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십자군전쟁은 종종 낭만적으로 묘사되듯이, 이교도로부터 성지를 탈환한다는 단순히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의도만은 아니었다. 이 유럽 최초의 기독교연합은 한편으로 홍해를 가로막는 봉쇄의 사실을 깨부수고자 했다. 유럽을 위해, 기독교 신앙을 위해 동양과의 무역의 길을 열어놓고자 하는 목적의 몸짓이었다. 그러나 이 충돌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들은 이집트를 이슬람교도들에게서 빼앗아오지도 못했으며 이슬람교도들은 여전히 인도로 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 인도로 가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또 다른 길을 찾고자 하는 욕구가 싹튼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눈길이 향한 곳은 바로 바다였다.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바르롤로뮤 디아스와 바스코 다 가마가 남쪽으로, 그리고 카보트가 라브라도를 향해 북쪽으로 떠날 수 있었던 대담함은, 그 무엇보다도 서양을 위해 간세도 물지 않고 방해도 받지 않고 인도로 갈 수 있는 자유로운 항로를 발견해서 이슬람의 패권을 꺾어놓고 말겠다는 분명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31)

그러나 포르투갈 왕자 엔리크는 이렇듯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나섰다. 성경 말씀처럼 맨 마지막에 있던 자가 맨 앞에 설 수도 있는 일을 해내는 것이 그의 필생의 과제가 되었다. 지리학의 교황이라는 프톨레메우스가 잘못 알고 있었다면? 때때로 기묘하고 낯선 나무들이 거대한 파도에 실려 해안으로 밀려오는 것으로 보아 만일 대서양이 어딘가에서 끝나 미지의 나라들로 이어지고 있다면? 그리고 회귀선 저편의 아프리카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면? 아직은 탐구되지 않은 이 대륙을 따라 주항할 수도, 인도양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던 그리스 학자의 주장이 허풍이었다면?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포르투갈은 서쪽으로 가장 멀리 나가 있으므로 모든 것을 발견하는 진정한 도약판이 될 테고, 인도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항로를 가진 셈이다. 대양 때문에 버림받은 것이 아니고,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항해를 위해 태어난 나라가 될 것이다. 작고 힘없는 포르투갈을 항해의 일인자로 부상시키고, 지금껏 폐쇄 영역으로만 여겨지던 대서양을 항로를 바꾸고야 말겠다는 커다란 소망은 엔리크 황태자를 일생동안 사로잡았다.


(69)

그는 이미 배가 벨렘에 입항할 때부터 놀라기 시작하였다. 바스코 다 가마가 출항할 때 그를 축복해주던 낡고 나지막한 교회 대신 이제 인도의 향료 덕분에 부강해진 조국의 첫 번째 징표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하고 화려한 대사원이 완성되어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변화가 느껴졌다. 예전엔 통행도 뜸했던 강에는 이제 돛대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고, 강변의 조선소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더 장대한 함선들을 만들어내느라고 일꾼들이 부지런히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항구에는 깃발은 깃발끼리, 돛대는 돛대끼리 자국선이건 외국선이건 간에 빽빽하게 모여 있었고, 정박소와 물품창고는 터질 것만 같았다. 새로 쌓아올린 웅장한 왕궁들 사이로 뻗은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몰려다니며 북적대고 있었다. 해외상관과 환금창구, 중개업소에는 갖가지 언어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인도를 약탈한 덕분에 리스본은 이제 10년이 채 지나기 전에 소도시에서 세계적인 도시요, 사치와 향락의 도시가 된 것이었다.


(72)

탐험의 시대는 거대한 배은망덕의 시대였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을 위해서 전세계를 정벌해나간 저들 정복자들이 국왕에게 받은 대가는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콜럼버스는 사슬에 묶인 채로 세비야에 돌아왔고, 코르테츠는 왕의 총애를 잃어버렸고, 피자로는 살해되었으며, 남태평양을 발견한 누녜즈 데 발보아는 참수형에 처해졌다. 포르투갈의 투사이자 시인인 카모엔은 비열한 시골 관리들에 의해 누명을 쓰고 동지인 위대한 세르반테스처럼 몇 달, 몇 해를 오물통 같은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카디스와 세비야의 골목길엔 귀향 선원들과 병사들이 불구가 되어 피폐해진 모습으로 열병에 시달리면서 거지떼처럼 헤매고 있었다.


(115)

더 이상은 마젤란도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위해 바랄 것이 없었으리라. 그러나 좀더 경이롭고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아직 어린 칼 5세는 말하자면 소극적이고 결단력이 부족한 성격이었는데, 성격과는 달리 이 원정대의 항해에 있어서는 열정적인 후원에 나섰다. 마젤란이 가졌던 남자다운 확고한 태도 때문인지, 아니면 이 원정의 대담한 때문인지, 무엇인가가 이 젊은 군주에게 특별한 열정을 불러일으켰음이 분명했다. 매주마다 진척사항에 대해 보고하도록 하는 등 누구보다도 그 스스로가 가장 장비와 항해 준비에 열심이었다. 때문에 일에 장애가 생길 때면 마젤란은 국왕에게 알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왕의 서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다. 평소에는 의지가 박약하고 남의 말을 잘 듣는 이 황제는 그의 긴 통치기간 동안 거의 유일하게 굳건한 신의를 지키며 이 위대한 이념을 실천해나갔다.


(118)

마젤란은 탐험을 준비해나가는 과정에서 그 어느 것도, 그것이 가장 하찮은 것일지라도 결코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자기에게 생명을 내맡긴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면서 세세한 사항까지 점검하였다. 또 그런 태도로 카사 데 라 콘트라타 시온과 관리들, 상인들, 납품업자, 일꾼들과 끈질기게 협상을 하였다. 영수증도 재검토되었고, 배의 밧줄 하나, 판자 하나, 무기 하나까지 직접 조사하였다. 돛대 꼭대기에서부터 선미에 이르기까지 다섯 척의 배를 모두 자기 몸처럼 자세히 꿰뚫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젤란은 함대를 정비해나가면서, 동시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들의 출항을 막으려는 사람들의 시기와 적대심에 대항해야만 했다. 한 사람이 세 개의 진영과 맞붙은 장렬한 싸움이었다.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에 대한 싸움이었고, 물질적으로 엄청난 차원의 사업에 가해지는 압력에 대한 싸움이었다. 이 모든 저항들은 어떻게 극복해나가는가가 바로 관건이었다.


(148)

1519년 9월 20일 화요일 아침이 밝아왔다. 세계사적으로 기억되어야 할 날이었다. 닻이 올려지고, 돛이 펄럭이고, 대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육지는 점점 멀어져 갔다. 인류 역사상 가장 용감하고, 가장 원대한 탐험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220-221)

1520년 11월 22일, 그의 명령에 따라 배는 정어리강의 항만을 떠났고, 며칠 후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였다(앞으로 마젤란 해협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해협이 끝나는 지점에서 마젤란은 캅 데세아도(열망의 곶)라고 명명한 곶 뒤쪽으로 유럽의 배가 아직 항행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바다가 끝없이 넘실대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서쪽 수평선 뒤로 보물의 섬인 향료군도가 놓여 있을 것이었다. 그 뒤로는 동양의 제국들, 중국, 일본과 인도가 있을 것이고 계속해서 가다 보면 고향인 스페인과 유럽대륙이 나타날 것이다. 지구가 개벽한 이래 그 누구도 통과해보지 못한 대양으로 돌진하기에 앞서 한 번 더, 마지막으로 휴식을 취했다. 1520년 11월 28일, 닻을 올리고 깃발이 올려졌다. 축포를 쏘아올리면서 세 척의 작은 배는 마치 생사의 결투를 앞둔 투사가 위대한 적수에게 인사하듯 낯선 바다에 경의를 표했다.


