 소설을 통해서 알게 되고 말이야.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메리 앤 셰퍼의 명복을 빌어 본다.

 

1.

이 소설은 2차 세계대전 후 채널 제도 건지 섬이 주요 배경지란다. 구글 지도에서 채널 제도 건지 섬을 찾아보면 영국과 프랑스 사이 도버 해협에 위치한 섬으로 프랑스 쪽에 가깝게 위치하고 있단다. 하지만 건지 섬은 영국령 섬이란다.

이야기는 1946 1 8일 시작된단다. 주인공 줄리엣은 어렸을 때 부모님을 잃고 친척집에서 지내다가 기숙학교에 다녔어. 기숙학교에서 소피라는 친구를 만나 친해졌고 소피의 집에도 자주 놀러 가서 며칠씩 지내곤 했어. 그래서 소피의 가족들, 특히 오빠 시드니와도 친해졌는데 시드니는 커서 스티븐슨&스타크 출판사를 운영하게 되었고 작가가 된 줄리엣은 시드니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책을 냈어. 줄리엣의 두 번째 책 <이지 비커스태프, 전장에 가다>라는 2차 세계대전 배경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영국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기념회를 열기도 했어.

그러던 어느 날 멀리 건지 섬에 사는 도시 애덤스라는 사람으로부터 편지가 왔어. 그가 가지고 있는 책에 줄리엣의 주소가 적혀 있다면서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였어. 건지 섬에 서점이 없어서 찰스 랭의 책을 구입하고 싶은데 도와달라는 내용이었어. 줄리엣의 주소가 적힌 책이 멀리 건지 섬으로 간 것도 신기하고 그 주소를 보고 낯선 이가 도움을 요청한 것도 신기하고 해서 줄리엣은 찰스 랭의 책과 자신의 책을 보내주었어.

그런 인연으로 줄리엣과 도시는 편지를 주고 받았어. 도시는 건지 감자껍질북클럽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북클럽을 하고 있다고 했어. 그 즈음 줄리엣은 <타임스> 제안으로 글을 연재하기로 했는데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 대해 쓰면 좋을 것 같아서 도시에게 허락 받기 위해 편지로 물어보았어. 도시는 당연히 괜찮다는 답장을 받았단다. 도시가 다른 북클럽 회원들에게 이야기를 해서 다른 멤버들도 줄리엣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단다. 대부분 호의적인 내용이었고 줄리엣도 진심을 담아 답장했단다.

그들과 주고받은 편지 내용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 당시 건지 섬도 독일군에 의해 점령되어 통제를 받고 있었어. 마을 사람들이 오랜만에 몰래 돼지고기파티를 하고 통금시간이 지나 집에 가다가 그만 독일군에게 검문을 당하게 되었대. 엘리자베스가 기지를 발휘하여 독일 책을 읽는 책모임을 가졌다가 늦었다면서 미안하다고 했어. 독일 책을 읽다가 늦었다고 했으니 독일군이 봐줄 만도 했지. 그래서 무사히 집에 돌아올 수 있었어. 이 에피소드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되었고 정식으로 책모임을 하자고 해서 북클럽이 시작되었어. 그런 모임에 먹을 것이 빠질 수 없었지. 하지만 전쟁 중이라서 먹을 것이 부족했어. 누군가 감자껍질로 만든 파이를 만들어 와서 먹게 되었는데 그것이 북클럽 이름이 되었단다.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줄리엣은 엘리자베스와도 연락을 하고 싶었지만 엘리자베스는 전쟁 중에 강제노동자를 숨겨 주었다가 독일군에게 발각되어 수용소로 끌려갔다고 했어. 전쟁은 끝났지만 엘리자베스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북클럽 사람들은 엘리자베스를 계속 기다라고 있었어. 건지 섬 북클럽 멤버들은 대부분 호의적인 편지를 보내주었는데 마을의 다른 사람 애들레이드 애디슨이 부정적인 내용에 북클럽 멤버들의 뒷담화를 잔뜩 쓴 편지를 보내왔어. 그러면서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을 <타임스>에 투고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어. 특히 엘리자베스의 험담을 했는데 독일군 장교 헬만의 아이도 낳았고 지금은 북클럽 멤버들이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도 했어.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2.

