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알렉세이는 도스토옙스키의 여러 작품에 등장하는 이름이지만 그중 대표를 꼽으라면 역시 그의 마지막 작품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알렉세이를 들어야겠다. 까라마조프 씨네 막내아들이자 참으로 비현실적이어서 기이하게 다가오는 캐릭터. 모두의 벗이자, 형제 같은 사람. 남녀노소 불문, 한 번이라도 그를 만나면 금세 사랑하게 만드는 마성의 남자. 누군가를 어떤 이유로도 비난하지 않으며, 그가 모든 이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믿게 만드는 사람. 그렇기에 부도덕하기 짝이 없는 그의 혈육들도 알렉세이만은 자신들과 다른 카테고리에 넣는다. 그러곤 모두 그에게 고백하고, 이해받길 원한다.


(48)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프로가 되는 지름길이며 또 그것만큼 인생에 도움이 되는 조건도 없다. 그렇게 산다 해서 모든 일이 잘되진 않겠지만 모른 채 산다면 자신을 더 힘들게 할 선택을 하게 될 것만은 분명하다. 잘 맞지 않은 회사에 아무 문제의식도 없이 입사하고 퇴사하기를 반복했던 나처럼 말이다.


(74-75)

물론 성숙한 인간이라면 죽는 순간까지 섣불리 자기 생각을 말하기보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살피며 진상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나 역시 성숙한 인간이 되고 싶다. 하지만 시대가 계속 변하고 있다는 사실, 그 변화 속도를 내가 따라가지 못해 때로 꼰대적 발상과 발언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 받아들이기로 했다.


(102)

나는 자신만의 소박한 일상을 잘 지켜 나가면서도 품위 있고, 지적이며, 편안하고 자유롭게 관계를 맺는 이를 몇 알고 있다. 나는 그 사람들이 내적 자산을 비교적 쉬이 갖출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온 이들보다 대단해 보이고, 그래서 그들을 만날 때마다 질투하고 부러워한다. 그렇게 부러워하다 보면 나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 말은 어쩌면 틀렸다. 부러우면 이기는 건지도 모른다.


(171)

UCLA에서 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참가자들에게 호감에 관련된 500개가 넘는 형용사에 점수를 매기게 했다. 다음 중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한 형용사는 무엇일까?

(1) 지성적인(intelligent)

(2) 타고난 매력이 있는(attractive)

(3) 사교적인(gregarious)

(4) 진심의(sincere)


(182)

솔직함은 그 내용이 자기 자신일 때 빛을 발한다. 타인의 장점을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도 호감을 얻는 방법이겠지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용기에 타인의 마음은 더 크게 움직이지 않을까. 상대에게 자신도 진심을 내보여도 안전하겠단 느낌을 주니 말이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고 싶다면 자기 자신을 잘 알 것, 그런 자신을 받아들일 것, 솔직함의 대상을 자기 자신으로 둘 것.


(193)

도스토옙스키 소설을 읽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을 긴 풀 네임, 약칭, 여러 애칭으로 불러서 누가 누구인지 판단하는 데 시간이 걸리도록 하는 불친절함, 하루 이틀 밤 이야기를 1000쪽 이상의 분량으로 풀어내는 집요함과 심오함에 임하기가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대체 내가 왜 이 인간 소설을 이렇게 파고 있나 회의감을 느낄 즈음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날 대체 뭘로 보는 거냐며 뒤통수를 한 대 쳤다. <스쩨빤치코보 마을 사람들>이란 소설을 통해서였다.


(206)

도스토예스키 장편 <노름꾼>은 여러 가지로 유명하다. 장편 <죄와 벌>을 쓰는 동안 27일 만에 완성했다는 것, 그것도 구두로 완성한 소설을 속기사 안나가 문자로 옮겨 출판사로 넘겼으며, 그 뒤 도스토예스크의 청혼으로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것, 이 소설을 쓸 당시 작가 자신도 도박으로 인해 돈에 쪼들리며 급하게 완성했다는 사실 등 제목만큼이나 흥미로운 비하인드 스토리가 많다.


(214)

그렇다고 해서 삶의 주도권까지 내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직장에서 누군가 나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해서 내 삶까지 좌우하려 할 때, 즉 내 삶의 주도권이 본인에게 있는 양 굴려 할 때 거절할 만한 지혜와 배짱은 필요하다. 그러자면 우선, 내 인생의 모든 행운과 불운을 스스로 만들어 가고 감당하겠다는 주인 의식이 가장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나는 아직 멀었단 걸 알았다. <노름꾼>의 가정교사의 대처에 정말 놀랐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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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7-21 08: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곧<스쩨빤치코보 마을 사람들> 읽으려고 하는데 뒤통수를 쳤다니 완전 기대되네요. 저도 이책 도선생님 책 다 읽고 읽어봐야겠어요 😊

페넬로페 2021-07-21 09:10   좋아요 3 | URL
다른분들은 어떠셨는지 모르지만 전 이 책 넘 재밌게 잘 읽었어요^^

scott 2021-07-21 14:53   좋아요 3 | URL
이책 컨셉도 좋고 도끼 선생님 작품과 사회인으로 마주 하게 되는 문제점들(개인과 조직)과 연결 시킨 점들이 좋았습니다.



bookholic 2021-07-22 05:05   좋아요 3 | URL
저도 도끼 선생님의 작품들을 많이 읽고 이 책을 읽었으면 더 공감했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오래 전에 읽은 두어권이 전부라서...
뭐, 그렇지 않아도 나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도끼 선생님들의 책들을 좀 많이 읽고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빅 슬립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1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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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는 아빠가 가끔 읽는 고전 시리즈란다. 많이는 읽지는 않았지만, 아빠가 읽었던 책들은 다들 괜찮았어. 번역도 나름 잘 되어 있는 것 같았고 말이야. 그래서 간혹 살펴보곤 한단다. 이번에 읽은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처음 보는 사람의 <빅 슬립>이란 책은 먼저 책 표지가 끌렸단다. 고전을 소개해주는 시리즈에 한 남자가 권총을 멋지게 뽑아 들은 그림이라니책 소개를 읽어보니 하드보일드 소설이라고 하는구나? 하드보일드라면 폭력이 난무하고, 중절모를 이들이 담배를 머금고 총 싸움하는 장면이 먼저 떠오르는구나.

지은이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사람이 쓴 소설들은 나중에 누아르 영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구나. 이번에 읽은 <빅 슬립>은 그의 대표작으로, 아주 오래 전에 험프리 보가트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는구나. <카사블랑카>로 유명한 험프리 보가트. 엄마가 <카사블랑카>를 너무 좋아하셔서 알게 된 영화와 배우란다. 영화 <빅 슬립>에서 험프리 보가트의 상대 배역인 로렌 바셀이었는데, 둘이 실제로 결혼하기도 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나이 차이가 25살 차이이고, 험프리 보가트는 세 번째 결혼이라고 하네. 더 깊은 사연을 찾아볼 생각은 없었고, 거기까지… <빅 슬립>을 인터넷 검색해 보니, 이런 이야기들이 있어서 그냥 이야기해보았단다.