(223)

그러나 마젤란은 철저히 허공 속으로 떠나고 있었다. 유럽의 항구와 집을 떠나온 것이 아니었고, 낯설고도 삭막한 파타고니아에서 출발해 온 것이다. 승무원들은 몇 달 간에 걸친 강행군으로 기진맥진이 되었다. 배고픔과 궁핍이 그들을 따라오는가 하면, 저기 앞에서 또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복은 낡았고, 돛이란 돛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밧줄은 삭아버렸다. 벌써 몇 주일이나 사람이라고는 만나보지도 못했고, 술도, 여자도, 신선한 고기와 빵은 구경도 못하였다. 이런 망망대해에 버려져 있자니 적시에 고향으로 도주해버린 대담한 동료들이 내심 부럽기도 했으리라. 세 척의 배는 20일, 30일, 40, 50, 60일 동안 계속해서 나아가기만 할 뿐이었다. 아직도 육지는 나타나지도 않고, 육지가 가까워 온다는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또 일주일이 지나고, 또 한 주일, 또 한 주일, 그렇게 해서 1백 일이 지났다. 콜럼버스가 대양을 세 번 횡단한 시간이었다. 수천, 수만의 무의미한 시간을 흘려보내며 마젤란의 함대는 그저 텅 빈 공간 속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235)

그리고 이 순간 마젤란은 자신이 목적지에 도착했고, 자신의 업적이 완성되었음을 알았다. 그는 동쪽에서 출발하여 그가 12년 전에 도착한 바 있던 말라야 언어권의 한 변두리에 다다른 것이었다. 그토록 열망하는 향료의 섬에 도달하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그 섬을 찾게 되던, 아니면 다른 사람이 그곳을 찾던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업적의 본질은 향료의 섬이 아니라 누구든지 바다를 따라 계속 항해하면, 그것이 태양이 지는 쪽이든 뜨는 쪽이든 상관없이 자기가 출발했던 지점에 되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그가 증명했다는 것이다. 수천 년 전부터 철학자들이 추측해 왔고, 꿈꾸어 왔던 일이 한 인간의 용기에 의해 믿을 수 있는 사실이 된 것이다. 진정으로 지구는 둥글었다. 한 인간이 지구를 둥글게 한바퀴 돌아온 것이다.


(258)

사령관이 누군지를 알았기 때문에 이제는 주로 주로 그를 겨냥했다. 벌써 두 번이나 투구를 머리에서 떨어뜨리기도 했다. 사령관은 몇 명 남지 않은 병사들과 함께 용감한 기사로서 더 이상 후퇴하려 하지 않고 자기 위치를 잘 지켰다. 이렇게 한 시간 이상을 대치해서 싸웠는데, 마침내 인디오 한 명이 사령관이 얼굴에 갈대로 만든 투창을 던졌다. 사령관은 노하여 이 공격자의 가슴을 창으로 찔렀다. 창이 찔려 죽은 사람의 몸에서 빠지지 않자 사령관은 이제 칼을 뽑으려 했지만 오른팔이 창에 찔려 마비가 되었기 때문에 절반 정도밖에 뽑지 못했다. 이를 보고 적군은 한꺼번에 그에게 달려들었고, 그 중 하나가 단칼에 왼쪽 다리를 내리치자 사령관은 땅에 얼굴을 박고 쓰러져 버렸다. 그러자 인디오들은 모두 그에게 덮쳐 창이나 다른 무기들을 가지고 그의 몸을 마구 찔러댔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우리의 거울이자 빛이요 위안이었던 지도자의 생명을 앗아가 버렸다.


(283-284)

베르데 곶에서의 체류가 시간도 짧고, 위험하기도 했지만 씩씩한 기록자 피가페타는 마지막 순간에 그가 그토록 찾아헤매던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다. 식료품을 사려고 해변까지 갔다온 선원들이 놀라운 소식을 전해왔는데, 육지는 목요일이라는데 배에서 수요일이 틀림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거의 3년 동안 매일같이 일지를 적어온 파가페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그렇게 해서 한 주가 지나고, 1년이 지나도록 날짜를 계산해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하루를 모르고 지나쳐버린 것일까. 그는 자기처럼 매일 선박일지를 쓰는 키잡이 알보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의 기록에도 아직 수요일이라는 것이었다.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면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루가 달력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틀림없었다. 베르데 곶에서 처음으로 관찰한 새롭고 중요한 이 현상은 전생애에 걸쳐 그를 흥분시키고 몰두하게 만들었다.


(286)

이제 하룻밤, 하루 낮, 이제 하룻밤만 지내면 된다. 단 하룻밤. 그리고 마침내(모두들 갑판으로 뛰쳐나가서 행복감에 전율하며 한 덩어리로 얼싸안았다) 산루카에서 바다와 만나는 구아달키비르 강이 육지 한가운데로 은띠처럼 반짝이며 흐르고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3년 전 265명이 마젤란의 지휘 아래 다섯 척의 배를 타고 출발했던 것이다. 18명의 선원들은 비틀거리면서 배에서 내리자 간신히 무릎을 꿇고 이 딱딱하고도 고마운 고향의 흙에 입을 맞추었다. 1522년 9월 6일, 항해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업적이 마침내 그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297)

한 인간의 생의 비밀은 언제나 죽음의 순간에 가서 밝혀지는 법이다. 그의 이념이 승리로 채워지는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비로소 이 고독한 인간의 내적인 비극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언제나 과업의 짐만을 짊어질 뿐 마지막 성공을 기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운명은 수백만의 무리들 속에서 이 어둡고, 말이 없고 스스로 벽을 쌓고 사는 사람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이승에서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과 자신의 목숨조차도 이념을 위해 절대적으로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부역으로 위해 불러냈고, 즐거움의 자리에는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날품팔이처럼 고마워하지도 않고 은혜를 내리지도 않은 채 이루어놓은 성과에서 쫓아버렸다. 다른 사람들이 그가 이룬 명예를 거두어들였고, 다른 이들이 이윤을 챙겼고, 다른 이들이 축제를 벌였다. 그가 모든 면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엄격했던 것처럼 운명도 이 냉혹한 군인에게 대항하고 싶어 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온 힘을 다해 원했던 단 하나만이 그에게 허용되었다. 그것은 지구를 일주하는 항로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귀향의 승리라는 보다 복된 부분은 그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단지 바라만 보고 만져보기만 할 뿐, 자신의 머리에 승리의 월계관을 올리려고 하자 운명은 그에게 ‘그만’이라고 말하며 간절히 내미는 손을 거부했다.