한편 얼마 전부터 마크 레이놀즈라는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꽃이 배달되어 왔어. 아무런 편지도 없이 꽃만 배달되었어. 알고 보니 어떤 미국인이었어. 만나 보았지. 호감형에 자신과 잘 맞아 데이트도 자주 했어. 출판사 사장 겸 친구의 오빠 시드니는 마크를 멀리하라고 충고했단다. 시드니가 줄리엣에게 연정을 품은 것 같기도 하지만 시드니는 동성연애자였단다^^ 남자의 육감인지 마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반대했던 거야.

...

다시 북클럽 이야기를 해보자. 도시는 엘리자베스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해줬어. 엘리자베스는 독일군 장교인 헬만 대위와 진심으로 사랑했대. 헬만 대위는 다른 독일군과 달리 섬 사람들에게 잘 대해주어 모두들 친하게 지냈다고 했어. 하지만 전투에 참여했다가 그만 죽고 말았대. 앞서 이야기했듯이 엘리자베스는 강제노동자를 숨겨주었다가 수용소로 끌려가서 엘리자베스의 딸 킷은 북클럽 사람들이 돌아가며 보살펴주고 있다고 했어.

건지 섬은 도버 해협 사이에 있다 보니 적의 배를 감시하기에 좋은 곳이었어. 독일군이 점령한 후 섬은 요새화되었다고 했어. 독일군이 건지 섬을 점령한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이라도 런던으로 피신시키기로 했어. 아이들이 무서워할까 봐 여행 간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앞서 소개한 뒷담화대마왕 애들레이드가 와서 기도를 한답시고 아이들에게 진실을 다 이야기해서 아이들이 겁먹고 모두 울고 말았어. 엘리자베스는 그런 애들레이드의 뺨을 시원하게 때리고 내쫓았다고 하더구나. 엘리자베스와 애들레이드는 그런 악연이 있었구나. 엘리자베스의 에피소드를 들려줄 때마다 엘리저베스가 마음에 들었고 줄리엣도 엘리자베스가 얼른 돌아오길 바랬어. 편지로만 주고 받는 것이 부족하다고 느낄 즈음 줄리엣은 건지 섬에 가기로 했단다. 직접 만나고 직접 보면 글도 더 잘 써질 테니까 말이야.

한편, 마크는 줄리엣에게 청혼을 했고 줄리엣은 생각해 보겠다고 하자, 마크는 불같이 화를 내어 줄리엣은 깜짝 놀랐어. 마크는 시드니와 친하게 지내는 것도건지 섬에 가는 것도 싫다고 했어. 얼른 헤어져야겠구나.

...

1946 5 22. 줄리엣이 드디어 건지 섬에 도착했고 모두들 환대해 주었단다. 당분간 비어 있는 엘리자베스의 집에서 지내기로 했어. 섬에서 있었던 일들을 시드니에게 편지를 보내서 책을 읽는 독자들도 알 수 있었단다. 시작할 때 이야기했듯이 이 소설은 편지로 이루어져 있어서 등장인물이 편지를 보내지 않으면 스토리를 알 수가 없어 ㅎㅎ.

어느 날 건지 섬으로 엘리자베스와 함께 수용소 생활을 한 레미 지로라는 사람의 편지가 왔어. 불길함이 현실이 되었구나. 엘리자베스는 전쟁이 끝나기 얼마 전인 1945 3월 처형당했다고 헸어. 엘리자베스는 수용소에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고 했어. 끝까지 엘리자베스다웠구나. 편지를 보내준 레미 지로는 건강이 안 좋아 요양원에 있다고 했단다. 북클럽 멤버들은 엘리자베스의 소식을 듣고 모두 슬퍼했어. 북클럽의 창립자이자 어찌 보면 멤버들의 정신적 지주였는데 말이야. 도시는 다른 북클럽 멤버인 아멜리아와 함께 레미를 만나러 갔단다.. 레미를 만나고 그녀에게 건지 섬에 오라고 제안했어. 그래서 나중에 레비는 건지 섬에 왔어.