1.

주인공은 필립 말로. 사설 탐정이야. 스턴우드라는 퇴역 장군의 의뢰를 받고 그의 집, 아니 저택을 갔단다. 스턴우드 장군은 늦게 딸들을 얻었는데 오냐 오냐 하면서 키워서 그런지 버릇없이 자라 말썽만 피우곤 했어. 첫째 딸은 비비언, 둘째 딸은 카멘. 비비언은 러스티라고 하는 전직 밀수업자와 결혼을 했어. 밀수업자라고는 하지만, 스턴우드가 신임을 갖고 있던 사위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단다.

스턴우드가 필립에게 의뢰한 것은 어떤 협박 편지를 조사해 달라는 것이었단다. 돈을 뜯어 내기위한 협박 편지였어. 그 협박 편지를 보낸 사람으로 알려진 가이거를 추적해 보았어. 가이거는 서점을 운영하는데 평범한 서점은 아닌 것처럼 보였어. 그의 집을 살피고 있는데, 안에서 들려온 총소리. 그리고 성급히 도망가는 누군가의 발소리. 필립은 그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안에는 예상치 못한 장면이 있었어. 가이거는 총에 맞아 죽어 있었고, 카멘이 그 집안에서 마약에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단다. 스턴우드의 말썽쟁이 둘째 딸 카멘 말이야. 필립은 카멘을 우선 집에 데려다 주고 다시 가이거의 집으로 왔어. 그런데 가이거의 시신이 사라졌어. 아니, 어찌된 일이지?

다음 날 알고 지내는 검찰 지검장인 올즈의 전화가 왔어. 스턴우드의 차가 강에 빠져 있다고 말이야. 그곳에 가보니 차 안에 젊은 흑인이 죽어 있었단다. 살해당한 것인지, 자살한 것이지 아직 몰랐어. 그는 오웬 테일러라는 사람으로 스턴우드의 운전사로 밝혀졌단다. 의문의 살인 사건이 계속 일어나는데 그것이 협박 편지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스턴우드의 첫째 딸 비비언이 필립을 찾아왔어. 누군가로부터 또 편지를 받았다고동생의 나체 사진을 가지고 있다면서, 원본을 돌려줄 테니 그 대가로 5천불을 요구했다는 거야. 필립은 다시 가이거의 집으로 가 보았어. 그런데 그곳에 카멘이 다시 와 있었어. 어제 일을 기억하는 것도 같았어. 그러면서 범인은 조 브로디라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했어. 필립이 가이거의 집에 있을 때, 에디 마스라는 건달이 찾아왔단다. 자신이 집 주인이라고 하면서

에디 마스.. 이 사람은 또 누구지? 나중에 알고 보니 카지노를 운영하는 사람인데, 그 카지노에 비비언이 자주 출입을 했다는구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고 관계가 얽히고 설켜서 너희들에게 설명해주기 쉽지 않구나. 아무튼 필립은 조 브로디라는 사람을 찾아갔지. 이 사람은 예전에도 스턴우드의 집에 협박 편지를 보내서 돈을 뜯어낸 이력이 있는 사람이었어. 필립이 조 브로디를 추궁하자, 자신이 어제 가이거의 집에 가긴 했지만 집 안까지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고, 그 집에서 뛰쳐나오는 오웬을 보게 되었고, 그래서 그를 쫓아갔고, 경찰 행세로 하며 그를 협박해서 그에게서 필름을 빼앗고, 그 필름으로 스턴우드에 협박편지를 보내 돈을 뜯어내려고 한 것뿐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 앞뒤가 맞는 것 같긴 한데, 의심을 완전히 거둘 수는 없었지.

그 때 누군가 찾아왔어. 조 브로디가 문을 열어주는 순간 문 밖에 있던 이는 조 브로디를 총으로 쏘고 도망을 갔단다. 필립이 잽싸게 쫓아가 잡고 보니, 캐럴 런드그런이라는 사람이었어. 이 사람은 가이거의 동성 애인이었는데, 조 브로디가 가이거를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복수한 것이야. 필립은 캐럴을 데리고 가이거의 집으로 갔어. 가이거의 집에는 겉으로 보이지 않는 비밀의 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 비밀의 방 안에 사라졌던 가이거의 시신이 있었단다. 캐럴이 가이거의 시신을 그리로 옮겨 놓았던 거야. 그렇다면 오웬을 죽인 것도 캐럴의 짓이었나? 필립은 지검장 올즈에게 연락을 했고, 올즈는 살인 사건의 지역 지검장 크론재거에게 연락했어. 필립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해주었단다. 그렇게 사건을 종결되었단다.


2.

그런데 필립의 마음 속에 찜찜함이 하나 있었단다. 처음 의뢰를 받았을 때부터 의식하게 된 비비언의 남편 러스티 리건의 실종. 담당했던 경찰을 찾아가니, 러스티는 에디 마스의 아내와 불륜에 빠지고 둘이 야반도주를 한 것으로 추정했어.

하지만 사건의 내막은 따로 있었단다. 비비안과 카멘의 그 내막의 주인공이었어. 그 내막을 알아낸 필립. 어떻게 했을까? 굳이 다들 잊혀져 있는 사건을 들출 필요는 없었지. 자신의 궁금증을 자신이 해결을 해냈으니 그걸로 만족한 것 같았어. 어쩌면 두 자매에 연정을 느꼈을 수도 있고 말이야.

소설은 그렇게 끝이 났단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그 영화를 보고 싶은데 1946년에 만들어진 영화를 어떻게 하면 볼 수 있나. 1978년에 다시 리메이크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아빠는 1946년 작품을 보고 싶구나

이 소설 주인공들의 대화 속에 마르셀 프루스트라는 작가가 등장했는데, 재미있어서 발췌해 보았단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대표작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유명한데, 유명한 이유는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를 받지만 그보다 너무 읽기 어려워서 유명하단다. 아빠도 우선 1권만 사두고 감히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있는 책이야. 이 소설에서 마르셀 프루스트는 변태들이 잘 아는 작가라고 하더구나. ㅎㅎㅎ 이 소설이 1939년 작품인데, 그 시절부터 마르셀 프루스트의 평판이 대단했구나.^^ 아빠도 언젠가는 읽어봐야지

===================

(69)

마르셀 프루스트처럼 침대에서 일하는 분인 줄 알았네요.”

그게 누구요?” 나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그녀를 빤히 보았다. 조금 창백하게 긴장한 듯했지만 아무리 긴장해도 제 앞가림은 하는 여자 같았다.

