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십자군전쟁은 종종 낭만적으로 묘사되듯이, 이교도로부터
성지를 탈환한다는 단순히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의도만은 아니었다. 이 유럽 최초의 기독교연합은 한편으로
홍해를 가로막는 봉쇄의 사실을 깨부수고자 했다. 유럽을 위해, 기독교
신앙을 위해 동양과의 무역의 길을 열어놓고자 하는 목적의 몸짓이었다. 그러나 이 충돌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들은 이집트를 이슬람교도들에게서 빼앗아오지도 못했으며 이슬람교도들은 여전히 인도로 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 인도로 가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또 다른 길을 찾고자 하는 욕구가 싹튼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눈길이 향한 곳은 바로 바다였다.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바르롤로뮤 디아스와 바스코 다 가마가 남쪽으로, 그리고
카보트가 라브라도를 향해 북쪽으로 떠날 수 있었던 대담함은, 그 무엇보다도 서양을 위해 간세도 물지
않고 방해도 받지 않고 인도로 갈 수 있는 자유로운 항로를 발견해서 이슬람의 패권을 꺾어놓고 말겠다는 분명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31)
그러나 포르투갈 왕자 엔리크는 이렇듯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나섰다. 성경 말씀처럼 맨 마지막에 있던 자가 맨 앞에 설 수도 있는 일을 해내는 것이 그의 필생의 과제가 되었다. 지리학의 교황이라는 프톨레메우스가 잘못 알고 있었다면? 때때로 기묘하고
낯선 나무들이 거대한 파도에 실려 해안으로 밀려오는 것으로 보아 만일 대서양이 어딘가에서 끝나 미지의 나라들로 이어지고 있다면? 그리고 회귀선 저편의 아프리카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면? 아직은 탐구되지
않은 이 대륙을 따라 주항할 수도, 인도양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던 그리스 학자의 주장이 허풍이었다면?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포르투갈은 서쪽으로 가장 멀리
나가 있으므로 모든 것을 발견하는 진정한 도약판이 될 테고, 인도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항로를 가진
셈이다. 대양 때문에 버림받은 것이 아니고,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항해를 위해 태어난 나라가 될 것이다. 작고 힘없는 포르투갈을 항해의 일인자로 부상시키고, 지금껏 폐쇄 영역으로만 여겨지던 대서양을 항로를 바꾸고야 말겠다는 커다란 소망은 엔리크 황태자를 일생동안 사로잡았다.
(69)
그는 이미 배가 벨렘에 입항할 때부터 놀라기 시작하였다. 바스코
다 가마가 출항할 때 그를 축복해주던 낡고 나지막한 교회 대신 이제 인도의 향료 덕분에 부강해진 조국의 첫 번째 징표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하고
화려한 대사원이 완성되어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변화가 느껴졌다. 예전엔 통행도 뜸했던 강에는 이제 돛대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고, 강변의
조선소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더 장대한 함선들을 만들어내느라고 일꾼들이 부지런히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항구에는
깃발은 깃발끼리, 돛대는 돛대끼리 자국선이건 외국선이건 간에 빽빽하게 모여 있었고, 정박소와 물품창고는 터질 것만 같았다. 새로 쌓아올린 웅장한 왕궁들
사이로 뻗은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몰려다니며 북적대고 있었다. 해외상관과 환금창구, 중개업소에는 갖가지 언어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인도를 약탈한 덕분에
리스본은 이제 10년이 채 지나기 전에 소도시에서 세계적인 도시요, 사치와
향락의 도시가 된 것이었다.
(72)
탐험의 시대는 거대한 배은망덕의 시대였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을 위해서 전세계를 정벌해나간 저들 정복자들이 국왕에게 받은 대가는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콜럼버스는
사슬에 묶인 채로 세비야에 돌아왔고, 코르테츠는 왕의 총애를 잃어버렸고, 피자로는 살해되었으며, 남태평양을 발견한 누녜즈 데 발보아는 참수형에
처해졌다. 포르투갈의 투사이자 시인인 카모엔은 비열한 시골 관리들에 의해 누명을 쓰고 동지인 위대한
세르반테스처럼 몇 달, 몇 해를 오물통 같은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카디스와 세비야의 골목길엔 귀향 선원들과 병사들이 불구가 되어 피폐해진 모습으로 열병에 시달리면서 거지떼처럼 헤매고 있었다.
(115)
더 이상은 마젤란도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위해 바랄 것이 없었으리라. 그러나 좀더 경이롭고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아직 어린 칼 5세는 말하자면 소극적이고 결단력이 부족한 성격이었는데, 성격과는
달리 이 원정대의 항해에 있어서는 열정적인 후원에 나섰다. 마젤란이 가졌던 남자다운 확고한 태도 때문인지, 아니면 이 원정의 대담한 때문인지, 무엇인가가 이 젊은 군주에게
특별한 열정을 불러일으켰음이 분명했다. 매주마다 진척사항에 대해 보고하도록 하는 등 누구보다도 그 스스로가
가장 장비와 항해 준비에 열심이었다. 때문에 일에 장애가 생길 때면 마젤란은 국왕에게 알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왕의 서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다. 평소에는
의지가 박약하고 남의 말을 잘 듣는 이 황제는 그의 긴 통치기간 동안 거의 유일하게 굳건한 신의를 지키며 이 위대한 이념을 실천해나갔다.