...

건지 섬은 조용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섬이야. 줄리엣도 건지 섬에 있으면서 행복했고 글도 잘 써졌어. 엘리자베스의 딸 킷도 줄리엣을 엄청 잘 따랐단다. 마크가 전화를 걸어 건지 섬에 온다는 것을 줄리엣이 만류했단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건지 섬과 마크는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또는 그를 멀리하고 싶어졌을 수도 있고마크는 전화로 또 청혼을 했는데 줄리엣은 이번에도 거절했단다. 시드니 오빠가 주말에 건지 섬에 방문했어.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멤버들 모두 시드니를 반기고 좋아했어. 다들 줄리엣과 관계를 궁금해하기도 했는데 시드니는 자신이 묵고 있는 집주인 이솔라 할머니에게 조심스럽게 자신은 동성애자라고 이야기했단다.

줄리엣이 마크에게 건지 섬에 오지 말라고 하고 청혼을 또 완강히 거절한 것은 아마 도시의 영향도 있었던 것 같아. 건지 섬에 도착해서 도시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에게 호감을 가진 것 같았거든. 섬에서 지내면서 둘이 함께 하는 시간도 많아지고. 그 날도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 근데 그때 뜻하지 않은 마크가 온 거야. 그렇게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말이야. 잠시 어색한 분위기도시는 이내 자리를 피해주었지. 마크는 킷이 줄리엣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는 얼른 다른 사람에게 넘기라고 했어. 짐만 될 뿐이라고. 어쩜 말을 그리 밉게만 할까. 그렇게 줄리엣을 모르는 사람이 어찌 청혼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네. 줄리엣은 그런 말을 뱉은 마크에게 명확하게 헤어지자고 했단다. 이제 도시와 잘 되는 일만 남았겠구나.

 

3.

이솔라 할머니가 보관한 편지들 중에 오스카 와일드의 편지처럼 보이는 편지들이 있었어. 필적 전문가들이 와서 확인을 해보니 오스카 와일드 것이 맞다고 했어. 대박. 그런데 시드니와 함께 섬에 방문한 출판사 직원 빌리 비가 그 편지들을 훔치려다가 걸려서 쫓겨나는 작은 에피소드도 있었어. 이 범인을 찾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이는 이솔라 할머니였어. 이솔라 할머니는 평소에 추리를 하는 것을 즐겨 했거든.

마크가 떠난 후로 줄리엣은 고민 끝에 킷을 자신이 입양하기로 했단다. 한편 도시는 레미와 함께 여행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줄리엣은 속상했단다. 마음에 두고 있는 도시가 다른 여자랑 여행을 준비하고 있으니. 레미가 몸이 허약해서 도와준다는 순수한 마음이긴 하지만...

이솔라 할머니도 그런 도시와 레미를 유심히 살펴보고는 도시가 레미를 사랑한다는 의심을 강하게 했어. 또 추리를 시작했어. 그 증거를 찾으려고 도시의 집을 청소해 주겠다고 하면서 도시가 출근하고 난 후 그의 집에 갔어. 하지만 도시가 레미를 사랑한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단다. 이상하게도 줄리엣의 사진과 소지품만 있었어. 이솔라 할머니는 줄리엣에게 찾아가 자신의 임무를 실패했다고 말하며 줄리엣의 사진과 소지품들이 있다고 이야기했어. 그러자 줄리엣은 깨달았지. 이솔라가 놓친 것. 도시도 줄리엣을 좋아하고 있다는 증거. 줄리엣은 바로 도시를 찾아가 청혼했단다. 도시도 당연히 좋다고 했어.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단다.