프랑스 소설가예요. 변태들이 잘 아는 사람이죠. 당신은 모르겠네요.”

===================


PS:

책의 첫 문장 : 10월 중순 어느 날 오전 열한시경, 태양은 보이지 않고 한결 뚜렷해진 언덕들이 폭우를 예고했다.

책의 끝 문장 : 술기운 때문에 은색 가발을 쓴 여자만 자꾸 떠올랐지만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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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7-19 08:2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깨알같은 프루스트 언급 ㅋ 표현이 너무 재미있네요. 북홀릭님이시라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금방 읽으실듯~!! 저도 이책 보관함에 있는데 아직 못읽었어요 ㅜㅜ 리뷰를 보니 재미있어 보이네요😊

bookholic 2021-07-19 18:29   좋아요 3 | URL
전에 어떤 분께서 이야기한 것처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자기 전에 10페이지씩 읽어보려고 합니다..^^

scott 2021-08-06 15:3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북홀릭님 이달의 당선 추카 합니다

이리뷰 명품이라 생각했는데 역쉬 알라딘 ^ㅅ^

bookholic 2021-08-07 06:05   좋아요 1 | URL
저는 늘 북플 친구님들이 졸필에 ˝좋아요˝를 눌러주셔서 당선 턱걸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늘 고맙습니다~~

mini74 2021-08-06 15:4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변태들이 잘 아는 사람이란 구절에 빵 터졌었는데 ㅎㅎ 축하드려요 *^^*

bookholic 2021-08-07 06:10   좋아요 0 | URL
변태에 합류하려고 하는데 쉽지 않아요...
축하 고맙습니다~

새파랑 2021-08-06 16:1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역시 북홀릭님! 축하드려요. 이번달에도 역시 딸과 아들들에게는 비밀로^^

bookholic 2021-08-07 06:12   좋아요 1 | URL
ㅎㅎ 네 비밀로..^^
얼마 전에 열린책들 35주년 thanks to 한 것 중에 midnight만 주문했었는데요..
새로 생긴 비자금으로 35주년 noon 마저 주문해야겠어요.. ㅎ

페넬로페 2021-08-06 17:5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북홀릭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근데 정말 북홀릭님의 글쓰기를 자제분들은 모르는 건가요?

scott 2021-08-06 18:25   좋아요 3 | URL
비밀로 ^.~

bookholic 2021-08-07 06:13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예전에는 애들이 어려서 알려준다는 것이 의미가 없었고...
지금은 제가 쑥쓰러워서 ㅎㅎ
애들이 좀더 커서 알라딘에서 책 검색하다가 알게 되기를~~^^

그레이스 2021-08-06 17: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

bookholic 2021-08-07 06:14   좋아요 0 | URL
그레이스 님, 늘 고맙습니다~~
즐거운 주말 되십시오~~

초딩 2021-08-06 17: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bookholic 2021-08-07 06:15   좋아요 0 | URL
초딩 님, 늘 고맙습니다...
제 절친 중에도 ‘초딩‘이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있어 늘 친근합니다 ㅎㅎ
시원한 주말 되십시오~~

이하라 2021-08-06 18: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bookholic 2021-08-07 06:16   좋아요 0 | URL
이하라 님, 늘 고맙습니다~~
행복한 주말 되십시오~~

서니데이 2021-08-06 18: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bookholic 2021-08-07 06:16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늘 고맙습니다...
여유로운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강나루 2021-08-06 2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bookholic 2021-08-07 06:17   좋아요 1 | URL
강나루 님, 늘 고맙습니다~~
웃음 가득한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의책장 2021-08-14 02: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bookholic 2021-08-14 21:43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즐거운 연휴 되십시오~~^^
 














(11)

한 공기의 사랑이다. 그의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한 공기의 사랑을 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한 공기를 넘어서는 모든 사랑은 정말 사랑했다!”라는 나의 정신 승리는 가능하게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에게 온갖 고통을 가하는 끔찍한 일이다. 심지어 나를 사랑하면 세 공기든 네 공기든 한 가마든 먹어야 한다고 그를 압박한다. 세 공기, 네 공기의 밥을 지은 자신의 수고를 내세우면서 말이다. “당신을 위한 나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말아줘. 그러면 나는 정말 슬플 거야.” 어느새 그의 배고픔과 포만감보다 나의 수고가 핵심이 되고 만다. 한 공기를 넘어서는 사랑은 이제 사랑의 궤도를 이탈해 공회전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애지중지(愛之重之)하지 않게 되니까. 애지중지하는 마음은 그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 한마디로 그를 내 뜻대로 부리지 않겠다는 마음이다.


(28)

과거 독재 시절, 시대에 걸맞게 학교에는 사랑의 매라는 것이 있었다. 학생들을 미워해서 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때린다는 체벌의 논리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선생님이 학생들의 종아리에 매를 대는 순간 아이들의 고통이 느껴진다면, 과연 선생님은 계속 매를 댈 수 있을까. 한 대 두 대 때리면 때릴수록 아이들의 아픔이 느껴진다면, 어떻게 아이들을 계속 때릴 수 있을까? 아내에 대한 사랑, 남편에 대한 사랑, 아이에 대한 사랑, 후배에 대한 사랑 등 타인에 대한 사랑은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은 타인의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다시 말해 타인의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의지이자 감정이기 때문이다.


(31)

사실 모든 생명체의 고통을 느끼고 그것들을 사랑한다면 아무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 정확히 말하면 먹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자기 자신을 죽이게 된다.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우리는 배고픔의 고통을 견디다 굶어 죽을 테니 말이다. 식물도, 토끼도, 사슴도, 독수리도, 늑대도, 그리도 인간도 생명체다. 식물을 살리려고 토끼를 죽여서도 안 된다. 토끼를 살리려고 늑대나 인간을 죽여서도 안 된다. 엄청난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사슴과 늑대가 동시에 배고픔의 고통을 토로한다면 싯다르타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난감한 일이다. 어쩌면 이 딜레마, 이 난감함, 이 애절함, 그리고 이 간절함 속에서 산다는 것, 바로 이것이 일체개고의 진정한 의미, 혹은 고통의 기원이 아닐까.


(34-35)

내가 옆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은 최소한 그 사람이 나 때문에 더 힘들지 않게 하는 일이다. 존재한다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고통을 가중시킬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메를로-퐁티의 최소 폭력의 논리가 고통에 대한 감수성에 기초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세계가 모두 고통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지만, 고통을 완화시킬 수는 있다. 결국 죽을 때까지 우리는 걷지 힘든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나의 고통과 타자의 고통을 동시에 최소화할 수 있는 어떤 균형을 매번 찾아내야만 하는 길, 균형을 찾는다 해도 그것이 진정한 균형인지 여전히 의문이 남는 그런 개운치 않은 길 말이다.