(301)

그러나 역사 속에서는 세속적인 이익이 어떤 업적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를 지속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사람은 창조적인 의식을 고양시키는 자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젤란의 행위는 당시 모든 행위들을 능가한다. 그의 명성 중에서 가장 특별한 것이라면 다른 지도자들처럼 자신의 이념을 위해 수천, 수십만의 목숨을 희생시킨 것이 아니라, 단 하나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토록 영웅적인 자기희생으로 인해 미지의 세계와의 성스러운 전쟁을 위해 떠난 다섯 척의 보잘것없고, 힘없고, 외로운 배들의 찬란한 용기가 영원히 잊히지 처음으로 실행에 옮기려 했고, 함대의 마지막 배 한 척이 이를 완수했다는 점에서 마젤란 자신도 잊히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광주 아리랑 2
정찬주 지음 / 다연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지난 번에 이어서 정찬주 님의 <광주 아리랑> 2권을 이야기해줄게. 1권이 1980년 5월 14일부터 5월 21일까지라고 했는데, 5월 21일은 1권에서 2권으로 이어진다.

5월 21일.

이제 광주 시민들은 계엄군의 무기에 맞서 광주 시민군이 되었단다.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여고생 등은 부상 당한 사람들의 부족한 혈액을 위해 헌혈을 했단다. 피를 보관한 헌혈 용기가 부족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참여를 했어. 계엄군의 총부리는 이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단다. 여고생인 박금희는 헌혈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도중 공수부대의 총격으로 사망하고 말았단다.

종교계에서도 더 많은 종교인들이 시위대에 동참하기 시작했어. 불교에서는 진각 스님 등 많은 스님들이 동참했고, 특히 적십자사에서 시민군을 돕는 일을 했어. 공수부대는 적십자에도 총격을 하기 진각 스님 등 부상자들이 속출했단다. 시민군도 성과를 했는데 전남도청을 점령했단다.

….

5월 22일.

갑자기 전남대와 종합운동장에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이 철수하기 시작했어. 시민들은 계엄군이 왜 철수했는지 이유는 몰랐지만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좋아했단다. 전남대학교 학생과장인 서명원은 계엄군들이 있던 대학교 시설들을 정리하고 청소를 했단다. 그리고 교내 이곳 저곳에서 발견된 시신들은 병원으로 옮기는 듯 학교를 정상화하기 위해 분주했단다. 전남대 교수였던 송기숙, 명노근은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나서 서울로 피신했었는데, 죄책감에 다시 광부로 돌아왔단다. 계엄군이 물러나고 시민대표수습위원회가 결성되어 계엄군과 협의하기 시작했어. 그런데 협의 내용 중에 시민군의 총기를 반납하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이것이 시민들의 분노를 유발시켰단다. 계엄군을 어떻게 믿고 총기를 반납하냐는 의견이 많았어. 그래서 시민군 일부는 시민대표를 인정하지 않았어. 도청을 장악한 학생들은 별도 조직을 만들려고 했고, 명노근 교수에게 위원장을 부탁했어. 그렇게 임시학생수습위원회를 조직했단다.

도청에서 시민군들을 만났는데, 시민군들은 지금 할 것은 수습이 아니라 전투와 항쟁이라고 했어. 송기숙 교수는 그런 시민군을 향해 지도부가 필요하다고 시민군을 설득했단다. 그렇게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임시학생수습위원회가 만들어졌지만, 시민군들 중에는 그들에게 동참하지 않는 세력도 있었어. 시민군들은 특별히 조직을 만든 것은 아니고, 자연스럽게 도청상황실장인 박남선이 리드를 하게 되었어. 시민군은 기동타격대를 결성하여 계엄군의 습격에 대비를 했어. 한편 수습위원회는 계엄군과 협의 항목 중 하나인 무기 회수를 해야 한다고 했어. 그렇게 회수된 무기와 계엄군에게 역류된 시민들과 교환하려고 했어. 그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시민군들은 뭔가 찜찜했어. 무기를 반납하고 나면 계엄군이 다시 쳐들어올 것 같았거든. 기동타격대로 활동하던 시민군들이 낙오한 공수부대원을 체포해서 데리고 왔어. 일부 시민들은 그를 죽이자고 했지만, 박남선은 포로를 죽이지 않는 법이라며 그를 감금하자고 했어. 나중에 시민군과 교환할 수도 있다고 시민군을 설득했단다. 그런데 이렇게 의로웠던 사람이 나중에 윤석열을 지지하게 되었으니, 배신도 그런 배신이 없을 것 같구나.

…

5월 23일.

시민수습위원회와 임시학생수습위원회가 별도로 활동하고 있었어. 조비오 신부와 명노근 교수는 회수한 총기를 들고 계엄군을 찾아가 협상을 벌였지만 원활하지는 않았다는구나. 무기 일부와 시민군들만 교환하고 끝났다고 했는데, 지나고 생각하면 이는 오판이었단다. 시민군들이 더 정확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어. 무기를 반납하고 나면 걸림돌이 사라진 계엄군이 다시 진격해 올 수 있었거든. 그렇게 당하고 계엄군과 그의 배후 전두환을 믿다니, 그들의 생각이 짧았던 것 같구나. 여전히 시민군들 사이에서는 무기회수에 찬반 논란이 이어졌어. 무기 회수를 결정한 시민군의 어떤 소대는 무기가 없어 더 이상 활동할 수 있는 것이 없어 해체하기도 했단다.

그 동안 시민들이 많이 죽어서 시신을 모슬 관이 부족해서 화순으로 관을 구하기 위해 시민들이 버스를 타고 가고 있었는데, 구남 마을에서 계엄군이 버스에 총격을 가해서 버스에 타고 있던 시민 아홉 명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단다. 이 소식을 들은 시민군이 구남 마을에 출격했다가 또 많은 사람들이 죽고 말았단다. 계엄군이 철수했다고 하지만 그들의 폭력성과 무자비함은 철수하지 않았단다.

…

5월 24일.

무기회수 때문에 시민군들은 수습위원회에 대한 불만이 많았어. 그리고 무기가 없어져서 불안하기도 했어. 앞서 몇 번 이야기한 것처럼 계엄군이 다시 쳐들어오면 방어할 수단이 없었던 거야. 수습위원회 내부에서도 무기 회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어 갈등을 빚기도 했어. 이것 때문에 시민들의 궐기대회까지 하면서 불만을 토로했단다.

=====================

(185)

이종기 변호사의 제안에 장세균 목사와 남재희 신부가 조비오 신부를 돕겠다고 나섰다. 김성용 신부는 시민수습위원들의 주고받는 말에 흥미를 잃었다. 광주시민을 살상한 계엄사의 사과 없이 무기만 갖다 바치면 수습이 될 것이라는 말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김성용 신부는 광주시민의 희생을 줄이겠다고 무기를 회수하러 나선 조비오 신부와는 생각이 달랐다. 일부 수습위원이 가해자인 계엄사 측에 끌려다니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어떤 조건을 요구하는 것은 협상이 아니었다. 무기를 회수해 오면 연행자를 석방하겠다, 보복을 금지하겠다, 광주에 재진입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본말이 바뀐 협상이었다. 김성용 신부는 수습위원의 태도를 비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

특히 박효선은 무기 회수에 강하게 반대하면서, 계엄군에게 속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어.