따뜻한 소설 한편 잘 읽었단다. 엘리자베스가 짠~ 하고 돌아왔으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야. 북클럽에 관한 소설이다 보니 여러 가지 책 이야기들도 나왔단다. 이 책의 뒷편에 보면 이 소설에 등장했던 책들 리스트를 뽑아 주어 좋았단다. 아빠가 읽은 책도 있고, 아빠가 읽고 싶은데 아직 읽지 못한 책도 있고, 처음 제목을 들어본 책들도 있었단다. 나중에 읽을 책이 없을 때 여기에 적힌 책 리스트도 함 참고해 봐야겠구나. 그리고 이 소설을 읽고 나서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영화도 찾아 보았단다. 약간 편집한 부분이 있었지만 소설의 대부분을 그대로 영화로 잘 만든 것 같구나. 소설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화면이 잘 연출되어서 영화도 소설만큼 잔잔하고 따뜻했단다. 나중에 너희들도 기회가 되면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시드니 오빠, 수전 스콧은 진짜 대단해요.

책의 끝 문장: 오오, 신을 찬양할지어다!


나 역시 전쟁이 끝없이 이어진다고 느꼈었어요. 아들 이언이 이집트 알라메인에서 죽었을 때(엘리의 아버지인 존과 함께 전사했지요.) 조문객들이 찾아와 나를 위로한답시고 하는 말이 "삶은 계속되는 거예요"였어요. 엉터리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연히 삶은 계속되지 않아요. 계속되는 건 죽음이죠. 이언은 이제 죽었고 내일도 내년에도 그 후로도 영원히 죽어 있을 테니까. 죽음에는 끝이 없어요. 하지만 어쩌면 슬픔에는 끝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엄청난 슬픔이 노아의 대홍수처럼 나의 세상을 휩쓸어버렸고, 여기서 벗어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죠. 그런데 벌써 물 위로 솟은 작은 섬들이 있네요. 희망? 행복? 뭐 그런 것들로 부를 수 있겠죠. 당신이 의자 위로 올라서서 부서진 건물 더미를 애써 외면한 채 반짝이는 햇빛을 받는 모습을 기분 좋게 상상해본답니다. - P162

나는 잘못됐다고 사과하고는 오빠 말이 전적으로 옳다, <오만과 편견>이야말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훌륭한 러브 스토리다, 라고 말해줬어요. 긴장감이 엄청난 작품이기 때문에 끝까지 읽기도 전에 애간장이 녹아서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고도 얘기해줬죠. - P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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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옛날 옛날에

세상에 자비도 없고 희망도 없고 노래도 없던 때

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첫날 자신이 만든 밤이 너무 좋아서

그 밤을 덮고 자느라

세상에 인간은 있되

구원도 없고 기적도 없고 선의도 없다는 걸 잊었습니다.

첫날 자신이 만든 밤이 너무 좋아서.

자신이 만든 밤이 너무 편해서.

 

(185)

-그럼 엄마도 거기 가봤어?

어린 딸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미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그러곤 뭔가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 진지하게 답했다.

-하지만 실제로 가본 사람들은 있지.

미정이 한 손으로 소리의 까맣고 반질거리는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 네가 어른이 된 미래에는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거야.

소리는 잠자코 있다 입을 열었다.

-엄마.

-?

-나 그거 가져도 돼?

-?

-미래라는 말.

 

(200)

지우가 이해하기로는 지우개는 뭔가를 없앨 뿐 아니라 있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대상에 빛을 드리우고 그림자를 입힐 때 꼭 필요했다. 그 대상이 사물이거나 인물, 심지어 신일 때조차 그랬다. 누구든 신의 얼굴을 그리기 위해서는 신의 얼굴을 조금 지워야 했다. ‘광원’. 즉 빛이 출발한 곳을 먼저 파악해 빛이 닿는 곳은 어둡게, 그렇지 않은 데는 밝게 표현하는 게 기본이었다.