(41)

진짜 사랑이 열정적인, 그리고 자발적인 노동을 낳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사람이 배부르면, 사랑하는 사람이 지인과 행복한 담소를 나누면, 사랑하는 사람이 건강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힘차게 잘 걸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명랑하면, 우리는 고맙기만 하다. 진짜 사랑할 때에는 질투라는 감정이 상대적으로 약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완화시켜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이 완화되었는지 여부뿐이기 때문이다. 잊지 말자. 질투심이 강해질수록 우리의 사랑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가 되어간다는 사실을.


(66-67)

놀이의 삶에는 근사한 표어가 주어진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표어이다. 반면 노동의 삶에도 그에 어울리는 표어가 있다.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라는 표어다. 이는 연애 시절과 결혼 생활을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연애 시절에 우리는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상대방에게 몰입한다. 가장 좋은 음식을 사주고 값비싼 선물도 아끼지 않는다. 오늘 그 사람을 기쁘게 해주지 않으면 내일은 다시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조바심 때문이다. 그런데 결혼을 하면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하염없이 미루기 쉽다. 대출을 갚아야 하고 아이들 양육비도 생각해야 하니, 맛있는 스파게티나 여행 등 오늘의 행복을 속절없이 미루게 된다. 오늘이 수단이 되고 내일이 목적이 되는 순간, 오늘은 수단이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83-84)

이렇게 현재의 삶을 수단으로 만들고 내일의 삶을 목적으로 만들면, 오늘의 행복은 계속 내일로 미루어지고 만다. 이런 식으로 반복하다 삶의 끝자락에 이르게 되면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행복한 적이 없다는 후회가 밀려올 것이다. 물론 이런 후회는 금방 사라질 수도 있다. 죽음 이후의 피안이나 이데아 세계, 혹은 기독교의 천국이 바로 눈앞에 있다고 마지막 기대를 걸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처럼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은 행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잘못된 생각, “오늘보다 내일이 더 중요하다는 기만적인 생각은 충만하고 아름다운 현재의 삶을 좀먹는 독약과도 같아.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신은 영원을 꿈꾸면서 무상을 직면하지 못하게 만드는 헛된 사유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114-115)

모든 존재는 영원하거나 불멸하지도 않고 동시에 순간적이거나 찰나적인 것도 아니다. 바로 이것이 제법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실상(實相)’이다. 결국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영원과 불멸이라는 한 극단과 순간과 찰나라는 또 다른 극단사이 어딘가에 존재한다. 바로 이것이 싯다르타가 말한 중도(中道)의 의미다. <가전연경>에서 싯다르타는 산스크리트어로는 카차야나, 한문으로는 가전연(迦旃延)이라는 이름의 제자에게 말한다.

“’모든 것은 존재한다.’ 카차야나야! 이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카차야나야! 이것도 또한 하나의 극단이다. 카차야나야! 두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여래는 중도로써 하나의 가르침을 설한다!” 모든 것은 존재한다는 극단은 모든 존재에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영원한 자성이 있다는 입장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입장을 상견(常見)’이라고 부른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또 다른 극단은 모든 존재가 어떤 연속성도 없이 끝없이 변화한다는 입장이다. ‘단견(斷見)’이라고 불리는 입장이다.


(130)

먼저 영원할 듯한 것에서 작은 변화를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영원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가 그 대상에 관심과 애정을 기울일 가능성은 줄어드는 말이다. 아내와의 관계나 남편과의 관계, 혹은 친구와의 관계가 예전 같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미세한 변화를 포착하려고 노력하라. 돈독하던 관계에서도 조금씩 균열이 생기는 것이 보일 수도 있다. 어제와 다름없이 보이는 부모님, 아내, 남편, 아이의 얼굴에서 변화를 읽으려고 노력하라. 작은 주름 하나, 깊은 한숨 하나, 작은 새치 하나, 작은 어둠 하나를 찾아낼 수도 있으니 말이다.


(151-152)

카페에서 스마트폰을 잃어버린 남자의 사례를 통해 번뇌망집이 그 정체를 드러낸다. 카페에서 스마트폰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하다. ‘스마트폰을 카페 의자에 둔 것이 맞을까?’ ‘스마트폰을 카페 점원이나 손님들 중 누군가 가져간 것은 아닐까?’ 등등, 번뇌란 이런 것이다. 스마트폰의 없음을 경험하자, 그의 뇌리에는 사라진 스마트폰이 떠나지를 않는다. 그는 허탈해하며 카페에서 나와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미 없어진 스마트폰이야. 없는 건 없는 거지. 잊자!’ 하지만 스마트폰의 없음을 받아들이려 할수록 없어진 스마트폰에 대한 기억은 더 강해질 뿐이다. ‘잊자, 잊아라는 생각이 오히려 사라진 스마트폰을 떠오르게 하니 말이다. 바로 망집이다.


(176)

성숙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금석은 단순하다. 성숙하면 자신이 강해지고 자신이 많은 것을 가지게 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아끼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아파하게 된다. 간혹 아이들은 엄마가 아파서 밥을 못 해주면 짜증을 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는 엄마가 아플 때 혼자 라면을 끓여 먹는다. 바로 이때 아이는 나이와 상관없이 성숙했다고 할 수 있다. 아이의 마음이 타인의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고요한 물처럼 작동한 것이다. 비록 아이지만, 이 순간 아이는 부처다. 자신의 배고픔이 아니라 엄마의 아픔에 사무쳐 있기 때문이다.


(197)

조금 도식적일 수 있지만 편의상 정리해보자면, 생성을 설명하는 데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로 다양한 연들이 존재를 만든다는 연기의 논리’, 둘째로 하나의 원인과 많은 조건들이라는 인연의 논리’, 그리고 셋째로 하나의 원인과 하나의 결과라는 인과의 논리가 그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인과의 논리는 인연의 논리로부터, 혹은 저 멀리 연기의 논리로부터 단순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가지 논리는 지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어느 논리에 따라 살아가느냐에 의해 우리의 삶은, 우리의 미래는,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진다. 육아나 교육의 사례로 세 가지 논리의 상이한 효과를 생각해보자.


(216)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거나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세상이 끝난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너무나 쉽게 만성화된 슬픔, 고질적인 우울 속에 갇히게 된다. 행복과 기쁨이 더 이상 없을 것만 같다. 그러나 앞으로 앞으로삶을 밀어붙이면 알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이 부재하기에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하나의 인연이 끝나야 다른 사람과 새로운 인연을 만들 수 있지 않은가? 처음에는 이별이 절벽으로 떨어지는 수평선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앞으로 앞으로걸어나가면, “앞으로 앞으로배를 수평선 쪽으로 밀어붙이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다.