(118)
마젤란은 탐험을 준비해나가는 과정에서 그 어느 것도, 그것이
가장 하찮은 것일지라도 결코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자기에게 생명을 내맡긴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면서 세세한 사항까지 점검하였다. 또 그런 태도로 카사 데 라 콘트라타 시온과 관리들, 상인들, 납품업자, 일꾼들과
끈질기게 협상을 하였다. 영수증도 재검토되었고, 배의 밧줄
하나, 판자 하나, 무기 하나까지 직접 조사하였다. 돛대 꼭대기에서부터 선미에 이르기까지 다섯 척의 배를 모두 자기 몸처럼 자세히 꿰뚫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젤란은 함대를 정비해나가면서, 동시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들의 출항을 막으려는 사람들의 시기와 적대심에 대항해야만 했다. 한 사람이 세 개의 진영과 맞붙은
장렬한 싸움이었다.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에 대한 싸움이었고, 물질적으로
엄청난 차원의 사업에 가해지는 압력에 대한 싸움이었다. 이 모든 저항들은 어떻게 극복해나가는가가 바로
관건이었다.
(148)
1519년 9월 20일 화요일 아침이 밝아왔다. 세계사적으로 기억되어야 할 날이었다. 닻이 올려지고, 돛이 펄럭이고, 대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육지는 점점 멀어져 갔다. 인류 역사상 가장 용감하고, 가장 원대한 탐험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220-221)
1520년 11월 22일, 그의 명령에 따라 배는 정어리강의 항만을 떠났고, 며칠 후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였다(앞으로 마젤란 해협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해협이 끝나는 지점에서 마젤란은 캅 데세아도(열망의 곶)라고 명명한 곶 뒤쪽으로 유럽의 배가 아직 항행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바다가 끝없이 넘실대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서쪽 수평선 뒤로 보물의 섬인 향료군도가 놓여
있을 것이었다. 그 뒤로는 동양의 제국들, 중국, 일본과 인도가 있을 것이고 계속해서 가다 보면 고향인 스페인과 유럽대륙이 나타날 것이다. 지구가 개벽한 이래 그 누구도 통과해보지 못한 대양으로 돌진하기에 앞서 한 번 더, 마지막으로 휴식을 취했다. 1520년 11월 28일, 닻을 올리고
깃발이 올려졌다. 축포를 쏘아올리면서 세 척의 작은 배는 마치 생사의 결투를 앞둔 투사가 위대한 적수에게
인사하듯 낯선 바다에 경의를 표했다.
(223)
그러나 마젤란은 철저히 허공 속으로 떠나고 있었다. 유럽의
항구와 집을 떠나온 것이 아니었고, 낯설고도 삭막한 파타고니아에서 출발해 온 것이다. 승무원들은 몇 달 간에 걸친 강행군으로 기진맥진이 되었다. 배고픔과
궁핍이 그들을 따라오는가 하면, 저기 앞에서 또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복은 낡았고, 돛이란 돛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밧줄은 삭아버렸다. 벌써 몇 주일이나 사람이라고는 만나보지도 못했고, 술도, 여자도, 신선한
고기와 빵은 구경도 못하였다. 이런 망망대해에 버려져 있자니 적시에 고향으로 도주해버린 대담한 동료들이
내심 부럽기도 했으리라. 세 척의 배는 20일, 30일, 40, 50, 60일 동안 계속해서 나아가기만 할 뿐이었다. 아직도 육지는 나타나지도 않고, 육지가 가까워 온다는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또 일주일이 지나고, 또 한 주일, 또 한 주일, 그렇게 해서 1백
일이 지났다. 콜럼버스가 대양을 세 번 횡단한 시간이었다. 수천, 수만의 무의미한 시간을 흘려보내며 마젤란의 함대는 그저 텅 빈 공간 속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235)
그리고 이 순간 마젤란은 자신이 목적지에 도착했고, 자신의
업적이 완성되었음을 알았다. 그는 동쪽에서 출발하여 그가 12년
전에 도착한 바 있던 말라야 언어권의 한 변두리에 다다른 것이었다. 그토록 열망하는 향료의 섬에 도달하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그 섬을 찾게 되던, 아니면
다른 사람이 그곳을 찾던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업적의 본질은 향료의 섬이 아니라 누구든지 바다를
따라 계속 항해하면, 그것이 태양이 지는 쪽이든 뜨는 쪽이든 상관없이 자기가 출발했던 지점에 되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그가 증명했다는 것이다. 수천 년 전부터 철학자들이 추측해 왔고, 꿈꾸어 왔던 일이 한 인간의 용기에 의해 믿을 수 있는 사실이 된 것이다. 진정으로
지구는 둥글었다. 한 인간이 지구를 둥글게 한바퀴 돌아온 것이다.