 

(232)

하지만 삶은 이야기와 다를 테지. 언제고 성큼 다가와 우리의 뺨을 때릴 준비가 돼 있을 테지. 종이는 찢어지고 연필을 빼앗기는 일도 허다하겠지.’ 누군가 집을 떠나 변해서 돌아오는 이야기, 지우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알았다. 하지만 그 결말을 잘 믿지는 않았다. 누군가 빛나는 재능으로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 재능이 구원이 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에 몰입하고 주인공을 응원하면서도 그게 자신의 이야기라 여기지는 않았다.

 

(233)

우리 삶의 나침반 속 바늘이 미지의 자성을 향해 약하게 떨릴 때가 있는 것 같다고. 그런데 그런 것도 성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는데다 거의 표도 안 나는 그 정도의 변화도? 혹은 변화 없음도? 지우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지우는 그 과정에서 겪을 실망과 모욕을 포함해 이 모든 걸 어딘가 남겨둬야겠다 생각했다. 그런 뒤 저쪽 세계에서 혼자 외롭고 두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엄마와 용식에서 보여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오래전 엄마가 자신에게 늘 그래줬듯이. 활짝 펼친 그림책 앞에서 한 손으로 자신의 눈썹을 꾹 누르며 빛이 나왔습니다. “낮이 생겼습니다.”라고 해주었듯이. 아무리 같은 줄거리가 되풀이돼도 항상 새롭게 놀라는 척해주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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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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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오래 전에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시리즈를 읽고 나서 그 책에서 소개 된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이제서야 읽어보았단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워낙 밀린 독서리스트가 많아서 그랬어. 아빠가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시리즈를 읽고 나서 나쓰메 소세키의 책을 서너 권 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중에 이번에 <마음>이라는 책을 읽었단다. 아빠는 나쓰메 소세키 소설이 처음이지만, 우리나라에도 나쓰메 소세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어. 그래서 여러 출판사에거 나쓰메 소세키의 책을 꾸준히 출간하고 있단다.

아빠가 이번에 읽은 것은 현암사에서 낸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중 <마음>이란다. 나쓰메 소세키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일본 근대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1900년대 전후로 활약하던 작가란다. 1900년대 전후면 일본이 제국주의 욕망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대륙으로 침략의 야욕을 한껏 보이던 시기이지만, 이번에 읽은 <마음>에서는 그런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더구나. 평화로운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인간 관계에서 느끼는 고뇌와 갈등을 그렸다고 해야 할까. 오늘날 쓰여진 소설이라도 해도 거부감 없는 그런 이야기더구나. 그리고 술술 잘 읽혀지는 것이 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지 알겠더구나.

 

1.

주인공 나는 일본의 유명한 피서지 가마쿠라에서 선생님을 처음 만났어. 선생님이라고 하지만 자신을 직접 가르친 그런 선생님은 아니고 나이 많은 어른에게 호칭으로의 선생님이란다. 소설에서 가 계속 선생님이라 호칭하니 아빠도 그렇게 부를게. ‘는 친구가 피서지 가마쿠라로 불러서 왔는데 친구는 집에서 호출이 와서 돌아가고 혼자 지냈단다. 찻집에서 우연히 외국인과 함께 있는 선생님을 보고 며칠 동안 선생님을 살펴보다가 우연한 기회에 말을 걸어 안면을 텄단다. 그 이후 자주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도쿄로 돌아왔어. 선생님을 이성으로 좋아하는가 싶었는데, 읽다 보니 는 남자였고, 계속 읽다 보니 존경심 같은 감정이었어. 선생님은 매달 친구의 묘지를 찾았는데, 그 친구가 누구인지 묻지 않았어.

...

선생님 댁에 자주 찾아가면서 사모님과도 친해지게 되었어. 선생님 부부는 아이가 없어서 조심스럽게 물어보니 자신은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하시면서 천벌이라고 했어. 어느날 선생님 댁에 찾아가니 두 분이 싸우셔서 그냥 돌아오기도 했어. 얼마 후 선생님이 나를 찾아와 아내가 오해를 해서 싸웠다고 했어. 그런데 무슨 오해인지는 이야기하지 않으셨단다.

...