(227-228)

매달린 절벽은 사실 놓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놓으면 죽을 것 같다고 믿는 집착의 대상일 뿐이다. ‘매달린 절벽은 사람마다 다르다. 젊음일 수도 있고, 건강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집일 수도 있고, 아이일 수도 있다. 아니면 사랑일 수도 있고, 우정일 수도 있고, 타인의 인정일 수도 있다. 아이를 잡지 않으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사람에게 아이에게 그렇게 집착하지 말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권고하는 사람도 돌아보면 돈이나 건강을 매달린 절벽처럼 붙잡고 집착할 수도 있다. 또한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사람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려 해서도 안 된다. 그럴수록 그 사람은 더 억세게, 저 집요하게 매달린 절벽을 잡으려 할 테니 말이다.


(241)

독일 철학자 슬로터다이크(1947~) <냉소적 이성 비판>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성숙한 능력은 예스의 유일하게 타당한 배경이 되며, 이 둘을 통해 진정한 자유의 윤관이 비로소 뚜렷해진다.” “예스가 힘이 있으려면 라고 외쳤던 경험들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스는 굴종의 표현이 아니라 자유의 표현일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예스라고 말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244)

멈출 수 있어야, 혹은 그만둘 수 있어야 자유다. 멈출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고, 관계를 단절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뜻대로 관계를 만들 수 있다. “!”라고 할 수 있어야 하고, 멈출 수 있어야 하고,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럴 때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당당해지고, 그만큼 우리는 주인으로서 삶을 영위하게 된다. 멈출 수 있는 자유를 가슴에 품을 때, 그가 누구이든 상대방은 우리를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가슴에 사표를 품고 있는 직원에게 사장이 어떻게 갑질을 할 수 있을까? 캐리어를 들고 집을 떠날 수 있는 아내에게 남편이 어떻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학위쯤이야 우습게 여기는 학생에게 교수가 어떻게 사역을 시킬 수 있을까?


(249)

몸과 마음 사이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면 우리는 주인으로서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고, 반대로 몸과 마음 사이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면 주인이 아니라 노예의 삶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301)

무엇이든 애지중지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어쨌든 애지중지하는 대상은 그 존재만으로 우리 삶을 기쁨으로 물들이고, 우리 삶에 의미를 제공하며, 우리 삶을 활기차게 한다. 어떤 것도 아끼는 것이 없다고 생각해봐라. 삶은 짙은 잿빛으로 우울하게 변할 것이고, 그러한 삶을 사는 우리는 심각한 우울과 무기력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문제는 애지중지하는 대상이 인간일 때 발생한다. 타인을 아낀다는 것은 그를 대신해 그의 수고를, 그의 고통을, 그리고 그의 노동을 감내하며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일이다. 누군가의 짐을 짊어지고 심지어 그 사람을 업으면서도 미소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끼는 사람을 최소한 한 명 가진 셈이다.


(303)

아끼는 사람은 그 존재만으로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소중한 사람이다. 아끼는 사람이 무언가 해주기를 원하는 순간, 아낌의 관계는 무너지고 그 자리에 너저분한 거래 관계가 들어선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도 이만큼 해야 하는 것 아니야?” 이제 상대방이 나의 애지중지하는 모든 행동을 일종의 부채감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아낌의 관계는 막장을 향해 치닫고 만다. 이런 비극을 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아끼는 사람을 반려견이나 반려묘처럼 보는 연습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다. 물을 가져다 달라고, 밥을 해달라고, 쓰레기 봉투를 버려달라고, 청소를 해달라고 할 수도 없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아듣는다 해도 쫑긋한 귀와 해맑은 눈, 그리고 네 다리를 가지고 무엇을 하겠는가?


(327)

우리 각자에게 아끼는 대상이 어머니일 수도, 아버지일 수도, 아내일 수도, 남편일 수도, 아일 수도, 친구일 수도, 반려견일 수도, 반려묘일 수도, 아니면 화초일 수도 있다. 아끼는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의 행복에 있어 한 공기의 연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농부의 물꼬 트기처럼 이 한 공기의 연을 우리가 채우지 못하면, 아끼는 사람의 삶은 불행에 빠진다. 그러니 좋은 공기, 맛있는 음식, 쾌적한 잠자리, 따뜻한 태양, 싱그러운 바람, 아름다운 음악, 근사한 영화, 멋진 식당, 의사와 간호사, 친구들 등등이 아끼는 사람에게 건강한 연이 되어줄 때, 우리는 충분히 쉬어야 한다. 잘 쉬고 맛있는 것을 먹고 잠도 잘 자야 한다. 우리게는 한 공기의 연을 채워야 할 때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333)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아이를 아끼기 때문에 노심초사하며 아이가 잘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영어 학원에 보내고 태권도를 가르치고 수영 강습도 받게 하고 피아노도 가르치고 방학마다 여행을 가고 캠핑도 간다. 문제는 엄마가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원해야만 한다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 혹은 언젠가 아이가 원할 수도 있다고 자신이 믿는 것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우 아이는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고, 웃음과 미소를 점점 잃어가게 될 것이다. 반대로 간혹 우리는 아이를 방임해서 키워요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엄마도 있다. 김을 매지 않아 잡초들에 둘러싸인 벼처럼, 아이는 경쟁적 교육 환경, 왕따를 시키는 차별적 문화,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에 둘러싸여 시름시름 앓게 될 것이다. 결국 엄마는 아이가 잘되기를 바라되 지나치게 관여해서는 안 되고, 관여하지 않되 완전히 잊어서는 안 된다.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완전히 알 때까지, 혹은 엄마가 아이가 원하는 것을 알 때까지, ‘조장사이 혹은 물망물조장사이 그 어딘가를 지키며 균형을 잡아야 한다.  아끼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다.