=====================

(187-188)

“저는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극단 광대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는 동리소극장 대표인 박효선입니다. 비도 오고 있으니 저는 군더더기의 말을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겄습니다. 계엄사 측은 무기를 회수해어 갖다 주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처럼 시민수습위원들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계엄사 측이 순진하고 순수헌 시민수습위원들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무기를 갖다 주는 것은 신군부 야욕을 도와주는 꼴입니다. 계엄사 측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시민들이 무기로 철저하게 무장허고 있어야만 계엄군의 진입을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며칠만 기다리십시오. 광주항쟁의 불길이 서울, 부산, 대전 등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갈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항쟁은 세계 각국의 지지를 받을 것이고 신군부는 국제적인 비난에 직면하여 스스로 권력 찬탈의 야욕을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

그런 와중에 계엄군이 다시 공격한다는 소문이 돌았어. 도청 안에서는 남아 있는 무기로 재무장을 했단다.

…

계엄군 사이에서는 어이없는 사고가 발생했어. 계엄군 안의 교도부대와 공수부대 사이에 서로 적인 줄 알고 오인사격으로 공수부대에 사상자가 다수 발생한 사건이란다. 공수부대는 이 오인사격사건 때문에 화가 잔뜩 나 있는 상태고, 이에 대한 분풀이를 위해 시민들에게 총을 휘둘렀단다. 그래서 놀고 있던 중학생들과 초등학생들을 포함하여 송암동 주민들을 죽였단다. 그야말로 학살이었어.

…

1.

5월 25일.

조비오 신부는 광주 시내를 돌면서 시민군을 설득하여 수천여 종의 총기를 회수했단다. 조비오 신부는 이렇게 무기 회수만이 계엄군과 협상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야 더 이상 광주 시민들의 희생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단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은 이해한단다. 시민군들이 무장하여 계엄군과 맞붙게 되면 희생자가 어마어마할 것 될 테니… 일단 계엄군을 믿어보고 평화적으로 이 사태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무기 회수를 해서 평화적인 대화로 풀어보려고 해던 것이란다. 하지만 계엄군은 계엄군이고, 여전히 시민군들은 이 의견에 반대를 했단다. 무기 회수가 제대로 되지 않게 되자 계엄군과 협상은 흐지부지되었고, 이제 무기 회수 반대 세력의 입김이 더 세졌어. 그리고 무기 회수에 찬성했던 사람들 일부는 무기를 반납하고 도청을 떠나갔단다. 무기 회수 반대 세력을 중심으로 시민학생투쟁위원회를 결성해서 도청에서 무기로 재정비했단다.

….

5월 26일.

시민군들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어. 계엄군의 장갑차와 탱크가 다시 도심에 나타났단다. 시민수습위원회는 계엄군 김기석 소장을 만나 항의를 했지만 김기석은 자신의 영향력 밖이라고 했어. 그래서 이번에는 계엄분소에 와 있던 신군부의 핵심 소준열 준장을 찾아가 항의를 했지만, 그도 명령이라 어쩔 수 없다는 한심한 답변만 했어. 그들은 명령에 따라 밤 12시에 진격할 것이라고 했어. 더 높은 곳에서 내려온 하달… 살인마 전두환의 명령이었나 보구나.

밤 12시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 김성용 신부는 서울로 가서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도움을 청하기로 했어. 홍남순 변호사는 총리와 대통령을 만나겠다고 서울로 가려고 했으나 도중에 계엄군에게 잡혀 영창에 갇히고 말았어. 시민군도 계엄군들이 밤 12시에 진격해 온다는 소식을 들었어. 이 소식을 듣고 겁을 먹은 시민들 일부는 집으로 돌아갔단다. 사람이라면 당연한 선택일 것 같구나. 누구도 그들을 탓할 수 없었어. 목숨을 내놓고 끝까지 싸우려는 이들만 남아서 도청과 YWCA에서 무장하고 계엄군에 결사항쟁하기로 했단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

5월 27일.

완전무장한 계엄군과 공수부대가 공격을 해봤는데, 시민군들이 저항을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단다. 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하고, 일부는 항복을 했지만 항복한 이들도 무차별로 폭행 당해 부상을 입었단다. 그렇게 아름답지만 슬프고 아픈 시민군의 저항은 끝이 났단다. 그 이후 오랜 시간 동안 광주 시민들은 1980년 5월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야 했단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  2024년 12월 3일, 40여년 만에 대한민국에서 다시 계엄령이 내려졌단다. 야밤에 독재자를 꿈꾼 돼지가 선포한 계엄령에 대부분의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광주를 떠올렸을 거야. 그래서 그 밤에 시민들은 국회로 몰려가서 온 몸으로 탱크를 막아 섰단다. 그리고 계엄군으로 참여한 군인들도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소극적으로 대응해서 계엄을 실패할 수 있었단다. 이 모든 것이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학습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었단다. 다시 한번 우리나라 국민 전체는 광주에 빚을 진 건 같더구나. 다시는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예전부터 보고 싶었던 드라마 <오월의 청춘>을 보았단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인데, 약간 설정에 어색한 부분이 있었지만, 잘 만들어진 드라마인 것 같더구나. 나중에 너희들도 여유가 생기면 한번 봐도 좋을 것 같구나.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창작물은 앞으로도 꾸준히 나와서 잊지 않게 해주었으면 좋겠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광주 시위대는 담양, 목포, 해남까지 시위차를 타고 달려갔다.

책의 끝 문장: 끝내 총을 들지 못한 자신이 비겁하고 서럽고 수치스러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광주 아리랑 1
정찬주 지음 / 다연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예전에 정찬주 님의 <광주 아리랑>(전 2권)이라는 책을 샀는데 이 책은 꼭 5월에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깜박하고 5월이 그냥 지나기를 두어 해. 올해는 꼭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다가 5월에 읽긴 했단다. 그런데 아빠의 게으름으로 인해 이제서야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는구나. 매년 5월 18이면 5.18광주민주화운동기념식을 진행한단다. 그런데 올해는 스타벅스의 몰상식한 이벤트 때문에 난리가 있었단다. 누가 봐도 5.18광주민주화운동기념일을 조롱하는 듯한 탱크데이 이벤트는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것 같더구나. 이게 우리나라 일부 사람들의 역사인식인가, 안타깝기도 했어.

5.18을 다룬 책들, 영화들, 드라마들이 이미 많이 있지만 정찬주 님은 왜 또 5.18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을까? 지은이는 자신들의 지인들을 비롯하여 5.18을 직접 겪은 사람들이 많다면서, 평범한 광주시민들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쓰고 싶었다고 하더구나.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총칼을 든 계엄군의 출현은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을까.