시간이 흘러 나는 도쿄제국대학생이 되었어. 선생님도 같은 학교 출신이었으니 선생님의 후배가 된 거야.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선생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머물렀어. 사람들도 거의 만나지 않으셨어. 사모님이 말씀하시길 원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고 했어. ‘는 선생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어느 날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했어. 선생님은 사랑을 죄악이라고 단정짓듯 이야기를 했단다. 젊은 시절 어떤 사연이 있으셨던 건가?

….

어느날 고향에 계신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시다고 하여 연락이 와서 갑작스레 가야 했어. 돈이 부족해서 선생님께 돈을 빌려서 고향으로 내려갔고 다행히 아버지는 다시 기력을 회복하셔서 다시 도쿄로 올라왔어. 하지만 아버지의 병은 불치병이라서 고칠 수 없는 병이었어.

시간이 흘러 대학 졸업 논문을 준비해야 하는데, ‘는 그동안 선생님과 많은 이야기를 해서 선생님의 전공과 관련된 내용으로 논문을 쓰려고 했어. 그래서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을 했지만, 선생님은 학교에 물어보라면서 거절했단다. 졸업 논문을 끝내고 선생님을 뵈러 갔어.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불치병에 걸리신 아버지 이야기가 나왔어. 그러자 선생님은 아버지한테 미리 재산을 받아놓으라는 충고를 했어. 선생님 자신은 예전에 착한 친척한테 배신을 당한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말이야. 기회다 싶어 궁금했던 선생님의 과거를 물어보았는데, 선생님은 나중에 해주겠다면서 입을 다무셨단다.

 

2.

1912 7 30일 천황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어. 소설에서는 서거라는 단어로 썼는데 아빠 입장에서는 그냥 죽었다고 하는 표현이 나을 것 같다. 대학 졸업을 하고 고향집에 내려와 있었어. 당시 됴쿄제국대학을 나오면 취직은 따놓은 당상이라서 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부모님은 그렇지 않은가 보구나. 부모님은 선생님한테 취직자리를 부탁해보라고 성화여서 편지를 보냈어. 하지만 한동안 답장이 오지 않았단다.

9월이 되어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다시 도쿄로 가기로 했어. 그런데 도쿄로 오기 하루 전날 아버지가 쓰러지셔서 도쿄로 가는 것은 연기를 해야 했단다. 잠깐 정신 차리신 아버지가 또 쓰러지면서 위중해 보였어. 형과 여동생에게 전보를 보냈단다. 그렇게 고향집에서 아버지를 보살피고 있었는데 어느날 선생님으로부터 등기우편이 왔어. 분량이 꽤 되었어. 열어보니 궁금했던 선생님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단다.

….

선생님의 고등학교 때 부모님 두분 모두 장티푸스로 돌아가셨다고 했어. 그래서 숙부가 선생님을 보살펴주었단다. 어차피 선생님은 도쿄에서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학 때만 고향집에 내려갔었거든. 고향집은 숙부의 식구들이 머물면서 관리도 해주고 그랬단다. 방학 때 집에 내려올 때마다 숙부는 결혼을 하라고 하셨어. 결혼해서 집에 와서 아버지의 대를 이으라고도 했어. 그리고 숙부의 딸 그러니까 선생님의 사촌과 결혼하라고 했어. 선생님은 당시에는 결혼에 전혀 뜻이 없었기 때문에 거절했어. 그것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다음 방학 때 집에 내려오니 숙부 식구들이 선생님을 다르게 대했어. 숙부가 선생님의 재산도 빼돌리고 난 후였지. 아버지의 유산 중 턱도 모자란 금액만 선생님한테 주었어. 그걸 받은 선생님은 배신을 느끼고 다시는 고향이 오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도쿄로 향했어.

대학생이 된 선생님은 하숙을 하게 되었는데, 하숙집 딸을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단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도 딸을 선생님과 맺어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았어.