(342-343)

사랑도 삶도 행복도 그리고 자유도 이만하면이라는 말로 가늠할 수 있는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다. 사랑했거나 사랑하지 않았거나, 제대로 살았거나 그러지 못했거나, 행복했거나 행복하지 않았거나, 자유롭거나 자유롭지 않았거나, 이제 이만하면이라는 말을 우리 삶의 사전에서 지우도록 하자. 사랑도 삶도 행복도 그리고 자유도 남들의 시선이나 평가, 재산이나 소비수준과는 무관하게 전적으로 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잘 사랑하려면, 제래도 살려면, 정말 행복하려면, 그리고 자유로우려면, 우리는 이만하면이라는 전체를 붙인 너저분한 자기만족과 정신 승리에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사랑도 삶도 행복도 그리고 자유도 아직까지 제대로 영위하지 못했다고, 아직도 부족하다고 이야기하자. 그래야 우리에게는 제대로 사랑하고, 제대로 살아가고, 제대로 행복하고, 제대로 자유로울 수 있는 희망이 생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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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사람의 길 - 下 - 맹자 한글역주 특별보급판
도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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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김용옥 님의 <맹자 사람의 길 下>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 맹자 사람의 길 上> 이야기하면서 맹자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해 주었는데, 맹자는 이야기한 것처럼 중국 전국 시대 사람이란다. 너희들이 나중에 학교에서 중국역사를 배우게 되면, 춘추전국시대라는 말을 듣게 될 거야. 많은 나라들이 생기고, 사라지던 혼란의 시기.. 그래서 많은 사상가들과 소위 말하는 영웅들이 출현했던 시기

아빠도 그 시대를 자세히는 몰라. 공원국이라는 분이 그 시대를 11권에 걸쳐 쓴 <춘추전국이야기>라는 책이 있단다. 그 책을 일 년에 한 권씩 읽겠다고 마음 적이 있는데, 3권에서 멈추고 말았어. 문득 김용옥 님의 < 맹자 사람의 길>을 읽다가 그 책을 끝까지 읽었더라면 좀 더 이해를 잘 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맹자>를 설명하면서 당시 전국 시대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거든나중에라도 다시 <춘추전국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봐야겠구나. 그리고 <맹자>에서 나오는 역사 부분은 잘 모르니까 그냥 흐릿한 눈으로 봐야겠구나. 삶의 가르침에 관한 부분에는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말이야.


1.

<맹자 사람의 길 下>에도 깊이 새겨 두었으면 하는 글들이 많이 있단다. < 맹자 사람의 길 上>의 책에서 발췌를 할 때는 되도록, 김용옥 님의 생각이 담긴 부분을 발췌하려고 했어. 이 책의 지은이는 김용옥 님이니까 말이야. 그런데 < 맹자 사람의 길 下>에서는 <맹자> 원문에 나와 있는 좋은 글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더구나. 그래서 <맹자> 원문을 해석한 부분에 대한 발췌가 많았어. <맹자>의 핵심은 지난 번에도 이야기했지만, 仁과 義란다.

공자와 같은 시대를 살지 않았지만, 맹자가 공자의 제자라고 알고 있는 이들도 그런 사상 때문이 아닌가 싶구나. 그리고 맹자도 스스로 공자를 사숙이라고 했고, 자신이 공자의 적통임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여럿 나온단다. 공자의 仁이라는 것에, 義를 추가하여 발전시킨 것이 맹자의 핵심이라고 아빠는 이해했단다. 仁과의 義의 차이는 ()이란 사람의 마음이요, ()란 사람의 길이다.”라는 문장으로 끝.

=========================

(457)

맹자가 말씀하시었다: “한 나라의 최고통치자가 인()하면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인()하지 않을 수가 없고,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가 의()로우면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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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7~638)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인()이란 사람의 마음이요, ()란 사람의 길이다. 그 길을 버려두고 그곳으로 걸어갈 생각을 하지 않으며, 그 마음을 놓아버리고 다시 구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그 얼마나 슬픈 일인가! 사람들이 집에서 기르던 닭이나 개가 없어지는 일이 있으면 부지런히 쏘아다니며 그것을 되찾아오려고 열심이나, 자신의 마음이 사라진 것은 되찾아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학문(學問, 우리가 쓰는 “학문”이라는 말의 한 유래)의 길이란 별것이 아니다. 그 놓아버린 마음(放心)을 되찾아오는 걸일 뿐이다.

=========================

그렇다고 義만 강조한 것은 아니야. 仁과 중요하게 생각하고 仁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있단다. 맹자가 살던 시절이 전쟁이 끊이지 않는 시대이다 보니, 仁이 있는 사람은 다른 이의 땅을 빼앗는 전쟁을 하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하지만, 욕심에 눈이 먼 당시 군주들이 그의 말을 들었겠니맹자가 이야기한 것은 오늘날 각 국가의 지도자들도 들어야 할 말 같구나. 특히 여전히 전쟁을 하고, 이웃 나라에 끊임없이 시비를 거는 나라의 지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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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1)

전쟁에 의존하지 않고 그냥 한 나라의 땅을 빼앗아 다른 나라에 줄 수 있는 역량이 누군가에게 있을 수 있다 해도 그가 진실로 인자(仁者)라고 한다면 그러한 짓은 하지 아니 할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을 죽여서 토지의 확대를 꾀한다는 것이 과연 사람이 할 짓입니까? 군자가 군주를 섬긴다고 하는 것은 그 군주로 하여금 정당한 길을 걸어가도록 인도하는 것을 힘쓰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오직 군주가 인()을 향하여 전력투구하도록 만드는 것밖에 딴 길이 없습니다.

=========================

그런 왕이 될 수 있도록 왕 옆에 있는 신하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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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4)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오늘날 군주를 잘 섬긴다 하는 자들은 모두 이와 같이 말한다: ‘나는 나의 군주를 위하여 토지를 개산하여 조세를 잘 거두어들여 국고를 충실하게 할 수 있도다’. (여기 가장 포인트가 되는 말은 “위군(爲君)”이라는 말이다. “위민(爲民)”이 아닌 군() 개인을 위하여 복무한다는 뜻이다). ~ 진실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위대한 양신(良臣)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옛 성왕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모두 백성을 등쳐먹는 민적(民賊)들이다. 군주가 바른 정도의 도덕을 지향하지 아니하고, ()의 실현에 근본적으로 뜻을 두지 않고 있는데 그런 불선한 군주를 부강하게 만들기를 꾀한다는 것은 곧 폭군 잡놈 걸()을 부강하게 만드는 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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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맹자>는 맹자가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실어 놓았단다. 그 중에 <맹자 사람의 길 下>에는 만장이라고 하는 맹자의 가장 나이 많은 제자와 나눈 대화도 있단다. 만장이 묻고, 맹자가 답하는 식으로 되어 있어. 만장은 날카로운 질문을 계속 맹자에게 맹자는 더 날카로운 답변을 한단다. 그러면서 맹자의 사상을 정리하는 것이야. 그 옛날에도 사람 사귈 때 어떤 사람을 사귀어야 하는지 궁금했나 보구나. 만장은 친구 사귀는 원칙을 맹자에게 물었단다. 이 때 한 맹자의 답변은 너희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구나. 너희들은 앞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게 될 테니 말이야.