=======================

(7)

두 번째는 지금까지 조명되지 않은 광주시민들을 중심에 두고 써보자는 관점이었다. 평전이 발간됐거나 신문과 방송 혹은 잡지에 집중인터뷰를 했던 분들은 널리 알려졌으므로 동어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인간의 보편적인 입장에서 참여한 신부님과 스님은 종교적 양심에 따라 행동한 분들이므로 뺄 이유는 없었다. 한편, 나중에 정치를 한 분은 순수성 측면에서 여러 해석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그분들의 역할은 가능한 한 줄였다. 따라서 <광주 아리랑>에 등장하는 인물은 식당주방장, 요리사, 시장 상인, 운전수, 페인트공, 용접공, 가구공, 선반공, 방직공장 여공, 예비군, 예비군 소대장, 대학교 교직원과 수위, 비운동권 학생, 영업사원, 재수생, 구두닦이, 농사꾼 등등이다. 이들도 80년 5월에 계엄군과 맞서 싸웠던 엄연한 실존이자 최대 피해자였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나는 이분들을 한 분 한 분 ‘광주 5.18 역사로서의 소설’에 주인공이자 증인으로 영원히 기리고 싶었다. 화강암 같은 개결한 역사의 비석에 이름을 깊이깊이 새기듯.

=======================

…

<광주 아리랑은> 5월 14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그곳에 살던 사람들 중심으로 이야기를 꾸려가고 있단다. 역사가 스포일러인 소설이고 그 끝이 슬픈 결말이지만 읽는 내내 해피 엔딩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읽었단다. 소설에서라도 계엄군이 평화롭게 철수하고 그 일을 시킨 살인마를 단죄하는 것으로 끝나면 좋겠다는 마음을 읽었지만 소설은 역사 그대로 고증하여 이야기해주고 있단다. 오늘은 <광주 오리랑> 1권을 이야기해줄게. 1권은 5월 14일부터  5월 21일까지의 이야기란다.

 

1.

1980년 5월은 서울의 봄이라고 부르며, 전국적으로 대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단다. 1979년부터 이어진 “계엄령을 철폐하라”와 “전두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 “노동자 생존권 보장하라” 등의 구호로 시위를 했단다. 그런 바람으로 광주에서도 시위를 했는데, 5월 14일에는 전남대 일부 학생들의 일상적인 시위였단다. 전남대학교 학생회장 박관현과 학생회가 주도로 이루어진 이 날의 시위는 비교적 평화로운 시위로 진행되었단다. 박효선이라는 고등학교 교사가 있었는데, 그는 교사를 그만두고 학생 때부터 꿈이었던 연극을 하기 위해 극단을 차리고 연극을 준비하고 있었단다. Jiny도 얼마 전에 읽은 적이 있는 황석영의 <한씨 연대기>를 연극으로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어. 광주 YWCA에서 공연할 예정이었단다.

이 소설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들이라서 다양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이를 줄거리로 소개하다 보니 맥락이 끊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를 감안하고 읽어주길 바란다. 광주 시민들이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 화천에 있는 공수여단에서는 진압 훈련에 열을 올리고 있었단다. 격려금이 내려와 대대적인 회식을 하고, 경기도 김포로 이동했단다.

…

5월 15일. 김현채라는 사람이 있었어. 그는 광주 출신인데 집이 가난해서 학업을 중단하고 서울에 가서 온갖 일을 했어. 그런데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려서 재발급을 받으러 광주에 내려왔단다. 하필 이때 내려왔을까. 그에게는 어떤 운명이 기다릴까. 그날도 시위가 있었는데, 전날 시위가 평화롭게 끝나서, 5월 15일에는 더 많은 학생들이 참여했단다. 전남대학교뿐만 아니라 광주지역의 여러 대학교 학생들이 참여했어. 그날도 별탈 없이 시위를 했단다. 그런 평화적인 시위와 별도로 7공수여단은 광주로 이동 배치되고 있었단다.

…

5월 16일. 전남대학교 학생회장 박관현은 전남경찰국장 안병하를 찾아가 만났어. 오늘 시위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평화시위와 질서 유지를 약속했단다. 안병하 경찰국장도 경찰들에게 시위를 안전하게 지도하고 원칙을 지키겠다고 했단다.

=======================

(98)

나라와 국민을 지키는 것이 군인이듯,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경찰의 본분이라고 안병하 경찰국장은 생각했다.

(중략)

”시위진압 시 안전수칙 잘 지키기를 바란다. 시위 학생에게 돌멩이를 던지지 말라. 도망가는 학생은 쫓지 말라. 시민이 다치는 일 없도록 하라. 알겠는가?“

(중략)

”부대 지휘관은 과격한 행동을 금하고 시위대를 추격하지 말라. 사과탄은 안면에 던지지 말고 공중에 투척하라. 최루탄도 각도를 유지해서 발사하라. 알겠는가?“

(중략)

”시위 시민에게 절대로 자극적인 언행을 삼가라. 시민들의 야유와 비난이 있어도 절대 대응하지 말라. 시민과 우리 경찰의 안전을 최우선하라.“

=======================

그만큼 광주의 시위는 그 어떤 시위보다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었단다. 이날은 시민들도 참여하고 저녁에는 횃불 시위까지 했지만 평화롭게 진행되었고 끝까지 잘 마무리했단다.

…

5월 17일 토요일. 이날은 시위를 쉬기로 한 날이란다. 그렇게 하루가 거의 다 지나간 밤에 뉴스 속보가 나왔단다. 5월 17일 24시부터 포고령 제 10호를 발령한다는 속보였어. 전국의 모든 대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고 정치 집회와 시위를 금지한다는 내용이고, 계엄령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한다는 내용이었단다. 정말 뜬금없고 무식하기 그지없는 포고령이구나.

이 속보가 나오자마자 계엄군들은 광주의 대학교들로 습격해서 학교 안에 남아 있던 학생들을 잡아갔단다. 조용히 잡아간 것도 아니고 무차별 구타를 해서 끌고 가다시피 연행했어. 그렇다고 그들이 죄가 있는 것도 아니야. 죄를 예방해서 미리 잡아가는 예비검속을 이유로 들었는데, 말도 안 되는 이유로구나.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죄를 질 것 같아서 미리 잡아간다니 황당하구나. 전남대, 조선대 등에서 많은 학생들이 잡혀갔어. 간신히 피신한 학생들은 자신들만 도망쳤다는 죄책감을 가졌어.

 

2.

5월 18일. 전남대학교 학생과장인 서명원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사태 파악을 해보려고 했지만, 이미 학교는 계엄군이 점령하고 마음대로 들어갈 수도 없었어. 밤새 일어났던 난리를 접한 대학생들은 금남로에 모여 시위를 시작했단다. 전경들은 최루탄을 쏘며 강경 진압을 하기 시작했어. 연극 준비를 하던 박효선은 계엄군의 광주 시내 출동으로 연극은 무기한 연기를 해야 했어. 자신의 첫 연극부터 이런 일이 벌어져서 좌절감이 들었지만 그는 급한 불부터 꺼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위에 참석했단다. 공수 부대원들은 시민들을 진압봉으로 가격하며 학생들을 색출해서 연행해 갔단다. 주민등록증을 재발급 받으러 광주에 왔던 김현채도 학생으로 오해 받아 군홧발에 진압봉에 이유 없이 맞았단다. 시위에 전혀 생각 없던 김현채도 시위에 휘말리게 되었어.

…

5월 19일. 아무 죄도 없이 끌려가는 광주의 대학생들을 본 광주 시민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어. 인간이라면 다 그런 심정일 거야. 고등학생들도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어. 당시 고등학교 선생님인 박석무도 동료 선생님인 박행삼과 함께 시위에 참가하면서 자신들의 제자인 고등학생들의 시위는 막으려고 했단다.