선생님에게는 중학교부터 알고 지낸 K라는 친구가 있었어. K는 스님의 아들로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입양되어 양부모 밑에서 자랐단다. 그런데 K가 대학교 때 부모님의 뜻과 다른 진로를 선택해서 심하게 싸우고 K가 끝내 진로를 바꾸지 않자, 양부모님을 화를 내며 다시 생가로 보냈고, K의 친아버지의 설득에도 뜻을 굽히지 않자, 친아버지마저 의절을 했다는구나. 선생님은 이런 K를 계속 응원하고 지지해 주었다고 했어. 갈 곳 없는 K를 선생님이 자신의 하숙집으로 데리고 왔단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K와 하숙집 딸과 함께 있는 횟수가 늘어나는 거야. 선생님은 어쩌지도 하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어.

선생님은 K와 보슈 반도라는 곳으로 여행을 갔어. 겉으로는 친하게 다녔지만 속으로는 계속 신경이 쓰였어. 여행 후 하숙집 아가씨는 예전처럼 선생님한테 다시 살갑게 굴었어. 그런데 우연히 외출했다가 K와 아가씨가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았단다. 그리고 얼마 후 K가 선생님한테 하숙집 아가씨를 좋아한다고 했단다. K는 당황해서 아무런 말도 못했어. 그 이후 선생님은 K를 거리 두게 되었는데, K는 자신이 하숙집 아가씨를 좋아하는 것에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어. 엄청 짜증나겠구나. 선생님은 무난하면서도 두루뭉실하게 이야기를 하면서 정작 K가 원하는 답은 하지 않았단다. K는 선생님이 하숙집 아가씨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나 보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선생님은 K보다 먼저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아가씨와 결혼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단다. 아주머니는 그 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좋다고 했어. 그렇게 이야기를 하자 선생님은 K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애가 탔어. 선생님도 그렇고, K도 그렇고 사랑에는 아마추어인 것 같구나. 며칠 뒤 아주머니가 K에게 선생님이 청혼한 소식을 이야기를 했더니 K는 심하게 당황한 것 같다면서 선생님한테 이야기해주었어.

아주머니 입장에서는 당연히 선생님이 K에게 이야기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대. 아빠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구나. 그런데 K는 평상시처럼 행동했어. 오히려 그것 때문에 선생님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어. 선생님은 K에게 자신의 진심을 다 이야기하겠다고 다짐을 했어. 그런데 K가 갑자기 자살을 했단다. 선생님은 충격을 받았단다. 그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K가 남긴 유서에는 아가씨에 대한 내용은 하나도 없고, 개인 신상 때문에 자살한다는 내용만 있었어. 하지만 선생님은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에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지냈어. 결국 하숙집 아가씨와 결혼했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K뿐이었어.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거야. 머릿속에 들어찬 K때문에 일도 할 수 없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 그저 괴로워하고 미안해하고 과거에 갇혀 있어야 했어. 결국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자살을 한다는 내용으로 선생님의 등기는 끝을 맺었단다.

….

그 사건이 있고 나서 선생님의 세계는 작고 작은 마음 속에 갇혀 지냈구나. 사랑도 그 세상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고, 그 세상에서 나오려고 스스로 노력도 하지 않고 말이야. 선생님의 행동이 친구 K의 자살의 원인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 K의 마음이 더 큰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구나. K가 살아온 과거를 봐도 평범한 삶이라고 할 수 없었으니힘든 과거를 잊기에 충분한 사랑을 만났다가 끝나버렸으니 힘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 K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거야.

선생님도 그런 아픈 과거를 잊고 마음의 감옥에서 나오려는 노력을 했어야 했는데 아쉽구나. 결국 자살한 선생님은 저 세상에 가서 K와 만났을까? K가 자살한 선생님을 보고 잘 했다고 칭찬했을까? 그 전에 K와 진정한 친구라면 서로의 마음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으면 어땠을까 생각이 드는구나.

….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나는 그분을 늘 선생님이라 불렀다.