(258)
사령관이 누군지를 알았기 때문에 이제는 주로 주로 그를 겨냥했다. 벌써 두 번이나 투구를 머리에서 떨어뜨리기도 했다. 사령관은 몇
명 남지 않은 병사들과 함께 용감한 기사로서 더 이상 후퇴하려 하지 않고 자기 위치를 잘 지켰다. 이렇게
한 시간 이상을 대치해서 싸웠는데, 마침내 인디오 한 명이 사령관이 얼굴에 갈대로 만든 투창을 던졌다. 사령관은 노하여 이 공격자의 가슴을 창으로 찔렀다. 창이 찔려 죽은
사람의 몸에서 빠지지 않자 사령관은 이제 칼을 뽑으려 했지만 오른팔이 창에 찔려 마비가 되었기 때문에 절반 정도밖에 뽑지 못했다. 이를 보고 적군은 한꺼번에 그에게 달려들었고, 그 중 하나가 단칼에
왼쪽 다리를 내리치자 사령관은 땅에 얼굴을 박고 쓰러져 버렸다. 그러자 인디오들은 모두 그에게 덮쳐
창이나 다른 무기들을 가지고 그의 몸을 마구 찔러댔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우리의 거울이자 빛이요 위안이었던
지도자의 생명을 앗아가 버렸다.
(283-284)
베르데 곶에서의 체류가 시간도 짧고, 위험하기도
했지만 씩씩한 기록자 피가페타는 마지막 순간에 그가 그토록 찾아헤매던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다. 식료품을
사려고 해변까지 갔다온 선원들이 놀라운 소식을 전해왔는데, 육지는 목요일이라는데 배에서 수요일이 틀림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거의 3년 동안 매일같이 일지를 적어온 파가페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그렇게 해서 한 주가 지나고, 1년이 지나도록 날짜를 계산해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하루를
모르고 지나쳐버린 것일까. 그는 자기처럼 매일 선박일지를 쓰는 키잡이 알보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의 기록에도 아직 수요일이라는 것이었다.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면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루가 달력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틀림없었다. 베르데 곶에서 처음으로 관찰한
새롭고 중요한 이 현상은 전생애에 걸쳐 그를 흥분시키고 몰두하게 만들었다.
(286)
이제 하룻밤, 하루 낮, 이제 하룻밤만 지내면 된다. 단 하룻밤. 그리고 마침내(모두들 갑판으로 뛰쳐나가서 행복감에 전율하며 한 덩어리로
얼싸안았다) 산루카에서 바다와 만나는 구아달키비르 강이 육지 한가운데로 은띠처럼 반짝이며 흐르고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3년 전 265명이
마젤란의 지휘 아래 다섯 척의 배를 타고 출발했던 것이다. 18명의 선원들은 비틀거리면서 배에서 내리자
간신히 무릎을 꿇고 이 딱딱하고도 고마운 고향의 흙에 입을 맞추었다. 1522년 9월 6일, 항해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업적이 마침내 그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297)
한 인간의 생의 비밀은 언제나 죽음의 순간에 가서 밝혀지는 법이다. 그의 이념이 승리로 채워지는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비로소 이 고독한 인간의 내적인 비극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언제나 과업의 짐만을 짊어질 뿐 마지막 성공을 기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운명은 수백만의 무리들 속에서 이 어둡고, 말이 없고 스스로 벽을 쌓고 사는 사람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이승에서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과 자신의 목숨조차도 이념을 위해 절대적으로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부역으로 위해 불러냈고, 즐거움의
자리에는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날품팔이처럼 고마워하지도 않고 은혜를 내리지도 않은 채 이루어놓은 성과에서
쫓아버렸다. 다른 사람들이 그가 이룬 명예를 거두어들였고, 다른
이들이 이윤을 챙겼고, 다른 이들이 축제를 벌였다. 그가
모든 면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엄격했던 것처럼 운명도 이 냉혹한 군인에게 대항하고 싶어 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온 힘을 다해 원했던 단 하나만이 그에게 허용되었다. 그것은
지구를 일주하는 항로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귀향의 승리라는 보다 복된 부분은 그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단지 바라만 보고 만져보기만 할 뿐, 자신의 머리에
승리의 월계관을 올리려고 하자 운명은 그에게 ‘그만’이라고
말하며 간절히 내미는 손을 거부했다.
(301)
그러나 역사 속에서는 세속적인 이익이 어떤 업적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를 지속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사람은 창조적인 의식을 고양시키는 자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젤란의 행위는 당시 모든 행위들을 능가한다. 그의 명성 중에서 가장 특별한
것이라면 다른 지도자들처럼 자신의 이념을 위해 수천, 수십만의 목숨을 희생시킨 것이 아니라, 단 하나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토록 영웅적인
자기희생으로 인해 미지의 세계와의 성스러운 전쟁을 위해 떠난 다섯 척의 보잘것없고, 힘없고, 외로운 배들의 찬란한 용기가 영원히 잊히지 처음으로 실행에 옮기려 했고, 함대의
마지막 배 한 척이 이를 완수했다는 점에서 마젤란 자신도 잊히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