=========================

(570~571)

만장이 여쭈어 말하였다: “감히 친구를 사귀는 원칙에 관하여 한 말씀 듣고자 하나이다.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참으로 좋은 질문이로다. 친구 사귀는 데도 중요한 원칙이 있으니, 친구 사귐의 사이에는 장유의 나이의식이 끼어들면 아니 되고, 귀천의 신분의식이 끼어들면 아니 되고, 연줄이나 패거리의식이 끼어들면 아니 된다(沃案 : 천하의 명언이라 할 것이다. 세 번째 “불협형제(不挾兄弟)”를 주희는 해설치 않았고, 조기는 사귀는 사람의 형제 중에 부귀한 인간이 있기 때문에 사귀어서는 아니 된다는 식으로 해석했으나, 그 주제는 이미 앞에서 말한 “귀()” 포함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형제”를 “등이(等夷)”로 보아 같은 한 동아리라는 의식, 타 인간 패거리와는 다르다는 의식, 혹은 대형교회 나가서 형제자매 찾는 연줄의식으로 보았다. 여기 맹자의 언급은 오륜에 얽매여 예의절차에만 충실한 듯이 보이는 동방문화에, 전혀 다른 인간관계(human relationship)가 상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매우 래디컬한 언급이다).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 덕()을 벗하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덕과 실력 이외의 어느 것도 끼어들어서는 아니 된다.

=========================

맹자의 사상 중에 또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 성선설이란다. 순자의 성악설과 함께 학창 시절 때 배운 기억이 있구나. 성선설(性善說)은 사람은 태어날 때 착하게 태어난다는 주장으로, 나중에 자라면서 악한 성품도 갖게 된다는 것이야… <맹자 사람의 길 上>에서 이야기했던 사단도 성선설을 뒷받침하는 사상이야. 이번 <맹자 사람의 길 下>에서는 물을 비유하여 성선설을 이야기하더구나.

물이라는 것은 원래 위에서 아래부터 흐르는 것이 당연하듯, 인성(人性)은 본래부터 善하다는 거야. 물을 거꾸로 가게 하려면 인위적인 외부의 힘이 필요한 것처럼, 불선(不善)도 외부의 힘이 가해진 결과라면서예전에 어디선가 성선설에 대한 비판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너희들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라온 것을 보면, 아빠는 성선설이 맞는 것 같구나.

=========================

(602~603)

맹자께서 이를 반박하여 말씀하시었다: “선생의 말씀은 매우 명료하오. 물은 진실로 선생의 말씀대로 동서를 가리지 않는다 할 것이요. 그러나 과연 상하의 분별조차 없다고 할 수 있으오리이까? 물은 본시 그 자체로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성질을 가지고 있소. 인성(人性)이 본시 선()하다고 하는 것은 물이 항상 아래로 흐르는 것과도 같소. 인성은 선하지 아니 함이 없고, 수성(水性)은 아래로 흐르지 아니 함이 없소이다. 지금 대저 물이라는 것은 손가락으로 튕겨 튀어오르게 하면 사람의 이마를 훌쩍 넘어갈 수도 있고, 인위적인 힘을 가하여 역류시키면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게도 할 수 있소. 그러나 어찌 이런 현상을 물 그 자체의 성질이라고 할 수 있겠소이까? 그것은 외부적인 힘에 의하여 그렇게 될 뿐이오이다. 사람 또한 불선(不善)을 행하도록 만들 수는 있으나 그것은 그 본래적 성()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물이 본성에 어긋나게 격발되듯 잘못 격발되었기 때문이라 할 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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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이 나이를 하나 둘 먹으면서, 공부를 비롯하여 해야 할 일들이 많아지는 것을 보니 아빠도 사실 안타깝구나. 그렇다고 그런 것들을 하지 말라는 용기도 없고 말이야. 이 사회 시스템을 벗어날 용기도 없으니 말이야. 무언인가 할 때 중단하지 말고 끝까지 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맹자도 이야기하는구나. 하지만 사실 아빠는 어떤 일을 하다가 중단하기도 하고, 읽던 책도 중간에 덮는 경우가 많아서 너희들에게 무조건 중간에 그만두지 말라는 이야기는 못하겠구나.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끝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보거든어쩌면 아빠의 끈기 부족에 대한 핑계일 수도 있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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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0~761)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어떠한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은 비유컨대 우물을 파는 것과도 같다. 우물을 판다는 것은 반드시 끝까지 지하수에 도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물 파기를 구인(, 조기는 1() 8()이라고 했다. 혹자는 7척이라고 한다. 9인이면 상당한 깊이를 나타낸다)이나 했어도 지하수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중단해버리는 것은 우물 파기를 처음부터 포기한 것과 동일한 것이다. 결국 우물을 안 판 것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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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을 하든 무엇을 공부하든 너희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너희들이 좋아하는 것을 공부하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꾸준하게 하는 것은 중요할 것 같구나. 마치 산에 난 길이 잡초로 뒤덮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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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

맹자께서 방황하는 그의 제자 고자(高子)를 타일러 말씀하시었다: “산봉우리의 작은 길도 당분가 사람들이 열심히 그 길로 다니면 탄탄한 좋은 길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그 길로 당분간 사람들이 다니지만 않아도 금새 억새 같은 잡초로 길이 막혀 버리고 만다. 학문이란 이와 같이 끊임없이 쉬지 않고 정진해야 하는 것인데 지금 너의 마음은 억새로 덮여 길이 보이질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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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책의 끝 문장 : 14의 이지형의 역주는 다산 <맹자요의>의 충실한 번역이다. 많은 참고가 되었다..



맹자가 제선왕에게 고하여 말씀하시었다: "군주가 신하를 보기를 자기 자신의 팔 다리와 같이 여긴다면, 신하 또한 군부를 보기를 자기의 생명 같이 여길 것입니다(복심 腹心 : 뱃속과 심장이라는 뜻인데 옛 사람들은 인간의 생명의 중추를 뇌로 보지 않고 복심, 즉 오장육부로 보았다). 군주가 신하를 보기를 자기가 기르는 개나 말 정도로 여긴다면, 신호 또한 군주를 보기를 성내를 걸어다니는 보통사람의 하나로 여길 것입니다. 군주가 신하를 보기를 토개(土芥, 짓밟는 흙과 쓰레기. 아주 천한 것)처럼 여긴다면, 신하 또한 군주를 보기를 죽여야 할 원수나 적수로 여길 것입니다. - P454

맹자가 말씀하시었다: "사람을 감복시키기 위한 동기를 가지고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진실로 사람을 감복시켜 존 적이 없다. 그러한 동기가 없이 스스로 선을 행하여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고 저절로 그들이 교화되도록 한 연후에나 비로소 천하사람들의 마음을 감복시킬 수 있다. 천하사람들이 가슴속으로부터 우러나와 감복되지 않고서 천하를 통일하는 왕자가 된다는 것은 여태까지 있어본 적이 없다. - P468

맹자는 민중의 평등사상을 존중하지만, 왕도의 실현을 위하여 문명의 번영을 동시에 주장한다. 무조건의 하향분배는 국가문명의 수준저하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묵가의 사상과 대비되는 맹자의 인문주의사상이다. 문명은 부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긍정되어야 하며, 그 긍정의 대전제가 "여민동락(與民同樂)"의 보편주의적 가치일 뿐이다. 따라서 세율이 과중하면 측정이 되지만 세율이 과하게 불급해도 야만의 정치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금의 "중용"이 이루어져야 한다. 세금이 문명의 번영을 이룩하여 그것이 다시 서민의 교육과 문화생활로 환원되는 피드백 시스템을 맹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 P699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소목장, 대목수, 수레바퀴공, 수레거푸집 장인과 같은 최고의 기술자들도 후학들에게 콤파스와 곡척의 원칙을 가르쳐줄 수는 있으나, 후학들로 하여금 명인의 솜씨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줄 수는 없다. 그것은 오로지 자득하는 것이다." - P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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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쇼팽의 <영웅 폴로네즈>.