=======================

(215)

”선생님,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나도 답답하고 암울하기는 여러분 같아요.“

”지금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합니까?“

”여러분 마음을 나도 알아요.“

”금남로에서 우리 형제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학생이 역시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울먹였다. 박행삼도 학생들과 같은 심정이었으므로 교사 신분을 잊어버리고 분필을 집어던지면서 눈물을 흘렸다. 박행삼이 비통하게 말했다.

”여러분, 우리는 어째서 비극의 역사를 반복하는지 참담할 뿐입니다.“

=======================

그런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박석무는 아빠가 읽은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편역하신 분이란다. 그 분도 광주에 계셨었구나.

…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인해 시위를 하는 청년들도 좀더 가격해졌단다. 억울하게 계엄군에서 구타당한 김현채도 동참했단다. 시민들도 시위대에 참여해서 시위대도 점점 커져갔단다. 그들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비합리적인 장면과 억울함 때문에 시위에 참가했을 거야.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시민들은 광주 MBC 방송국을 점령하려고 했는데, 이때 계엄군 7공수여단 35대대와 11공수여단 63대대가 시위대를 막아 섰어.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어. 시민을 향해 발포를 해서 고등학교 3학년 학생 김영찬 군이 총상을 입고 병원에 후송되었어. 뿐만 아니라 농아장애자 김경철 씨는 계엄군의 구타로 죽고 말았단다. 김경철 씨가 계엄군에 의한 첫 사망자였는데 이후 사망자들이 속출했단다. 광주 사람들의 억울함을 달래줄 언론은 없었어. 신문들은 광주 시민들이 폭도라고 보도했어. 시민들이 직접 호소문을 써서 배포를 했지만 역부족이었단다.

…

5월 20일. 시민들은 진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차에 앰프를 설치해서 차량 방송을 하기로 했어. 전옥주, 차명숙 두 분이 본격적인 가두방송을 하기 시작했단다. 진실을 알리는 한편, 시민들에게 시위에 동참해달라는 호소를 했단다.

=======================

(304-305)

전옥주의 가두방송 멘트는 전날보다 더 거칠었다.

”형제 동생들이 죽어가는데 다리를 쭉 뻗고 잠이 옵니까. 공수들이 광주 시민을 다 죽이려고 하는데 도대체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갑니까. 일제 때 학생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난 광주입니다. 광주정신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광주시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팔십만 광주시민 모두가 나서 대한민국 군인이기를 포기한 공수 놈들과 싸워야 합니다.“

=======================

택시운전사들도 단체로 동참하고 고등학생들을 포함한 많은 시민들도 대거 참여하게 되었어. 그들은 버스와 화물차와 택시를 몰고 나와 차량 시위를 했어. 공수부대는 더욱 과격해지고 이제는 시민들을 상대로 조준사격까지 했어. 사태가 급격하게 악화되니 종교계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하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서 조비오 신부 등 가톨릭 신부들은 기도를 했단다.

…

5월 21일. 이날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어. 가두 방송을 하던 전옥주는 계엄군 중령과 만나서 협상하자고 제안을 했어. 계엄군 중령도 이에 동의하여 시민들은 협상대표를 뽑아 도지사를 만나러 도청에 갔는데 이것은 계엄군의 속임수였단다. 지휘부가 빠진 시위대를 계엄군이 공격했어. 시민들은 다시 차량을 끌어 모아 2차 차량 시위를 진행했단다.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이날 금남로에서는 사망자들이 대거 발생했단다. 계엄군은 무장헬기까지 동원해서 사격을 했어. 시위대도 더 이상 비무장으로 계엄군을 맞설 수 없었고 생각했어. 시위대는 광주 경찰서를 점거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화순과 광주 지역의 파출소와 예비군 부대에게 총기와 수류탄을 확보했단다.

이젠 강대강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구나. 도대체 광주 시민들이 무엇을 잘못했다고…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된 드라마, 영화, 소설 등을 볼 때마다 울분이 치솟는구나.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도 이렇게 억울한데, 당시 광주에 살고 있는 시민들의 감정은 어땠을까. 사랑하는 가족들, 친구들이 아무런 죄도 없이 계엄군의 총칼이 죽었다고 하면 평생 그 억울하고 아픈 기억을 어찌 안고 살아갈까. 그런 역사는 꼭 기억하고 다시는 이런 역사는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모든 국민이 다짐을 해야겠구나. <광주 아리랑> 1권은 여기까지. 2권도 부지런히 이야기할게.

 

PS,

책의 첫 문장: 40대 초반의 사내가 책상 옆의 창가에 앉아 우두커니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책의 끝 문장: 조원들에게는 잠을 자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14일 전남대생들의 시위는 처음 가두로 진출할 때는 최루탄을 쏘는 경찰과 격렬하게 맞선 양상이었는데, 오후 3시쯤에 시작한 민주성회와 이후 가두 행진 때는 뜻밖에 평화로웠다. 경찰이 수수방관하는 태도로 나왔던 것이다. 한복에 고무신을 신은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시민들에게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오후 6시까지 집회를 마치고 귀교하겠습니다"라고 약속을 해서였다. 경찰은 전남대생들이 귀교할 때는 시위 행렬을 따라가며 교통정리까지 해주었다. - P89

문장우는 체격이 날렵하고 단단했지만 그의 친구는 둔하고 허약해 보였다. 허약한 친구가 문장우를 잡았지만 오히려 그가 끌려갔다. 창 너머는 바로 충장파출소였다. 학생 예닐곱 명이 진압봉을 든 공수부대원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그러나 충장로 지리에 밝은 학생들은 잽싸게 골목으로 달아나버렸다. 그러자 공수부대원들이 지나가는 행인을 아무나 붙들고 진압봉을 휘둘렀다. 청바지에 긴팔 티를 입은 여학생을 잡아당기더니 길바닥에 내팽개쳤다. 여학생의 티가 벗겨져 가슴이 보일 만큼 난폭하게 질질 끌고 갔다. 그뿐만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가던 사오십으로 보이는 남자를 붙잡은 뒤 진압봉으로 두들겨 팼다. 시민들 보란 듯이 자전거는 길바닥에 사정없이 던져 망가뜨렸다. 지켜보는 시민들은 두려움 때문에 아무도 항변을 못했다. 문장우 역시도 처음에는 말을 못하다가 꾸역꾸역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야, 개새끼들아. 니들이 대한민국 군인이냐? 죄읎는 사람들까지 왜 때려!"
- P199

‘국민들이 낸 방위세로 무장한 군인이 아닌가! 외적을 막으라고 지급한 총을 시민들에게 돌리고 있다니. 이런 군대는 필요 없다. 주인을 모르고 미쳐 날뛰는 군대는 없어져야 한다. 누가 이 군인들을 미치게 했는가? 시민을 살상하라고 명령한 원흉은 누구인가?’ - P222