책의 끝 문장: 아내가 내 과거에 대해 가진 기억을 되도록 순백의 상태로 있게 해주고 싶은 것이 나의 유일한 바람이니 내가 죽은 뒤에도 아내가 살아 있는 이상은 자네에게만 털어놓은 내 비밀로서 모든 것을 가슴에 묻어두게.


"예전에 그 사람 앞에서 무릎을 끓었다는 기억이 이번에는 그 사람 머리 위에 발을 올리게 하는 거라네. 나는 미래의 모욕을 받지 않기 위해 지금의 존경을 물리치고 싶은 거지. 난 지금보다 한층 외로움 미래의 나를 견디는 대신에 외로운 지금의 나를 견디고 싶은 거야. 자유와 독립과 자기 자신으로 충만한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 이 외로움을 맛봐야 하는 거겠지." - P50

"시골 사람들은 도회지 사람들보다 오히려 나쁘다고 해야 할 사람들이지. 그리고 지금 자네는 친척들 중에 이렇다 하게 나쁜 사람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지? 하지만 나쁜 사람이라는 부류가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세상에 그렇게 틀에 박은 듯한 나쁜 사람이 있을 리 없지. 평소에는 다들 착한 사람들이네. 다들 적어도 평범한 사람들이지. 그런데 막상 어떤 일이 닥치면 갑자기 악인으로 변하니까 무서운 거네. 그래서 방심할 수 없는 거지." - P82

나는 아버지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아버지를 떠난다면 부모와 자식 사이의 정이라는 점에서 미련이 남을 뿐이었다. 나는 아직 선생님의 대부분을 모르고 있었다. 이야기해주겠다고 약속한 선생님의 과거도 아직 들을 기회가 없었다. 요컨대 선생님은 나에게 어스레했다. 나는 반드시 그곳을 지나 밝은 곳까지 가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았다. 선생님과의 관계가 끊기는 것은 큰 고통이었다. 어머니가 좋은 날을 잡아줘 떠날 날이 정해졌다. - P123

그토록 여자를 업신여겼던 내가 아가씨는 도저히 업신여길 수 없었네. 내 이론은 아가씨 앞에서는 무용지물일 만큼 힘을 쓰지 못했지. 나는 아가씨에게 거의 신앙에 가까운 애정을 갖고 있었네. 내가 종교에만 쓰는 이 말을 젊은 여자에게 쓰는 것을 보고 자네는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도 굳게 믿고 있네. 진정한 사랑은 신앙심과 그다지 다르게 않다는 것을. 나는 아가씨의 얼굴을 볼 때마다 자신이 아름다워지는 기분이 들었네. 아가씨를 생각하면 고상한 기분이 금방이라도 자신에게 옮겨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 만약 사랑이라는 불가사의한 것에 양쪽 끝이 있고 높은 쪽 끝에는 신성한 느낌이 작동하고 낮은 쪽 끝에는 성욕이 작동하고 있다면 나의 사랑은 분명히 제일 높은 쪽에 매달려 있었을 거야. 나는 물론 인간으로서 육체를 떠날 수 없는 몸이지. 하지만 아가씨를 보는 내 눈은, 아가씨를 생각하는 내 마음은 전혀 육체의 냄새를 띠지 않았어. - P178

죽었다 생각하고 살아가려고 결심한 내 마음은 때때로 외계의 자극에 펄쩍 뛰어올랐지. 하지만 내가 어떤 방면으로 나아가려고 생각하자마자 어딘가에서 엄청난 힘이 나와서 내 마음을 꽉 쥐고 전혀 움직일 수 없게 하네. 그리고 그 힘이 나에게 너는 뭔가를 할 자격이 없는 놈이라며 억누르듯이 말하지. 그러면 나는 그 한마디에 곧 위축되고 마네. 얼마쯤 지나 다시 일어나려고 하면 다시 단단히 죄어오지. 나는 이를 악물고 왜 남을 방해하는 거냐고 호통을 친다네. 불가사의한 힘은 차가운 목소리로 웃지. 네가 잘 알 텐데, 하는 거야. 나는 다시 축 늘어지고 마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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