폴로네즈를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볼로네즈 파스타와 헷갈리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파스타를 푸짐하게 삶아 줄 테다. 폴로네즈란 폴란드 무곡을 뜻하는 말인데 곡의 주선율은 과연 무곡풍이다. 서주부터 춤추는 듯한 선율이 이어져 듣는 이를 들뜨게 한다. 하지만 연주하는 입장에서 이 곡은 그야말로 난곡이다. 화음을 이루는 음표가 건반을 폭넓게 넘나들어 손이 작은 연주자가 치기에는 불리하기 때문이다. 그런 데다 연속되는 왼손 옥타브 때문에 엄지손가락을 거의 중노동 하듯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한다. 차라리 파스타를 삶는 게 훨씬 편하다. 실제로 중간부에 접어든 시점에서 내 손가락은 이미 너덜너덜해졌다.


(107)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게 있지. 건반을 힘주어서 정확히 치고 싶은 나머지 손끝에 체중이 실리도록 의자를 높게 조절하거든. 그런데 건반의 무게는 고작 70그램이야. 지압하듯 센 힘이 필요 없어. 앉은 위치를 낮추면 자연히 등허리가 세워지고 근육을 곧게 펴서 잘못된 자세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하단다."


(123)

", 음이 연속해서 나면 드디어 연주의 기본 요소가 갖추어진 셈이야. 기본 요소는 세 가지인데 첫째 리듬, 둘째 음, 그리고 셋째 스타일. 리듬은 작품의 짜임새인 만큼 무조건 정확해야 할 것. 또 연속해서 내되 각각의 끝소리가 다음 소리와 붙어 버리면 안 돼. 리듬이 애매해지거든. 따라서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의 시간을 가늠할 필요가 있어.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의 시간은 오롯이 음절의 울림을 나타내는 셈이니까, 여기서도 너무 강하게 쳐서 울리지 않게 하는 건 마이너스야."


(234)

영롱한 음 하나에 달빛 한 줄기가 오롯이 담겨 있다. 음이 빛이 되어 마음속에 비쳐 든다. 눈꺼풀이 절로 감기더니 이내 정경이 떠올라 또 한 번 놀랐다. 미사키 씨에 따르면 드뷔시는 음과 영상의 관계를 중시했다고 하던데, 정말이었다. 달빛이 호수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교교한 달빛 아래 한 쌍의 남녀가 한가로이 왈츠를 춘다. 시간마저 느릿느릿 흘러가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잔물결 위로 퇴락한 고성이 또렷이 떠오른다. 한 음이 끊어지기 전에 다음 음이 이어진다. 곡이 끝나자 나는 무척 후회했다. 왜 이런 곡을 그동안 허투루 들었을까. 선율이 아름답다는 생각은 했지만, 진지하게 들으면 이토록 상상력을 자극하는 곡이었건만.


(271)

"아무리 근사한 옷이라도 취향과 체형에 맞지 않으면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그런 걸 오시키세(주인이 고용인에게 철마다 해 입히는 의복을 뜻하는 말)라고 하죠. 제 지인 중에도 실제로 있는데요, 주변의 기대와 착각 때문에 본래 자신과는 다른 존재로 인식되는 건 비극입니다. 인간은 물이 아니라서 준비된 그릇에 강제로 집어넣으면 뼈가 뒤틀리고 피멍도 생기지요. 그런데도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무리를 거듭합니다. 그건 남의 인생을 사는 빈껍데기 같은 삶입니다. 그 괴로움과 허무함을 생각하니 암담한 기분이 드는군요."


(303-304)

"으음. 하긴 수업이나 레슨에서는 음악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거의 없으니. 다만 그러다 보면 신체와 직감, 기술과 정신이 따로 놀게 돼. 마음에 곡의 이미지가 확립된 상태에서 손가락으로 재현할 때 지금껏 상상도 하지 못한 운지가 나오는 경우가 있어. 반대로 새로운 움직임이 이미지에 새로운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지. 하지만 양쪽이 동떨어지면 연주는 절로 빈곤해지지. 잘 들으렴. 연주의 기본 요소 중 세 번째가 스타일이라는 건 전에 설명했지? 스타일이란 곡의 건축 형태를 가리켜. 연주자가 어떻게 칠 것인지는 곡이 만들어진 시대와 작곡가의 어법을 연주자가 어떻게 인식하느냐로 결정되지. 그리고 그 인식 방법은 직감과 조예를 통해 길러져. 악보에 기록된 이음줄, 악센트, 스타카토, 강약 등의 지시 기호를 존중한 상태에서 자신의 재능과 교양과 감수성이 그 곡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걸 선택하지.


(342)

쇼팽은 1831년 파리로 향하던 길에 고국인 폴란드 바르샤바가 러시아군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짓밟힌 고향과 남겨 둔 가족. 이 곡(혁명)은 그때의 실망과 분노를 즉흥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곡 전반에 걸쳐 쇼팽의 분노가 가득 차 있다.

곡은 왼손에서 시작해 낮은 음역부터 음계적으로 진행하고 내림나장조로 바뀐다. 도입부의 거친 화음은 몇 번이나 형태를 바꿔 나타나고 그때마다 흥분이 더해진다. 분노는 가라앉을 줄 모른 채 솟구치기만 한다. 선율을 배경으로 전쟁에 쓰러져 가는 민중과 무너져 가는 건물이 보인다. 권총, 파괴음, 그리고 아비규환. 관객은 모두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나도 두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359)

그것이 피아노였다. 피아노와 하나가 되었을 때 나는 목소리보다 더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노래한다. 말보다 더 전달력 있는 말로 이야기한다. 나이, 성별, 국경, 언어와 같은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 마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꿈같았던 마법이 지금은 미사키 씨가 가능성을 끌어올려 준 덕분에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유일한 능력, 허락된 유일한 재산이 될지도 모른다. 이제 내게 남은 건 피아노밖에 없다. 피아니스트로 인정받지 못하면 나는 나조차 아니게 된다. 그래서 매일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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