그때였다. 바퀴 달린 시위 장갑차 한 대가 도청 분수대 쪽으로 달렸다. 장갑차 뚜껑을 열고 한 청년이 용감하게 상체를 드러냈다. 머리에 흰 띠를 두른 청년은 윗옷을 벗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도청 광장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원들이 그 청년을 향해 가차 없이 집중사격을 했다. 목에 총을 맞은 듯 청년의 머리가 푹 꺾였다. 공수부대원의 집중사격으로 충장로 입구 빌딩에 있는 노인과 동구청 앞의 학생과 처녀, 시민 등 여덟 명이 쓰러졌다. 도청 광장으로 돌진했던 시위 장갑차는 분수대를 돌아 노동청 쪽으로 빠져나갔다. 그제야 시민들이 쓰러진 사람들 중에 경상자는 동구청 뒤 홍안과로, 중상자는 전대병원과 적십자병원, 기독병원으로 시위 차량에 실어 갔다. - P3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프로이트를 위하여 - 작가 츠바이크, 프로이트를 말하다
슈테판 츠바이크.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양진호 옮김 / 책세상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평전인줄 알았던 <프로이트를 위하여>라는 책이란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소설도 재미있게 잘 쓰지만 그동안 아빠가 읽은 평전도 모두 괜찮았단다. 이번에 읽은 책은 제목 <프로이트를 위하여>에서 알 수 있듯이 전대미문의 학자 지그문크  프로이트에 관한 책이란다. 기대를 잔뜩 하고 책을 펼쳤는데, 그 동안의 평전과는 좀 다른 구성이었단다. 프로이트 평전은 1부에만 구성되어 있고, 2부는 프로이트와 츠바이크가 주고 받은 편지들로 구성되어 있고, 3부는 츠바이크가 여기저기 기록한 프로이트에 관한 글들로 구성되어 있더구나. 더욱이 1부는 츠바이크의 다른 책 <정신에 의한 치유>라는 책의 3부를 발췌한 것이라고 하는구나. 그러니까 이 책은 다른 책, 츠바이크의 기록 등을 짜깁기하여 편집된 것 같았어. 아빠가 가장 싫어하는 편집 방식이로구나.

츠바이크가 이런 편집을 좋아했으려나? 그래서 <정신에 의한 치유>라는 책을 검색해 보았는데 우리나라 서점에서는 검색이 안되더구나. 혹시 다른 책제목으로 출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들을 다 검색해서 확인을 보니 우리나라에서 2000년에 출간된 <정신의 탐험가들>이라는 책인 것 같더구나. 이 책의 차례를 보니 3부의 제목이 <지그문트 프로이트>이더구나. <프로이트를 위하여>라는 책의 이런 짜깁기 편집은 외국의 출판사에서 한 것으로 그대로 번역 출간한 것인지, 우리나라 출판사에서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슈테판 프로이트의 팬으로는 실망스러운 편집이로구나. <프로이트의 위하여>의 3부에 나오는 기록도 다른 책 <어제의 세계> 등에 실린 글인데 <어제의 세계>는 아빠도 가지고 있는 책이란다. 유독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들은 여러 출판사의 중복, 짜깁기 출간이 잦은 것 같더구나. 프로이트에 대해 궁금하고, 그런 궁금증을 츠바이크가 해결해 준다는 생각으로 기대를 잔뜩 하고 책을 펼쳤는데, 이런 짜깁기 편집으로 실망을 하고 말았단다.

 

1.

실망스러운 편집은 편집이지만, 1부 프로이트에 관한 츠바이크이 글은 다른 책에서도 볼 수 있는 츠바이크의 흡입력 있고 묵직한 필력을 엿볼 수 있었단다.

…

책의 시작은 ‘병’의 의미로 시작하여 병을 치료하기 위한 치료법의 변천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어. 원시시대와 고대 의학을 거쳐 현대 의학까지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현대 의학은 많은 의료 장비를 이용하여 치료를 하지만 장비의 도움 없이 영적 치료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했단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연구>라는 논문에서 신경증이 성적인 억압에서 기인한다고 결론을 내렸고, 기존의 학자들과 달리 억압이라는 것은 숨기지 말고 밖으로 내놓아야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단다.

====================

(60)

옛 방법이 은폐하려 애쓰던 그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라고 요구했다. 모르는 체하지 말고 확인하라는 것이다. 돌아가지 말고 들어가라는 것이다. 눈 돌리지 말고 깊이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외투를 입히지 말고 벌거벗기라는 것이다. 충동을 인식하는 사람만이 그것을 틀어쥘 수 있다. 악마의 심연에서 충동을 끌어내 거리낌 없이 마주하는 사람만이 그것을 길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의학은 미학이나 문헌학 못지않게 도덕이나 수치심과는 상관이 없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인간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침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말하게 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 세기가 얼버무리고 싶어 한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억압과 무의식에 대한 자기 인식과 자기 고백의 문제를 시대의 한복판에 던져놓았다. 그리하여 그들의 억압된 근본적 갈등을 위선에서 학문으로 변모시킴으로써 수많은 개인들뿐 아니라 도덕병에 걸린 그 시대 전체를 치료하는 일에 착수했다.

====================

….

프로이트는 조수, 비서, 조교도 없이 평생 혼자 분석하고 연구했다는구나. 무엇보다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했대. 그런 규칙적인 생활 때문인지 평생 건강하게 지냈다는구나. 그리고 그런 연구 결과를 발표할 때 남을 의식하는 글쓰기가 아닌, 단지 결과의 산출물로만 생각한 글쓰기였기 때문에 글들이 무미건조하고, 냉정하고, 창백한 글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하는구나. 선동하거나 선전하는 내용은 없지만 엄격한 조형력 있는 글들이라는구나.

…

프로이트의 의대 시절, 심리학도 신체기관을 연구하면 알게 되는 생리학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했대. 그리고 프랑스 파리에서 최면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있다고 해서 파리에 가서 그들과 교류도 했다는구나. 그리고 그들과 교류하면서 심리라는 것이 신체가 아닌 심리적, 초심리적 원인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몇 달 뒤 빈으로 돌아와 독자적인 연구를 시작했대. 그 일로 빈의 다른 학자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정규 교수가 될 수 없었지만, 프로이트가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지.

…

프로이트는 최면을 이용하여 치료하는 브로이어와 공통 연구도 했는데, 프로이트는 이때부터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단다. 당시 무의식을 연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하기여 의식도 아니고 그 내면에 깔려 있는 무의식을 연구할 생각은 프로이트와 같은 천재들만의 영역이었지. 무의식의 핵심은 꿈이라고 생각했고, 우리가 꿈을 꾸는 이유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꿈을 분석하면 당사자의 심리 상태를 알 수 있다고 했단다. 그리고 어른들은 그런 꿈도 의식으로 조작하여 본심을 숨기는 경우가 있다는구나. 하지만 어린이들의 꿈은 자신의 심리 상태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했어.

====================

(124-125)

프로이트는 꿈이 우리의 심리적 균형을 안정시키는 데 필수적임을 처음으로 입증한다. 꿈은 우리 감정 능력의 밸브이다. 우리의 작은 세속적 육신 속에는 정말이지 너무도 막강한 욕만, 헤아릴 수 없는 괘락욕과 생존 본능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소원 가운데, 평범한 사람들이 옹졸하게 꽉 짜인 일상 속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몇 개나 되겠는가? 우리들 중 누구도 자신의 쾌락의지를 천분의 일도 실현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루어지지 않고 이룰 수도 없는 한없는 욕망이 더없이 궁색한 소액 연금 생활자, 임금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의 가슴속에 밀려드는 것이다. 저마다의 마음속에 못된 욕망들이 음란하게 들끓는다. 지배권이 부재하는 권력의지, 억눌리고 비겁하게 일그러진 무정부주의적 욕구, 감춰진 허영심, 열정, 질투 등. 날이면 날마다 수많은 여자들이 지나다니며 저마다 순간적인 정욕을 도발하고, 이루어지지 못한 그 모든 소망과 소유욕은 똬리를 튼 채 독사처럼 틀어박혀 혀를 날름거르며 새벽종이 우릴 때부터 밤이 깊어질 때까지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다. 밤마다 꿈이 이 모든 응어리진 소원들에 배출구를 마련해주지 않는다면, 영혼은 그런 대기압 아래에서 폭발하거나, 갑자기 흉악한 난동이라도 부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

…..

프로이트는 심리학이 성과 관련이 있다고 처음으로 주장했다는구나. 성에 대한 의식은 아무래도 사춘기 이후에 형성되다 보니 사춘기 이후 연령에 대해서만 분석을 하다가 아기 때부터 관련이 있다는 내용을 알게 되었다는구나.

====================

(157-158)

프로이트는 깨달았다. 성 의식은 사춘기쯤 되었을 때 처음으로 갑자기 몸 안에 주입되는-대체 그것이 어디로부터 올 수 있다는 말인가?-것이 아니라, 오히려-모든 강단 심리학보다 천 배는 더 심리학적인 언어가 이미 오래전부터 대단히 구체적으로 표현해주었듯이-영글다 만 인간 속에서 성 충동이 그저 ‘깨어날’뿐이라는 사실, 따라서 성 충동은 잠든 채로(말하자면 잠복 상태로) 오래전부터 어린이의 신체 속에서 현존해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유아가 걷기 전에 걸을 수 있는 잠재력을 두 다리에 지니고 있듯이, 말할 수 있기 전에 언어 욕구를 지니고 있듯이, 성욕도-목전에 맞는 행동에 대해서는 짐작도 못 하면서-유아 속에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유아는-결정적 표현!-자신의 성욕에 관해 안다. 그저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

…

프로이트의 학문이 쉽지 않다 보니, 아빠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너희들에게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하는 것 같구나. 양해 바란다. 1부 프로이트 평전의 마지막 부분에서 츠바이크가 프로이트의 업적에 대해서 정리해 준 부분이 있는데, 짧지만 핵심적인 내용이 잘 담겨 있는 것 같구나.

====================

(199)

현재 우리는 프로이트 덕분에 처음으로 개인의 중요성을, 모든 인간 영혼의 대체 불가능한 일회적 가치를 새롭고 생생하게 깨닫게 되었다. 유럽에서 예술, 연구, 생명과학의 모든 영역에서 내로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찬성하든 반대하든 프로이트의 사상 체계로부터, 그의 견해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창조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외부인은 모든 영역에서 삶의 중심부-인간적인 것-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작업이 의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철학이든 교과서적 의미에서 엄밀하게 규칙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전문가들이 망설이는 동안, 개별성과 궁극적 가치에 관해 추밀 고문관과 학자들이 열심히 싸우는 동안, 프로이트의 이론은 이미 오래전에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참된 것으로 입증되었다. 괴테가 잊을 수 없는 말로 우리에게 새겨놓은 창조적 의미에서 참된 것으로 입증된 것이다. ”결실이 있는 것만이 참된 것이다.“

====================

….

이 책의 2부에서는 츠바이크와 프로이트가 서로 주고 받은 편지와 엽서들이 실려 있는데, 1908년부터 프로이트가 죽기 직전인 1939년까지의 편지와 엽서라고 하는구나.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상대방의 편지를 읽는 프로이트와 츠바이크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어. 둘은 서로 존경하는 모습이 편지 속에서 느껴지더구나. 츠바이크는 새로운 책이 나오면 꼭 프로이트에게 보내주고 프로이트는 답장을 쓰면서 그 책들에 대한 감상을 적어 보기도 했단다. 뿐만 아니라 당대 유명한 책들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 도스토엡스키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대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리뷰가 인상적이어서 발췌해 보았단다.

====================

(211-212)

당신이 빠짐없이 알고 있는, 그의 작품이 지닌 거의 모든 특성들은 그 자신의 특성에 기인하며, 우리에게는 특이한 것이지만 러시아인들에게는 흔히 있는 심리 구조입니다. 사실 성적 기질에 기인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이것을 더 상세히 설명해야 하겠지요. 우선 그것은 학대하고 맟설게 하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정신분석 없이 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스스로 각 인물들과 각 문장들을 통해 정신분석을 하고 있으므로, 정신분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카라마조프 씨네 사람들>이 도스토엡스키의 가장 개인적인 문제인 아버지 살해를 다루며 범행과  무의식적 악의에 관한 정신분석적 원리를 그 근거를 삼고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또한 그가 표현한 기이한 성애는 충동적 발정이거나 승화된 연민입니다. 자신의 영웅들이 사랑할 때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미워하는지 등에 관한 회의[=양가감정]는 그의 심리학이 어떤 독특한 토양에서 자라났는지를 보여줍니다.

====================

….

오늘은 이 정도로 해야겠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짜깁기 편집한 책이라서 실망했는데, 그래도 츠바이크와 프로이트의 편지를 읽으면서 그 실망감을 다소 해소한 것 같구나. 이 책 1부에 보면 츠바이트가 프로이트를 한 줄로 평한 글이 있는데, 그 글을 소개하며 오늘 편지를 마치련다.

====================

(74)

니체가 망치를 들고 철학을 했다면, 프로이트는 평생 메스를 들고 철학을 했다.

====================

 

PS,

책의 첫 문장: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은 건강이요, 부자연스러운 것은 질병이다.

책의 끝 문장: 그리고 그의 관을 영국 땅에 묻었을 때, 우리는 조국에서 가장 훌륭한 것을 그곳에 바쳤음을 깨달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29)

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버터와 설탕을 섞어 크림을 만들면서도 펄롱의 생각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일요일, 아내와 딸들과 함께 있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내일, 그리고 누구한테 받을 돈이 얼마인지, 주문받은 물건을 언제 어떻게 배달할지, 누구한테 무슨 일을 맡길지, 받을 돈을 어디에서 어떻게 받을지에 닿아 있었다. 내일이 저물 때도 생각이 비슷하게 흘러가면서 또다시 다음 날 일에 골몰하리란 걸 펄롱은 알았다.

 

(43-44)

이게 다 무엇 때문일까? 펄롱은 생각했다. 일 그리고 끝 없는 걱정. 캄캄할 때 일어나서 작업장으로 출근해 날마다 하루 종일 배달하고 캄캄할 때 집에 돌아와서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가 어둠 속에서 잠에서 깨어 똑 같은 것을 또다시 마주하는 것.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119)

두 사람은 계속 걸었고 펄롱이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더 마주쳤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세상에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121)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